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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강화지맥(終)

강화지맥 남.북 제2구간 - 농업지원센터에서 택리나루까지

by 범여(梵如) 2013. 7. 1.

 

☞ 산행일자:  2013년 6 월 30일

☞ 산행날씨: 맑고 무지더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8km / 8시간 15분 소요

☞ 참석인원: 좋은 사람들 산악회와 30여명과 함께

☞ 산행코스: 강화농업지원센터-덕정산-236.4m봉-1번 군도-71.2m봉-강남중.고교-18번도로-정족산

                   여능고개-152m봉-224m봉-여우고개(로얄호텔)-길상산-택리나루

소 재 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양도면, 길상면, 화도면

요즘 범여는 엉뚱한 일에 고민이 참으로 많다... 4년 반동안 매주 계속해 온 이 좋은산행을 접어야 할지 ,

아님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진행해야 할 지를...한달전부터 자다가 거의 매일 다리에  쥐가 나더니만

이제는 산행할 때 무릎에 통증을 심하게 오고 발바닥은 불이 나는것 같더니만, 이제는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파오니 걱정이다.병원에서 X-ray를 찍어보니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나와서 계속 산행을 진행하고 있지만

계속되는 고통을 감내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한의원에서 매일 침을맞고, 스포츠 맛사지를 받지만 통증은 가라않지 않는다. 
한의원 원장님께서 몸에 과부하가 걸려서 한달만 산행을 쉬면 났는다고 하지만
산에 집착때문에 그것을 멈추지 못하고 오늘도 더운날씨에 강화지맥길에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강화도(江華島)

강화도는 섬 전체가 선사시대에서부터 개화기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변하는듯한

말 그대로 야외 역사박물관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고의 역사탓인지 강화도를

걸어면서 자주 만나는게 돈대(墩臺)이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로 밖은 성곽을 높게 쌓고, 그 안은 낮게하여 포를 설치해 둔 곳이다.

강화도 전체에 53개의 돈대가 있다고 한다.

 

 돈대(墩臺)란 경사면을 자르거나 흙을 다져 평평한 지대를 만들고 옹벽을 쌓은 곳으로

이 같은 형태의 돈대는 수원성곽 돈대 3곳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선 강화가 유일하다.

강화에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가 있는데 강화해안을 빙둘러 설치되었다고 한다.

요즘의 군대 편제로 치면 진은 대대, 보는 중대,돈대는 그보다 작은 요새로 말한다.

5진중에 지금은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만 남아있고 7보중엔 광성보만 남아 있다고 한다 .

 

강화는 940년에 현으로 승격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야 강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231년 몽고의 대대적인 침입을 피해 고종과 최씨정권은 개경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1232)하여 끈질긴 저항으로 39년간의 장기전을 치르게 된다. 대륙민족인 몽고는

해전에 약해 강화도가 섬이라는 이유로 접근하지 못하고 대신에 전국으로 흩어져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지역 갈등이 있었으나 강화 천도 이후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단일민족으로의 민족주체성이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의 고려 궁터는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강화의 천도 역사는 최씨정권의 몰락으로 1270년에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막을 내린다. 후에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몽고와 고려 조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한 가운데에서도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다 4년만에 진압되었다.

강화인삼센터 휴게소(07:50)

사당역에서 07시에 출발한 버스는 50분만에 강화대교를 건너서 휴게소에 도착한다.

이곳 휴게소에 식당도 있고 매점도 있지만 청결하지도 않고 음식맛도 별로 인데다

쥔장이 그리 후덕해 보이지는 않는것 같아서 1구간에 이곳의 아침식사에 실망하여

사당동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온 바람에 휴게소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당에서

20분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들머리인 강화농업기술센터로 향한다

강화농업지원센터(08:35)

버스에서 내려 강화농업지원센터 도로를 건너서 덕정산을 바라보며 산행을 시작하다(08:45)

도로를 건너자마자 정기카센터를 끼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농로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은 상당히 따갑기만 하다

포도도 탐스럽게...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끔하는 보리밭도 오랫만에 만나고...
한수농장으로 가야만 강화지맥길인데 선두가 그쪽은 길이 나쁘다면서 우측

넓은 임도로 쏜살같이 가버린다. 좌측으로 가면 시간이 너무 차이가 나 울며

겨자먹기로 가긴 하지만 이 산악회 산꾼들은 지맥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는듯하다.

좌측으로 가서 지퍼가 있는 조형물에서 올라가야 강화지맥길인데 아쉽기만 하다.

넓은 임도로 가니까 편하긴 하다. 초반부터 땀이 비오듯 흐른다.

좌측에 꽤나 규모가 큰 한수농장이 보인다.

뒤돌아 보니 지난구간에 걸었던 혈구산과 퇴모산도 보이고...

넓은 임도로 들어서 안부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가서 본격적인 마루금에 도착한다.

한수농장에 오르는 길과 만나 본격적인 강화지맥 우측 능선길을 걷는다.

암릉이 나타나고 전망이 좋은 바위가 나온다.

전망대바위(09:20)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강화군 양도면의 모습

전망바위에서 덕정산 가는 길은 잡풀이 어깨까지 올 정도로 우거져 있다.

덕정산(德政山:325m:09:27)
강화군 불은면과 양도면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강화군의 자료 어느곳에도 이 산에 대한 자료는 없다.

산 정산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해병대에서 사격 훈련때 표시하는 빨간 깃발과 부대장 경고판만 있다.

