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강화지맥(終)

강화지맥 동.서 제1구간 - 월곶돈대에서 고비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3. 8. 1.

 

☞ 산행일자:  2013년 8 월 1일

☞ 산행날씨:  맑은날씨, 엄청난 습도, 높은기온, 바람한 점 없음

산행거리: 도상거리12km / 4시간 5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연미정-능가사삼거리-대월초교-북산-강화산성 북문-군부대-진고개

                   국화저수지-돌탑-청련사 갈림길-고려산-국화리 갈림길-산불예방 감시탑-고비고개

소 재 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하점면, 내가면

 

지난 6월 30일 강화지맥 남.북구간을 마치고 휴가철에 특별히 갈 때도 없고하여

동.서 지맥을 하기위해 자료를 검색해 보지만 남.북구간 자료는 나와 있어나 동.서구간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을 정도로 자료도 없고 하다가 겨우 지도하나 달랑 구해서 무모하다시피

새벽 4시에 강화를 가기위해 집을 나선다. 인터넷에 버스시간을 검색해보니 04:40분이 첫차라고

해서 03시 30분에 일어나 베낭을 꾸려 버스 정류장에 나오니 개포동에서 신촌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04:20분 첫차를 타고 신촌역에 내리니 5시가 채 되지않은 시간이다.

신촌역 1번 출구에서 직진하여 현대백화점을 지나고 기업은행을 지나 빠리파게트 빵집앞에 있는

버스 정류소에 버스를 기다려도 오지않아 안내판을 보니 04시 40분은 강화에서 출발하는 시간이다.

나! 원... 하는 수 없이 아침밥 먹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신촌역쪽에서 내려와 식당을 찾아봐도 식당은

눈에 뛰지않고 하는 수 없이 패스트푸드점에 들려 별로 좋아하지도 햄버거 하나를 먹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첫차가 저만치 가버린다... 아침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기다리다 6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강화행 3000번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진다 

오늘 산행할 강화지맥 동서구간의 지도

강화도는 원래 두 개의 섬, 즉 원래의 강화도(江華島)와 마니산을 중심으로 한 고가도(古加島)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고려시대부터의 간척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강화도를 남북으로 잇는 강화지맥의 마루금을 긋기가 쉽지 않다.

 

강화지맥은 강화도의 동북단인 양사면 철산리 해안에서 출발하여 별악봉(別岳峰), 성덕산, 봉천산(奉天山 291m),

시루메산, 고려산(高麗山 436m), 혈구산(穴口山 466m), 퇴모산(退帽山 339m), 덕정산(德政山 325m)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 덕정산에서 산줄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남동쪽 갈래는 정족산(鼎足山 221m), 길상산(吉祥山 336m)을

거쳐 가천의과대학 부근에서 맥을 다하며, 이 산줄기는 간척 전의 강화지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서쪽 산줄기는 진강산(鎭江山 441m)을 거쳐 간척지를 가로질러 강화도의 최고봉인 마니산(469m)에

올랐다가 분오리 돈대에서 끝이 난다. 즉 덕정산을 중심으로 Y자를 거꾸로 세워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30일에 강화지맥 남.북구간을 마친후에 동.서구간을 한번 해보려고 자료를 검색해보지만

남.북구간은 산꾼들이 많이 하고 있으나 동.서지맥이 있는줄도 모르는 산꾼들이 많을정도로

알려지지도 않고 자료가 거의 없어서 애를 먹었지만 기왕 마음 먹었는거 시행하려고 출발한다.

 

강화지맥 동.서구간은 월곶돈대(연미정)에서 강화산성(북산), 진고개를 거쳐서 남북구간과

합쳐지는 고려산, 고비고개, 혈구산, 퇴모산과는 같이 가다가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뻗어 덕산,

국수산을 지나서 삼암돈대가 있는 황청포구에서 맥을 다하는 24km 구간이다.

강화지맥 동.서구간 고도표 

 강화군 행정지도

강화가는 버스 정류장(04:57)

버스 정류장에 앞에있는 빵집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질 않는다.

04시 40분이 첫 차이고 배차시간이 10~15분이라 했는데 버스는 오질않아

안내판을 자세히보니 이곳에서 그렇다는게 아니고 강화에서 출발하는 첫차가

04시 40분이란다... 괜히 일찍 나와서 헛고생만 한 결과가 되버렸다.

