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5 월 5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
☞산행거리: 도상거리 21.6km / 7시간 20분 소요
☞참석인원: 좋은 사람들 산악회 40여명과 함께
☞산행코스: 평화전망대(제적봉)-별악봉-철산리 갈림길-저담산 갈림길-저담산 -성덕산덕고개-새말고개-봉천산
갈림길-안정골-점골 지석묘-산불감시탑-시루메산-헬기장 -백련사 갈림길-고려산-고비고개-1봉-2봉
3봉-186m봉-혈구산-삼각점봉-퇴모산- 강화농업기술센터
☞소 재 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하점면, 강화읍, 내가면, 불은면
늘 가고 싶었던 지맥길이고 서울에서 가깝게만 느껴진 강화지맥 걷기가 그리 쉽지는않았는지?
늘상 다른 산행 스케줄에 밀려가지 못한 그 길은 이제사 걷게된다.지난 4월에 현장 업무 과로로 인해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요즘 몸 상태가최악이다. 이틀동안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아도 별 소용이 없다.어제는
단골 한의원인 쌍계한의원 최원장님께서 봉침(蜂針)을 무료로 놔주셔어 조금은 낳은 느낌이나 그래도 통증이
완전히 가라 않지 않은 상태에서 지맥길에 오른다.
06시 40분에 탑승지인 사당역에 도착하니 이곳저곳에 등산객들 천지이다.
조선 말기에 들어와 수차례에 걸쳐 강화도가 서양세력 및 일본의 침략에 맞선
격전의 장소가 되었음은 강화도가 수도방위의 전초기지로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지녔음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있다 하겠다. 쇄국정책을 표방한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함대의 침략사건인 병인양요(1866년), 미국의
통상요구가 발단이 되었던 신미양요(1871년), 그리고 개항을 요구하기 위한 구실로
강화도 앞바다에 출현한 일본 선박과의 충돌사건인 운양호사건(1875년) 등이 그러하다.
운양호 사건에 대한 배상으로 일본과 체결한 병자수호조약(1876년)이 맺어진 곳도
바로 강화도에서였다. (따라서 이 수호조약을 일명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강화도 전체가 역사박물관을 연상케 할만큼 선사시대에서 부터
내려오는 지석묘와 고려무신정권의 삼별초의 난, 조선 병자호란 때에
인조의 피신과 굴욕,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인해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체결로 힘없는 국가로 인해서 수많은 고초를 경험한 강화도의 민초들...
강화지맥 지도
강화지맥(江華支脈)의 개요우리나라 많은 섬 중에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강화도가 네 번째 큰 섬이다.
이는 제주도(1,848.2km2), 거제도(378,795km2), 진도(319km2)에 이어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의 역사적으로 변해온 지명을 살펴보면, 상고시대에는 "갑비고차" 라 하였고...
서기475년 고구려(장수왕)때에는 "혈구군" 으로, 서기844년 신라(문성왕)때에는 "혈구진" 으로,
서기1363년 고려(공민왕)때에는 "강화부" 로, 서기 1895년 조선(고종)때에는 "강화군" 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최근 1995년에 "경기도 강화군" 에서 "인천광역시 강화군" 으로 바뀌었다.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반도의 역사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하겠다.
선사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하점면 장정리와 화도면 사기리, 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신석기 유물도 강화도내의 여러곳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거석(巨石) 유적인 지석묘(고인돌)가 하점면 부근리를 비롯한 도처에서
80기 이상 발견되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강화도는 원래 두곳의 섬, 즉 원래의 강화도와 마니산을 중심으로한 고가도(古加島)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고려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하나의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강화도를 북에서 남으로 잇는 강화지맥의 마루금을 긋기가 애매모호하다.
강화지맥은 대간이나 정맥등에서 갈라져 가지친 지맥(枝脈)이
아닌 단순히 강화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지맥(支脈)이다
강화지맥은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한 양사면 철산리 해안에서 시작하여 제적봉(115m), 별악봉(130m),
저담산(167.3m), 성덕산(215m), 봉천산(291.1m), 시루메산(250m), 고려산(436.3m), 혈구산(466m),
퇴모산(338.9m)을 거쳐서 덕정산(325m)에 이르러 여기서 남동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는 정족산(221m),
길상산(336m)을 거쳐서 강화도 최남단 길상면 장흥리 택리마을앞 강화만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34.1km의 산줄기이고, 덕정산에서 또 하나의 분맥 산줄기가 진강산(441.3m), 마니산(469m)을
거쳐서 분오리 마을앞 강화만에서 그 맥을 다한다.
원래의 강화도를 일주하는 정족산, 길상산 방향으로 택리마을까지 이어지는 34.1km의 강화지맥을 종주하기로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평화전망대(09:20)
버스가 평화전망대 주차장을 도착하였다가 다시 버스 정류장 아래로 내려온다.
전망대에서 시작하는 강화지맥길은 전망대가 점령하고 있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지맥꾼들에게도 입장료 2,500원을 징수한다고 하여 산행대장이
산꾼들에게서 미안해서인지 아래에서 옆구리로 치고 능선으로 오를 모양이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전망대 옆 농장 펜스를 치고 오르다고 해병대 출신의
성질 고약한(?) 농장 쥔장에게 쫒겨난 기사를 많이 보긴 했지만 무모하게 시도한다.
선두에 대여섯명이 농장 펜스 능선을 치고 오르다가 단박에 쫒겨나는 걸 보고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매표소로 가서 전망대 관람이 아닌 산행을 한다고 사정해보지만
매표소 직원에게 보기좋게 툇짜를 맞고 울며 겨자먹기로 2,500원을 지불한다.
평화전망대 버스 정류장
도로옆에서 세워진 제적도로 개통비
도로를 따라서 평화전망대로 올라간다.
巨金 2,500원의 입장료가 아까워서라도 구경을 좀해야겠다고 맘 먹었지만
강 건너 개성땅을 짙은 운무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을 정도인데
작금에 개성공단 폐쇄같은 악재와 같은 남,북관계의 현실과 같아 안타깝다.