그러나 능선 줄기로 봐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진강산과 마니산을 거쳐 분오리돈대로 이어지는 뚜렷한 산줄기가 있고

직진으로 가면 내가 오늘 진행하는 강화지맥 남.북구간으로 정족산과 길상산을 거쳐 택리나루로 가는 길이다.

솔나물꽃

이곳 방화선 임도에는 솔나물을 비롯해 엉컹퀴, 나리를 비롯해

야생화와 야생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덕정산 정상에서 바라본 진강산(433m)의 모습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도장리·삼흥리·하일리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강화에서 3번째로 높은 산이다.

조선시대 진강현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 정상부에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강도지와대동여지도에 진강산이 표기되어 있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가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여지도서에도 산 이름이 나오며, 강화부지에는“강화부성 남쪽 삼십리에

있는데 산등성이가 낙타 등과 같다. 그 아래로 촌락이 번성하여 옛 진강현이 있었다.

또한 산에 목마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자료에

“진강산 봉수는 동쪽으로 대포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망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덕정산에서 잡풀이 우거진 방화선 임도를 따라 지맥길을 이어간다.

뒤돌아본 덕정산의 모습

방화선 임도를 따라가니 또다른 깃대가 있는 봉우리가 나오고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올해들어 처음 산에서 만나는 나리꽃

산불이 난 흔적이 있는 안부 능선을 지나고...

멋진 암릉도 만나고...

236.4m봉(10:00)

등로옆 숲에 파묻혀 있는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을 만난다.

236.4m봉 아래에는 불은면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운동기구와 의자가 있다.

불은면(佛恩面)의 유래는 고려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 이곳 고릉리에 자은사(慈恩寺)가 있었는데

이절의 이름에서 은자를 따서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지역이란 뜻으로 불은면이라 칭하였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불은면과 인정면을 병합한 후에도 그대로 불은면으로 부르고 있다.

 갈림길(10:05)

Y자형 길이 나오고 직진인 뚜렸한 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임도로 내려간다.

좌측에는 천주교인 인 청도김공과 광산김씨 부부 합장묘가 있다.

좌측에 있는 천주교인 묘지를 지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임도를 계속 내려가니...

우측 으로 진강산이 보이고 호화로운 가족 납골묘 2군데가 있고

본격적인 묘지가 많은 곳을 지난다

납골묘를 지나 좌측 묘지 능선으로 올라서고...

기독교인들 묘지인지 비석마다 십자가들이 그려져 있다.

공동묘지를 지나 넓은 임도로 들어서니 나무마다 빨간 철판을

나무에 못으로 박아놨다... 군인들은 자연보호도 안하나... 참으로 개념이 없다.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잔인한지... 손톱밑에 조그만 가시하나만 박혀도

엄청나게 아픈데 나무 한 가운데 못을 박았으니 얼마나 아플까?

공동묘지지대를 내려가니 군부대 담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그늘이 하나도 없는 임도로 내려서니 엄청나게 덥다.

군부대  담장을 내려서니 화도면과 불은면을 연결하는 1번 군도가 나온다.

1번군도(10:20)

1번 군도에서 군부대 담장을 끼고 우측으로 걸어가면...

강화군 예비군 훈련장이 나오고...

ㅓ자의 삼거리가 나오는데 길상면과 외포리 선착장 표지판 쪽으로 가다가...

축산농가가 즐비한 우측의 포장도로로 접어든다.

무더운 퇴약볕에 산도 아닌 도로로 걸어가는 산꾼들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계림농장을 지나니 비포장 도로에 고구마밭이 나오고 우측으로 접어든다.

이름이 특이한 쪽빛 개구리 펜션 간판을 만나 우측으로 간다.

강화는 서울과 가깝다보니 섬 곳곳에 펜션 간판을 많이 만난다.

고구마밭을 지나서 비포장 도로를 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엉컹퀴를 좋아하는 울님... 관절염에 특효라나 뭐라나...

잡풀이 우거진 임도로 오르니 좌측에 여러기의 묘지가 나오고 강화군수가

불법묘지를 조성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서있는 곳을 지난다.

다시 길은 잘 보이지 않고 낡은 철조망을 비집고 능선으로 오른다.

국립건설 연구소에서 설치한 소삼각점을 만나고 71m봉 표지판이 나온다.

71m봉(10:40)

지도상에는 71.2m봉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지만 누군가 71m봉이란 팻말을 붙혀놨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71m봉을 내려선다.

71봉 아래 소나무 단지를 내려서니 밭이 나오고 우측에 멋진 전원주택과 길정저수지가 보인다.

전원주택 앞에 내려서니 비포장 도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도로로 내려간다.

앞에 보이는 강화군 불은면 길직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밭가운데 컨테이너를

보면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서 밭고랑 가운데를 거쳐서 능선으로 오른다.

밭고랑에서 뒤돌아 본 불은면 길직리의 모습

능선을 넘어서니 공동묘지가 나오고 우측에 산딸기가 있어

동료산꾼들은 연신 산딸기를 입에따서 넣느라 정신이 없다.

포장도로(10:50)

공동묘지를 내려오니 불은면 길직리 마을에서 강남중학교로 연결되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후미를 기다리면서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동료산꾼들은 길가에 있는 벚나무에 까맣게 익은 벚찌를 따먹느라 정신이 없다.

잠시후에 Y자의 길이 나오고 강남중학교 이정표 방향으로 걸어간다.

