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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3

by 범여(梵如) 2013. 8. 22.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3

 

청정(淸淨)한 마음은 바로 깨끗한 마음이고 훌륭하고 수승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매우 존귀한 마음입니다.
무엇이 가장 청정한 마음이겠습니까.
그것은 상을 떠나 보내고머무르지 않는 마음, 무상 무주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청정해진 마음으로 선(善)을 행합니다.
있는 그대로 없고 없는 그 즉시로 있는 텅 빈 마음으로 선법을 닦습니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선근을 심습니다.
또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덜어내어 모든 법이 평등해진 그 자리는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긴것은 긴것에 짧은 것은 짧은 것에 맡기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바로 보리심인 것입니다.
육도 만행(六度 萬行)을 했으되, 텅빈 마음으로 행하여 했음도, 하지 아니하였음도

다 떠나 보내면 그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復次須菩提야 是法이 平等하야 無有高下일새 是名阿縟多羅三藐三菩提니
부차수보리   시법   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시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음으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시법(是法)이 평등(平等)하여 무유고하(無有高下)"라.

 그냥 우리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하나도 힘줄 게 없습니다.
그냥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어찌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이 인식하는 세계는 대개가 다 상대적(相對的)입니다.
나와 너, 남녀노소, 장단고저, 동서남북, 부처와 중생으로 모든 것을 양분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차별되는 저 너머의 세계에는 이러한 상대가 끊어진 절대(絶對)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로 통일된 진실 생명 자체입니다.
통일되어 있으니 차별이 생길 리 없고 오직 평등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취사 선택할 것이 없습니다.
좋다고 하여 그것에만 애착을 가질 것이 없고 싫은 것이라고 해서 배척할 것도 없습니다.
육진 경계에 끄달려 편견을 가질 것이 없는 것입니다.
편견이 없으면 편벽이 사라져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가 크든 작든, 또 파도가 치든 고요하든 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고 평등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을 마음의 원리에서 생각해 보면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수없이 많은 의식 작용을 벌입니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은 일 찰나에 구백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할 정도로 온갖 차별된 생각을 벌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온갖 차별된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알고 있습니다.
하루 가운데에서 일으킨 온갖 차별된 마음도 알고 보면 적멸한 일심 진여(一心 眞如) 본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의 마음이니 통일되어 있고 그것뿐이니 평등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남녀가 없고 승속이 없는 것입니다.
적멸한 자리이므로 평등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애착할 것이 없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로 則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이무아무인무중생상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우리들의 진실 생명 자리는 한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적멸한 자리이고 평등한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또한 보리의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데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칭찬에 크게 기뻐할 것도 없고 비난에 심하게 굴욕감을 느낄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진실로 좋은 마음, 바로 청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말하는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과는 구별이 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진실하고 올곧은 행동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뭔가의 선법을 닦고난 뒤
스스로 흐뭇해하는 흔적이 남아 있으면 청정한 마음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마음, 텅 빈 마음으로 일체 경계에 매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무심(無心)으로 선법을 닦고, 열심히 선법을 닦으면서도 닦음이 없는 무심의 도리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지마는 나 자신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또 너를 위해서도
살뜰하게 보살펴 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지마는 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기도 해야 합니다.
부처의 세계에는 온전히 부처밖에 없고, 꿈을 깬 사람에게는 전부 사실밖에 없지마는
그러면서도 제도할 중생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불교에서는 가관(假觀).공관(空觀).중도관(中道觀)의 삼관(三觀)이라고 합니다.
이 삼관은 나 자신과 사물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관점입니다.
팔만 사천 법문이라는 불교의 입장도 다 이 삼관으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가관(假觀)은 세속적인 관점으로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홍서원을 할 때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道)’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혹한 중생들이 많으므로 한없이 많아서 제도해야겠다는 원을 세운 것입니다.
사실은 잘못 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중생들이
많으므로 이 모습에서 바라보고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공관(空觀)은 중생도 공하고 부처도 공하여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다는 시각입니다.
설사 열반보다도 더 수승한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텅 비어 공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시각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공입니다.물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의 세계, 감정의 세계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비어 있다는 시각입니다.
 
중도관(中道觀)은 공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된 사홍서원을 하려면 "본래 부처인 중생을 맹세코 건지리이다."해야 합니다.
이 말 속에는 굉장히 심오한 불교의 경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무아(無我), 무인(無人), 무중생(無衆生) 무수자(無壽者)로써 선법을 닦는다는
것은 바로 이 중도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상을 말하니까 공관이기도 하지만 선법을 닦는 입장에서는 중도관이라 하겠습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須菩提야 所言善法者는 如來가 說卽非善法일새 是名善法이니라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   설즉비선법     시명선법
 
"수보리야, 말한 바 선법이라는 것은 여래가 설하되 곧 선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선법(善法)이란 수양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법으로서
흔히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을 말합니다.
 
오계는
첫째, 산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不殺生)
둘째,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지 않는다(不偸盜)
셋째,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이외에는 간음하지 않는다(不邪淫)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不妄語)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는다(不飮酒)입니다.『
 
화엄경』의 야마천궁회에서는 보살들이 행해야 하는 열 가지행〔十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홉 번째 행이 선법행(善法行)인데 이것도 열 가지이기 때문에 십선(十善)이라고 합니다.
 
첫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집이 된다.
둘째, 일체 중생의 구호가 된다.
셋째, 일체 중생의 귀의처가 되리라.
넷째, 일체 중생의 존경스러운 인도자가 되리라.
다섯째,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되리라.
여섯째,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겠다.
일곱째, 일체 중생의 광명이 되겠다.
여덟째, 일체 중생의 어리석음을 떠나게 하는 햇불이 되겠다.
아홉 번째, 일체 중생의 밝은 빛이 되리라.
열 번째, 진실행을 하리라.이러한 행을 실천함으로써 점차 부처님을 닮아가고 진실해 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과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반야의육바라밀을 실천행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것을 선법의 기준으로 삼더라도 매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무심으로 해야 합니다.
선악시비를 가리는 데 있어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선(善)이 될 수 있는 것이 저기에서는 악(惡)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법을 닦는다 하는 분별 의식과 상을 가지면 선법을 선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무심히 행할 때에 선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을 선법이라고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