강화가는 버스 안내판

무작정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아침식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신촌역쪽으로

내려와서 식당을 찾아도 보이질 않고 바로앞에 패스트푸드점이 보인다.

난 피자나 햄버거 같은건 거의 먹지않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햄버거 하나를 먹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오는데 3000번 버스가 정류장을 출발을 한다.

대략 난감... 한참을 기다리다가 6시가 훌쩍 넘어서야 버스를 타고 강화로 향한다

강화시외버스 터미널(07:35)

강화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서둘러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연미정으로 향한다 

택시는 15분만에 연미정앞 월곶검문소에 산꾼을 내려주고 강화로 되돌아 간다 (택시비 5,000원)

월곶검문소(07:50) 
월곶검문소 버스 정류장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월미정으로 올라간다.

좌측 해병대 초소가 보이는데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 예전에는 민간인은

접근조차 되지 않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많이 완화가 된 모양이다

월곶돈대강화도에는 5진 7보 8포대 54돈대를 설치하였는데,

섬 전체가 마치 톱니바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정자는 그후 1744년(영조 20)에 중건하였고, 1891년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강화도 해안에 구축되어 있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는 조선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자 망대였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요,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쓸쓸한 벌판에 있는 마을을 가로질러 연미정에 올라선다.

 

월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에 53개 돈대가 지어질 때 축조되었고,

연미정은 고려 고종(1213-1259) 때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이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연미정의 연조가 훨씬 앞선다.

월곶돈대 문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연미정과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는 노거수 2그루가

연미정을 외호하고 있고 월곶돈대 성곽너머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가운데가 유도(留島)가 떠있다.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 사진촬영을 하지 말라는 해병대부대장의 경고가 있어 사진을 찍지 않는다.

강 건너는 운무가 끼여 잘 보이지 않지만 지난해 1대간 9정맥의 희열을 느낀 문수산과 보구곶리가 보인다

연미정(燕尾亭)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최초 건립연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시련을 겪고

파손된 것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팔각지붕의 겹처마로 돌기둥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건축한 민도리집이다.

임진강과 염하강의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하여 연미정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파주, 김포군, 개풍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연미정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함경도 야인을 진압한 황형장군에게 조정에서 하사한 정자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이곳에 세워진 정자를 연미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로 가는 배들은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는데 달이 뜨면 그 광경이 더욱 멋져 강화 팔경의 하나이기도하다

 

연미정은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파주시, 동으로는 김포시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정자는 주위에 석축이 둘러쳐져 있고, 평지 위에

사방 8m의 바닥을 높이고 10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 정자 양쪽에는 약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그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이곳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1244년에 왕이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조선시대에는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全羅左道防禦使)로 왜적을

물리친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황형은 그후 도총관을 거쳐

1512년 함경도지방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공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정자 밑에 반쪽으로 갈라진 작은 비석에는

 ‘고공신장무공황형택(故功臣莊武公黃衡宅)’이라고 새겨져 있다.

연미정 안내판

월곶은 한강 하류가 두 갈래로(남쪽:염하 서쪽:조강) 갈라지는 지점으로

옛날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다.
한강(염하)과 임진강(조강)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이름 붙었다 한다.

연미정의 달맞이는 강화8경의 하나이다.

 

연미정은 민통선 북쪽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과거에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부근을 정비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월곶돈대 성곽의 모습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염하(鹽河)의 모습

육지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바다를 예부터 염하(鹽河)라 하였다.

바다이되 강을 닮았으니 참으로 맞춤한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민물의 이름을 크기에

따라 천(川), 강(江), 하(河)로 나누어 불렀다. 중국의 황하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엔 하(河)가 없다 하지만, 분명 이곳 염하는 우리 선인들의 인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절묘한 강이면서 바다이다.

연미정 나들길 상회(08:10)

20분 가량을 월곶돈대와 연미정을 둘러보고 다시 도로로 내려서는데 벌 한마리가 와서

팔뚝에 와서 쏘는데 엄청나게 아프면서 갑자기 팔뚝이 퉁퉁부어 오른다.

