☞ 산행일자: 2014년 1월 19일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22km +어프로치 3.3km / 9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장성갈재-헬기장(511봉)-변산지맥 분기점-쓰리봉(734봉)-서대봉(673)-연자봉-용추폭포 이정표5년을 넘게 매주 산행을 하다시피 했더니만 오만군데 다 쑤시는듯 하는게 이제는자꾸만 몸뚱아리가 고물상이 되는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드는게 자다가왼쪽 다리에 갑자기 근육이 돌덩이처럼 되면서 쥐가 나는데 그 후유증이 낮에까지 계속된다.
할 수 없이 금욜에 내가 다니는 단골 한의원에 갔더니만 최 원장님이 산행을 줄이란다.
원장님! 나도 알어... 근데 그게 내 의지대로 안되는데 어쩌란 말이요.올 8월까지만 하고 이젠 목적산행은 줄여야 될듯싶다.
용산역에 도착하니 35분정도의 여유가 있다.
대합실 위층에 있는 식당에서 부대찌게를 하나 시켜먹고 셀프로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고구마 맛탕을 실컷먹었더니만 배가 엄청 부르다...10분정도를 남겨놓고 호남선 열차를 타기위해플렛폼으로 들어간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신선님 블로그 인용)
용산발 → 백양사행 무궁화호 열차표
용산역(18:50)
국민행복 KORAIL로 거듭나겠다고요?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하죠... 한달전 파업할 때 보니까 국민 행복보다는
당신네들 밥그릇을 더 챙기는 것 같던데... 저 프랑카드 문구처럼 하는지 두고 보겠소.
열차를 타기 위해서 용산역 플렛폼으로 향한다
18시 55분발 목포행 무궁화 열차
영산기맥 한 구간을 하기 위해서 낮에 부지런히 쫓아 다니면서 현장을 마무리 하다보니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열차에 올랐는데 예전과 달리 몸을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하다.
하는 수 없어서 매점에 가서 캔맥주 하나를 사서 마시고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열차가
서대전역을 지나면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니 백양사역을 지나 장성역으로 향하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예정에 없던 장성역에서 내리는데 한 구간 요금 덜낸거 어떡하지...
장성역(23:10)
장성역에서 내려서 10분정도 걸어서 지난번에 신세를 졌던 찜질방으로 향한다.
삼호 24시 찜질방(23:20~04:50)
찜질방에 들어서니 지난번에 커다란 베낭을 메고 갔던 차에 찜질방 쥔장이 단번에 알아보고
‘또 오셨군요’ 하면서 락카키 2개를 건네주는데 고맙기만 하다.
샤워를 마치고 수면실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고 전기온돌 판넬도 꺼져있다.
내가 직접 판넬에 스위치를 켜고 잠자리를 드는데 아침까지 독방으로 사용했다.
04시 30분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서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가지고 온 보온병에 점심때 라면 끓여먹을 물을 담은 다음에 장성역으로 향한다.
장성역 앞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타고 갈재를 간다 ( 택시비 28,000원)
장성갈재(220m:05:20)
전남 장성군 북이면과 전북 정읍군 입암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목포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1번 국도가 지나는 노령산맥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그냥 갈재라고도 부른다.
억새가 많은 재(峙)라는 이름으로 이길은 정읍- 장성을 가르는 재로써 동학혁명 당시
녹두 장군 전봉준 이 정읍 고부에서 조병학의 탐학에 봉기 동학운동하다 외세 일본 개입으로
진이 와해되자 입암산성을거쳐 남창계곡에서 은거하다 내장산을 거쳐 정읍 황토현
(정읍시 종성리 황토리에서 김개남 장군과 부흥을 꿈꾸다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김경준의 고변으로 피체(체포)되에 민족 부흥운동의꿈을 못이룬 한맺힌 고개이기도 하다
이 고개 아래로 호남고속도로, 호남선철도, 호남고속전철이 지나가는
터널이 통과하고 있고 이 고개까지가 내장산국림공원으로 속해있어
관광 교통로는 물론 이 일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유통로 기능도
담당하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는 김대중 前대통령과 김정일이 6.15정상회담을
기념해 만든 통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 정상에서 우측 차단기 옆의 등로로 접어들어 2구간을 시작한다.
장성갈재 오는동안 장성 개인택시 기사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올해 67세라는 분인데 장성에서 40년동안 택시를 하시는 분인데 자기도
산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런데 왜 혼자서 꼭두새벽에 다니냐고
하면서 이해를 못하는 눈치시다... 하긴 내가봐도 내가 약간 맛이 간것 같은데 ㅋㅋㅋ
이야기를 하는동안 택시는 들머리에 도착을 하고 나중에 내려와서 다시
택시를 타야하기에 명함을 하나 받아들고... 인사를 한 다음 택시에서 내린다.
이런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내일이 大寒임에도 날씨도 춥지않고 바람도 없다.
장비를 점검하고 헤드렌턴을 켠 다음에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들머리(05:20)
임도 차단기가 있고 광산이씨 세친비가 있는 건너편 좁은 등로로 산행을 시작한다.
511봉(05:45)
갈재에서 이곳 오늘의 첫 봉우리인 511봉까지는 눈(雪)도 없고 잘 정돈된 길을 따라
편하게 왔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마루금을 따라 진행하니 성터 같지는 않고 이곳에 마을이
있었는지 집터의 흔적같은 돌담이 보인다.
헬기장과 군참호를 지나가게 되는데, 군참호는 '방등산가'에 등장하는 도적들의 산성터라 추정하고 있다.
511봉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우측 정읍쪽에는 호남고속도로 차들이 보이고
정읍시내의 불빛이 환하기만 하다...어둠속에 돌담같은 군 교통호를 지나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데 이곳은 음지라서 그런지 눈도 많이 쌓여있고 길이 미끄러워
베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착용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잠깐 사이에 상당히 춥다.
