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3년 12월 22일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1km +어프로치 5.2km / 7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남창골 주차장-장성새재 옛길-장성새재-불바래기-순창새재-영산기맥 분기봉568봉-삼성산 분기봉-장성새재-입암산-입암산성 북문-갓바위봉-시루봉-노령터널
폐헬기장-송전탑-장성갈재
☞ 소 재 지: 전남 장성군 북하면, 북이면 / 전북 순창군 복흥면, 정읍시 입암면
12월 첫주에 한강기맥을 끝내고 나머지 2기맥이 남았는데 모두 공교롭게도 남도길이다.
혼자 다니기엔 경비 문제도 있고 겨울엔 눈(雪)이란 변수가 있어서 같이 갈 동료를
찾아보았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가장 편하고 마음에 맞는 산꾼이 지난 겨울 금남기맥을
같이한 젠틀맨님이지만 요즘 직장이 바쁜 모양이라 말도 못꺼내고 나홀로 산행계획을 세운다.
금욜 저녁에 오랫만에 형제들끼리 해넘기 전에 밥한번 먹자고 하여 저녁 먹으면서
마신 술이 조금은 과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무겁다.
결혼식 한군데 들렸다오니 학교 선배이면서 같이 모임을 하고 평소에 내게 도움을
많이 주시는 선배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조화를 보내고
조문을 한 다음에 부지런히 집에 들어와 베낭을 메고 용산역으로 향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용산역에 도착하니 열차 출발시간 10분전... 저녁도 먹지 못하고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영산기맥(榮山岐脈)이란? 백두대간상의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분기하여 내려오다가 조약봉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져서 이 호남정맥이 내려오다가 내장산의 소죽염재와 상왕봉 사이의 순창새재로 내려서기전의
530봉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내려서면서 좌측으로 영산강과 우측으로 동진강을 가르며 내려서면서 입암산(626m), 시루봉(649m), 방장산(742.8m), 벽오봉(640.4m), 갈미봉(579m), 문수산(621.6m), 두루봉(441.5m), 소두랑봉(470m), 구황산(500m), 고산(528m), 고성산(546.7m), 월랑산(458m), 태청산(593.3m), 장암산(481.5m), 분성산(318m), 장군봉(430m), 불갑산(518.2m), 모악산(352.3m), 금산(305.0m), 군유산(405.0m), 발봉산(181.0m), 영태산(135.0m), 감방산(259.0m), 병산(130.7m), 마협봉(288m), 기봉(264.6m), 승달산(318.9m), 국사봉(283m), 대봉산(252m), 지적산(187m), 대박산(155.4m), 양을산(156m), 유달산(230m) 등을 거쳐서 목포시 충무동 다순금 마을앞의 목포만으로 가라앉는 도상거리 약157.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백암산 상왕봉(741.7m)에서 발원한 남창골의 물이 장성호를 이루고, 다시 황룡강으로 흘러서 나주를 적시며 영산강으로 유입되어 목포 앞 서해바다로 흘러드는데 영산기맥은 영산강 북서쪽의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산줄기가 비록 정맥에서 분기하였으나 그 길이에 있어서나 산세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산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이 산경표에 언급되어 있지않아서 뜻있는 많은 산악인들의 아쉬움을 남긴다 |
영산기맥 개념도와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구글어스
산경표에 표기된 영산기맥 자료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영산기맥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용산역(18:45)
장례식장 갔다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고생을 한다.
부지런히 집에와서 베낭을 급하게 챙긴 다음에 도곡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옥수역에 환승하여 용산역에 도착을 하니 열차가 출발하기 10분전이다.
원래 좀 일찍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열차를 탈 예정이었으나 대합실에
도착하니 열차에 탑승하라는 안내 멘트가 나오는 바람에 부지런히 풀렛폼으로 향한다.
용산발 장성행 열차표
용산역 풀렛폼
열차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열차는 출발하고 4시간을 좀 넘긴 밤11시 10분에 장성역에 도착한다.
장성역(23:10)
난생 처음으로 전라도땅 장성역에 와본다.
예전에 지명 큰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백양사에 성지순례를 와보긴 했으나
그땐 단체로 와봐서 의미없이 지나갔기에 오늘이 처음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은 큰 스님께서 고불총림의 방장으로 계신다... 함 찾아뵈야 할터인데
역 대합실을 빠져나와 인터넷에서 확인한 삼호스파 찜찔방으로 향한다.
이상한 계산 방식의 호프집
찜찔방 가는길에 저녁식사를 하지않아 배가 고픈탓에 요기라도 할려고
식당을 찾아봐도 늦은시간이라 다들 문을 닫아버린 탓에 호프 한잔을 하려고
호프집에 들려서 치킨 반마리에 생맥주 500cc를 시키니 반마리는 10,000원이고
한마리는 14,000원이란다... 뭐 이런 계산방식이 다 있노 하니까
먹을라면 먹고 말라면 마라는 식이다...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가보다.