그리고 너무 늦게 산행을 시작하는데 계속 비가와서 그런지 땅에서 올라오는 地熱과

높은 습도에다 바람이 한 점이 없어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감하는데 아침에

먹은 햄버거 때문에 체기가 있는데 산행을 시작도 안했는데 힘이든다. 

연미정 상회에서 도로를 따라 좌측 도로로 들어서니 주택에 능가사란 절이 있다. 

능가사 골목으로 접어들어 포장도로를 계속 걸어간다.

능가사를 지나 좌우에 있는 논밭을 지나 Y자의 길에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폐가가 있는 콘크리트 도로를 지나 좌측 저수조가 있는 곳으로 오르는데

이곳은 강화나들길 1코스라는 표지목이 서있다.

저수조가 있는 곳을 올라가니...

길은 상당히 좋다.

계속해서 강화나들길 표지목을 만나고...

창원황공과 부인 고성이씨 부인묘를 비롯해 3기의 묘지를 지난다

묘지와 스텐레스 물탱크가 나오고...

물탱크를 지나니 오성농장이 나오고...오미자가 많이 심어져 있다.

오성농장 휀스를 끼고 좁은 길을 지난다.

또다른 물탱크를 지나 포장도로로 내려서는데 이 길은 초반에

능가사 지나서 헤어진 Y자의 좌측길이다.

도로에서 우측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올라서니 강화둘레길이 나오고...

편안한 임도를 따라 한동안 지맥길과 강화둘레길이 같이 이어진다.

강화의 넓은들이 보이고 저멀리 임진강 너머 북한땅이 아련히 보인다

 영지버섯 과 너무 닮아서 왠 횡재냐고 하면서 채취하려고 자세히 보니

영지버섯은 아니고 아카시아재목 버섯이다.

묘지의 뒷편을 돌아서 다시 능선으로 접어든다.

산딸기를 만나는데 이것을 입에다 따서 넣으니 비가 많이와서 그런지 맛은 별로다.

ㅓ자의 길에서 직진을 하여 진행하는데...

등로에는 조그만한 지적도근점도 설치되어 있고...

잠시후에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올라가니 좌측 아래에는 창원황씨 종친회장을 지낸 묘지가 나오고...

등로에서 바라본 강화읍내의 모습

잠시후에 강화읍과 송해면을 잇는 도로현장을 만나고 도로공사 절개지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출발점부터 같이해 온  강화나들길과 이별을 한다.

비에젖은 미끄러운 절개지로 올라서는데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가 초반부터 산꾼을 잡는다.

거기다가 아침에 먹은 햄버거가 영 좋지않아 속이 더부룩하고 체기는 계속된다.

능선에는 폐안테나를 만나고...

잠시후에 좌측으로 대월초교가 보이고...

능선으로 내려서서 대월초교 담장을 끼고 운동장으로 간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대월초교 정문으로 빠져 나간다.

대월초교 운동장을 빠져나온 등로

대월초교 정문을 빠져나와 강화읍과 송해면을 잇는 도로를 따라 강화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오른다.

강화지맥으로 이어지는 길

시멘트 도로로 올라서니 대월초교 사택이 나오고...

고약한 영감탱이

사택을 지나니 고추와 고구마를 심은 밭이 나오고 컨테이너 박스를 끼고 능선을 올라서는데

갑자기 밭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70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남의 밭으로

들어왔다고 소리를 질러된다. 등산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막무가내로 절도범 취급을 하며

고발하겠다고 급박을 하는데 보시다시피 산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곳에 등산로가

어딧냐고 하면서 농작물 절도범으로 몰아 부치는데 미칠지경이다.

그래 안가면 될것 아니냐 망할넘의 영감탱이야! 퇴퇴...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와서 조금 더 걸어간다.

50m 정도를 더 걸어가서 우측 능선으로 더 걸어가서 능선으로 진입한다

길이없는 잡초사이를 걸어 올라간다

묘지 1기를 만나 올라서니 뚜렷한 등로가 나오고 조금을 더 지나니 넓은 임도가 나오면서

좌측으로 아침에 시작한 들머리인 연미정과 한강 가운데 유도(留島)가 보인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이상하다. 이곳에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하는데 옷은 벌써 다 젖어 버렸다.