한참을 치고 오르니 눈속에 파묻힌 묘지 1기를 만난다.
변산지맥 분기봉(06:25)
고흥류씨 묘지에 오르니 갈림길이 나오고 좌측에는 멋진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전망바위에 오르니 저 아래 정읍시내의 불빛만 보이고 계사년 섣달 스무날의
달빛이 지난구간의 갓바위봉을 비추건만 어둠속이라 아쉽기만 하다.
전망바위 우측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어둠속에 만나는데 변산지맥 분기봉이다
이 전망바위에서 우측으로 뻗은 능선이 변산지맥이라는데 어둠속에 확인할 길이없다.
이럴줄 알았으면 1시간 늦게 시작하는건데 서울로 가는 시간땜에 일찍 시작한 게 아쉽다
변산지맥(邊山支脈)이란?
변산지맥은 새재에서 유달산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이 장성 갈재를 지난
734m봉(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및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와의 경계점) 직전에서 서북쪽과 서남쪽, 서북쪽과
서남쪽으로 가지를 쳐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53.4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봉화봉에서 그 맥을 황해 바다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수산(237m), 배풍산(109.2m), 상여봉(398m), 옥녀봉(432.7m),
용각봉(365m), 세봉(415m), 관음봉(425.4m), 신선봉(486m), 삼신산(486m), 갑남산(415m),
사투봉(169.2m), 봉화봉(174.2m)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의 서쪽에는 갈곡천 등이 서해 바다로 흐르고, 이 산줄기의 북쪽에는 백천,
직소천, 고부천 등이 서해 바다로 흘러간다.
묘지 뒤로 올라서서 가는데 이곳은 아기자기한 암릉이 많이 보이는데 눈에 살짝 얼어있어
꽤나 미끄럽다... 조심조심해서 걸어가는데 능선 정상이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다.
잠시후에 쓰리봉을 만난다.
쓰리봉(734m:06:30)
전남 장성군 북이면과 전북 정읍시 입암면 그리고, 고창군 신림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가 연달아 3개가 있다고 해서 쓰리봉이라고 하는데 봉우리 정상은 암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는 1구간부터 같이 걸어온 정읍시와 작별을 하고 고창군으로 접어든다.
쓰리봉 정상에 있는 스텐레스 이정표
쓰리봉 정상 이정표
봉 정상의 표지판을 찍은 다음에 암릉 사이로 기맥길을 이어가며
눈 덮인 산죽길이 호젓하게 나홀로 걷는데 마치 神仙이 된 기분이다.
이 맛에 자꾸만 나홀로 산행에 중독이 되는가보다.
저 아래 새벽에 내가 빠져나온 장성읍내의 불빛만이 산꾼을 반긴다.
쓰리봉의 마지막 봉우리를 지나니 데크목 계단이 어둠속에 나타난다.
미끄러운 데크목 계단으로 우회를 하니...
암릉 사이에 누워있는 소나무 한그루를 만나고
그러면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급경사이긴 하지만 로프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그리 걱정은 없다.
어둠속에 고개 하나를 치고 올라선다.
675봉(07:10)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해가 뜨기 직전이라 그런지 손이 시릴 정도로 춥다.
정상 나무에는 서대봉이라는 코팅지를 걸어놨고 동쪽에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산에는 일출을 준비한다.
날이 밝아오면서 헤드렌턴을 끄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사물이 보인다.
가야할 봉수대와 방장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용추계곡 갈림길(07:25)
잠시후에 오를 봉수대의 모습
조금전에 내가 걸어온 등로의 궤적
봉수대(烽燧臺:715m:07:35)
용추계곡 갈림길에서 힘들게 치고 오르니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봉수대라는 표지목이 서 있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고창의 넓은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오고 좌측으로는 장성군과 지나온 입암산과 갓바위봉 그 너머로 백암산의
멋진 장관들이 실루엣처럼 넘실거린다...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원래는 봉수대가 방장산(742.8m) 보다 높았으나 6.25때 폭격을 받아 높이가 방장산보다 낮아졌다 한다.
봉수대에서 바라본 잠시후에 가야할 방장산의 모습
방장산 가기 직전에 만난 큰바위봉
큰바위봉을 우회하여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서 방장산으로 향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출은 시작된다.
매일 뜨고지는 해이긴 하지만 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남다르다.
조금전에 지나온 큰바위봉
이른 새벽부터 걸어온 능선들이 뚜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출은 시작되건만 섣달 스무날의 달은 무순 미련이 있는지 아직도 중천에 있다.
735봉(07:45)
방장산(方丈山:743m:07:45)
전북 고창군 신림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전형적인 육산(陸山)의 산세를 지녔음에도
악산(岳山) 못지 않은 기개와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방장산은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추앙 받아온 산이다.
당당한 기세로 전남과 전북을 가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호남지역의 명산으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방장산은 산세가 크고 험한데다가 전라남·북도를 이어주는 요충지라서 백제가신라에 멸망한 뒤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의적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들은 도적성으로 불리는 성을 쌓고 지나는 사람들을 약탈하곤 했는데, 이런 활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방장산은 중국 삼신산의 하나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산이 넓고커서 백성을 감싸준다’
라는 뜻이다
한국은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불렀다.
호남지역에서는 방장산, 무등산, 지리산을 삼신산으로 불렀고 전라북도에서는 일봉래로
변산을, 이방장으로 방장산, 삼영주로 두숭산을 삼신산으로 하였다.
예전에는 이 산을 방등산 또는 반등산으로 불렀다.
반등산은 산이 높고 장엄해서 절반밖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조선 인조때에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사대부들이 중국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닮았다는 이유로 방장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방장산 남쪽 백암리의 수도골에는 절이 많았다하고, 예부터 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단다.
