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後期의 實學思想
1. 실학사상의 발생배경
1) 사회적 원인
조선조 후기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거듭된 변방 민족의 침입과 이로 인한 전국토의 황폐화는 정치 사회 경제등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시대이었다. 이러한 사회 체제의 변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의 형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대다수의 백성들이 최저생활의 유지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특히 농민들이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을 부단히 받아야 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사회체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하거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마련해 주었고 이러한 무관심과 반감은 곧 기존 정치 지도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높여주었으며 결국 기존 질서에서의 이탈(은둔)이나 또는 변혁(반항)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이러한 농민들의 최저생활 유지의 어려움이 인구 이동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구 이동성의 증대는 그 원인 자체가 현실적 생존의 문제에서 발단한 것이어서 결국 기존 경제관계의 변화를 자극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미 15세기 후반부터 농민들의 생존수단은 같은 처지의 농민들끼리의 결합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결합이 간간이 지배계층에 대한 무력저항으로 나타났었다. 1559년의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농민 저항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1640년 이후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고 전후의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농민 경제와 민간 수공업이 회복될 기미가 있었음에도 계속 전개되어 농민의 인구 이동성을 계속 증가시켰다.
세째 농민의 생존자체의 위협과 이로 인한 인구 이동성의 증대는 당시 정치 참여에서 소외된 계층의 정치의식을 높여주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전후 복구의 뚜렷한 증거는 특용작물의 재배와 경지면적의 확대로 나타났고 생산력의 증대로 화폐경제가 발달되었으며 임금노동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도시 인구의 증가와 시장경제의 확대를 야기시켰다. 시장경제의 확대는 시장을 통한 농민들의 대화의 기회를 늘려주었고 이는 불만을 조직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였으며 결국 농민의 정치의식을 높여주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수공업의 발전은 수공업자를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자유인으로 변신시킴으로서 자유인을 수적으로 증대시켰고 자유인의 증대가 동시에 정치참여를 의식하는 계층의 확산을 뜻하게 되었다.
네째 신분계층의 두드러진 변화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는 종전의 서민 또는 노예계층이 양반이나 서민 신분으로 몰락하는 하향적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먼저 상향적 경 우는 신분제와 토지소유제의 연결이 와해되면서 서민 대지주가 생기기도 하고 평민 이하의 계층이 양반이나 소농민보다 우세한 경제력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노비제도의 붕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향적 경우는 잇따른 권력다툼에서 패한 양반들은 삭탈관직은 물론 가산까지 물수당하여 생계유지를 위하여 하층업종에 종사하기도 하고 남의 고용인이 되기도 하여 사회적 지위가 하강하게 되었다. 이들 몰락한 양반층의 기존질서에 대한 반감은 궁핍해지는 그들의 처지에 비례하여 커져갔다.
다섯째 지도층의 백성들에 대한 지도력이 미약하였다는 것이다. 전후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지도층이 이미 실질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지도력의 발휘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다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난 채로 백성들에게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각종의 혁명 저항세력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하에서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단지 누구에 의하여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인가가 문제이었다. 이러한 변혁을 시도하는 주동세력은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보수파 세력으로 주로 기존 집권층을 중심으로 하거나 당시의 지도 정치이념이었던 주자학자 중심이다.
둘째로 급진파라고 할 수 있는 폭력적 저항을 주장하는 농민 세력으로 주로 당시 광산을 근거지로 한 농민 출신의 광부들이다.
세째로 개혁파라고 할 수 있는 세력으로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되 서서히 개혁하고자 하는 소외되었거나 몰락한 양반 지식 층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실학파는 세째번의 개혁파에 속하는 세력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은 기존의 정치 이념인 주자학에 대하여 도전과 조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2) 학문적 배경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형성에는 그 시대 사회의 현실적 변화라는 요인과 더불어 그 시대사상의 다양화라는 요인이 작용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實學을 道學(朱子學)과 구별하여 파악하려는 기본전제에서 실학은 도학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입장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는 실학사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상적 유형을 분석하고 그 사상적 다양성과 실학과의 관계를 해명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실학파가 발생한 배경으로 조선전기에 비교하여 정통의 도학과는 구별이 되는 陽明學 西學 考證學 등의 새로운 학풍이 17세기를 전후하여 전래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풍에 대해 도학파의 기본입장은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지만 실학파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이미 도학과 실학의 기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하겠다.
첫째로 정통의 도학파에 대한 실학파의 입장과 자세를 검토하여 보면 실학사상의 발생초기에는 그 뿌리를 도학 속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사회의 모든 유학자는 주자학의 經學的 철학체계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실학파의 인물들은 도학을 부정하면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도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도학파와는 다른 학문적 관심을 가지거나 나아가서 도학을 긍정하면서도 도학파의 태도에 현실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는 데에서 실학적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 실학파는 의리중심의 도학파의 규범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고취시켜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이념을 실현시키려는 방법론적 입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나아가서 성리학의 논리적 형식에 의존하기 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합리성을 중시하여 점차 실학파의 철학적 기반이 도학파의 성리학적 체계 곧 이기심성론으로부터 이탈되는 과정을 밟아가게 되었다.
