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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고흥지맥(終)

고흥지맥 제3구간 - 당치에서 운곡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4. 4. 14.

 

☞산행일자:  2014년 4월 10일

☞산행날씨:  맑고 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1km / 11시간 50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당치-111봉-사정재-모동고개-159.8봉-186봉-암봉-성황당-147봉-성주고개-SK기지국-158봉

                152봉-당재-232봉-채석장-312봉-322봉-388.5봉-봉남재-338봉-375봉-335봉-408봉

               운암산-병풍바위-중섯재-산림욕장-239봉-238봉-182봉-운곡재

소 재 재:  전남 고흥군 점암면. 포두면, 두원면, 고흥읍

 

오랫만에 고흥지맥길을 나서지만 매주 산을 타는 산꾼인데도 겁이난다.

악명높은 잡목에다가 망개나무(청미래), 아카시아를 비록해 태클을 거는 놈이

너무 많고 길이 없어서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엄청 걸리는 곳이라...

이번주에는 초등학교 동창들이 제주도로 2박3일 여행을 가기 위해 완도에서

배를 탄다고 하기에 완도에서 그리 멀지않고 시작을 했지만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은

고흥지맥 한 구간을 마치고 완도항으로 가기위해 선택한 코스이다

요즘 사무실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하여 평일 오후에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고흥행 고속버스표

17시 30분발 고흥행 고속버스에 올라 늘상하는 버스에 오르면 잠을자는 습관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정안휴게소에 버스가 정차하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

휴게소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저녁으로 간단하게 우동 한그릇을 시켜 먹은 다음에

고흥으로 향하여 4시간 20분만에 고흥읍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고흥버스 터미널(21:50)

난생 처음 고흥읍에 와본 느낌은 거리가 너무 어둡다는 느낌이다

버스에서 내려 대합실로 나오는데 불을 완전히 꺼버려 암흑천지이다

도로로 나와서 인터넷에서 검색한 명동사우나 찜질방을 찾아서 간다

고흥 명동 건강사우나 찜질방(22:00~05:20)

버스 터미널에서 10분정도를 걸어가니 오늘의 숙소인 찜질방이 나온다.

시설은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나 하룻밤 묵기에는 괜찮은 편이지만

가격은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싼 9,000원이다... 샤워를 마친 다음에

잠자리에 드는데 이곳도 지난주 광주처럼 코골이들이 자는 방이 따로있어

참으로 편하게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면도와 샤워를 한 다음 터미널로 향한다

고객들을 위해서 핸드폰 충전기 설치해놨다... 작은 배려가 고맙기만하다.

산에 다니면서 GPS를 활용하니 배터리가 근방 달아 이곳에서 만땅 충전을 한다

과역가는 버스표

과역가는 버스(05:40)

고흥에서 과역가는 완행버스를 타는데 고흥읍에서 달랑 나혼자를 실고 과역으로

향하다가 중간에 연세드신 노부부를 태우고 25분만에 과역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과역 버스 터미널(06:05)

버스 터미널 앞 도로

버스에서 내려서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주변에 있는 기사식당으로 향한다

과역기사식당

버스터미널 바로 옆에있는 기사식당인데 음식이 참으로 깔끔하다

7,000원짜리 백반 정식인데 반찬이 무려 16가지가 나온다

한결같이 반찬들도 다 맛이있다... 남도음식의 진수를 맛보는 것 같다

내가 매달 모임을 하는 서울 강남의 오미가라는 음식점에 27,000원짜리보다

더 나은 느낌이다... 거기다가 점심때 먹을 빈 도시락에 채우는 백반값도 안받는다

고맙습니다... 길가는 산꾼에게 보시한 공덕... 복받을깁니다

식당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당치로 향한다 (택시비 7,000원)

당치(堂峙:06:40)

고흥군 점암면 사정리에서 화계리를 지나는 고개로 33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이동통신탑이 있다.

지맥길은 도로 우측의 임도로 연결이 된다. 바로 아래에 있는 당치마을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의 지형이

돼지형이며 마을의 터는 돼지구유형으로 되어 있고 산 허리 지점에 제당이 있어 마을 이름이 당치라

불리웠는데 원래는 점암면 사동리에 속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화계리에 속해있다.

 

당치는 워낙 오지라서 옛날에는 도적들이 진을치고 있다가 이곳을 지나는

民草들의 재물을 빼앗고 하던 곳으로 소장수가 소판돈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곳이며, 6.25때는 양민들이 많이 학살 당하여 그 원한으로 귀신이 많이 출몰한 곳이란다.

