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적은 수의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혜명(慧命-Ayusmant)은 지혜를 목숨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수보리를 보고 늘 장로라고만 하다가 이 대목에 와서는 특별히 혜명 수보리라고 합니다.
수보리는 근기가 높아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공의 도리를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미래세에 대하여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들도 밝은 지혜를 갖추어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는 계기도 됩니다.
이처럼 경전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는 그냥 쓰인 것이 없습니다.
꼭 필요할 때에 거기에 맞는 문자가 배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문일자가 참부처(一文一字是眞佛)'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은 매우 근기가 높고 또 부처님을 모시고 수십 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육신이나 깨달음, 설법 그 모두가 텅 비어 공(空)한 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지혜 높은 수보리는 당대(當代)에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 이 미묘하고도 지극히
높은 법을 잘 이해하고 미래세에 계속하여 태어날 중생이라고 하는 문제도 한 번 짚어 보자는 입장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의 씨앗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큰 파도는 파도이고 작은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만이 부처이고 중생은 부처가 아니다 하는 분별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또 중생의 위치에 있으니 중생인 부처가 매일매일 중생 노릇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를 넘나들되 거기에 걸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실로는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인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를 하나 하자면 사실 우리들 보고 자꾸 '중생 중생'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한두 번은 괜찮은데 몇 번 계속 듣게 되면 가슴 속에서 울컥 하고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속에 영롱하게 빛나는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중생이기만 하냐. 나 자신은 원래 부처인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지만 부처인 내 자신이 해결 못할 것이 없고 또한 중생이 아닌 내 자신이 남을 위해 못해 줄 것도 없습니다.
진실로 나 자신을 조그맣게 규정하지 않으면 더 넓고 밝은 세계에서 힘차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중생이 아닌데 무엇인들 하지 못할 것이 있겠으며 또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을 할것이 뭐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