동으로 헬기장봉과의 사이에 유독 흰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있었는데 이 바위에서 백암마을 이름을 짓고,
삼한시대의 성으로 전해오는 벽오산성(碧梧山城)이 벽오봉을 남긴 것으로 짐작된다.
방장산 정상 이정표
이곳도 조금전에 지나온 봉수대 못지않은 조망권을 자랑하는데 저 멀리 지난구간의
갓바위봉, 시루봉은 물론 그 너머 백양산과 추월산과 강천산까지 아련하게 보인다.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라 그런지 생각보다 상당히 춥다.
잠깐사이에 손이 굳을정도로 추위는 엄습해온다.
눈 속에 묻힌 삼각점(△남양21 1999복구)과 이정표, 안내판을 둘러보고 삼각대를
꺼내서 인증샷을 남긴 다음에 능선 우측으로 꺽어져 고창고개로 한다
방장산에 대한 여러가지 이름 때문에 혼란스럽다... 자료를 보면
동에서 서로, 입암-노령-반등산-고사치-송현-문수사-취령산으로 이어지는데 반등산 북쪽골짜기는
현재에도 용추계곡이고 고사치는 양고살재, 송현은 솔재, 취령산은 현재 문수산이나 장성군에서는 ‘축령산’이다.
취령산(鷲灵山=鷲靈山)의 취를 축으로 읽은 것은 양산 통도사의 영취산(靈鷲山)이 영축산이 된것과 같다.
현재의 지형도마다 표기가 다르다. 최신 25000 지형도에는 두 곳(×734, ×640)에 ‘방장산’ 지명표기가 되어 있고,
구 5만지형도에는 ×734봉은 방장산(方丈山), ×640봉은 방문산(方文山)으로 따로 표기되었다. 25000지형도의
서쪽 ×640봉에 표기된 方丈山은 方文山의 한자가(文, 丈) 비슷한데서 발생한 오기(誤記)로 보인다만,
방문산은 또 뭔가. 게다가 정작 최고봉인 744.1봉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다
(산경표) 半登山(井邑南十里 興德南十五里 長城北四十里 高敞東五里 分三歧)
방장산의 옛 이름은 반등산이고, 더 예전으로 돌아가면 방등산이다.
×640봉을 지난 능선 아래 방장굴 앞에 세운 방등산가(方等山歌)에 근거하듯 백제시대에는
방등산 이었다가, 후에 반등산 그리고 그 후에는 방장산이 된 것이다. 각 바뀐 시점은 알 수가 없다.
예전(백제시대)의 방등산이 현재에 방장산이 되었는데, 이 방등산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방장산이 되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원래 방등산으로 불리었으나 도적떼가 쫓겨나고 난 뒤,
모든 백성을 포용한다는 의미로 방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거나, 방등이 부르기 쉽게 ‘반등’으로
불려 반등산(半登山)이 되었다가, 조선조에 와서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의 명나라의
삼신산(방장, 봉래, 영주)의 본을 따라 방장산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장성군 홈의 설명도 맞지 않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이어 일제시대(1918) 지형도까지 半登山이고, 1961년 건설부 고시에서
반등산과 방장산이 혼용되었다가 2003.5.17.에 방장산으로 확정되었다.
조은산님 블로그 자료 인용
방장산 정상에서 인증샷
방장(方丈))이란 주지 또는 스승의 존칭으로 사용되는 불교 용어이다.
유마(維摩)거사가 거처하는 방이 일장사방(一丈四方)이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방장은 원래 중국에서 고래로 청렴한 성인의 거실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유마경 維摩經〉에서 설하는 유마거사의 간소한 거처와 결부되었고,
이로부터 사방으로 1장이 되는 승려의 방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장은 단순히 간소한 거처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유마거사가 사방 1장의 협소한 방에서 3만 2,000의 좌석을 벌여놓았다는 데서
유래해, 법력(法力) 또는 도력(道力)이 특출난 스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방장이 주지나 스승의 의미로 쓰이는 것도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근래 주로 큰 절의 주지(主持)를 가리켜서 방장화상이라 한다.
현재 한국에는 해인사의 해인총림(海印叢林), 송광사의 조계총림(曹溪叢林),
통도사의 영축총림(靈鷲叢林), 수덕사의 덕숭총림(德崇叢林)
백양사의 고불총림(古佛叢林)에만 방장이 있다.
방장산 아래에 있는 전망대
잠시후에 가야할 능선들
637봉(08:05)
방장산 내리막길을 따라 완만하고 편안한 길을 따라서 내려선다
NO 134송전탑(08:10)
고창고개(高昌峙:536m:08:15)
전북 고창군 신림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을 넘는 고개로 장성쪽에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방장산 휴양림이 있고 고창쪽으로는 용추계곡으로
연결되는 고개인데 용추계곡에 있는 용추폭포는 수심이 20m나 되는
깊은 웅덩이로 용이 승천했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인데 고산자 선생이
쓴 대동여지도에도 용추계곡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새벽에 찜질방에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심한 허기가 느껴져
고창고개 벤치에서 밀감2개와 두유를 하나를 마신 다음 오르막을 오르니 조그만
너덜길에 산죽밭이 나오고 고개를 넘어 우회길로 활공장으로 향한다
방장산 휴양림 분기점(08:30)
휴양림 분기점에서 산길로 활공장으로 향하는데 바로 아래에 있는 휴양림 도로와 나란히 한다.
도로 아래에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방장산 휴양림이 보인다.
