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흘읍 연혁
▷ 1895년 이전 : 남면(南面)이라 칭함. ▷ 조선조 고종 32년(1895년) : 외소면(송우, 이동교, 무림, 직동, 이곡리 일부)과 내소면(이가팔, 초가팔, 무봉, 고모, 이곡리 일 부)을 통합하여 소흘면으로 변경 ▷ 1996. 2. 1 소흘읍으로 승격
▣ 송우리( 松隅里 ) - '송우(松隅)' 의 순수한 한글뜻은 '솔모루' (소나무가 많은 모퉁이 마을) 이다.
송우리 - 하늘의 보물이 묻혔다는 천보산 줄기의 배꼽 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칠봉산, 왕방산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와 죽엽산이 있어 옛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30년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소나무(松林)가 무성하여, 마을이름을 '솔모루'라 불리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초동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우리'라 하고 소흘읍에 편입시켰다. 현재는 신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개발이 한창 진행중이다.
태봉산(胎峰山)은 송우초등학교 바로 뒤에 있으며 높이가 낮고 아담한 산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송림(松林)이 무성하고 경관(景觀)이 아름답다고 해서 옥녀봉(玉女峰)이라고도 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정희(禎禧)공주의 태(胎)를 태워 이곳에 매장한 후에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제(祭)를 지냈다하여 태봉산(胎峰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정상에는 팔각정과 쉼터가 있으며 팔각정 한가운데에는 태를 모셨다는 큰봉이 자리잡고 있다.[ 태봉산팔각정 사진 참고 ▲ 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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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말(酒幕) - 송우리시장 5일장이 열리는 이곳은 강원ㆍ함경(江原ㆍ咸鏡) 양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허브)이어서 숙박시설과 모든 물자가 모여들어 상업이 매우 번창한 곳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약500여년 전 이태조도 함흥으로부터 이곳을 거쳐 한양에 도달했다는 유래담도 있다. 이곳을 장(場)이 번성하여 “장터”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큰길이 뚫리고 주변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어 옛모습은 사라져 가지만, 5일장(날자에 4와 9가 있는날)이 열리고 있으며, 휴일과 겹치는 장날에는 외국인 근로자들로 문전 성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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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당골(渼洞) - 지금으로부터 약 220여년 전 이씨 일가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곤당골”이란 태봉산(胎峰山)의 옥여봉(玉女峰)이 곱고 아름답다고해서 이곳을 “곤당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봉산을 끼고 있는 동네이며 지금은 아파트 건립이 한창이다..
산막골(山幕골) - 곤당골 맞은편 도로 건너 재림공동묘지 옆에 있는 동네다. 이곳에는 최씨(崔氏)의 묘를 지키는 산막이 있어서 이곳을 “산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삿골(李司果谷) - 사과(司果)라는 벼슬을 하던 이씨성을 가진이가 이곳에 이주하여 살게된 이후 이곳을 “이사과골“이라 불렀는데 이말이 줄어서 ”이삿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갈뫼(秋山洞) - 이곳은 농사를 많이 지어 부촌(富村)이었던 관계로 춘궁기(春窮期)를 맞아 남들이 모두 곤궁을 겪는 때라도 이마을 사람들만은 봄도 가을처럼 식량이 풍족하다고 애서 “갈뫼”라 부르게되었다 한다. 또 이마을을 석문리(石門里)라고도 부르는데 이 마을 서편에 돌을 쌓고 문을 만들었다고 해서 “석문동”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봉모루(年峰隅) - 송우리 경원가도(京元街道) 양편에 발달한 마을로 이성계 장군이 이곳에서 유숙(留宿)하였는데 이 어여(御輿)의 뜻으로 연(輦)자와 소랑(小岡)의 뜻인 봉(峰)과 모퉁이라는 우(隅)를 떼어 연봉우(蓮峰隅)가 유래되고 이에서 연꽃(蓮花)의 의미로 변하여 지금의 연봉우(連峰隅)라 쓰게 되었다.
젖띠는개울 - 연봉모루 앞에 있는 내이다. 마을의 부인들이 아기의 젓을 땔 때 이 물로 젖을 씻으면 젖이 떨어졌다고 한다.
