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4 월 20일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바람, 9시부터 비가 내림
☞산행거리: 도상거리 22km / GPS 23.8km / 9시간 40분 소요☞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탄포 삼거리-운교마을-혼백산-운교마을-천봉산-골안고개-70봉-옥천고개-송정고개
통제골 고개-덕촌고개-129봉(월악산 갈림길)-장담고개-계룡산(152.7봉)-월악육교-지석묘요즘 사는게 너무 정신이 없어 나 자신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이다.
탄포 삼거리(07:00)
오늘의 들머리인 탄포 삼거리에 도착하니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것만 같은 분위기다.
짙은 구름이 낀 탓 때문에 날씨가 상당히 차갑다.
탄포(炭浦)부락의 모습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나 군지(郡誌)에 따르면 입포(入浦) 혹은 탄포(炭浦)라고 되어 있다.
입포(入浦)라 함은 서(西)쪽 득량만(得糧灣)의 해안선(海岸線)이 마을앞 어구까지 들어왔다하여
입포(入浦)라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탄포(炭浦)라 함은 군지(郡誌)에 따르면
마을 부근(附近)에서 숯을 구었다하여 탄포(炭浦)라 한다고 하였고 부노(父老)들의 말에 따르면
질매산(山) 서(西)북쪽 중(中)턱에서 탄(炭)이 나오나 사탄(死炭)이 나온다하여 탄포(炭浦)라 한다고
하니 어느 설(設)이 정설(正設)인지 알수가 없다.본동(本洞)이 원래(元來)는 남서면(南西面)이었는데
일제대정3년(日帝大正三年) 갑인(甲寅) 西紀 1914年에 실시(實施)된 지방행정구역개편에
(地方行政區域改編)에 따라 남양면(南陽面)으로 편입(編入)함과 동시(同時)에 숯캐라는
동명(洞名)을 음차(音借)하여 탄포(炭浦)라 개칭(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탄포 삼거리에서 검문소를 끼고 좌측으로 돌아서면 문을 닫은 구멍가게와 아평마을
표시석이 있는 곳으로 접어드니 고흥을 가로 지르는15.27,77번의 도로가 지나는
탄포육교를 지난 다음에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탄포육교(07:08)
탄포육교에서 바라본 벌교쪽과 호남정맥상에 있는 존재산의 모습
육교를 건너자마자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측에 여산송씨(礪山宋氏)의 묘지가 있다.
여산송씨 묘지와 우측의 철재 휀스를 끼고 지맥길을 이어간다
아주 낮은 능선으로 올라서니 길이 전혀 보이고 않고 잡목이 길을 막고있다.
조금을 더 진행을 하니 부드러운 머위가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묘지가 나오는데 이곳은 이제 갓 올라오기
시작한 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갑자기 맘속에 탐욕이 싹트기 시작한다.
見物生心이라... 베낭을 벗어놓고 고사리를 꺽기 시작하는데 30분정도만에
꽤나 많은 고사리를 수확하여 베낭에 집어 넣는다... 나홀로 산행의 전리품으로.
30분동안 수확한 부드러운 고사리
조금을 내려오니 이제 갓올라오기 시작한 두릅도 수확하고...
도로로 내려서서 좌측 아평마을 표시석을 끼고 마을로 간다.
아평마을의 유래
아평(鴉坪)이란 촌전(村前)의 지형(地形)에 따른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依)한 것으로
이는 검은 갈가마귀가 사람이 죽은 시체(屍體)를 보고 이를 쪼아먹기 위하여 날아드
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갈가마귀 아자(鴉字)와 들 평자(坪字)를 써서 동명(洞名)을
아평리(鴉坪里)라고 개칭(改稱)한 것이다. 검은 갈가마귀는 촌전(村前)의 안산(案山)이며
죽은 사람의 시체(屍體)는 촌전저수지(村前貯水池) 밑에 길게 뻗어있는 벌판을 말한 것이다.
도로에서 대밭을 끼고 우측으로 올라서니 좌측으론 관상수를 심어논 밭이있다.
대밭을 지나 본격적인 능선으로 접어든다.등로로 접어드니 취나물도 많이 보이고...
