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3년 9 월 1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상당히 더움
☞ 산행거리: 도상거리 18km+어프로치2.8km (식사 왕복4km) = 24.8km / 10시간 10분 소요
☞ 참석인원: 친구 淸眼과 함께
☞ 산행코스:강화농업기술센터-한수농장-전망대바위-덕정산-해병대 훈련장-진강산
카톨릭대 갈림길-조산마을-17번도로- 조산초등학교-들판-인공수로-86m봉
폐헬기장-우물고개-새부천 수양관 갈림길-마니산-참성단-마니산-암릉구간
469m봉-함허동천 갈림길-314m봉- 안부-전망데크-진개갈림길-물탱크-동막해수욕장
분오리돈대
☞ 소 재 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양도면, 화도면
벌써 9월... 한일도 별로 없는데 벌써 9월이라니 마음만 급해진다.
일찍 집에오니... 아무도 없다. 마눌은 친구들과 무등산 가버리고, 아들은 휴가중이고,딸래미는 토욜 친구집에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신촌 오거리(05:40)
개포동집 앞에서 05시에 472번 버스를 타고 한번만에 신촌오거리 도착하니 05시 40분이다.
지난번에 아침식사 때문에 고생한 경험 때문에 주변에 아침식사를 하려고 주변을 두번거리다
언덕위로 올라가니 24시간 장사를 하는 밥집이 서너군데 있어서 설렁탕집으로 들어간다.
설렁탕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시켜서 설렁탕 한그릇을 먹고 강화가는 버스를 타러가는데 속이 더부룩하다.
아무래도 난 육식이 몸에 맞질 않는것 같다... 채식(菜食)이 내 몸에 맞는 느낌이다.
지난번과 달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려는데 저만치 강화가는 3000번 버스가 가려고 한다.
죽기 살기로 뛰어 버스에 오른 다음에 깊은 잠에 빠졌는데 이른 아침에 핸드폰이 울린다.
김포사는 친구 淸眼이 오늘 산행에 동참하겠다고 하면서 어디냐고 묻느다.
강화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강화시외버스 터미널(07:20)
강화터미널에서 바라본 강화산성 남문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이다. 경기도에 인접하고 지형학적으로따라서 역사 유적지 곳곳에 산재되어 섬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나 진배없는 곳이다.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부근리 고인돌” 과
한국 최초의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다음가는 우리나라 종마의 양육지역으로도 유명하다
김포에서 오는 친구가 늦는 바람에 터미널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여기저기가 다 문화재처럼 보인다... 4번째 오는 산행인데 범여는 강화의 매력에
푹빠지는 느낌이다. 강화지맥이 끝나고나서 나중에는 쉬엄쉬엄 둘레길이나 걸어볼까?
고려 고종이 몽골로 불모로 잡혀간 왕자를 이 산에 올라가서 그리워했다는 견자산도 보이고...
농업기술센터가는 버스(07:50)
친구 淸眼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앞에 있는 버스는 가버리고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 37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이곳 버스는 안내 멘트가 없고 승객이 내릴 장소에 벨을 눌러야만 서고 안그러면 그대로
달려가기에 서울버스와는 달리 길을 모르는 사람은 상당히 불편하다
강화농업기술센터(08:10)
버스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길을 건너서 덕정산으로 향한다.
淸眼과는 3년만에 같이 산행을 하는데 오늘은 좀 걱정이 된다.
사실 불알친구인 淸眼과 같이가긴 하지만 조금은 불안하다... 가야할 길이 만만찮아
물어보니 걱정하지 말란다... 느낌상 중간에서 탈출하려는 모양이다
이 친구와는 추억이 참으로 많다. 10여년 전 추석날 오후 무작정 베낭을 메고 덕유산
아래에 민박집에서 자고 향적봉 한바퀴를 돌고 오기도 하고 서울살 때 일욜마다
북한산 가는 바람에 1년에 북한산만 40번 이상 다니면서 북한산의 매력에 푹빠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도봉산의 아련한 추억(?) 등등 참으로 많이 다녔는데 김포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나홀로 대간길에 들어서게 만든 장본인이자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
이 친구 땜에 백두대간과 정맥, 기맥, 지맥을 알았으니 고마워해야겠지 ㅋㅋㅋ
강화농업기술센터 입구
농업기술센터 도로를 건너서 좌회전하여 마을도로로 걷는데 좌측 포도밭에는 포도가
탐스럽게 열려있고 나락논에는 벼가 익어가고 있다
한수농장 입구에서 직진을 하여 덕정산으로 향한다.
