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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영산기맥(終)

영산기맥 제5구간 - 밀재에서 사간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4. 3. 17.

 

☞ 산행일자:  2014년 3월 16일

☞ 산행날씨:  맑고 여름날씨만큼 엄청나게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2km + 어프로치 1.5km / 8시간 5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밀재-헬기장(310.5봉)-금산고개-258봉-350봉-장군봉-노루목-455봉-해불암갈림길

                  108계단-33통천계단-불갑산(연실봉)-부처바위-구수재-용봉-용천봉-모악산

                  한우재-노은재-275봉-215봉-화산골재-218봉-161봉-지경재-김철숭모비

                  서해안 고속도로-구봉고개-금산고개-상광암고개-275봉-금산-칡재-192봉-사간고개

소 재 지:  전남 영광군 묘량면, 불갑면, 군남면 /함평군  해보면, 신광면

 

지난주 대간 한 구간을 끝내고 영산기맥 5구간을 나서려는데 즐거움보다 걱정이 앞선다.지난번 구간에 비를 쫄딱맞고 안경까지 잊어버리며 잡목과 가시에 개고생을 했는데이번 구간은 지난번보다 훨씬 심하다는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초반부터 기가 질린다.

그렇다고 9기맥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안 갈수도 없고하여 토욜이 부처님이입멸하신 열반재일이라 절에가서 법회에 참석하고 사무실에 와서 잔무를 처리한다음에 영광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신선님 블로그 인용)

토욜 오전

은사스님이 계시는 사찰에 들려 마침 오늘이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열반재일이라 법회에

참석하고 점심 공양을 한 다음에 사무실에 돌아와서 간단한 잔무를 마친 다음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서울 강남고속버스 터미널(18:00)

터미널에 도착히니 30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비빔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는다

서울발 → 영광행 고속버스표

고속버스를 탔는데 40인승 고속버스에 15명정도만 타고 영광으로 향한다

영광고속버스 터미널(22:00)

고속버스 터미널을 빠져나와 인터넷에서 검색한 정보를 가지고 터미널에서 나와

우측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태정호텔 사우나로 향해 12분정도를 걸어간다

태정호텔 사우나(22:12)

말이 호텔이지 시설은 여관 수준인데 이곳 사우나는 찜질방식으로 운영되는게 아니고

목욕은 2층에서 하고 탈의실 락카에 물건을 보관한 다음 밖으로 나와 옆의 통로 엘리베이트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면 수면실이 있는데 각자 한명씩 들어갈 수 있는 토굴식 수면실에

전기 장판을 깔아놓고 두꺼운 이불까지 있어서 참으로 편안하게 수면을 취했다.

요금은 초반에 13,000원을 받는데 퇴실하면서 옷을 반납하니 5,000원을 돌려준다.

사우나에서 수건을 많이 가져가는 모양이다.

수건에다가 이런 문구를 적어놨는데 쥔장의 기발한 아이디어도

웃음이 나오지만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 아쉽다 

태정호텔 안내판

어제 저녁 11시경에 수면실에 들었는데 너무 편하게 넔놓고 잠을 자는 바람에 원래

계획보다 1시간가량 늦은 05시 20분에 일어나 샤워에다 면도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사우나를 나와서 영광 터미널로 나오는데 이곳 영광은 지난번 4번이나 묶었던 장성보다

훨씬 큰 모양인지 24시간 운영하는 깁밥집이 3군데나 있다

아침식사(05:35)

홀로 산행을 할 때는 아침식사가 가장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일반산행과는 달리 내려와서 갈아입을 옷가지 등을 모두 질머지고

가야하기에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는 아침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하는게

가장 좋기 때문에...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탄 다음에 오늘 들머리인 밀재로 향한다

밀재(蟬峙:180m:06:10)

전남 영광군 묘량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형도에는

매미‘선(蟬)’자를 써서 선치(蟬峙)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며 군 경계석으로

영광라이온스 클럽에서 설치한 사자상이 2개가 고개 정상을 지키고 있는데

라이온스클럽 회원인 범여는 사자상이 반갑기만 하다

고개 정상에는 버스 정류장과 좌측 도로 아래에 밀재산장이란 식당이 있고

함평쪽에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해보면쪽인 문장리에는 국군통합병원이 있다.

이곳 문장리는 예전에는 전남에서 5일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란다.

 

22번 국도가 지나가는 밀재는 고개 아래로 새로 뚫린 밀재터널로 인해

예전의 영화를 잊어 버린채 나처럼 맛이간 산꾼들이나 찾는 고개로 전락했다 

밀재 버스 정류장

택시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에서 스틱을 펴고 헤드렌턴을 켠다.

아직도 주위는 어둡고 갑자기 짙은 안개로 인해 사물이 분간되지 않는다.

지난번 이곳에서 안경을 잊어버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 기억을 더듬어

5분정도 살피지만 안경을 찾지 못하고 산행을 준비한다.

밀재 정상에 서있는 라이온스의 상징인 사자상

버스 정류장에서 영광쪽으로 와서 ‘전망 좋은곳’ 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오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06:20)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서 등로로 들어서니...

‘탐진최씨세장산’ 비석이 나오고 조금 더 오르니 봉분이 엄청나게 큰 무덤이 나온다. 

탐진최씨 묘지를 가로질로 올라간다.

어르신은 女福도 많으셔... 같은 성씨의 부인을 2명이나 거느리시고...

310.5봉(06:30)

탐진최씨 묘지를 지나 10분을 빡세게 치고 오르니 넓은 공터의 헬기장이

나오는데 아마 이곳이 전망좋은가?... 지도에는 이곳에 삼각점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어 한참을 찾았는데도 찾을길이 없어서 포기한다.

이곳은 아직 이슬이 내릴만큼 춥고 손이 시리다.

다시 되돌아 내려와서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초반부터 잡목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전망좋은 곳?

글쎄요 짙은 안개로 지금은 아니올씨다

이젠 날씨가 밝아 헤드렌턴을 벗어 베낭에 넣고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을 만난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읽고 단단히 준비했지만 초반부터 잡목이 장난이 아니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함평이씨 묘지 1기가 나오고...

咸平李公 묘지를 지나니...

함평이씨 세장산비가 나오고...