묘지 아래에는 부드러운 두릅이 보여 베낭을 내려놓고 두릅을 딴다
묘지위로 올라서니 길은 거의 보이지 않아 감각적으로 길을 걸어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운무가 낀 고흥만이 시야에 들어오고능선 아래 철조망 너머로는 염소를 키우는 목장과 운교마을이 보인다.
운교마을의 유래
구전(口傳)에 의(衣)하면 거금(距今) 약3백여년전(約三白餘年前) 이조숙종연간(李朝肅宗年間)으로
추정(推定)되는데 그 당시(當時) 선인(先人)들이 동명(洞名)을 두루실(주곡周谷)이라 명명(命名)하여
구한말(舊韓末)까지 약2백여년간(約二百餘年間) 불러오다가 왜정대정3년(倭政大正三年)갑인(甲寅) 西紀
1914年 지방행정구역개편(地方行政區域改編)에 따라 구름다리(운교雲橋)라 개칭(改稱)하게 된 것이다.
두루실(주곡周谷)이라 함은 마을안이 두루 골짜기라 하여 두루실(주곡:周谷)이라고 한 것이며,
구름다리(운교:雲橋)라 함은 그 당시(當時)의 지방명물(地方名物)이었던 구름다리(운교:雲橋)의
교명(槁名)을 따서 동명(洞名)을 구름다리(운교雲橋)라 개칭(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도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초반부터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니
지난해 1구간과 마찬가지로 초반부터 고흥지맥길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첨산(尖山:313m)고흥군 동강면 대강리, 마동리 한천리에 걸쳐있는 산으로고흥의 수문장처럼 고흥군 초입에 자리잡고 있어 주민들이
신성시하고 함부로 오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산이란다.
조정래의 소설“태백산맥”에서 김 범우의 눈을 통해 필봉(筆峰)
또는 신비로운 산으로 묘사되기도 한 산이다.
마동이라 불리는 마륜마을(馬輪)은 선비들이 마차를 넘너드는 마을이고
과거보러 한양이나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를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가 첨산 아래에 있는 뱀골재이다.
이 고개는 벌교에서 고흥을 넘어가는 고개로 선량한 선비는 미녀가 길을 안내하여
과거급제를 한 반면, 부도덕한 선비가 고개를 넘을때는 큰 뱀이 고개에 진을치며 고개를
막아 과거에 낙방했다는 전설이 있다.
탐관오리나 부도덕한 사람을 고흥땅을 들지 못하게 하려는 선조들의 재치가 엿보인다.
첨산은 정유재란에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막하로 활동했던 송대립 장군이 의병을 모아
분전하다가 순절한 곳으로 이곳 첨산을 숫첨산, 순천 동송리에 있는 첨산을 암첨산이라 부른다.
목장 안에는 까만 염소들이 노닐고 있고 운교마을과 고흥만이 보인다.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능선 위에는 묘지 5기가 있고 우측으로 임도가 나온다.
이곳에서 고흥지맥은 우측 임도로 내려가야 하나 좌측으로 10분 거리인
혼백산으로 오르기 위해 좌측으로 오르는데 인적이 드문 탓인지 길이없다.
혼백산 오르는 길에 대산꾼 준.희님의 흔적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간벌을 한 다음에 아무렇게나 방치한 나무들 때문에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혼백산(180m:08:05)
고흥군 남양면 침교리에 있는 산으로 산 정상에는
묘지 2기만 덩그러니 있고 인적이 드문 탓인지 아무런 표식도 없다.
고흥지맥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으로 정상 좌측인 침교리
방향으로는 방화선 임도가 뚜렸이 나있다.
혼백산 갈림길(08:15)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한 채 다시 임도가 있는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편안한 임도로 내려오니 좌측으론 조그만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고
우측으론 운교마을이 보이며 길가에는 머위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운교마을 도로(08:20)
우측에 운교마을이 있고 포장도로로 가면 신흥리 덕동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오며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위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기맥,지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시그널이 보인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고흥지맥길을 이어간다.
능선 좌측으로는 주교제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여자만이 나타난다.
이곳은 벌써 복사꽃이 지기 시작한다.
능선에서 바라본 여자만의 모습
이곳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부드러운 엄나물이 많다.
우측에는 느티나무 조림지가 있고 잡목을 헤치고 힘들게 능선으로 오른다.