휴양림 갈림길에서 활공장까지 4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따라서 능선으로 오르는데
이곳은 음지라서 눈은 제법 많이 쌓여있다... 잠시후에 너덜길이 나타나고 눈에
파묻힌 함평이공 묘지 1기를 만난다... 뒤돌아 보니 방장산이 한 눈에 보인다
뒤돌아 본 방장산의 모습
억새봉(636m:08:40)
정상에 오르니 활공장이 나오는데 정상 이정표에는 지도상에는 없는 억새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고창읍내의 모습
고창군 (高敞郡)은
삼한(三韓)시대에는 마한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모이부곡현(牟伊部曲縣)이었고,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또는 모량현이라 불렸다. 신라 경덕왕 때 4개의 현으로
분리되면서 무송현(茂松縣), 장사현(長沙縣), 상질현(尙質縣), 고창현(高敞縣)으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장사현과 무송현은 영광군(靈光郡)에 속하였고, 고창현과 상질현은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고창현으로 바뀌고, 조선말기에 고창군이 되었다.
지금의 고창군은 조선시대의 고창현(高敞縣)·무장현(茂長縣)·흥덕현(興德縣) 등 3개의 독립된 현이 있었던 곳이다.
대체로 지금의 고창읍과 고수면(古水面)·아산면(雅山面) 일대는 옛 고창현 지역이며, 무장(茂長)·성동(星洞)
·대산(大山)·공음(孔音)·상하(上下)·해리(海里)·심원면(心元面) 일대는 옛 무장현 지역이고, 흥덕(興德)·
성내(星內)·신림면(新林面) 일대는 옛 흥덕현 지역에 해당한다. 3개현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고창군·무장군·흥덕군이 되어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의 지방제도 재개편으로 전라남도에 속했다.
이는 나주·영광 등과 지역적 연계가 많아 동일한 문화권과 생활권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로교통의 약화와 육로교통의 변화 등으로 1906년 3개 군이 전라북도로 편입되었으며,
지방구역 정리에 의해 고부군의 비입지(飛入地)인 부안면이 흥덕군에 이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3개 군 중
가장 작은 곳이었던 고창에 나머지 2군이 합병되어 고창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고창이라는 지명은 높고 넓은 들(보리밭)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고창의 인물로는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전봉준과, 미당 서정주선생,
명창 동리 신재효,그리고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가 이곳 고창출신이다
억새봉이라 표기된 활공장 정상에 서니 고창의 山河들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저 멀리 선운산까지 보이고 변산반도까지 아련히 보이고 능선 아래로 내려서니
활공장에 전주이공 묘지 2기가 있고 세로 세운 데크목 광장이 세워졌다.
활공장 정상에 있는 데크목광장
활공장에서 벽오봉으로 향한다
벽오봉에서 만난 山客
오늘 처음으로 산에서 사람을 만난다... 왜그리 반가운지?
광주에서 이른 새벽에 왔다는 등산객 방장산 가는 길이란다
나도 고창읍내를 배경으로...
벽오봉(壁梧峰:640m:08:45)
전북 고창군 신림면과 고창읍,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2010년에 제작된
지도에는 방문산(方文山)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이는 방문산(方文山)과 한 산줄기에 있는 방장산의 가운데 글자인 어른 ‘장(丈)’ 을 글월 ‘문(文)’으로
잘못 해석해서 붙혀진 이름으로 본래 방문산은 벽오봉으로 불렀는데 벽오봉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예전에 고창 주변이 바다였을 때 오동나무를 싣고가던 선박이 벽오봉에 부딪혀서 난파된 뒤 이곳에
오동나무가 자생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벽오봉에서 조금 내려오니 산허리를 잘라서 도로를 만들어놨다.
영산기맥은 도로를 가로질러 연결된다.
고창군에서 산허리를 마구 해친 다음에 MTB 도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산 전체가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이곳으로 자전거 타러 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지방자치단체의
무분별한 전시성 행정으로 세금 낭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영산기맥은 악명높은 길이라고 소문이 나서 겨울산행을 택했는데
오늘 현재까지 걸어온 구간은 이곳 남도의 인심만큼이나 후덕하고 편한 길이다
방장동굴 갈림길(08:55)
등로에서 동굴까지 거리가 90m란다. 베낭을 벗어놓고 방장동굴로 향한다.
방장동굴(08:58)
이 동굴은 방등산가(方登山歌)의 유래가 얽힌 동굴로서 예로부타 도적때의
소굴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구한말 병인박해를 피해 충청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노령산맥을 넘어와 신앙을 지키며 은거하기도 하였으며 6.25때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된 곳이기도 한 굴이란다
그런데 몰지각한 인간들이 낙서로 인해 흉물로 변해잇는 느낌이고 굴 옆에는
방등산가 안내판이 서 있다
전북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남쪽 중턱에 있는 굴로서 방장동굴과 관련된
노래인 “방등산가”가 고려사 券71 삼국속악조에 그 제목과 유래만 전하고 있다
방등산가는 신라말기에 장일현의 한 여인이 지은 것으로 전해오며
신라말년에 온 세상이 어지러워 도둑들이 고창 방등산의 방장동굴에
본거지를 두고 고창지역의 풍요로운 들녘에서 생산된 곡식들을 훔치고
양가집의 부녀자들을 납치해갔다... 그 가운데 도둑들에게 잡혀간 장일현의
한 여인이 남편이 자신을 구하려 오지 않음을 탄식하여 부른 노래라고 한다.
방장동굴의 유래는 방장산에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방장동굴은 도적굴이라고 한다.
방등산가(方登山歌)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백제가요는 다섯 편이다. '선운산가', '무등산가'
'지리산가', '정읍사' 그리고 '방등산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가사가 남아있는 것은 '정읍사'뿐이다.