어렴풋이 북한 땅이 보이긴 하지만 맑은날 개성 송악산이 빤히 보이는
곳이라는데 짙은 박무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평화전망대(09:30)
강화평화전망대는 2006년 말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타 지역에선 전망하기 힘든 이북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며,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게스트 룸이,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볼 수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 및 그 이후 생애 잊지 못할 어려움을겪고 있는 피해상황 등을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3층에는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
본 전망대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가 위치해 있으며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연백군으로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역사 문화의 고장 강화는 곳곳에 산재한 역사· 문화 유적 등과 일일 관광 테마 코스로연계하여 타 지역 안보 관광지와
차별화된 관광코스로 개발 다시오고 싶은 관광시설 개발은 물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 강화군 자료 -
제적봉(制赤峰:115m:09:25)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에 위치한 봉우리로 강화도
최북단에 민통선 안에 위치하여 있으며 1966년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JP가 참석하여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뜻에서 제적봉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강화지맥을 시작하는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한다.
제적봉의 유래
공정식 제 4대 해병대 사령관은 김포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하였으나
1966년 故 박정희 대통령께서 현 애기봉 방문시 애기의 전설을 듣고
제적봉 명칭대신 애기봉으로 명함에 따라 강화도의 현 고지를 제적봉으로 정하고
1966년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 참석하에 그가 친필로 쓴 제적봉 碑 건립과 명명식을 거행 했다.
제적봉은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연성대첩비
임진년(1592년)에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했다. 우리의 방비(防備)는
미약했으나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서
해전으로 왜군의 기세를 꺽었고 절도사 김시민(金時敏,1554년~1592년)은
진주성(晋州城)에서 분투(奮鬪)하여 충절을 다했으며,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은 의병(義兵)과 함께 연안성(延安城)을 지켜냈다.
또한 원수 권율(元帥 權慄)은 행주산선(幸州山城)에서 승리하였고 명(明)의 제독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평양성(平壤城)의 왜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개성(開城)을
탈환 함으로써 3경(평양. 개성. 한양)과 8도를 수복했다.
살펴보건대 고(故)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이정암(知中樞府使 李廷?,1541~1600)은
지난 날 주상(主上)께서 몽진할 때 호종(扈從)했는데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던 공의 아우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개성(開城)을 지키겠다고
주청(奏請)하였고, 임진강 방어전에서 실패하자 공은 그해 8월 22일 연안부(延安府)로 넘어갔다.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의병 1백여명을 모아 반겨 맞으며 말하기를 공께서
부사(府使)로 있을 때 은혜를 베풀었던 이 곳을 지켜달라고 하여, 공이 싸워 죽을 곳을 얻었노라 하고
의병 5백여명을 모아 각자에게 임무를 분담시키고 가마솥을 걸어 노약자들도 구휼(救恤)했다.
28일 적장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재령(載寧). 신천(信川). 해주(海州)를 함락시킨데 이어
3천여의 병력을 몰고 연안성으로 쳐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성밖으로 도주하려했다.
공은 사수(死守)를 결심하고 겁을 먹은 사람은 출성(出城)해도 막지
않겠다하니 다들 감격하여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다.
저녁 무렵 연안성의 방어태세를 살피던 적의 신봉을 중문장 장응기(中門將 張應祺)가 화살로 사살하자
왜군은 성 서쪽에서 대포와 불화살을 쏘아 성내의 초가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했지만 때마침
풍향이 바뀌어 불길이 성밖으로 건너뛰자 적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적은 막사를 헐어 해자를 메우며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자, 공은 섶 위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성이 함락되면
섶에다 불을 질러 아비가 자진 할 수 있게 하라 명하자 모두가 감
읍(感泣)하며 죽을 각오로 나흘간 맞서 싸우니 적의 과반수가 죽거나 다쳤다.
적은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 불사르고 다음날 아침 포위를 풀고 패퇴하였고,
아군은 적이 남긴 시체 18구를 구덩이에 묻고 우마 90여필과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했다.
이 대첩으로 연안(延安)이하 13주(州)가 회복되었으며, 아산(牙山). 강화(江華).
용강(龍岡)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린 것은 공의 힘이었다.
공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21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했고, 문장은 세상을 울렸으며
국란에 무훈(武勳)을 떨쳤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장부(丈夫)였다.
이 비석은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썼으며,
상호군 김상용(上護軍 金尙容)이 전자(篆字)하여 선조 41년(1608년) 5월에 세웠다.
황해도 연백군 용봉면 모정리(黃海道 延白郡 龍鳳面 橫井里)에 있던 이 비는
실향민이 망향단(양사면 인화리)에
의사 편강열 추모비와 같이 건립했던 것으로
2009년 8월 19일 이곳 평화전망대로 이전하게 되었다.
연성대첩비는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강화 제적봉평화전망대 앞 광장에 있다.
해병대상륙돌격 장갑차
망배단
망배단에서 강건너 개성땅을 바라보지만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능선에서 바라본 소래돈대의 모습
돈대는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樓臺)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2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 설치의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타난다. 남한지 南漢志〉에 인조(1623~49 재위) 때 수축된
남한산성에 2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위(金錫胃)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특히 강화는 조선 인조때 한양 도성 방어를 중요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과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2차례청태종의 침입에 의해 강화도는
중요한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섬 전체를 전초기지화 하기위해 5진(鎭),7보(堡) 53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巨金 2,500원을 주고 평화전망대를 15분정도를 둘러본 다음에 헬기장을 지나서
본격적인 강화지맥길로 접어드는데 자꾸만 북녁땅이 눈에 아른거린다.
평화전망대(제적봉) 헬기장과 군부대 삼각점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09:30)
오랫만에 만난 동료 산꾼들은 무슨 조급증인지 능선에 오르자마자
길도 없는 곳에서 전력 질주를 하면서 총알같이 튀어 나가는데 정말 이해가 안된다.
조금을 올라서니 군부대 철조망이 나오고 거기에서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서니 군부대 후문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도로가 나온다.
2분정도를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북성2리 이정표(09:37)
이곳에서 콘크리트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트럭이 다닐만큼 넓은 도로가 나온다.
룰루랄라~~~♪.♪.♪.♬ 편한 길
등로에 피어있는 보라색 제비꽃과 붓꽃
북성리와 철산리 갈림길(09:45)
별악봉 갈림길로 올라선다
별악봉(別岳峰:145m:09:50)
강화군 양사면에 있는 봉우리로 동쪽에서 올라오면 악산인줄 모른다.
