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역사속으로

朝鮮 後期의 實學思想

by 범여(梵如) 2012. 12. 4.

 

朝鮮 後期의 實學思想

 

1. 실학사상의 발생배경

1) 사회적 원인

조선조 후기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거듭된 변방 민족의 침입과 이로 인한 전국토의 황폐화는 정치 사회 경제등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던 시대이었다. 이러한 사회 체제의 변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의 형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대다수의 백성들이 최저생활의 유지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특히 농민들이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을 부단히 받아야 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사회체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하거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마련해 주었고 이러한 무관심과 반감은 곧 기존 정치 지도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높여주었으며 결국 기존 질서에서의 이탈(은둔)이나 또는 변혁(반항)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이러한 농민들의 최저생활 유지의 어려움이 인구 이동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구 이동성의 증대는 그 원인 자체가 현실적 생존의 문제에서 발단한 것이어서 결국 기존 경제관계의 변화를 자극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미 15세기 후반부터 농민들의 생존수단은 같은 처지의 농민들끼리의 결합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결합이 간간이 지배계층에 대한 무력저항으로 나타났었다. 1559년의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농민 저항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1640년 이후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고 전후의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농민 경제와 민간 수공업이 회복될 기미가 있었음에도 계속 전개되어 농민의 인구 이동성을 계속 증가시켰다.

세째 농민의 생존자체의 위협과 이로 인한 인구 이동성의 증대는 당시 정치 참여에서 소외된 계층의 정치의식을 높여주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전후 복구의 뚜렷한 증거는 특용작물의 재배와 경지면적의 확대로 나타났고 생산력의 증대로 화폐경제가 발달되었으며 임금노동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도시 인구의 증가와 시장경제의 확대를 야기시켰다. 시장경제의 확대는 시장을 통한 농민들의 대화의 기회를 늘려주었고 이는 불만을 조직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였으며 결국 농민의 정치의식을 높여주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수공업의 발전은 수공업자를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자유인으로 변신시킴으로서 자유인을 수적으로 증대시켰고 자유인의 증대가 동시에 정치참여를 의식하는 계층의 확산을 뜻하게 되었다.

네째 신분계층의 두드러진 변화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는 종전의 서민 또는 노예계층이 양반이나 서민 신분으로 몰락하는 하향적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먼저 상향적 경 우는 신분제와 토지소유제의 연결이 와해되면서 서민 대지주가 생기기도 하고 평민 이하의 계층이 양반이나 소농민보다 우세한 경제력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노비제도의 붕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향적 경우는 잇따른 권력다툼에서 패한 양반들은 삭탈관직은 물론 가산까지 물수당하여 생계유지를 위하여 하층업종에 종사하기도 하고 남의 고용인이 되기도 하여 사회적 지위가 하강하게 되었다. 이들 몰락한 양반층의 기존질서에 대한 반감은 궁핍해지는 그들의 처지에 비례하여 커져갔다.

다섯째 지도층의 백성들에 대한 지도력이 미약하였다는 것이다. 전후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지도층이 이미 실질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지도력의 발휘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다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난 채로 백성들에게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각종의 혁명 저항세력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하에서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단지 누구에 의하여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인가가 문제이었다. 이러한 변혁을 시도하는 주동세력은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보수파 세력으로 주로 기존 집권층을 중심으로 하거나 당시의 지도 정치이념이었던 주자학자 중심이다.

둘째로 급진파라고 할 수 있는 폭력적 저항을 주장하는 농민 세력으로 주로 당시 광산을 근거지로 한 농민 출신의 광부들이다.

세째로 개혁파라고 할 수 있는 세력으로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되 서서히 개혁하고자 하는 소외되었거나 몰락한 양반 지식 층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실학파는 세째번의 개혁파에 속하는 세력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은 기존의 정치 이념인 주자학에 대하여 도전과 조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2) 학문적 배경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형성에는 그 시대 사회의 현실적 변화라는 요인과 더불어 그 시대사상의 다양화라는 요인이 작용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實學을 道學(朱子學)과 구별하여 파악하려는 기본전제에서 실학은 도학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입장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는 실학사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상적 유형을 분석하고 그 사상적 다양성과 실학과의 관계를 해명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실학파가 발생한 배경으로 조선전기에 비교하여 정통의 도학과는 구별이 되는 陽明學 西學 考證學 등의 새로운 학풍이 17세기를 전후하여 전래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풍에 대해 도학파의 기본입장은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지만 실학파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이미 도학과 실학의 기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하겠다.

첫째로 정통의 도학파에 대한 실학파의 입장과 자세를 검토하여 보면 실학사상의 발생초기에는 그 뿌리를 도학 속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사회의 모든 유학자는 주자학의 經學的 철학체계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실학파의 인물들은 도학을 부정하면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도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도학파와는 다른 학문적 관심을 가지거나 나아가서 도학을 긍정하면서도 도학파의 태도에 현실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는 데에서 실학적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 실학파는 의리중심의 도학파의 규범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고취시켜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이념을 실현시키려는 방법론적 입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나아가서 성리학의 논리적 형식에 의존하기 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합리성을 중시하여 점차 실학파의 철학적 기반이 도학파의 성리학적 체계 곧 이기심성론으로부터 이탈되는 과정을 밟아가게 되었다.