Y자의 길가에 있는 이정표

포장도로 좌측에는 커다란 수수밭이 보이고 그 위로는 펜션이 많이 있다.

우측으로는 길정저수지가 있고 그 너머로 진강산이 보인다.

도로 좌측에는 개인이 지은듯한 사각정자가 있고 우리가 걷는

지맥길이 강화군에서 조성한 강화나들길이란다. 

길정저수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있는 저수지로 강화도에서 "내가저수지" 다음으로 용량이

큰 저수지로 수심이 제일 깊다고 하며, 길상면과 양도면의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저수지를 바라보면 조금을 걸으니 ㅏ자 형태의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직진하여 강남중학교 방향으로 향한다.

지나온 길직리에 고려 중기에 대문장가이신 백운 이규보 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백운 이규보 선생은 고려 중기 무인정권 밑에서 한 자루의 붓으로 무자경국대업이 이루며 산 분이다.

선생은 려천이씨시상 은백의 후손으로 의종 22년 (1168)에 부윤수공과 모 김해김씨 사이에 태어나

고종28년 몽고의난에 천도한 이곳 강화도에서 74세로 돌아가니 나라에서는 문순공의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명종20년(1190) 진사에 합격한 후 고종 24년(1237) 문하시인으로서 동경 이상국집 56권과

백운소설 등 많은 저서를 통하여 고려 시대의 문장을 가름할 위대한 업적을 남긴분이다.

선생의 문장을 일컬어 동 시대의 진화는 적선의 일기가 안가밖에 서있는 것같다고 하였다.

최자는 일명과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 가 없다. 천재의 준일한 자라고 평하였으니

선생은 실로 현세의 문자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분이다.

선생은 자호로 백운거사 백운 삼흑호선생 상상헌 등 다양하게 일컬었으니 품성이 소탈하고 청백한 분이었다.

선생은 유불선 삼교에 출입하고 기고문이 많으니 전통적인 신념에도 유념하여 구삼국사에 의거하여

동며왕편의 작서 서사시를 남겨 만유를 엄유하는 기상을 가졌다. 선생의 문집에 2천여수의시와 가사가

남아 있으나 생전에 7,8천 여수에 이르는 시사를 지었다고 하니 선생은 참으로 천하의 시인이었다.

행운류수와 같이 막히는데 없이 뻗어 나가는 시사는 한림별전에 이정언 진한림 상운주필로

이름을 날리고 백운시를 경각에 짓기도 하였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몽고의 정복 야욕이 고려에 미쳤을 때 선생은 그 예봉을 한자루의

붓으로 멈추게 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이나라 국보로서 세계문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해인시 짓기도 하고 삼정례문의 에서는 주자를 사용하여 이 책이 간행된 사실을 명백히 밝힘으로서

세계 최초의 고자주성을 알려주었다. 또 당시 나라의 중요한 외교문서는 선생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로써 문자는 칼보다 강하는 말은 선생에게 합당한 말이니 고려 수백만 백성 위에 선생이 보여준

천재의 일기는 이 나라 문기의 역사에 길이 빛날 교감이 된다.

이규보 묘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115 
시 대 고려시대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을 지었다. 선생이 남긴

문집은『동명왕편』을 비롯하여『동국이상국집』,『백운소설』등 55권으로,

모두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강화군청 홈페이지 인용)

강남중학교 방향으로 향하다가 ‘들꽃피는 언덕펜션’ 이란 팻말을 보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펜션 이름이 참으로 예쁘다.

펜션 입구에는 고추밭과 인삼밭이 있고...

인삼밭과 펜션사이에 있는 강화지맥길을 이어간다.

아름다운 산수국의 모습들꽃 펜션은 이름에 걸맞게 산수국을 비롯한 야생화들을 많이 심어놨다.

펜션 뒤의 무명봉 오르는 길은 아예 길이 없어서 길을 개척하며 걷는다.

무명봉 정상에 있는 군참호

무명봉 내려오는 길에서 바라본 양도면 도장리의 모습

서두머리 마을의 모습

길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내려오니 강화지맥 길은 멋진 호화주택이 점령하고 있다.

호화주택의 잔디밭으로 걸어 내려간다.

호화주택의 길을 내려오니 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담장 철조망을 나오니 강남중학교가 나온다

강남중학교 후문(11:20)

날씨는 무척이나 덥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호화주택 정문 앞 시원한 그늘에서

점심을 먹는데 너무 더워서 밥맛이 별로 없지만 배가 고프면 걷지 못하기에

싸가지고 온 도시락 밥에다가 물을 말아 풋고추 3개를 된장에 찍어서 억지로 먹는다.

20분간 점심겸 휴식을 취한다. 다리의 통증은 심해지고 발바닥은 불이 나는 느낌이라

양말을 벗고 무릎과 발목에 에어파스를 뿌리고 나니 조금은 나은듯 싶다.

중학교 후문에서 내려오니 우측에 새빛교회가 있어서 식수를 보충하고 시원한

정수기에서 연거푸 3컵을 마시고 다시 강화지맥길을 나선다.

새빛교회에서 나와 좌측 17번 도로를 따라서 강남 미디어고교

정문 직전에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강남 중학교 정문 들어가는 길 맞은편 버스 정류소에서 돌계단으로 올라서니...

강화지맥길은 새로지은 강남미디어고의 기숙사가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다. 