서쪽에서 올라오면 암봉을 올라와서 별악산이란걸 알수있다.
동쪽과 서쪽에 전망바위가 있으며 조망권이 대단히 좋다.
별악산 정상은 동서 방향 평화전망대, 가운데는 둥그스런 모양새인데
서쪽 전망바위에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옛날 이곳에 암지네와 숫지네가 있었는데
인간이 숫지네를 죽이려하자 암지네가 앙갚읆을 하려고 돌을모아 높게
쌓아 하늘에 거의 다다렸을때 벼락이 쳐서 그 돌이 무너져 산이 생겼다하여
별악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정상에는 별 특징이 없다.
엉터리 이정표
이곳을 별악산 또는 별악봉이라고 부르는데 강화군에 설치한 이정표에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2.9km떨어진 곳이라고 표기가 되어있어 산꾼들이 골탕 먹기 일쑤이다.
범여도 아무 생각없이 이정표를 따라서 10분 정도를 가다가 되돌아오니 약이 오른다.
공공기관에서 설치한 엉터리 이정표... 강화군에서는 빨리 철거하고 다시 설치하시요
당신네들은 민초들의 피땀어린 녹을 먹으면서 엉터리 이정표... 업체에 발주했으면
현장에서 확인해야지. 탁상머리 행정은 당장 치우시요.
만일 당신네들이 민간회사 소속이면 당장 해고감이요... 제발 정신 좀 차리시요
10여분을 알바하고 되돌아와서 우측 암릉을 지나가는데 양사면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별악봉 암릉에서 바라본 양사면(兩寺面)
(양사(兩寺)란 두 개의 절이란 뜻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때 서사면과 북사면을 합쳐서 양사면이라 칭하였다.
암릉 내리막길에는 예전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로프가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내리막길이 아주 편하다.
철계단을 내려서니 우측 사면으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지맥길이 이어지고...
등로 좌측에는 묘지가 있는데 편한길이 이어진다.
이곳부터 성덕산 아래까지 룰루랄라 하면서 지맥길이 이어진다
y자 길이 나오는데 지맥길을 고집하는 산꾼은 좌측 능선으로
임도파는 우측 임도로 걷지만 1분만에 다시 만난다.
능선으로 내려서니 기독교인이였던 淸州韓公의 묘지가 나오고...
덕하2리와 북성2리 갈림길(10:10)
조금을 올라서니 좌측으로 공동묘지가 있고 컨테이너 하우스가
나오는데 이곳이 저담산 갈림길이다
저담산 갈림길 이정표(10:15)
이곳에서 우측으로 200m 가면 저담산이 나오는데 강화군에서
설치한 이정표에는 2km 지점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는데 이제
이 엉터리 이정표가 화가나는게 넘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든다.
200m와 2km를 구분할 줄 모르는 이런자들에게 민초들의 피땀어린
세금으로 월급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동료산꾼들은 2km라는 이정표를 확인하고는 저담산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것이
200m라고 하니 가려고 한다. 베낭을 공동묘지에 벗어놓고 카메라만 들고 저담산으로 향한다.
저담산(猪膽山:167.3m:10:20)
강화군 양사면에 있는 산으로 강화지맥에서 200m정도 비켜나 있다.
정상에 오르니 양사면 북성리와 북성 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가야할 성덕산과 지맥길에서 비켜나 있는 별립산, 가야할 봉천산이 보인다.
이곳에도 최전방인 관계로 군부대의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랜덤지도에는 강화에서 저담산이라 부르는 이곳을 별악봉(167.3m)으로 표기되어 있다.
저담산 정상에서 바라본 양사면 북성리의 모습
저담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군부대 삼각점
저담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덕산과 별립산의 모습
저담산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되돌아온 저담산 갈림길(10:30)
등로에서 바라본 저담산의 모습
금정골 갈림길(10:32)
그리 힘들지 않은 성덕산의 오르막길을 향한다.
성덕산(聖德山:215m:10:42)
강화군 양사면에 있는 산으로 강화도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에는 체육시설과 원형식탁이 있으며 삼각점(331-FOB,H-8864)이 있다.
평행봉 아래에는 별악봉, 금정굴, 저담산 팻말이 있는데 모두가 별악봉
방향인 동쪽을 가리키고 있다.
이정표를 보니 이곳은 산은 전체를 아우르는 지명이고 봉우리는 특정한 봉을
가리키는 지명이므로 성덕산 동쪽 전체가 저담산이고, 별악봉과 제적봉은
각각 저담산의 한봉우리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덕산 정상에 자리잡은 군부대 삼각점
성덕산을 지나서 덕고개로 향한다
장군바위(?)
성덕산에서 4분정도를 걸어서 오니 멋진 암릉이 나오는데 이게 장군바위 같은데
그 옆에 있는 이정목에는 장군바위 600m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데 믿음이 안간다
이 바위가 장군바위 같은데 600m 후방에 있다니
그 어디에서도 장군바위를 본 적이 없는데...
저 멀리 어렴풋이 교동도와 석모도가 아련히 보인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멋진 海松 한그루을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덕하리 갈림길(10:48)
덕고개 삼거리 가는길 이정표를 만나 계속간다.
이곳 강화지맥길에는 진달래 군락지를 많이 만나는데 진달래들이 지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花無十日紅이다... 열흘가는 붉은 꽃이 없듯이 우리 인간사도 늘 좋은
일만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마는... 요즘 세상사는게 참으로 고달프다.
그러고보면 늘 자연의 이치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조금을 더 내려가는 스텐레스로 만든 평상과 식탁 그리고 의자를 만나고...
조금을 더 진행하니 군부대 시설물인데 통신기기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스텐레스 평상을 만나고 우측에 묘지가 나오는데 조금 더
진행하니 군부대 철조망이 지맥길을 막고있어 좌측으로 꺽어진다.
좌측 능선으로 접어드니 군 교통호가 설치되어 있는데 군 교통호를
이리저리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벙커가 나오고 차량소리가 들린다.
잠시후에 덕고개 삼거리가 나타난다.