고로쇠 나무는 아닌것 같은데 이렇게 수액을 채취하고 있다.
힘들게 능선을 치고 오르니 이제껏 힘들게 온 길을 보상이라도 하듯 편한길이 나온다.
제비꽃도 외로운 산꾼을 반긴다.
포개진 바위를 지나니...
청순한 붓꽃도 산꾼을 유혹하고...
올핸 불순한 일기탓에 할미꽃을 구경도 못했는데 이곳의 할미꽃은
벌써 지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버렸네.
이곳부터 천봉산 정상까지는 방화선 임도가 나온다.
천봉산가는 방화선 임도
서울은 진달래도 다 피지 않았는데 이곳은 개꽃이라는 철쭉이 흐드르지게 피었다.
게으름뱅이 철쭉
억새밭을 지나 천봉산으로 향한다.
천봉산 오르는 임도가에는 두릅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벌써 이렇게
피어서 식용으로는 불가하니 정말 아깝기만 하다...
분홍색 철쭉은 지기 시작한다.
철쭉과 붓꽃
천봉산(千鳳山:193.1m:08:45)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운교마을과 신흥리 주교마을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산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있고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삼각점이 있다고 했는데 5분 정도를 헤매도
삼각점을 찿을 수가 없어서 포기를 한다.
산 중턱에는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퇴뫼식 산성인 남양리 산성
(전남 지방기념물 제207호)이 있고 천봉산 서남향으로 뻗은 줄기가
득량만과 만나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중산리 지석묘군(전남지방기념물 제160호)
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남양리 산성은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일대에 있는 해발 162m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동.서 양쪽의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지역 일대에는 백제시대에 조조례현(助助禮懸)이 있었던 곳이다.
조조례현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때 이르러 충열현(忠烈懸)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시대에 이르러 남양현(南陽懸)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남양리 산성의 총 둘레는 534m이고 너비는 4m 내외이다.
남양리 산성의 입지와 축성법, 출토유물들의 양상등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초축(初築)된 퇴메식 산성으로 산성내에서 출토된 유물상으로 볼 때
이 산성은 초축된 뒤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천봉산부터는 4륜차가 다닐만큼 편한 임도길을 걸어간다.
임도 가운데서 만난 조개나물
천봉산 임도 삼거리(08:55)
오늘 고흥지맥길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남양산성 1.3km, 면사무소 1.7km, 골안고개 1.1km)를 만난다.
지도상에에는 천봉산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곳에
설치한 이정표에는 천방산 삼거리라니 상당히 헷갈린다.
편한 임도길 따라 룰루~~~랄라 임도에서 바라본 여자만의 모습지나온 천봉산의 모습
멧돼지의 목욕탕인가?
조금을 더 내려오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2차선 포장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골안고개로 향한다.
2차선 포장도로(09:15)
남양면서 동강면과 고흥읍으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천봉산 안내도와 담양전씨 선산 표시석이 있다.
천봉산에서 이곳까지 30분동안 정말 편한 길을 걸었다.
갑자기 꽤나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치겠지 생각하며
비를 맞으면서 골안고개로 걸어간다.
골안고개(09:20)
고흥군 남양면 대곡리에 있는 고개로 직진을 하면 동강면으로
향하고 우측으로 가면 고흥읍으로 가는 15번 국도가 나오는 곳이다
도로 삼거리에 커다란 농협창고가 있으며, 도로 맞은편 중앙에 상와마을 표시석이
있는 곳에서 밭과 밭사이로 고흥지맥 마루금이 이어진다.
골안마을의 뒷산인 남정자등을 주봉으로 하여 서쪽의 임정등과 동쪽의 새산
등(嶝)과의 사이에 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하여 골안(嶝內)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우의를 입고 간식으로 훈제 계란 한개와 두유 하나를 마시고 길을 나선다.
상와마을 가는길
마늘밭을 지나니 커다란 노송 2그루가 있는 70봉을 지난다
마늘밭에서 바라본 남양초등학교의 모습
70봉을 지나니...
황토밭과 단풍나무 조림지를 지나니 상와고개가 나온다.
상와(上瓦)고개(09:40)
2차선 포장도로가 있는 상와고개에는 버스 정류장과 배씨 효열비가 있고
이곳에서 우측마을 골목으로 들어서서 좌측 대밭으로 올라선다.