덕정산 오름길 좌측 언덕에 강화지맥 산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지퍼모양 조형물도 보이고...
햇빛이 나면서 날씨는 상당히 덥다. 능선 안부까지 오르는데 꽤나 땀을 흘려야 했다.
능선 안부에서 좌측으로 가다가 삼거리를 만나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조그만 영지버섯을 만난다.
운지버섯도 보이고...잠시후 전망대 바위에 오른다
전망대 바위에 오르니 오늘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석모도가 손에 잡힐듯 가깝게 보인다.
오늘 가야할 진강산도 보이고...
지난 5월에 걸었던 퇴모산, 혈구산도 한 눈에 들어오고...
강화군 양도면과 석모도의 모습
전망대 바위에서 친구가 가지고 온 쮸쮸바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 5분정도 휴식을 취한다
한 여름이라 우거진 숲으로 인하여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덕정산 오르기 직전에 만난 해병대 부대장의 경고판
덕정산(德政山:325m:09:20)산 정산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해병대에서 사격 훈련때 표시하는 빨간 깃발과 부대장 경고판만 있다.
그러나 능선 줄기로 봐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진강산과 마니산을 거쳐 분오리돈대로 이어지는 뚜렷한 산줄기가 있고
직진으로 가면 내가 오늘 진행하는 강화지맥 남.북구간으로 정족산과 길상산을 거쳐 택리나루로 가는 길이다.
덕정산 정상에서
덕정산 정상에서 바라본 혈구산과 불은면의 모습
강화지맥은 섬을 지탱시키는 근간을 이루는 만큼 강화산맥으로 지칭하여도
무방하지만 산의 높이와 거리 등에서 난이성이 평이한 때문인지 산맥보다는
지맥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흔한지라 '강화지맥'으로 한다.
강화도 최북단의 철곶에서 시작되는 강화지맥은 남으로 뻗어가며 별악봉과
봉천산으로 연결되고 다시 강화도의 중심축인 고대산과 혈구산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덕정산으로 이어지다가 좌,우로 분맥하게 되는데,
좌로는 정족산과 길상산으로 연결되며 택이마을에서 멈춘다.
'右'로는 진강산과 진정한 단맥은 아니면서 마니산과 연결되어 분오리돈대에서 멎는다.
원래 섬이였던 마니산이 고려산 혈구산을 지나와 덕정산에서 정족산과 진강산으로 갈라진다.
그러나 마니산이 강화섬과 연결된게 수백년 고려시대부터니
진강산에서 마니산으로 지맥길은 아니지만 그길을 이어주는게
수백년을 뭍으로 이어놓고 서로 바라만 보고있는
따라서 진강산과 마니산은 한 줄기로 연결된 산줄기는 아니지만
강화도를 전관하는 본질에서 자연스레 포함시키는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오늘 그 길을 걸어보기로 하고 이곳 덕정산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을 축하라도 해주듯 야생화가 활짝 피어있다
가야할 진강산의 등로
길정저수지와 해병대 훈련장의 모습
해병대 훈련장으로 내려가는데 이곳은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지역이라 잡풀이 자라서 내 키보다도 더 높아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기만 하다
잔대도 산꾼을 반기고...
한많은 며느리 밥풀도 오늘만큼은 산꾼 범여를 응원한다.
길은 잘 보이지 않고 길은 내가 만들어 가야한다.
초소를 포스트 삼아서 걸어간다
해병대 초소(09:45)
지나온 덕정산을 뒤돌아 보고...
나는 시간이 지체되어 마음이 급한데 뒤따라 오는 淸眼은 음악을 들어면서 여유로운 牛步 걸음이다.
그러면서 뭐가 그리도 급하냐고 나를 나무란다... 산은 즐기면서 걷는 거라고...
나도 알어 근데 갈길이 먼데 어떡하란 말이야
훈련장 안에 있는 군사도로(09:50)
풀이 너무 자라버린 군사도로를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이곳은 벌목을 하여 좌측으로는
해병대 훈련장과 길정저수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양도면의 전경과 석모도가 보인다.
이곳은 길이 없다시피 하여 내가 길을 만들어서 가야하는데 한참을 걸어가니 잣나무가 심어져
있는 진강산 올라가는 임도가 나타난다.
오름길에서 반가운 꼬리표를 만나는데 아마 백두대장이 달아논 모양이다.
귀한 능이버섯도 만나고...
임도(10:20)
임도에 도착하는데 친구가 영 따라오질 않는다.