억울해서 한마리를 시켜서 반마리는 포장하여 내일 아침으로 먹을요량으로
베낭에 넣고 반마리에다가 생맥주 한잔 마시고 근처 찜찔방으로 향한다.
장성 농협 3층에 있는 찜찔방
찜찔방(12:00~05:45)
찜찔방에 들리니 마음씨 좋은 쥔장이 락카키를 2개를 준다
한명이라고 하니 베낭과 옷을 한꺼번에 들어가니 않으니 2개를 준단다.
찜찔방비도 다른곳보다 싼 7,000원이다. 샤워를 마치고 수면실로 향하니
수면실에 나말고 달랑 한명이 잠을 자고 있다. 덕분에 새벽까지 깊은 잠을
자긴 했지만 덕분에 예상보다 1시간이상 늦게 있어나는 바람에 정신없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베낭을 챙겨 역전으로 와서 택시를 탄다.
남창골(170m:06:30)
장성역에서 출발한 택시는 25분 이상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남창골이다.
남창골 전남대 장성학습림 앞에 내려 산행을 준비한다 (택시비 28,000원)
늦잠을 자는 바람에 1시간정도 산행이 늦어져서 괜스레 맘이 급해진다.
서둘러 산행을 준비하고 06시 35분에 출발을 하는데 날씨는 그리 춥지않다.
영산기맥 분기점을 올라가는 어프로치 구간이 5km가 넘기에 결코 만만치가 않다.
차량을 가지고 오면 순창 대가마을쪽이 가장 가깝긴 하지만 대충교통을 이용하면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아 부득히 거리가 먼 남창골로 택하였다.
남창골은 몽계폭포에서 내려오는 하곡동골, 불바래기에서 내려오는 새재골, 입암산성 마을을
통해 내려오는 산성골과 갓바위에서 흘러내린 은선골 네 계곡물이 합해져 황룡천을 이룬다
이 물은 장성호에 잠시 머물고는 황룡강이란 이름으로 흐르다가 나주에서 영산강이 된다.
전남대 학습림을 좌측에 두고 조금 오르니 이정표가 나오고 어둠속에 우측에
남경산교회 수련원이 있고 그 가운데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장비를 점검하다가 보니 낭패한 일이 생겼다.
어제 급하게 베낭을 챙기다가 보니 복사한 지도와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카피한 것을 안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산행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지...
장가가는 넘이 뭐 빼놓고 가는 꼴이 되었으니...그래도 가야지
선답자들의 산행기 읽었던 것과 그 간의 경험으로 산행을 나선다.
내장산 남창골 탐방지원센터 (06:40)
안내소에서 직진을 하면서 길을 계속 올라간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상왕봉과 백양사가는 곳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곳 남창계곡이 오늘 산행들머리이다
남창계곡은 산성골 은선동 반석동 정자동 지하골 내인골 등
여섯갈래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이가 4km에 이른다고 한다
그 계곡마다 폭포와 기암괴석을 거느리고 있어 마치 仙界에 들어선 착각을 일으킨다.
남창(南倉)이란 산성의 남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으로 입암산성에 쓸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유래된 지명이며 창고자리에는 전남대 수련원이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등산객들은 은선동계곡을 지나 갓바위로 오르나
영산기맥꾼인 나는 장성옛길로 빠져서 장성새재 지나 순창새재로 올라선다
장성새재 옛길(06:43)
탐방지원센터에 오르는 길은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도로로 올라가니
좌측에 마지막 화장실이란 표시가 보이고 잠시후에 삼거리가 나오는데
직진의 넓은길은 갓바위로 가는 넓은 길인데 난 이 길을 버리고 우측의 장성새재 옛길로 향한다.
이곳부터는 길이 좁고 자갈길이긴 하지만 호젓하여 어둠속이긴 하지만 편하다.
이정표(06:58)
어둠속에서 좌측에 산불감시카메라를 만나고...
장성새재(07:15)
전남 장성군 북하면과 전북 정읍시 임암면을 넘는 고개로 이 길은 옛 선조들이
장을 보러 가거나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정읍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로
이용하던 고개로 새재라는 이름은 ‘새의 목처럼 잘록하게 생겨서’ , ‘새도 쉬어 넘기 때문에’
‘샛길(間路)이라는 뜻’으로 새재라고 불렀다고 하며 옛날에는 이 길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막이 있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사람들이 떠나고 군사용 도로로만 이용하다가
지금은 차량 통행을 막고 숲속 탐방로만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달도 숨어 안보일 정도롤 깊은 고개란 뜻으로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와 대동방여전도 같은 고지도에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장사 방향으로 기맥길을 향한 길을 걸어간다.