마을길에서 좌측으로 올라서니... 상와마을이 보인다.
밭 능선에서 바라본 상와마을
천방산(天尨山)의 지맥(支脈)이 달려 내려오면서 여러갈래로 뻗어 내린 형국(形局)이 마치
바닥기와가 깔려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기와 와자(瓦字)와 들평자를 써서 와평(瓦坪)이라고 한 것이라 한다.
와평(瓦坪)은 상와(上瓦), 골안, 중와(中瓦), 하와등(下瓦等) 4개부락(四個部落)을 말하며 상와(上瓦)를
상단(上壇) 혹(或)은 상미(上尾)라고도 하다가 왜정대정3년(倭政大正三年) 갑인(甲寅) 西紀 1914年에
지방행정구역개편(地方行政區域改編)에 따라 상단(上壇)에 있다 하여
상와(上瓦)라 개칭(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밭고랑을 지나니 감나무가 있는 둔덕이 나오고 포장도로를 따른다.
시멘트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대밭을 바라보고 있는 임도를 만난다.
조금 가다가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길은 거의 보이지 않고 얼굴을 할키면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괘불주머니도 산꾼을 반기고...
능선 정상에는 무명묘지가 있고 좌측에는 金寧金氏 가족묘지가 있다.
지나온 길의 모습
포장도로를 만나서 직진하여 숲으로 들어간다
고흥앞 바다가 보이고...
밀양박공과 함안조씨의 묘지를 지나니 마늘밭이 나온다.
좌측 밭 아래로는 옥천제가 보이고...
마늘밭 밭 가장자리를 지나 숲으로 향한다.
지나온 길
숲속에서 만난 벙커
옥천고개(10:05)
옥천마을의 유래마을 지형이 고깔안과 같다하여 당초 마을명을 고깔?자와 안 내(內)자를 써서 “?내(內)”라 하였고
혹은 터꼴(基洞)이라고 불리어오다가 한일합방후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시
마을형국을 거군지(巨軍地)의 제왕산지형(帝王山地形)에 비유, 이곳이 제왕(帝王)의
식수정(食水井)이라하여 마을에 있는 샘물이 마치 옥(玉)과 같이 맑다하여
옥천(玉泉)을 개칭(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옥천고개를 올라서서 밭가운데를 지나니 묘지 4기가 나오고...
묘지를 지나 100봉으로 올라선다.
100봉 가는 길에 반가운 시그널을 만나고...100봉(10:18)
100봉에서 소나무 숲을 따라 좌측으로 꺽어진다
오래된 전주이공의 묘지를 지나니...
고흥지맥의 산길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아주 좋은곳은 눈을 감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편한 길인 반면에
힘든곳은 그야말로 잡목과의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할 정도로 힘이든다.
100봉을 내려서니 다시 밭과 묘지가 나오고 밭 가장자리로 걸어간다.
송정고개(10:25)
능선에서 바라본 송정마을의 모습
마을 너머로는 여자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의하면 송정(松亭),서거(西巨),동거(東巨) 등 3개 마을을 거해라 부르며
지형이 큰 계(蟹) 형국(形局)이라 하여 송정(松亭)을 웃 거해(巨蟹) 또는 상거(上巨)라 불리어오다가
1914년 왜정초기에 지방행정제도개혁령(地方行政制度改革令)에 따라 마을 명(名)을 송정(松亭)으로
개칭(改稱)하였고 마을 서쪽에 큰 바위가 마을에 보이면 해(害)가 된다하여 소나무를 울창하게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하였으나 왜정말(대동극정大東極戰爭때) 군용물질(軍用物質)인 송탄유(松炭油)를
짜기 위하여 1942년 이를 벌목 했다는 구전(口傳)이다.
송정고개를 가로질러 올라오니 묘지들이 나타나고 지맥길 가운데에
땅 주인이 재배한 듯한 두릅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우의가 찢어질까봐 약간 우회하여 두릅밭을 지난다.
밭두둑을 걸어서 지나가니 다시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중년부부가 비가 오는데 밭에 고추 모종을 심고있다.
