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수행
한국불교의 수행법중에서 참선수행은 그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제방에서 왕성히 참선이 행해지고 또한 참선수행에 대해 일반인의 관심도 높다.
그런데 일반신도들은 참선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직접 수행하기에는 아직 거리감이 있다.
왜냐하면 선사들의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고 매력을 느끼고 실제 수행에 접근하려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자신의 종교신자에게 신행방법이나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구나 참선수행은 원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수행법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선의 사상이나 역사에 대한 책은 많은데 정작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드물고, 선법문을 하는 분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참선 방법에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참선수행의 의미
禪이란 무엇인가?
선은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고 나와 우주의 참모습(眞面目)을 자각하여 참된 주체을 확립하는 수행이다.
이러한 참선수행이 현대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인간은 참된 주체적 삶을 스스로 살지 못하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고 있다.
자아(自我)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 삶을 돌이켜 보면 타성적인 생활관습으로 살고 있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산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위해 사는 이도 있고,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산다고도 한다.
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일상의 반복 속에 묻혀 살기도 하고, 하루하루 삶이 고통뿐인 삶도 있다.
이러한 각각의 삶 속에서 지각 있는 가슴은「나는 무엇인가」를 외치게 된다.
나의 진면목이 무엇이며 울고, 웃고, 나고, 죽는 주인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더 많은 갈등과 불안요인으로 둘러 쌓여 있다.
더 높은 생산력 속에서도 인간은 여유는커녕 가중된 업무와 스트레스와 고독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되고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며 스스로 지쳐가고 있다.
사회전체가 방향을 잃은 듯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물질적 풍요는 왜 우리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지.
여기에 선(禪)은 나는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참다운 자기로 살게 된다.
삶에 의미를 주고 자신의 참된 면목을 여지없이 발휘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수행은 무엇이 인간의 참된 삶이냐를 문제 삼으며 자기 주체를 찾아
활발발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2. 참선수행의 정의
참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정의를 내려보자.
참선이란 무엇인가. 참구한다.
참여한다는 의미의 참과 선이라는 말의 합성어가 참선이다.
연구가 객관적 자료와 생각과 논리를 바탕으로 진행된다면 참구는 이런 것들을 떠난
체험과 직관에 의해 진행되는데 선이란 범어 디야나(Dhyana)를 한역한 선나의 약어이다.
번역하여 공덕총림, 사유수, 정려라 한다.
선을 통해 얻어지는 공능이 한량없으므로 공덕총림이라하고, 사유하여 닦아가므로
수유수라 하며, 선을 닦아 마음이 적정하고 여실한 지혜가 드러나므로 정려라 한다.
이 마음은 정심(定心)이므로 선정이라고도 한다.
정은 범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 삼매, 삼마지, 삼마야, 삼마제 등을 의역한 말로 마음이
고요하여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다. 삼매는 다른 말로 등지(等地)라고도 하는데 평등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불교의 수행법은 계정혜 3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총설편에서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 끝과 같이 나누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참선은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이다. 이를 정혜쌍수라고 한다.
정과 혜는 수행의 증득의 측면을, 지와 관은 닦는 방법의 측면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어 지관쌍수라고도 한다.
따라서 참선수행은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아나파나삿티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실로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선하면 중국 선종의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화두참구가 참선의 핵심이자 유일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참선수행을 우리 종단의 전통적 수행법인 간화선에 근간을 두면서도
이것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부처님 당시부터 행해지던 불교의 다양한 지관법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화두참구법이 독특하고 위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불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선 수행의 발전단계들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이 선방에서 마음 놓고 24시간 화두만 챙길 수 있는 전문수행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가정과 직장생활을 하는 재가불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여러가지 방법 들을 통해 그때 그때 스스로
응용하고 적용해가며 생활 속에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법의 제시가 필수적이다.
그 중에서도 관법에 관해 자세히 제시한 것은 간화선이라 할 때 간(看)이라는 말도 결국 본다는
의미로 관(觀)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관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꽤뚫어 보는 것이다.
간화란 화두를 참구한다는 의미인데 역시 화두를 철파한다. 뚫는다고 한다.