方等山歌(방등산가)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탄식한 여인의 노래
方登山 在羅州屬縣 長城之境( 방등산 재나주속현 장성지경)
新羅末 盜賊大起 良家子女 據此山( 신라말 도적대기 량가자녀 거차산)
多被擄掠長日縣之女(다피로략장일현지녀)
亦在基中作此歌 而諷其夫不卽來救也(역재기중작차가 이풍기부불즉래구야)
[해석] 방등산(方登山)은 나주의 속현(屬縣)인 장성(長城) 경계에 있다. 신라 말엽 도적이 크게 번져 이 산에
은거하여 양가(良家)의 자녀들을 많이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했다. 이때 장일현(長日縣)의 한 여인이 이 가운데
있었는데, 이 노래를 지어 그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한탄했다.
작자, 연대미상이다.「고려사」권71, 삼국 속악조에 가사는 전하지 않고 노래의 내력만 전한다. 「고려사」에는
제목이 「방등산(方登山)」으로 되어있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반등산곡(半登山曲)으로 되어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시대 5대 가사에 선운산가, 방등산가, 무등산가, 지리산가, 정읍사가 있는데,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의 정읍사(井邑詞)와 방장산가, 선운산가 셋 모두 남편을
그리며 우는 아낙의 노래다. 백제 여인들의 님사랑하는 마음은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람이 없지 싶다.
문너머재(09:15)
방장산 등산 안내도가 있고 등로 우측으로는 산림욕장과 공설운동장 그리고
영춘봉과 석정웰파크 시티로 내려가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갈미봉(별봉:579m:09:20)
정상 아래에 무명묘지 1기가 있고 고창 밀알회에서 설치한 스텐레스 이정표와
방장산 안내도가 서 있는데 영산기맥길은 임공사 방향이다
배넘이재(09:25)
이곳은 배넘이재 그리고 조금전에 지나온 문넘어재... 호남정맥 길에서 만난 전남 보성군
조성읍에 있는 주월산 능선에 배걸이재와 문너미재와 같은 뜻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곳 고창도 예전에 바다였다고하니 아마 바닷물이 밀려와 배가 고개에 걸려서
그 이름이 붙이지 않았나 싶다(범여의 생각中에서)
이곳에서 전면에 있는 545봉으로 오르지 않고 옆사면으로 우회하여 양고살재로 향한다.
옆사면으로 내려서니 산죽밭이 나오고...
우측 아래에는 너덜겅이 나오고 잠시후에 대밭사이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호젓한 대밭길을 지나니 좌측위에 방장사가 보이고 등로에는 해후소가 있다.
잠시 방장사에 들리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열차시간을 맞추기가 촉박할 것 같아
절 쪽을 향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내리막길 향해 내려간다
방장사(方丈寺:09:30)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서 벽오봉 절벽 아래에
자리잡은 조그만 암자로서 예전에는 임공사(臨空寺) 였으나 절집이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현재의 사찰은 1965년 주지 법륜(法輪)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관세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보살상 뒤에 후불탱화가 있으며, 법당, 요사채, 선방이 있다
방장사를 지나니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이곳부터는 등산객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양고살재 이정표
양고살재(楊古殺峙:300m:09:40)
전북 고창군 석정리에서 전남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15번 국도가 지나간다.
고개 정상에는 여러개의 이정표와 주차장이 있는걸로 봐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가보다.
양고살재는 병자호란때 고창 출신 박의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의(朴義)는 1599년(선조 32년)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불렀다. 1624년(인조2년)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당하고 임금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수모를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수원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여러번 이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을 만나 양군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방장산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초탄에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죽은 적의 상장은 양고리라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사위로서 창평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태종의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다. 이때에 예친왕 다락을 따라 왔다가 박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청나라 사기에서 보듯 청태종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무훈왕을 봉하였다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에 산에서 조급히 몸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쏜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쏘는 애륵을 시켜 잡아 목을 바치었다고 한다. 박의의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에 있으며 후손은 고수면
장두리와 아산면 중월리등에 살고 있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유래는, “큰 재(峙), 작은 재(峙) 두개가 있다고 하여 양
고령이라 부르며 양고령이 발음 변화로 양고살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장성군 죽청리 마을에는 이와는 다른 유래가 보인다.
세종실록 지리지(권제151, 16장) 장성현에 기록되기를,
-長城縣 古百濟古尸伊縣 新羅改岬城郡 高麗改長城郡 爲靈光任內 明宗二年壬辰置監務 本朝因之-
(해석) 장성현은 본래 백제의 고시이현인데 신라에서 갑성군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장성군으로
고쳐서 영광의 임내로 하였다가 명종 2년 임진에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즉, 장성의 옛 이름이 고시이(古尸伊)이고, 고시이로 가는 고개라 고사치가 되고, 고사치가
고살재로, 웃고살 아랫고살 보태서 양고살로 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역시 古沙峙이니, 누루하치의 사위 楊古를 殺했다는 내용은 근거가 약해진다.
(조은산님 블로그 인용)
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다가 주차장 옆 좌측 넓은 임도로 들어선다.
솔재 3.7km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니...
임도 우측에 雲月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곳에 서니 고창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운월정에서 바라본 고창읍내의 모습
좌측에 편백나무 숲으로 오르니 갈라지는 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올라선다.
편백나무 숲
NO126송전탑(09:55)
송전탑 뒤로 아침에 지나온 방장산이 보이고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곳은 길이없다.
임도를 버리고 험한 숲으로 오르는 곳에서 만난 선답자의 시그널
390봉(10:00)
아무것도 없고 잡초와 쓰러진 잡목에 베낭이 걸려 애를 먹는다.
다시 우측으로 90도 꺽어져서 내려오니 조금전에 헤어진 임도를 만난다.
임도로 내려와서 편하게 영산기맥길을 이어간다.
NO124 송전탑(10:05)
조금전에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보고...
고창 예향천리 마실길 이정표(10:15)
편안한 임도를 따라 오다가 우측의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고창 마실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다시 조그만 봉우리로 향한다.
멋진 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기고...