오늘이 동지라 그런지 7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둡다.
좌측에 기독교인의 묘지가 보이고 이 묘지를 지나니 이제껏 온 길과는
달리 눈의 양이 많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길이 보이질 않는다.
다행히 짐승들이 많이 다닌 탓에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길을 걸어간다.
잠시후에 집 한채가 나오면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한데 이곳이 불바래기이다
불바래기 (330m:07:30)
전북 정읍시 입암면에 행정구역을 둔 곳으로 황토로 된 집 두채와 가건물이 있다
이런곳에 누가사나 싶어서 카메라로 이곳저곳을 찍는데 남자 한사람이 나와서어떻게 왔냐고 하면서 경계심을 드러낸다.
순창새재 가는 길이라고 하니까 개울을 건너서 가라고 한다
‘불바래기’는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오지마을로 전기도 안들어오는 곳에 단 한 가구 살고 있다.
불바래기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있는데, 옛날 화전을 일궈먹고 살던 시절밭을 만들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과, 가을 단풍 때면 온 산이 불에 타는 듯 붉어붙여진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화전을 일궜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불바래기 감나무
커다란 감나무에는 따지 않은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직도 하늘에 떠있는 동짓달 스무날의 하현달
불바래기에서 농막쪽으로 되돌아와서 순창새재로 향한다.
개울을 건너는데 오늘 처음으로 선답들의 시그널을 만난다.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이정목을 지나니...
건너편 산쪽에서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마 먹이를 찾는 모양이다.
음지라 그런지 눈이 발목까지 차오르고 계곡이라서 조심스럽기만 하다.
이곳부터는 아예 길이없다. 빡세게 치고 오르니 옆사면길이 나오고 잠시후에 순창새재가 나온다.
순창새재(514m:08:00)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 위치한 고개로 4년전 호남정맥길에 걸었던 고개라
왠지 반갑기만하다. 우측으로는 상왕봉 가는 길이고 직진을 하면 까치봉 가는 길이다.
까치봉을 가려면 새봉봉으로 올라서야 하는데 국공파들이 우회로 돌려놨다.
힘들게 눈길을 치고 오르느라 힘이들고 아침을 먹지않았던 탓이라 허기가 진다.
이곳에 숨 한번 돌리고 가져온 견과류에다 곶감 2개에 두유 한병을 허기를 면한다.
녹두장군 전 봉준이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잡혀 우거(牛車)에 실려 한양으로 가던 길,
다른 이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과 왜군에게 전주 전투에서 패하고 임암산성으로 몸을
숨겼다가 장성새재와 순창새재를 거쳐 순창으로 도피했다가 장군의 전(前) 부하의 밀고와
마을 사람들의 몸둥이 세례에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이곳 순창새재는 민초들의 나라를 꿈꾸며 혁명을 일으켰지만 끝내 좌절로 끝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의 한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곳으로 전봉준의
이루지 못한 恨을 새기면 순창새재를 걷는다.
호남정맥길인 상왕봉과 까치봉쪽은 산꾼들이 많이 다닌 탓에 등로가
반질반질하고 시그널이 많이 보이지만 영산기맥 오름길은 산꾼들이
전혀 다니지 않았는지 눈에 파묻혀 길은 보이질 않는다.
거기다가 탐방로가 아니니 다니지 말라는 표지판까지 서있다.
그렇다고 안갈소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오르막을 올라 능선을 치고 오르니 길은 어려풋이 보이나 바람에 눈이 몰려
능선 가운데는 눈이 무릎 위까지 올라오니 오늘길도 초반부터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능선 안부를 조금 걸어가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는 새재봉이 나온다.
새재봉(535m:08:15)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호남정맥에서
영산강 북쪽 능선으로 목포 다순금까지 이어가는 160여km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의미있는 봉우리이건만 국립공원에서 출입금지를 시켜놓아 의미가 퇴색됐다.
거기다가 선답자의 산행기에 보면 준.희님이 걸어둔 “영산기맥 분기봉”이란
아크릴 표지판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너무 크다.
날씨가 포근하다하나 잠깐 서있는 사이에 상당히 춥다.
거기다가 영산기맥 가는 길은 나무로 막아놓아 부득히 우회한다
길은 없고 산죽위에 얹혀있는 눈이 자꾸만 산꾼을 괴롭히고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선 후에 다시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암릉지대가 시작되는데 상당히 미끄럽다.
지도도 없이 장님 문고리 잡듯이 산행을 진행하는데 아무 표시도 없는
연초록 시그널이 산꾼 범여를 인도하는데... 관세음보살의 화현인가?
힘들게 치고 오르니 568봉 정상이 나타난다.
