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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고흥지맥(終)

고흥지맥 제4구간 - 운곡고개에서 철쭉동산까지

by 범여(梵如) 2015. 3. 23.

☞산행일자: 2015년 3월 22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짙은 황사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1.3km(실제거리:26km) + 어프로치 4.2km / 9시간 5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운곡재-141봉-146봉(유승봉갈림길)-송곡재-163봉-주월산-대곡재-222봉

                231봉-수덕재-156봉-192봉(고봉산갈림길)-272봉-수덕산-봉수대-화적재

                NO101송전탑-포장임도-196봉-신촌고개-221봉-오무산-방화임도(3번)-이조판서 묘지

                농장임도-130봉-112봉-먹국재-135봉-갓점고개-석류농장-대밭-암릉구간-351봉

                미인치-390봉-안지재-염소바위-벼락산-천등산-철쭉공원-앙천잇재-사동마을

소 재 재: 전남, 고흥군 두원면, 고흥읍, 풍양면, 포두면

지난주 영월지맥 마지막 구간에서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으로 인해 개고생한 경험 때문에

눈이녹는 5월까지 강원도 산행을 5월로 미루고 지맥길 중에서 잡목과 길이 없어서 지맥길

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구간중에 하나인 고흥지맥 한 구간을 잡목과 가시나무에 새순이 오르기

전에 한 구간이라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토욜 오전에 결혼식 한군데 들렸다가 집에

베낭을 챙겨서 고속터미널에 가서 고흥행 마지막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고흥행 17:30분발 버스표

고흥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센트럴시티 터미널에 도착하니 시간은 10분정도 여유가 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잠깐 뉴스를 보다가 버스에 오르니 28인승 버스에 손님이라곤 달랑

10여명이라 넓은 의자에 침대칸으로 사용하며 편하게 고흥까지 간다

고흥 버스 터미널(21:30)

고속도로의 통행이 원할하여 정확하게 4시간만에 고흥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수퍼에 들려서 내일 산행하면서 먹을 빵과 쥬스, 막걸리

한병을 사서 찜질방가는 길에 너무 일찍 찜질방에 가봐야 잠자기가 불편할 듯

싶어서 찜질방 가는길에 생맥주 생각이 나서 호프집에 들린다

이곳에 들려서 생맥주 한잔에 치킨을 먹고 싶은데 치킨 반마리만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줄 수 있다고 하여 치킨 반마리(5,000원)에 생맥주 500cc 2잔을 마시고 찜질방으로 향한다

고흥 건강사우나 찜질방(10:20~05:00)

고흥읍내에서 유일한 찜질방은 터미널에서 10분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해 고흥지맥 3구간을 산행할 때 이곳에서 하룻밤을 신세진 곳이다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으로 올라가니 손님이라곤 5~6명 밖에 없어서 좀 편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겠구나 하고 토굴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얼마나 코를 골아 되는지 하는 수 없이 2층으로 약간 추운 곳에서 잠을 청한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찜질방이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7~8명정도 되는 인원이 술을 먹고 들어와서 싸움을 하는지 시끄럽고, 한쪽에선

족발과 술판을 벌이며, TV를 크게 틀어놓고 매너는 국끓여 먹었는지 찾을길이 없다

한 마디 하려고 내려가는데 팔뚝에 문신을 한 깍두기들이  아닌가

말 잘못했다간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될것만 같아서 찍소리도 못하는데 어느 누구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시계는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킨다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서 사우나 락카룸으로 내려오니 우측에 문이 달린 방이 있는데

떼밀이 아저씨가 쓰는 방이 있고 이불까지 깔려 있는데 문이 열려 있는게 아닌가

이른 새벽에 출근하지 않을 것 같아서 2시간 가까이 꿀맛같은 단잠을 잔다... 진작 올것

 

이곳은 시설은 그런데로 괜찮으나 시설관리는 빵점 수준이다

영산기맥을  타면서 장성의 삼호 찜질방과 영광의 태성호텔 찜질방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런대도 지난해에 비해서 요금은 1,000원이나 오른 9,000원이나 받는다 

4시 30분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을 영업하는 식당을 찿으려고 읍내를

헤매는데도 문을 연 식당은 한 군데도 없고,  이곳은 아직도 12월인지 로터리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밝히고 있는데 고흥군의 재정자립도가 얼만인지 모르겠으나

이 지역 공무원들의 의식 수준이 의심스럽다... 저것도 민초들의 세금일텐데

식당을 찾아서 20분이상을  헤매다가 포기하고 편의점에 들린다

편의점에 들려서 인스턴트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고 점심때 먹을 햇반하나를

전자렌지에 돌려서 가져간 보온도시락에 담고 운곡재를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탄다

운곡재(05:30)

운곡재는 운곡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운암산 중턱에 고려 공민왕 19년에 중수한

고찰 수도암(修道庵)이 있고 마을앞에 正宗 乙巳年에 건립한 雲谷祠가 있었는데 고종때

서원철페령에 의해 철거되었으며 당초 마을이름이 사구시였는데 일제시대인 1914년

지방행정 통폐합시 운대리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운암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운곡(雲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읍내에서 이곳까지 택시를 타고 오는데 10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인데 요금은 5,500원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아직도 컴컴한 한밤중이라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나를 태워준  택시는 요금을 받자마자 고흥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음력 이월 초사흘날의

운곡재 새벽은 적막강산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30분정도 늦게 출발할 걸 후회스럽다

거기다가 최근에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산행하다 보니 헤드렌턴의 필요성을 별로

못느껴, 건전지를 점검을 안했더니만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불빛이 상당히 흐리다

겨우 렌턴을 켜고 스틱을 편 다음에 등로에 접어드니 초반부터 잡목의 심한 태클로

인해 베낭을 잡아 당기고 나무는 얼굴을 후려치는데 등로는 거의 보이질 않는다

141봉(05:40)

등로에 들어서니 고흥지맥 특유의 길이 없어지고 어둠속에 이리저리

헤매다가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광주 백계남님의 시그널을 만나는데

우짜든 간에 고흥지맥길을 정상적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141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길을 가지만 길이 너무 난해하다

잠시 후 능선을 지나 또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무명묘지를 만난다.  

146봉(05:50)

이곳이 유승봉 갈림길이라고하는 곳인데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되는 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이제서야 등로가 조금씩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캄캄하다

어제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春分이지만, 아직까지 밤이 조금 길다는 느낌이다

내리막 등로를 내려오니 어둠속에 密陽 朴公의 묘지를 만난다.