다만 화두참구에서는 의심이 꽤뚫음의 핵심이 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
러나 의심하면서 그 힘으로 화두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꽤뚫어 보는 관법수행이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초심자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화두와 하나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상생활에서
늘 깨어있을 수 있는 관법 수행은 재가수행자들에게 유용한 수행법이 될 것이다.
3. 참선수행의 기본요건
참선수행의 기본요건 및 자세와 참선 수행시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극복방법을
천태지관의 25방편을 근간으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 다섯가지를 갖춤(具五緣)
① 지계청정(持戒淸淨)
계를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율은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참선수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② 의식구족(衣食具足)
옷과 음식을 갖추는 것이다. 수행자는 오직 굶주림과 추위만을 면할 뿐 사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아예 갖추지 않는 것도 선수행을 방해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옷가지와 음식물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가정생활을 하는 재가자의 경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무가 있으므로 부득이 여러 가지
소유물들이 생기겠지만 앞에서 소욕지족을 말했듯이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③ 한거정처(閑居靜處)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산란하고 시끄러움을 멀리 피하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또한 마음 속에 일이 없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마음 속에 시끄러움이 없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 한적하고 조용해야 곧 선을 닦을 수 있다.
④ 식제연무(息諸緣務)
모든 인연있는 일을 쉬는 것이다.
작위적인 모든 사업을 하지 않고 세속적인 왕래를 좇거나 찾지 않는다.
방술과 재주를 익히지 않고 학문과 강론을 숭상하지 않는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오직 선을 닦을 뿐이다. 몸과 마음에 일이 많으면 수행을 할 수 없다.
수행인은 세속의 일을 줄여 주변을 정리하고 생활을 단조롭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일을 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고, 쉴 때는 몸과 마음을 확실히 쉬며, 사교모임은 줄이이는 것이다.
또한 외도의 경전이나 외전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 불전이라도 지식을 쫓아 거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⑤ 근선지식(近善知識)
선지식의 필요성은 총설편에서도 밝혔지만 특히 참선수행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선지식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밖에서 보호하는 선지식으로서, 살림을 꾸리고 공양하여 수행인을 잘 보호하며 어지럽지 않게 하는 분이다.
둘째는 함께 행하는 선지식으로서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서로 채찍질해주고 북돋아주며 서로 어지럽게
하지 않는 분이다.
셋째는 가르쳐 주는 선지식이니 내외방편과 선정의 법문으로 가르쳐 이익되게 하는 분이다.
모든 수행에 선지식이 필수적이지만 특히 참선수행에서는 선지식이 더욱 중요하다.
만공스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으로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 다섯가지를 꾸짖음(呵五欲)
마음을 기쁘게 하고 몸을 안락하게 하는 세간의 ①모양, ②소리, ③냄새, ④맛, ⑤촉감 등을 꾸짖는다.
이것들은 법부의 마음에 애착과 탐욕을 생기게하여 온갖 악업을 짓게 하므로 수행자는 항상 이를 경계해야 한다.
수행자는 이렇게 꾸짖어 책망한다.
"일체중생은 항상 다섯가지 욕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 다섯가지 욕망은 얻을수록 점점 심해지니 마치 불에 땔나무를 더해 주는 것과 같다.
오욕은 이익이 없으니 개가 말라빠진 뼈를 씹는 것과 같고, 오욕은 다툼을 늘이니 새들이
고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과 같으며, 오욕은 사람을 태우니 역풍에 횃불을 잡은 것과 같다.
또 오욕은 사람을 해치니 모진 뱀을 밟은 것과 같고, 오욕은 알맹이가 없으니 꿈에서 얻은 것과
같으며, 오욕은 오래가지 않으니 잠시 빌린 것과 같다.
어리석은 저 중생은 항상 오욕의 부림을 당하므로 '오욕의 노예'라 부른다.
이 욕망에 무릎 꿇어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면 영영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내가 지금 수도하는 데도 장애가 되니 이것은 큰 도적이다. 마땅히 서둘러 이것을 멀리하고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3) 다섯가지를 버림(棄五蓋)
① 탐욕
다섯가지 감각적 욕망을 비롯하여 모든 욕망의 근원은 나라는 환상과 내것이라는 집착,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필사적인 애착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정관을 닦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다섯감관을 잘 수호해야 한다. 다섯감관을 도둑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감각적 욕망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때문에 도둑을
지키듯이 정신차리고 감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대상을 대하더라도
즐거워하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대상에 대한 즐거움이 사라진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애착이 사라지고 애착이 없으면 속박도 없다.