이곳 바위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잠시 도착하여 빨리 간다고 투덜댄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두유 하나를 먹고는 진강산으로 향한다.
지금 진강산 아래에는 해병대가 아닌 잡초가 점령하고 있다.
벤취를 지나서 진강산 정상으로 향한다
진강산 정상에서 오늘 산행중에 사람을 만난다.
진강산(鎭江山:443m:10:45)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도장리·삼흥리·하일리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강화에서 3번째로 높은산이다. 조선시대 진강현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 정상부에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강도지와대동여지도에 진강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가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여지도서에도 산 이름이 나오며, 강화부지에는“강화부성 남쪽
삼십리에 있는데 산등성이가 낙타 등과 같다. 그 아래로 촌락이 번성하여 옛 진강현이 있었다.
또한 산에목마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자료에
“진강산 봉수는 동쪽으로 대포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망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고려 초 이 일대를 이르던 황골(강주)에 현읍을 옮기고 ‘강주의 진산’이라고 하여
고려 21대 희종의 무덤인 석릉(碩陵),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
22대 강종의 왕비인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坤陵) 등
고려 고종의 홍릉을 제외한 왕실의 무덤이 모두 모여 있다.
고려시대 이래로 유명한 진강목장이 있고, 조선조 효종 임금이 타시던
명마 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진강산 정상 삼각점
친구 淸眼의 모습
화도면과 강화 앞바다의 모습
가야할 마니산과 참성단의 모습
진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석모도의 모습
전망바위에서 폼을 잡았는데 자세가 영 엉성하다
산불예방 무인 감시카메라
혈구산과 퇴모산도 보이고...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가시거리가 엄청나게 길다.
얼마전 북녘 동포가 귀순하였다는 교동도도 보이고 그너머 북한땅도 보인다.
이곳은 개똥쑥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난 개똥쑥을 모르는데 이게 개똥쑥이란다.
이건 조금전 지나온 해병대 훈련장 능선에 많이 보이던데...
진강산 정상에서 다시 되돌아와서 벤취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가야할 마니산의 모습
강화만의 모습
능선을 내려오니 벤취도 보이고...
이정표(←정상 0.3km, ↑ 카톨릭 대학교 →가릉 1.7km )에서 가릉 방향으로 간다
마니산 앞 양도면 들녘
예전에 저곳은 바다였는데 고려시대부터 간척지를 매립하여 들판이 되었단다.
그러면 지맥을 타는 산꾼에겐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따라 의미없는 걸음이 아닌가?
그런데 난 왜 이 길을 걷고있단 말인가?... 의문을 품고 길을 걷는다. 그냥 좋아서...
전망이 기가 막히는 멋진 암릉구간을 지나고...
친구가 자꾸만 뒤쳐지기에 벤취에 앉아 커피한잔 끓여서 마시고
골뱅이다가 맥주+소주 말아서 한 잔을 마시는데도 친구는 오질않고
전화도 되질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베낭을 꾸리고 마니산으로 향한다.
갈림길(11:35)
이정표(←정상 0.9km 가릉 1.1km →)에서 길이 뚜렸한 가릉가는 길을 버리고
길이 아예 보이질 않는 능선을 좌측으로 치고 조금을 가니 뚜렸한 길이 나온다.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가니 파란지붕이 보이면서 조산마을이 나온다.
강화 가릉
고려 제24대 원종(재위:1259∼1274)왕비 순경태후의 릉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妃)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고종 31년(1244)경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원종 3년(1262)에 정순왕후에
추봉되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이 릉의 봉분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진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강화군에서 보수.정화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능은 능내리 마을을 지나 약 500m 정도 산길로 가면 있다. 능은 전체 3단으로 되어 있다.
1974년 보수, 정비공사 당시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강화군에서 보수·정화하였다고 한다. 상계부분의 봉분은 활개없이 원형봉분만 있는 상태이며,
곡장 대신에 봉분 주위에 계체석으로 능역을 표시만 해 놓았다.
원래 봉분에 복토 작업을 한 관계로 석수가 봉분 뒷편에 머리모양만 보인다.
중계에는 묘표와 좌우에 각각 문인석이 있다. 묘표는 중앙에 있으며 원두형이다.
묘표에는 ‘고려왕가릉(高麗王嘉陵)’이라 새겨져 있다.
기존 조사에서 문인석은 좌우에 각각 2쌍씩 있다고 하였데 지금은 1쌍씩만이 있다.