그런탓에 20여년까지만 해도 이 지역 지서(파출소)에 순찰차가 없어서  자전거로 순찰할 때

순경들도 이 곳은 오지 않았을 정도 겁나는 곳이었단다

택시를 타고 당치에 도착하여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우측 콘크리트 옹벽으로 올라선다

옹벽으로 올라서지마자 잡목이 태클을 걸기 시작한다

길이 없는 잡목지대를 헤쳐 나가니 잠시후 임도가 나타난다.

잠시후에 넓은 임도가 나오고 한 동안 임도를 따라 걷는다

임도에서 조금을 올라오니 두릅밭이 나온다

꽤나 많은 두릅나무에서 두릅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꽤 많은 두릅을 채취한다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길은 희미하다

이곳은 진달래가 아닌 철쭉이 滿開했다.

111봉(07:00)

봉우리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사정제가 보인다

봉우리로 내려서니 무명묘지 1기가 있고...

가족묘지(07:05)

111봉에서 5분정도를 지나니 장학관을 지냈다는 昌原 朴公과 부인 礪山宋氏

묘지가 나오고 고흥의 진산인 팔영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족 묘에는 부모님의 교훈이 적힌 묘비가 있고 묘지로 통하는 임도로 직진한다

묘지를 지나 편안한 임도를 걷는다

묘지에서 6~7분정도 편안한 임도를 내려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 길이없는 고흥지맥길을 걷는데 고사리들이 많이 보인다.

길을 걸어면서 고사리를 꺽어며 가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간벌한 잡목들을 등로 가운데 버려놓아 시간이 많이 걸린다

흐미 이쁜 넘

두릅과 고사리가 꽤나 많다... 예상보다 수확이 짭짤할 것 같다

당치1재(07:15)

고흥군 점암면 화계리와 모룡리를 잇는 고개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희미한 옛길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재를 지나니 망개나무(청미래) 넝쿨이 엉켜있어 걷기가 힘이든다

옷이 걸리고 베낭이 걸리고 정말 힘이 드는데 날씨는 초반부터 한 여름 날씨이다

힘들게 능선을 오르다가 다시 내려서니 한적한 모동고개가 나온다

모동고개(茅洞峙:07:30)

고흥군 점암리 모룡리 모동마을에 있는 고개로 지형이 관복의 띠와

같다고 해서 띠골이라고 했으나, 외정때 띠자를 풀의 띠로

잘못 해석 띠모라고 하여 띠골 즉 모동(茅洞)이라고 하였다

지도상에는 사정재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사정 저수지가 있어 부르는 모양이다

모동고개는 2차선의 포장도로가 있고 고개 좌측에는  쓰레기 재활용장이 있다.

고개 우측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맞은편 절개지로 올라선다

절개지 맞은편으로 오르니 잡목사이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절개지 잡목을 치고 오르는데 갑자기 얼굴에 이상한 느낌이

오기에 장갑으로 얼굴을 닦으니 피가 많이 나온다

아마도 오르는 길에 망개나무에 얼굴이 할킨 모양이다

잠시 후에 오를 159.8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활짝 핀 철쭉의 모습

159.8봉(07:40)

정상에는 깨진 삼각점과 준.희님께서 걸어논 아크릴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90도 꺽어져서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이곳부터는 고사리가 상당히 보인다... 고사리를 채취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159.8봉 삼각점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가뭄에 콩나듯이 보이는 띠지가 반갑기만 하다

159.8봉을 지나니 우측으로 벌목지대가 나오고 다시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거의 지맥길이 거의 보이질 않아

내가 길을 개척해 가면서 걷는데 고사리가 참으로 많다

길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개척하는 심정으로 지맥길을 걷는다

내리막으로 내려오니 우측 모룡리로 통하는 길은 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있지만 좌측 화계리 방향은 길이 전혀 없는걸로 보아

아마도 벌목을 하면서 생긴 도로인 모양이다

임도(07:55)

내려온 고도만큼 다시 치고 오르니 힘이든다.

아예 길은 보이질 않고 가파른 급경사이다.

흔히들 고도가 150~200밖에 안되는데 엄살 부린다고 할 지 모르나

바닷가 산들은 해발이 바닥에서 시작하기에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친다

능선에서 바라본 점암면 화계리 신전(新田)마을의 모습

1952년에 신전저수지가 방조되면서부터 아랫동네가 살기좋은 곳이라 하여 새점이

신점으로 다시 신점으로 다시 신전마을로 일구었다 하여 개칭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봉(08:15)

임도에서 힘들게 196봉에 오르니 건너편에 고흥의 진산인 팔영산이 한 눈에 보인다

아쉽다면 고흥지맥에 포함되어 있지않아  가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고흥지맥길을 이어간다

196봉에서 바라본 고흥의 진산인 팔영산의 모습

고흥지맥에서 약간 동쪽으로 비켜서 있는 팔영산은 고흥의 진산이자 고흥의 최고봉이다.

