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7 (2)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불언 여시여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떠나보낸 보살의 삶과 부처님의 금생에 있어서의 깨달음이나
과거생에 있어서의 보리심 그 무엇도 매인 바 없이 없음을 부처님만큼이나 잘 밝히는
수보리의 높은 안목을 부처님께서 흔쾌히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같은 소리는 서로 울리고 상승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과거 수보리의 한마음과 과장이 수천년이 지난 우리에게까지 벅차게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須菩提야 實無有法如來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실무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우리 인류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이고도 값진 사건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삶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아 정진할 수 있고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그 거대한 성도도 어떠한 고정된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에게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에게도
불상(佛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리를 얻었다 하는 보리상(菩提相),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각상(覺相),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불상(佛相)을 모두 다 걷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흔적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부처님은 부처가 못 되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若有法如來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인댄 燃燈佛이 則不與我授記하사대
수보리 약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연등불 즉불여아수기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를 釋迦牟尼라하시니라
여어래세 당즉작불 호 석가모니
以實無有法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是故로 燃燈佛이 與我授記하사 作是言하사대
이실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 연등불 여아수기 작시언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를 釋迦牟尼라하시니
여어래세 당즉작불 호 석가모니
"수보리야, 만약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음인댄 연등불이
곧 나에게 수기를 주면서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라'고
하시지않았으려니와,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너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니라."
수기(授記)는 부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대는 언제 어디서 어떠어떠한 부처가 되어
이러이러한 교화를 펼 것이다." 하고 미리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 부처님에게서 석가모니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과거생에 보살행을 하시고 깨달음을 얻음에 있어서 어떠한
고정된 법에 머물렀다면 연등불이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보리심을 얻는 데 있어서 그러한 법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는 보리심을 얻었다'하는 상을 갖고 있엇다면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지만
실로 그러한 마음의 상이 없음으로 해서 부처를 이루어 우리 인류의 너무나도 큰 스승이 된 것입니다.
이럼으로 해서 현재 우리 모두는 더 멀리 연등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갖가지 고통과 문제 속에서 욕심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실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밝은 등불을 켜신 연등 부처님에게서 '너는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받았기에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내부에는 빛나는 반야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광명덩어리의 지혜를 갖고서 오로지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바로 비추어 복된 인생길로 가꾸어 갈 뿐입니다.
우리들 개인 개인 모두는 수기받은 부처이고 남들 또한 부처인데 부처가 어찌 다른 부처를 해할 수 있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긍정과 찬탄 일색뿐입니다.
何以故오 如來者는 卽諸法如義니라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니라."
여(如)는 '그대로이다', '같다', '진리이다', '평등하다'는 불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진리라고 하는 것보다 여(如)라고 하는 것이 더 구체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모든 법이 진리이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여래라고도 하는데 여(如)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에서 왔다, 진리 그 자체이다 하는 뜻이 됩니다.
부처는 진리 그 자체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부처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어떤 특별한 형상을 갖추셨거나 상당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제법(諸法) 속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고 오고 자연이 바뀌면서 돌아오고 심지어는 가만히 있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도 다 제법에 포함됩니다.
얕은 소견에서 보면 이 세상 만유의 이치가 변화 무상하고 낱낱이 차별로 된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눈을 뜨고 보면 만 가지의 차별 너머로 변화지 아니하고 본래로 평등하고 동일되어서
다를래야 도저히 다를 수 없는 그런 근원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를 여여(如如)하다고 하겠습니다.
若有人이 言如來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라하면 須菩提야
약부인 언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實無有法佛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실무유법붇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릴르 얻었다'고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의 육년간의 고행을 떠나 보리수 아래에서 납월 팔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를 이루었습니다.
생사의 근원적인 의문과 문제가 풀리고 모든 집착을 끊고 광대무변하고도 영원한 진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하고 획기적인 깨달음도 어떤 고정된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게서 증득한 보리심은 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기준이나 선악시비를 떠나서
두루두루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須菩提야 如來所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는 於是中에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시중 무실무허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가운데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위대한 부처님의 깨달음은 진정 어떠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실다움이 있다고 하면 어떤 고정된 실체가 되니 상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금강경』의 도리에 맞지 않게 됩니다.
어디에 기준하여 부처님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하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에 기준하였다 하면 그곳에는 반야의 빛이 갈 수 없을 테니까 오도(悟道)를 이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헛된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부처님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것은 더욱 더 아닌 것입니다.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 그 자체뿐이니까 실(實)이니 허(虛)니 하는 말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식과 분별이 끊어지고 말로써 나타낼 수 없는 '언어 도단(言語 道斷)'의 자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