바로 아래 경고판이 서있고 경고판을 내려서니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금산고개(06:45)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에서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내려온 길에
咸平李氏世葬山碑있으며 산꾼들에는 용천사 갈림길로 많이 알려진 고개이다
고개의 지명은 고개 아래에 있는 금계리 금산마을의 지명을 따온 듯 하다
이곳에서 많은 기맥산꾼들이 등로를 포기하고 좌측 용문사쪽 도로를 따라 장군봉까지
많이 올라갔는데 그래도 명색이 정통산꾼을 자처하는 범여가 그런 편법은 쓰고 싶지않아
고생길이 훤한 등로로 가기위해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초입에 힘든 가시나무와 사투를 벌이면서 올라서니 산에는 어디에 쓰인지는 몰라도 플라스틱 
폐기물을 산에 함부로 버려져 있어 보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조금을 오르니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그리 험하지 않다.
허물어진 무명묘지 한기가 나오고 곧이어 봉우리가 나온다.
무명봉(260m:06:55)
봉우리 정상에 오르면서 다시 등로는 사라지고 이곳에서 살짝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으로
내려가는데 가시나무가 자꾸만 베낭을 물어 뜯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다 .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능선 좌측으로는 한창 간벌 작업중이다.
잡목과 가시나무를 피하니 이젠 산죽이 태클을 건다
산죽을 헤치고 나가다가 발아래 누워있는 고사목을 보지 못해 초반에 고사목에 걸려
그냥 꼬꾸라지는데 내가봐도 맛이간 것 같다.뭣이 아쉬워 이 짓거리를 하는지 ㅋㅋㅋ.
등로에서 바라본 용문사와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 금산마을의 모습
금산마을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에 이천서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신기지(新基趾) 마을을 이루었고
그 후 순조 때 전주이씨, 진주정씨, 파평윤씨가 이주하여 살고 있다
1789년의 호구 총수지명에는 신계리(新溪里)로 되어 있고 1891년(광서 7년 고종28년) 이 마을에 거주한
서복남 소유의 호적에 의하면 "신성리(新成里)"라 했는데 1912년 행정구역 명에는 신성(申成)으로 표기했다.
대체적으로 1912년 표기는 "新"을 "申"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같은 마을이다 기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금계(金鷄)"라고 해야 옳은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마을 앞 시냇물이 맑은 것을 보고 "금계(金溪)"라 칭하였다.
산행 초반에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니 어느새 해는 구름사이로 中天까지 올라와 버렸다.
무명봉 정상에 올라서서 좌측으로 꺽어져 안부 능선을 걷는다.

금산고개에서 장군봉까지  오르는 포장도로가 보인다

안부 능선을 오르니 암릉구간이 보이고 잠시후에  육각정이 보인다.
육각정(07:30)
이곳에서 좌측으로 용문사에서 올라오는 포장도로와 만난다.
육각정을 지나 직진을 하니 이동통신 중계탑이 나온다.
중계탑을 끼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능선으로 올라선다.
kt 해보2 이동통신 중계탑
중계기지로 올라서니 넓은 공터인 폐헬기장이 나오고 이곳부터는
좋은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장군봉으로 향한다.
아침에 힘들게 걸었던 길을 보상하려는지 길은 무지좋다.
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지나니 장군봉이 나오고...
장군봉(447m:07:35)
노루목(439m:07:37)
노루목 정상에는 군부대 통신시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직진하여 연실봉으로 향한다.
이정표(07:39)
이정표 좌측의 위험한 길이 표시된계단으로 오른다
이곳의 암릉은 마치 진안 마이산의 암릉처럼 시멘트에 자갈을 버무린듯한
타포니(taffoni)현상의 암릉으로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총알을 맞은듯한 모습이다. 
멋진 암릉구간을 따라서 위험한 구간을 지나가는데 맥산꾼으로서 그리 어렵다는 생각은 안든다.
능선에서 바라본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의 모습
조금전에 지나온 장군봉과 노루목의 모습
잠시후에 가야할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이 보이고...
능선에서 바라본 해불암(海佛庵)
해불암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1번지에 위치하며 불갑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서 정확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그 경치가 뛰어나며 옛부터 호남지역의 참선 수행  도량으로서 이름난 4곳의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혀왔다.
백제말엽 ~ 고려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말 각진국사가 불갑사에 주석하시면서 불갑산내에 31암자가
형성 되었는데 해불암도 이 가운데하나이며 불갑사 5대암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해불암은 역대로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였으며, 정유재란때 전소 되었으나 그  후
법릉선사의 중창과 연화 인욱 대선사의
중창으로 가람의 면모를 되찾았다. 이 사실은 백암 성총 스님의 모악산 해불암기(한국불교전서 제8권 476쪽)에 자세히 실려있다.
그 후 1741년경의 채은선사의 중수를 거쳐 1870년 설두대사의 중수와 자운천우선사의 중수를 거쳐 가람의 빛을 이어내려 왔으나
6.25동란시 전소 되어 버리고 해불암에 모셔져 있던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과 지장 시왕도, 칠성탱화, 신중탱화 등이 당시
불갑사의 포교당인 영광읍 원각사로 옮겨 모셔져서 현재까지 봉안되어 있다 

해불암에는 설두대사의 중수시에 굉장히 늙은 차나무가 고사되어 있었는데
설두대사의 중수로 다시 흥성하게 되자 차나무에 새 잎이 돋았다고 한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불갑사가 흥성하면 차나무에 새 잎이 돋고 불갑사가 쇄폐되면
차나무가 다시 고사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베어져 없어져 버려서 아쉬운 마음 금할길 없다.
해불암에서는 연화 인욱 대선사와 그 제자인 구련 선하, 구화 처열, 구용 도인등이 머물며 수행하였고
조선조 후기와 구한말 시대에는 설두대사의 주석이후 금화 유성, 학명 계종 스님들이 선풍을 드날렸으니
그 도향이 호남지역을 가득 채웠었다.
현재 대웅전 1동, 요사 2동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능선 우측 아래로 내려다보니 불갑사가 아련히 보인다.
백양사의 말사인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과 만세루, 향로전, 팔상전, 명부전, 일광당,
칠성각, 일광당, 범종각, 세심정, 천왕문 등.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보물 제830호)은 서쪽으로 돌아앉았다.
서방정토를 그리는 것일까.

아니면 마라난타가 서해를 건너 백제 땅을 밟은 것을 기리기 위해서일까. 다른 사찰과 달리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약사여래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모신 불상배치도 특이하다.

불갑사는 창건 시기는 4세기 말 또는 5세기 말로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백제 때 창건 이후 고려 후기에 크게 융성해

승려 수백 명이 머물고 절 땅이 10리 밖까지 미쳤다고 한다. 지금도 옛 영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절의 규모가 크다.