지난 1998년 7월 30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일찌감치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다 역사, 지리, 생태적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판단돼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지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지구이다

 

조선 고종 때 편찬한 흥양읍지(흥양은 고흥의 옛 이름)에 팔영산

 8개 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북쪽 봉우리부터 순서를 매긴다.

제1봉은 유영봉(儒影峰·491m)이다. 선비의 그림자를 닮았다는 봉우리다.

이 봉우리에 송팔응(宋八應)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다.

팔영산 제1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송팔응에게 하늘을 나는 백마가 있었다.

 

어느 날 송팔응은 말의 성능(?)을 시험하려고 화살 한 발을 팔영산 봉우리에 쏘았다.

이내 말을 타고 봉우리로 날았지만, 화살은 온데간데없었다.

낙담한 송팔응은 말의 목을 단칼에 벴다. 그때 화살이 바위 뒤에 와서 꽂혔고,

송팔응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팔순의 송팔응은 이 산에 올라 '팔십에 팔영산에 오르니

팔영은 늙지 않았는데 팔응은 늙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팔영산의 다른 이름이 팔응산이다.

또다른 설은 위왕 시대에 중국 위왕이 세수하려던

관수(세수대)에 여덟 가지 산봉우리 그림자가 비치었다.
신기하게 생각한 위왕은 신하들을 불러 천하 제후들에게

명하여 팔봉의 산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찾아 아뢰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땅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뒤늦게 동방의 나라 조선국

최남단에 있는 점암면 성기리와 동쪽 금사리를 에워싸고 중앙 상부에 돌출한

팔봉의 운치를 자랑한 영산 팔영산을 발견했다는 고사가 구전되고 있다.

원래는 팔전산이라 이름 하였는데 위왕의 관수에 팔봉이 비치었다 하여

그때부터 그림자 영자를 붙여 팔영산으로 불리게 됐다.
동쪽에는 유영봉, 군선봉, 중앙에는 성주봉, 북쪽에는 천주봉, 중앙에 사자봉,

서쪽에는 별봉과 팔응장군이 백마를 채찍질하여 하늘을 날았다는 팔응봉이 있으며,

남쪽에는 일출봉등이 있는데 왜놈이 침입하여 조선을 정복하려면 팔봉에다

큰 대못을 박아야 민족의 정기가 끊어진다하여 칠봉까지 못을 박고, 팔영봉에는

대못을 박지 못하여 팔응장군이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예전에 화엄사, 송광사, 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꼽히던

능가사를 비롯하여 경관이 빼어난 신선대와 강산폭포 등 명소가 많다 

팔영산 자락에 있는 능가사(楞伽寺)는 행정구역상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71-1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며 비구니 도량이다.

능가사(楞伽寺)는 신라 417년(눌지왕 원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모르는 보현사(普賢寺)가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에서는 밝히고 있으나 지리지(地理志) 등에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능가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불확실하나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버려

폐사찰(廢寺刹)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44년(仁祖 22)에 정현대사(正玄大師)가

하안거(夏安居)를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고, 산 자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여 불사를 함으로써

사찰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690년(肅宗 16년)에는 <능가사사적비>를 건립하였고, 

그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중수하였다.

능가사 대웅전(보물 제1307호)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고 건축양식이 우수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건물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로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창호는 어칸은 4분합의 빗살문, 협칸은 쌍여닫이, 퇴문은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약한 배흘림의 두리기둥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올렸으며,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의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다 (자료 - 펌)

암봉(08:35)

좌측에 있는 팔영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다

계속해서 팔영산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걷는데 낮으막한 암봉이 나온다

암릉 끝부분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묘비가 깨어진 金寧金公의 묘지가 나온다

바로 아래에는 또다른 안동권씨의 묘지를 지난 다음 부터는 길이없다

길을 개척하다시피 걸어 내려오니 성황당 안부가 나온다

성황당(09:00)

147봉(09:10)

등로에서 바라본 점암면 성기리 성주마을의 모습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옛날 마을뒤에 성주골 샘이라는 우물이 있고 마을이

팔영산(八影山) 모이봉(茅二峰)과 상접하므로 한 때 성주동(聖主洞)이라 하였으나,

성주는 성상을 뜻하는데 촌명(村名)에 붙이는 것은 성상을 모독한다 하여

성주로 개칭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길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토실토실한 고사리를 꽤나 많이 수확한다

후손들이 돌보지 않는 묘지를 지나...