조그만 능선으로 올라서니 잔나비 걸상버섯이 3개가 달려있고 능선을  오르니

무명묘지가 나타나고 이윽고 새로운 묘지로 내려서니 차량소리가 들리면서

2차선 도로인  18번 군도가 나온다

여능고개(12:00)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와 길상면 온수리를 잇는 18번 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여우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도로를 따라서 화도면쪽으로 50여m를 가다가 좌측 임도로 올라선다.

정족산 오르는 임도로 들어서니 좌측에 ‘여능’이란 빨간 글씨가 이곳을 여능고개임을 알려준다.

넓은 임도로 따라 올라오니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고 우측엔 스텐레스 탱크가 있다.

은행나무를 지나자마자 좌측 능선으로 접어들어 정족산으로 향한다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커다란 밤나무 단지가 나오고 여능고개에서

정족산까지 해발고도가 113m 밖에 되지 않지만 더운 여름날에 한참을  땀을

흐리는 수고로움을 한 다음에야 정족산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섬 산행은 산의 높이만 보고 올랐다가는 상당히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해발고도가 거의 제로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족산 정상 직전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화도면이 시원하게 보인다.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본 강화군 화도면의 모습

강화도를 江都(강도) 혹은 沁州( 심주)라고도 한다.

강화도는 우리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온 참성단(塹城壇)이란 신성한 곳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이기도 하다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燕山君)은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고, 교동도에 유배되었으며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용흥궁 자리의 초가에서 살다가 즉위하였다.
병자호란 때 김상용(金尙鎔)은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梁憲洙)는 프랑스군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이며
이시원(李是遠) 전주 덕천군의 후예로서 자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이다.
1866년 프랑스 군인이 강화를 침략할때 유수 이하는 도망치고 숙중, 영조 두임금의 영정을  봉안한

궁전이 다 적의 수중에 들어가 불타고 혹은 파괴된 것을 본 공이 78세의 고령으로  아우와 함께 약을 마시고 순절했다. 

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영의정을 추서하고 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수사(淨水寺)를 중건한 함허대사(涵虛大師)스님 등이다. 

고려 무신정권 때의 여몽전쟁에서 부터 삼별초의 난, 병자호란, 병인양요, 강화도 조약 등

수많은 역사의 질곡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강화의 山河들이 운무 때문에 시원스럽지는

않지만 아쉬운대로 범여의 시야에 들어온다.

 

강화도와 직접 관련된 말은 '넉살 좋은 강화년' 또는 '넉 살 좋은 강화 연'이라는 말이다.

앞의 말은 '-광화년/광해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앞 속담의 와전인 듯하다.

뒷말이 먼저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강화문화원에서 펴낸 강화사(江華史)에서는

앞의 말이 먼저이고 뒷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은 앞의 말을 더 많이 알고 있다.

"넉살 좋은 강화년이라더니 옛말 그른 데가 하나도 없다니까!"(김문수, 끈)라는 소설 용례에서 보듯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이 속담은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여자를 조롱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실제 배경을 보면 이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배여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인조견과 관련되어 생겼다는 것으로 보아 인조견이 생긴 뒤 일 것이다.

강화도에서 인조견을 언제부터 생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제 시대 이후로 유명해졌다.

구체적으로 1920년 전후 약 20년간 강화군민 대다수가 인조견 생산에 들었다고 한다.

 

인조견을 초기에는 강화 여인들이 직접 방문으로 팔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강화 여인들의 장사 수완이

좋아 생긴 말이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의 배경에는 강화 여인들의 억센 삶의 역사가 깔려 있을 것이다.

갖은 외환과 군사 요충지로서의 터전, 바닷길의 중심지, 피난민이 많았던 곳이었으니

이곳 여인들이 헤쳐 나온 삶의 풍랑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전망대 바위에서 조금 올라서니 성벽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정족산이 나타난다.

정족산(鼎足山:221m:12:30)
강화군의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산으로 산 정상부에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부르는 정족산성이
소재하며 전설에 의하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성이라 전하나 확실치 않다.
솥을 업어놓아 세발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정족산(鼎足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산에 전등사가 있기 때문에 전등산이라고도 부르며, ‘해동지도’에도 산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서는 정족산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이정표에는 정족산이 아닌 삼랑성 정상으로 표시되고 있고 고도도 지도에는 221m이고

이정표에는 113m로 표기가 되어있어 상당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정족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정족산 정상에서 바라본 길상면의 모습

조선시대에 길상산의 이름을 따라 길상면이라 칭하였으며 길상산에는 양마목장(良馬牧場)이 있었고

임금께 진상하던 약쑥과 감목관청에서 향탄(香炭)을 공급하는 등 이로 인해 좋은 행운이 깃들었다는

뜻으로 길상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성곽 너머로 마니산과 초피산이 가깝게 보이고...

잠시후에 가야할 강화지맥 남.북구간 마지막 산인 길상산이 가깝게 보이고...

 삼랑산성(三郞山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위치한 연대미상의 산성으로 인천시 사적 제130호이다.

면적이 245.997㎡로 둘레는 약 2.5km에 달한다. 산성 안에는 강화에서

가장 유명한 전등사(傳燈寺)를 품고 있으며 성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정족산(鼎足山;113m)이기 때문에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삼랑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있고 성문의 누각이 있는 곳은 남문인

종해루(宗海樓) 뿐이며 전등사로 들어서려면 산성의 4개 문중 하나로 들어서야 한다.