요즘은 9월 중순에서 말에 걸친 꽃무릇 개화기에 집중적으로 많은 인파가 찾지만 동백골의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는

이른 봄이나 단풍이 화려한 늦가을에 찾아도 좋은 곳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불갑사 대웅전(보물 제830호)

불갑산(516m)기슭에 자리잡은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절이름을 불갑사라 하였다고 하는 설과 백제 무왕(600~640) 때

행은선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는데  문화유적 답사 11選으로 선정된 사찰이다 

 

불갑사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러운 돌계단을 올라 처음 마주하게되는 천왕문 안에는 신라

진흥왕때 연기조사가 목각하고 고종 1년에설두선사가 불갑사 를 중수하면서 폐사된

전북 흥덕연기사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정면과

측면 모두 가운데 칸의 세짝 문을 연화문과 국화문으로 장식했고 좌우칸에는

소슬 빗살무늬로 처리하여 분위기가 매우 화사하다.

 

불갑사 안에는 만세루, 부전, 일광당 그리고 요사채가 있고, 뒤에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참식나무 군락이 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활엽수로 10 월이나 11월에 암꽃과 수꽃이 각각 루에서 피며
다음해 10월쯤에 열매가 붉게 익어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수변에 해불암,
수도암, 내산서원, 불갑저수지주변 공원. 원불교 성지, 돔배섬 등이 있다.
불갑산 지도

이땅에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영광(靈光)의 불갑사(佛甲寺)였다.

법성포는 이땅에 비쳐지는 광영(光靈)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고,

이 영광(靈光)을 불갑사에 공손히 모셨다.

백제의 불교가 정확히는 고구려보다 12년이 늦었지만 불교문화가

번성한 신라보다 144년이나 빠른 시점이였다.

이렇게해서 백제불교는 이땅에 뿌리를 내렸다.

 

산문의 표석엔 모악산불갑사(母岳山佛甲寺)였다.

처음엔 모악산이 어머니의 품으로 불갑사를 보듬었지만

어느새 그 어머니의 산을 부처님의 품으로 품은 것이 아닐까?

불갑산은 부처님이 품은 어머니의 산이였다.

 

언제부터인가 불갑사 일원에 상사화(相思花)를 심기 시작하였다.

꽃말엔 애틋한 전설이 서려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불갑사의 꽃무릇(석산화)

꽃무릇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붉은 상사화로 알려져 있는데

꽃무릇과 상사화와 같이 수선화과에 속하지만 전혀 다른 꽃이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피고 잎이 떨어진 뒤에 7~8월에 노란색 꽃이 핀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므로 상사화란 이름이 붙었다.

 

꽃무릇도 상사화처럼 잎과 꽃을 동시에 볼 수 없지만 꽃무릇은 꽃이 먼저 9~10월에 피고 꽃이 진 뒤
잎이난 뒤 겨울을 지나고 5월경에 떨어진다. 그리고 꽃 색깔도 붉은 색이다.
꽃무릇은 꽃이 피는 무릇이란 뜻이며 무릇은 백합과의 야생화다. 물론 꽃이 피지만 꽃이 작고 특색이 없다.
무릇과 매한가지로 꽃무릇도 백합 뿌리와 비슷한 구근이 있어(학술적으로 비늘줄기라 부른다 한다)
꽃이 화려한 꽃무릇을 그리 부르게 된 것이다. 꽃무릇  군락지는 이곳 불갑산의 좌우에 있는 불갑사와 용천사
그리고 고창 선운사가 유명하다
(꽃무릇 / 상사화: 조은산님 블로그에서 펌)
암릉구간을 지나니 마치 백두대간 석병산 구간에서 만난
일월문(日月門)처렴 생긴 멋진 암릉을 만난다.
조금전에 헤어졌던 위험한 길과 안전한 길을 다시 만나는 이정표가 나오고...
커다란 암릉을 만나 우측으로 우회하니...

타포니(taffoni)현상의 암릉 

해불암 갈림길(07:50)
편안한 길을 따라 올라서니 데크목 계단이 나오는데 108계단이라...
세속의 모든 번뇌를 털어버리고 산으로 오르라는 뜻인가?
불갑산 정상으로 오르는 108계단
연실봉 오르는 108계단을 지나니 통천계단 33개가 나오니 계단은 총141개이다
108 번뇌를 끊으면  도리천으로 가는 지름길인가? 수행에는 지름길이 없는데...
통천계단
도리천(忉利天 )은 산스크리트 Trāyastriṃśa의 음역으로 의역해 33천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수미산(須彌山)의 꼭대기에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는 사방에 각 8천성(八天城)이 있으며, 중앙에는 제석천(帝釋天)이

머무는 선견성(善見城)이 있기 때문에 합쳐서 모두 33성이 된다.

 

그러므로 33천이라고 한다. 이곳의 천인(天人)들은 신장이 1유순(由旬)이고, 수명은

1,000세이며, 남녀의 구별이 있어서 신체가 서로 접근하면 음기와 양기가 만나서 아이가 태어난다.

처음 태어날 때 인간의 6세 된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며, 저절로 옷이 입혀진다고 한다.

이곳에는 뛰어난 누각·동산·연못·난간 등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한다.

33천은 6재일(六齋日:매달 8·14·15·23·29·30일)마다 성밖에 있는 선법당(善法堂)에

모여서 법다운 일과 법답지 않은 일을 서로 논의한다.

 

이때에는 지상에 있는 중생들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함께 다룬다 하여 6재일에는

특히 계율을 잘 지키고 하루 한 끼만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제석천이 머무는 곳으로서의 도리천은 원래 인도에 있던 것을 불교에서 취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摩耶) 부인이 죽은 뒤에 이곳에 다시 태어났으며,

석가모니는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3개월 동안 설법했다고 한다.

연실봉으로 오르는 통천(通天 33계단)

연실봉(蓮實峰:519:07:55)

전남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연실봉은 불갑산의 주봉으로서  산 정상의 형상이 연꽃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데서 이름하였으며 주변 산들이 연꽃잎처럼 감싸고 있어서

산 전체가 연화형국을 하고 있는 영산(靈山)으로서 영광의 정기가

이곳에서부터 발원하고 있단다

 

불갑산은 호남정맥 서남쪽 끄트머리에서 갈라진 영산기맥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천년고찰 불갑사를 품고 있어 더욱 이름이 알려진 산이다.

본래 이름은 모악산. 산세가 부드러워 ‘산들의 어머니’라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불갑산으로 명패가 바뀌었다.

이는 산이 품은 불갑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백제 때 창건한 고찰 불갑사를 품고 있고 낮은 높이에도 빼어난 조망으로 이름난 산이다
남북으로 줄을 선 주능선에서는 전망이 트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정상인 연실봉 아래 있는 해불암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는 장관이다
일출은 경주 토함산, 낙조는 영광 불갑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갑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유명하다고 한다.
연실봉 정상 삼각점(나주21 1984 재설)

영광의 진산이라 불리는 이곳 불갑산은 멀리서 보이는 산형은 마치

노서하전(老鼠下田)이라 하여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오는 형세와도 같다고 한다.