덕고개 삼거리(40m:11:00)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와 덕하리를 잇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로
이곳은 민통선에 위치하고 있는 고개로 해병대 부대가 있다.
덕고개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덕산 아래에 있는 고개라 덕고개라 부른단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10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그러면서 막걸리 한잔 마시려고 베낭을 내리는데 평소에 무장공비 공작
안내조만큼 빠른 주력을 자랑하는 수락문수암님을 비롯한 4명의 산꾼들이
뒤에서 온다. 알고보니 별악봉에서 이정표만 보고 2.9km나 같다 왔단다.
속으로 얼마나 웃음이 나오는지... 같이 막걸리 한잔을 나눠 마시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베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선다.
베낭을 메고 일어서는 사이에 알바를 한 동료산꾼들은 보상이라도
받으려는듯 벌써 능선 저 위로 달려가고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양사면 덕하리의 모습
고도를 조금 높혀가니 진달래 능선에 무명묘지가 나타난다.
진달래 군락지 사이로 뚜렸한 능선길을 걸어간다.
별립산 갈림길(11:25)
능선을 타고 오르다 길이없는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이곳이 애매하다.
직진은 별립산 가는데 길인데 뚜렸한 임도가 있지만 좌측 지맥길은
길이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특히 섬 지역의 지맥길은 능선의 맥은
뚜렸이 보이지만 등로에 접어들면 아예 길이없어 애를 먹는다.
거기다가 강화지맥은 다니는 산꾼들이 거의 없는지 선답자의 시그널도 없다.
등로 아래로 내려서니 소나무 숲만 무성하고 길이없어 개척자의 심정으로 간다.
엄나무 군락지
급경사로 내려서는데 길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귀한 엄나무가 많다.
그런데 앞서가던 동료산꾼들은 이 귀한 엄나물을 황금을 돌보기 하듯이
나물을 채취하지 않고 그냥 내빼기만 한다. 아무 그래도 그렇지 이 귀한것을...
가던 길을 멈추고 비닐봉지를 꺼내서 꽤많은 엄나물을 채취하는 바람에 졸지에 꼴찌가 된다.
부지런히 길을 만들면서 내려서니 새말고개가 나온다.
새말고개(55m:11:40)
강화군 하점면과 양사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개로 301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새말고개라 부르는 이유는 하점면 고개 아래에 있는 새말부락이 있어 마을
이름을 따와서 새말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능선을 가로 질러서 간벌을 하고 새로운 묘목을 심어 놓은 능선으로 오른다.
봉천산 오르는 길은 등로가 비교적 뚜렸하다
묘지를 뒤의 봉분위를 올라 숲속으로 접어든다.
등로에서 바라본 하점면 산하와 별립산(別立山)의 모습
강화 북단에서 제일 높은 바위산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가파르고 초절하며
옛날에는 봉천산, 별악봉과 함께 바닷물로 둘러 싸여 있는 강화도와는 별개의 섬처럼 이어져 있었다.
4면이 가파르고 해수가 둘리어 있는 천험의 요새로서 <삼국사기>의 고구려ㆍ백제 본기에는 ‘관미성’(關彌城)으로,
광개토태왕의 비문에는 ‘각미성’(閣彌城)으로 기록되어 있는 백제 성의 위치를 관미성으로 비정하였다.
“강화군 홈페이지에서”
또다른 묘지를 지나고...
드디어 봉천산 정상으로 올라서는데 약간의 박무가 있긴 하여도
전망은 그야말로 굿이다. 지나온 능선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봉천산 정산에는 나옹선사의 禪詩가 눈길을 끈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 ~ 1376)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牙)씨인데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朝鮮太祖)의 왕사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스승 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 절터가 있는데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로 중창했고,
그의 출생지 부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운서산(雲捿山) (해발520m)기슭에 장육사(莊陸寺)를
창건 하고 오랫동안 머물며 참선했다고 전하며,
나옹선사가 입적한 뒤에는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한 수도 사찰로 유명했다 한다.
회암사 터의 뒤쪽에는 나옹, 지공, 무학, 세분의 부도와 비석이 현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조선왕조 유학사상의 지주였던 목은 이색이 찬하여 지금도 비문이 남아있다.
장륙사(莊陸寺)에는 고려 공민왕 때 건물과 건물 내벽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그가 입적한 남한강변 여주 신륵사에도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문이 남아 있다.
그의 가송집과 비문을 한글로 해석한 서적으로 나옹록이 있고 연구서도 있다.
이 시의 작자에 대해서는 나옹선사 이외에 중국 당나라의 寒山스님이라는 설과 작자 미상이라는 설이 있다.
봉천산(烽天山:291.1m:12:05)
강화군의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봉두산, 하음산 이라고도 부른다.
강화지역 향토사인 ‘강도지(江都地)’에 “봉두산은 곧 하음산인데 봉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하음산이라 표기되어 있고 정상부에 봉수, 산남쪽에 하음현 치소가 잇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하음백으로 봉해졌던 하음 봉씨 봉천우라는 사람이 봉천대를 쌓았다고 전하는 산이다.
봉천우는 봉천대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와준 하늘에 제사를지냈다고 한다
‘강화부지’에 “봉두산은 강화부 북쪽 이십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하음산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방대와 석축이 있으며 옛날 하음현이 그 아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산의 정상부에는 봉수가 설치되었으며, 봉수산 주변에는 옛 하음현 시대의 하음산성
조선조 하음산 봉수와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5층석탑, 석조여래입상등 많은 문화재가 분포해 있다.
봉천산은 하음(河陰) 봉(奉)씨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고려 예종 때 이곳에 사는 할머니가 연못에 물을 길러 갔다가 돌 상자가 떠 있기에 건져서
열어보니 아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를 임금님께 바치자, 임금님은 우(禑)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이 분이 하음 봉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봉천산 정상에는 삼각점이 두 개가 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려 때 제천의식을 했던 제단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사용했다는 봉천대가 있다.
사각형으로 정성들여 쌓은 모습이 다른 곳에서 보던 봉수대와는 크게 다른 것 같다.
봉천산은 해발 291.1m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멋진 360도 조망을 갖고 있다.
한네산 멤버인 장기리님을 만나서 인증샷을 남기고...
