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8
보살이 반야행(般若行)을 하면 자연히 복덕(福德)이 따르고 참다운 진리도 깨닫게 됩니다.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있어서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집(我執) 하나 떠나 보내면 일체 만물에서 참 여래를 봅니다.
그리하여 일체법에 아(我)가 없음을 깨달은 지혜의 공덕은 그 어떠한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큰 것입니다.
또한 무상(無相), 무아(無我)를 깨달은 사람은 복덕을 구하거나 탐하지도 않습니다.
무심히 체득되어 실천할 뿐이지, 기다리거나 바라거나 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구하지 않아도 얻게 되는 것이고 탐(貪)하지 않아도 갖추게 되는 법입니다.
須菩提야 若菩薩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持用布施어든
수보리 약보살 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 지용보시
若復有人이 知一切法無我하야 得成於忍하면 此菩薩이
약부유인 지일체법무아 득성어인 차보살
勝前菩薩의 所得功德이니
승전보살 소득공덕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은 일체법이 아가 없음을 알아서 인을 얻어 이루면
이 보살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수승하리라."
부처님께서 과거 오백생 동안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서 수행을 할 때
아(我)를 텅 빈 것으로 보아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인(忍)의 경지가 깊어지면 단순하게 수행자니까 참는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본성 자리를 굳게 지켜 일체의 분별에 흔들리지 않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진리에 머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인(忍)은 바로 깨달음의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일체법을 비추어 보았을 때 텅 비어 청정하여 아(我)가 없는 진리를 알아 확실한
지혜를 이루었을 때의 공덕은 거듭하여 말하지만 그 어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보다 크다고 하겠습니다.
새어 버리지 않고 샐 수도 없는 무루복이기 때문에 한없이 한없이 공덕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금강경』의 공덕을 거듭거듭 나타내는 이유는 눈을 뜬 사람이 보았을 때 정말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흙을 물에 넣으면 그대로 풀려 버리지만 차돌은 물 속에서 아무리 오래 있어도 겉만
젖지 속에는 물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업이 두터워 아무리 눈을 뜨라고 해도 뜨는 시늉만 낼 뿐입니다.
진실로 눈을 뜨기를 원한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눈을 뜨는 데에 그까짓 공양미 삼백석이 문제이겠습니까.
심청이는 생명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사실 『심청전』은 그대로 불교의 가르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보시하였더니 그 때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그냥 버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눈을 들 때 혼자만 뜨는 것이 아니고 온 국토에 있는 모든 맹인들이 함게 눈을 뜹니다.
함께 가는 불교 사상을 참 멋지게 표현하였습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以諸菩薩이 不受福德故니라 須菩提가
하이고 수보리 이제보살 불수복덕고 수보리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云何菩薩이 不受福德이니잇고 須菩提야
백불언 세존 운하보살 불수복덕 수보리
菩薩은 所作福德에 不應貪着일새 是故로 說不受福德이니라
보살 소작복덕 불응탐착 시고 설불수복덕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응당 탐착하지 않음이니
이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일체법에 있어서 무아의 지혜를 체득한 보살이 ‘내가 짓는 바의 공덕이 크다.
그러니 나는 복덕을 많이 받을 것이다’라는상을 낼 까닭이 없습니다.
설사 보살이 복덕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무아를 터득한 보살이 뭐 그리 복덕을
기대하고 탐착하겠습니까. 여기서의 복덕이 바로 깨달음에의 복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복도 받아 들이려는 자세가 있어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참선(參禪)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지막 걸림돌이‘대오지심(大悟之心)’입니다.
다른 번뇌는 다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최후로 남는 번뇌가 깨닫기를 희망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의미있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하나 번뇌를 제거하면서 깨달음에 이르러 가야겠지만 깨닫고자 하는
마음에 붙들려 있으면 계속하여 그것이 번뇌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연꽃이 피듯이 소리없이 핀다고 했습니다.
심봉사도 눈뜨기를 포기했을 때 그 순간 눈을 떴습니다.
설사 보살이 아무리 깨달음을 많이 이루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복을 많이 받겠지 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야 진정한 복덕을 이룰 수가 있으니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깨달음의 복덕은 받아 들이고 주고 할 거리가 아닙니다.
어떠한 형태를 띄고서 깨달음의 복덕을 이루는 경계가 아니고 마냥 우주와 혼연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에 변만해 있는 복덕을 탐할 것도 받아 들일 것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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