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20
모든 색신(色身)과 형상(形相)은 인연으로 엮어져 있으므로 참으로 구족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에 따른 모든 인식을 떠나 보내야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의 먼지와 때를 날려 버려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의 형색과 형상에다 인식까지 꽁꽁 잡혀 있다면 무량 공덕 생명인 반야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의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가 거룩하고 구족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현상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사대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해 버리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없어져 버릴 색상(色相)에 마음을 붙이면
상주 불멸하는 참 여래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반야신(般若身)은 끝내 찾지 못할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을 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불 가이구족색신 견부 불야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색신 견 하이고 여래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이다
설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마땅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고 그 이름이 구족한 색신입니다."
여기서의 색신(色身)은 전체적인 육신(肉身)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흔히 부처를 법신(法身), 화신(化身), 보신(報身)의 삼신(三身)이라 하는데 이 중에서 화신(化身)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당체에서 와서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 직접 부처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달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허공에 떠 있는 달은 진리 당체인 법신(法身)이라고 합니다.
물에 비친 달은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라 하여 화신(化身)에 해당되는데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오셨던 그 육신을 보고 부처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석가모니 부처님이 훌륭한 왕가에서 태어나고 남들보다 수승한 모습을 지녔으며
또 출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도
우리들 중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겉모습을 보고 부처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연이 있는 동안만 잠시 육신의 모습이라는 형상을 지녔었기에 영원한 색신 즉,
마음의 몸은 아닌 것이고 그 이름을 색신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가이구족제상 견부 불야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제상 견 하이고 여래
說諸相具足은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이다
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가이구족제상 견부 불야
世尊하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제상 견 하이고 여래
說諸相具足은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이다
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이 구족한 것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모든 상의 구족함이 곧 구족이 아니고 그 이름이 모든 상의 구족함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오백 생을 닦은 수행의 과보로 길상으로써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지녔는데 이는 여기서 말하는 제상(諸相)입니다.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합해 흔히 묘한 상호(相好)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갖추신 상호도 결국에는 지수화풍의 사대가 잠시의 인연에 의해
결합되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사대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혜안으로 볼 때 아무리 훌륭한 길상(吉相)이라도 모양을 갖고 있는 한
언젠가는 무너져 버릴것이므로 구족한 것이 못되고 단지 이름하기를 구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의 겉모습이나 공덕의 과보로 구족한 삼심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사랑스런 아들을 병으로 잃고서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아들을 안고서 "이 아이에게 약을 주십시오."하며 집집마다 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그 여인을 부처님께 데려 갔습니다.
부처님은 그 여인에게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좋은약을 주겠다. 우선 마을에 가서 겨자씨를 받아 오너라. 단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의 씨앗이라야 한다."
그 여인은 아들을 살릴수 있다는 희망에서 마을로 갔지만 그런 집은 단 한 집도 없었습니다.
그 때서야 부처님이 설하신 집착할 것이 없는 인연의 가르침을 깨닫고 수행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찰나적인 모습을 영원한 것으로 여겨 가지고 거기에 매여 가슴 아프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무너지고 나서야 인연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현재의 모습에서도
앞으로 전개될 처지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정도의 반야의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잠시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가
궁극에는 무너질 육신이라는 현상에 자기 자신의 인생 전부를 매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육신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열심히 건강을 돌보고 아름답게 가꾸되 거기에 걸리거나 집착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육신 너머의실상을 알면서 또 지금 인연을 갖고 있는 육신도 잘 가꿀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현상과 본체 그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세가 성숙한 불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무애행(無碍行)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교리상으로 말하면
"차별이 평등에 걸리지 않고 평등이 차별에 걸리지 않는다."
"항포(行布)가 원융(圓融)에 걸리지 않고 원융이 항포에 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또 현실을 무시하고
너무 본체적인 것에만 매달려서도 바람직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지 말아야 하듯이 현실을 수용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실상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만이 불생 불멸한 존재가 아닙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우리들 육신 하나하나도 다 불생 불멸한 존재인 것입니다.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을 삼는 『금강경』의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다져지면 정말로
인생의 아픔도 한 순간의 찰나적인 것으로 보고 가볍게 넘길 수가 있습니다.
남에게서 칭찬을 듣더라도 기뻐하거나 자만하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남의 비난에
흔들리거나 자괴심을 갖지 않아져서 완전한 자신의 인생을 꾸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라는 것은 남의 인생을 찬탄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가르침에 비추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생을 바르게 펼쳐가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두루 환히 비추이도록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열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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