568봉(08:35)
568봉 정상에서 바라본 내장산의 모습
내장산은 신선봉(763m)을 비롯한 9개의 봉우리가 말밥굽처럼 울타리를 친 산이며
백암산(백양산)은 상왕봉(741m)을 비롯한 5개의 봉우리가 백양사를 품고있는 산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봄 도다리 가을 전어’ 또 ‘춘 마곡 추 갑사’ 를 떠 올리는 것처럼
내장산과 백암산을 두고도 예부터 ‘봄 백양 가을 내장’ , ‘산은 내장 고적은 백암’,
‘산은 내장 절은 백암’ 등등으로 회자되고 있는 산이다.
꽤나 큰 岩陵群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눈 아래에는 빙판이라 발한번
삐끗하면 능선아래가 천길 낭떠러지라서 그대로 황천길이다.
조심 또 조심하면서 걸어내려오니 산죽길이 나온다.
산죽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걷기도 힘들거니와 상당히 거추장스럽다.
삼성산 갈림길(530m:09:10)
삼성산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커다란 무덤 1기를 만나고...
곧이어 또다른 묘지를 만나면서 오르막으로 치고 오른다.
536봉(09:20)
이 무명 봉우리에서 내려서는데 눈으로 길은 보이지 않고 시그널도 없어서
길을 찾는데 애를 먹는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좌측으로 내려선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내려서니 아침에 만났던 장성새재에 도착한다.
장성새재(325m:09:45)
장성새재에서 남창골 방향으로 임도를 따라 조금 내려서다가
출입금지 표지판 뒤로 올라서서 입암산성 능선으로 올라선다.
멋진 상고대를 바라보면서 걷는데 이곳은 양지라 그런지 눈이 녹아서 아이젠에
눈이 달라 붙기 시작하니 상당히 힘이 든다... 너무 허기가 져서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치킨 4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 오르막으로 오른다.
능선에서 바라본 정읍지역의 산그리메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관리가 안되어 무너진 채 방치된 입암산성을 만난다.
입암산성(笠岩山城:651m:10:35)
시 대 : 고려
소 재 지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규 모 : 지정면적 1,308,429㎡
지정사항 : 사적 제384호
고려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노령 동쪽 약 4km 지점인 입암산(높이 654.8m)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을 감싸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여 옛날부터 전략요새지로 알려진 곳이다.
총길이 약 15㎞, 높이 3m의 이 산성은 형태가 상봉을 둘러싸듯 하였으며,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이곳 전라도에까지 쳐들어오자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가 이 성을 지키면서 큰 전과를 올린 곳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는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수축한 바 있다.
한편, 정유재란 때에 이곳 성의 별장인 윤진(尹軫)이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기도 하였다.
이후 1653년(효종 4) 장성현감 이유형(李惟馨)이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성의 축성법은 협축으로 성벽 내외가 수직에 가까우며, 넓은 계곡과 산세를 잘 이용하였다.
무너진 산성으로 올라서서 우측으로 꺽어져 산성을 타고 걸어간다.
이곳 역시 눈에 쌓인 산죽 때문에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삼한시대로 추측되고 있다.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 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 몽고에 대항할 때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이 있다.
바람의 영향으로 눈이 많은 곳은 배꼽까지 차오르니 걷기가 불편하기 그지없고
계속해서 혼자서 진행하니 러셀로 인하여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는 느낌이다
능선에서 바라본 장성지역의 모습
장성군은 전라남도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순창군과 담양군, 서쪽은 고창군과 영광군,
남쪽은 광주광역시, 북쪽은 전라북도 정읍시와 고창군에 접하고 있다. 군 전체가 대부분 산지를
이루며 영산강 최상류인 황룡강과장성호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며
그 한줄기인 북서쪽의 산줄기는 고창군과 영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장성 갈재(일명 노령(蘆嶺)에서
태청산(太淸山)으로 이어지는 북동-남서 산줄기이다. 또 하나는 순창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이루며,
노령에서 도장봉(459m)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이는 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병풍산(屛風山, 826m), 불태산(佛台山, 636m) 등을 이룬다.
영산강의 상류 지류인 황룡강이 북동~남서 방향의 구조선을 따라 흐르고, 북하천 · 약수천 ·개천 동화천
등의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흐르면서 들을 이루고 이곳에 마을이 입지한다.
노령을 중심으로 각 고속국도 및 철도의 관문이다. 금성산성과 백양사가 유명하며 홍길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장성읍 · 지원면 · 동화면 · 삼계면 등 1개 읍 10개 면을 관할한다.
