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7 (3)
是故로 如來가 說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 하나니
시고 여래 설일체법 개시불법
"그러므로여래가 다 불법이라'하시니."
"일체법이 모두 다 불법이다."라는 말은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쉽게 불법(佛法)이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합니다.
불법을 뭔가 굉장히 거창하고 뼈를 깎는 듯한 고행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온 사람은 뒷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또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모든 것이 다 불법이니 온갖 비리와 반도덕적인 행위를 해도
좋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어떤 특정한 장소나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일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떠나 불교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 불법인 것입니다.
넘어져도 불법이고 일어서도 불법인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으면 괴로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소음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요하고 맑으면 맑은 그대로가 바로 불법인 것입니다.
봄이 돌아와 새 잎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 아니 꼭 봄이 올 것도 없이
겨울이면 겨울 그대로 여름이면 여름 그대로가 그저 불법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눈을 떠야 하는데 자꾸 먼 곳에 가서 불법을 구합니다.
그래서 선사(禪師)들의 선구(禪句)를 보면 불법을 바로 들어보여 주고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열렬한 동경으로 길을 묻는자에게 때로는 엉뚱하고 논리에 맞지 않는 소리만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불법 적적대의입니까." 하는 진지한 물음에 전혀 얼토당토 않게 대답을 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 또, 때로는 법을 구해 헐레벌떡 달려온 사람에게
그냥 "여기 앉게."하며 방석을 권하기도 합니다.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아침 먹었어? 그러면 설겆이 해야지."하고 아주 단순하고 일상적인 말로 일러 주십니다.
또 구지 선사(俱지 禪師) 같은 분은 평생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선구나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하는 것은 결국은 같은데 맛이 다를 뿐입니다.
경(經)은 돌아가고 선구(禪句)는 바로 질러간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활과 같이 둥글게 말씀하시고 선사는 활줄과 같이 팽팽하게
가로질러 명쾌하게 바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육조 혜능대사 이래로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기도 하지만
이런 선구들의 바탕이 될 수 있기에 여러 선사(禪師)들이 참으로 금강경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所言一切法者는 卽非一切法일새 是故로 名一切法이니라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 명일체법
"수보리야, 말한 바 일체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님일새
그러므로 일체법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러나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라 하니 또 일체법이이라는 법의 실체가 따로 어느 것에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우리들 중생이 즉각적으로 빠지게 되는 일체법이라는 상을 즉시로 또 지워주시는 것입니다.
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헛된 것은 더욱 더 아닌 진공 묘유한 상태를 말로 나타내자니
일체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법이라는 상에 매일까봐 일체법이 일체법이 아니고 단지 이름 붙이기를 일체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譬如人身長大이니라 須菩提가 言하사되 世尊하 如來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수보리 언 세존 여래
說人身長大가 卽爲非大身일새 是名大身이니이다
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이 장대함과 같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 사람 몸의 장대함도 곧 큰 몸이 아니고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
"일체법이 곧 일체법이 아님일새 그러므로 일체법이라 이름하느니라."라는
이해를 돕고자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갖고 와서 비유를 드십니다.
사람의 몸이 몹시 장대(長大)하여 확실하게 자리잡아 우리 눈앞에 보여 주고 있어도
결국은 시대와 오온이 잠시 인연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그 장대했던 몸도 다 흩어지고 본질자리는 텅 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것도 실로 큰 몸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이름을 큰 몸이라 붙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말이 끊어진 진여(眞如)의 그 본체 그 자리를 일체법이라고 이름붙일 뿐입니다.
須菩提야 菩薩도 亦如是하야 若作是言호대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수보리 보살 역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卽不名菩薩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實無有法名爲菩薩이니
즉불명보살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명위보살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런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리라'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음이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보살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
보살(菩薩)이란 나니 너니 하는 상대적인 생각이 끊어져 지극히 평등한 원리를 깨친
사람이므로 없는 가운데에서 불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생명의 복을
자신이 캐내어 자신이 쓸 뿐이지 누가 제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쏟아 놓은 것이 아니고 바로
설법을 듣는 우리들의 보물 그대로를 자랑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어떠한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데 도를 구해 나아가는 보살이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심을 내어 제도하였다는 상을 내면 그를 보살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한 기준에 근거하여 이렇게 하면 보살이다 저렇게 하면 보살이 아니다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전부 다 공을 근본으로 하여 잠시 인연을 갖고 있을 뿐인데 어떤 법이 있어서 보살이라 하겠습니까.
실로 보살이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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