도로에서 올라오니 최근에 조성한 듯한 전주이공의 묘비가 있는데
아마 기독교인인 모양인데 묘비의 양식은 유교식이다.
다시 밭 가운데를 걸어간다
이곳의 밭에는 작약과 도라지 등 약용식물을 많이 심어놨다.
밭자락 끝의 묘지 옆에는 더덕을 많이 심어놨는데 비를 맞은
더덕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더덕 냄새가 진동을 한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우로 편백나무가 즐비하고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준.희님의 응원 메세지가 보이고...
이곳은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는 편백나무가 많이 보인다.
피톤치드는 1937년 러시아의 생화학자 토킨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식물이 병원균·해충·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20세기 초~ 폐결핵을 치료하려면 숲속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요양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삼림욕을 하면 식물서 나오는 각종 항균성물질을 이루는 피톤치드가 몸속으로 들어가무명봉(10:45)
무명봉에 오르니 간벌한 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길이없다.
좌측으로 걸어가는데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을 닿지 않은 탓인지
엄청나게 넓은 두릅나무 군락지와 가죽나무들이 많은데 두릅이
이제 갓 올라오는 탓인지 참으로 부드러워 보여서 정신없이 따서
베낭에 담는 바람에 시간이 20분이나 지체를 한다.
가죽나무 군락지
지천으로 널려있는 두릅나무
수줍은 새색씨처럼 나뭇잎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보춘화20분동안 두릅을 꽤나많이 전리품으로 챙겨서 베낭에 넣은 다음에
편백나무 숲을 헤치고 내려서 꽤나 큰 배밭이 보이고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과수원 도로(11:10)
가시덤불을 헤치고 내려오면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도로 옆에는 꽤나 큰 배밭에 하얀 梨花가 만발하였다.
청순한 梨花의 모습
배밭 옆의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자꾸만 빗줄기는 굵어진다.
통제골 고개(11:18)
고흥군 남양면 장담리에 있는 과역에서 남양면 넘어가는 고개로
18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며 좌측에 있는 송정재를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통제골 고개로 표기되어 있어 통제골 고개로 부르는 모양이다.
고흥지맥에서 약간 벗어난 뾰족한 봉우리가 월악산이다.
좌측으로론 송정 저수지가 있고 양파밭 가운데를 지나간다.
양파밭 가에는 고인돌처럼 보이는 돌이 보이고
S자 형태의 농로를 따라서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선다.
양파밭을 지나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경주김씨 종중묘가 나오고...
묘지 좌측으로는 꽤나 규모가 큰 장담 태양광 단지가 나온다.
장담 태양광 단지 휀스를 끼고 지맥길을 이어간다.
장담 태양광 단지
덕촌재(11:25)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에서 남양면 장담리 덕촌마을 넘어가는 고개로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있고 장담 태양광 단지가 있는 고개이다.
고개에서 좌측으로 바라보니 지맥길에서 조금 떨어진 월악산이 보인다.
등로에서 바라본 월악산
월악산(月樂山:254m)은
전남 고흥군 과역면과 남양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먼 옛날에 천상에 있는
선인이 이 산에 내려와 옥녀와 더불어 탄금(彈禁)하며 월하풍악을 즐겼다 하여
월악산 또는 달악산이라고 부렀다고 한다.
덕촌(德村) 마을의 유래는
다락산지맥(多樂山支脈)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마을의 형국(形局)이 마치 밤알을 안고 있는
밤송이와 같이 생겼다 하여 마을명을 "밤방굴"이라 불리어 왔으며 밤방굴을 한자로 음차하여
율동(栗洞)이라 칭하여 오다가 1956년 자연마을로 독립되면서 이는 해방된 덕(德)이라는
뜻으로 덕촌(德村)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농로를 지나서 등로로 접어드니 등로는 완전히 고속도로이다.
곳곳에 피어있는 찔레꽃과 탱자나무꽃이 만발하여 운치가 있는데
아쉽다면 자꾸만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바지와 신발이 다 젖어버려
찝찝하기가 그지없다... 비를 많이 맞은 탓이지 자꾸만 추워진다.
등로에는 양탄자같은 잔디가 깔려있어 어프로치 연습에 제격같다. ㅋㅋㅋ
편안한 능선을 치고 오르니 월악산 분기점이 나온다.
