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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1

by 범여(梵如) 2013. 8. 10.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1

 

일체법(一切法)은 본래로 텅 비어 청정합니다.
설법(說法)이란 저 일체법을 깨달은 사람이 아직도 꿈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을 깨우기

위하여 팔만 사천 법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설(說)은 능설(能說)을 줄인 것으로서 설법을 하는 입장입니다.
소설(所說)은 말해질 것으로서 설법되어지는 대상인 것입니다.
설과 소설이 다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즉 설명할 것도 없고 설명되어질 진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람은 본래로 다 금강신(金剛身)이고, 본래로 다 금강반야지(金剛般若智)를
 

구족하고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설법을 하고 또 설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래가 설법을 했다고 한다면 여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고

심지어는 부처님을 비방(誹謗)하는 것이 됩니다.
부처의 실체가 텅 비었고 깨달음도 그러하며 설법조차도 텅비었습니다.
따라서 설법을 듣는 우리들 중생도 텅 비어 청정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중생이 아닌 것이고 중생이라고 이름지을 뿐입니다.

須菩提야 汝가 勿謂如來가 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수보리   여   물위여래   작시념     아당유소설법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若人이 言如來가 有所說法이라하면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   언여래   유소설법
 
則爲謗佛이라 不能解我所說故니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이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是名說法이니라
시명설법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함이니라.능히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수보리야, 설법이라는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온갖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팔만대장경으로 남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자기 인생에서 자기 표현을 멋지게 하신 것입니다.
전법륜(轉法輪)을 굴린 것입니다.
우리 또한 나름대로 전법륜을 하고 있습니다.
꽃은 꽃을 피워서 법륜을 굴리고 있고 풀 한 포기는 풀 한 포기의 모습으로

바람에 흔들리면서 법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적 중국에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와 나무꾼인 종자기가 있었습니다.
종자기는 비록 나무를 하는 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습니다.
백아가 마음 속에 산을 그리면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그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타는 산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골짜기는 깊고 그윽하고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산의

사계절이 다 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로 백아의 음(音)을 다 이해해 주니 백아의 기쁨은 얼마나 커겠습니까.
넓고 넓은 대해(大海)의 장엄함을 노래하면 저 대해의 출렁거림을 눈에 보듯이 다 읽어 내렸습니다.
러던 어느 날 백아는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던 종자기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로 거문고를 내려 줄을 끊고서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산을 그리면 산을 이해하고 바다를 노래하면 바다를 한숨에 읽어 내리던 백아와 종자기는
서로의 참뜻을 잘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고 부처님의 설법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래는 육신에 본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사량 분별로 헤아려질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설한 자도 없고 설한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일체법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적멸한 그 자리를 굳이 말로 나타내었을 뿐인데
여래가 무엇인가 힘주어 설법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여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고
심지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기까지 합니다.
 
실답지도 않고 허하지도 않은 평등한 그 자리를 깨치고 말이라는 수단을 쓰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전할 수가 없어서 설법을 한 것이지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로텅 비어 있어서 말할 것이 없는 것을 가지고 설법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여 주자니 설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爾時에 慧命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이시    혜명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어미래세

聞說是法하사옵고 生信心不잇가 佛이 言하사대 須菩提야
문설시법              생신심부       불    언           수보리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衆生衆生者는
피비중생        비불중생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如來가 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여래    설비중생       시명중생


그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적은 수의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혜명(慧命-Ayusmant)은 지혜를 목숨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수보리를 보고 늘 장로라고만 하다가 이 대목에 와서는 특별히 혜명 수보리라고 합니다.
수보리는 근기가 높아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공의 도리를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미래세에 대하여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들도 밝은 지혜를 갖추어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는 계기도 됩니다.

 이처럼 경전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는 그냥 쓰인 것이 없습니다.

꼭 필요할 때에 거기에 맞는 문자가 배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문일자가 참부처(一文一字是眞佛)'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은 매우 근기가 높고 또 부처님을 모시고 수십 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육신이나 깨달음, 설법 그 모두가 텅 비어 공(空)한 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지혜 높은 수보리는 당대(當代)에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 이 미묘하고도 지극히
높은 법을 잘 이해하고 미래세에 계속하여 태어날 중생이라고 하는 문제도 한 번 짚어 보자는 입장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의 씨앗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큰 파도는 파도이고 작은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만이 부처이고 중생은 부처가 아니다 하는 분별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또 중생의 위치에 있으니 중생인 부처가 매일매일 중생 노릇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를 넘나들되 거기에 걸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실로는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인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를 하나 하자면 사실 우리들 보고 자꾸 '중생 중생'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한두 번은 괜찮은데 몇 번 계속 듣게 되면 가슴 속에서 울컥 하고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속에 영롱하게 빛나는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중생이기만 하냐. 나 자신은 원래 부처인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지만 부처인 내 자신이 해결 못할 것이 없고 또한 중생이 아닌 내 자신이 남을 위해 못해 줄 것도 없습니다.
진실로 나 자신을 조그맣게 규정하지 않으면 더 넓고 밝은 세계에서 힘차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중생이 아닌데 무엇인들 하지 못할 것이 있겠으며 또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을 할것이 뭐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