묘지를 내려오니 절개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데

아예 길은 보이질 않고 백두사랑의 이 대장 시그널만 보이는데 잡목의

저항이 너무 심하여 이리저리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다 얼굴이 할키어 피나 난다

이런 젠장맞을... 초반부터 피를 본다... 이제사 날이 새기 시작한다

잠시 후에 77번 국도로 구도로 내려서 송곡육교에 도착한다

송곡육교(06:15)

송곡육교를 건너서 송곡재로 향한다

송곡육교 아래로는 고흥군을 전체를 관통하는 77, 27, 17번 국도가 시원스럽게 지나간다

송곡재(松谷峴:06:17)

고흥읍 남계리 송곡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민주인사추모비와 수준점과 사각정자,

와이즈맨 고흥클럽에서 설치한 ‘親, 敎養, 奉仕’라고 새겨져 있는 기념비가 있다 

육교 아래로 벌교~고흥간을 잇는 4차선도로(15번,27번, 77번)가 지나가고

저 건너편에 우뚝 솟은 유승봉이 보인다.

좌측에 있는 송곡마을은 예전에 이곳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곡(松谷)이라

불렀으며 옛 문헌에는 송현(松峴: 솔고개)로 표시가 되어있다

민주인사 추모비

민주인사 추모 獻詩

송곡재 소공원에 있는 수준점

와이즈맨 기념탑

송곡재에서 우측으로 돌아 오르면 계단을 따라 묘지 상단에 도착한다.

처음 만나는 孺人 礪山宋氏 묘지를 지나 조금을 더 오르니 호화묘지가 나온다

密陽 朴公의 가족묘지

등로에서 바라본 조금전에 지나온 구간

오늘은 전국적으로 몰아친 황사현상으로 인해 이곳 청정지역에도 앞을 가늠하기 힘들다

또 다른 묘지 2기를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평소에 酒量이 상당하셨던 모양입니다... 참이슬이 여섯병씩이나...

능선을 올라섰다 내려서니 과수원과 그 너머로 주월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지러운 등로로 내려서서 과수원 도로를 따라 가다가 과수원 가운데로 들어선다

매화꽃이 피기 시작한다

만발한 매화꽃을 바라보며 과수원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잡목과 잡풀로 인하여 고생길이 훤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남도의 넉넉한 인심과는 달리 산의 인심은 참으로 고약하기 그지없다

간벌을 한 나무들을 등로에 그대로 방치하여 걷는데 엄청 불편하다.

놀부의 심보를 닮았나... 고얀지고...

지난해 영산기맥길에서 길을 찾지못해 헤맬때 녹색 리번이 산 길을 안내했는데

오늘은  빨간 리번이 등로를 안내한다 ( 공작산 아우님은  아닐테고... 암튼 감사)

163봉(06:35)

묘지 뒷 능선을 지나가는데 이곳 역시 등로는 개판이다

손에 잡힐듯한 주월산이 짙은 황사로 멀게만 보인다

부처손도 봄나들이를 시작했나 보다

생강나무도 독립군(나홀로 산행)을 반기고...

주월산 갈림길(06:50)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200여m 떨어진 주월산으로 향한다

주월산 정상가는 길에는 송곡마을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포장도를 만난다

주월산 정상 아래의 이정표

저 앞 운암산 위로 태양이 한참을 떠올랐건만 짙은 황사로 운암산은 전혀 안보인다

주월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고흥군에서 설치한 산불감시 카메라와

SK 이동통신 고흥기지국이 있고, 조금을 더 가니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주월산 정상에 있는 산불감시초소

주월산(舟越山:291m:06:50)

고흥군 고흥읍과 두원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옛날에 홍수로 인하여 바닷물이

범람하여 풍양과 축두에 정박하고 있던 범선이 바닷물에 밀려 이 산을

넘었다고 하여 주월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고흥과 두원을 사이에 두고 주월산이 우뚝솟아 있는데 이 때에

큰 홍수 피해를 입은 고흥땅은 남쪽 조계산밑으로 형성되어 있는 등암리를

깃점으로 포두면 장수 저수지까지 길게 흘러내렸다는 장수천이 있고

그 이후에 남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마치 보성군 조성에 있는 호남정맥 능선에 있는 주월산과 똑같은 내용이다

주월산 정상에는 정상석은 없고 하늘기둥님께서 설치한 아크릴 표시판만 있는데

주위에는 굴참나무가 많이 보이며 인식할 없는 깨진 삼각점과 돌탑이 많이 보인다.

고흥읍내로 내려가는 옥상마을 길에는 돌탑들이 많다

다시 베낭을 벗어논 갈림길로 향하는데 좌측으로 가야할 수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주월산 갈림길(07:00)

내 베낭이 얌전하게 쥔장을 기다리고 있다

등로 주위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역시 남쪽은 남쪽이다

주월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이른 아침 개고생한 등로를 보상이라도 해주는지 무척이나 좋다

대곡재(大谷峴:07:05)

주월산에서 지맥길 등로로 되돌아와 급경사로 내려서니 안부사거리에 대곡재가 나온다.

고흥군 고흥읍 행정리 교촌부락과 두원면 반송부락을 연결하는 옛길이다.

고개는 +로 된 길이 나오며 사방이 다 등로가 뚜렸하나 직진으로 향한다

고흥지맥길은 속된말로 등로는 개판이나 선답자들의 시그널은 의외로 많아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사는 서울쪽은 아직 진달래가 필 생각도 안하는데 이곳은  많이 피었다

조금전에 지나온 주월산은 미세 먼지로 앞이 잘 안 보인다

능선으로 오르니 육군 훈련장이라는 말뚝이 있는데 능선 좌측으로 고흥군 동원 예비군 훈련장이다

222봉(07:15)

새로 보수한듯한 벙커가 등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222봉을 넘어서니 군참호가 있고 ‘적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표지석을 지나 사격깃발이 있는 곳을 지난다.

안부로 내렸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오르는데 좌측의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암릉이 나오고 등로 아래로 두원면 반송마을이 보인다 

암릉에서 바라본 반송마을과 반송재의 모습

짙은 황사로 아주 가까운 거리이건만 마을은 보이지도 않는다

반송마을은 고흥군 두원면 신송리에 속에 있으며 예전에 소반등이라

하였고 이 마을에서 고흥읍 주월산으로 배(船)가 넘어갔다하여 배실마을로

불리웠으나 신송리로 통합되면서 소반등을 한자로 반송(盤松)이라 하여

개칭한 후에 1956년에 리.동 행정개편에 따라 독립마을이 되었다.