원래는 아늑한 산의 형상이 어머니와 같아서 '산들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모악산이라고 불렀는데,

백제시대에 불교의 '불(佛)'자와 육십갑자의 으뜸인 '갑(甲)'자를 딴 불갑사가 지어지면서

산이름도 불갑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아늑하며, 참식나무와 상사초 같은 희귀식물들이 자생군락을 이루고 있다.

 

6·25때 이 산은 빨치산의 본거지로 많은 양민이 토벌작전에 희생된 아픈 역사를 지닌 무대이다.
인민군 전남 유격사령부는 한때 광주, 노령, 유치, 보성, 불갑 지구 등 5개의 지구대로 편성하여
활동했는데 이곳 불갑산은 주로 노령지구와 연계하여 작전을 펼치곤했다.
이때 이 주변마을의 선량한 양민 5,6 백명이 학살당하여 규명을 해야할 역사적인 소명을 간직한 산이다.
육군 전사를 보면 1951년 2월20일 실시된 대규모 작전으로 전남의 지구사령부에
비해 가장 빨리 진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 아침이라 정상에는 개미 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갖고 다니는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긴다

불갑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삼각점  그리고 영광군에서 세운 관광안내도와

함평군에서 세운 등산안내도가 있고 넓은 공터가 있다.

정상석에서 아랫쪽 금계리 계곡에는 안개가 자욱히 깔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지나온 장군봉과 노루목  그리고 그 너머 지난구간의 장암산과 태청봉이  아련히 보인다.

영광군에서 설치한 관광안내도

함평군에서 설치한 등산안내도

우측 아래에 동백골 끄트머리에는 불갑사의 가람이 겨우 보이기에 그곳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다시 계단으로 돌아와  구수재로 향한다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와서 구수재 방향으로 영산기맥길을 이어간다

잠시후에 등로에서 쉼터로 바뀌어 버린 폐헬기장을 만나고...

구수재로 향하는 이정표

구수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안개가 끼어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함평군의 산그리메

 함평군에는 ‘함평천지’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는데 함평은 예로부터 ’천지(天地)’라

부른데서 연유한 말로 함평이 “사람살기에 좋고 모든것이 넉넉하니 조화롭고 무궁하다 ”

라는 뜻이란다

 

함풍과 모평을 합해 현을 만들어 1409년에 비로소 지어진 이름이며 고을이 이름이 함평이며
땅의 질이 좋아 농사가 잘되었고 특히 쌀맛이 좋고 질이 좋아 '함평 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다'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함평은 특히 높은 산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함평에는 기산영수로 불리는 명승지가 있으며 함평읍내 동북방 함평공원의
둔덕과 그 밑 함평천을 일러 중국 하남성 동봉현의 전설적인 땅에 비유하고 기산영수라 했던 것이다

함평군 해보면의 산그리메에 夢幻的 분위기에 한동안 취했다가

갈길이 멀어 다시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면서 기맥길을 이어간다

데크목에서 바라본 부처바위

20km가 넘는 산행을 하면서 산에서 유일하게 딱 한명의 등산객을 만난다.

고향 광주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서울 올라가는 길에 불갑산을

한바퀴 돌고 귀경하려고 한다면서 본인도 무척이나 반가워 하는 눈치이다

사는곳이 분당이란다...사진 한장을 부탁하고 인사를 나눈 후 헤어진다

저 구름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의 몽환적이다

부처바위

부처바위로 내려서니 데크목 계단이 나오는데 혹시 내가 길을 잃을까봐

먼저 공작산 아우님이 연두색 띠지를 붙혀놨다... 아우님 복받을겨 

등로 가운데 光州 鄭氏의 묘지가 있고 편한길을 따라 7분정도 내려가니 조금전과 똑같이

平山申氏의 묘지 한기가 등로 가운데 있다... 2분정도를 걸으니 구수재가 나온다

구수재(223m:08:30)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와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를 경계로 좌,우에 있는 용천사와 불갑사를 연결하는 고개인데

예전에 두 사찰의 스님들이 교류하는 통로였고,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넘었던 길이였으며  숯을 구워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숯쟁이들도 나무를 구하고, 또 영광에 숯을 내다 팔기위해 그 길을 오갔던 고개란다.

구수재를 깃점으로 불갑산과 모악산으로 나뉘는데 두 산의 모양도 전혀 다르다.

불갑산은 주봉인 연실봉 주변으로 기암괴봉이 옹골차게 들어앉아 남성다운

반면 모악산은 겉보기에도 부드럽고 아늑한 이름 그대로 어머니의 산같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불갑사로 내려가는 동백골이 나오고 좌측 11시 방향으로는

백양사 말사인 꽃무릇 축제로 유명한 용천사가 나온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 구수재를 경계로 하여 영광의 불갑사와 함평의 용천사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데

두 사찰이 상사화로 잘못 알려져 있는 꽃무릇으로 유명하여 9월에 상사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몇년전 고창 선운사에 들렸다가 스님에게 상사화(그 땐 꽃무릇인 줄 몰랐음) 한 그루를

선물받아  텃밭에 심어봤는데 토양이 맞질않아 죽어 버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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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사 석불(사진 - 펌)

우리나라 3대 꽃무릇 군락지라면 선운사`불갑사`용천사 일대다.

그중 두 군데가 바로 전남 영광군 불갑사 일대와 함평군 해보면의 용천사 일대다.

공교롭게도 이 두 군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지척에 있다.

상사화로 잘못 알려진 꽃무릇(석산화)은 9월~10월에 붉은 꽃이피며 꽃이 시든 후에

 

잎이 피어나고 잎이 시든 후에 꽃이피기 때문에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

상사화(相思化)라고 하는 애틋한 이름도 붙여졌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이 떨어진 다음 짙은 녹색의 잎이 나오는데 다음해 봄에 시든다.

꽃무릇은 산기슭이나 사찰 근처에 많이 피어 있는데, 뿌리를 가루로 말려 불교탱화의

방부제로 사용하였기에 사찰이면 어디를 가나 손쉽게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용천사 주위는 우리나라의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천사(龍泉寺) - 불교카페에서 인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600년(백제 무왕 1) 행은선사(幸恩禪師)께서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대웅전 층계 아래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다.

이 샘은 황해로 통하며 용이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645년(의자왕 5) 각진(覺眞) 스님이 중수하고,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국사 각적(覺積)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세조와 명종 때 중수하여 큰 절로 성장하였다.