월악산 분기봉(129m:11:40)
어제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거기다가 비까지 내려서
월악산가기를 포기하고 편한 걸음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넓은 등로에는 산딸기꽃이 만발하였다.
등나무에 휘감긴 소나무는 고사하였다.
산에서 만나기가 그리 흔치않은 제피나무도 꽤나 보인다.
125봉(11:50)
장담고개(11:55)
고흥군 남양면 장담리이에서 과역면 월악리 넘어가는 고개로
희미한 길만이 보여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모양이다.
고개에는 두릅나무를 심어놓고 과실수가 있는 밭이 보이고
고흥지맥길은 과수밭을 지나 직진으로 이어진다.
장담마을의 유래마을의 산세(山勢)가 자형(字形)으로 되어 서(西)쪽으로 유수(流水)하고 기중간지점(其中間支店)
정자등(亭子登 사장등(沙長嶝)) 이 마치 연꽃모양이라 3백여년전(三百餘年前)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입주설촌(入住設村)하면서 긴못에 연꽃이있다 하여 장담(長潭)이라 불렀다고 한다.
등로로 올라서니 순이 아주 부드러운 엄나무가 여러그루가 있는데
이곳은 길이 좋은데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지 그대로이다.
아이쿠 저렇게 맛있는 나물을 그냥 두다니...
다시 편한 소나무 숲을 지나는데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진다.
152.7봉(12:15)산 정상에는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고 4등 삼각점이 있다.
일부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계룡산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지만
이곳 계룡산이라는 자료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이곳부터는 여태껏 같이 고흥지맥길을 걸어온 남양면과 작별을 하고
새로운 과역면을 맞이한다.
152.7봉 삼각점(△고흥 407 2002년 복구)
152.7봉에서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지나온 월악산은 짙은 안개로 휩싸여 있고... 편안한 내리막길로 고흥지맥길을 이어간다. 빗물을 머금은 제비꽃 이런길을 걸으면 늘 습관처럼 잠이 몰려 오는데 오늘도 어김없이그 버릇은 나타난다. 내려가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진 다음에
정신이 번쩍든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고흥반도를 가로 지르는
3개의 국도가 지나가는 도로가 나오고 월악육교가 나타난다.
월악육교(12:30)육교를 건너니 좌측으로 도천리의 지석묘지군이 나타나고...
도천리 지석묘군(전남 지방기념물 제197호) 도천리 지석묘지군에서 조금을 더 올라가니 우측으로 정수장이 있고좌측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을 올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105봉(12:40) 아주 편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가 편한 임도를 버리고...이곳은 잠깐 방심을 하면 대형 알바를 하는곳이라 바짝 신경을 쓴다.
편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지면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다시 조금을 더 진행하니 이곳은 아예 길 자체가 없다.우측으론 희미한 길이 보이지만 지맥길은 좌측으로 가야한다.
좌측으로 올라가니 잡풀과 찔레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길은 보이질않고 겨우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번엔 넘어진 잡목이 태클을 건다.
봉우리 정상에서 잡목을 헤치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과역면의 모습전남 고흥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의 대부분이 300m 미만의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에는 득량만이 있고, 동쪽에는 순천만이 있다. 순천만 근해에는 백일도를 비롯하여
원주도, 해하도, 옥금도, 미덕도, 진지도 등의 많은 섬들이 있다. 과역리에는 고인돌군이 있다.
1441년(세종 23) 행정구역 개편 때 남면(南面)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호구총수』, 『구한국행정구역일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14년 점암면 백일리를 편입하였다.
1931년 남양면 도천리를 편입하고, 과역면(過驛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과역리(過驛里) 지명에서 빌어다가 사용하였다.
과역리는 조선 시대에 현 북쪽 15리의 금모연원(今毛淵院) 도로변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현재 면 소재지인 신곡리를 비롯하여 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과역리의 원등(院燈) 마을은 흥양원의 5개 역원 중 하나인 복제원(卜梯院)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 역은 남양면의 양강역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과역(過驛)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금전 지나온 길도로 아래로는 과역면소재지이다.
이곳 고흥 지역에는 우리나라에서 내노라는 체육인이 많이 나온 곳이다.