산 능선에는 동백나무가 꽤나 많이 보이지만 잡목이

어지럽게 널린 지맥길을 이어가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희미한 십자 안부를 지나 오르막으로 올라서지만 고도차는 거의 없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살짝 꺽어져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186봉(09:42)

186봉에서 내리막을 내려서는데 이곳 역시 길은 거의없다.

좌측으로 살짝 꺽어진 다음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아예 길은 없고 조그만

능선으로 내려서니 커다란 황토밭이 지맥길을 점령한 바람에 잡목에다가

땅가시와 산딸기 나무를 헤치고 내려서니 14번 군도가 지나는 성주고개가 보인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

성주고개(10:00)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성주마을에 있는 고개로 옛날 마을뒤에 성주골 샘이라는

우물이 있고 마을이 팔영산(八影山) 모이봉(茅二峰)과 상접하므로 한 때

성주동(聖主洞)이라 하였으나, 성주는 성상을 뜻하는데 촌명(村名)에 붙이는

것은 성상을 모독한다 하여 성주로 개칭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개 정상에는 성주마을 표시석이 있고 14번 군도가 지나가며 Y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면 성주마을이 나오고 그 너머로 팔영산이 보인다

고개에서 물한금을 마시고 5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능선으로

진입하는데 길은 보이질 않고 잡목들이 마구 베낭을 잡아챈다

잡목구간을 어렵게 빠져 나오니 뚜렸한 임도가 나타난다.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뚜렸한 임도를 따라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SK점암 성대 기지국(10:12)

기지국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접어드니 길이 보이질 않는다

어지러운 잡목을 헤치면서 능선길을 걷는데 잡목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고흥지맥길은 고도가 낮아 이런곳은 길만 좋으면 산길이라도 시간당 3km

이상을 가야 하지만 오늘은 시간당 2km도 안 나오니 미치겠다

물론 고사리에 혼이 팔려서 시간이 많이 빼앗기긴 해도 말이다

반갑습니다

158봉(10:45)

봉우리 정상에는  삼각점(△ 414,74.10 재설)있고 준.희님의 아크릴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158봉 삼각점(△ 414,74.10 재설)

아주 예쁜 운지버섯도 만나고...

158봉을 지나면서 지맥길은 상당히 난해하다

158봉에서 우측 방향으로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좌측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으로 가지말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들어서서 잡목과의

전쟁을 하면서 직진하면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안부가 나온다

오름길에는 이곳 날씨가 따뜻한 탓인지 물뿌레 나무에 하얀꽃이 활짝 피었다

조그만 암릉위로 올라선 다음에 좌측으로 꺽어진다

희미한 안부를 지난 다음에 무명봉으로 올라 섰다가 내리막을 내려서니

엄청나게 큰 채석장이 산꾼의 심장을 멎게할만큼  크게 다가온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을 동시에 보는 느낌이다.

산 하나가 통채로 없어질 것 같은 분위기이다

지도상으로 보니 이곳은 152봉 가기직전이며 채석장을 앞에두고

당재방향 우측으로 내려가야 한다.  당재방향으로 내려가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지만 이내 길은 없어지고 급경사에다가 자갈길을

지나 잡목을 치고 내려가니 우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급경사를 내려서니 무명묘지 1기가 나오고 도로가 보이면서 당재로 내려선다

당재(11:30)

고흥군 점암면 모룡리에서 천학리로 연결되는  855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좌측 천학리 방향에는 엄청나게 큰 채석장이 있고 우측에는 주유소가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콘크리트 옹벽을 타고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등로로 올라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오늘 산행중 현재까지

걸어온 길중에서 가장 힘이 들 정도로 급경사 오르막이다

급경사의 능선을 치고 오르니 동백나무 숲이 나오고 다시 오르막을

올라서니 저멀리 고흥의 진산이라는 팔영산이 보이면서 조금전에

지나온 고흥지맥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에 식사를 한 탓인지 배가 고파온다.

아침에 식당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232봉으로 올라선다

밥을 먹은 다음에 급경사의 능선을 치고 오르니 더 힘이든다.

조금을 지나니 암릉구간이 나타나고...광주 백계남님의 시그널에

‘아이구 죽겠구나’하고 쓰여 있다. 이 범여도 이하 동문입니다

청순한 모습으로 산꾼을 격려하는 물뿌레나무

232봉(12:10)

232봉에서 우측으로 살짝 내려오니 암릉이 나오고 점암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점암면 어디에서 행사를 하는지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가 계속 들린다

지나온 고흥지맥의 마루금이 한 눈에 들어온다.