《용천사대웅전현판단청기》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선조 33) 중창하였고, 1632년(인조 10년)에는 법당을 새로 지었다.

1638년(인조 16년)과 1705년(숙종 31년)에 중건하고, 1938년에 중수했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1964년에 금당이 옛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세우고, 요사도 지어 절의 면모를 바꾸었다.

1996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며 9월에 열리는 함평 꽃무릇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용천사 갈림길(08:35)

용봉(龍峰:08:40)

용봉에는 야생동,식물 보호구역 안내판이 설치되어 이 구역이 2003년부터 올해 말까지 8년간은

건축물과 공작물을 설치하지 못하며 설치하고자 하면 규정에 의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영광군수의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고 좌측으로 용천사 내려가는 길이 있고 정상에는 2개의 이정표가 있다

용봉 이정표

용봉에서 용천봉 가는길
독서하는 숲도 만나고...

독서하는 숲을 지나니 나무계단 오르막이 나오고 사각정자가 보인다

사각정자(08:45)

이곳은 쉬어가는 곳이란다. 이보시요. 기맥산꾼이 쉴 시간이 어딧소.

그나저나 제발 등로 정비나 좀 해주소. 영산기맥 길 타면서 안경 잊어버리고

베낭 찢어지고, 옷이 가시나무에 걸려 찢어지고 피해가 정말 막심하오 

정자 아래의 능선에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다

수면을 취할 수 있는 휴게의자도 보이고...

용천봉 오르는 길

용천봉(龍泉峰:350m:08:50)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2개의

이정표와 삼각점이 있고 우측으로는 도솔봉으로 가는 등로가 뚜렸하다

25,000 지형도에는 이곳이 불갑산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는데

오기(誤記)가 아닌가 싶다구수재에서 모악산까지는 2개의 이정표가 서있는데 다른데도 좀 세워주지 이게뭐야

 

용천봉  정상 삼각점(△나주 404 / 1984재설)

용천봉에 있는 또다른 이정표

가시나무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악명높은  잡목과 잡풀... 숲을 이루기 전에 영산기맥을 마쳐야 하는데

사각정자를 지나니...

다시 로프가 처져있는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벤치 4개와 돌탑이 있는 넓은 공터를 지나 2분정도 걸으니 모악산이 나온다

모악산(母岳山:347.8m:08:55)

함평군의 해보면영광군 불갑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불갑산 다음으로 높은 산봉우리이며, 불갑산 남서부 줄기와 바로 이어진다.

산 아래에 용천사(龍泉寺)라는 절이 있다. 함평천의 지류인 내동천과 불갑천의 발원지이다.

용천사 계곡에는 희귀식물인 꽃무릇[相思花]이 수백만 주 자생하고 있다.

대동지지』(함평)에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영광과 경계를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광)에 모악산은 "함평군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함평현에서도 보인다.

산중에 용굴이 있는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가뭄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함평군지』에 "모악산은 해보면에 있고, 불갑산에서 직락(直落)하여 구름 사이에 솟아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용천사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광여도』와 『지승』에는 지명이 표기되지 않으나,

『1872년지방지도』(함평)에 모악산이 무악산(毋岳山)으로 표기되어 대야면의 북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와 현대지형도에도 지명 표기가 없지만 『군세일반』(함평)의 지도에 불갑산과 무악산이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평군)과 『1872년지방지도』(함평)에는 무악산(毋岳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모(母)와 무(毋)가 혼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는 봉우리라는데 현대 지형도에는 없다.

 

우측으로 가면 태고봉,과 나팔봉, 불갑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기맥길은

좌측 주차장(용천사)방향으로  내려간다 

모악산 정상 이정표

모악산에서 내려서니 데크목 나무 계단이 나오고...

群木一松

한우재(283.4m:09:00)

밋밋한 봉우리에 벤치와 이정표(←용천사0.4km 모악산0.36km→)가 있고

스텐레스 표지판이 서있는데 우측으로 직진하여 기맥길을 이어간다

용천사가는 길의 이정표가 계속해서 나온다

등로 사이로 용천사 부근에 있는 광암저수지가 보이고...

노은재(老隱峙:253m:09:05)

함평군 해보면 용암리와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용암리에 있는 용천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정표도 있고 뚜렸하나 정작 고개의 이름을 따온 노은마을 쪽은 아예 길도 없다  

노은(老隱)마을은 고흥유씨가 처음 조선조 세조때부터 살기 시작하였으며 젊어서는 속세에서 생활하고 늙어서는

은둔생활로 자기 수양(修養)을 하기 위하여 찾아들어 마을을 형성 했다하여 노은(老隱)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군봉 아래 헬기장에서 이곳까지 1시간 35분동안 편하게 걸었던 길은

이곳에서 끝나고 지금부터 다시 고행의 길로 접어든다

노은재로 오르자마자 잡목과 가시나무가 기다렸다는듯이 괴롭히기 시작한다

힘들게 봉우리를  치고 오르니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광동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이 이루어진 역사는 용천사 건립 연대인 통일신라시대로 보고 있으므로 1천여 년 전이

최초로 황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하나 현재 황씨는 한 세대도 살고 있지 않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광동(廣洞)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은 용천사 터에서 용이

승천할 때 이 마을 부근에서 빛을 발했다 하여 광동(光洞 1914년 행정구역 개편명)이라 하였다 한다.

무명봉으로 올라 우측으로 걸어가는데 뚜렸한 등로가 보이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는지 잡풀과 가시나무가 우거져 있어 자꾸만 태클을 건다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 서는데 원추리 새순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남도지방에는 벌써 산에는 봄이다

진달래며 생강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275봉(09:20)

이곳은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 신광면의 경계인 삼면봉이다

지금부터 남쪽으론 밀재에서부터 이곳까지 같이 걸어온 해보면과

작별을 하고 신광면으로 面界가 바뀌지만 북쪽은 여전히 불갑면과 같이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지도를 보니 좌측은 먹우재 가는 길인데 길이 없긴 마찬가지이나

우측 영산기맥길은 아예 길이없고 가시와 잡목, 그리고 간벌하여

버려진 나무들이 자꾸만 갈 길이 먼 산꾼에게 태클을 건다

275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잡목이 너무 우거져 앞이 캄캄하다.

잠시 조망이 되니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 노은마을이 보이고 마을앞에

있는 건무산이 멋진 모습을 뽐내면서 산꾼을 위로한다

길이없는 길을 내가 만들다시피 내려서니 생강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많은 생강나무들이 노란 꽃봉우리를 틔우기 시작한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다시 간벌지역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는데 2년전에 진양, 팔공, 호미기맥을 1년동안 같이했던

사르님의 시그널이 반긴다... 말없이 정말 산을 잘타는 친구였는데

우째 지내지 궁금하다
내 키보다도 더 큰 산죽길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또다시 땅바닥에
누워있는 고사목에 걸려서 된통 넘어지는데 무지 아프다.