박치기왕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러 김일, 복싱선수 류제두, 백인천, 박종팔
배구선수 류중탁, 축구선수 박지성, 김영광 등이 이곳 고흥출신이란다.
과역(過驛)고개(13:10)
1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과역이란 지명은 인근 고흥군 남양면에
조선시대 벽사도 찰방 9역의 하나인 양강역이 있어 역을 지나왔다하여 과역이라고 한다.
고흥군의 심장을 가로지르는 3개도로(15번. 27번, 77번)가 지나는 도로의 지하차도를 건너서
도로를 통과하자마자 우측으로 올라선다. 우측의 도로의 표지판이 보이는 지점에서
좌측의 전봇대가 있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밭이 나온다.
과역고개에서 능선으로 올라서서 김녕김씨 묘지를 지나 밭 가운데를통과하여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곳 역시 잡목이 장난이 아니다.
아예 길은 보이질 않고 내가 길을 만들어서 가야한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기에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우측 묘지의 상석에서 너무 배가 고파서 가져온 주전자에다
물을 팔팔 끓여서 컵라면에다가 맥주 한 켠을 마시고 후식으로
오렌지 하나에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20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묘지 앞에는 과역 면소재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망자의 밥상에 산 자가 밥을 먹었으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용서를 구할 따름이다. 미안한 마음에 주변을 깨끗이
정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비는 그쳤지만 젖은 옷으로 추위가 몰려온다.
84.5봉(13:45)식사를 마친 다음에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84.5봉이 나타나고
그 옆에는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좌측 능선으로 고흥지맥 길을 이어간다.
표식을 알 수 없는 84.5봉 삼각점84.5봉에서 직진을 하니 엄청난 절개지 아래로 고흥반도를
관통하는 국도가 지맥길을 끊어 버린 바람에 90도 꺽어져 우회한다.
이곳 역시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같은 길이라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 소나무 숲을 지나는데 반가운 선답자의 시그널 하나가 보인다.
원시림같은 숲을 헤치고 내려오니 내보다도 더 큰 억새밭이 나오는데갑자기 까투리 한마리가 날아가는 바람에 깜짝 놀란다.
갈대밭을 내려와서... 국도가 지나는 지하차도로 국도를 건넌다. 15번 국도 지하차도(14:00) 우측으로 고흥의 진산인 팔영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간다월송재(14:05)
전남 고흥군 과역면 사정리 월송부락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에는 큰 나무 2그루가 있는 곳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월송마을은 옛날에
마을주변에 모시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서 마을이름이
모시내(못의내)로 불리워 오다가 이 마을을 지나던 지관(地官)이 마을의 지형이
달과같이 아름답고 소나무가 무성하여서 달 월(月)과 소나무 송(松)자를 따서
月松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월송재를 지나 스레트 집이 있는 곳에서 우측 마늘밭으로 접어든다.
월송재 지나면서 바라본 석촌마을의 모습옛날 마을앞에 큰 바위가 박혀있어 이 바위가 동쪽으로 비스듬이 누워있을 때 마을이 貧村이었으나
어느 스님이 마을앞 큰 바위를 바로 세우면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 하자 전 동민이 바위를 바로 세웠으며
마을명을 바윗돌을 상징하여 "돌배기"라고 불리어오다가 1936년 일정때 마을명을 한자화할 당시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뜻으로 石村이라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늘밭 가운데를 지나 도로로 내려간다 마늘밭을 지나서 지맥길을 이어가는 표시 폐허가 되어버린 석봉농원 옆을 지나 53봉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곳 역시 아예 길이없다.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53봉에 오른다
53봉(14:40) 53봉을 지나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고 조금 지나니 흥양이씨 묘지가 나온다 또다른 묘지를 지나... 월송마을을 가는 Y자의 갈림길에서 조그만 동백나무가 있는 좌측으로... 좌측으로 가서 다시 우측으로 기수를 돌린다 넓은 임도에서 다시 좌측으로 꺽어진다넓은 임도를 따라서 걸어가니 우측으로 자재창고가 나온다