지나온 연미정의 모습

휴식을 취하고 물을 먹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소화재 2알을 먹고 묘지를 지나 북산으로 향한다

묘지를 치고 오르는데 길은 잘 보이지 않다가...

잠시후 뚜렸한 임도가 나타나고...

잠시후에는 아예 길이없고 산딸기, 아카시아, 자리공이 숲을 이루고 있어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는데 10분동안 잡목과 싸움이 끝난후에 공터인 북산에 오른다.

북산(北山:140m:09:20)
강화읍 관청리와 대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관청리 뒤에 있어 북산(北山)이다.

강도(江都) 시절에는 송악산(松岳山) 이라고도 불렀으며 강화읍성의 북장대(北將臺)가 있었다.

북산 정상에 올라서니 강화읍이 한 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고려산과

혈구산이 보이고 강화지맥길은 이곳 우측으로 강화산성 능선으로 이어간다

북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읍의 모습

흔히들 강화를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중요 유적들이 참으로 많다.

참으로 恨많은 역사에 民草들의 고단함이 베어있는 곳이 강화가 아닐까싶다.

강화읍은 고려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에서

천도 한후 강도의 소재지였으며 1377년(우왕 3) 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부치(府治)가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이래 부내면(府內面)이라 칭하다가 1938년 강화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7월 1일 강화읍으로 승격되었다.
강화는 강과 연관된 지명으로 강(한강, 임진, 예성)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으로 강화(江華)로 개명한 듯 하다.

북산 정상에서 바라본 문수산과 유도(留島)

유도는 한강에서 떠내려가던 섬이 멈춰서 머무른 곳이라 머머리선(留島)라고 부른다.

유도는 조선시대까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섬이라고 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배들이 한양의 마포나루로 올라가기 위해선 서해바다의

간조 시간을 맞춰 밀물때 올라가려고 대기하였던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저 섬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가야할 고려산도 보이고...

다시 만난 강화나들길 (09:22)

북산에서 북문쪽으로 향하는데  조금전 도로공사장에서 헤어진 나들길과 다시 만난다

나들길 표지목을 따라 산성을 따라 직진한다.

강화산성에서 바라본 강화군 송해면의 모습

넓은 들판이 한가롭다. 강화는 참으로 살기좋은 땅인가 보다.

그 너머 임진강 너머 북녘땅은 짙은 운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강화산성(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강화강화읍의 북산과 견자산 남산의능선을 잇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

7.1km 높이 3m 내외. 너비 4m이다.

현재의 성곽은 조선 숙종 36년(1710) 민진원이 축조한 것으로 성곽에 따르는 시설물로

동.서.남/북.의 4대문과 4 암문, 2개의수문 그리고 남장대와 북장대 등이 있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 성은 내성(內城)·중성·외성이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쌓았고, 외성은 1233년에 지었다.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했고,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세웠고,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암문(暗門) 4개소와 수문(水門) 2개소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임진강과 북녁땅이 보이고 물맛이 좋은 약수터가 있다.

고려궁지의 인근에는 오읍약수터와 관청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는 고려궁지 대형 주차장 옆 30m 지점에 있다.

그리고 약수터는 고려궁지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려궁지 담을 끼고 시멘트 포장된 오르막길을 5분 여 걸어서

강화산성 북문을 지나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물맛이 아주 좋고 또 산책삼아 걷기에 좋아

인근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강화산성(江華山城) 북문인 진송루(鎭松樓:09:30)강화산성(江華山城)은 고려가 1232년(고종 19년)
대몽항쟁을 위해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궁궐을 지을 때 함께 쌓았다고 하며,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1677년(숙종 3년)에 현재와 같은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고 한다.

 

도성(都城)은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중 내성(內城)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강화산성이며,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그리고 북문은 진송루(鎭松樓)라 한다

병자호란 당시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효종3년에 일부 개축하였으며 조선 숙종3년(1677)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강화산성 북쪽 성곽은 둘레가 1947m, 치첩이 1813개소이고, 4대문, 4소문 2수문, 9개의 성곽,

4개의 성문장청이 있었으며  당시 북문에는 누각이 없었으나, 정조7년(1783)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워 “鎭松樓”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누각에 걸려있는 鎭松樓 라는 편액이 정통방식인 우측에서“樓松鎭”라 쓰여있질 않고

한글방식인 좌측에서 우측으로 쓰여있는 것이 조금 특이하다

성문 아래에 있는 강화산성 안내판

진송루 아래에서 5분정도 휴식을 취한후에 성곽위를 걸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진고개 가는 길에서 바라본 강화산성과 진송루의 모습
산성끝을 조금 지나니 이내 숲으로 우거져서 도저히 앞으로 전진할 수 없을정도이다.