② 성냄
악의란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일에 대한 성내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탐욕 다음에 경계해야 할 것이 성냄이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앞에서 본 자비관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화가 일어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남에게 화를 내는 것은 마치 이글거리는 숯덩어리, 달군 쇠몽둥이 혹은 똥을 집어 드는 꼴이구나.
"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기에게 화를 낼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라.
"마치 받지 않은 선물이나, 바람을 향해던진 한 줌 먼지와 같이 그 사람의 노여움도
되돌아가서 제 머리에 떨어지고 말 것을."
③ 해태와 혼침
정신적 해이와 육체적 졸음에 대한 극복방법은 사수념(死隨念)이라 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무상고를 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우리는 모두 언제 죽음이 닥칠 지 모른다.
지금 당장 죽음이 와도 후회하지 않겠는지를 물어보라. 그리고 모든 것은 무상함을 관하라.
정신이 번뜩 들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분발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여덟가지 각성제를
상기함으로써 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여덟이란 생, 노, 병, 사, 삼악도의 고통, 윤회에 기인한 과거세의 괴로움, 윤회로 기인한
미래세의 괴로움 그리고 자양을 구하는 데 기인하는 현생의 괴로움이다.
'지금은 젊지만 나는 곧 늙음이 찾아 올 것이다. 늙음에 짓눌린 자 정진하기 여럽다.
또, 지금은 병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소화도 잘되고 몸은 균형잡혀 있다.
그러나 이 몸 병마에 사로잡힐 때가 오리라. 병든 자 수행하기 어렵다. 지금은 양식이 풍부하다.
그러나 곤란해 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는 수행에만 힘 쏟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행할 수
있는 지금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참선 중에 애를 먹는 부분 중의 하나가 졸음이다. 수마라고할 정도로 위력적으로 덤벼든다.
이 때에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부처님께서 목련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졸리운가? 목갈라나여, 졸고있는가? 목갈라나여"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목갈라나여, 어떤 생각을 하다가 혼침이 그대를 덮쳤든지간에, 그 생각에 더 이상주의를
팔지 말아야 하며, 그 생각에 자주 머물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느니라.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해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가 이미 듣고 배운 바, 교의(法)를 마음 속에
떠올려 생각하고 되새기라.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가 이미 듣고 배운 교의를 모두 세세하게 암송하라.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귓볼을 잡아당기고 손바닥으로 팔다리를 문지른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눈을 씻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하늘의 별을 쳐다본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한 낮의 밝은 빛을 떠올려라(光明想). 낮에 그러했듯이
밤에도, 밤에 그랬듯이 낮에도 또한 맑고 트인 마음으로 밝음에 가득찬 의식을 계발한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감각을 안으로 돌이켜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도록 한 채, 앞과 뒤를 똑바로 알아차리면서 왔다갔다 걷는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곧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정념.정지하며
사자모양새로 두 발을 포개어 오른쪽이 바닥으로 가도록 조심스럽게 눕는다.
다시 깨어나는 대로 "드러눕거나 기대는 즐거움에, 잠자는 즐거움에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빨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④들뜸과 회환
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유희에 빠지는 것을 몸의 들뜸이라 하고, 읊고 노래하는 것을
즐기고 시비 가리는 것을 좋아하며 이익 없는 담론을 장활하게 설하는 것을 입의 들뜸이라 한다.
정서가 방일하고 제멋대로 상상하여 세간의 문장과 재주를 연구하며 온갖 나쁜 생각과 관찰로
사유함이 그치지 않는 것을 마음의 들뜸이라 한다. 이럴 때에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비유하면 여기 통 속에 물이 있는데 바람이 휘저어 흔들리고 출렁거려 파문이 인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 비친 자기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으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들뜸과 회한에서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나니,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행복도 남의 행복도 그리고 자신과 남의 행복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하느니라.
또한 이미 오래 전에 마음에 새겨 둔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새기지 않은 것들이랴.