문인석은 홀대를 약간 좌측으로 비켜 잡고 있으며, 고려후기 조선전기 양식이다.
하계에는 자연석으로 신도(神道) 형태만을 만들어 놓았다
강화군청 홈페이지 인용
조산마을 입구(11:55)
등로에서 내려와 파란지붕이 있는 집을 우회하여 마을 도로로 내려오니 좌측에
멋진 한옥이 보이고 마을길로 계속 걸어간다.
마을길로 계속 내려가니...
도로 초입 좌측에 삼랑성 쌀보리밥집이 나오고...
17번 도로(12:00)
조산초교쪽으로 가려는데 淸眼한테서 전화가 온다.
어디냐고 물으니까. 허브까페 지나서 짜장면 집이란다
이런... 이 친구는 진강산 아래 이정표에서 길이 좋은 가릉 방면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2km 가량을 걸어서 탑재 삼거리 방향으로 간다.
퇴약볕에 도로를 따라서 탑재 삼거리로 가는데 더워서 미칠것만 같다.
가는길에 우측에 조선조 태종의 넷째 왕자(세종의 동생)인 예천군
묘비와 재실이 있는 길을 지나고 로망스 모텔을 지나 탑재 삼거리에 도착한다
탑재 삼거리(12:20)
탑재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마니산 방면으로 가니 짜장면 집에서
친구가 나를 기다리는데 이 친구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왜 하필이면 좋은 길 두고 길이없는 곳으로 다니냐고 힐난을 한다
2,000원짜리 짜장면집
탑재 삼거리에서 좌측 마니산 방향으로 300m 정도를 가니 우측에
옛날 손짜장집이 나오는데 한그릇에 2,000원이다.
우리동네 6,000원짜리 짜장면보다 더 맛이 있다.
그런데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음식값을 선불로 내고 한참을 대기한
다음에야 짜장면 맛을 볼 수가 있었다.
친구와 둘이서 짜장면에다가 션한 맥주 각 1병을 마신 다음에
셀프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다시 조산초교쪽으로 향하는데
친구가 더운데 뭔 산이냐고 하면서 강화 바닷가에 가서 회에다가
소주나 한잔 기울이자고 유혹을 하지만 과감하게 뿌리치고 지맥길을 나선다.
다시 17번 국도(13:30)
도로를 따라서 조산초교 방향으로 걸어간다.
조산초교(13:32)
조산초교에서 100여m 를 가다가 우측 포장도로로 꺽어진다
사실 여기서부터는 山自分水嶺 원칙에 따라 지맥길을 걷는 산꾼들에겐
사실상 의미없는 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이전엔 이곳이 바다였으니까.
양곡창고 같은 건물을 끼고 계속 걸어간다. 커다란 건물을 끼고 직진을 하니... 길 좌측에는 유럽풍을 연상케하는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지나온 진강산의 모습 가야할 마니산을 바라보며 옛날 바다였던 이곳을 지나간다 농로 끝부분에서 친구 淸眼은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자택인 김포로 가기위해문산리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난 친구와 작별을 하고 좌측 농로를 따라서 86m봉으로 향한다.
오랫만에 같이 산행을 하여 고맙기만 하다. 거기다가 맛있는 짜장면에다가 맥주까지...복받을겨
가야할 능선의 모습
농로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수로에다가 조그만 다리를 건너서 다시 좌측으로 꺽어진다
다리 좌측 수로에는 수초가 가득하고 지나온 진강산이 작별 인사를 한다.
우측 수로에는 물이 보이고 가야할 마니산이 빨리오라 손짓하고...
이름모를 보라색 수초꽃이 피어있고 갑자기 물뱀 한마리가 내 앞을 지나간다
다리를 건너 검은 비닐막을 쳐놓은 농가 좌측으로 꺽어진다.
농가를 지나니 Y자의 도로에서 우측으로 간다.
약 2.5km 정도를 들판을 걸어나와 이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진강산이 아쉬움을 표시한다.
등로 초입(14:00)
등로에 진입하여 조금을 오르니 노병석님의 묘지를 만나는데
묘비명에 부인 2명도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복도 많으셔
등로는 양호하다.
우측으로 파란색 물탱크도 보이고...
가야할 마니산과 문산리 전경
우측으로 멋진 전원주택이 나오고...
전원주택 옆에 개집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개를 묶어 놓질 않아서 따라오면서 산꾼 범여를 위협한다.
겁도 약간 나지만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니 도망을 간다.
전원주택에서 조금 내려오니 잡풀이 가득한 안부가 나오는데
덕달마을과 문곡마을을 잇는 희미한 고갯길이다.