▣ 이동교리(二東橋里)
이동교리 - 포천시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한내(抱川川)의 “두번째 동교”라 해서 이동교(二東橋)라 부른다
용상동(龍床洞) - 이태조가 함흥으로부터 한양으로 환행(還幸)하던 길에 이곳에서 주무셨다고 해서 이 마을을 임금님의 침상(寢床)이란 뜻으로 “용상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전(全) 씨가 들어와 정착하더니 지금은 전씨의 외척인 김해(金海)김씨가 들어와 후손이 번성하고 있다.
부인터(婦人터) - 이조가 용상동에서 주무시게 되었을 때 왕비(王妃)는 이곳에서 주무시게 되었다고 해서 부인(婦人터)라고 한다 물안(水內)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 전에 개설된 마을로 평택(平澤) 임씨인 임득의(林得義)가 임진왜란 때 홍주(洪州)서 전공을 세워 선조대왕으로부터 이 땅을 하사받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임씨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남쪽 산 기슭에는 온수(溫水)가 나왔다는데 이 마을의 위치가 그 물(水) 안(內)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물안”(水內)이라 부른다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을 무란(茂蘭)이라 하여 난초(蘭草)가 무성했다고 하나 이것은 물안∽무란이라 변한 것을 한자로 표기한 데서 비롯된 이야기일 것으로 보인다
축석령(祝石嶺) - 포천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포천시 어룡리에 오백주라는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벼슬살이 중에 부친이 병환으로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이곳 고개를 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마침 맹호(猛虎)가 앞을 가로막으며 덤비려 하자 이 선비는 부친의 급환(急患)으로 가는 효(孝)의 길을 가로막는 까닭이 무어냐고 일갈(一喝)하자 호랑이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집에는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산삼(山蔘)과 석청(石淸)이 있어야만 한다기에 이 선비는 산 속을 헤메고 있던 중이었는데 전일의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선비는 호랑이 등에 탔더니 이곳에 선비를 내려 놓았다. 그래서 선비는 이 근처에서 산삼을 구할 수가 있었으며 이제 다시 석청을 구하고자 할 때 마침 벌 한 마리가 안내 하거늘 그 벌을 따라가 바위틈에서 또 석청을 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석청을 얻었다고 해서 축석령(祝石嶺)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무림리(茂林里)
무림리 - 옛날에 고씨(高氏)와 문씨(文氏) 두 처사(處士)가 있어 이곳에 정착하여 후손이 번창하여 “무림리”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을 분수령(分水嶺)으로 북쪽으로는 포천천(抱川川)과 남쪽으로는 중랑천(中浪川)으로 각각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의 분기점(分技鮎)이기도 하다 중말(中村) 내루(內樓)에 입주했던 고처사(高處士)와 어렸을 때부터 친근히 지냈던 남평 문처사(南平 文處士)가 이 마을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자연경치에 감탄하여 이곳에서 영주하게 되었는데 두 처사는 계속해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이곡리
배골(梨谷) - 이 마을의 지형(地形)이 배(舟)를 닮았다고 해서 배골(舟谷)로 불이우던 곳이었으나 조선 철종(哲宗)이 광릉(光陵) 세조대왕 능에 참배하러 가던 때 마침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다. 마침 계절이 꽃피는 때라 배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봄 경치가 한창 무르익어 철종은 이 마을 이름이 배골(舟谷)이라 하니 그 보다는 배(舟)를 배(梨)로 고쳐 배골(梨谷)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노라 하여 이후부터는 배골을 이곡(梨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철종은 광릉에 참배할 때마다 이곳을 경유하였는데 그 까닭은 임금은 단(壇)에 행행(行幸)할 수 있어도 묘소에는 행행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즐선리(櫛仙里)에는 철종의 부군(夫君) 묘소가 있다 솔개(松峴) 이 마을 앞에 소가 누운 것 같은 고개(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처음에는 와우현(臥牛峴)이라불렀으며 속칭으로는 쇠현(牛峴)이라 하였다 그 “소”가 다시 “솔”로 변하여 “솔개”(松峴)로 변했다는 것이다