231봉(07:25)

231봉 정상에는 예비군 훈련장 시설문인듯한 스텐 대문에 철조망으로 녹슨 캐비넷을 감싸고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가는데 황사가 얼마나 심한지 목이 따끈거린다

231봉을 지나니 이곳 등로는 뚜렸하다... 암릉의 날등구간을 가로 지른다

가야할 수덕산과 오무산은 지금 오리무중이다

옛적에 고흥읍이 홍수로 인하여 극심한 피해를 입었을 때

백성의 건강과 평온을 기원하기 위하여 어느 때의 황후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수덕산에 올라와서 백성의 안녕을 기도했다는 설이 내려온다

수덕재로 향하는 등로는 편하다

편안한 길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삼거리 우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김녕김공과 광산김씨 부부묘를 지나서 수덕재로 향한다

고흥읍 행정리 수덕마을의 모습

수덕마을의 앞산인 수덕산을 닮아 수양과 덕을 쌓으라고 하여 수덕이라 불렀으며

또한 마을이 들 가운데에 있어 사방이 들판을 감싸고 있으므로 벼가 흔한 마을이라

하여 화덕이라 부르다가 1966년 행정개편 때에 수덕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수덕재(修德峴:07:35)

고흥읍 행정리와 두원면을 잇는 851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좌측에 수덕마을이 보이며

예비군 훈련장 간판도 보이고, 고개마루에 커다란 노거수인 느티나무 한그루가 수덕마을을

외호하고 있으며 우측 도로 삼거리에 두원면 표지석과 소공원이 있다.

두원면은 산의 지세가 야산으로 되어 언덕이 콩깍지처럼 엉켰다고 하여

두원(豆源)이라 불렀으며 사람들이 온순하고 순박하고 충, 효,예를 중시한다고 한다

수덕재를 가로질러 마을 뒷쪽 길로 올라서니 밭 가운데로 길이 나있고 좌.우 개집이 있는데

개쉬끼 2마리가 이른 아침에 홀로가는 산꾼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짖어댄다

조금을 더 오르니 멋진 소나무와 두릅밭이 있고 다시 능선으로 들어서는데 길은 보이질 않는다

마을의 밭에 있는 원추리의 모습

아주 부드러워 데쳐서 쐬주 한잔에 안주로 하면 기가 막히겠다

탐스러운 원추리 옆에는 미친광대나물꽃이 활짝 피어있다 

두릅밭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길은 없고 다시 고행길이 시작된다

맥 산꾼에게는 전설같으신 인물인 준.희님

지나가신지 오래되었는지 시그널이 많이 바래있다.

건강이 어떠신지?... 2년전 수도지맥을 홀로 하면서 솜등산의

유래를 몰라서 통화를 했는데... 부산오면 꼭 한번 달라고 했는데...

길이 없는 등로를 수행이라 생각하며 힘들게 올라가니 암릉구간이 나온다

156봉(07:45)

정상에는 약간의 암릉과 소나무가 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달려있다

이곳에서 90도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지만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소곳이 새색씨처럼 수줍어하는 진달래가 피어있는 등로로 내려선다

이장(移葬)을 했는지 파묘(破墓)가 있는 묘지를 내려서니 넓은 안부가 나온다

안부로 내려서니 좌측으로는 수덕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나오고 우측 묘지로 올라선다

무명 묘지를 지나니...호화로운 한양조씨 가족 묘지가 나온다

이 어르신은 女福도 많으셔요

밀양박씨와 의령남씨 부인을 두 분이나 두셨군요

한양조씨 묘지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갑자기 길이 없어지고 망개나무(청미래)를

비롯한 잡목들이 너무 많아 어디로 가야할 지 앞이 캄캄하다

언젠가 후배 산꾼 공작산과 막걸리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어디 맥길이 가장 힘드냐고

하니까... 그 후배가 거두절미하고 고흥지맥이라고 한 생각이 나는데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저 친구는 어떻게 지나 갔을까... 암튼 대단한 친구야

무명묘지가 나오고 묘지를 가로질러 우측 잡목 숲으로 향한다

정말이지 미치겠다

준.희 선배님 이곳은 넘...힘들어요

192봉(08:00)

준.희님의 응원 메세지를 지나니 암릉이 나타나고 암릉을 올라서니 삼거리가 나타나면서

길은 좋아진다...편안한 능선을 따라 좌측으로 꺽어진 지점이 고봉산과 옥녀봉의 갈림길이다

동백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등로는 약간 뚜렸해진다

272봉(08:15)

272봉을 지나면서 수덕산 정상 직전까지는 계속해서 암릉구간이다

고흥지맥길은 어느 한 곳 그리 만만한 곳이 없다 

수덕산 정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멋진 바위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멋진 암릉이 근육질을 뽐내지만 갈길 바쁜 산꾼에겐 고역입니다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호동마을의 모습

짙은 황사로 인해 저멀리 보이는 득량만을 똑딱이 카메라에 담는 건 역부족이다

수덕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고흥읍 호동리(虎東里)는 호산의 동쪽마을이라

호동(虎東)이라 하였으며 마을 뒷쪽으로 오무산이 )자형으로 고흥지맥 마루금을 이어가고 있다.

짙은 황사 저 너머로 두시쪽에 녹동항과 거금대교가 아련하게 보이며,  바둑판처럼

보이는 간척지 뒤로는 고흥만 방조제가 있는데 고흥군 도덕면 용동리에서 두원면 풍류리까지

2,893m의 득량만 바닷길을 막아 축조한 방조제이며 1191년에 착공하여 16년간의 공사끝에

2007년말에 완공하였고, 그 너머 호남정맥길인 오봉산과 존재산이 아련히 보이는 곳이건만

오늘은 전혀 보이지 않은 그야말로 오리무중 길이다

짙은 황사로 뒤덮인 고흥읍내의 모습

3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로서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흥군은 흔히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하며,아름다운 고흥10景에 속해있는 팔영산, 소록도, 중산리 일몰, 유자공원,

고흥만 방조제 나로도 우주센터 등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조금전에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다... 좌측으로 고흥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흥반도는 독수리처럼 용맹스럽고 구름을 탄 천마리의 학이 천궁을 이끌어

제왕이 앉은듯한 산세로 수많은 인재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 국가와 인류를

크게 이바지하면서 영화를 누릴 산세라고 한다

수덕산(修德山:301m:08:30)

고흥군 고흥군 옥하리와 호동리의 경계에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산 아래에 있는

수덕마을에서 따온 듯 하며 정상 아래에는 조선조 중종때 설치한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

이곳은 고흥 사람들에게는 버려진 산인지(?) 등로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잡풀만 무성하다

어영님께서 걸어둔 아크릴 표지판만 없으면 모르고 지날 갈 산이다

수덕산 정상의 봉수대

옛날에 흥양현(고흥의 옛지명)에 11개의 봉수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팔전산(팔영산), 천등산, 장기산, 마복산은 직봉이로, 수덕산은 간봉으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 있으며 나머지 여섯곳 봉수 가운데 유주산 봉수를

제외한 나머지 봉수는 중종 년간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중종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포구에 설치하였다가 그 이후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수덕산의 봉수대

수덕산 정상에 조금을 지나고 방치되어 있는 봉수대를 지나니 갑자기 등로가 사라졌다 

봄의 전령사인 제비꽃

붓꽃도 꽃망울을 터트렸네...