두번째로 실학파와 양명학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 실학파의 성격과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도학파는 이미 李滉 이래로 양명학을 비판하는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황의 양명학 비판은 그의 전습록논변에 보인다.) 그러나 양명학이 일부의 지식인에 의해 공감적인 이해를 불러 일으켰을 때 도학의 일방적 지배 아래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가능케하였고 특히 양명학이 주자학의 규범적 형식성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실학파가 양명학의 영향에서 발전하였다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지만 양명학을 보다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을 이룬다. 조선 후기에서 실학파의 양명학에 대한 태도는 청조의 실학파가 비 판적인 입장을 갖는데 비하여 상당히 호의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사회에서는 양명학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사상사에 유폐를 남기는데서 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없었고 오히려 도학의 정통주의로 획일화된 사상계를 다원화 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이 양명학에 주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식과 행동의 거리에서 오는 주자학파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양명학의 지행합일론은 실학파의 실천정신을 격려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학파는 양명학에서 철학적 근거를 발견하기 보다는 도학파의 절대적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수단적 역할에 접근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째로 실학파와 서학과의 연관성을 검토하여 보면 실학파의 기본적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17세기 초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연속적으로 수입되었고 이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상적 유파가 실학파라 할 수 있다. 도학파가 정통주의적 입장에 사로잡혀 실질적인 사 상이나 문화 형태에 대해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데 비하여 실학파는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탐색하여 서학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여주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자연관 내지 인간관이나 윤리관에 서학이 근본적인 이질성을 제시하고 있을 때 실학파는 이 양자의 조정을 중요과제로 안게 되었던 것이다. 서학에 대한 실학파의 자세는 초기에 제한된 지식의 수용으로부터 점차 서학의 근본입장에 대한 인식과 수용에로 급속한 진전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실학파는 자신의 철학적 근거를 재정립하고 나아가 전통기반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통해 새로운 입장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네째로 실학파와 고증학파의 관계도 중요한 측면을 이룬다. 특히 淸朝의 실학이 經學과 史學의 고증학적 연구에로 발전하였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청조 고증학이 조선 후기 실학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증학의 객관적 내지 실증적 연구 태도는 실학파에서 경전에 대한 의리론적 내지 성리학적 해석을 벗어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증학이 경학에 미친 영향은 비교적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고증학을 위한 방대한 문헌을 구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현실적 난점도 있었겠지만 경학에 대한 관심보다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 절박한 사회적 여건이 큰 이유이었을 것이다. 다만 고증학적 방법은 실학파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지리나 문헌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을 하려는 관심을 자극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국학연구의 업적을 가능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실학파의 기본입장은 끊임없이 그 사회의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 관심과 개방적 섭취 태도에서 전개되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은 형이상학적 전제의 연역이 아니라 현실 인식과 실용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험하여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주자학과 실학의 관계를 돌이켜 보면 실학파의제 1기(18세기 전반까지)인 柳馨遠 李瀷 安鼎福에서는 주자학적 문제와 실학적 관심이 모순없이 추구되었으며 제 2기(18세기 후반)의 洪大容 朴趾源 朴齊家에 와서는 주자학의 이념에 대하여서라기 보다는 주자학파의 학풍에 대해 비판과 거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고 제 3기(19세기 전반)의 丁若鏞 金正喜 崔漢綺에 이르러서는 주자학의 이론체계를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제시하는 데까지 나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실학파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실학파의 근본입장은 반주자학적인 데서 찾기 보다는 실학파의 문제의식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학사를 돌이켜 보건데 도덕의 문제와 경제의 문제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던 유학의 본연의 이념은 宋代에 이르러 도가와 불교에 의한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인 피폐는 송대의 유학자들에게 유가의 이념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이었으며 현실적 경제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경향은 조선에 전래되어 의리학 중심의 주자학으로 전개되어 현실문제를 등한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었다. 이에 대하여 실학파는 그 반성으로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고취하여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이념을 실현시키려 는 방법적 입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실학파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첫째로 물자의 생산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주자학파의 이념적 핵심은 한마디로 의리정신이다. 이 의리정신은 의리와 경제를 대립적으로 양극화하였다. 따라서 의리를 높이고 경제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가치의식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주자학파는 의리의 객관적 규범을 절대화함으로써 현실의 사태를 비판하는데는 과감하였지만 동시에 관념적 이상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실학파는 국가의 폐단이 무엇보다도 빈곤에 있음 을 강조하여 물자의 생산이 백성의 생존과 국가의 존립에 필수적임을 인식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물자의 생산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물자생산에 대한 적극적 긍정은 선비들의 비생산적인 생활을 비판하게 된다. 星湖는 과거공부나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천시하며 평생토록 놀고 먹는 양반들을 좀이라고 비판하며 朴齊 家는 농업에 힘쓰려면 유자들을 도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丁若鏞은 놀고 먹는 선비를 농공상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처럼 물자의 생산을 필연적이요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그 효과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이 실학파의 공리사상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바로 실학파의 공리적 의리관이며 이것은 주자학파에 있어서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天理를 내용으로 하는 의리관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렇게 하여 증대된 물자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봉건적 사회계층이 고착되었을 때 도덕적 신분질서는 富益富 貧益貧하는 경제적 약자와 강자로 유리 화되는 변질현상을 가져왔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 실학파의 근본과제였다. 다라서 신분계급에 따른 특권을 제거하고 모든 백성이 균평하게 부를 향유하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들의 백성 개념에는 신분제도의 개혁이 들어있으며 모든 인간이 동등한 생존권을 가지고 있다는 평등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실학파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하였으며 그것은 이념과 현실의 괴리이며 또한 현실적 빈곤이었기 때문에 그 이론과 입장은 시대적 제약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즉 현실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여 백성이 극도로 빈곤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의 개혁과 기술의 이용을 중시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객관적 수단과 방법을 밝히는 동안 개인의 내면적 도덕근거에 대한 관심은 이차적인 것으로 후퇴하게 된 인상마져 주는 것이다.그러나 실학파의 주장은 한 시대의 모순을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실학파는 고정화된 형식적 규범을 거부하면서 신체를 가진 구체적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고양시켰다.