이러한 들뜸과 회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해야 하며 산란심을 극복하는 대치법으로 호흡관이 있다.
⑤회의적 의심
의심에는 세가지가 있으니 이것은 도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다.
첫째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요, 둘째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자신을 의심함이란 사람이 스스로 나의 근기는 어둡고 둔하며 죄의 때가 깊고도 무거우니
법의 그릇이 아니지 않은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승을 의심함이란 무엇인가.
스승의 위의를 보면서 '외모가 그럴 듯하지 않고 스스로도 도가 없는데 어찌 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한다. 무릇 사람을 볼 때는 단지 그 도만 취할 뿐 그 모습을 취해서는 안된다.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법이 더 낫고 어떤 법이 더 못한지, 과연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마음으로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면 법이 마음 속으로 젖어들지 못해 비록 법 가운데 있더라도 마침내 열반을 얻는 바가 없다.
의혹에 찬 수행자의 마음 속에는 잇달아 동요와 주저가 일고 결단력도 부적해지며 근심만 생길 뿐이다.
이리하여 그는 안전한 성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자기 내면에다 장애물을 스스로 설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의심의 해로움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믿고 스승을 믿으며 법을 믿는 마음을
굳건히 하여야 흔들림없이 정진할 수 있다.
4) 다섯가지를 조절함(調五事)
① 조심(調心)
어지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조복하여 지나치게 방일하게 하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느슨하거나 급하지 않는 네가지 모습을 얻는 것이 마음을 조화롭게 함이다.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여 다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은 들뜬 모습(浮相)이다.
이때는 마음을 편안히 하여 아래쪽을 향하여 대상에 묶어두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억제하여 마음이 안정되게 머물도록 한다.
또한 좌선할 때 마음이 어두워 기억이나 상념하는 바 없이 머리가 자꾸 밑으로 처지는 것을
가라앉은 모습(沈相)이라 한다. 이때는 마땅히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하면 가라앉음을 다스릴 수 있다,
만일 마음을 모아 생각으로 얻으려 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마음과 기가 위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슴이 팽팽하게 켕기는 통증이 생기는 것을 급한 모습(急相)이라고 한다.
이때는 마땅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기가 아래로 흐르는 것을 상상하면 고통이 저절로 사라진다.
마음이 이곳 저곳 유람하여 몸은 힘빠진 뱀같고 입에서는 침이 흐르며 마음은 어두운 것은
느슨한 모습(寬相)이다. 이때는 몸을 추스리고 생각을 거두어 마음을 대상 가운데 머물게 해야 한다.
② 조신(調身)
몸을 조화롭게 함이란 몸을 편안하고 고요히 유지하는 것이다.
선정에 들지 않은 때라도 걷거나 머물거나 나아가거나 멈출 때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만일 하는 일이 거칠면 호흡도 따라서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면 마음이 산란하여 단속하기
어려워서 좌선할 때에 이르러서도 편안하지 못하다. 따라서 항상 몸과 마음과 호흡을 조화롭게 해야 한다.
좌선을 하려면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를 하고 옷과 허리띠를 느슨하게 한다.
참선은 원래 좌선만을 이야기 하지 않으며 일상생활 그 자체가 참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개 앉아서 하는 좌선에서부터 시작한다. 좌선은 그 자체로 훌륭한
수행방법이면서 동시에 일상생활의 참선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 앉기 힘든 사람은 제외하고
좌법은 참선수행자가 불가불 배워야 할 기본 과정이다.
좌선할 때에는 우선 두꺼운 방석을 준비하고 앉는다. 가부좌는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겹친다.
그리고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포개는 것이다. 이것이 결가부좌이고 또한 반가부좌도 무방하다.
반가부좌는 다만 왼발을 오른쪽 무릎위에 놓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바른 손을 발목 위에 놓고 왼손을
바른 손바닥 위에 겹치며 양쪽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둥글게 맞댄다.
이것이 대삼마야인(大三摩耶印) 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 한다.
그 다음에 허리를 반듯이 수직으로 세운다. 이때에 몸을 전후, 좌우로 약간 움직여서
허리를 자연스럽게 세워 몸이 기울거나, 앞으로 굽거나 뒤로 제쳐지지 않도록 한다.