넘어진 잡목사이로 곱게 핀 생강나무꽃

235봉(09:45)

육군보병학교 훈련장의 경계말뚝을 만나면서 가시나무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데 정말 미칠지경이다.
그렇다고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곳은 탈출로가 아예없다.

어디로 가라는 건지...잡가시의 태클이 엄청 심하다

건무산 갈림길(09:50)

군사시설 말뚝(-024)과 하얀 콘크리트 말뚝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좌측으로 꺽어지니 편안한 내리막길이 나오고...

깃대봉(215m:09:52)

사격시에 빨간 깃발을 올리는 깃봉이 있고 ‘8 진지강화및 재편성’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군부대 사격장 전체가 조망된다

깃대봉 정상에서 바라본 육군보병학교 사격장

깃대봉에서 가야할 영산기맥 등로의 궤적

우측으로 건무산과 국사봉이 보이고...

사격장 안부를 지나  능선을 타고 내려서니 넓은 도로가 나오는데 화산골재이다.

화산골재(10:05)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에서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육군보병학교 사격장이 있는 고개 위에는 군 교육장이 있다.

기맥길은 타이어로 만든 교육장을 지나 능선위로 올라선다.

육군보병학교 교육장
이른 아침에 밥을  먹은 탓인지 배가 고파온다.

며칠전에 지나간 동료산꾼 도리깨님의 정보에 의하면 지경재에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하여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점심을 사먹기로 하고 간단하게

우유하나, 쥬스하나, 과일 2개,앙꼬빵 2개와 날씨가 더울것 같아 식수 2L가 전부이다.
이곳에서 앙꼬빵 하나에 쥬스로 허기를 면하고 지경재로 향한다  

교육장을 올라서니 공격개시선 표지판과  교육생 관측소를 지나면서길은 다시 험해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175봉(10:20)
Y자의 길에서 좌측의 뚜렸한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다시 길은 험해지고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올라가는데 이곳에
요즘 왠만한 산에서 구경하기 힘든 오가피 나무들이 굉장히 많이 보인다.

아마 이 지역은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서 민간인들의 출입이 뜸한 탓일까?

등로의 나무사이로 보이는 불갑면 우곡리월곡마을

정확한 마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약300년전 영월신씨들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으며 마을이 월형이고 골짜기에 있다하여 월곡(月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215봉(10:43)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지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

가야할 지경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역시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 내가 길을 만들어서 간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좌측으로 인삼밭이 나오고...

다시 우측으로 올라서는데 망개나무(청미래)들이 군락을 이뤄 걷기가 힘들다.

161봉(11:00)

내리막길로 내려서는데 이곳 역시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지만 길이 없어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마늘밭이 나온다 

마늘밭을 가로질러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에서 좌측 밭 가장자리로 내려서니 지경재가 나온다.

지경재(地境峙:11:10)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신광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3번 국도가 지나가며

고개에는 독립유공자이셨던 一江 金撤선생의 숭모비와 GS 주유소, 그리고

하여주 가든 식당이 있고 이곳이 양계장이 많은지 AI방역작업이 한창이다.

 

지경(地境)이란 지명은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단어로 낙동정맥 길의

울산, 양산, 부산 등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곳도 영광과 함평의 경계라 쓰는 모양이 

나를 난감하게 만든 식당

며칠전에 이곳을 지나간 도리깨님의 정보에 의해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베낭무게를

줄이기 위해 점심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식당문은 굳게 잠긴체 ‘주일은 쉽니다’ 라는 팻말이

참으로 난감하게 만든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13km나 남았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이 웬쑤 덩어리 엉터리 정보로 사람을 골탕 먹이다니... 다시 주유소로 돌아와 커피 한잔

마시려고 자판기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니 동전만 삼킨채 커피는 안나온다.

주유소 쥔장을 불러 동전을 돌려받고 식당 옆으로 오니 AI 방역을 작업을 하는 컨테이너에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 2명이 있다. 이 근처에 식당이 없느냐고 물으니

한참을 가야 한다고 하기에 포기하고 커피 한잔만 마실수 없냐고 물으니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커피 한잔을 주면서 이곳은 산도 없는데 큰 베낭을 메고 어딜 가냐고 묻는다.

사람들에게 영산기맥을 설명해봐야 입만 아플것 같아 그냥 산이 좋아 다닌다고

하면서 이 식당만 믿고 점심을 준비 안했다고하니까 이 식당은 교회를 다니기에

일욜은 영업을 안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먹으려고 가지고 온 김밥 한줄을 준다.

감지덕지 하면서 김밥 한 줄을 얻어먹고 오늘은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 아무래도

식수가 모자랄 것 같아 생수까지 얻어 수통에 가득 채우고 다시 길을 떠난다.

고맙소... 복들 많이 받을겨...

대부분의 산꾼들은 이곳에서 우측 능선인 기맥길을 가지않고 좌측 도로를 따라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는데 난 원칙을 고수하고자 우측에 있는 숭모비 뒤로 오른 

주유소와 식당 가운데에 있는 숭모비 계단으로 오른다

일강 김철 선생은 1886년 10월 15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김동진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산(英山), 호는 일강(一江)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영탁(永鐸)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위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영광군 묘량(靈光郡 畝良)의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8년 9월 22세의 나이로 영광 광흥학교(光興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조찬승(曺燦承)․편용무(片容武) 등 영광인들이

뜻을 모아 관 서당․노인당․향교서당 등의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된 자금으로 향교의 명륜당에 설립한 것이었다.

1년간의 속성과정으로 제1회 졸업생 35명을 배출하였는데 경술국치 이후

 ‘한일합방’ 반대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다 2년만에 폐교 당하였다.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수학하고 귀국하여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김철에게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1917년 김철은 조국의 독립에 투신하기 위해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던 상해(上海)를 향해 고향을 떠났다.

상해에 도착한 김철은 1918년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한진교(韓鎭敎)․

선우혁(鮮于赫) 등과 발기인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초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보냈고,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국내외로 당원들을 파견하였다.