둘째로 현실과 이념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관념적 의리론자의 위선적 기만성을 부정하고 실질적 효과를 통한 진실성과 정당성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째로 실제의 공효를 추구하면서 사상을 사고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행동의 세계로 나오게 한다. 가장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가장 근본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3) 실학사상의 전개와 실학파의 계보
임진왜란을 거쳐 병자호란을 치르는 17세기 초기에 전통적 도학파의 일반적관심이 禮學과 義理論에 집중되고 있는 반면 일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의 경제적 내지 사회제도적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초기의 실학파적 학풍의 발생은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다음 세대에서 더욱 구체화될 문제의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학파의 준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와서 실학파의 성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을 때의 인물로 柳馨遠과 朴世堂을 들 수 있다. 유형원은 그의 主著인 磻溪隨錄에서 정치 사회 경제의 조직적인 제도개혁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율곡의 時務論에 영 향을 받고 있으며 독자적인 초기 실학파라고 할 수 있다. 박세당은 당시 排淸義理論에 대해 현실적 事大論을 제기하는 데서 도학파의 정통적 입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朱子註를 벗어난 경전해 석등에서 실학파의 입장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시기를 실학파의 맹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에는 17세기에서 제기된 실학사상의 발생배경이 되는 제반 사상적 요소들과 새로운 현실적 문제의식들이 정리되어 실 학파의 학파적인 확립을 이루게 되었다. 18세기에 나타난 실학파의 두 조류는 전반기에 출현한 星湖學派와 후반기에 출현한 北學派로 구분이 될 수 있다.
星湖 李瀷은 退溪를 사숙하고 이기론이나 예학 등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졌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사회제도의 개선에 있었다. 특히 이익은 당시 漢譯된 서학 문헌에 해박한 지식을 가져 천문 역법등 서양 과학지식에 적극적인 긍정 태도를 밝혔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신앙적 내용에 대한 부분적 비판을 보여 주면서도 윤리적 내용에 긍정적 태도를 가졌다. 이러한 서학에 대한 이익의 지식과 관심은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이른바 성호학파에 있어서 愼後聃 安鼎福등 攻西的 입장과 權哲身 李家煥등 信西的 입장으로 분열이 되지만 서학이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성호학파가 畿湖 南人을 중심으로 형성이 되었다면 다른 한편 老論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淸朝를 왕래하면서 그 문물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을 발전시킨 北學派가 있다. 湛軒 洪大容은 청 조의 서양의 과학지식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북학파의 선두가 되었고 도학파의 排淸義理論을 자주의식으로 극복하여 전 통적 질서의 근원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홍대용은 地球自轉說을 내세울 만큼 자연과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면 朴趾源은 청조 문 물을 수용함으로서 생산기술과 유통에 관한 개선을 촉구하면서 특히 소설을 통하여 전통적 질서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여 실학사상을 문학적 형식으로 발현시켰다. 또 朴齊家는 庶孼出身이 지만 正祖때 奎章閣 檢書官으로 활동을 했으며 北學儀를 저술하여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정리하였다.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했다는 경향에서 經世致用學派라고 한다면 북학 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 기술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利 用厚生學派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18세기는 실학파가 학파적 면모를 확립하였다는데 특징을 가지지만 그 철학적 입장은 아 직 형성되는 과정이고 전통의 기존제도에 대한 비판적 개혁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전반에 활동하였던 丁若鏞과 金正喜에 이르러서는 실학파의 철학적 기반이 확립되고 19세기 중엽의 崔漢綺에 있어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실학파적 철학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성호학파에서 나와 西學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고증학적 지식으로 경학에 대한 새로운 체계적 해석을 시도하였고 자신의 경학 적 입장과의 연관 속에서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金正喜는 朴齊家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를 계승하면서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하여 고증학적 실학사상을 전개하였다. 또 崔漢綺는 기존 전통으로부터의 영향이 극소화되고 서학의 영향도 자연과학을 벗어나서는 거의 용해되어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구성하는 진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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