능선에서 바라본 석촌마을의 모습 이곳에서도 엄나무를 만나고... 건축자재창고 안부(14:50) 직진하여 묘목 조림지로 올라선다조금전에 걸어온 길
묘목 조림지를 지나니 감나무밭이 나온다.68봉(15:00)
68봉 정상에는 묘지 2기가 있고 직진을 하니 선답자의 시그널이 보인다.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무명묘지를 만난다음에 내려서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시멘트 도로를 가로질러 좌측 능선으로 접어드니 임도가 나타나고... 뚜렸한 임도를 따라가다가 우측으로 올라선 다음에 좌측으로 꺽어진다. 지맥길을 올라서서 다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길은 보이지 않고... 무명봉에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선다. 우측에 넓은 밭이 나오고 다시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내려서는데 낙엽이 쌓여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거의 보이지 않은 등로에 내려서니 꽤나 넓은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비포장 도로에서 나무 계단을 만들어 논 묘지로 올라가니... 길은 거의 보이질 않고 감각적으로 길을 찾아 지맥길을 이어간다 또다른 무명묘지를 지나 올라가니... 분홍색 철쭉이 힘들어 하는 산꾼 범여를 반기는 듯... 좌측 나무 사이로 소대방산이 보이고... 소대방산 갈림길(15:35) 우측으로 고흥지맥길을 이어간다 이곳 등로에는 흐드르지게 철쭉과 고사리가 많아서 고사리를 꺽어 베낭에 넣는다. 팔영산이 계속 따라온다 153봉(15:55)153봉 정상에는 준,희님의 격려 표지판이 있고 봉우리 아래에는
점암 저수지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내리막을 내려간다.
송정고개? (16:00)광주 백계남님이 이곳을 송정고개라 표기를 해놨는데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은 곳이다.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이곳에서 다시 힘든 오르막을 올라간다.
서서히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오르막에서 만난 달팽이 186봉 갈림길(16:10) 지맥길에서 살짝 비켜난 186봉(16:15)186봉 정상에서 바라본 사정재
다시 되돌아온 186 분기봉(16:20) 이곳도 간벌로 어지러운 등로에 길은 보이지 않고 솔잎사이로 고사리가 많다 길은 보이질 않고... 186봉 갈림길에서 조금을 내려와 좌측으로 꺽어진다 산 아래에는 고사리가 다 피어 버렸다. 다시 좌측으로 힘들게 길을 가다가 등로가 좋아지는 지점에서 진행을 하니묘지 2기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서니 당치고개가 나타난다
당치(堂峙:16:40)고흥군 점암면 사정리에서 화계리를 지나는 고개로 33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이동통신탑이 있다.
지맥길은 도로 우측의 임도로 연결이 된다. 바로 아래에 있는 당치마을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의 지형이
돼지형이며 마을의 터는 돼지구유형으로 되어 있고 산 허리 지점에 제당이 있어 마을 이름이 당치라
불리웠는데 원래는 점암면 사동리에 속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화계리에 속해있다.
원래 계획은 성주고개까지 가기로 했으나 고사리와 두릅, 엄나물의 유혹에
넘어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체가 되고 거기다가 원시림같은 등로에다
비까지 내려 더 이상 산행을 진행하지 못하고 이곳 당치에서 산행을 마친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꾸무리한 날씨 땜에 주위는 벌써부터 컴컴하다.
이곳 당치는 워낙 오지라서 옛날에는 도적들이 진을치고 있다가 이곳을 지나는
民草들의 재물을 빼앗고 하던 곳으로 소장수가 소판돈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곳이며, 6.25때는 양민들이 많이 학살 당하여 그 원한으로 귀신이 많이 출몰한 곳이란다.
그런탓에 20여년까지만 해도 이 지역 지서(파출소)에 순찰차가 없어서 자전거로 순찰할 때
순경들도 이 곳은 오지 않았을 정도 겁나는 곳이었단다
언제 올 지 모르는 다음 구간을 확인하고 스틱을 접고 산행을 마무리 하는데 지나가는
자동차를 히치하려는데 30분이 경과되도 차량 한대가 지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사동(沙洞)마을까지 걸어 내려오니 택배 차량인 1톤 탑차 한대가
지나가는 것을 히치하여 과역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한다.
과역 버스 정류장(17:20)이곳에 도착하여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니 시간이 맞질않아
하는 수 없이 막내 처남에게 전화를 하여 차를타고 처갓집으로 향한다.
과역 버스터미널 시간표 오늘 산행의 전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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