지명은 산세가 깊고 성곽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지명이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에는 고시이현(古尸伊縣, 현 장성), 구사진혜현(臼斯珍兮縣, 현 진원),소비혜현(所非兮縣, 현삼계)으로
이루어진 군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시이현이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은 진원현(珍原縣)으로,
소비혜현은 삼계현(森溪縣)으로개칭되어 무진주 관할이 되었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고쳐 처음 장성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성군과 삼계현은 영광군의 속현이 되고 진원현은 나주목에 속했다. 1413년(태종 3)에 장성은 나주목의 관할이 되고, 진원은 장흥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래는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광군에 붙였다가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문헌의 「동람도」에는 장성과 진원이 분리되어 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정읍지역의 모습
멋진 소나무 서너그루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선다.
저 아래 평지는 아침에 남창골에서 출발하여 장성옛길에서 갈라진 길로 올라가는 갓바위가는
길이 보이고 오늘 처음으로 등산객의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가야할 갓바위봉과 시루봉이 보이고...
뒤돌아보니 내가 걸어왔던 길과 내장산이 보이고...
다시 산죽길을 만나고 잠시후에 아무런 표식도 없는 입암산이 나온다
입암산(笠岩山:655m:10:55)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에 있는 입암산성의 봉우리로산 정상에는 잡목만
무성하고 아무런 표식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다행히 한 현우님께서 표지판을 달아놓아 입암산입을 알 수 있을 뿐 내장산국립공원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출입금지 된 곳이라 그런지 명성에 비해 초라하다.
내장산국립공원의 일부로 국립공원의 서북쪽인 장성군에 있으며 笠岩山城
은 삼한시대에 축성되었으며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던 곳이었고
정유왜란때 왜구의 침입에 저항하였으며 조선말 동학농민 운동시 녹두장군으로 불리던
정봉준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후 잠시 이곳에 몸을 숨겼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입암산하면 갓바위봉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라 그런지 갓바위봉은 등산객이 많은데
이곳은 나처럼 맛이 간(?) 기맥꾼이나 찾지... 아무도 찾지않은 버림받은 산이다.
입암산에서 갓바위봉 가는 등산로의 궤적
북서로 향하던 입암산성이 서쪽으로 꺾이고 산성 축대가 열린 통로가 있다.
여기서 북쪽 방향은 한우재를 통해 오봉산으로 갈 수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오봉산이란다.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이다
입암산을 내려서는데 산죽길이 나오고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통제구역이다.
주위의 국공파가 있는지 살핀 다음에 재빨리 목책을 넘어선다 ... 후~우
산 타는게 뭔 죄인이라고 맨날 가슴 조이며 산을 타야 한단 말인가?
최근 순찰일이 12월 21일이라 그렀다면 어제잖아... 깜짝이야
목책을 넘어 태연하게 등로를 들어서니 좌측 아래 남창계곡에서
등산객이 많이 올라오고 우측으로는 입암면 만화재 내려가는 길이 있다.
입암산성 북문(540m:11:10)
남창계곡에서 등산객들이 계속 올라온다.
내장산 국립공원은 전북 정읍의 내장산과 전남 장성의 백암산과 입암산
3개의 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암사무소가 장성의 백암산과 입암산을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내장산 국립공원(81,715㎢)은 20개 국립공원 중 8번 째 지정된 공원이지만,
그 중 남창지구의 입암산은 내장산과 백암산에 비해 이름이 덜 나있던 곳이다
특히, 입암산은 중부 이북의 등산인들에게는 낯설지만,
그나마 호남 등산인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명성이 자자해
겨울철이면 내장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설경으로 인기를 끄는 산이라고 한다
갓바위봉으로 향하는 등로 옆에는 산성의 흔적이 보이고...
당겨본 갓바위봉의 모습
갓바위봉 오르기 전 철계단 옆에는 거북바위의 안내판이 있고...
거북바위(11:20)
멋진 거북바위를 지나 우측으로 오르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면서 주위가 다 보인다.
잠시 후에 가야할 시루봉이 손에 잡힐듯이 다가온다
갓바위봉(631m:11:25)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읍쪽에서 바라봤을 때 갓(草笠)을 쓴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갓바위라
부르며 입암산(笠岩山, 654m)이란 이름은 이 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 지도에는 이곳을 입암산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입암산 정상과 갓바위를 잇는 능선상에 조선 효종때 개축한 입암산성이 있다.
전국에서 단풍으로 가장 유명한 산인 내장산, 백암산 능선 바로 서쪽에 위치한나지막한 산으로 내장산,
백암산의 위세 및 유명세에 덮여 이름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산이다.
전남・북을 잇는 고속도・철도・국도가 모두 산 서쪽 갈재협곡을 통해 있는 교통의 요충지
인 입암산 주위에 축성한 입암산성은 총연장 5,208m의 석성이다. 남쪽을 제외한 3면이
급경사를 이룬 천혜의 요새지로 고려때는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하고, 정유재란때는
윤진 장군이 왜장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 밖에 산성의 서쪽 정상에 있는 갓바위와 마당바위, 베틀바위, 상여바위, 족두리바위, 등이 있다
가까이서 바라본 갓바위의 모습
갓바위 정상에 오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지나온 내장산 구간과
발 아래로는 호남고속도로와 호남선 철도, 그리고 멀리 변산반도가 아련히 보인다.