두번째로 실학파와 양명학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 실학파의 성격과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도학파는 이미 李滉 이래로 양명학을 비판하는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황의 양명학 비판은 그의 전습록논변에 보인다.) 그러나 양명학이 일부의 지식인에 의해 공감적인 이해를 불러 일으켰을 때 도학의 일방적 지배 아래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가능케하였고 특히 양명학이 주자학의 규범적 형식성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실학파가 양명학의 영향에서 발전하였다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지만 양명학을 보다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을 이룬다. 조선 후기에서 실학파의 양명학에 대한 태도는 청조의 실학파가 비 판적인 입장을 갖는데 비하여 상당히 호의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사회에서는 양명학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사상사에 유폐를 남기는데서 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없었고 오히려 도학의 정통주의로 획일화된 사상계를 다원화 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이 양명학에 주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지식과 행동의 거리에서 오는 주자학파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양명학의 지행합일론은 실학파의 실천정신을 격려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학파는 양명학에서 철학적 근거를 발견하기 보다는 도학파의 절대적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수단적 역할에 접근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째로 실학파와 서학과의 연관성을 검토하여 보면 실학파의 기본적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17세기 초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연속적으로 수입되었고 이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상적 유파가 실학파라 할 수 있다. 도학파가 정통주의적 입장에 사로잡혀 실질적인 사 상이나 문화 형태에 대해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데 비하여 실학파는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탐색하여 서학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여주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자연관 내지 인간관이나 윤리관에 서학이 근본적인 이질성을 제시하고 있을 때 실학파는 이 양자의 조정을 중요과제로 안게 되었던 것이다. 서학에 대한 실학파의 자세는 초기에 제한된 지식의 수용으로부터 점차 서학의 근본입장에 대한 인식과 수용에로 급속한 진전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실학파는 자신의 철학적 근거를 재정립하고 나아가 전통기반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통해 새로운 입장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네째로 실학파와 고증학파의 관계도 중요한 측면을 이룬다. 특히 淸朝의 실학이 經學과 史學의 고증학적 연구에로 발전하였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청조 고증학이 조선 후기 실학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증학의 객관적 내지 실증적 연구 태도는 실학파에서 경전에 대한 의리론적 내지 성리학적 해석을 벗어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증학이 경학에 미친 영향은 비교적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고증학을 위한 방대한 문헌을 구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현실적 난점도 있었겠지만 경학에 대한 관심보다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 절박한 사회적 여건이 큰 이유이었을 것이다. 다만 고증학적 방법은 실학파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지리나 문헌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을 하려는 관심을 자극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국학연구의 업적을 가능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실학파의 기본입장은 끊임없이 그 사회의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 관심과 개방적 섭취 태도에서 전개되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은 형이상학적 전제의 연역이 아니라 현실 인식과 실용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험하여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주자학과 실학의 관계를 돌이켜 보면 실학파의제 1기(18세기 전반까지)인 柳馨遠 李瀷 安鼎福에서는 주자학적 문제와 실학적 관심이 모순없이 추구되었으며 제 2기(18세기 후반)의 洪大容 朴趾源 朴齊家에 와서는 주자학의 이념에 대하여서라기 보다는 주자학파의 학풍에 대해 비판과 거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고 제 3기(19세기 전반)의 丁若鏞 金正喜 崔漢綺에 이르러서는 주자학의 이론체계를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제시하는 데까지 나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실학파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실학파의 근본입장은 반주자학적인 데서 찾기 보다는 실학파의 문제의식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학사를 돌이켜 보건데 도덕의 문제와 경제의 문제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던 유학의 본연의 이념은 宋代에 이르러 도가와 불교에 의한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인 피폐는 송대의 유학자들에게 유가의 이념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이었으며 현실적 경제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경향은 조선에 전래되어 의리학 중심의 주자학으로 전개되어 현실문제를 등한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었다. 이에 대하여 실학파는 그 반성으로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고취하여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이념을 실현시키려 는 방법적 입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실학파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첫째로 물자의 생산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주자학파의 이념적 핵심은 한마디로 의리정신이다. 이 의리정신은 의리와 경제를 대립적으로 양극화하였다. 따라서 의리를 높이고 경제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가치의식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주자학파는 의리의 객관적 규범을 절대화함으로써 현실의 사태를 비판하는데는 과감하였지만 동시에 관념적 이상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실학파는 국가의 폐단이 무엇보다도 빈곤에 있음 을 강조하여 물자의 생산이 백성의 생존과 국가의 존립에 필수적임을 인식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물자의 생산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물자생산에 대한 적극적 긍정은 선비들의 비생산적인 생활을 비판하게 된다. 星湖는 과거공부나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천시하며 평생토록 놀고 먹는 양반들을 좀이라고 비판하며 朴齊 家는 농업에 힘쓰려면 유자들을 도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丁若鏞은 놀고 먹는 선비를 농공상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처럼 물자의 생산을 필연적이요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그 효과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이 실학파의 공리사상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바로 실학파의 공리적 의리관이며 이것은 주자학파에 있어서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天理를 내용으로 하는 의리관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렇게 하여 증대된 물자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봉건적 사회계층이 고착되었을 때 도덕적 신분질서는 富益富 貧益貧하는 경제적 약자와 강자로 유리 화되는 변질현상을 가져왔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 실학파의 근본과제였다. 다라서 신분계급에 따른 특권을 제거하고 모든 백성이 균평하게 부를 향유하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들의 백성 개념에는 신분제도의 개혁이 들어있으며 모든 인간이 동등한 생존권을 가지고 있다는 평등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실학파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하였으며 그것은 이념과 현실의 괴리이며 또한 현실적 빈곤이었기 때문에 그 이론과 입장은 시대적 제약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즉 현실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여 백성이 극도로 빈곤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의 개혁과 기술의 이용을 중시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객관적 수단과 방법을 밝히는 동안 개인의 내면적 도덕근거에 대한 관심은 이차적인 것으로 후퇴하게 된 인상마져 주는 것이다.그러나 실학파의 주장은 한 시대의 모순을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실학파는 고정화된 형식적 규범을 거부하면서 신체를 가진 구체적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고양시켰다.