421봉 분기봉(10:25)
분기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넓은 임도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昌寧曺公 묘지(10:25~55)
421봉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임도길을 걸으니 좌측에 커다란 묘지 2기가 나온다.
이른새벽에 라면 하나를 먹었더니만 배가 상당히 고파온다.
양지 바른 묘지 상석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 묘지쪽으로 내려간다
예전에 중추부사를 지낸 창녕조공 묘지인데 아침밥상 펼치기엔 안성맞춤이다
혼자 산행을 하면서 밥 먹기는 상석이 있는 묘지만큼 좋은 명당은 없다.
이곳도 양지 바른 명당이라 亡者의 밥상을 빌려 아침상을 펼친다.
그래봐야 라면 하나에 막걸리 한병이다... 라면을 끓인 다음에 막걸리 한잔을
망자의 묘지 주변으로 고수래를 하고 맛있게 먹은 다음에 후식으로 사과 하나에
커피 한잔까지 마시고 30분의 여유로운 휴식을 취한 다음에 솔재로 향한다.
묘지 우측의 임도로 나오니 솔재 쉼터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수레가 다닐만큼 넓은 고창예향천리 마실길을 따라서 영산기맥을 이어간다
양고살재 안내판과 휴계의자가 있는 임도를 지나....
솔재로 내려가는 좋은 길을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아직까지 우측으로는 고창읍내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송전탑(11:10)
송전탑이 있는 조그만 봉우리에는 가시가 달린 잡목과 자리공들이 뒤엉켜 걸을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랴 가야할 길이거늘... 살짝 우회하여 좌측으로 내려선다
연녹색 이름없는 시그널이 범여를 계속 안내한다.
이 띠지는 공작산 아우님이 다니는 산악랜드 카페에서 걸어논 것인 모양이다
빽빽한 숲사이로 길이없는 곳을 내가 만들어 내려가니...
광산김씨 묘지 1기를 만나고 곧바로 내려서니 도로가 나타난다.
솔재(松峙:284m:11:15)
전북 고창군 고창읍과 전남 장성군 북일면으로 이어지는89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옛날에는 소나무가 많아서 송치(松峙)라고 부르다가 순수 우리말로 ‘솔재’로 부르게 되었단다.
대동여지도에는 松峴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정상에는 쉼터와 수준점 그리고 삼각점이 있다
묘지로 내려서 고창쪽을 넘어가니 좌측으로 새마을꽃동산이란 표지석이 있다.
솔재에서 바라본 장성군 북이면쪽의 모습
고창쪽으로 넘어오니 좌측에 솔재 쉼터가 있고 월산산림욕장 가는 이정표를 끼고 우측으로 올라선다
솔재 수준점
이동통신탑(11:20)
솔재에서 올라서니 좌측으로 간벌작업을 해놔서 조망이 시원스럽다.
편한 임도가 이어지다가 우측으로 묘지가 나오고 이윽고 이동통신탑을
지나면서 선답자들이 힘들게 지나갔다는 가시밭과 잡목이 엉켜진 고난의 길로 들어선다.
이리저리 피해보지만 별 방법이 없다. 베낭이 나무에 걸리고 얼굴은 가시에 할키고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는 느낌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쓰러진 나무 사이로 낮은 포복까지 하면서 지나간다.
지나온 벽오봉과 갈미봉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고창 석정웰파크시티 골프장이 보인다.
힘들게 능선을 치고 오르니 정상에는 인식할 수 없는 삼각점을 만난다.
399.8봉(11:45)
399.8봉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이 곳 길도 장난이 아니다
험한길을 조금 내려오니 좌측으로 대밭이 보이고 넘어진 나무를 피해 걸어간다
북당골 안부(11:55)
NO88 송전탑이 나오면서 길은 유순해진다.
송전탑 옆의 4기 묘지 사이를 지나면서 임도가 나온다.
이곳은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북당골과 전북 고창군 고창읍 월산리를 잇는 고개이다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지나온 능선들이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다시 임도에서 우측으로 간벌된 지역을 바라보면 능선위로 올라선다.
324.8봉(12:10)
선답자들이 달아논 324.8봉을 지나서 5분 정도를 걸어 비포장도로로 내려선다.
검곡치 (劍谷峙:324.8m:12:15)
전북 고창군 고창읍 월산리에서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금곡마을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가 시원스럽게 나 있고 좌측 小路로 금곡마을 가는 길이 보인다.
아마 검곡치(劍谷峙)는 금곡마을에서 딴 이름으로 보인다.
한자표기는 그렇더라도 금곡마을과 같은 음이니 더욱 그렇다.
이곳에서 베낭을 내리고 물한모금을 마신다... 오늘 날씨는 아침에는 상당히 추웠으나
낮에는 겨울날씨답지 않게 상당히 더운 느낌이다.
어느 선답자들께서는 이곳에서 좌측 임도를 따라서 수량동 고개까지 같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렇게 기맥길은 타고 싶지 않아서 다시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른다
비포장 도로를 건너서 능선으로 오른다. 우측에는 간벌을 하고 어린 편백나무를 심어놨다.
능선에서 바라본 고창읍 월산리의 모습
월산리는 풍수지리상 지형이 ‘운중반월(雲中伴月)’ 이라 하여 ‘월산’이라 부르며
조선시대 후기에 창녕조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우측으로 간벌을 한 다음 편백나무 조림지 옆 능선을 치고 오르니
무명 묘지 2기가 나오고 지금부터 잡목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침에 걸었던 방장산 구간은 아직도 보이고...
잡목이 심해도 너무 심해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선답자들이 왜 임도를 따라 수량동을 향해 갔고 영산기맥을 여름에는 하지
말라는 선답자들의 조언을 이제서야 이해할 것 같다
438봉(12:35)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며 내려오니 넓은 임도가 나오며 편백나무 숲을 만난다.