▣ 직동리(直東里)
직동(直洞) - 이 마을은 산간 부락이라서 폭이 좁고 길어서 직곡(直谷)이라 부르다가 직곡동(直谷洞)이 다시 줄어서 “직동”(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득재(鳩峴) 이 마을은 노고산(老姑山) 기슭에 위치하여 고모리(古毛里)로 통하는 장령(長嶺)의 모습이 흡사 비들기가 나는 모습과 같아서 “비득재”라 일컫게 되었으며 한자로는 구현(鳩峴)이라 적는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험준하여 그동안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으나 개척이 미진한바 있다
▣ 고모리
고뫼전(姑墓전) - 옛날에 노고산(老姑山) 앞에서 어느 불쌍한 할미(姑)가 외로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 할미를 매장한 묘 앞에 개설된 마을이라하여 이곳을 “고뫼앞”이라고 하고 또는 고묘(姑墓)ㆍ고모(古毛)라 쓰기도 한다 한성골 이 마을 뒤로는 죽엽산(竹葉山)이 둘러싸고 있는데 노을(霞)이나 안개(霧)가 마치 성(城)을 둘러 쌓은 듯이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하성동”(霞城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하성동이 다시 변한 것이 “한성동”이다
▣ 이가팔리
갈오리(葛塢里) - 애초에는 이 마을 중앙 위치에 연못이 있었는데 온 연못을 덮을 만큼 연꽃이 무성하니 연(蓮)은 차츰 없어지고 사방 산에 칡(葛)이 무성하여 뚝(塢) 모양을 만들었으므로 이 마을을 “갈오리”라 부르게 되었다 방아다리(春橋) 이 마을은 고모리(古毛里)와 초가팔리(初加八里)로 통하는 길목에 춘자(春字) 모양의 다리가 있어 춘교(春橋)라 하고 또 속칭으로는 “방아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벌말(坪村) 이 마을은 약300년 전에 강원도 방면으로부터 이주해 온 김해김씨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 전체가 넓은 벌판(原野)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예로부터 이 마을을 “벌말”이라 불렀다 벌말은 벌판마을이란 뜻이다
▣ 초가팔리
능말(陵) - 이 마을에는 고창현감(高敞顯監) 조방보(趙邦輔)의 묘가 있는데 그 규모가 커서 묘라기 보다는 차라리 능(陵)과 같다고 ?서 이 마을을 “능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붉은덕이(紅) 이 마을 뒤에는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에는 어찌나 나무 한그루가 없던지 붉은 흙이 그대로 노출(露出)되어 있어서 이 마을을 “붉은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음성말(陰城里) 이 마을에 살던 성천경(成天慶)의 7대손이 성해응(成海應)이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낸 일이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마을을 “음성현감이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마을 이름을 음성리(陰城里)라 부르게 되었다
▣ 무봉리
거친봉(茂逢里) -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220여년 전부터 상산김씨(商山金氏)가 개척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주해 와 그들의 후손이 번성하였다 이곳에는 수목(樹木)이 워낙 무성하여 이 마을을 “거친봉”(茂蜂)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골(寺谷) 조선 선조(宣祖) 시대에 이 마을 뒷산에 사찰(寺刹)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다만 이 산봉우리에 약우현(藥佑峴)이란 곳에 석불(石佛) 하나가 남아 있엇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석불을 송산(松山)에 사는 어느 사람이 도적질하게 되었는데 그 날밤 그 사람은 온 가족들이 모두 심한 복통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음날 그 사람은 다시 그 석불을 도로 반환했다는 전설이 있다 막골(幕谷) 이 마을은 이성계 장군이 함흥(咸興)으로부터 환행(還幸)할 때 이동교리 용상동(二東橋里龍床洞)에서 주무실 때 후방 경계로 초병(哨兵)들이 막(幕)을 치고 경계하였다고 해서 “막골”(幕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충목단(忠穆壇) 조선 6대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분인 유응부(兪應孚)는 원래가 몹시 가난하여 온갖 고생을 겪으며 어머니를 봉양(奉養)하던 사람이다 그 후에 이 마을에서는 유응부를 기리기 위하여 선원(書院)을 건립하였던 바 대원군 시정레 폐쇠되고 그 후 유림(儒林)들이 힘을 모아 단(壇)을 모으고 그 이름을 충목단(忠穆壇)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