둘째로 현실과 이념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관념적 의리론자의 위선적 기만성을 부정하고 실질적 효과를 통한 진실성과 정당성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째로 실제의 공효를 추구하면서 사상을 사고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행동의 세계로 나오게 한다. 가장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가장 근본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3) 실학사상의 전개와 실학파의 계보

임진왜란을 거쳐 병자호란을 치르는 17세기 초기에 전통적 도학파의 일반적관심이 禮學과 義理論에 집중되고 있는 반면 일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의 경제적 내지 사회제도적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초기의 실학파적 학풍의 발생은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다음 세대에서 더욱 구체화될 문제의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학파의 준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와서 실학파의 성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을 때의 인물로 柳馨遠과 朴世堂을 들 수 있다. 유형원은 그의 主著인 磻溪隨錄에서 정치 사회 경제의 조직적인 제도개혁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율곡의 時務論에 영 향을 받고 있으며 독자적인 초기 실학파라고 할 수 있다. 박세당은 당시 排淸義理論에 대해 현실적 事大論을 제기하는 데서 도학파의 정통적 입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朱子註를 벗어난 경전해 석등에서 실학파의 입장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시기를 실학파의 맹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에는 17세기에서 제기된 실학사상의 발생배경이 되는 제반 사상적 요소들과 새로운 현실적 문제의식들이 정리되어 실 학파의 학파적인 확립을 이루게 되었다. 18세기에 나타난 실학파의 두 조류는 전반기에 출현한 星湖學派와 후반기에 출현한 北學派로 구분이 될 수 있다.

星湖 李瀷은 退溪를 사숙하고 이기론이나 예학 등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졌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사회제도의 개선에 있었다. 특히 이익은 당시 漢譯된 서학 문헌에 해박한 지식을 가져 천문 역법등 서양 과학지식에 적극적인 긍정 태도를 밝혔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신앙적 내용에 대한 부분적 비판을 보여 주면서도 윤리적 내용에 긍정적 태도를 가졌다. 이러한 서학에 대한 이익의 지식과 관심은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이른바 성호학파에 있어서 愼後聃 安鼎福등 攻西的 입장과 權哲身 李家煥등 信西的 입장으로 분열이 되지만 서학이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성호학파가 畿湖 南人을 중심으로 형성이 되었다면 다른 한편 老論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淸朝를 왕래하면서 그 문물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을 발전시킨 北學派가 있다. 湛軒 洪大容은 청 조의 서양의 과학지식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북학파의 선두가 되었고 도학파의 排淸義理論을 자주의식으로 극복하여 전 통적 질서의 근원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홍대용은 地球自轉說을 내세울 만큼 자연과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면 朴趾源은 청조 문 물을 수용함으로서 생산기술과 유통에 관한 개선을 촉구하면서 특히 소설을 통하여 전통적 질서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여 실학사상을 문학적 형식으로 발현시켰다. 또 朴齊家는 庶孼出身이 지만 正祖때 奎章閣 檢書官으로 활동을 했으며 北學儀를 저술하여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정리하였다.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했다는 경향에서 經世致用學派라고 한다면 북학 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 기술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利 用厚生學派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18세기는 실학파가 학파적 면모를 확립하였다는데 특징을 가지지만 그 철학적 입장은 아 직 형성되는 과정이고 전통의 기존제도에 대한 비판적 개혁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전반에 활동하였던 丁若鏞과 金正喜에 이르러서는 실학파의 철학적 기반이 확립되고 19세기 중엽의 崔漢綺에 있어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실학파적 철학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성호학파에서 나와 西學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고증학적 지식으로 경학에 대한 새로운 체계적 해석을 시도하였고 자신의 경학 적 입장과의 연관 속에서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金正喜는 朴齊家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를 계승하면서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하여 고증학적 실학사상을 전개하였다. 또 崔漢綺는 기존 전통으로부터의 영향이 극소화되고 서학의 영향도 자연과학을 벗어나서는 거의 용해되어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구성하는 진전을 이루었다. 