특히 어깨나 목 등 몸에 힘을 주지말고 자연스런 자세를 취해야 된다.
턱은 당기고 눈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군다. 귀와 어깨가 서로 수직이 되고 코와 배꼽이
서로 수직이 되도록 반듯이 한다. 혀는 입천장에 대고 입을 가볍게 다문다.
혀를 입천장에 대는 것은 침이 입안에 고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가 익숙할 때까지는 다리가 자주 아프고 저릴 것이다.
그럴 때는 다리를 바꿔가며 앉도록 한다. 그러나 바꾸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즉시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
먼저 왜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지 알아보라. 육체적 피로 때문인지, 정신적 불안정 때문인지를 몸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부분을 주목해 보라. 정직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는 법을 배워라.
수행정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다리가 아프거든 스스로에게
"내게는 다리가 없다"고 타일러라. 공부가 순숙해지면 어느덧 몸이 있는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시선은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면 정신이 산만해져서 좌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집중이 안될 때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벽에다 작은 점이나 원을 표시해 놓고
거기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 초심자는 눈을 감는 것이 더 집중이 잘 된다.
그러나 눈을 감고 하면 어느덧 혼침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오후나 새벽 좌선시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잠을 청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좌선 중 수면에 시달릴 때는 눈을 크게 뜨도록 하는 것이 좋다.
좌선시 몸이 피로하고 졸음이 심해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수시 포행을 하는 것이 좋다.
보통 선원에서는 50분 좌선하고 5분 내지 10분간 선방 내를 포행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포행시간은 좀더 늘여도 좋다.
포행할 때는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으로 무명지의 아래 마디를 누르고 주먹을 쥔 상태) 을
하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드리우고 서서히 걷는 것이 좋다. 이때에 좌우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포행은 바로 행선(行禪)이다. 앉았을 때와 같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피로가 풀리고 맑은 정신이 돌며 몸에 활기를 준다. 따라서 좌선과 행선을 적절히 섞어서 수행하면 좋다.
한편 혼자서 하는 산책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사유를 깊게 해주며 내면들 들여다 보는 좋은
수행법이되므로 덧붙여 권하고 싶다.
③ 조식(調息)
좌선하는 데는 반드시 좌선의 기초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 때 상기(上氣) 기타 신체상의 장애가 생겨 공부에 지장을 받을 때가 많다.
앞의 요령에 따라 바르게 앚았으면 다음은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알 필요가 있다.
먼저 몸을 3, 4회 전후좌우로 흔들어 자세를 바르게 한다. 처음에 호흡을 한번 크게(깊게) 내쉰다.
다음에 서서히 호흡을 들이쉰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편안히 앉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인도의 요가나 중국의 도교에서는 인위적으로 숨을 길게 또는 짧게 하는 다양한 호흡법들이 있으나
불교의 호흡법은 자연 호흡법이다. 인위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려고 몸에 힘을 줘가면서
애쓸 필요가 없고, 일부러 숨을 길게 쉬려고 숨을 참거나 멈출 필요가 없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하면 된다.
마음이 안정되면 호흡도 자연스럽게 안정되기 마련이다.
안정된 속에서 편안하게 호흡을 하면 숨은 자연히 길어지고 미세해진다.
좌선할 때 뿐만 아니라 언제나 호흡을 의식하면서 호흡이 급한지 안정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라.
화가 났을 때, 긴장하고 있을 때 호흡은 여지 없이 급해지고 불안정하다.
이때에도 호흡을 길게 심호흡을 몇 번 하면 마음이 안정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호흡과 마음은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참선수행에서 호흡관은 가장 기초적인 행법이다.
④ 조면(調眠)
잠자는 시간을 조화롭게 하는 것으로 너무 많이 자서 몸과 마음을 나태하지 않게 하고
너무 적게 자서 피곤하지 않게 하며, 잠은 최소한으로 줄이되 짧은 시간 내에서도 숙면하도록 조절한다.