김철은 서병호(徐丙浩)․선우혁과 국내로,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잠입한 김철은 영광으로 가서 광흥학교 동창 조병모(曺秉模) 집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승려를 가장하여 돌아다니며 지방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고향 함평에 들러 자신의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만드는 한편

당시 천도교 교주이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3․1운동을 협의하고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기산도(奇山度) 등과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철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1975년 8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를 세워 그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1984년 6월 서거 50주기를 맞이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

리고 1999년부터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번지 일원에 사당․동상․기념관․수양관․관리사

등을 건립하여 2003년 6월 ‘일강 김철선생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숭모비를 좌측으로 우회하여 농로로 들어선다

농로를 걸어가니 억새가 가득한 묵밭이 나오고...

억새를 헤치고 내려서서 밭 가운데를 지난다

가운데를 지나니 공작산 아우님의 연두색 띠지가 보이고 밭 언덕을 내려서니

밭에서 퇴비를 뿌리던 농부가 악을쓰며 지랄지랄하는데 니 넘이야 악을쓰던 말든

난 영산기맥길을 걸어간다... 밭 가운데를 지나 내려서니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온다 

서해안 고속도로로 내려서니 차량은 그리 많지 않으나 차량들이 너무

과속으로 달려서 무단횡단을 포기하고 펜스 뒤를 돌아서 지하통로로 향한다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3분정도 북쪽으로 걸으니 굴다리가 나오고...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니 Y자의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Y자 도로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니 공작산 아우님이 걸어둔 연두색 띠지가 보이고...

다시 도로에서 좌측으로 올라서서 고속도로 반대편으로 접어든다.

고속도로 철재 휀스를 따라 능선으로 오르니...

밭에서 내려 10분정도를 돌아서 다시 기맥길로 올라서니 인공수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희미한 길이 보이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이곳도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 이 지역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길가운데 두는게 취미인가?

취미하고는 고약한 취미이다.

조금을 내려가니 임도가 나오고 우측에는 咸平李公의 묘소가 있고

이곳에서 좌측 임도로 내려가는데 이 임도는 묘지로 가는 도로이 

우측에 있는 함평이공 묘지
편안한 임도를 따라 2분정도 걷다가 내리막 임도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노송나무가 우거진 숲을 헤치고 올라오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문패없는 묘지 3기가 나오고 다시 조그만 봉우리로 올라서는데

이곳 역시 길이없고  칡넝쿨에 베낭이 걸려 넘어지면서 또다시 한바퀴를 뒹군다.

우측으로는 지도에 목우촌 농장으로 표기된 커다란 축사가 보인다

절개지에서 바라본 목우촌 축사

조그만 무명봉에서 올라 우측으로 내려서니 우측으로는 목우촌 축사가 보이고

좌측에는 송아지만한 개들이 엄청많이 키우는 개사육장이 보이고 이곳에서

절개지로 내려서니 대밭이 나온다.

좌측의 개사육장

갑자기 수백마리도 더 되어 보이는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대는 바람에 엄청 시끄럽다

대밭으로 내려서서 대밭 가운데를 통과하여 내려오니 구봉고개가 나온다.

구봉고개(九峙::12:15)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영광군 불갑면 우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고개 옆에서

꽤나 큰 규모의 개 사육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명 유래는 구봉마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뒷산이 아홉 봉우리여서

마을 이름을 "구봉(九峯)"이라 하였다 한다. 최초의 흥성장씨가 들어와 터를 닦은 후

최씨, 강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그 후 영산김씨

김 황이 들어와 세거하였으며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광군 불갑면에서

함평군 신광면으로 편입되었다고 하며 독립유공자 김철선생이 구봉마을 출신이다

구봉고개를 가로질러 올라서니 우측에  커다란 물탱크가 있고

이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 임도에서 바라본 조금전에 지나온 길

210봉(12:25)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조금전에 올라온 양호한 길에서

갑자기 험한 가시밭길로 바뀌어 버린다

오늘 낮의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할만큼 덥다.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다.

생수 2L와 스포츠 음료 한병을 가져 왔는데 그나마 다행인게 식수를 지경재에서

보충하여 물걱정은 안해도 될듯 싶다.

핑크색 노루귀가 새색씨처럼 수줍은 미소로 외롭고 지친 산꾼을 반긴다 

넘어진 나무에다가 산딸기 나무, 복분자 나무들의 가시가 상당히 성가시게 한다

249봉(12:40)

영광군 불갑면과 군남면이 만나는 곳으로 이곳에서 함평군 신광면과

잠깐의 이별을 고하고 온전히 영광군으로 접어들지만 금산 지나면서

다시 함평군 신광면으로 접어드는데 지경재에서 이 구간은 ⊃으로

기맥길을 이어가는데 약간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는데 측백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영광군 불갑면에서 군남면으로 면계가 바뀐다

측백나무를 따라 내려서니 길은 뚜렸하다

다시 좌측으로 살짝 꺽어서 내려오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12:50)

임도로 내려서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지경재에서 얻어먹은 김밥 한줄로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더 이상 버티기가 힘이들어 이곳에서 비상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점심이래봐야 앙꼬빵 하나에 우유, 오렌지와 사과 하나이다.

너무 덥고 목이 텁텁하여 탁배기 생각이 간절하건만 그림의 떡이니 ㅉㅉㅉ

거짓정보(?)를 제공한 도리깨님... 이 웬쑤가 두고두고 밉기만 하다

 

점심을 먹고나니 조금은 나은 것 같다... 그냥 임도로 가고 싶은 유혹이

심하지만 꾹 참고 조금한 봉우리로 올랐다가 내려서니 또다시 임도를 만난다.

단촐한 점심메뉴

다시 넓은 임도를 따라서 내려서니 우측에 커다란 묘지가 나온다

송림고개(13:05)

우측에는 호미기맥  경주구간에서나 볼 수 있는 왕릉만큼이나 큰 봉분의  광주이씨의

묘지가 있고 좌측으로는 송림마을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있는데 비닐 하우스가

있는 농가 한채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포장도로를 따라서 5분정도 내려서니

상광암 고개가 나온다. 

상광암 고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영광군 군남면 대덕리의 모습 

도로로 내려서니 송림마을 표지판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상광암 고개에 있는 버스 정류장

상광암 고개(13:10)

영광군 군남면 대덕리 광암마을과 함평군 신광면을 연결하는 17번

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에는 ‘송림’이라는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군남면에서 관리하는 고인돌 1기가 보인다

 

고개 명칭은 좌측 아래에는 대덕리 광암마을이 있는데 상광암,중광암, 하광암이

있는데 그 중에서 고개와 가장 가까운 상광암의 명칭을 따온듯 하다.