 

 

 

재야학자 성호 이익 의 실학사상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5)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上


성호선생의 사당인 첨성사. 오른쪽 위는 성호 선생 문집. <사진작가 황헌만>

ㆍ실학을 세워 변화의 논리를 개척하다

“이러다가는 망하겠다”는 세상

‘시대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독특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환경이 위대한 인간을 배출해내기도 하지만,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한 인간의 역할 때문에 새로운 물꼬가 터지면서 시대와 사회는 변혁의 기틀을 이루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실학의 비조는 당연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73)이다. 반계의 체계적인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실학사상을 정립하고 새로운 변화의 논리를 개척했던 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분은 바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광대무변한 실학의 집대성자는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었기에, 위당 정인보는 오래 전에 조선 후기의 3대 학자로 반계·성호·다산을 꼽고, 일조(一祖)는 반계, 이조(二祖)는 성호, 삼조(三祖)는 다산이라 하여 실학사상의 계승과 발전에 관한 주장을 폈었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은 40여년의 사이를 두고 일어난 조선 최대의 병란이자 국가와 민족의 참혹한 비극의 역사였다. 어떻게 보면 나라가 망한 정도의 생지옥 속에서 인민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고난의 연속이자 질곡의 세월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몸소 병자호란의 참상을 목격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온 반계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저 멀고 먼 전라도 땅, 부안(扶安)에 은거하면서 ‘이러하고는 나라가 망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나라와 백성을 건질 계책에 온 생애를 바치며 ‘반계수록’이라는 대저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나라나 세상은 ‘반계수록’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갈수록 세상은 더욱 부패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반계가 세상을 떠난 8년 뒤에 태어난 성호, 자신의 당내(堂內)집안의 외손이어서 척의까지 있던 때문에 일찍부터 반계의 학문에 주목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과, 침몰해가는 나라를 구제할 우국충정에 불탔었다. 그는 반계학문을 해석하며 자신의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역시 성호도 ‘이러다가는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배태된다. 성호는 ‘반계수록’에 서문을 짓고, ‘반계선생유집’에도 서문을 썼으며, ‘반계선생전(磻溪先生傳)’을 지어 반계의 학문과 사상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삶에 대한 전모를 밝히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해놓기도 했다.

반계의 시대 못지않게 성호의 시대도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며, 성호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 태어난 다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해석한 분이 바로 위당 정인보였다. 그러한 시대와 사회적 환경 아래서 반계·성호·다산의 학문이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찾을 길 없는 유적지

성호는 여흥 이씨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의 고관을 지낸 학자였고, 조부 이지안(李志安)도 지평(持平)의 벼슬에 학자로 이름이 컸으며, 아버지 매산 이하진(梅山 李夏鎭)은 대사헌(大司憲)의 고관에 명성이 높은 남인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귀양 갔으며, 귀양 간 다음 해에 성호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성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할 생각은 버리고 재야에 숨어서 큰 학문적인 업적을 이룩하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83세의 장수를 누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뒤이어 성호의 중형(仲兄) 이잠(李潛) 또한 당쟁의 여파로 젊은 시절에 장살(杖殺)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으니 가정적으로는 매우 비참하였다. 외동아들이자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이던 이맹휴(李孟休)가 일찍 세상을 뜨고 며느리까지 성호 앞에서 세상을 떠나 만년은 참으로 곤궁함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운에도 좌절하지 않고 천수를 다 누리고 큰 학파를 이루는 학자로 자리했다.

본디 성호 집안은 정릉 이씨라는 호칭을 들었듯이,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그곳을 뒷날에도 가끔 찾아다니기는 했어도 거주한 적은 없다. 아버지를 이별한 뒤에 어머니 권씨(權氏)를 따라 선산 아래인 경기 광주(廣州)에 속했던, 지금의 안산시 개발지역의 어디쯤에 있는 첨성리의 성호장(星湖莊)에서 일생을 보냈다. 여행이나 친척을 방문하는 때가 아니고는 그곳을 뜨지 않고 80 평생을 살았던 곳이 가장 분명한 성호의 유적지다. 순암 안정복, 소남 윤동규, 하빈 신후담, 녹암 권철신 등 제제다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학문과 의리를 논했던 곳이 바로 거기다. 자신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이맹휴, 손자 이구환은 물론 조카 이병휴·이용휴, 종손들인 이가환·이삼환 등 가학을 이은 학자들이 항상 모여 글을 배우고 실학의 논리를 익혔던 곳이 또 거기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개발되어 흔적도 없고 찾을 길도 없다.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이런 것을 일러 상전벽해라고 하는가보다. 조선 후기 남인계 학파로는 가장 큰 학단이자, 사상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진보적 실학사상이 싹터서 성립된 ‘성호장’의 옛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민족의 불행이다.


묘소의 묘비명을 읽으며

조선후기 명정승의 한 분인 번암 채제공은 단 한 차례 성호장으로 성호선생을 찾아 뵈운 적이 있다. 경기도관찰사라는 고관을 역임하여 지역을 순방하다가 첨성리로 성호를 방문했노라는 기록이 있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던 돌아가시기 몇 해 전의 성호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부분도 있다. 성호 사후이지만 다산도 22세에 그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희대의 유적지는 더욱 빛날 곳인데 찾지 못하는 아쉬움에, 우리는 성호의 혼이라도 뵈우려고 성호의 묘소를 찾았다. 생전에 선공감 가감역(假監役)이라는 학자에게 내리는 벼슬이 내려졌건만 성호는 벼슬에 응하지 않았다. 세상 뜨기 바로 전에 나이 많은 노인에게 내리는 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가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일생을 포의(布衣)로 마친 재야학자였다. 그래서인지 묘소는 정말로 검소하고 아담했다. 묘소 앞에는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던 영의정 채제공이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걸 어떻게 초라하다고 하겠는가. 겉이야 초라해도 그 글 속에 담긴 내용은 아무리 훌륭하게 치장한 화려한 신도비라도 당해낼 수 없는 천고의 멋진 내용이 담겨있었다.