그러나 오늘 구간에는 유명한 산치고는 변변찮은 이정석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이곳 역시 마찬가치로 겨우 표지판 하나 달랑 있으니... 명성에 비해 홀대받는 산이다
갓바위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정읍의 모습
전망대 아래로는 꽤나 큰 입암저수지(전북 정읍시 소재)가 보이고 호남고속도로와 철도가
보이며 저 산너머로는 변산반도 새만금 간척지는 흐린 시야로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온 등산객에게 부탁하여 오늘 유일하게 사진 한장을 남긴다.
이곳 갓바위에는 산악회에서 온 등산객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수도권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지역에서는 유명한 산행코스란다.
쥐똥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잠시후에 가야할 시루봉의 모습
잠시후에 내가 걸어야 할 등산코스의 궤적
갓바위에서 주위를 두루두루 감상하고 다시 철계단을 내려와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가야할 방장산도 시원스레 조망되고...
철계단을 내려서니 등산객들이 계속해서 올라온다.
잠시후에 커다란 암릉이 나오는데 그 아래 커다란 굴이 있어 비박장소로는 끝내 주겠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멋진 암릉이 나타나고 편안 등로가 펼쳐진다
산죽길의 편안한 걸음으로 등로는 계속되고...
은선골 갈림길(11:50)
이정표가 가리키는 ←주차장 3.8km 산성 울타리 바깥쪽의 은선골로 해서 남창주차장으로 가는 길이다.
현 지도에는 표기가 없지만 옛지도에는 산성마을 안쪽은 城內里, 은선골은 隱仙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은선골 주차장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가야 하는데 이곳도 출입금지 구간이다.
그렇다고 목적산행을 하는 사람이 안 갈수는 없잖은가?
다행히 아침에 지나온 순창새재 구간과는 달리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있어서
러셀을 해야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어서 그저 고맙기만 하다.
쓰러진 소나무들이 즐비하고 눈의 양이 많아지면서 자꾸만 시간이 지체된다
가야할 시루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르먼 오를수록 눈의 양이 많아지고 산죽과 쓰러진 나무와 잡목들이 태클을 건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린다... 혹 국공파가 아닌지 하고 숨을 죽이며 동태를 살피니 등산객이다.
자기들은 갓바위봉에 사람들이 많아서 번잡함이 싫어서 온 사람이지 기맥길은 모른단다.
바로 아래인 정읍 입암면 사람이라면서 끓인 라면과 막걸리 한잔을 권하는데 어찌나 반가운지
염치 불구하고 얼른 받아서 먹는데 그야말로 꿀맛이다
그 때 정말 허기가 져서 고생을 했는데 정말 잘 먹었습니다.
이 분들과 헤어져 10여m 정도를 지나니 장성갈재로 가는 기맥길은
아무도 다닌 흔적이 없고 산죽에다가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걷기가 힘이든다.
갈림길(12:25)
이곳은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곳이다.
오늘 지도도 없는 범여는 아주 신경을 바짝 쓴다. 여태껏 걸어온 길을
경험상 동물적인 감각으로 기맥길을 이어가는데 내가 생각해도 기특하다
우측길로 꺽어지자마자 산죽위에 쌓인 눈이 산꾼의 길을 막는다.
이곳은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고 길은 없다. 그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스틱으로 눈을 가름하며 길을 걷는데 산 아래에는 호남고속도로가 보인다
능선 등로에서 바라본 호남고속도로와 장성군 북이면의 모습
어렴풋이 등로가 보이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도 만난다.
시루봉(649m:12:35)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떡시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시루봉이라고 부르는데 정상에는
잡목과 잡풀만 우거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루봉을 중심으로 연속해서 암릉이 계속 이어진다
지나온 시루봉의 모습
시루봉을 지나니 다시 뾰족하게 생긴 3개의 봉우리를 만나는데 입암면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어른봉, 애기봉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어느게 어른봉인지 모르겠다
뾰족한 첫번째 봉우리에서 바라본 가야할 방장산의 모습
첫번째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우회를 하는데 경사도가 70도 정도의 급경사에다
눈길이라 엄청나게 미끄럽다... 스틱을 접고 나무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급경사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겨울산행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한참을 내려온 후에 좌측으로 꺽어져 옆사면길을 가는데 연녹색 시그널이 계속 안내를 한다.