봉천산 정상 3등 삼각점(△교동306 1989 복구)
봉천산 정상에 있는 봉천정에서 동료산꾼들과 점심식사를 한다.
오늘 점심이래야 김밥 한줄에다가 커피 한잔이 전부이다
봉천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군 하점면(河岾面)의 모습
고려때 있던 하음현(河陰峴)의 이름을 따서 조선시대 이래로 하음면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하음면에 간점면(艮岾面)과 외가면(外家面)을 합하고 하음에서
하(河)자와 간점에서 점(岾)자를 따서 하점면이라 하였다.
봉천대(奉天臺)
인천 광역시 기념물 제 18호(하점면 신봉리 산 63)
봉천산 정상(291m)에 돌로 쌓아 올린 방형의 제단이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때 축리소(祝釐소)로 사용 하였다고 한것으로 보아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임을 알수 있는곳이다.
臺의 크기로 높이는 5.5m 밑지름은 7.2m의 정방형 사다리꼴 모양이다.
하점면 소재지와 가야할 시루메산과 고려산도 보이고...
봉천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의 山河
역사를 살펴보면 상고시대에는 ‘갑비고차’라 하였고 서기475년 고구려 장수왕시
혈구군으로, 서기844년 신라 문성왕시 혈구진, 서기1363년 고려 공민왕시 강화부로,
서기1895년 조선 고종왕시 강화군으로, 1995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오늘날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사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반도의 역사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 강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마니산 참성단과 그의 세 아들로 하여금 쌓게 하였다는
정족산 삼랑성(일명 정족산성)에 관한 전설, 그리고 하음봉씨 시조의 천강 설화와 관련한
봉천대 및 봉가지·봉은사·석조여래입상(일명 하음노구석상) 등의 유적은 강화도가 성지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강화... 섬 전제가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숱한 역사의 고난속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수차례 몽진을 한 피난처였다.
고려 [강도시대 江都時代 : 1232 ~1270년] 에는 몽골군과의 항쟁을 위해 수도를 옮기였고
그래서 고려시대의 유물, 고려궁터 및 성곽 등이 있어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에 따른 최적의
피난처로 강화도가 가능하였음을 본다. 특히 세계적인 보물로 인정(1998년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일명 제조대장경 : 1236~1251년간에 걸쳐 완성)의
제작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대몽항쟁시의 강도시대에서였다.
봉천산(奉天山, 291.1m) 은 민통선 남쪽에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강화에서 가장 북쪽에
솟아있는 산은 정상에 서니 저멀리 예성강 하구, 조강(祖江)건너 북한땅 개풍군이 눈에 들어오며
날씨가 좋은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볼 수 있으며 주변 바다와 멀리 북녘땅을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실향민들은 명절이 되면 가족과 함께 북한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린단다
봉천산은 그 산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밝히기도 했던 곳으로
고려 때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제단 봉천단(奉天壇)이 있다
봉천산은 낮은 산이지만 `망향의 산'이라는 각별한 이름으로
6.25 전란후 이 산을 오르내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겨진 산이며
서쪽에 별립산과 남쪽에 고려산(진달래축제) 북쪽 바로앞에 성덕산,저담산,별악봉이 보인다
다시 길을 나서다.
점심을 겸한 20분간의 긴 시간을 지체한 끝에 다시 고려산으로 향한다.
봉천정에서 박무땜에 보이지 않은 개성땅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면서
진달래 군락을 이루고 있는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등로 돌아래에 수줍게 피어있는 솜다리
급경사를 내려서자마자 y자의 길이 나오는데 좌측 능선으로 간다
부드러운 안부 능선을 걷는다.
무명묘지를 지나고 5분 정도를 걷다가 y자의 희미한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섬 지역의 지맥길... 그 중에서도 내리막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아님 바람같은 자연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내리막길은 어김없이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요즘 백두대간 남진을 같이하는 김포 패밀리 오야지인
영만님의 시그널을 만나는데 무지하게 반가웠다... 이번주에도 김포 막걸리 한잔 주실라나... ㅋㅋㅋ
조금을 더 내려가니 뚜렸한 등로가 나타난다.
안부 능선 갈림길에서 7분 정도를 내려와서 우측의 뚜렸한 임도가 있고
다시 좌측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선답자들의 시그널 몇개가 보인다.
아무 의심도 없이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이 길 역시 길은 거의 보이질 않고 산꾼들의 발자국이 보이질 않는다.
조금을 더 내려가니 우측에 묘지의 가계도(家係圖)가 그려져 있는 표시석을 만나고...
오랫만에 선답자의 시그널을 만나는데 무지 반가웠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마을의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
봉은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린다.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시대의 국가사찰로 고종 19년 (1232) 수도를 개성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졌다.
발견당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6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상륜부가 유실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높이는 3.5m이다.
만든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길을 따라 계속 내려간다.
하점 천주교 성당을 지나고...
장정1리 마을회관을 지나니...
48번 국도(12:50)
마을회관을 빠져나오니 48번 국도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직진하니
버스 정류장과 싱싱마트 수퍼가 보인다.
싱싱마트에서 꺽어져...
조그만 도로로 들어선다.
싱싱마트와 늘푸른 공인중개사 골목을 따라서 계속 걸어가다가...
집에와서 확인한 길
선답자의 산행기에도 이 구간이 가장 헷갈리는 곳이라 거의 80%가
알바하는 곳이라 자료 내용이 제각각이라 상당히 힘든 구간이었다.
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점골 지석묘가 어디냐고 물으니
저 쪽으로 가란다. 그쪽을 보니 봉천산에서 이어지는 능선도 뚜렸하고
하여 아무런 지체도 없이 도로 좌측으로 빠져서 밭을 가로 지른다.
그 바람에 하지 말아야 할 알바라는 명예롭지(?) 못한 길로 접어들었다.
도로로 접어드니 이곳은 고려산 진달래 축제에 온 차들로 몸살을 앓고있다.
도로를 따라서 고인돌 주차장으로 계속 향한다.
강화고인돌 버스 정류장 사거리(13:15)
이곳에 온 다음에 알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하점면 부근리 311에 있는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이고
강화지맥을 지나가는 점골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2호)로
부근리743-6외 1필지에 있는 곳으로 30분이라는 알토란 같은 시간을 허비한다.