도(道)를 안고서도 혜택을 끼치지 못했으니 한세대의 불행이로다(抱道而莫能致澤 一世之不幸) /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이 넉넉했으니 백세의 다행이로다 (著書而亦足嘉惠 百世之幸) / 하늘의 뜻은 아마도 거기에 있었지 않을까 한 세대야 짧지만 백세는 길도다(天之意無乃在是歟 一世短而百世永) /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 / 학통을 전해가는 일 자기가 해야지 남이 해줄 것인가(傳統由己而由人乎)

이런 명문의 명(銘)을 읽어가다가 아쉽고 서운함은 싹 가셨다. 묘소가 아무리 초라해도, 생전에 그렇게 오래도록 거주하면서 연구와 사색에 잠기고, 그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 옛집이야 흔적도 없지만, 저서를 통한 성호의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그 글 속에 모든 유적이 살아나 있기 때문이었다. 성호의 혜택이 크고 넓어서인지, 왕조가 망한 왜정 때에야 ‘성호문집’이 간행되었고, 이제는 ‘성호전서’가 완간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호의 위대한 학문을 접할 수 있으니, 역시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채제공의 높은 식견은 옳게만 여겨진다.

성호기념관을 돌아보며

근래에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명인달사들의 유물관이나 기념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다. 성호의 묘소 앞에 도로가 있고 도로 곁에는 ‘성호기념관’이 덩실하게 서 있다. 성호를 만나는 기분으로 기념관으로 들어갔더니, 우선 성호의 초상이 눈에 들어온다. 생전의 모습은 아니고 뒷세상에서 상상해 그린 유상이겠지만, 우선 학자이자 선비이던 성호의 모습의 역력했다. 벼슬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재야학자, 그런 꼿꼿하고 총명한 모습이 성호를 회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이외의 성호 유품이나 수택(手澤)이 완연한 친필 글씨나 저술 및 서한들이 그런대로 유품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날림공사로 체면치레의 보통 기념관이나 유물관과는 다르게 매우 정성과 뜻이 담긴 유물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만한 기념관을 만들고 유지도 제대로 해주는 안산시 당국은 칭찬받기에 마땅했다.

기념관 밖의 넓은 공간의 조경도 그럴싸하고, 정리 정돈된 모습이 매우 좋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성호의 초상화에 찬사를 바친 글을 지었다. 그 글을 읊으며 기념관을 나오는 우리의 발길은 그런대로 가벼웠다.

…저 덕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윤기 흐르고 함치르함이여

도가 저 몸속에 가득 쌓여 있는 데다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움으로만 흠뻑 적셔 있구료

…누가 이 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억센 물결 물리치고 공자의 학문으로 돌이킬까. 슬프지고.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6) 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 下


성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전경. 왼쪽 아래는 성호사설. <사진작가 | 황헌만>

“가진 자의 富는 덜어내고 없는 자에게는 보태주라”

학해(學海)를 이룬 성호학문

조선후기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는 성호 이익이다. 반계 유형원이 17세기의 학자라면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최고 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성호가 일생 동안 반계의 학문을 천착하고 정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듯이, 다산은 일생 동안 성호의 학문을 천착하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한우근 교수는 성호학문을 가장 넓고 깊게 연구한 학자였다. “평생을 두문분출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던 성호의 식견은 넓고 깊었다. 천문·지리에서부터 일반 민속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의 학문과 덕망은 널리 알려져서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 하나의 ‘학해(學海)’를 이루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모든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바다로 들어오듯이, 성호의 넓고 깊은 학문 때문에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학자들이 ‘성호장’으로 모여들어서 학문의 바다를 이룬 곳이 성호학파였다는 뜻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평생 국학연구에 몸 바치고 계시는 이우성 교수도 “실학의 개척자로서 실학의 가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킨 학자”라고 성호의 학문을 찬양하고 있다.

성호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근래의 학자들에게서만 나오지 않았다. 성호장에서 함께 생활하며 제자로서 성호의 학문을 익힌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과 덕행에 대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40년 가까이 성호를 모시고 학문을 닦은 조카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는 성호의 가장(家狀)과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성호의 삶과 사상, 학문적 업적까지 유감없이 서술하여 성호에 대한 기본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병휴가 내린 성호학문의 결론은 이렇다.

진부(陳腐)한 선비들과는 달랐다

“학문의 대요(大要)를 거론해보면, 경학(經學)은 주자의 집주(集註)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의 본뜻에 거슬러 올라갔는데 옛날의 유자들이 논하지 못했던 것을 주장한 바가 많다. 예(禮)에 대한 이론으로는, 반드시 사치는 버리고 검소함만 따랐으며, 경제정책을 논함에는 지위 높은 고관의 재산은 덜어내고 지위 낮은 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라는 평가다.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면, 경전에 대한 연구는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여 선진시대의 고경(古經)을 두루 연구했는데 주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냈다는 것이다. 주자학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일반 유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새 이론을 개발하여 새로운 학설을 첨가한 경학연구라는 것이다. 이른바 ‘번문욕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예학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예대로 지키고 실천하다가는 딱 망하기 십상인 세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호는 모든 예를 간소하고 절약하게 지켜야 한다면서 가능한 한 검소한 것만 따르고 사치스럽거나 호화로운 예는 모두 삭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인 논리가 제대로 실행되는 부면이다. 경제정책의 기본도 매우 진보적이다. 빈익빈·부익부의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기본 목표 아래, 가진 자의 것을 덜어다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보태주는 정책, ‘손상익하(損上益下)’의 탁월한 경제논리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성호의 학문이나 사상은 일반 세상의 유자들의 진부하고 무용(無用)의 공언(空言), 즉 실현 불가능한 논리들과는 분명하게 달랐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성호의 학문이 다산 정약용의 ‘다산학’의 원류이자 바탕이라는 주장이 증명되는 것이다. 성호가 옛날의 유자들이 주장하지 못한 새로운 경학논리를 주장하여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점이, 곧 다산학이 성호학문과 주자학을 뛰어넘어 다산경학이라는 독창적인 실학적 경학사상이 정립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가진 자의 부는 가능한 덜어내고 없는 사람에게는 보태주려는 ‘손상익하’의 경제정책이야말로 다산 경제학의 기본 요소였다. 다산의 유명한 토지제도론인 ‘전론(田論)’이나 ‘정전의(井田議)’ 등은 바로 성호의 경제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진부하고 무용한 공언이나 일삼던 성리학자들의 관념적인 유희와는 다르게 실질·실용·실사구시적 실학사상을 정립했다는 주장이 여기에서 부합되고 있다.