잠시후에 숲에서 큰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노루 2마리가 놀라서 달아난다.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 때문에 심한 고생을 한다. 조금 더 진행하니 삼각점을 만나고...

숲속에서 만난 삼각점(△교동 409 / 1989 재설:09:45)
잠시후에 군부대 철조망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군부대로

내려가니 평일이라 그런지 군부대 초병의 눈초리가 매섭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경계의 눈초리가 무서워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군부대 옹벽을 타고 내려서서 계속 내려오니 진고개가 나온다 

진고개(10:15)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고개로 강화읍에서 송해면으로 넘어가는

48번 일반국도가 지나가며 지방돌과 서문사이에 있는 고개로 긴고개가

변하여 진고개로 부른듯 하며 그곳에 있는 마을 이름이 진고개이다.

진고개를 건너서 시멘트 도로를 조금 지나가니 커다란 오미자밭고 고추밭이

지맥길을 점령하고 있고 우측 송해면 하도리에는 2014 인천아시아드 경기장 공사가 한창이다.

등로에서 만난 박주가리박주가리는 여러해살이 덩굴풀로서

들판의 풀밭에서 길이3m 정도 자란다

줄기를 자르면 흰 젖같은 유액이 나온다

꽃은7~8월에 피며 잎 겨드랑이에 모여 매달린다

열매는 골돌과이고 표주박 모양이며 10월에 익고 사마귀 모양의 돌기가 있다

연한잎을 나물로 먹고 열매를 약재로 쓴다

양 끝이 뾰족한 배 모양의 열매꼬투리가 다 여물면 벌어지는데

이것이 조그만 바가지 같다고 하여 "박주가리"  라고한다

 

박주가리 효능은 정액. 골수. 기혈을 보하며 익정 작용이 강하다고 한다

따라서 임포텐츠로 불리는 음위증을 비롯해서 몽정. 조루증. 같은 위정 증세를 개선하며

머리카락을 검게 하고 허리와 무릎을 튼튼하게 하며

젖을 잘 나오게 한다

박주가리는 새살이 잘 돋게 하며 독을 풀어준다 이것을 생기작용이라 하는데

화농성 외가 질환인 옹종을 비롯해서 갑작이 얼굴이나 종아리가

빨갛게 되면서 열이 나는 단독 증세 그리고 대화증. 백전풍. 백선. 등에 응용된다

등로를 점령하고 있는 고추밭을 지나니 작은 능선이 나타나는데

이른 아침에 먹은 햄버거 탓인지 자꾸만 체기가 있어 배가 아프고 엄청나게

많은 습도로 인해 걷기가 힘이들 정도이다. 할 수 없어 등로에 앉아서 가지고 다니는 

침으로 손끝을 따는데 검은 피가 많이 나온다. 그리곤 소화재 2알을 먹는다. 

 조금을 내려가다가 좌측으로 내려서니 묘지가 나오면서 도로가 보인다.
국화리 도로(10:40)

진고개 바로 아래인 송해면 하도리쪽에서 48번 도로에서  ㅜ자형으로 갈라져 국화저수지와

고려홍릉, 청련사를 거쳐서 고비고개 지나 내가면쪽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 도로이다

국화저수지의 모습

강화읍 국화리(菊花里)는

본래 강화군 부내면 지역으로 이곳에 산천이 아름다운 국정동천(國靜洞天)이 있어

국정동으로 부르다가 1941년 행정구역 개편때 국정동과 자연부락인 연화골(蓮花谷)

에서 한글씩 따서 音만같은 국화리(菊花里)로 명명 하였다하며 나라 국(國)자를

국화 국(菊)로 고친것은 꽃 화(花)자에 어울리는 말을 찾아 국화 국(菊)자로 표기한 듯 하다

도로를 건너니 해병대 강화교회가 있고 교회 뒷쪽의 절개지로 올라선다.