반갑습니다... 기맥, 지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무원마을님의 시그널
한참을 내려선 다음에 다시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올라가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뾰족하게 생긴 3번째 봉우리에서 다시 능선을 타고 내려선다.
이곳은 양지라 그런지 눈이 많이 녹아있다
또 다른 멋진 암릉을 만나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내려선다
예전에 집터의 흔적인듯한 돌담을 만나 편안한 길로 내려선다.
관리가 안된 남평문씨 묘비를 지나 계속 내려서니...
또다른 집터의 흔적인듯한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아마 예전에 마을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나온 갓바위와 시루봉을 뒤돌아보면서 장성갈재로 향한다
잠시후 이정표를 만나면서 갈재로 내려선다.
갈재(蘆嶺 271m:13:25)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전북 정읍시 입암면을 넘는 고개로
옛길 삼남대로의 ‘갈재’가 이곳으로 1918년 발행 지도에는
이 길이 장성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였다고 한다.
이곳은 예부터 갈대가 많은 곳이라 ‘갈재’로 불렸건만, 현 지도에는
노령으로 표기되어 있어 혹자는 일제가 갈재를 노령(갈대 노(蘆))으로
왜곡했다하나(월간山 2005.11월호), 일제시대 이전인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모두 노령(蘆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 아래로 호남고속도로, 호남고속전철과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고개를 넘어 장성쪽 방향으로 내려오니 이정표, 갈재 안내판과 사각정자가 있다.
갈재의 안내판
노령의 전설은 조선시대가 그 시대적 배경이다. 남도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한 도령이 있었다. 도령은 장성과 정읍의 경계선 부근의 고개에 와서 날이 저물어 주막에
묵었다. 그 주막에는 노화(蘆花:갈대 노, 꽃화)라는 딸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도령은 노화의 아리따움에 빠져 주막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사흘을 머물며 노화와 정분을
쌓았고 급기야 사흘밤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반드시 찾으러 오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꿈같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른 아침에 떠나는 도령을 노화는 주먹밥을 지어서 싸주며 꼭 돌아오기를 당부했고 도령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양으로 향했다. 도령은 그해 과거에서 급제했고 정읍과는
다른 방향의 수령이 되어 부임했다. 그러면서 도령은 노화와의 인연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도령은 전라감사가 되어 정읍을 지나게 되었고 고개에 이르렀을
즈음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화를 떠올렸다. 주막에 멈추게 한 후에 주막을 살펴 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주막이었고 퇴락해서 무너져가고 있었다. 인근을 뒤져서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겨우 노화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도령이 떠나간 후 노화는 한양간 도령을 기다리며 10년이
지난 후부터는 점점 몸이 야위어 가면서 병색이 돌다가 5년쯤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그녀의 묘가 고개 위 산에 있다고 했다. 감사가 그녀의 묘라는 곳에 갔을 때 노화의 묘 위에는
갈대 한 송이가 피어 있었고 훗날 산 정상엔 갈대만 무성하게 되었다.
그 뒤로 이 고개를 갈재(갈대고개)라 했고 혹은 노령이라 했다고 한다
벙커봉(13:30)
갈재에서 5분 정도를 치고 올라오니 넓은 공터에 폐헬기장이 자리를 잡고 있고
공터 아래에는 군부대의 벙커가 있다. 지나온 시루봉과 갓바위가 보이가 가야할 방장산도 보인다.
벙커봉을 우회하여 능선을 타고 장성갈재로 내려선다.
호남고속도로 장성쪽의 모습
갓바위봉과 시루봉을 또한번 바라보고 등로로 내려선다.
군부대 시설물을 지나니...
송전탑을 만나는데 이상하게도 번호가 없다.
또다른 폐헬기장을 지나니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좌측에 측백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무덤들을 보면서 장성갈재로 내려선다.
무덤을 지나니 출입금지 목책이 보이고 주위를 살핀 다음에 쨉싸게 목책을 넘어선다
출입금지판
또 다른 출입금지 표지판을 지나니...
조국통일 기원비가 나타난다.
김 대중 前 대통령과 김 정일이 서명된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표시석이 있는데 이곳이 통일공원으로 명명된 곳이다
통일공원에 설치된 수준점
통일공원 내에 있는 통합 기준점
통일 공원의 모습
장성갈재(13:55)
전남 장성군 북이면과 전북 정읍시 입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일제시대에 착공이 되고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개통이 되었다 한다.
노령이 장성갈재로 불리웠는데 이 도로가 생기면서 지명을 거기서
따왔다고 하는데 원래 갈재 아래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곳도 옛 영화를 잃어가고 있다.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의 낮은 능선인 노령부터 장성갈재까지가
전라남도에서 북으로 가는 대표적인 고개가 되는데
국도1호선과 호남선 철도,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여기를 통과한다.
이 고개 남쪽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이고 북쪽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이다.