봉우리 아래에는 점암면 소재지가 한 눈에 보인다.

면소재지 중앙에 드문드문 바위가 있어서 점암면이라고 부른단다

232봉 아래 암릉에서 바라본 점암면의 모습

고흥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면적은 69㎢, 39개마을, 1,700세대 3,400여명이

거주하는 순수 농어촌 마을로 형성되어 있는 점암면은 고흥군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이다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친환경 고품질 쌀과 특용작물인 딸기, 오이 등 시설원예와 팔영산 자락에서

생산되는 참다래, 하나봉은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며, 특히 천학리가 주산지인 마늘은

그 품질이 으뜸으로 건강기능식품으로 각광 받고 있다고 한다.
또한, 청정해역인 남해 여자만에서 생산되는 바지락, 참고막, 낙지 등의 해산물이 더해 풍요로움이 넘치는 고장이다.

예로부터 남도의 순박함과 넉넉한 인심이 우리지역의 정서이며, 국난에 맞선 여도진의 생생한

역사의 현장과 일제에 항거한 선열의 자취가 남은 팔영의 계곡, 또한 해발 609m의 팔영산과

천년 고찰 능가사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69호 범종, 제70호 능가사 사적비, 제224호 목조사천왕상과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된 능가사 대웅전이 있고  축구선수 박 지성이 이 지역 출신이다

232봉에서 바라본 채석장의 모습

잠시후에 가야할 고흥지맥길의 모습

채석장 절개지 옆사면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내려간다.

길은 없고 망개나무가 너무 많아서 걷기가 엄청 불편하다

채석장(12:40)

채석장 절개지 사면을 타고 곡예를 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지맥길을 이어간다

조금전에 지나온 맥길의 궤적

팔영산과 조금전에 지나온 당재도 보이고...

채석장 능선길은 마구 헤처져 있어 오르면 미끄러지고 또다시 오르면

미끄러지고 그러다보니 자꾸만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천신만고 끝에 312봉 능선으로 올라선다

312봉 정상에서 바라본 점암면 천학리 가학마을의 모습

천학리에 속한 마을로써 옛날 풍수가 뒷산의 지형이 학과 같다 하였으며, 마을 양쪽 산이

학이 멍애를 메고 나르는 형태라 하여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가학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이곳 천학리는 고흥군에서 마늘이 가장 많이 재배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 천학리(天鶴里)는 구천(九天)과 가학(駕鶴)의 2개 마을을 합쳐서

글자 한자씩 따와 천학리가 되었다고 한다.  우측에 있는 구천마을은 마을 서쪽에

거북이 모양의 샘이 많아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서 귀천(龜泉)이라 하였으며

귀천을 잘못 표기하여 ‘구천’으로 부르게 된게 마을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312봉에서 바라본 322봉의 모습

322봉 가는 길에서 만난 암릉

암릉에는 부처손이 많이 보인다

322봉(13:15)

322봉에서 90도 좌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이곳부터 길은 무지 좋다 

간벌이 잘되어 있는 임도를 따라서 가니...

준.희님의 격려 문구를 만나고...

멋진 암릉구간이 나오고 이곳을 우회하여 편안 임도를 걸어간다

임도 갈림길(13:35)

322봉에서 이곳까지 20분동안 정말 편안한 길을 걷어오다 편안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표식이 없는 삼각점을 만난다

388.5봉(13:36)

봉우리 정상에는 아크릴 표지판과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을 만난다

388.5봉 삼각점

388.5봉에서 직진으로 내려오다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조망이 되는 암릉을 만난  다음에 우측 사면을 타고 봉남재로 내려선다.

날씨가 이렇게까지 더울줄은 몰라서 식수 2L와 스포츠 음료 조그만한 것

하나밖에 준비하지 않았는데 너무 덥고 힘이 든 나머지 식수 조절을 하지

못하여 114로 전화하여 포두면 택시한테 생수 2L와 막걸리 한통을 부탁하며

봉남재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하니 20분이라 하여 시간을 맞춰 봉남재로 내려선다

봉남재(鳳南峙:14:00)

고흥군 점암면 연봉리 봉남마을과 포두면 송산리를 이어지는 고개로 4륜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로 되어있다. 이 아래에 있는 봉남(鳳南)마을은 신선봉 남쪽에 황무봉

천마봉, 봉명산 등이 있어 마을 이름을  봉명동(鳳鳴洞)이라 불리워 오다가 봉명동

북촌, 못등을 통폐합하여 연봉리(淵鳳里)라 하였으나 195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명동을 분할하여 국도변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봉남(鳳南)마을이라 불린다고 한다.