남문과 동문이 절의 출입구 역할을 하며 그래서인지 전등사에는 산문이나 일주문이 없다.

 

 

성의 축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三郞)인 부루(扶婁),

 부소(扶蘇), 부여(扶餘)의 삼형제가 쌓은것으로 전해지고있다.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또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 부른다.

성곽의 축성구조로 보면 잡석(雜石)으로 삼국시대의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 조선시대에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문은 동,서, 남,북 4곳에 있으며 문루(門樓)는 남문에만 있으며 종해루(宗海樓)라 하는데

조선시대 영조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문루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선 현종 1년(1660년)에〈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史庫)가 옮겨와

성 안에 있는 정족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과 함께 지어 보관되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으며 삼랑산성은 마니산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된 성이라고 볼 수 있다.

산성을 따라 조금 내려오니 서문이 나오고 좌측으로 전등사 가는 길이 나온다
전등사는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서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전등사는 만해 한 용운 선사와 만공선사의 상좌이셨던 춘성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곳이다.

general_image

 전등사 대웅보전 삼존불

대웅보전 안쪽에 모셔진 목조삼존불상 위에는 완주 화암사의 것과 견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닫집이 장식되어 있다. 섬세하게 조각된 극락조와 연꽃,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을 보면

왜 닫집이 걸작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전등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는데, 표면에

붉은 녹이 슬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쇠붙이라고 생긴 것은 모두 군수물자로

쓰여 약탈당했는데, 그때 전등사의 범종도 떼어 가 버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물러간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탈해 간 쇠붙이를 모아 놓은 곳으로

스님들이 범종을 찾으러 갔더니, 전등사의 것은 없고, 무쇠종만 남아 있었다.

결국 이것을 들고 와 전등사에 다시 설치를 하였는데, 190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만들어진 종으로

측면에 '깨달음의 종소리'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종소리가 아주 맑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편액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대웅전과 대웅전 처마의 네귀를 떠 받들고 있는 나부상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전등사 대웅보전 네 귀퉁이에서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조각상’.

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은 모두 연꽃좌대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4개 모두 각각 다르다.

대웅보전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오른쪽 앞 귀퉁이 나부상은 왼쪽 한 손으로만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심각한 울상이다. 굳게 다문 입,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퉁방울 눈. 뭔가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모습이다.

오른쪽 뒤 나부상은 오른 손바닥 하나만으로 떠받들고 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다.

이는 악물고, 눈은 부릅떴다. 눈썹은 꼿꼿하다.

왼쪽 나부상은 앞뒤 모두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다. 앞 나부상(아래사진 왼쪽)은 즐거운 얼굴이다.

이 정도야 ‘누워 떡 먹기’라는 듯 ‘헤∼’ 웃고 있다. 입 꼬리가 위쪽으로 약간 올라갔다. 눈은 술 취한 듯 몽롱하다.

코는 위로 들쳐져 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왼쪽 뒤 나부상(아래사진 오른쪽)은 아예 낄낄대고 있다.

양쪽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눈은 ‘용용 죽겠지’ 하며 동그랗게 떴다. 영락없는 장난꾸러기이다.

그렇다. 어쩌면 4개의 나부상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기쁨과 성냄,

슬픔과 즐거움이 마찬가지란 것이다. 기쁨 속에 슬픔이 들어 있고, 즐거움 속에 노여움이 녹아 있다.

슬픔이 거름 되어 기쁨이 솟고, 노여움이 가라앉아 즐거움이 우러난다. (동아일보 자료 인용)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정족산 史庫  사고(史庫) : 조선 왕조때 역사, 왕실에 관한 기록이나,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던 곳집. 

 정족사고는 조선 후기 외사고(外史庫)의 하나로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에 위치하였다.

정족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가 1653년(효종4) 11월 실록각의
실화사건으로 많은 사적들이 불타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헌종1)
12월에 남은 역대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정족산사고에 보관된 실록들을 보면 '태조실록'에서 '인조실록'까지는 처음부터 봉안되었고, '효종실록'은

1661년 11월에 봉안되었으며, 1664년 12월에는 무려 223권에 달하는 실록들을 개사하였다.

1665년 9월에는 그동안 낙권(落卷)이 되어 있던 부분을 새로 등서(騰書)하여 채워넣었고,

'현종실록'은 1683년(숙종 9) 3월에 완성, 봉안되었으며, '숙종실록'은 1728년(영조 4) 3월에 완성, 봉안되었다.

'성종실록'은 1805년(순조5) 8월에, '순조실록'은 1838년(헌종4) 윤4월에 각기 완성, 봉안되었다.

그리고 '헌종실록'은 1852년(철종3) 9월에 인쇄하여 각 사고들에 봉안하였으며,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 윤 5월에 인쇄하여 봉안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일시 점거한 프랑스의 해병들에 의하여 이 정족산사고의
서적들이 일부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 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실록 및 서적들은 때로는 서울로
가져가기도 하고, 일부는 약탈되는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춘추관(春秋館)의 관장하에 관리되어왔으나
대한제국시대에는 의정부에서 관원이 파견되어 강화군수와 협력하여 관리하고 포쇄(曝 )를 실시하며 보존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부터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들 및 규장각의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서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겨진 뒤 광복으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 발전되면서 서울대학교에 옮겨 보존 관리되었다. 