편한 임도를 따라서 7~8분을 편백나무 숲과 우측으로 보이는 고창의 山河를 바라보며 걷는다.
임도 갈림길(12:43)
편백나무 숲을 바라보면 걷다가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곳부터 또다시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넓은 공터에 올라서니 반가운 시그널을 만나는데
진양기맥을 같이한 사르리님의 띠지가 반갑기만 하다
아우님! 잘 계시죠?
길은 아예 안보이고 겨우 중심을 잡아 좌측으로 떨어지니 원형 철조망이 나타나고
원형 철조망을 따라 내리막길을 향하는데 저 아래 금곡영화마을이 보인다
장성하면 얼른 생각나는게 홍길동의 생가가 있는 곳,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축령산,
별이 빛나는 가장 아름다운 고장이 이곳 장성이란다
그리고 저 아래 축령산에 둘러쌓인 금곡영화마을이 보인다.
장성군 남면이 고향인 거장 임권택 감독은 이곳에서 영화 ‘태백산맥’을 찍었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 ‘만남의 광장’ 그리고 드라마 ‘왕초’ 금곡마을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급경사를 내려오니 무명묘지 1기가 등로에서 만나고 좌측의
원형철조망 대신에 또다른 철조망이 편백나무 숲을 외호하고 있다.
등로 주위에는 야생란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철조망을 따라서 내려가니 좌측에 스텐레스 물탱크가 있고
묘지 몇기를 지나면서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수량동고개(12:55)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금곡마을에서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수량동으로
연결하는 고개로 좌측인 장성쪽은 금곡영화마을이 있고 우측에는 세심원이 있다.
그리고 세심원에서 조금 더가면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문수사가 있다.
들독재라고 부르는데 들독재’ 이름은 장성군의 청량산안내도에 나오는 이름으로
금곡동 윗골짜기가 들독골이라 들독재라 하는 모양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세심원(洗心院)
한자 그대로 뜻을 풀이하자면 ‘마음을 씻는 곳’이다
원래 장성군 민원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일찍 퇴직하신 한 분이, 축령산 자락에
그동안 소장해오던 미술 작품을 모아 미술관을 여시고 장성과 고창 중간에
'세심원(洗心院)'이라는 쉼터를 여셨다고 하는데 道를 닦는 곳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온갖 소음과 정신없음에서 잠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배려해둔 곳이라고 해야하나?
적어도 한국에 이런 곳이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만드셨다는데
오는 사람마다않고 가는 사람 잡지않으신다... 나중에 꼭 한번 오고 싶은 곳이다
수량동 고개 정상 이정표
문수사를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고개를 가로질러 문수산으로 향한다
문수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643년에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던 자장율사가 잠시 이
곳에 머물렀던 것을 인연으로 하여 절을 짓고 그 이름을 문수사라고 하였다.
그 중 대웅전은 만세루와 문수전 사이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삼출목의 주심포 형식을 취하였다. 기둥은 두리평주로 되어 있으며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다.
고창 문수사 단풍나무 숲은 문수산 입구에서부터 중턱에 자리한 문수사 입구까지의
진입도로 약 80m 좌우측 일대에 수령 100년에서 400년으로 추정되는
단풍나무 500여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숲이다.
이 숲의 단풍나무 크기는 직경 30~80㎝, 수고 10~15m정도이며, 특히 흉고둘레 2m 이상 2.96m에
이르는 단풍나무 노거수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문화재지정구역 120,065㎡ 내에는 단풍나무 노거수 외에도 고로쇠나무, 졸참나무,
개서어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등의 노거수들이 혼재하고 있으며,
아교목층과 관목층에는 사람주나무, 산딸나무, 물푸레나무, 쪽동백, 쇠물푸레나무, 박쥐나무,
작살나무, 초피나무, 고추나무, 쥐똥나무 등이 나타나고, 아울러 조릿대 군락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사진 - 펌)
수량동 고개에서 문수산가는 길은 조금전에 힘들게 지나온 길을 보상이라도
해주듯이 백두대간 길 못지않은 편안한 길이다... 마치 트레킹하는 기분이다.
잠시후 우측에 잘 관리된 묘지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금곡영화마을 가는 길이 있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이곳 고창쪽은 은사시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장성쪽은 멋진 편백나무 숲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장성쪽의 멋진 편백나무 숲
이런 길은 거리를 줄여야하기에 아주 빠른 속도로 길을 걷는다.
그런데 지도상에는 문수산으로 표기가 되어 있지만 이정표는 축령산으로
표기가 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가끔씩 등산객도 만나지만 음지라
그런지 눈이 녹아 얼음으로 바뀌어 있는 탓에 상당히 미끄럽다.
희안하게 생긴 나무를 만난다.
565봉(13:45)
넓은 봉우리에 올라서서 다시 내려서는데 비를 피하기 위한 조그만 정자가
설치되어 있는데 4명의 산꾼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늘 생각보다 날씨가
더워서 1L의 물이 모자라서 혹 물 남은거 있으면 달라고하니 선뜻 주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이분들도 전주에서 오신 분인데 영산기맥을
하신다고 하면서 사과 한쪽을 줘서 참으로 맛있게 먹고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진다.
금곡영화마을 갈림길(13:50)
두번째 휴식공간
독림가 임종국 선생 수목장 가는 이정표전북 고창과 경계를 이룬 축령산 일대에는 4~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늘푸른 상록수림대 1,148ha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독림가였던 춘원 임종국선생은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무입목지에 1956년부터 21여년간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고 있다
춘원 임종국 선생은 1915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에서 임영규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창중학교 3년 중퇴 후 농촌 일을 돕다가 25세 때인 1940년 전남 장성군 장재 마을로 이주, 양잠과 특용작물을
재배하며 제법 짭짤한 농가소득을 올려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그는 농사일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고, 돈도 벌면서 영농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우연히 장성군 덕진리의 인촌 김성수 선생 소유 야산에 쭉쭉 뻗어 자라고 있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보고 ‘아! 우리 강산에도 이런 나무가 성장할 수 있구나’를 느끼며 한눈에 반해버렸다.
