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7 (4)
是故로 佛說一切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나이라
시고 불설일체법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그러므로 부처님이 설화되,"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수자도 없다."라 하느니라.
우리들의 바깥 경계에서 벌어져 있는 모든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어디에다
머물러 한정지우면 일체법의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일체법과 아울러 언제나 나 자신이 기준이 되고 나아가서는 남과 나머지 삼라만상 전부가 다 분별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진실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볼 때는 잠시의 인연의 결합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의 실체는 말할 것도 없고 불법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도 텅 빈 자리에 나다 남이다 하는 분별은 있다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법(法)이 공하고 나도 공한 것입니다.
내가 비어 버리면 나로 인해 벌어지는 다른 모든 일체법도 공한 것입니다.
須菩提야 若菩薩이 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수보리 약보살 작시언 아당장엄불토
是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如來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라
시불명보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이니라."
만약 우리들이 사는 집을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 집의 건물을 으리으리하게 짓고 호화로운
장식물로 치장하고 값나가는 가구로 꾸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집안에 어울려 살아가는 가족들이 신뢰를 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을 진실한 장엄이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으로 혐동하고 예의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국토를 균형있게 개발하고 편리하고 큰 건물을 높이 세우는 일도 필수적이겠지만
이같은 겉치레의 장엄이 아니고 이 국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으로써 장엄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일차적인 장엄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좀 더 발심(發心)하면 장엄하겠다는 마음의 상을 내지 않고 장엄할 국토도 없습니다.
너와 나의 능소(能所)가 끊어진 자리에는 지극히 평등한 도리만 있을 뿐인데 장엄하겠다는 상에 떨어질 것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음으로써 장엄하는 곳에 무슨 국토라는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단지 무심히 체득되어 실천할 따름이지 내가 마음을 낼 것이 없고 마음을 굳힐 국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인 것입니다.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 약보살 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을 통달한 자이면 여래는 이를 참다운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나와 너라는 분별심을 떠나보내고, 나아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이나 불국토를
장엄해야겠다는 의식을 철저하게 비운 사람은 무아법(無我法)의 이치를 완전히 깨친 사람입니다.
아니 깨쳤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바다에는 오직 짠맛뿐이듯이 무아에는 오직 무아뿐입니다.
철저하게 무아뿐입니다.
아(我)가 없으니 나 이외의 대상인 법(法)도 없고 그리하여 이 둘 또한 같이 텅 비어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삼공(三空)이 혁혁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총달한 사람은 참으로 큰 보살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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