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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經典講解

금강경 -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5

by 범여(梵如) 2013. 8. 30.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5

 

여래는 일찍이 법을 설한 적도 없고 중생을 교화한 적도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래는 법을 설했다, 중생을 교화했다고 하면 그는 여래의 참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심지어는 비방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평등한 성품으로 중생과 일체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진여 법계(眞如 法界) 안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습니다.
안과 밖이 여여(如如)한데 교화하는 부처님과 교화받는 중생이 있다고 하면 

부처님을 부처 아래로 끌어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상이 없고 대 자유자재한 부처님은 진실로 교화함이 없이 교화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汝等은 勿謂如來가 作是念호대 我當度衆生이라하라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     물위여래    작시념       아당도중생
 
 須菩提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
수보리     막작시념        하이고    실무유중생여래도자
 
若有衆生如來度者면 如來가 則有我人衆生壽니라
약유중생여래도자    여래    즉유아인중생수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여기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은 하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실로는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음이니,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하면 여래는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가 있음이라."
 

우리들 각자는 본래가 부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본바탕이 부처이니 여래에게는 원래로 제도할 중생이 없고 또 제도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가 어찌 남으로부터 제도받을 것이 있으며, 또 다른 부처를 제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이치를 알고 실제로 부처님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열어 가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나 아직은 능력이 달려서 부처님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우리들 자신 속에  이러한 무한정한 부처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햇볕이 비치고 비가 알맞게 내린다고 하여도 애초에 씨앗이 심겨져 있지 않다면 싹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도되었다, 불은(佛恩)을 입었다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원래로 가지고 있는
재산을 우리가 꺼내어 썼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여래가 ‘내가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한다면 교화한 여래가 있고 교화를 받는 중생이 있다는
분별을 취한 것이 되어 그 즉시로 상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자만 의식, 중생이라는 차별 의식에 빠져 집착하게 된 여래를 여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須菩提야 如來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수보리    여래설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以爲有我일새니 須菩提야 凡夫者는 如來가 說卽非凡夫일새
이위유아       수보리    범부자    여래    설즉비범부
 
是名凡夫니라
명범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되,아가 있다는 것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이를 아가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
 
여래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합니다.
또한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실로 무아(無我), 무인(無人), 무중생(無衆生), 무수자(無壽者)인 것입니다.
사상(四相)이 모두 텅 비어 공합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아(我)가 있다고 하는 것도 텅 비어 청정할뿐 아(我)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범부들은 여래가 아(我), 아(我) 하니 또 어디 아(我)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我)를 자만 의식이나 자존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환상뿐인 자존심이 어디 있는 줄 알고 "나는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자존심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하여 수십 년 더불어 살던 사람과도 전쟁을 일으킵니다.
가만히 분석해 보면 정말 나라는 실체가 없습니다.
썩어 무너져 내릴 이 몸뚱이가 진정한 나일 리가 없고,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보고 나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 반갑던 사람이 오늘 당장 뒷모습조차 보기 싫은 경우를 누구나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일은 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게서는 제발 나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한 것입니다.
집착하면 편벽이 생기고 편벽이 생기면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문제가 일어나면 상처받아 아플 분입니다.
이런 상처를 당하지 말고 늘 행복하게 살라고 범부에게 늘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또 범부 범부 하니 우리 자신을 범부라고만 생각할까봐 또 범부라는 상을 싹 지워버립니다.
범부(凡夫;Bala-Prthag-janah)를 글자 그대로 새기면 ‘따로 따로 태어나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범부를 어리석고 슬기가 모자라는 중생을 말하는데 마음에 아직도 ‘나’와 ‘너’의
능소(能所)가 남아 있으면 범부가 되고 이러한 상을 내지 않으면 범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부처의 바탕을 꺼낼 수만 있다면 범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부라는 상도 공하여 범부가 아닌 것이고 그 이름이 범부일 따름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