경전에서는 "초저녁이나 새벽에도 공부를 그만두지 말지니, 수면을 인연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얻는 바가 없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논에서는 수행자가 공부해야 할 시간으로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새벽 2시부터 6시까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⑤ 조식(調食)
너무 많이 먹으면 기가 급해지고 몸이 팽만해지며 여러 맥이 통하지 않아서 마음을 막히게 하므로
좌선할 때 생각이 안정되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적게 먹으면 몸이 고달프고 마음이
동떨어져서 생각이 굳지 않게 된다. 음식을 최소한으로 줄이되 섭취한 음식이 최대한의
정기를 발휘하도록 조절한다.
5 ) 다섯가지를 행함(行五法)
① 욕(欲;願)
세간의 전도망상과 삿된 욕심을 떠나기를 원하고 모든 선정과 지혜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욕이라하고, 원이라하고, 뜻이라 하고 사랑함이라 하며 좋아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큰 의지이고 서원과 즐거움을 성취하려는 마음이지 생각을 일으키고 희망하고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선정의 결과를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면 마음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므로 삼매가 생길 수 없다.
② 정진
항상 방일하지 않고 계를 지키며, 다섯가지 덮개를 버리고 저녁 6~10시 새벽 2~6시까지
오로지 정진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나무에 구멍을 내어 비벼서 불을 일으키는데
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끝까지 그만두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정진이라고 한다.
③ 념(念)
세간은 깨끗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속이므로 가볍고 천하게 생각하며, 불법의 선정과 지혜를 귀하고 중하게 생각한다.
④ 정교한 지혜
세간의 헛된 즐거움과 선정 지혜의 참다운 즐거움 중 어느 것을 얻어야 하는지 헤아려 아는 것이다.
세간의 즐거움이란 낙이 적고 괴로움이 많으며, 거짓되고 허망한 것이고 실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손해이며 가벼운 것이다. 선정과 지혜의 즐거움이란 모든 번뇌를 여읜 것이며, 인연에
의하여 생멸함을 떠난 것이고, 고요하고도 한가롭고 넓다란 것으로서 영원히 나고 죽음을 떠난,
그리고 오래도록 괴로움을 멀리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익이며 무거운 것이다. 이와같이 분별하는
것을 정교한 지혜라고 한다.
⑤ 일심
한마음이라는 것은 생각과 지혜를 분명히하여 세간은 근심스러운 것이고 싫어하여야 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보고, 선정지혜의 존귀함을 알아 일심으로 결정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금강석과 같아 천마나 외도라도 막거나 무너뜨리지 못하고 가령 헛되이 얻어진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끝내 되돌아서거나 달라지거나 하지 않는 것을 한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길을 갈 때 우선 반드시 길이 통한 곳과 막힌 곳의 양상을 알고 그런 연후에
한마음으로 결정하고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방편을 잘 알아서 교묘하게
사용하고 그 마땅함을 잃지 않아 속히 선정을 얻는 것을 교묘한 지혜라고 하니, 선정에
이르는 길을 잘 아는 것이 정교한 지혜이고 그길을 가는 것이 일심이다.
따라서 일심에 의해 선정에 이른다.
4. 참선수행의 방법
참선은 생사의 근원이 무엇이고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불교의 다른 수행법들도 모두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고 성불이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빠르게
성품을 보게 하는 수행법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과 유사한 말로 선, 선나, 선정, 삼매, 지.관 등이 있다. 참선이란 이런 수행법들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호흡관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실로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선하면 중국 선종의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화두참구가 참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 자리를 말하고 참구란 생각과 분별을 끊고 직입하는 것을 말한다.
직입하면 말 나오기 이전을 봄이요, 성품을 봄이다. 즉 견성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담박에 깨치는 것이므로 돈오라고 한다.
이때 직입하게 하는 힘은 의심에 있다.
오직 의심으로 똘똘뭉쳐 모든 것을 잊고 무엇일까를 탐구하다 보면 철벽처럼 어둡고
깜깜하고 아득하던 화두가 툭- 트이는 순간, 화두가 타파되고 모든 낡은 껍질들을 벗게 된다.
나와 우주 만물의 참성품을 본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으며 거짓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참은 또 어떻게 그것과 함께 그렇게 오묘하게 있는지를 알게된다.
관법(觀法)
현재 조계종단의 선원에서는 관법수행의 단계를 체택하지 않고 곧 바로 화두에 들어간다.