문인 윤동규의 행장

소남 윤동규는 성호 문하의 큰 학자로 성호의 행장을 기술했다. 성호의 일생을 차례대로 서술하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공업에 대하여도 빠짐없이 자상하게 기록했다. 자신의 말대로 이병휴의 가장에서 8~9할을 인용하여 기술했노라면서 이병휴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주장을 종합하여 적었노라고 했다. 그러나 윤동규는 성호의 죽음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슬픔이 조선 인민의 슬픔임을 토로하였다. “한 차례 시행해보지도 못하고 뜻만 품은 채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라고 애통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성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이 부와 권력에만 집착했던 집권층이나 벼슬아치들에 의하여 천대받고 말았던가. 반계·성호·다산의 그 높은 사상과 철학이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아갈 정책으로 전혀 구현되지 못했음은 역사의 비운이자 조선인민의 불행이었다.

제자 안정복의 『동사강목』

성호학파에는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는 학설이 있다. 이우성 교수의 주장이다. 다산 정약용은 오래 전에 성호 가문의 찬란한 학문역량에 대한 찬탄을 발한 적이 있다. “성호선생은 하늘에서 솟아나고 사람 중에서 빼어나며 도덕과 학문이 고금에 초월했던 분이라 자제들 중에서 직접 학문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모두 대유(大儒)로 성장했다. 조카 이병휴는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아들 맹휴는 경제와 실용학문에, 조카 이용휴는 문장학에, 족손 철환은 박식으로, 종손 삼환은 예학으로 뛰어나고, 손자 구환(九煥)도 할아버지를 이어 명성을 날렸다”라고 했던 것처럼 집안 전체가 ‘학해’를 이루기도 했지만, 제자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호의 학문을 이은 분은 순암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이 40대에 완성한 역사책인 ‘동사강목’은 성호의 의견을 대체로 반영한 안정복의 저서다. 성호와 순암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를 분석해보면, 동사강목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서를 순암이 성호에게 보냈으며, 성호의 답변에 따라 내용에 많은 보충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성호가 가장 믿고 사랑했던 제자 안정복. 성호라는 스승을 가장 존숭하면서 광주의 경안에서 안산의 성호장까지 100여리의 먼 길을 네 차례나 직접 찾아가 학문을 물었고, 이후 수없이 많은 편지로 학문을 논했던 제자가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은 성호의 우파 제자다. 그가 성호의 뜻에 따라 ‘동사강목’을 저술하고, 성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가필하고 요령 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순암 문하에서도 제제다사들이 배출되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도 그 문하에 출입했던 기록이 있다. 대표자는 하려 황덕길이고 하려의 제자가 성재 허전(許傳)으로 조선 최후의 성호학파의 큰 학통을 이었다.

성호문하의 좌파 권철신

성호는 일찍부터 서양 학문과 사상을 접했다. 특히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전적으로 크게 찬성하면서 서양인들의 우수성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사상으로 천주교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문하의 좌우파는 여기서 갈리고 있다.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그런대로 수긍하지만 곧 난리를 당하고 파멸될 것이 분명한 천주교사상에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부류가 우파에 속한다. 좌파의 효장은 성호문하에서 가장 젊은 층에 속하던 녹암 권철신이다. 성호의 비판적 주자학을 넘어 새로 경학논리를 수립한 학파다. 서양의 과학사상은 물론, 천주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밝히지 못했던 학자들이 권철신과 함께 했던 좌파다. 정약전·정약용도 애초에는 그 일파였으나 가장 철저한 좌파는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순암의 사위)이나 이벽이 그 학파의 효장이었다. 물론 그들은 순암 안정복의 예언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불꽃으로 변하듯이, 천주교로 파멸한 성호의 좌파들은 다산 정약용을 통해 실학사상으로는 큰 공업을 이룩했으나, 성호의 학통을 지키고 학문을 전파한 계승자들은 우파에 속하는 안정복 문하의 학자들이었다. 건전한 보수 우파는 그런데서 학문 계승의 큰 역할도 해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통시대의 평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성호의 큰 학파는 다산 정약용으로 집결된다. 16세에 성호의 유저를 읽어보고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던 다산. 평소에 “내 학문의 큰 틀은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라고 했던 대로 성호가 뿌린 실학사상은 다산을 통해 제대로 집대성되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스스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천지의 웅대함과 해와 달의 광명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성호선생의 힘이었습니다”라고 갈파했듯이, 조선의 가장 진보적 논리이자 대표적 사유의 한 체계인 실학사상은 성호를 거쳐 다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 논리로서 민족의 지혜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보성이, 언제쯤 활짝 꽃을 피우고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지. 역사와 사회의 겉에 우파만이 판치는 지금 우울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꼬마큐레이터