봉남재에서 목이 말라서 미치겠구만 택시는 오질않고 전화를 해도 받질않고

택시회사에다 전화를 하니 나갔다고 하고 40분을 기다리다 포기를 하고

능선으로 올라 5분정도를 갔는데 저 아래 임도에서 크락숀 소리가 들린다

다시 베낭을 벗어놓고 내려가서 물과 막걸리를 받으면서 왜 그리 늦었냐고

하니까 길을 찾지못해 헤맸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막걸리와 생수를 받아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능선에서 버선처럼 생긴 돌도 보이고...

임도에서 338봉 오름길은 상당히 가파른 오름길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포두면 송산리를 연결하는 임도가 보인다

338봉(14:50)

338봉에서 암릉구간을 넘어서니  우측으로 335봉인 3면 경계봉이 보인다.

엄청난 잡목길에 온 몸이 할키어 만신창이가 되어 지맥길을 이어간다.

산도 텃세를 하는가보다... 경상도 사람이라고 엄청나게 괄세를 하는지...

338봉 능선 아래에는 신안제와 저 멀리 보성쪽으로 득량만이 보인다

가야할 375봉과 335봉이 보이고...

또다시 잡목구간이 계속되고 길은 보이질 않는다

375봉(15:05)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홀로가는 산꾼을 반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지맥길을 이어간다...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포두면과 고흥만이 시원스레 보인다

가야할 408봉이 보인다

335봉(15:28)

고흥군 고흥읍과 포두면 점암면이 맞닿는 3면 경계봉이다.

정상에서 바로 앞에 신안제가 보이고 좌측에 복호산과 우측에 뾰족한 봉우리인

월악산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영조때 기록에 의하면  별칭 영주(한라산)과 같은 이름으로

산과 바다가 맑고 아름다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송 의립을 비롯한 장군들이 많이 배출한 곳이 이곳 고흥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정계, 학계, 체육계에 많은 인재들이 활약을 하고있다.

18대 국회의원 중에서도 이곳 출신들이 7명이나 된다고 한다

특히 체육계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1970년대에 박치기왕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선수가

이곳 출신이며 돌주먹인 유재두, 박종팔 선수를 비롯하여 2002년 월드컵의 주역인 박 지성,

김 태영, 김영광 선수가 이곳 고흥출신이다. 또한 80년대 배구 국가대표 명세터인 유 중탁과

현대건설 여자 배구팀 감독을 역임한 유 화석은 우리 집사람 외사촌이다 

고흥지맥을 타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들판에 유난히 저수지가 많이 보인다

그만큼 고흥들판이 기름지다고나 할까...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렵게 내리막을 내려서서 능선 안부를 걷는데 대산꾼 준.희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다시 고도를 높인다... 그런데 이곳 역시 길은 없고 철쭉과 잡목 망개나무가 산꾼을 괴롭혀도

너무 괴롭히는 바람에 미처버릴 것만 기분이다... 누군가 고흥지맥을 하고 계신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내가 왜 하는지 모르겠다.

천신만고 끝에 능선에 오르려 하니 이젠 암릉이 길을 가로 막는다

408봉 오르기 직전에 만난 암릉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408봉 갈림길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좌측으로 30m 떨어진 408봉으로 향한다

408봉(15:55)

정상에 오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우측에 천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용정마을이 한가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용정마을은 점아면 신안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옛부터 ‘아린멀’이라고 불리다가

신안리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하신이라고 불렀으며  마을의 지세가

우물안에 있는것 같다하여 용정(龍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안부로 내려선다

태풍으로 넘어진  나무사이로 운암산을 향해서 간다

죽고 못사는 사이인가... 아님 왠수인지?

408봉에서 안부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오름길로 올라선다

이곳 역시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408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382봉을 지나서 너덜길이 나타난다.

암릉구간을 힘들게 지나니 칼바위가 나타나더니 지나온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능선에 올라서니 고흥의 산그리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로 앞에는 高興 10景중 제1景인 팔영산의 팔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팔영산은 여인의 젖무덤처럼 솟은 8개의 봉우리가 기묘하여 그 그림자가

중국의 위왕 세숫대야까지 비쳐졌다는 전설이 있다.

 

우측으로 득량만이 한 눈에 들어오고...

득량만은 바다 중앙에 득량도가 있어서 득량만이 부른다고 하며 보성만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남정맥길에 주월산에서 보는 느낌과는 또다르게 다가온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얻었다하여 득량이라 부르게 되었고도 한다.