기왕 온 김에 꿩대신 닭이라고 강화 역사 박물관 앞에있는 지석묘로 향한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支石墓)
• 지정 번호; 사적 137호
•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 지정일; 1964년 7월 11일
• 시대; 청동기시대
• 분류; 지석묘
• 내용;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돌을 조그만 지석(支石; 고임돌)으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강화읍 서쪽에 있는
고려산(高麗山)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시루메산이 평야와 만나는 지점에 수십 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점면 삼거리・부근리, 양사면 교산리 일대에는 고인돌이
40여 기쯤 있는 것으로 최근에 조사되었다. 그 가운데 흔히 부근리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가장 규모가 큰 무덤 1기를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현재는 남아 있는 2개의
지석이 개석(蓋石; 덮개돌)을 받들고 있는 형태로 마치 통로와 같은 모양이다.
즉 입구 역할을 하는 양끝의 마감돌이 없어진 것을 뜻한다. 지석의 크기는 서쪽의 길이가 4.5m・
두께는 0.6m이며, 높이는 1.4m이고, 동쪽 지석은 길이가 4.64m・두께 0.8m・높이 1.4m이다.
개석은 장축의 길이 6.5m・너비 5.2m・두께는 1.2m이며, 전체 지석묘의 높이는 2.6m이다.
지석묘를 이루고 있는 개석의 석질은 강화도에 흔한 화강편마암이다.
이 지석묘의 주변에 이러한 규모의 석재가 없는 것으로 볼 때 돌산이나 해안 등지에서
바위를 운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예로 마니산(摩尼山)에는 자연 판상석(板狀石)을
떼어 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형 판석의 채취와 운반 기술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으로 남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수량면에서 세계적으로 으뜸이고
고인돌은 이른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로 분류되는 우리나라 대표적 고인돌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지를 세계유산일람표에 등록(2000,12)한다..
기왕 온 김에 지석묘 앞에서 폼한번 잡아보고...
강화지석묘 앞에는 강화역사 박물관이 자리를 잡고있다.
강화도 섬 전체가 역사박물관인데 또 이렇게 지어놓았다.
역사박물관에서 조금 올라오니 연개소문 유적비가 있다.
지역 향토사인 강도지(江都地)에 따르면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은 강화군 하점면 유지인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산 치마대의 오정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고려산에 그의 집터가 있고 5井이 있어
그 5정에서 깨끗한 물이 용솟음쳐 흘렀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언제나 그 물가에서 말에 물 먹이고, 무술을
연마하였는데 고려의 몽고침탈이후 몽고의 사신이 오정을 찾아보고 그곳의 지맥을 누르기 위하여, 이 다섯의
우물에쇠 말둑을 만들어 깊이 박아 지맥을 끊었다 라고 하며, 그 후부터는 넘쳐흐르던 물이 말라버렸으나 아직도
그 연못의 자취는 남아 전하고 있다. 1993년에 출생지인 고려산 밑 하음에 유허비를 세웠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랴!
봉천산에서 점심으로 참치김밥 한줄 먹었더니 배가 고파온다.
기왕 동료 산꾼들 놓치고 늦은걸...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고려산 진달래 축제 음식 파는데서 인삼 막걸리에다 새우튀김으로
걸쭉하게 한잔하고 나니 이제서야 살것만 같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데 동료 산꾼들은 죽기살기 들고 뛰니... 불쌍한 衆生들
고려산 가는 길(13:35)
다시 지맥 마루금으로 복귀하여 시루메산으로 가야하는데
30분이상 허비하는 바람에 편한길로 걸어서 간다.
고려산 진달래 축제기간이라서 그런지 도로에는 등산객이 미어 터진다.
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길에는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강화지맥 갈림길(13:40)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좌측에 있는 호담 갤러리& 까페가 있는 곳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비포장도로가 넓은 공터가 있는 곳에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길은 아예없고 홀대모의 대방님의 시그널만 산꾼을 반긴다.
능선을 조금 더 올라가니 군부대 교통호가 나오는데...
교통호를 조금 더 치고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를 따라서 능선 안부로 올라서니 우측에 청송심씨 숭모당이 나온다.
숭모당을 지나니...
진달래 군락과 잡목지대가 나오고...
무명묘지를 만나고 건너편에는 공동묘지가 보이고
가야할 시루메산과 고려산이 보인다.
조금을 더 지나니 산불이 난 흔적이 보이고 나무들이 이리저리 넘어져
걷기가 보통 불편한 게 아닌데 길은 보이질 않고 동료산꾼들은 구경을 할
수가 없는데 다리를 약간 겹질려 심한 통증을 느낀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묘지 옆에서 5분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통증을
잊기위해 아스피린 2알을 먹는다...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일까?
아직 3년은 더 산을 타야만 십승지까지 마무리하는데 괜스레 불안하다.
무명묘지를 지나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이곳은 아예 길이없고
산꾼들이 다닌 흔적조차 보이질 않는데 다리는 아파오고 미치겠다.
10여분을 잡목을 헤치고 치고 오르니 군부대 교통호가 나타난다.
군부대 교통호를 따라서 조금을 올라가니 시루메산 정상이 나온다.
시루메산(252m:14:10)
강화군 하점면과 송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모양이 떡시루 같이 생겼다하여 시루메산, 증산(甑山)이라 한다.
강화군 지명유래 자료에는 "고려산 한줄기는 동북으로 떨어져 불쑥
솟은 증산 (부근리 서강 시루미산)이 있고" 라고 되어 있다.
고려산 정상 북쪽 능선상에 있는 높이 252m의 조그만 봉우리로 군시설물과
그 옆 공터에 화생방 타종및 깃대가 설치되어 있다.
시루메산은 ‘ 시루메 ’ 가 올바른 표기로 한자어인 증산(甑山)을 우리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같은 뜻의 글자인 메, 산이 겹치어 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원을 통일하고 천자의 나라를 칭하던 당나라를 제압한 구국의
영웅 연개소문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시루메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의 山河
강화도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3강의 어귀에 있는 섬으로 천연의 요새지다,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이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침강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유적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바로 고인돌이다, 한국의
고창 장흥 강화의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강화도는 섬 전체가 천연 요새지로 고려 때는 몽고가 침략하자 강화로 천도하여 39년간을
수도가 되고, 조선 말기에는 개항을 요구하며 침략해 온 프랑스와 미국해군과 포격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1627년에는 청이 쳐들어와 인조가 100여일이나 머문 곳이기도 하다.