넘어진 나무는 산꾼에게 겸손과 下心을 가르치고...
낮은 오르막을 오르니...
등로 가운데 삼각점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지도상 86m봉이다
86m봉(14:15)
86m봉을 내려오는데 이곳부터는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강화지맥 남.북구간은 제적봉에서 덕정산을 거쳐 택리나루로 잡기에
산꾼들은 이곳을 관심조차 두지 않아서 길이 아예없고 길을 내가 만들어 가야한다.
86m봉 내려오는 우측에는 淸州韓氏 종중묘와 영묘단이 있고...
내가 개척한 강화지맥길 ㅋㅋㅋ
그와중에도 기맥, 지맥길에서 자주 만나는 시그널을 본다... 반갑기 그지없다.
길이없는 곳을 헤치고 오르니 공동묘지가 나온다.
공동묘지(14:20)공동묘지를 바라보며 우측 묘지옆 등로를 타고 내려간다
묘지의 모습
안부가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데 이곳은 아예 길자체가 없다.
조그만 엄나무가 많이 보이고...
폐헬기장폐헬기장을 지나 묘지에서 바라본 초피산의 모습
초피산(椒皮山:242m)은 숙피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산초나무 ‘초(椒) ’
자를 숙(菽)으로 잘못 읽어 숙피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다른 이름으로 문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정한 무명봉 2기를 만나고...산도라지도 만나고... 너무 어려 채취를 포기한다.
영지버섯... ㅋㅋㅋ 이쁜넘들
잡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산을 빠져 나오니 우물고개가 보인다
우물고개(14:30)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에 있는 고개로 18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이 고개의 유래에 대한 자료는 찾을수가 없다.
우물고개 찐빵파는 아줌마
강화 할머니 찐빵가게라는데 할머니는 고사하고 미시아줌마 같구먼
아무도 다니지 않는곳에서 혼자 내려오니 나를 약초꾼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차가운 냉수 한그릇을 준다. 정말 고맙기만 하다.
내가 할머니 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손주도 있고 나이가 62세란다.
62세가 나이라고 요즘 우리동네 경로당에는 75세도 심부름해야 하는데...
생활력 강한 젊은 할매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마니산으로 향한다.
강화도에는 넉살 좋은 광해년(강화년)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광해란 강화를 강화 사투리로 발음한 것으로 흔히 강화 여자가
부끄럼을 타지 않고 검질기다고 하여 체면과 염치를 모르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암 강화, 숫 통진 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강화 처녀가 김포 땅으로
시집가면 잘살지만 김포처녀가 강화 땅으로 시집가면 잘못 산다는 말이다.
그만큼 김포처녀보다 억척스럽다는 이야기다.
그런 연유로 한 시절 전만 해도 강화 사람들은 김포에서 행세
깨나 하는 집안의 처가는 강화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피력했다고 한다.
우물고개를 건너 넓은 임도로 10m 정도를 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멋진 바위를 지나니 Y자의 갈림길이 나오지만 계속해서 직진하여 오른다.
마니산 오르기 직전에 우측으로 멋진 조망을 가진 암릉이 나오는데오늘 내가 지나온 등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한번을 밀어부치니 마니산으로 오르는 마니계단이 나온다.마니산 정상에 오른다... 25여년만에 마니산에 올라와본다.
마니산 헬기장에 오르니 온 천지가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강화의 멋진 山河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강화뿐만 아니라 북녘땅인
개성의 송악산도 보이고 인천시내와 영종도, 용유도가 한 눈에 보인다.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가시거리가 멀리 보이는 건 그리 많지 않으리라
마니산(摩尼山:455m:15:40)
마리산(摩利山)은 범어(梵語) 태양빛(日光)을 음역한 마리지천(摩利之天)이
거주한 산으로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킨다는 뜻이다.
이 산은 마리산, 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고어(故語)로 머리를 뜻하니
강화사람들이 마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뜻한다.
게다가 산 정상에는 하늘의 제(祭)를 지내는 단(壇)이 있으니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뒤에 마니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한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비구니를 뜻하는 니(尼)자를 붙혀
마니산(摩尼山)으로 이름이 변형되어 버렸다.
그 후 1995년 마리산으로 공식 지명이 원래대로 복원되었으나 아직도
인터넷을 비롯한 대다수의 자료에서 일제의 잔재인 마니산의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뭇 산의 머리되는 성산(聖山), 마리산
이 강화도 서남단 바닷가에 밝달임금, 즉 단군이
삼신하느님(삼위일체 하나님)께 천제를 올렸던 마리산(摩利山)이 자리하고 있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인 것이다.