천혜의 청정지역으로 장어, 김, 키조개가 많이 수확되고 각시바위 등 기암괴석이 있어

해변 경관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운암산 가는 길은 명성만큼이나 칼바위 능선이다

운암산 정상을 향해서 칼바위 능선을 걸어간다

운암산(雲巖山:487m: 16:40)

고흥군 포두면과 두원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운람산이라고 부른다.

산이 높아 구름같은 기운이 산을 감싸고 있다고 하여 운암산이라고 부르며

어머니 품같이 포근한 느낌을 주고 정상부근의 빼어난 봉우리가 줄지어

서있는 산줄기 아래로 깊은 계곡들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골짜기에는 많은 전설들이

있으며 정상 부근의 빼어난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과 산길 옆 저수지의 에메랄드 빛

초록색의 향연, 깊은 계곡들 그리고 수목들이 가슴벅찬 아름다운을 느끼게 한다.


옛 흥양지에는 흥양현 북쪽 15리에 이 산이 있고 산에는 죽사(竹寺), 은석사(隱寂寺),

중흥사(中興寺)가 이어져 내려왔었으며 용은사(龍隱寺)라는 말사(末寺)도 있었다고 한다.
금석병용시대의 동검, 동추 등이 발굴된 이 산에 현재는 수도암만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조선말기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이 흥양현감으로 재임시

이곳 운암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린 사실이 기우제문과 함께 전한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는 운암산(雲岩山)으로 표시되어 있고

고흥 향토기록에는 이 산을 일명 모악산(母岳山)으로도 부른다고 하였다.

 

 

정상에는 건설부 삼각점(△고흥 24 1990재설)이 있으며  고흥군의 향토기록을 보면

이 산을 모악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맥길은 병풍바위와 중섯재쪽인 우측으로 향한다.

직진으로 가면 깃대봉과 죽순바위 가는 길이다.

오늘 산행중에 유일하게 지명을 가지고 있는 운암산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운암산 정상 1등 삼각점(△고흥 24 1990재설)

운암산에서 고흥읍 산림욕장까지 5km 거리는 둘레길이다

여태껏 힘들게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지만 오늘  산행중

길도 길이지만 고사리와 두릅 채취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바람에 지금부터는 거의 뛰다시피하면서 송곡육교로 향한다

끈질긴 삶

능선 삼거리(16:55)

정상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고흥군에서 설치한 정상 능선 삼거리라는

이정표가 있고 좌측방향으로 가면 병풍바위 이정표가 나타난다.

가야할 중섯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병풍바위(17:05)

병풍바위 이정표와 함께 벤치가 있는데 아랫쪽에서는 병풍처럼 보일지

몰라도 위에서는 그저 밋밋한 암릉일 뿐이다

중섯재(17:10)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가 나타나며 벤치와 체육시설, 그리고 풍,수해

경보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마루금으로 산림욕장  방향인 직진으로 이어진다.

이정표 우측으로는 수도암 가는길이고 좌측으로는 중흥마을 내려가는 길이다.

 

중섯재를 지나면서부터는 운암산의 일반도로와 계속 같이간다.

이곳은 고흥종합문화회관에서 운암산 올라오는 등산로로 커다란 의자 2개가 있다.

편안한 등로를 따라가다 보면 쉼터4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수도암 가는 길이 나오고...

수도암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41번지 운암산(雲嵐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운암산은 모악산(暮岳山)이라고도 한다. 창건이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기록상 분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예를 들면 1983년 절에서 만든 필사본 사적기에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대에 영헌(靈憲) 스님이

창건한 중흥사(中興寺)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699년(숙종 25) 혜현(慧玄) 스님이 지은

<흥양모악산중흥사수도암불량기(興陽暮岳山中興寺修道庵佛粮記)>를 보면 해잠 영허(海岑暎虛) 대사가

은적사(隱寂寺)를 이곳에 옮겨와 중흥사로 새로 짓고는 아울러 수도승을 위해 수도암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금 다르다.

 

곧 수도암은 이때 처음 지어진 셈이다. 그러나 ‘중흥사를 새로 지었다’는 부분은 중창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혜헌 스님의 사적기에는 수도암 이전의 중흥사 창건이 언제인지 밝혀져 있지 않고,

 ‘오랜 옛날이라 언제인지 알 수 없다’라고만 되어 있다. 또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이때의 영허대사의 창건을 고려시대인 1370년(공민왕 19)의 중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허대사나 수도암 사적기를 지은 혜현 스님이 어떤 분인지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두 주장은 창건주와 시기에 관한 부분은 서로 다르지만 절이 중흥사에서

비롯되었다는 부분은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 밖에도 어디에 근거한 이야기인지는 모르나

고려시대 1083년(순종 1) 도희(道喜) 스님이 창건했다는 말도 있다.