이곳은 오래전에 산불이 난 모양이다

소나무를 비롯한 산의 주인공(?)로 인하여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바람에 산꾼들은 이 지역을 지나는데 정말 고역이다

가시나무 잡목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은 존경하다 못해 경이롭게까지 보인다

가시나무와 잡목으로 우거진 능선 끝에 오니 엄청난 절개지가 나오는데 물에 타서

넘어진 소나무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오늘의 빨간리본이 보이다가 갑자기 없어진다

화재가 난 지역 아래는 황사에 뒤덮인 고흥읍 성촌리 마을이 아련히 보인다

서쪽으로 바다가 있으나 성촌리의 서쪽에 작은 산이 있어 지대가 약간 높고

이 주변에서 고흥천이 시작되고 있으며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성촌(城村)이란 이름은 마을 주위를 산이 성과 같이 둘러싸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오늘 산행중에 나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빨간 리번이 나를 기다린다

수덕산을 내려오다가 불탄지역의 급경사를 지나 약간 우측으로 꺽어져

무작정 내려오니 산의 허리를 가로 지르는 희미한 등로가 나온다

불탄 자리의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 고사리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아래로는 너덜겅이 보이고...

이곳에서 상당히 망설였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가야 할 지

아니면 험한 너덜겅을 가로질러 내려가야 할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무조건 내려온다

집에와서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니 좌측으로 내려온 산꾼, 나처럼 무조건 직진하여

너덜겅을 치고 내려온 산꾼, 우측으로 내려온 산꾼들...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편하게 내려오려면 산중간의 등로에서 우측으로 갔다가 좌측으로 꺽어지는게 편할 것 같다 

너덜겅을 가로질러 내려오니 잡목이 우거진 숲으로 내려서니 高興 柳公 묘지가 나온다 

묘지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나오니 우측 윗쪽으로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이쪽으로 내려와야 맞을듯 싶다

묘지 갈림길(09:15)

고흥류공의 묘지로 연결되는 뚜렸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최근에 조성한 듯한

무명의 쌍묘가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넓은 임도를 버리고 희미한 우측 길을 따라간다

희미한 등로로 접어드니 광주 백계남님의 시그널이 반갑게 산꾼을 반긴다

곧이어 ㅓ자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직진의 뚜렸한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수덕산 내려오면서 엄청난 개고생으로 망가진 心身을 달래려는듯 진달래가

만발한 편한 길을 내려오니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차량소리가 들린다

넓은 길을 내려서니 우측에 고흥류씨 재각인 추선묘(追先廟)가 있고

좌측으로는 류개남의 추모비와 소공원이 있는 화적재로 내려선다

화적재(09:20)

고흥읍 성촌리에서 호동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고개 정상 위에는 高興柳氏 祭閣이 있고

그 옆에는 고흥 유씨인 유개남의 사적비와 물맛이 좋다는 약수터가 보인다 

유개남의 사적비와  그 뒷쪽으로 수덕산의 모습
이곳 화적재가 있는 호동리는 고흥류씨(高興柳氏)의 집성촌으로 화적재란

지명 역시 고흥류씨와 관련된 듯 한데 그 유래는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하다

 

고흥은 고려초에 고이부곡이라 불렸고 고흥읍 호동리는 지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호서와 간천을 합쳐 호동리로 개칭됐다.
고흥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이었던 류영(柳英)을 시조로 하고,7세손
청신(淸臣)이 고려 충선왕때
고흥부원군에 봉해져 관향을 고흥으로 한데서 비롯됐다.
고흥류씨는 남한에 총 1만5천296가구 6만4천456명이 살고 있으며 고흥을 비롯,
전남지역에만 1만3천여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동리는 고흥류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조선 중종 때 13세손인 류문이 터를 잡은 뒤 
이곳 호동리를 비롯하여 고흥지역에는 300여명의 사직공파 후손들이 살고 있다

화적재 약수터

화적재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 약수터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어들지 않으며 물통에 담아서 한달정도를 놓아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수덕산 정상에서 시작되는 이 물줄기는 고흥읍내에 있는 홍교 다리밑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선녀들이 홍교 다리밑에서 목욕을 하고 수덕산에서 기원한

무지개를 타고 등천하는 곳으로 꿈을 키워 소원을 성취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차를 세워놓고 약수물을 받는 여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다시 한 바가지 물을 들이킨 다음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무산으로 향한다

오늘의 날씨가 생각보다 더워서 물이 아무래도 모자랄듯 싶었는데 식수 보충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준.희님의 화적재라 붙인 표시판을 지나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화적재에서 수통에 식수를 가득 채우고 우측 포장도로를 접어든 직후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좌측 포장도로를 가도 잠시후에 길은 만나지만 가급적 원칙대로 가고 싶어 능선으로 간다 

능선으로 오르니 유인 여산 송씨 묘지가 보이고 그 뒤로 송전탑을 만난다

이 어른도 生前에 女福이 많으셨군요

그리고 본부인과 첩의 사이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지나온 수락산의 모습... 두번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개고생하면서 내려왔다

묘지를 지나니 다시 잡목구간이 시작되고 잠시후 밭 가운데로 접어든다

밭 가운데를 지나 지맥길을 이어가니 NO101 송전탑을 만난다

NO 101송전탑(09:23)

밭을 지나 능선으로 들어서자마자 묘지가 나오고 곧이어 시멘트 도로를 만난다

묘지를 내려서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화적재에서 헤어졌던 도로와 다시 만나고...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가 좌측의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올라선다

뚜렸한 등로로 올라서니 무명묘지 2기를 지나 능선으로 접어든다

잠시후에 측백나무 군락지가 나오고..길이 험하다가 우측으로 오르는 뚜렸한 등로를 만난다

평평한 능선에 오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좌측으로 오르는 희미한 등로를 만난다