 

현재 이 정족산사고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인 전등사가 있어 이 사고를 보호하여왔기에 1910년 조선총독부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고의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성의 사진이 수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고 쓰인 현판은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 실록들로,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겨졌던 전주사고본

실록들이 보다 안전한 마니산사고로 옮겨졌다가 이후 마련된 정족산성 내의 사고로 모아졌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정족산사고 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삼랑성(三郞城) 서문(西門:12:40)

삼랑성은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석성으로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불리운다

사적 제130호인 삼랑성은 지정면적이 75,000평, 산성둘레 2.3km로 전등사 일대를 둘러싸고있는 산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三郞)인 부루(扶婁), 부소(扶蘇), 부여(扶餘)의 삼형제가 쌓은것으로 전해지고있다.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고, 후에 토성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석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보존되고있다.

삼랑성은 성 안밖을 할석으로 겹축하였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쇄기를 많이 박아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있다.

이 삼랑성은 고려시대에도 몇번의 보수가 있었던것으로 보이며...

1739년 영조15년에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종해루(宗海樓)라는 문루를 건립하였고,

1764년에 다시 성을 중수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삼랑성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때인 1259년에 삼랑성안에 가궐(假闕)을 세웠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장사각(정족산 사고)을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하고 남은 전적과 실록은 규장각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고한다.

삼랑성은 해발 221m의 정족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쪽의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남쪽 안부에 위치하고있으며, 남문은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위치하고있다.

성벽이 꺽여지는 곳마다 10여곳의 곡성을 두고,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稚城)을 두고있다.

본래 삼랑성에는 동서남북에 네곳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이 가운데 문루가 남아있는 곳은 남문 뿐이며 종해루(宗海樓)라 부르고있다.

서문에서 최근에 복원된듯한 성곽을 따라서 남문쪽으로 향해서 올라가는데

오늘 서울의 기온이 34도란다. 햇볕이 따가운 정도가 아니라 살이 익을것만 같다.

그늘도 없는 성곽위로 올라서니 가야할 길상산과  한강 하구가 한 눈에 보인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빠져야 한다는데 성곽이 완전히

복원돼버려서  가야할 길이 없어져 버려  성곽 벽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같이온 유주열님은 위험하다고 다시 서문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간을 집에다

빼놓고 다니는 범여만 성곽벽을 곡예하듯이 내려선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남문인 종해루가 나온다.

삼랑성 남문과 동문이  전등사 일주문 역할을 하는 바람에

다른 가람과는 달리 전등사에는 일주문이 없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 양헌수 대장(1816∼1888)은

 바로 이 남문 동문에 300여 명의 포수를 나눠 배치했다.

11월 9일 프랑스군 160명이 이 두 성문으로 공격해 오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적군은 사망 6명 부상 60여 명의 흔적을 남기고 퇴각했다.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 4명뿐이었다.

성 안의 정족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무사했던 것도 바로 이 승리 덕분이었다.

삼랑산성에서 성곽벽을 타고 내려오니 솔밭이 나오고 희미한 능선이 보인다.

간벌된 나무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등로를 내려오니 무명묘지가 나온다. 

무명묘지를 지나니 그린색 펜스가 처져있고 지맥길은 주택이 막고있다.

주택을 개.보수 하는지 도장공이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라 인부들에게 수고하십니다. 인사를 하니 답례를 한다.

주택 마당을 빠져 나와서 도로로 내려오니 로얄유스호스텔이 나오고...

로얄유스호스텔에서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니...

보리고개(13:15)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와 장흥리를 잇는 13번 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정상에는 로얄유스호스텔이 자리를 잡고 지맥을 짤라먹고 있다

공터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선두리로 내려온 동료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 같이 휴식을 취하는데 자꾸만 발바닥이 아파온다.

나홀로 조금전에 지나온 능선의 모습

첫번째 헬기장인 152m봉(13:40)

자꾸만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여 아스피린 한알을 먹었지만 별 효력이 없다.

자꾸만 휴식 시간이 길어지는데 안부 능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위로를 한다.

안부 능선에서 바라본 마니산(摩利山·469.4m)

마니산은 강화섬에서 가장 높은 ‘머리산’이다. ‘마리(摩利)’는 ‘머리’, 즉 ‘으뜸’을 뜻한다.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있다. ‘한반도의 머리’가 마니산인 것이다.

그만큼 성스러운 곳이다. 일부에선 마니산을 ‘한반도의 명치’라고도 부른다.

명치가 막히면 사람은 기가 막혀 살 수 없다.

 

마니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 덩어리로 한반도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기(氣)가 센 땅이 있다. 지구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보텍스(Vortex)’라고 불리는 곳이 그렇다.

‘기 덩어리’가 소용돌이치는 땅인 셈이다. 세계적으로는 미국 애리조나의 세도나(Sedona)가 이름났다.

 

단군이 왜 이곳에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지 알 것 같다.

한 조사에 따르면 마니산 자기장 회전수는 65회나 된다. 46회전인 합천 해인사 독성각보다 훨씬 세다.

청도 운문사(20회전), 팔공산 갓바위(16회전)와는 비교가 안 된다.

 

기(氣) 내륙보다는 해안 쪽이 더 세며 한반도 남단인 전남 경남 제주 사람들이 기가 세다고 불리는 이유다

기가 세다고 무조건 좋지는 않다. 어느 땅이든 그 사람과 기운이 맞아야 편안하다.

맞지 않은 땅은 독(毒)일 뿐이다. 난리 때 피란처로 손꼽혔던 계룡산 신도안이나 풍기 금계동

같은 곳이 ‘기는 세지 않지만 평안한’ 땅이다.