 

실학사상의 대두와 전개

1. 실학 사상의 대두

17·18세기 조선봉건사회는 붕당정치가 무너지면서 치열한 정쟁을 유발하여 노론 일당체제로 귀결

정권에서 배제된 정치세력은 주로 근기지방에 근거지를 둔 남인들. 이들은 재야학자로서 농촌에 머물면서

 당시 사회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강구
경제적으로는 양란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농업면에서는 대동법의 실시와 화폐의 사용,

민영수공업의 발전 등으로 상품화폐경제가 발전

농촌에서는 농민층의 분해가 일어나 대지주와 빈농층이 발생하고, 도시에서는 도고상인의 활동으로 영세상인은 몰락의 길로
국외적으로는 청과의 관계가 열리고, 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론이 起

청 : 명말 청초의 실학적 학술사상의 전통을 계승한 고증학이 일어나 과학적인 학문연구 방법을 발달시키고 있었고

서양의 과학기술과 사상이 서학으로서 도입

중세봉건사회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고 있던 성리학이 보수화, 교조화, 폐쇄화의 말폐만 드러내고

조선후기 봉건사회 해체기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함

실학자들은 점차 성리학의 교조적인 주자해석에 따라 경전을 해석하기를 거부, 나아가서는 성리학 자체를

극복하는 단계까지 나아가 근대문물을 도입하려는 개화사상으로 연결

근기남인 ; 토지문제를 비롯한 농업문제에 관심
북학파 : 18세기 후반 집권 노론층에서 발생한 북학자들→ 주로 도시에서 성장한 이들은 淸의 우수한 문물을 접하고

상공업의 발전을 주장
실학자들의 연구분야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위시하여 경학,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실학자 : 고대사회 민본주의 이상을 계승, 개혁의 대상은 현실임을 깊이 자각

중국 중심의 중세의 華夷사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등에 관심을 갖는 민족주의적 성격



2. 농업 중심의 개혁론

성리학의 관념화, 예학의 의식화에 대한 반성에서 下學적인 민생문제에 주목하여,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며, 유형원(1622-1673) - 이익(1681-1763) - 정약용(1762-1836)을 중심으로 개혁론을 전개

학문적 기반이 원시유학인 六經체제이고 이는 바로 요순 삼대의 문물제도이므로 삼대의 이상인 민본주의를 지향하고

 민의 토대인 토지제도에 관심을 집중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과 정전론 등이 각각 제시

유형원 : 《반계수록》→ 전제, 敎選, 任官, 직관, 녹제, 병제 등에 관하여 그 역사와 현실을 상세히 검토하고 비판

균전론 : 以田爲本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모든 군역과 부세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일률적으로 부과하되, 다만 사대부에게는 특권을 인정하여 2-4경(입학만 하면) 내지 6-12경

            (관직자의 경우 資品에 따라)의 토지를 분급  궁방, 관아, 토호, 양반들의 토지집적으로 야기된 토지제도의

           문란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토지의 국유화와 균전적 재분배를 목표로
          지주-전호제의 잔존을 인정하는등 신분제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

이익 : 《성호사설》과 《곽우록》

한전론 : 국가가 1호당 기준 소경전을 1경으로 작정하여 그것을 영업전으로 하고 영업전 이내의 매매는 금지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자유매매를 허용→ 당시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대토지 소유의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 점진적으로 토지소유의 균등화를 이룩하자는 방안

⇒ 균전론과 한전론은 지주-전호제적인 농업생산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는 있지만 시급한 해결을 요하던 농민들의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고, 또한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새로운 차원으로 진전시키는데는 한계가 있는 주장

정약용 :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및 《전론》《탕론》

여전론 : 지주-전호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당시의 사회경제체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농민위주의 토지개혁론. 여전제의 기본원리는 전국에 자연 촌락을 기초로 하여 30호를 1단위로 하는 閭를 설치하고, 3여=1리, 5리=1방, 5방=1읍으로 이루어지는 행정체계를 구축한 뒤, 각 閭내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閭民의 공동소유로 만들어 공동경작하도록 하고, 생산물은 여민이 그 동안 투입한 노동량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

⇒ 봉건지주층을 부정하고 농민층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 것.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농업생산의 사회화를 통하여 이룩하려고 한 점에서 혁신적 내용

현실의 제조건과 타협한 절충안이 井田制論 : 국가가 공전을 매입하거나 지주로부터 사유지를 기증받아 가족의 노동량에 따라 재분배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토지의 균산화를 이룩하되, 이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토지 경작의 재분배를 실시하여 전호의 소작지 보유지만이라도 균평하게 하자는 주장

⇒ 지주-전호제의 존속을 현실적으로 인정한 위에서 농민들에게 차경지나마 균등하게 분급하자는 점진적인 개혁안

서유구(1764-1845) : 屯田論

지주층의 경영전환을 중심으로 한 농업개혁론

국가나 지주층이 대규모로 농장을 건설하여 농민을 농업노동자로 종사시키고, 국영농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경영형 부농층 가운데 전농관을 선발하여 그들의 경영방식으로 경영케