다시 길은 難解해지지만 지나온 수덕산 내리막길과 비교하면 양반이다

좌측으로는 동백나무 우측으로는 측백나무 군락지가 있고 갈림길에서 직진한다

못된 놈의 쉬끼... 누굴보고 치우라는거냐

196봉(09:47)

산딸기 군락지를 지나는데 여름철엔 지나기가 무척 힘들것 같다

너도 나만큼이나 힘든 삶을 살고 있구나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등로를 지나간다

편안한 등로를 내려오다가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우측에 커다란 비석이 서있는 묘지가 있어서 가본다

신촌고개(10:00)

이 길은 탐생마을에서 간척지로 만들어진 신촌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이며

일명 신촌고개로 불리며 처음에 신(申)씨가 입주하여 생긴 마을로

신촌마을이라고 부르며 고흥읍 관내에서 가장 적은 마을이라고 한다

이른 새벽에 아침을 먹은터라 약간의 허기가 지기에 이곳에서 우유 하나와 사과 한쪽으로

허기를 면하고 10여분 동안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임도를 가로질러 등로로 접어든다

221봉(10:25)

조금전에 지나온 수덕산과 196봉의 모습

임도 갈림길(10:28)

비포장도로인 방화선 임도로 내려섰다가 우측 등로로 접어든다

너덜겅 갈림길(10:33)

뚜렸한 등로를 따라 올라 오르니 꽤나 큰 너덜길을 만나 우측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 너덜겅으로 올라서서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조금전 헤어진

방화선 임도를 만나고 산불감시요원이 차량을 주차해 놓고 있는데 이곳에 산불이

났을 때 이 험한 길까지 소방차가 올라올 때까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문!!!

임도에서 절개지로 올라서니 오무산 이정표와 삼각점을 만난다

오무산(鼇舞山:356.3m)

고흥군 고흥읍 고소리와 등암리 그리고 풍양면 상림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아래로는 뱀처럼 꼬불꼬불한 방화임도가 나있고 정상에는 2등삼각점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커다란 자라가 헤엄을 치며 춤을 추었던 바다가 융기를 해서

중후한 산봉을 세웠다는 설도 있고, 또다른 설은 이곳의 산세가 마치 자라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자라 오(鰲), 춤출 무(舞)’ 자를 써서 오무산이라

불렀다고 하며 영진지도에는 어무산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오무산 정상 삼각점(△고흥 25 / 1990재설)

오무산 정상의 모습

오무산 정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방화 임도를 만나고...

임도를 가로질러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아침부터 온전히 고흥읍만 걸어왔는데 이곳부터는 고흥읍과 풍양면의 경계이다

2번째 임도로 내렸다가 능선으로 접어 든 다음에...

3번째 방화선 임도를 거치면서 내려서니...

3번째 방화선 임도로 내려오니 희미한 등로가 나오고 묘지 2기가 나란히 보인다

가선대부 이조판서 금녕 김성록(金成綠)의 묘를 만난다

이조판서(吏曹書)이면 지금의 직책으로는 행정자치부 장관과 같은 것인데

예전의 막강한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묘지는 그냥 수수하다. 

울님의 乳頭처럼 생긴 진달래 봉우리가 세월을 기다린다

이조판서 묘지를 지나면서 간벌을 한 다음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잡목으로 인하여

갑자기 등로가 사라져 버리고 길은 보이질 않는다... 오늘 몇번이나 이 짓거리인지

이리저리 한참을 헤매다가 너덜길 비슷한 곳으로 내려서는데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스틱으로 잡목을 헤치면서 내려가는데 등산화 바닥이 물커덩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독사 한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걸 내가 밟은 것이다

나도 놀라고 그 넘도 놀란 모양이다... 다행이 날씨가 추운 탓이라 힘을 못쓰는지

얼른 도망을 가버리는데 가을철에 밟았으면 황천길 갈뻔 했다

힘들게 능선을 헤쳐 나오니 뚜렸한 등로가 나타난다

등로 우측으로는 꽤나 큰 농장이 보이고...

시멘트 포장도로(11:10)

농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접어든다

이곳 역시 등로는 거칠기만 하다... 철조망을 끼고 우측으로 내려간다

포장도로(11:18)

조금전에 헤어진 포장도로를 또다시 만난다

우측으로는 농장이고 좌측 아래로는 고흥읍 등암리와 상림제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빨간 동백꽃이 탐스럽다

다시 농장 묘목장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접어든다

130봉(11:25)

가선대부를 지낸 高靈申公과 부인 光山金氏 묘지는 관리가 안 된채로 방치되어 있고...

잘 관리된 무명묘지 뒤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고흥읍 등암마을

등암마을은 옛부터 이곳이 세갈래길이 있다하여 삼거리라 불렀으나

일제시대에 등암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매실밭을 지나서 숲속으로 들어선다

간벌지역으로 내려서니...

허름한 주택가 가운데로 내려서니 개쉬끼가 독립군에게 난리부르스를 친다

주택옆에 있는게 고인돌(지석묘)이 분명한 듯 보이는데 다들 관심이 없는가 보다

먹국재로 내려선다

77번과 22번 구도로와 신 도로가 나란히 지나가는 먹국재에 내려서서 교통의 흐름을 파악하고 무단횡단을 한다

먹국재 - 풍양면 상림리 방면의 모습

이 고개가 먹국재라는 곳인데 조금전에 지나온 화적재와 마찬가지로 고흥군의

그 어느 자료에도 먹국재라는 유래를 찾을 길이 없고, 화적재가 고흥류씨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 역시 상림리가 곡부공씨(曲阜孔氏)의 집성촌이

있어서 곡부공씨에 관련된 지명이 아닌지...(범여의 생각 中에서)

 

공씨 본관은 곡부(曲阜) 단본으로 1351년(충정왕 3) 공자의 53세손 공소(孔紹)

고려에 귀화하여 문화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함으로써 우리나라 공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국의 창원을 본관으로 같이 할 수 없다 하여, 1794년(정조 18)

공자의 고향인 곡부를 사적(賜籍) 받음으로써 곡부공씨가 되었다.

공소의 후손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판윤공파(判尹公派)·봉명파(鳳鳴派)·목사공파(牧使公派)·

장성파(長城派)·사성공파(司成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 등으로 분파되었다.

