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동관분(一切同觀分) 제18(2)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甚多니이다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여시영위다부 심다
世尊하
세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한 항하강에 있는 모래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강에 있는바 모래 수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불세계(佛世界)란 한 부처님이 교화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교화할 수 있는 일불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합니다.
저 길고 긴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 만큼의 많고 많은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 수 만큼이나 있다는
불세계는 너무나도 많을 것입니다.
이토록 많은 불세계를 언급하는 까닭은 이 불세계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마음도
다양하게 많음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가
불 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
悉知하나니
실지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저 국토 가운데 잇는 중생의 갖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우리들은 평생 함께하는 한 사람의 마음도 잘 모를때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열리면 이 우주 법계와 내가 하나로 되어 버립니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와 내가 한 몸이 되고 나아가 세상의 중생들과도 내가 하나로 되니
다른 중생의 마음을 내 마음 알듯이 환히 알게 됩니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신통안을 갖추고 삼생을 꿰뚫고 시방 세계를 다 둘러 보시니
국토마다에 있는 모든 중생의 온갖 마음씀씀이를 완전히 압니다.
더구나 부처님은 중생과 자신을 따로 떨어진 존재로 보지 아니하고 본질적으로
일체라는 입장에서 보고 있으니 모를 리가 없는 것입니다.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
하이고 여래 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우리들이 사상(四相)을 떠나보내고 깨달음이나 법도 다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들 마음만은 진실이고 뭔가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은 들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개인적인 특수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일으키는 갖가지의 차별된 마음, 모든 마음인 것입니다.
즉 망념(妄念)인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그런 순간이 쉬지를 않으니 모든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멸(生滅)을 거듭하는 망념(妄念)은 이 마음들을 일어나게 하는 본질적인 마음자리는 아닌 것입니다.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참마음일 터인데 온갖 사물에 찰나찰나마다 생각을 갖다 붙이고
계속 흘러보내고를 멈추지 않으니 마음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적인 마음에 이름을 붙여주자니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未來心不可得이니라
미래심 불가득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未來心不可得이니라
미래심 불가득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라."
우리들이 마음 마음하며 마음을 떠올리고 쉽게 말을 하곤 하지만 "마음을 내 놓아라."하면 정작 내놓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찾을 길도 없습니다.
왜 그렇느냐 하면 마음의 자리가 고상하게 높거나, 우리들 중생이 어리석어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본래가 공적(空寂)한 자리이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고 내어 놓을 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 자리는 석가, 달마와 같은 성현(聖賢)이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는 나와 너가 없고 남녀가 없으며 노소가 없고 승속도 다 벗어난 자리인데 어찌 시간(時間)이라는
구분을 지워 지나간 마음이니 현재의 마음이니 미래의 마음이라 할 것이 있으며 또 그 마음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생각해 보아도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지금 우리들에게 잡혀 있지 않습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도 '현재다'하고 인식하는 곧바로 계속 과거로 되어 버리니 현재 또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대목에는 당나라 때 『금강경』의 대가 덕산(德山)스님을 점심도 못 얻어먹고 굶게 한 이야기가 늘 따라다닙니다.
덕산 스님은 금강경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고 하였는데 항상 금강경에
대한 연구 서적과 논문을 가득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방에서 웬 사람이 나타나 문자를 부정하고 견성 성불(見性 成佛)을 주장하며
경전 대신에 "그대로 마음을 깨달아야 부처다."하고 큰 소리 친다기에 그말을 꺾어 주려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웬 소리냐. 삼천 위의와 팔만 세행을 천겁 만겁 동안 공부를 해야 성불을 할 수 있는 거지."하며
발끈하여 남방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풍주라는 지방에 이르러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떡장수 노파가 있었습니다.
시장하던 터라 덕산 스님은 그 노보살 떡장수가 에게 떡을 좀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노보살 떡장수가 묻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떡을 파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먼저 여쭈어 볼 게 있습니다.스님 등 뒤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이것들은 내가 평생토록 연구한 금강경에 관한 논문과 책들이지."
"그러면 제가 금강경에 대해 하나 묻겠습니다.
대답을 해 주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스님께서 대답을 못하시면 우리 집에서뿐 아니라
이 동네에서는 떡을 잡수실 수 없습니다."
"좋다. 나는 일평생을 『금강경』을 연구하였다.
그래서 금강경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스님,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방금 점심(點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라고
결정적인 질문을 날렸습니다.
점심(點心)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마음에 점을 찍는다 하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주금강 덕산 스님은 답을 찾았지만 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굶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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