길상산 정상이 1,5km 나 남았는데 자꾸만 무릎이 아파 휴식시간이 길어진다.

로프가 설치된 등로를 지나고...

224m봉(14:10)

두번째 헬기장(14:12)

능선으로 올라서니 가야할 길상산이 보이고 강화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선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병인양요와 강화도 조약 등 외세의 침탈에

강화의 民草들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화 앞바다는 여유롭기만 하다.

강화도 조약(1876년)  

명치(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근대 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자본주의화를 서두르면서 해외 진출을

시도하고 있던 일본은 자신들이 미국에게 당한 방법대로, 중무장한 굼한 운요호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 측의 포격을 유도하고 영종도를 습격하여 30여명의 조선주민을 살해하고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윤요호는 한반도 연안을 탐측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도 앞바다를 불법으로 침입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군이 방어를 하기위해 공격하자, 윤요호는 포격하며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한 뒤 인적 ? 물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그리고 1876년 1월 함대 6척을 강화도로 파견하여 조선에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때 일본은 조약 체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전쟁을 벌일 태세로 시모노세키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 결과 1876년 2월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일본보다도 후발국이라 규정하고,

서구 열강보다 먼저 조선에 대한 경제적 ? 정치적 우선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훨씬 불평등한 내용을 강요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모든 책임을 조선에 돌리며, 조선에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한다.

이 것은 서양 열강이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에 강요한 방식을 답습한 이니다.

 

 일본은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서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며

조선 정부는 일본의 행위를 야만적이고 침략적이라고 비난하며 이들과 대화하기를 거부했지만,

조선의 일부 관리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과

통상을 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이런 통상 개화론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으로

이들은 '개화 통상은 국가 부강을 위한 유효한 방책이며,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서양의 기술 습득과 그 이용이 필요하다' 고 주장하였다.

 

이런 대내외적 상황 속에서 강화도에서 두 나라 대표가 모여 조약을 맺었는데,

이를 강화도 조약(1876년)이라 하는데. 이 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조선에 불리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조약에는 통상 목적 이외에

정치적, 군사적 침략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조약에서는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밝히지만, 이건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만들려는

일본의 속셈이었고,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로이 측량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당연히

군사 작전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또한 치외법권을 인정해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법으로 그들을 심판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이는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도 일본의 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불평등한 내용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조선은 미국, 영국 등 서양 열강과도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해 문호 개방을 확대해 나간다.

거듭된 외국과의 조약과 문호 개방으로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에 강제로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서양 각국과 맺은 조약 역시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일수호조규 체결에 관한 조회(1976.2.2)

종이에 필사, 일본외무성사료관 소장

강화도 조약은 1876년2월 2일(양력 2월 26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조약이다.

조선 전권대신 신헌(申櫶), 부관 윤자승(尹滋承)과 일본 전권대사 구로다기요타가(黑田淸隆),

부사 이노우에가오루(井上聲)가 체결에 참여했다. 모두 12개 조항으로 주요 내용은 부산과 5도 연해안

2개 항구의 개항, 개항장 내 일본인 영사재판권 인정 등이다.

계속해서 마니산과 초피산은 산꾼 범여와 동행을 같이하고...

강화도는 갯벌 면적이 여의도의 52.7배로 국내에서 가장 넓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드넓은 갯벌이 있다.

우리나라의 갯벌은 규모가 클뿐만 아니라 생태적 가치가 높아 세계 5대 갯벌로 꼽힌다.

 

특히 증도, 순천만 등의 갯벌은 람사르 협약에 등록될 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다.

길상산이 가까워질수록 강화만의 갯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길상산이 0.7km로 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리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는

바람에 2번이나 휴식을 취한후에 정상에 다다른다.

강화지맥 2구간은 그래도 수도권과 가까워 그런지 등로는 뚜렸한 편이다

안부 능선을 타고 걷는데 그나마 능선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길은 걸을만하고 간간히  나타나는 전망대 암릉에서 강화만을 볼 수 있다.

강화지맥 남.북구간의 마지막 산인 길상산의 모습

3번째 헬기장(14:25)

3번째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헬기장에는 좌측으로도 뚜렸한 길이 있고 시그널도 달려 있으니 알바주의 할 것

나리꽃도 마지막을 응원한다

길상산(吉祥山:336.1m:14:40)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위치한 산으로 ‘江都誌’에 “부의 남쪽

30리에 있고 둘레가 30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 강화부 남쪽 30리에 있으며 주위가 13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되어 있다 ‘강화부지’에도 목장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와

‘대동지지’,‘조선지지자료‘에 지명이 기입되어 있다.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했다고 하는 일명 사자족애(獅子足艾)라고 부르는 약쑥이 많이 났다고하여

유명한 곳으로 길상산 동사면 장흥리에는 지금도 쑥밭다리라 부르는 자연마을이 남아있는데

화약을 만드는 약쑥을 많이 재배한 곳이라고  한다

1706년(숙종32) 길상면 선두리와 화도면 사기리 사이의 갯골 약 1km를 막아서

선두포 둑을 쌓아 이 일대 농경지를 개간했다고 전한다.