공씨의 중시조 공손의 손자인 공은((孔㒚)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 불의라 하여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가 조선 초에 여수시 삼일동 낙포에 유배되어 이곳에서 타계했다

먹국재(11:40)

고흥군 고흥읍 등암리와 상림리의 경계에 있는 22번과 77번 신.구 국도가 나란히 지나는 곳으로 

고개로 우측으로 소록도와 녹동으로 연결되고 좌측으로는 고흥과 벌교를 연결하는 도로이다.

먹국재에서 수로를 타고 올라가서 초반부터 희미한 등로에 길은 보이지 않고 잡목과의 전쟁을 치른다

도데체 어디로 가야할 지 답이 나오질 않는데 왜이리 사서 개고생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135봉(11:55)

능선에 올라서니 등로가 뚜렸하게 보이고 T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100m정도를 진행하니 묘지 1기가 있는 135봉을 만난다

135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등로가 뚜렸해지기 시작하고...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나고 약간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안부에 내려서니 좌측으로 신전제가 보이며 저수지 너머로 신전마을이 보인다.

고흥읍 등암리에 속한 신전마을은 200년 전 마을이 생길 당시 소반과 같이 생긴

넓은 밭이 있어 장전(長田)이라 불렀으며 이곳에서 직진으로 넓은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한다

시멘트 도로(12:05)

시멘트 포장도로 끝나는 지점에 감나무밭이 있고...

감나무밭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서니 묘지 한 기가 나온다

독립군의 점심상(12:10 ~ 30)

배꼽시계는 정확하게 점심시간을 알린다... 이른 새벽에 부실하게 아침을

먹은 탓인지 배가 고파오기에 양지바른 亡者의 음택 옆에 밥상을 펼친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햇반 하나를 사서 전자렌지에 5분정도 데운 다음에

집에서 가져간 보온 도시락에 넣은 탓인지 밥은 아직 溫氣가 돌아 먹을 만하다

거기다가 집에서 가져온 달래간장에다 밥 비비고, 막걸리 한병에 한라봉을

후식으로 이만하면 집 나온 산꾼의 밥상은 진수성찬이 아닌감...ㅋㅋㅋ

20분간의 여유(?)로운 점심 만찬을 즐기고 다시 베낭을 추스려 길을 나선다

잠시후에 등로는 밭으로 변하고 있고, 농군 한명이 석류를 심고 있는데 인사를 건넨다

트럭을 대놓고, 석류나무를 심고 있는데 이 양반은 인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몇년전 고향인 이곳으로 귀촌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밭으로 개간되고 있는 곳으로 올라서서 고흥지맥을 이어간다

조금전에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개간지를 지나서 다시 등로로 접어든다

능선 좌측으로 내려서니 대나무 숲길을 만나게 되고... 

대나무 숲사이로 풍양논공단지가 보이고...

대밭 우측으로 통과하다가 끝날 무렵에 좌측의 능선으로 접어든다

오름길에는 간벌을 하여 잘 정리가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는게 간벌의 원칙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y자 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또다시 등로가 없어진다

迷路같은 등로를 겨우 헤집고 내려서니 묘지를 조성하면서 헤쳐놓은 등로를 만난다

갓점고개(12:50)

우측 시멘트 도로쪽은 삼신제가는 길이며 좌측은 갓점마을에서 신전제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인데 도로를 가로질러 올라서다가 우측으로 꺽어진다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능성구공(綾城具公) 묘지가 나오고 묘지 뒷쪽으로 올라서니 고생문이 훤하게 보인다

등로는 거의 보이질 않고 오늘 나의 나침판 역할을 하는 빨간 리본이 범여를 안내한다

등로는 이제 아주 보이질 않고 무작정 너덜길을  가로질러 올라간다

어제밤에 잠을 설친 표시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너덜길에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이제 서서히 짙은 황사가 물러가고 험한 등로와는 달리 남도땅 고흥의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조지프 A. 아마토가 지은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On Foot)"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 약 6백만년이 지났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바빌로니아 지도가 만들어진 것이 약4,500년전의 일이라하니, 그 때의

우리조상들이 지금의 우리와 같지는 않겠지만 지도를 보고 걸은 기간은 그 때부터

계산하더라도 걷기 역사의 1%도 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다시 말해 인류는 직립보행 역사의 99% 이상을 지도 없이 걸은 것이다.

우리나라 지형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일제 때로 우리 산꾼들이 등고선을 보고

산 위를 걷기 시작한 것 또한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이 못 되었을 것이다.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면서 나의 조그만 두 다리로 엄청난 길을 걸어 왔구나

351봉에서 바라본 고흥군 풍양면과 고흥읍의 산그리메

고흥읍과 풍얌면이 한 눈에 들어 오는데 고흥읍은 좌측에 오무산,

중앙에 수덕산, 우측엔 주월산과 봉황산에 둘러싸여 있다.

351봉(13:30)

그리 길지 않은 너덜길 등로의 급경사를 치고 오르는 바람에 30분의 시간을 허비한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핸드폰의 배터리가 15%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손목시계가 있긴 하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이 8km 이상이 남았는데 맘이 급해진다

중부지방 산에서 그리도 오매불망 찾아 다녔던 노루귀를 여기서 만나네

간벌을 하려는지 빨간 깃대들이 많이 보인다

Y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안부가 나오고 다시 능선을 치고 오른다

멋진 암릉

바로 아래에 보이는 저수지는 원봉림마을의 대륭지이며 원봉림(元鳳林) 마을은

원래 봉림의 중심마을로서 비봉의 큰떨(바위가 운집되어 있음을 뜻함) 의 형국이 마치 암,수의 형태로

되어 있어 암봉은 알을 품고 앉아 있고 숫봉을 마을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아 (鳳)에 마을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마을 어느곳이나 봉황이 좋아하는 오동나무숲이 많아 林자를 합쳐서 봉림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계속되는 멋진 전망암

산자고(山茨菰)

학명:Tulipa edulis  꽃말: 봄처녀

백합과에속한여러해살이풀. 양지바른풀밭에서자란다. 비늘줄기는난상원형이고

길이는 3~4 센티미터이며, 비늘 조각은 한쪽에 갈색 털이 빽빽이 난다.

잎은 선형이고, 꽃은 4~5월에 30센티미터 정도의 꽃줄기 끝에 달리며, 열매는 세모지고 둥글다.

비늘줄기를 소종이나 종양 치료제로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제주, 전남, 전북 및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조계산 분기점(13:50)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 어영님께서 걸어둔 아크릴판으로 만든

“조계산 분기점”이란 표지판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지금 이곳은 벌목중인데 벌목꾼들이 없애 버린 모양이다... 아쉽다

이곳에서 급경사로 내려서서 미인치로 향한다

미인치(美人峙:270m:13:57)

고흥군 풍양면 율치리와 봉림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옛날에 어느 풍수가

이 고개를 넘으면서 이곳 주위를 둘러보고 미인과 같다하여 미인치라

불렀으며 또한 고개가 밋밋하다고 하여 민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인치부터는 천등산 주등산로라 그런지 길이 아주 좋다.