교회뒤의 절개지로 올라서니 개발을 하다만 공터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방치가 되어있다.

공터를 지나서 숲을 헤치고 고려산 가는길로 향하는데 뜨거운 地熱이 산꾼을 미치게 만든다 

절개지를 올라서서 조금을 지나니 이내 뚜렸한 등로는 나타난다.

그리고 안부로 올라서니 묘지群들이 보이고 아무래도 몸이 이상한 모양이다

휴식을 취한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또 묘지옆에 베낭을 내려 놓는다. 

묘지옆에 10분정도 휴식을 취하는데 잠깐사이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옷을벗어

스틱에 걸어 말리고  물한모금 마시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습도로 인해 힘이든다.

부지런히 걸어서 고려산 지나 고비고개에서 점심을 먹고 물을 보충해야지...

휴식을 취한후에  등로로 올라가니 등로에 군 교통호가 있고 기관총 진지도 보인다.
돌탑(11:15)
돌탑에서 Y자형의 뚜렸한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으로 간다.

다시 조그만 봉우리 몇개를 오르락 내리락하니... 

다시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하얀 플라스틱 말뚝에 강화군이라 글씨를 써논 것을 만나고...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ㅏ자의 등로를 만나 좌측으로 지맥길을 걸어 오르막에

오른 다음에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사람들이 많이 다닌 흔적이 보인 고개가 나온다. 

고개(11:40)

고개를 지나 오르막길은 여태껏 왔던 길과는 달리 넓은 등로가 반질반질하다.

그러나 최근에 비가 많이오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길 위에 이끼가

많이 끼어있어 등로가 상당히 미끄러워 걸어가는 시간이 자꾸만 드디다 

  백련사, 청련사 길림길(11:45)

옛날 고려산 정상에 연못이 있어 다섯가지 색깔의 연꽃의 피어있어 오련지(五蓮池)라

불렀다고 하며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조사가 이곳 연못에서 핀 백련,청련, 적련

황련, 흑련 등 다섯가지 연꽃을 날려 떨어진 자리에 연꽃 색깔로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적석사), 황련사(폐사: 연화동천), 흑련사(페사: 혈구산 서영 석굴부근)를

지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등로 가운데 너럭바위를 만나고...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기고...
백련사 갈림길
군부대가 자리를 잡은 고려산 정상의 모습

고려산 갈림길(12:15)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야 강화지맥 동,서구간이나 지난 5월초 남,북구간에

진달래 축제때문에 고려산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동,서지맥길에서 벗어나 고려산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들어서니 등로에는 데크목을 설치해놓아 걷기는 편하다

고려산 올라가는 포장도로로 접어들어 지난 5월에 걸었던 남, 북구간의 모습이 보인다

고려산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군 화점면의 모습

지난 5월 첫주 강화지맥 남,북구간 걸을땐 진달래가 빨갛게 산을 물들였던

고려산은 녹음이 가득하고 강화8경의 하나인 낙조봉도 보이고...

고려산에서 퇴모산까지는 강화지맥 남,북구간과 동,서지맥이 겹쳐진다.

고려산 정상 시멘트도로 200m를 걸어서 정상아래 헬기장을 걷는데 얼굴이 익는 느낌이다
고려산(高麗山:436m:12:25)

강화군 강화읍,내가면,송해면,하점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출입금지구역이다.

출입금지구역 입구의 헬기장이 고려산 정상을 대신하고 있으며, 헬기장 아래에

삼각점(G.O.2 1999매설)이 있다.

 

 

강화 6대산의 하나로 마니산(472.1m),혈구산(466m),진강산(443)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1696년 편찬된 강도지에 홍릉과 국정,적석,백련등의 세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화부 서쪽 15리에 있으며 강화부의 진산이다라고 되어 있다.

 

고려산은 고려의 정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신성한 연못의 물고기가 중국 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연못의 연꽃이 떨어진 다섯 곳에 오련사를 지었으며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이 태어난 전설이 있는 곳으로 곳곳에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등 사찰과

고인돌군락지, 고구려 토성, 오련지, 홍릉 등 문화재가 분포하여 아침에

 역사탐방 위주의 산행이 좋다. 서쪽 적석사를 가다보면 솔밭을 지나고 갈대밭을

지나 낙조봉을 만날 수 있는데 저녁에 서해 수평선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해지는 광경은 [강화8경]중 하나이다.