 

산 정상에는 2등 삼각점과 군 삼각점이 있고 데크목 전망대가 있어서 강화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길상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군부대에서 설치한 삼각점은 숲속 바위에 설치되어 있어 찾기가 싶지는 않다.
최근에 설치한듯한 길상산 정상 삼각점은 최근에 재설한듯 보이며 표지판은
정상 표지판 옆에 있고 삼각점은 데크목 앞에 있어서 처음에 표지판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데크목 정상에서 바라본 강화만의 갯벌

심한 운무로 인하여 사진이 상당히 흐릿하다

길상산 정상의 모습

길상산 정상에서 좌측 장흥리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길상면 장흥리(長興里)의 지명은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으로 장흥리라 하였다.

 일설은 자손이 번성한 지역이라 장흥리라 부른다.

무지 반가웠습니다... 어느 분이 걸어놓으셨는지...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오니 정면은 암릉으로 막혀있고 우측 편한길로 이어진다.

한참을 내려오니 우측으로 약수터 가는 길도 있고...

의좋은 삼형제(?) 소나무도 만나고...

등로 가운데 대한지적공사에서 설치한 지적도근점도 보이고...

묘지가 보이고...

무명봉이 나오고 11시 방향으로 오르니 차량이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초지처럼 넓은 임도가 나오고 우측에는 全州李公과 星州金氏의 묘지가 있고...

넓은 임도 우측에 있는 묘지

전주 이공과 성주김씨 부부 묘를 지나니 소나무 사이로 넓은 임도가 나오고...

넓은 임도를 5분정도를 편한히 걸어가다가 넓은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져 택리나루쪽으로 향하는데 길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조금만 방심하면 알바하기 좋은 곳이다.

소나무 숲을 좌측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다가 고도를 낮추니 간벌한 임도가

나오고 다시 직진을 하여 걷는데 조금전 오던 길과는 전혀 다르게 잡풀이 가득하다 

다시 뚜렷한 등로가 나오고 海松이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내려선다.

야트막한 능선에는 조그만 전망대를 만들어 놨고 전망대에 올라서니 강화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화만의 갯벌

海松나무의 도열을 받으려 택리마을로 걸어가는데 이곳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는다.

희미한 등로에서 우리는 우측으로 빠져 동검도가 보이는 택리마을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 왔는데 집에와서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니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와 양계장을

지나 소리체험 박물관으로 내려와서 택리마을로 했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능선상으론

선답자들이 맞은것 같은데 그쪽은 모두 막아놓아 길이 보이지 않아서 어느게 맞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보이지 않은 길을 찾아 내려오니 개새끼들이 지랄발광을 한다

개집을 피해서 주택으로 내려온다.

주택으로 내려서서 도로로 내려간다.

주택 아래로 내려서니 13번 군도가 지나가고 건너편엔 동검도가 보인다.

도로가에는 빈 공터가 수도가 있어서 이곳에서 염치불구하고 홀라당 벗고

등목과 머리를 감고 옷을 빨아서 입고 택리나루로 향한다.

13번 군도(15:40)

몸을 좀 씻고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다시 200m 정도 떨어진 택리나루로 향한다.

택리마을 버스 정류장

동검도(東檢島)의 모습

동검도(東檢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속하며 면적이 2.3㎡의 작은 섬이다.

동검도라는 지명은 옛날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한강 하류의 강화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두갈래의 뱃길이 있었고, 1872년 지방지도

「강도(江都)」편에는 ‘소검도(小檢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872년지방지도』

「통진부」편에는 동검도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동검도 안에

동검도산(東檢島山)이 있으며 ‘탁이나루’라는 나루터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옛날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선박들이 한강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염하 입구에 위치해 있다. 동검도는 이곳을 지나가는 모든 선박들을 검문하는 역할을

했던 섬이라고 하는데 강화도 삼산면에 위치한 서검도와 대비되는 섬이란다.

현재는 강화도와 제방도로로 이어져 거의 육지화되어 있으며 동검도 연안에 넓게

펼져진 갯벌에서 가리맛조개, 바지락 등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동검도 일대에는 갯벌생태체험장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13번 군도옆 둑방길에는 수준점이 설치되어 있고...해발이 6m란다

택리나루에 있는 꺼꾸로 된 카페로 향한다.

마지막 길

강화지맥 남.북구간의 마지막 종착지인 거꾸로된 집(16:00)

2구간에 걸쳐서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섬 강화의 지맥길 한 구간을 마치는

스틱을 접는다. 무더운 날씨에 무릎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고생을 하긴 했지만

또 한 구간을 마쳤다는 황홀한 희열을 맛본다.

섹스에서 느끼는 오르가즘과 전혀 다른 오르가즘을 느끼면서 남.북구간을

마치고  날씨가 선선한 9월경에 동.서구간을 마쳐야겠다.

4년 6개월을 매주 산에 미쳐 다니는 범여.

힘들다 하면서 다음주에 또 어느 산을  헤매고 있겠지 ㅋㅋㅋ

강화지맥 남.북구간을 마무리하면서 인증샷을 남기고...

거꾸로 된 카페 뒤에는 또다른 거꾸로 된 집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집만 거꾸로 된 것이 아니라 자동차도 거꾸로 매달려 있다.

원래 저 집 뒤로 내려가 갯벌이 있는 바다가가 강화지맥의

종착지이지만 갈 수가 없어서 이곳에서 마무리를 한다

후미에서 내려오는 동료산꾼들이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화도면 사기리로 가서 묵밥에다가 소.맥을 말아서 오랫만에
만난 동료산꾼들과 회포를 풀고 초지대교를 넘어서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