⇒ 지주-전호제의 기본적인 모순관계를 개혁은 하되 그것의 타도로서가 아니라 질적인 전환을 토둽여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경제기구로서 편입하려 토지제도 이외에 신분제도, 과거제도, 군사제도, 관직제도 등에

    관해서도 광범위한 주장
   사농일치의 원칙에서 신분적인 차별을 없이 하고,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하여 능력본위로 관리를 등용할 것을 주장
   병농일치와 국가의 재정을 좀 먹는 불필요한 관직의 제거 등 주장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유통에 의한 농촌경제의 침식을 방지할 것을 주장



3.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기술 혁신을 지표로

북학운동 : 18세기 홍대용(1731-1783), 박지원(1737-1805), 박제가(1750-?),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9-?) 등에 의하여 시작. 18세기 중반부터는 북벌론을 대신하여 청의 실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그 문화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으로 인식의 대전환

내재적 요인 : 종래의 성리학적 인식을 극복

湖洛論爭

호론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 人物性異論→ 기존의 화이론적 사유체계를 그대로 계승
낙론 :서울지방의 학자들. 人物性同論 → 화이론을 극복하는 논리체계
북학파→ 人物性同論 계승.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하지않음으로써 병자호란 이후 현실성을 잃어가던 북벌론을 대신해 대청의식의 변화. 나아가 사람에 대한 관심인 심성론 뿐만 아니라 물체에 대한 관심으로 관심영역이 확대. 이 과정에서 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생산력에 대한 관심도 증대

낙론계 노론 집권층의 젊은이들은 子弟軍官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건륭문화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청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각성

홍대용 : 《연기》(청에의 기행문) 《임하경륜》 《의산문답》

《의산문답》→ 실옹과 허자를 등장시켜 문답에 의해 조선학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자연과 우주의 문제를 연구할 것을 주장

박지원 : 노론 벌열 출신. 규장각 검서로 있으면서 북학을 체제 내의 확산에 기여

《열하일기》→ 청의 우수한 문화를 도입할 것, 상공업의 발전과 상품유통의 원활화, 기술혁신과 생산의 촉진,

                      해외 통상의 장려를 통한 국부의 증진 등을 주장

박제가 : 《북학의》→ 상업이 사농공을 유통시켜 주는 없어서는 안될 산업이라고 인식하고 유식하는 양반층을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소비를 장려해서 생산을 자극해야 하며, 부국책으로 해외무역을 장려해야 한다는 근대 경제사상적인 견해

이덕무 : 청의 기행문인 《연기》와 백과전서인 《청장관전서》

유수원(1694-1755) : 소론 가문. 북학파로 분류되지는 않음, 영조 31년(1755) 반역의 혐의로 처형

《우서》 →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권력에서 탈락된 양반계층은 상업을 경영할 것, 상업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정부가 허가하는 시전의 독점 상업권을 철저히 보장하며 대상인과 군소상인이 자본을 결합하여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상업을 경영할 것, 상설 시장을 설립하고 이를 통한 상업도시를 형성할 것 등을 주장

당시 심각한 문제였던 錢荒을 해결하는 방안을 상품화폐경제의 확대에서 求

북학파들의 주장은 정조대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여 수용되기도

19세기에 김정희(1786-1856)에 이르면 사상적인 틀을 완성하면서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각되고 중인층에까지 확산

청의 고증학을 수용하고 실사구시의 학문정신으로 경서, 금석, 전고 등에 과학적이고 실증적 연구

김정희 : 24세 때 父의 연행사로 수행하여 청의 제일의 학자인 옹방강, 완원 등과 사제의 의를 맺고 청의 고증학의 진수를 터득.

            귀국하여 북학의 학문적 수준을 일보 전진시켜 사상적 심화를 도모



4. 실학사상의 개화사상에의 연결

근기남인학자들의 주장 ; 노론일당 체제하에서 정권에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체제 내에 수용되지 못하고 개혁론의 수준에 머물고
이익의 제자 가운데 이벽, 권철신, 권일신 등 좌파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서학에서 찾음으로써 이후 정부로부터 심한 탄압. → 그들이 주장한 독립자영농의 육성은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제시한 평균분작으로 나타남

실학이 개화사상으로 연결된 인적 계보

정약용→ 최한기, 김정희→ 박규수, 강위, 신헌(신관호)

노론 집권층에서 성장한 북학파의 주장은 정조대에 규장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체제내로 수용, 세도정국하에서

 김정희에 의해 더욱 학문적으로 성숙

김정희 문하에서 배출된 조희롱, 이상적, 허유, 오경호, 강위 등 중인계층은 상공업 사회의 주도층이 될

상인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관배가 중심

신헌, 민태호 등 양반사대부 계층은 19세기 후반 개화운동의 핵심세력

최한기 : 기의 철학을 주장하여 실학이 개화사사응로 전환될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닦고 스스로의 근대화 기술을 연구.

개국통상론을 주장, 선각적인 개화사상가로.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 연결되는 가교의 역할

박규수 :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등 선배실학자들에게 출입. 윤종의, 남병철 등 말기 실학자들과 교유. 셔먼호 사건 때

평안감사로서 국교수립을 주장. 강화도조약 체결 때는 우의정, 문하에 출입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은 개화당으로 활약

통상개국론이 개화사상에 계승 발전→ 단순한 무역이 아니고 기술도입을 중시하는 것으로 개화사상가들의 기술도입론으로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