가야할 능선들

헬기장에서 좌측 능선을 타고 가는데 등로에 끼인 이끼 때문에 2번이나 넘어진다
강화지맥 남,북과 동,서 지맥간 만남의 길(12:30)
패랭이꽃
오늘 힘들게 지나온 구간의 모습
등로에서 만난 영지버섯
오상리 고인돌 갈림길(12:50)
산불예방 감시탑(12:53)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봄과는 전혀 달리 잡풀만이 무성하다
이동통신 중계탑(12:55)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고비고개로 향한다
고비고개(13:00)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서 강화읍 국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8번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이곳에서 고려산과 혈구산 가는 등산객이 많다.

 

 ‘고비’는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있었던 곳으로,‘고읍(古邑)’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고읍’은‘고비’고부’로도 부르며 지도상에는 나래현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시대 강화로 수도를 옮기고 39년 동안 몽골과 맞서 싸우다 개경으로

돌아갈 때 강화의 궁궐과 성곽이 몽골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무렵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내가면 고천리로 옮겨와‘ 심주(沁州)’라고도

불렸는데 이후 심도(沁都)’는 강화의 별칭이 되었다.

 관아터, 향교터, 형옥터와 장터라 전해오는 곳이 있으며 조선 세종때

행정관서가 현재의 읍내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의 강화의 행정 중심지였다고 한다.

(강화 역사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옴)

이런 낭패를?

지난 5월 고려산과 혈구산 경계에 있는 고비고개에 멋진 매점과  사람들이 인산인해라

그리고 도로가라서 당연히 매점에 영업을 하리라 믿고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식수를 보충하여 혈구산으로 오르려고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점심도

안싸오고 식수도 이곳까지 오면서 마실만큼만 가져왔는데  5월에 있었던 매점 자리에는

 싹 없애버리고 화단에다가 꽃을 심어놨다... 이걸 어쩐다 배고픈거야 과일과 모나카

과자 2개와 두유 하나가 있으니 가능하지만 식수가 없으면 산행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컨디션이 최악이라 다음구간으로 미루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20분이 와도

차는 오질않아 땀으로 범벅이 된 옷으로 히치를 시도하는데 승용차는 엄두를 못내고

지나가는 1톤 트럭을 보고 손을 들으니 금방 차를 세워서 시외버스 정류소 옆에 세워준다.

 

이 친구는 나이는 나와 비슷하고 부천에서 설비가계를 하는데 고향이 강화 교동이라

강화쪽 설비공사를 많이 한다고 하면서 재료를 사려고 강화읍내를 나가는 중이란다.

고비고개에서 강화까지 태워준 91마1206 설비가게 사장님 감사합니다.
강화시외버스 터미널 앞 도로의 모습
강화시외버스 터미널 앞에는 내 식성에 맞는 음식점이 별로없다.

배는 고프고 하는 수 없어 인근 식당에서 소머리국밥 한그릇에다

션한 맥주 한병을 마시고나니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고려 효종의 恨이 서린 견자산이 보인다

 

견자산(見子山:60m)

강화군 강화읍의 강화산성에 있는 낮으막한 동산 같은게 견자산으로

7백여년전 고려 고종이 나라가 힘이 없음을 뼈져리게 느꼈던 산이다.

이곳은 옛부터 성황당과 정자가 있어 정자산으로 불리웠는데 임금(고종)은

자주 정자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며 멀리 몽골로 떠난 아들(원종)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자산으로 불리던 이 산의 이름이 아들을 본다는 뜻으로 ‘볼 견(見)’ ‘아들 자(子)’를

써서 견자산이 되었다.

 

이곳은 그 당시 권력의 실세였였던 최씨 집안이 몰려살던 장동마을 있고 강화산성과 무덤이 있다.

병인양요 당시 1개월정도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방어진지로 사용하고자 구축한

흙더미도 간간히 보인다.

강화에서 15시경에 출발하여 서울 송정역에서 내려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집으로 오다
강화대교 다리위에서 차창밖으로 본 문수산의 모습
산행길에서 채취한 영지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