저 멀리 고흥의 진산인 팔영산과 해창만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이곳이 미인치라 불리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전망이 끝내주는 곳이다

미인치에서 천등산으로 오르는 길은 고흥군에서 100m 단위로 이정표를

만들어 놨지만 최근에 간벌한 진달래 나무를 마구 흐트려놔서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이곳은 벌써 노루귀가 이별을 준비한다

미인치에서 천등산 가는 길은 고흥군에서 너무나 과잉친절(?)을 베푼다

100m 단위로 이정표를 세워놓은 것도 모자라서 소방서에서 구조목도

500m 단위로 세워 놓았는데 이런곳도 좋지만 지맥길도 신경 좀 써주셔요

고흥군은 산에 대해 무심한 듯 하오... 이웃에 있는 보성군이나 장흥군,

그리고 장성, 영광, 해남, 영암군들이 산을 어떻게 관리하시나 보셔요

고흥 땅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서쪽은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장흥과 보성을,

동쪽은 여자만과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반도와 마주하며 남쪽으로 수많은 섬과

바다가 펼쳐지고, 고흥의 산으로는 역시 호남 4대 사찰 중 하나인 능가사를 품고 있는

팔영산(八影山·608.6m). 이 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거금도에 솟은

적대봉(積臺峰·592.2m) 역시 산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조계산(473m)의 모습

고흥군 고흥군 호형리와 포두면 봉림리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해동여지도』,

『청구도』, 『1872년지방지도』에는 조계산(), 『동여도』, 『조선지형도』에는

조계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산의 모양이 조개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마다 한자가 다르게 표기된 것은 음을 취한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미인치에서 힘들게 능선에 올라서니 멋진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바닷가 근처의

산이라 그런지 그리 춥지는 않으니 바람이 참으로 세차게 불어댄다 

390봉(14:15)

가야할 천등산은 잘 보이질 않고 지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벼락산만 보인다

안지재(14:25)

고흥지맥 능선에서 풍양면 율치리 사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엉터리 이정표

안지재에서  천등산 정상 2.7km→ 라고 표시해놨는데 바로 아래에

고흥군에서 100m  단위로 세워논 이정표에는 1.8km 이다... 고흥군 것이 맞다

아주 편안한 길을 따라서 천등산으로 향한다

염소바위(14:35)

안치재에서 올라서니 염소바위 아래로 사동 저수지가 보인다.

서쪽으로는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장흥과 보성이 보이며

동쪽은 여자만과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반도와 마주하는 곳이다

바위 아래에는 현오색과 산자고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멋진 암릉구간으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사동저수지가 보이는데 흙탕물이다

현호색

벼락산(431m:14:50)

안부같은 평평한 능선에 벼락산이라는 표시판이 달려있는데 약간은 혼란스럽다

천등산가는 저 높은곳에 암릉 덩어리로 되어있는 곳에 별학산이 또 있으니...

벼락산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산의 형상 때문이다.

산의 형상이 호랑이 상이라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이 산의 상봉이 보이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천등산보다 높은 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벼락을 때려서

산의 높이를 낮췄는데, 그런 연유로 벼락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설은 두 남매가 장대를 들고 별을 따러 올라갔다가 벼락을 맞았다는 전설이 있는 봉우리이다

이젠 먹을것도 없고 체력은 다 소진되어 버렸는데 천등산 능선을 바라보니 다리가 풀려 버린다

오늘도 내 다리가 쥔장 잘못만나 혹사를 당하는구나

이른 새벽부터 운암산 아래에서 시작하였으니 참으로 많이도 왔구나

급경사의 오르막 길을 오르는데 바위굴 안에서 石間水가 흘러 내린다

오늘은 의외로 날씨가 더워서 화적재에서 보충한 식수가 달랑달랑하여

이곳에서 펫트병으로 한 통을 받아 마시고 나니 조금은 살 것만 같다

벼락산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는데는 상당히 힘도 들지만 늦은 오후의

바닷가 산이라서 그런지 능선 정상에 오르니 서 있기조차 힘들만큼 바람이 세다

천등산 가는 길의 암릉들은 마치 수석 전시장을 옮겨 놓은듯 하다

장계지맥 갈림길(15:15)

장계지맥 지도

암릉 사이의 편안한 길을 따라서 걸어간다

천등산가는 길의 암릉길은 오늘 힘들게 걸어온 지맥길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지 정말 환상 그 자체이다

고흥군이 100m마다 이정표를 붙혀놨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고흥반도 최남단 풍남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풍남항은 한때 수군만호가 지킨 조운(漕運)의 경유항이었지만 지금은 한적한 어항이다.

천등산은 풍양면과 도화면, 포두면 등 3개 면에 걸쳐있으며, 이 산은 올라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고 할 정도로 산세가 우람하고 품위가 있다.

천등산 정상에서 바라본 암봉의 모습

딸각산의 명칭은 바위를 밟으면 “딸각딸각” 소리가 난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전한다.

해서 ‘딸각산’이라 불리던 것이 ‘달각산’으로 바뀐 것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달 월(月)’자와 ‘뿔 각(角)’자를 쓴 것이라 한다.

천등산(天登山:553.5m:15:22)

고흥반도 최남단인 고흥군 풍양면, 포두면, 도화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3면봉으로

다도해의 여러섬에 둘러쌓인 산으로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봉우리가 하늘에 닿는다고 하여 天登山이라 불렀으며 금탑사(金塔寺)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이 있엇던 옛날에 스님들이 정상에 올라 천개의 등불을 바쳤다는 설과

금탑사 스님들이 도를 닦으려고 산 정상에 올라와 밤이면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다고 하여 천등산이란 설이 있다.

 

금탑사는 통일신라시대 선덕여왕시절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100년 이상된

비자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되어 자생하고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천등산 봉수대

정상에는 조선조 때의 봉수대 축성이 흐트러져 있고 기우단으로서도 유명한 곳이며,

고흥 반도에서 팔영산, 적대봉에 이어 3번째로 높은 산이라 남해의 조망이 특히 뛰어나다.