마리산은 마치 자로 잰 듯 백두산과 한라산의
꼭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해준다.
마리란 머리의 옛 말로서 으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곧 마리산은 우두머리산인 것이다.
더구나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마리산은 모든 산의 종산(宗山)이 되고 성스러움을 상징한다.
마리산에는 박달나무가 장생하며, 여기서 생산되는 마리산 쑥은 약효 좋기로
유명한 강화약쑥 중에서도 가장 이름이 높은 명약(名藥)으로 손꼽힌다.
이곳 강화도에서 약 20여년 전부터 강화도 주민을 중심으로
<마리산 이름 되찾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 요지는 중앙지명위원회에서 공표된 바 있는 ‘마니산(摩尼山)’이란 지명을
원래의 이름인 ‘마리산(摩利山)’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산은 원래 ‘머리산’의 뜻으로,
뭇 산의 머리가 되는 숭고하고 거룩한 성산(聖山)을 상징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왜?
마리산 정상의 천제단에서 이 산은 우두머리산, 곧 마리산인 것이다.
이를 『고려사』에는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岳)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실록』에서도 마리산(摩利山)으로 적고 있다.
마리산(摩利山) 남쪽에 이궁(離宮)을 창건하였다.
(『고려사』, 고종 46년(1259년)
강화부 마리산(摩利山) 참성대에서 종소리같은 울음소리가
10여리까지 들리더니 얼마 안되어 큰돌이 무너졌다.
(『세종실록』, 권 31)
또 우리 민족이 동물의 수를 셀 때
‘마리’라는 말을 써 온 데서도 어원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納采用雁一頭, 납채용 기러기 한 마리
(『선조실록』. 35년)
黃牛一首, 누런 소 한 마리.
(『만기요람萬機要覽』)
이처럼 ‘마리’는 ‘머리 두(頭)’나 ‘머리 수(首)’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마니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강화의 모습
마니산에서 멋진 仙景을 감상하고 지맥길에서 조금 떨어진 참성단으로 향한다
참성단 가는 길에서 만난 표지판
참성단(塹城壇)이란 성(城)을 파서(塹) 단을 쌓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3m의 높이로 쌓은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제단으로 오르는 스물 한 개의 계단은 상하 두 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 계단은 네 개, 윗 계단은 열 일곱 개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 5.1미터, 너비 16평 정도의 공간에 돌로 쌓은 제단이 위치하고,
한켠으로는 향로가 놓여져 있는데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릴 때 향로에 불을 지펴
칠선녀로 하여금 그 불을 이전하게 했다고 한다.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시대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성단은 원방각(圓方角)의 형태로 조성되어, 돌로 쌓인 제단 아래 부분은 둥글게, 윗 부분은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상은 우리 선조들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원은 하늘을, 네모는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 말 김교헌(金敎獻)이 지은 『신단실기(神檀實記)』에는
“하늘은 음(陰, 땅)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 하늘)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壇)을 물 한가운데 있는 산에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단실기(神檀實記)』는 『동사(東史)』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마니산(摩尼山)은 강과 바다의 모퉁이로서, 땅이 한적하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깊어서, 신명(神明)한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자리를 만들어서 상제께 제사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에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잡아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비롯,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의 제단으로도 활용되어,
임시제(臨時祭)와 정기제(定期祭)의 제사가 행해졌는데,
임시제는 가뭄이나 전쟁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러진 것이며, 정기제는 4월과 8월에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
그 외에도 마리산에 얽힌 천제의식 및 상제문화의 흔적들이 여러 문헌에서 나타난다.
고구려 19대 광개토경평안호태황(361년)은 순찰할 때에는 마리산에 올라 친히 삼신께 제사를 드렸다.
을지문덕 장군은 해마다 3월 16일에는 강화 마리산으로 달려가
제물을 차려 경배하였고, 돌아와서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 하느님께 제사를 올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태종이 이곳까지 거동하시어 승지로 하여금 이곳 사당 밑에 있는 제궁에서 쉬면서 초례를 봉행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인조 17년(1639)에 마리산 참성단을 수축하고 사당을 세워 삼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강도지(江都志)』)
역대 제왕들 뿐 아니라 나라의 관리와 장수들도 참성단에서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하느님께 제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나라의 안녕을 위해 참성단에서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참성단과 유사한 유적으로 인근에 있는 삼랑성(三郞城)에 관한 기록도
좋은 전거(典據)로 꼽힌다. 삼랑성은 강화에 있는 또 하나의 단군 유적으로,
『환단고기』에는 단군께서 명을 내려 쌓았다고 전해지는 산성이며,
『고려사』에 나오는 관련 기록으로는 ‘단군이 세 아들로 하여금 쌓게 했다’는 대목이 나타난다.