강화의 산하를 내려다 보니 문득 강화도령이라 불리웠던 조선 25대왕 철종이 생각난다.
그 이외에도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강화학파의 비조(鼻祖)로 불린 정재두 선생과
가야할 고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은 군부대한테 완벽하게 점령당하고 그아래 초라하게 붙은 표지판이 안쓰럽기만 하다.
시루메산을 내려와서 넓은 헬기장으로 간다.
시루메산 헬기장(14:15)
헬기장을 지나서 고려산으로 가는 포장도로로 올라간다.
도로 옆에는 ‘땀의 결실’ 이라는 표시석이 있고...
계속 도로로 올라간다.
군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지 문을 굳게 잠겨있다
고려산의 능선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의 진달래 -
백련사 갈림길(14:30)
오련지
고려산에는 크고 작은 다섯개의 연못이 있다.
이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4세기 이전에 축조되어 정상의 큰연못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되었고 작은 연못은 연개소문이 군사훈련시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다.이후 장수왕 4년 인도의 천축조사가 이곳고려산에 가람터를 찾던 중 정상의 연못에 피어있던 5가지 색상의 연꽃을 따서 불심으로 날려 꽃이 떨어진곳의 색깔에 따라 백색연꽃이 떨어진 곳은 백련사흑색연꽃은 흑련사 적색은 적석사 황색은 황련사,청색이 떨어진곳은 청색은 조사가 원하는곳에 떨어지지 않아 원통하다 하여 원통암을 짓고,청색꽃이 떨어진 곳에 청련사를 지어 현재 3개의 사찰과 1개의 암자가 수천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으며,이연못을 오련지로(五蓮池) 이 산을 오련산으로 다섯개의 사찰을 묶어 오련사라고 불리고 있으며,오련산은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여
고려산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또한 고려산에는 3개의 연못과 1개의 샘이 남아 있어 현존하는 오련사와 맥이같아 신비감을 더한다.
이 연못은 정상 군시설로 통제되어 있는 연못을 실제 크기로 재현 했다.
고려산 오련지 안내판
고려산 오련지 안내판 뒤로 올라서니 데크목 계단이 나오는데
이곳은 진달래와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데크목 계단을 지나니 고려산 지나가는 도로를 또다시 만나고...
지나온 능선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도로옆 넓은 공터에는 막걸리 파는 장소와 진달래 축제 행사가 진행되고...
지금 고려산은 진달래 천국이다.
갈길 바쁜 산꾼 범여를 일반 등산객이 길을 막는다.
자꾸만 시간은 지체되고 다리의 통증이 더해지면서 마음만 급해진다
고려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내가면(內家面)의 모습
조선시대 이래로 내가면이라 하였는데 내가면이란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 있던 외가면(外家面)의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상대적 개념으로 붙여진 듯 하다
고려산(高麗山:436m:14:40)
강화군 강화읍,내가면,송해면,하점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출입금지구역이다.
출입금지구역 입구의 헬기장이 고려산 정상을 대신하고 있으며, 헬기장 아래에
삼각점(G.O.2 1999매설)이 있다.
강화 6대산의 하나로 마니산(472.1m),혈구산(466m),진강산(443)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1696년 편찬된 강도지에 홍릉과 국정,적석,백련등의 세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화부 서쪽 15리에 있으며 강화부의 진산이다라고 되어 있다.
고려산은 고려의 정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신성한 연못의 물고기가 중국 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연못의 연꽃이 떨어진 다섯 곳에 오련사를 지었으며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이 태어난 전설이 있는 곳으로 곳곳에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등 사찰과
고인돌군락지, 고구려 토성, 오련지, 홍릉 등 문화재가 분포하여 아침에
역사탐방 위주의 산행이 좋다. 서쪽 적석사를 가다보면 솔밭을 지나고 갈대밭을
지나 낙조봉을 만날 수 있는데 저녁에 서해 수평선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해지는 광경은 [강화8경]중 하나이다.
고려산(436.3m)의 옛 명칭은 오련산dl다.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적, 백, 청, 황, 흑색의 다섯색깔의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려산은 그 인근에 130여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다.
고려산이란 지명은 1232년 몽골의 칩임을 피해
고려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했던 시기에 붙은 지명이다.
고려 왕조는 궁의 주산을 고려산이라 부르며 개경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뭍에서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도륙당하거나 말거나
이곳에서 무신정권의 비호는 받았던 고려 왕조는
불과 38년 만에 강화 시대를 접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고려산 주변에는 그 38년 시기의 고려 유적들이 잔존한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무신들은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진도~제주도를 거쳐 몽고에 맞서다가 토벌당한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이곳 고려산 정상에 오니 정상 아래 헬기장에는
단체 등산객들이 먹고 마시는데 열중인데 어느 산악회인지는 모르나
막걸리 한잔을 권하는데 얼른 받아 마시고 안주까지 얻어먹는데 꿀맛이다
가야할 혈구산과 퇴모산이 보이는데 아픈 무릎 때문에 멀게만 느껴진다.
헬기장에서 좌측 공터로 가니...
나무로 막아놨는데 이곳을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군부대에 시설물인 함석집을 지나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에서 바라본 국화저수지와 강화읍의 모습
급경사 내리막길에는 먼지가 어찌나는지 목이 아파 미치겠다.
범여가 뭣이 아쉬어 이 짓거릴 하는지 내가봐도 미쳐도 너무 미쳤다.
오상리 고인돌과 국화리 갈림길(14:58)
산불예방 감시탑(15:02)
사거리 안부에서 올라선 다음 조금을 더 지나니 산불예방 감시탑이 나오고
이곳부터 고비고개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라 다리 통증은 더 심해진다.
산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도로는 고비고개까지 계속되고...
고비고개(15:08)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서 강화읍 국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8번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이곳에서 고려산과 혈구산 가는 등산객이 많다.