전남에는 목란마을이, 전북에는 군령마을이 고개 첫 마을이며
모두 예전에는 주막거리가 있었던 마을인데 옛날 과거길 가는 선비들로부터
소금장수 소장수 새우젓장수 등 수많은 민초들의 발길이 다다렀던 곳이다.
갈재를 한자로 갈대 노(蘆)자를 써 노령(蘆嶺)으로 했다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북이면 목란마을에 갈애바위가 있는데 역시 갈재에서 옮겨진 이름이다.
갈재 남쪽 목란마을 아래 원덕리 원덕제(저수지) 북쪽에 암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있다.
이 암봉을 바라보면 눈, 코, 입이 확연한 미인의 모습인데 조선 중엽 이전에는
처용암이라고 불렀으나, 천하일색이었던 갈애 전설이 얽혀있다.
장성갈재 정읍쪽의 모습
갈재는 전라좌도는 물론 전라우도 등 크고 작은 한양길이 모이는 주요 통로였다.
재를 넘으면 전북 전주 길목인 정읍이 펼쳐지는데 장성댐 밑 청암역에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고개밑 원덕리 미륵원에서 쉬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넘어야 했다.
고개는 산적들 소굴이었다.1520년 중종 때 군사까지 파견될 정도였다.
이 미륵원 인근 500m쯤에 주막이 7개나 된 주막촌 ‘목란’이 있었다.
장사꾼이나 과거 지망생들이 목란에서 투전판이나 술 따르는
여인의 유혹에 걸려 인생을 망친 일이 많았다는 전설이 있다.
목란과 미륵불이 있었던 원덕주막 사이 동쪽 산허리에는
처용암(處容岩)이란 미인 바위가 보이는데 짙은 두 눈썹 형상이 마치 아리따운 여인과 같다.
이곳 주막에서 태어난 ‘갈아’란 여인은 뭇사내들의 신세를 망쳐 어떤 장군의 칼에 찔려죽었다고 한다.
이후로 바위는 애꾸눈이 되고 인근 마을에서 애꾸눈 미인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과 관련, 정비석씨의 ‘기생열전’에서는 조선시대 성종때의 기생 ‘노화’가 나온다.
미색이 뛰어나 그의 치마폭에서 장성 현감 셋이 파직된다.
파견된 사헌부 관원마저 노화의 유혹에 걸려 팔뚝에 정표를 해준다.
다음날 관헌에게 붙들려 온 노화는 그의 팔뚝을 보여주며 노래한다.
“노화의 이 팔뚝에 뉘 이름 새겼는고, 고운 살에 먹이 베어 글자도 선명코나.”
결국 이 기생은 관원의 첩으로 들어앉앗다고 한다.
여기에서 산행을 접다.
원래 오늘의 산행은 양고살재까지 가기로 했으나 지도도 없는데다가
아침을 굶은데다가 지금까지 먹는것도 변변찮아서 체력이 고갈되어
앞으로 4시간정도를 더 걸을 자신이 없어서 여기서 산행을 종료한다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하는데 바로 앞에 트럭 한대가 시동을 건다.
얼른 쫒아가서 어딜가냐고 물으면서 백양사역까지 좀 태워 달라고 하니
자기는 정읍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반대 방향인 백양사역까 태워 줄테니
타라고 한다... 이런 횡재가 있나? 얼른 트럭에 올라타서 15분정도 지나니
백양사역에 도착을 하여 인사도 하기전에 다시 정읍쪽으로 가버린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백양사역(14:30)
백양사역에 도착하여 기차표를 예매하니 16:30분 열차표가 한장 있다고 하여
표를 예매하고 2시간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역 앞에 식당에 들려서
김치찌게에다가 막걸리 한병을 마시고 나니 살 것만 같다.
식당에 손님은 달랑 나혼자라 밥을먹고 화장실에서 온수가 나오길래
간단하게 몸을 닦은 다음에 장비를 정리하고 테이블에 오니 방바닥이
따뜻하니 잠이 쏟아진다... 쥔장 아줌마 왈 억쎈 전라도 사투리로
‘솔찬이 피곤한갑소이, 어째 혼자서 위험하게 산에 다닌 당가요’ 하면서
이 시간에 손님이 없은께로 눈 좀 부치시요 하여 1시간정도를 잠을 청한다.
다시 일어나 미안하여 막걸리 한 병을 더마시고 역으로 향한다.
남도의 푸근한 인심을 맛보면서... 사람사는 맛을 느끼고 갑니다.
백양사발 영등포행 열차표
김치찌게에다가 맛있게 막걸리 한통을 마시니 이 세상 모두 내것처럼 보인다.
백양사역 열차 시간표
백양사역의 지명 유래
서울행 열차가 들어온다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고 20시 10분경 영등포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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