그리고 근래 북한의 화성동에서 발견된 제단 유적을 단군시대의 것으로 판단한 근거가
참성단과의 외형적 유사성이었다고 하니,
이를 통해서도 참성단의 역사적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가 참성단을 천문대로 왜곡해 진면목을 가리고 오랫동안
방치해 오다가, 광복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담고 있는 대표사서 『환단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져 온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초대 단군임금께서 단기 51년 참성단 축성을 명하고
3년 뒤에 직접 이곳에 임하시어 천제를 올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근 4천3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전해 내려온 참성단은 여러 차례 보수 및 중수되는 가운데,
이후 고려 원종 11년(1270년), 조선 인조 17년(1639년)에 제단을 고쳐 쌓았고,
숙종 43년(1717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당시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바위에 새긴
중수비(重修碑)는 참성단 동쪽 아래에 지금까지 현존해 오고 있다.
강화를 제외한 남한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각별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근 4천3백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고(古) 유적의
참성단 정상에서 바라본 장봉도와 용유도의 모습
참성단에서 바라본 화도면 들판
•지정 번호; 천연기념물 502호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55 마니산 참성단 내
•지정일; 2009년 9월 16일
•분류; 노거수
•내용;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의
다시 되돌아 온 마니산(15:58)
원래의 이름은 두악(頭嶽)으로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부렀다
특히 마리란 머리를 뜻하는 고어로, 강화도뿐 아니라 전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숭앙되어왔다.
본래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강화도 본 섬과는 떨어진 곳이었으나 가릉포(嘉陵浦)와
선두포(船頭浦)에 둑을 쌓은 후부터 육지화되었다. 일대의 산지들은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형성된 낮은 구릉성 산지이다. 북쪽 사면을 제외한 전 사면이 거의 급경사를 이루며,
기반암은 화강암·결정편암이다.
북쪽 기슭에는 화강암반이 비교적 넓게 분포하며, 풍화된 사질토와 암괴가 양파 껍질처럼
분해되는 박리현상(剝離現象)이 나타나고 거대한 널빤지 모양의 암편이 나타난다.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산정 부근은 경사가 심하며, 서해안에 산재한 섬과 김포평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니산 헬기장에서 마니계단을 내려와 직진하여 분오리돈대로 향한다
참성단(인천시사적 제136호)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였다.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정사오십년이라 홍수범람하여 민부득식일세
丁巳五十年 洪水汎濫 民不得息
제명풍백팽우하여 치수하시고
帝命風伯彭虞 治水
정고산대천하여 이민편거하시니 우수주에 유비하시니라定高山大川 以便民居 牛首州 有碑
무오오십일년이라 제명운사 배달신하여
戊午五十一年 帝命雲師 倍達神
설삼랑성우 혈구하시고
設三郞城于 穴口
축제천단어마리산하시니 금참성단이 시야니라
築祭天壇於摩璃山 今塹城壇 是也그런데 비문의 글짜가 너무 마모되어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다
참성단 중수비 안내판돌아보건대 수천년이 지났으니 풍우에 씻기고 깍여 서북 양면이 반쯤 무너졌고
동편 계단이 기울어져 이 고을 여러 어른들이 만나면 개탄함이 오래 되었다.
이즈음 못난 내가 이 곳의 유수로 부임하여 이해 봄에 고을을 두루 살피게 되어
이 산에 오르고 분연히 참성단을 중수할 뜻이 생겨 선두포 별장 김덕하와
전등사 총섭 승신묵에게 일을 주선케 하여 다시 쌓게하니 열흘이 채 되지 아니하여 다 마쳤다.
아~ 무너진 곳을 고치어 옛 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고을을 지키는 자가
당요와 같은 시대에 나시어 손수 단을 쌓아 청결히 하늘에 제사하시던 곳임에랴!
수천년 후의 후손들이 이 곳을 바라보면 반드시 경건한 마음을 일으킬 것인즉
어찌 바로 고치지 않을 것인가?
신묵이 이 일의 지말을 적어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청하므로 이 글을 써서 남긴다.