‘고비’는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있었던 곳으로,‘고읍古邑’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고읍’은‘고비’고부’로도 불르며 지도상에는 나래현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시대 강화로 수도를 옮기고 39년 동안 몽골과 맞서 싸우다 개경으로
돌아갈 때 강화의 궁궐과 성곽이 몽골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무렵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내가면 고천리로 옮겨와‘ 심주(沁州)’라고도
불렸는데 이후 심도(沁都)’는 강화의 별칭이 되었다.
관아터, 향교터, 형옥터와 장터라 전해오는 곳이 있으며 조선 세종때
행정관서가 현재의 읍내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의 강화의 행정 중심지였다고 한다.
“(강화 역사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옴)
고비고개까지 오면서 무릎 통증이 심해서 탈출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心的 갈등이 상당히 심했다. 몇번이나 여기서 포기할까 생각하다가
다시 베낭을 둘러메고 미련한 곰탱이처럼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간벌한 능선으로 올라서서 혈구산으로 향한다.
조금전 지나온 능선의 괘적
혈구산 1봉(15:20)
가야할 2,3봉이 보이고 길은 좋다.
2봉에서 바라본 내가면의 모습(15:27)
노란 제비꽃이 격려를 보내고...
3봉(15:43)
봉우리 정상에는 고인돌 느낌이 나는 돌이있고 의자가 하나 있는데
바람은 시원하게 불길에 베낭을 내려놓고 캔맥주 하나를 마신다.
경치는 너무 좋다. 저 멀리 마니산이 운무에 가려 신비스럽게만 보인다.
3봉에서 바라본 마니산의 모습
키위에다가 캔맥주로 마지막 베낭을 턴다.
시원한 바람에 맥주맛 정말 쥑인다.
혈구산 능선의 진달래도 고려산 못지않다.
더 좋은것은 고려산처럼 사람이 많지않아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퇴모산도 보이고...1봉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혈구산으로 오르는데 사방이 탁트여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1봉 아래의 암릉
당겨본 마니산의 모습
혈구산(穴口山: 466m:15:58)
강화군 강화읍,선원면,불은면,양도면, 내가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용혈의 근원이자 고려 정기를 품은 산으로 여신의 성격을 띠었으며,
예로부터 용이 나고 국가의 재난을 알리는 곳, 대운산(戴雲山)이
하늘에 닿아 있다는 의미를 지닌 산으로 마니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라 전해진다.
혈구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정상에 올라 주위를 보면 가슴이 벅차고 힘이
저절로 솟구치는 살아숨쉬는 산으로 정기가 산 정상으로 항상 넘쳐 흐르고
있다. 또한, 강화 중앙부에 위치하여 강화 전경을 고루 볼 수 있는 산이다.
혈구산은 그 이름에서 보듯 정상에 올라 주위를 내려다 보면 가슴 벅차고 힘이 저절로
솟구치는 살아 숨쉬는 산으로 정기가 산 정상에서 항상 넘쳐 흐르고 있다고 한다.
산 이름은 강화군의 옛 지명인 혈구군(穴口郡)에서 유래되었거나 문헌상에
혈구진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성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혈구산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손에 잡힐듯 고려산이 마주
보이고 서쪽 낙조봉에서 고려산 정상에 이르는 능선길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동으로는 강화 시내와 강화대교, 바다 건너 김포 땅인 문수산성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내가 저수지, 외포리 포구, 석모도와 해명산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 온다.
4월의 혈구산은 진달래로 유명한 고려산 못지않게 온통 진달래 꽃밭이다.
일부 등산로 구간은 진달래 꽃으로 완전히 터널을 이루며 가파른 길을 한번 치고
올라 내려다 보면 능선 마다 선분홍 빛이 흐드러 진다. 마치 조물주가 분홍 물감을 휙휙
뿌려 놓은듯 산 전체를 이렇게 물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내가 오늘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지나온 능선들
혈구산 정상에 있는 지적삼각점
혈구산 정상에서
저 멀리 지난해 1대간 9정맥을 끝낸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가 보이고...
퇴모산으로 향하는 이정표
안양대학교 강화캠프스 갈림길
등로에서 바라본 강화군 불은면(佛恩面)의 모습
고려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 이곳 고릉리에 자은사(慈恩寺)가 있었는데 이절의 이름에서
은(恩)자를 따서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지역이란 뜻으로 불은면이라 칭하였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불은면과 인정면을 병합한 후에도 그대로 불은면으로 부르고 있다.
삼각점봉(16:12)
퇴모산 가는길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안정뱅이 소나무의 도열을 받으며 퇴모산으로 향한다
퇴모산 300m 전방에 있는 샛길 이정표(16:22)
퇴모산 올라가는 능선에도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퇴모산 정상 이정표
퇴모산(退帽山:338m:16:27)
강화군 내가면과 불은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단군 왕검이 혈구산에서 모(帽)를 세우고 퇴모산에서 끝 맺음을 하셨다는 유래가 있는 산이다
산 아래에는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가 있고 커다란 채석장이 보이며
마니산이 하얀 뭉개 구름에 가려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산 정상에는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3등 삼각점이 있다.
퇴모산 정상에 있는 3등 삼각점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퇴모산 정상에서 바라본 민족의 영산인 마니산의 신비로움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를 찍고 날머리인 강화농업기술센터로 향한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와 편한 길을 걷는다
강화군 농업기술센터로 향한다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내려오니...
강화농업기술센터 후문이 나오고...
농경문화관을 돌아서 주차장에 도착하여...
강화군 농업기술센터 주차장(16:50)
오늘은 참으로 힘든 산행을 했다.
무릎의 통증은 자꾸만 심해지는데 동료산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은끝에 무사히 한 구간을 마치고 오는데
초지대교를 강화길은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올만에 만난 장기리님과 사당동에서 치킨에다가 생맥주 마시고 집으로 오다.
나홀로 산행길에는 알바라는 걸 거의 모르고 완벽할 정도로 한 산행이
오늘은 마치 귀신에 홀린듯한 3번의 알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은 산행을 했다.
단체산행만 믿고 공부하지 않은 댓가를 톡톡히 치른셈이다... 범여의 산행에 오점을 남긴다.
다음에 알바구간에 땜방을 해야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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