 

한편 앞서 말한 해잠 영허대사를 영허 선영(映虛善影, 1792~1880)으로 혼동하기도 하는데,

<흥양모악산중흥사수도암불량기(興陽暮岳山中興寺修道庵佛粮記)>가 해잠 영허 스님의 권유로

지어진 만큼 두 사람은 활동연대가 다른 별개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창건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고,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연혁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 현대까지의 연혁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절에서 지은 필사본 사적기에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다.

자료출처: 전통사찰관광안내

무루전(전남 문화재 자료 156호)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으로 전면으로는 살림집 형식으로 반간폭의 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전면으로만 장대석 1벌대 쌓기로 되어 있고 초석은 막돌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위로는 행공첨차를 둔 2익공식의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전면에만 두고 후면은 보와 납도리 만으로 결구시켰다.

가구는 1고주 5량형식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내부바닥은 장마루로 처리하였다.

처마는 전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꾸몄다. 내부는 고주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판대공(板臺工) 위에

중종(中宗)보를 걸친 다음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았으며 그 위에 첨차와 소로를 놓고 종도리를 설치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다. 문은 2분합 띠살문으로 하부에는 청판이 있다.

무루전(無漏殿)은 곧 나한전으로도 쓰인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석가삼본불상과 16나한상 사자상

2체 및 나한도 4폭이 있다.‘무루’의‘누’는 곧 번뇌를 말한다. 그러므로‘무루’라는 것은 번뇌를 없앤 경지를 뜻한다.

수도암 대웅전

중섯재를 가로 질러서 편안한 길을 걸어간다

간벌한 나무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데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고흥읍내 사람만 사람이고 고흥지맥을 타는 산꾼들은 사람도 아닌가?

이곳은 고흥군에서 100m마다 이정표와 500m마다 구조목을 설치해놨다

멋진 암릉을 지나면서 룰루랄라 길을 걸어간다

산림욕장 삼거리(17:35)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산림욕장으로 올라선다 

239봉(17:43)

중섯재 임도에서 표시한 산림욕장은 아무래도 이곳 239봉을 말하는 것 같다.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니 ‘아름다운 중독’라는 팻말이 있고 휴게용 벤치들이 있다

이곳에서 마지막 남은 오렌지 하나와 봉남재에서 산 막걸리 한 통을 다 마시면서

1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베낭을 메고 다시 지맥길을 나선다

임도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임도 갈림길(17:50)

운암산에서 이곳까지 5km 조금 넘는 거리를 1시간여를 걸어왔다.

이곳에서 고흥 종합 운동장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좁은 등로가 나타나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잠시후에 전망암이 나타나고 다시 길이없는 고생길로 접어든다

238봉(17:52)

암릉으로 된 238봉에 올라서니 고흥종합운동장이 보이며 

고흥읍내의 뒷산인 봉황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봉황산은 ‘옛날에 이 지방에 군자(君子) 가 많이 배출되어 봉황새가

이 산에 날아와 보금자리를 잡았다’라는 전설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흥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238봉 전망바위를 내려서면 여태껏 편한 등로와는 정반대로 또다시 잡목과의 전쟁을 치른다.

이곳에서 앞에 보이는 182봉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내려서면 무명묘지가 있는 안부로 내려선다

238봉에서 바라본 고흥종합 운동장과 봉황산의 모습

암릉을 지나니 아예 길이없어서 내가 길을 만들어 내려서니
무명 묘지가 나오면서 희미한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명 묘지를 지나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182봉(18:12)

길이 아예 보이질 않고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니 괜스레 맘이 급해진다

이젠 특별하게 찍을것도 없을 것 같아 카메라를 베낭에 넣어 버리고 무조건 내달리기 시작을 한다

운곡재(雲谷峙:18:30)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와 고흥읍 남계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2차선 도로가 있다.

원 계획대로 송곡육교까지는 아직 30분정도 더 가야하기에 조금 아쉽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산행을 마무해야 할 듯 싶어 스틱을 접는다

운곡재는  운곡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운암산 중턱에 고려 공민왕 19년에 중수한

고찰 수도암(修道庵)이 있고 마을앞에 正宗 乙巳年에 건립한 雲谷祠가 있었는데 고종때

서원철페령에 의해 철거되었으며 당초 마을이름이 사구시였는데 일제시대인 1914년

지방행정 통폐합시 운대리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운암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운곡(雲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G.P.S 기록

산행 후 베낭을 정리하고 수통에 남은 물로 몸을 닦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고흥읍쪽 송곡마을로 내려가다 지나가는 자가용을 히치하여 고흥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채취한 부드러운 고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