그리고 마을 아래의 또다른  마을 이름으로 송림고개라 부른 탓에

버스 정류장 명칭은 ‘송림’이라 표기를 해놨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이 고개 이름을 ‘모기장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상광암 마을은 조선조 선녕남씨 23대손 남 우원이 함평에서 이곳으로 이주하고

그 뒤에 평택임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소나무가 무성하고

바위가 많아서 松岩 또는 광암이라 하였는데 그 이후에 마을이 나뉘어져

상,중,하광암으로 마을이 나뉘어졌다고 한다

도로 좌측 대덕리쪽으로 5m 정도 내려가다가 우측으로 올라선다

양쪽이 밭인 농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가야할 길이 보이는데 산에 불이난 건지

아니면 간벌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봉우리가 민둥산이다.

밭 가운데 농로를 따라 올라서니 慶州李公의 묘지가 나오고 묘지 좌측으로 올라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에 오르니 칡넝쿨 제거작업의 일환으로 고독성 농약을 뿌렸다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런것만 하지말고 제발 영산기맥길 정비 좀 해주소... 지체 높으신 영광군수 나으리!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더운 날씨 탓인지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다

이곳에 불이 났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 편백나무를 심어놨다.

이곳은 양지라 그런지 진달래들이 많이 피어있다.

남쪽으로 내려다보니 금산마을과 17번 군도가 한가롭게만 보인다

지나온 상광암 고개의 모습

아침에 지나온 불갑산 정상 연실봉도 보이고...

빡세게 능선을 치고 오르니 다시 잡목이 태클으로 거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283봉(13:30)

정상에는 암릉과 느티나무가 있으며 잡목과 가시나무 간벌하여 마구 버려진

나무들로 인해 걷기가 엄청 힘들지만 여기서는 죽으나사나 전진밖에 없다

대덕리 일대가 시원스럽게 보인다

잡목 사이로 핑크색 노루귀가 보이고...

하얀색 노루귀도 보인다

산죽밭이 나오는데 산죽만 있는게 아니라 가시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들이 뒤엉켜 있어 조심스럽게 지나가는데 결국 베낭이 찢어진다

금산 갈림길(13:58)

영산기맥길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금산으로 향한다

금산(305.4m:14:00)

전남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와 대덕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무지봉 또는

검산이라고도 하며  정상에는 삼각점(△와도417 1985재설)이 있다.

옛날에 가뭄이 계속되며 무지(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외래식물인 자리공이 메말라 죽어 있다. 

산 정상에는 삼각점 이외는 아무것도 없어서 정말 버림받은 산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등산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모양이다.

유일한 건 얼마전에 지나간 공작산 아우님 팀들이 붙어둔 연두색

띠지에 ‘금산 305.4m’라는게 유일하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영산기맥을 이어간다

등로사이로 하광암 마을과 평암제가 보인다.

310봉(14:10)

보라색으로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현호색꽃도 보이고...

산자고도 봄소식을 알린다

또 다시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우측 능선으로 꺽어진다.

등로에서 바라본 하광암 마을의 모습

오늘은 공작산 아우님의 덕을 많이본다

칡재(132m:14:50)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와 함평군 신광면 보여리 장전마을을 잇는 고개로

장전마을쪽은 비교적 길이 뚜렸하나 용암리쪽은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돌무더기의 흔적으로 보아 서낭당이 아닌가 싶다

좌측의 고개 아래에 있는 장전(長田)마을은 평산등에 있는 고인돌로 미루어 보아

마을의 역사는 선시대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680년경에 김해김씨가

지장골이라는 곳에 들어와서 살았다. 그 후 1750년경에 현재의 이곳으로 이동해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영광군 군남면 대덕리 3구와 경계에 있으며 송사리 사간마을과 보전마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칡재에서 부터 다시 남쪽은 영광군 군남면에서 함평군 신광면으로 접어든다.

금산에서 칡재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192봉으로 오르는데 V자의 형태의

급경사라 봉우리는 그리 높지 않지만 마지막이라 그런지 엄청 힘이든다  

192봉(14:58)

金海金公과 光山金氏 부부 합장묘를 만나면서우측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빠져나오니 소나무 묘목장과 청색 물탱크가 있고 맞은편에

군유산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시간상으로 오늘까지 가기로 한

건김재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이곳 사간고개에서 산행을 접어야 할 듯 싶다

사간고개(士干峙:154m:15:15)

함평군 신광면 보여리 사간마을에서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좌측 아래에 있는 사간마을에서 지명을 따온듯 하다

사간마을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황씨가 들어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또한 그 후손들도 현재 거주하고 있지 않다.

오늘의 산행기록

사간고개에서 베낭을 정리하고 수통에 남은 물에다가 수건을 적셔서 몸을닦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임도를 따라 계속 내려가니 송사리 송계마을이 나온다.

마을을 지나서 좌측으로 올라오니 마을회관이 있고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버스 정류장 옆에는 남매동심회 기념비가 있고 사간동천이라는 표시석도 있다

송계마을 버스 정류장(15:50)

송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어서지나가는 노인에게 버스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단다.그래도 걱정하지 않는것은 영광에서 서울가는 버스가 워낙 많아서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저 아래에서 조그만 모닝차량 한대가 온다.

무작정 손을들고 히치를 하는데 차를 세워준다.영광가는 버스 타는데 까지만 태워 달라고 하니 어디 가느냐고 묻길래

서울가기 위해서 영광터미널로 가야 한다고 하니까.

자기도 영광 터미널 가는 중이라면서 타라고 하는데 울매나 반가운지...

터미널에서 내려 인사를 하는데 바쁘다면서 잘가라고 하고 서둘러 가버리는 바람에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헤어진다... 고맙심더

영광서 서울가는 버스표

영광 터미널에 도착하니 16시 20분이다

서울가는 표를 예매하는데 가격이 싼 일반버스는 저녁 6시 50분에 있고

16시 50분발 우등고속버스가 있다고 하여 2시간반을 기다릴 수 없어서

우등고속버스표를 예매하고 재빨리 터미널에 붙어있는 영광시장 안에 있는

국밥집으로 향한다

시장안은 한가한데 국밥집은 꽤나 많다.

원조순대국밥집에 들려서 국밥 한그릇에 이곳에서 유명한 대마 막걸리 한통으로

민생고를 해결하니 이제사 눈에 뭣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국밥 한그릇에 5,000원과 막걸리 3,000원인데 막걸리를 너무 맛있게 먹는다면서

조금전 손님이 두고 간 막걸리 반통을 더주는 바람에 그것마져 먹고 커피까지 마신 후에

대합실로 와서 이빨까지 딲고나니 버스 출발 3분전이다.

서울가는 우등고속버스에 손님은 달랑 8명이라 널널한 리무진 버스에

편안하게 깊은 잠에 빠지는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잠에서 깨니

경기도 안성부근이다... 정말 힘들게 영산기맥 한구간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