이 봉수대는 동쪽의 마복산과 서쪽의 장기산과 봉수가 통했다고 한다

천등산에서니 고흥의 명산들이 한 눈에 들어오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건만

오늘 산행은 거리도 만만찮지만 워낙 길이 좋지않아 똑닥이카메라를 가져 왔더니만

멋진 仙景을 잡을수가 없어서 아쉽다...마복산 너머 나로도 우주기지가 아련히 보인다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의 4대 사찰인 능가사를 품고있는 팔영산과

거금도에 있는 적대봉(積臺峰:592.2m)과 고흥의 산을 애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천등산 등

이곳 천등산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落照와 다도해의 풍광이 환상적이다.

봄철에 철쭉 산행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천등산 너머로 우리나라 우주센터와 발사기지가 있는 나로도(羅老島)가 보인다.

2009년에 우주센터가 완공되어 세계에서 13번째로 우주발사기지를 갖게 되었고

2011년도에 2번에 걸쳐서 발사실패도 맛보았다

중국 상인들이 비단이 바람에 날리는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단 나(羅)에 늙을 로(老)를

써서 나로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등산 정상 2등 삼각점(△고흥 26 / 1990 재설)

천등산과 별학산에 관한 전설

천등산(天登山:5553.5m)의 지명유래와 관련해 두 가지의 설이 전해진다.

‘하늘을 오르는 산’ 또는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듯한 산’이라는 뜻이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풍양면 송정리 송정마을과 천등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인데 천등산과 서쪽에 있는 별학산(別鶴山:342m)이 서로 하늘 높이 올라가겠다고

매일 밤이 지날때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했는데 별학산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서 바위 높이를 매일밤 키워서 천등산보다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별학산의 탐욕을 꾸짖어 벼락을 내리쳐 바위를 부수었고

승부는 천등산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별학산을 아래에서 바라보면 바위가 부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별학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호랑이상(虎像)에 해당되어 그 산자락에 묏자리를

쓰지 않았다고 하며,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한 별학산 암봉 아래 위치한

천등, 송정마을에서는 좀처럼 큰 인물이 나지않고 있으며 호랑이 등을 탄 산너머

사동마을 출신들은 큰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천등산 정상에서 바라본 금탑사 (金塔寺)

고흥읍에서 16km 떨어진 포두면 천등산(554m)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 중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사찰로 승려들은 천등산의 ‘천등’이란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한 것을 이르는 것이고,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말한다.

그 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03년 궁현·옥순대사가 중건했다가
숙종18년(1692년) 불에 타버리고 극락전만
남았다고 하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지방 문화재102호)을 비롯해서 명부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고,
보물1344호인 괘불탱이 있다.

절 주위의 울창한 비자림은 천연기념물 제239호이다. 4만여평의 면적에 약 3,3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금탑사와
암자주변에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주변에는 율곡 이이의 부친이 호환(虎患)이 두려워 심었다는 나도밤나무가 있다.
금탑사를 둘러싸고 있는 비자나무숲은 사찰 창건 후 300~400년이 지난 1700년 이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고흥 10景중에 하나이다

조금 내려오니 선인대라는 너럭바위가 하나 나온다.

옛날에 신선들이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바위라고 한다.

신선대에서 내려서 갈림길에서 철쭉공원 방향으로 향한다.

마치 한라산의 남쪽벽을 연상할 정도로 멋진 암릉군이 보인다.

천등산 하산길에서 바라본 장계지맥 능선
선인대 옆에 설치된 이정표

천등산 아래 갈림길(15:30)

선인대에서 내려서 갈림길에서 철쭉공원 방향으로 향한다.

마치 한라산의 남쪽벽을 연상할 정도로 멋진 암릉군이 보인다.

뱀처럼 꼬부라진 길에 철쭉공원이 보이며 그 너머로 유주산과 고흥지맥 끝 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울로 귀경할 버스시간이 촉박하여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천등산 정상에서 내려온다

철쭉공원이 가까워지면서 의자와 전망대 등 편의시설들이 많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데크목 계단을 따라서 철쭉 공원으로 내려선다

철쭉공원 너머로 안장바위가 보인다

철쭉공원(15:35)

철쭉동산에서 내려오니 데크목을 설치하여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임도의 안부에는 이정표와 화장실이 있고 좌측 사동마을 5.5km,

우측 호덕마을 5.2km의 표지판이 있다.

철쭉공원에서 뒤돌아 본 천등산의 모습

오늘 산행목표의 끝지점을 지등고개로 잡았지만 아직도 5.2km 정도 남았고

시간도 1시간 30분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무리일듯 싶다

물론 갈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고흥에서 서울로 가는 막차가 17:30이니

그 차를 탈 수가 없고 그러려면 고흥에서 순천이나 광주로 가야 하는데

또 그렇게 되면 새벽에야 서울에 떨어지면 내일 업무에 지장을 줄 것 같다

거기다가 핸드폰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전화가 불통이다

 

조금은 아쉽지만 이곳에서 베낭을 정리하고 풍양면 소재지쪽인 사동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5.5km의 먼 거리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내리막길이고

포장도로라서 1시간이면 갈 수 있을듯 싶고 도로에서 택시를 타면 충분히

고흥발 서울행 막차를 탈 수 있을듯 싶다...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걷는다

앙천잇재15:50)

앙천잇재에서 바라본 별학산과 천등산의 모습

이곳에서 뱀의 또아리처럼 생긴 도로를 내려가는데 계속해서 중간을

가로 질러서 내려가니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줄일 수 있어 다행이다

한 30분정도 부지런히 걸어온나 싶었는데 비포장도로를 부지런히 걷는다

뒷쪽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는게 아닌가... 무조건 길을 막고 손을 드니

두말 않고 태워준다... 딸각산에서 산불감시업무를 마치고 가는 차량인데

왜 혼자 다니냐면서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을 한다

어디 가냐고 묻길래 서울가는 고속버스를 타려고 고흥을 가는 중인데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만 태워 달라고 하니까... 터미널까지 태워주겠단다

도로를 나와서 10분정도 달리니 버스터미널이 나오는데 터미널에 내려

주고는 잘 가라는 인사를 건내고 서둘러 가버린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흥 공용 버스터미널(16:40)

貴人을 만나서 편하게 터미널을 오는 바람에 아직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다

일단 버스표를 예매하고 터미널 건너편 식당에 가서 칼국수 곱배기 한그릇을

시켜놓고 안채 수둣가에 가서 씻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나니 이제사 사람처럼 보인다

시원한 바지락 칼국수 한그릇에 맥주 2병을 마신 다음에 험하다 험한 고흥지맥 4구간을 마친다

고흥발 서울행 17시 30분발 버스표

고흥읍내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