6.25전쟁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그 해 봄부터 본격 조림을 시작했다
편백나무와 삼나무는 각종 가구와 인테리어에 최고로 좋은 목재이다. 각종 침대, 책상, 의자, 서랍장, 식탁,
발판, 옷장 등 가구와 욕조탕(희노키탕), 베개, 도마, 어린이 놀이기구, 안마기구, 화장품, 오일, 천연 염색, 목공예,
새집증후균 제거 피톤치드, 무궁무진하게 소요되고 있다.
또 편백나무와 삼나무의 피톤치드(phytoncide)는 항암작용이 있고, 이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자료 인용)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문수산(축령산)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암릉을 만나 우회길로 올라서니 커다란 2층 팔각정자가 나타난다
문수산 (文殊山:621m:14:15)
전북 고창군 고수면과 전남 장성군 북일면, 서삼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장성 사람들은
축령산으로 고창 사람들은 문수산으로 부르는데 또 하나의 이름은 청량산으로 불리운다.
대동여지도에는 취령산(鷲嶺山)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로 취령산이 축령산으로
바뀌었는지는 지나가는 산꾼은 알 길이 없다.
고창에서는 축령산을 문수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산 아래에 있는 문수사
창건(644년) 당시 신라의 자장율사가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나오는 꿈을꾸고 그곳을 파보니
문수보살 입상이 나와 문수사로 창건하여 문수사로 부른듯 하다.
또 하나는 문수사 일주문 편액에 “청량산 문수사(淸凉山 文殊寺)”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 중국 청량산에서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해서 이곳도 그곳에서 온 것이 아닌가싶다
아뭏든 하나의 산에 세가지 이름을 가졌으니 상당히 헷갈린다.
정상에는 2층 팔각정과 무인감시 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와 2등 삼각점이 있고
이정표, 안내판의 시설물들이 보이고 팔각정 앞에는 축령산으로 이어지는
등로에는 등산객들이 가끔씩 올라오는게 보인다
문수산 정상에서
산 정상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광주 무등산이 아련히 보인다
문수산(축령산) 정상에서 이것 저것을 본 다음에 우측 추암마을
이정표를 따라 영산기맥길을 이어간다
산죽길이 나타나고 이윽고 커다란 암릉구간이 나오더니만 내리막길에
로프시설이 나타나면서 음지에 얼어있는 얼음구간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잠시후 50대 후반쯤 되는 남자1명, 여자 2명을 만나는데 여자분이
전라도 사투리로 ‘고생하시시요’라고 인사를 하는데 처음에 그 뜻이 뭔지 몰랐다.
안부(14:32)
내리막 안부에 내려서니 멋진 노거수 한 그루가 서 있고
이 안부 아래로 고창~담양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550봉(14:37)
봉우리 정상에는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고 담양~고창간 고속도로가 보인다
550봉에서 바라본 고창~담양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고창군 고수면의 모습
이곳부터는 길이 아주좋다. 가끔가다가 등산객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도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오후 4시반 열차를
타야하기에 마음이 급해져 이제는 달리다시피 하면서 내려간다.
우측으로 간벌된 지역을 만나고 저 멀리 등로에 팔각정이 보인다.
추암마을 갈림길(14:50)
이곳에서 기맥길 등로에서 벗어나 추암마을로 내려선다.
추암마을 3.3km(56분 소요)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아무래도 내리막길이라 30분이면 갈 것 같아서 아침에 탔던 택시기사분에게
15:30분까지 추암마을로 와달라는 전화를 하고 등로로 내려서니 길은 완전히
뱀이 또아리 틀듯이 뱅글뱅글 도는데 이런곳은 산꾼 특유의 가는 법으로 험한
길을 가로질러 내려가는데 거리는 줄이나 가시덤불에 얼굴이 할키어 상처가 난다
추암마을(15:10)
전남 장성군 서삼면에 위치한 마을로 예전에는 오지였으나 지금은 축령산 휴양림
덕분에 상전벽해가 된 마을이다... 마을에 음식점과 민박집, 편백나무 제품을
파는 상점이 있는데 혼자 내려오는 산꾼에게 호객행위를 한다.
한 그래도 출출한 참에 막걸리 한사발 할까하고 기웃거리는데 벌써 기사
아저씨가 와서 기다리는 바람에 입맛만 다시고 택시를 타고 장성역으로 향한다
장성역(15:40)
장성역에 도착하여 열차표를 예매하니 16:20분발 열차인데 장성에서
서대전까지만 앉아가고 서대전부터 영등포까지는 입석이란다
다음 열차는 17:55분이란다... 일단 16시 20분 표를 끊은 다음에
점심 먹기는 애매하여 화장실로 들어가서 대충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니 시간이 조금 남아서 역전 주위를 돌아본다.
장성역 유래 표시석
장성역발→영등포행 무궁화호 열차표
장성읍내의 모습
장성역 홍길동 테마역의 모습
역 플렛폼으로 열차가 들어온다. 열차에 올라 어차피 서대전부터는 서서 가야할 것
같아서 아예 초반부터 식당칸으로 가서 오뎅하나에 캔맥주 2개 그리고 베낭에서
막걸리 한 통을 꺼내서 점심 대신에 마시고는 식당칸에 명당자리를 잡아서 베낭을
베고 멋들어지고 잠을 자고나니 열차는 벌써 수원역을 지나고 있다.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20시 05분이다... 노량진에서 경찰학원을 운영하는
초딩이 동창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집으로 간다
힘들었지만 멋들어지게 영산기맥 한 구간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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