정유(丁酉, 1716)년 단양월
행(行) 유수 최석항(崔錫恒) 기(記)
469m봉 기준점
장봉도의 모습
함허동천(涵虛洞天)의 유래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 마니산 계곡에 있는 함허동천은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摩尼山;469m)
정수사(淨水寺)를 중수하 고 이곳에서 수도 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涵虛)를 따 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도 기화가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 있 는데 "구름 한점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곳" 이라는 뜻이다. 함허동천은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함허대사가 이곳을 찾아"사바세계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 자가 가히 삼매경에 들수 있는곳" 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계단의 명칭이 114계단인데 함허동천 갈림길에서 우측 정수사로 향한다.
정수사(淨水寺)
강화도 남단에 해발 467m의 높이로 우뚝 솟고, 동서로 약 20리에 걸쳐 나래를 펴고 있는 마니산.
그 마니산 동쪽 기슭에 천년 고찰 정수사가 고즈넉히 안겨 있다.
전등사에서 참성단으로 이르는 산길에 있는 조그마한 절로 사찰이라기 보다는 암자와 같은 성격이다.
사찰의 입지로 서는 드물게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여,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사찰 영역에 도달한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마니산을 참배한 회정대사는 동쪽의 지형이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三昧精修)에 들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했다 한다고 여러 책들에서 말하고 있지만,
이같은 기록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정수산영각중건기(淨水山靈閣重建記)'(1903년의 기록임)에는 <창건 년대를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 시대 창건설은 전설이 아니었던가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강도지 (江都誌)'에도 정수사(淨水寺)의 창건을 어느 때 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 창건설로 보고 있는 것이 현재로선 유력한 듯 하다.
이를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수했는데, 법당 서쪽의 맑은 샘물이 솟아나
사명을 정수사(淨水寺) 라 고쳐 부르게 된다. 헌종 14년(1848)부터는 한때 법진, 만홍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살면서 중수, 중창을 거듭했고, 탱화를 봉안하는 등 절을 가꿨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가 있고, 근년에 건립한 탑 1기가 법당 앞에 안치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 안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1848년 무렵에 조성된
아미타불 후불. 지장. 칠성 탱화각 있고, 삼성각에 1878년에 조성한 칠성. 독성. 산신탱화가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평대군이 썼다는 법화경. 은중경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정수사 대웅전 문이 특이한 문양인데, 좌우 칸이 평범한 우물살문인데 반해
판목에 투각으로 새겨진 꽃나무살문으로 매우 화려하다. 문살의 꽃항아리 무늬는 국내유일의 사례인 것 같다.
대사의 속성은 유(劉). 이름 수이(守伊)이며, 법명은 기화(己和) 법호는 득통(得通)이며 당호는 함허(涵虛)이다.
'금강경오가해설의' '현정론(顯正論)'등을 저술하시고 중생교화에 힘쓰셨다.
1420년 세종대왕의 초청을 받아 어찰에 머물다가 4년 뒤 사퇴한 후 이곳 정수사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문경 봉암사에서 입적하셨는데 후학들이, 이곳 외에 '가평 현등사' '문경 봉암사'에도 부도를 세워 대사의 덕화를 기리고 있다. (사진인용: 강화로)
암릉으로 내려와서 뒤돌아 본 모습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데 아예 길은 보이질 않는다.
10여분을 내려가니 원형 철조망과 그린색 헨스로 막아놨다.
등로를 우회시킨 주범이 이것이었구먼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드넓은 갯벌이 있다.
우리나라의 갯벌은 규모가 클뿐만 아니라 생태적 가치가 높아 세계 5대 갯벌로 꼽힌다.
특히 증도, 순천만 등의 갯벌은 람사르 협약에 등록될 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다.
길상산이 가까워질수록 강화만의 갯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등로 중간중간에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고...
지나온 469m봉은 자꾸만 멀어지고...
종착지인 분오리돈대와 동막해수욕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돈대는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넓으며,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평면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4곳에 문을 설치한 외곽 포대로, 관아에서 돈장을 따로 두어 관리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띠었다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명이 동원하여 쌓았다.
분오리돈대에서 바라본 동막해수욕장
옷이 땀에 흠뻑 젖어서 동막 해수욕장이 있는 샤워장에 와서
1,500원을 주고 샤워를 하고나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택시를 운행하는 친구를 소개하여 주는 바람에 동막 해수욕장에 있는
공영샤워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캔맥주 하나 마시는 사이에 택시가
도착하여 편하게 강화터미널로 와서 무사히 집으로 귀가한다.
산까치님!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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