혹 어떤 사람은 화두들기 전에 관법수행을 체택하는 것을 두고 조계종의 전통 선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식관, 부정관, 인연관, 불타관, 자비관, 사념처관 등의 관법은 재가불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수행을 닦아갈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수행법이며 예로부터 참선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는
대치법으로 익혀 오던 방편이다.
관법수행에는 다섯 문이 있으니,
첫째는 수식관(數息觀)이요,
둘째는 부정관(不淨觀)이며,
셋째는 자비관(慈悲觀)이요,
넷째는 인연관(因緣觀)이며,
다섯째는 불타관(佛陀觀)이다.
수식. 부정. 인연. 등 이 세문에는 안팎의 경계가 있고 불타관. 자비관은 바깥 경계를 반연한다.
이 다섯 문은 중생들의 병을 따르는 것이다. 즉 마음에 번뇌가 많은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가르치고, 탐욕심(貪慾心)이 많은 이에게는 부정관을 가르치고, 화(瞋心)를 잘 내는 사람에게는
자비관을 가르치고, 집착심(執着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인연관을 가르치고, 마음이 흐릿한
사람에게는 염불(佛陀觀)을 가르친다." <오문선경요용법>
옛부터 참선수행의 5방편문으로 장애에 따른 처방법으로 즐겨 사용되 오던 관법들이 있다.
이들 오방편 중에서 수식관은 수식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호흡에 대한 관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안반수의경에 의거하여 소개하겠다. 부정관은 사념처관 중에 몸에
대한 관찰에 포함되는 내용이므로 몸에 대한 관찰 속에서 이야기 될 것이다.
자비관은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자 하는 불교수행자들이 즐겨 익혀야할 수행법이며
가장 쉽게 실천하면서 가장 쉽게 공덕의 결과를 맛볼 수 있는 수행법이 될 것이다.
인연관은 법에 대한 관찰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다만 불타관은 염불수행에서 다루어지므로 생략하였다.
① 호흡에 대한 관
호흡관은 수식관이라하여 참선수행의 가장 기초적인 행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단의 통상적인 방법에서 탈피해서 부처님 당시의 호흡관에 근거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호흡관은 사념처관의 신념처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독립적인 행법으로 아나파나삿티(anapanasati)라 한다.
아나파나삿티는 번역하면 입출식념이라는 뜻으로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모으는 방법으로 안반수의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입출식념경>을 비롯하여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으며 사념처관에 관한 경전인
<대념처경>에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 가장 초기에 번역된 경전 중의 하나인
<안반수의경>에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경에 의해 안반수의는 수식에서부터 상수, 지, 관, 환, 정에
이르는 6사와 4성제로 이어지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초기불교의 수행법의 총체인
37조도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안반수의는 수식관이라는 협소한 영역에서
벗어나 호흡관을 통해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실적인 행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앞에서 불교의 호흡법은 자연스러운 호흡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보자들의 경우 평상시에 그렇게 잘 쉬던 숨도 막상 앉아서 관하려고 하면 숨쉬기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져 자연스러운 호흡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심호흡을 몇 번 한다. 숨 쉬는게 한결 편해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숨이 골라 지면 들숨과 날숨을 따라 관하는데, 이때에도 초보자들은
집중이 잘 안되어 생각이 이리저리 굴러가거나 졸리기 쉽다. 따라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쉬면서 하나, 다시 들어마시고 내쉬면서 둘 하면서 열까지 센다.
수를 세다가 또 집중하지 못하고 놓치고는 딴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면 즉시 알아차리고 하나부터 다시 세어나간다.
이렇게 열까지 세어지고 집중이 되었다 싶으면 수는 헤아리지 말고 다만 호흡과정만을 관하도록 한다.
들고 나는 숨을 한 지점(주로 코끝)에서 계속 집중하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차가운지, 따뜻한지,
긴지, 짧은지, 급한지, 완만한지, 거친지, 미세한지 등을 관하다보면 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되는 느낌이 확 온다. 그러다가 내가 사라지는 느낌, 우주와 하나가 된 느낌,
숨을 쉬는지 안쉬는지 모르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때 숨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도 숨을 쉬어야지 하고 생각을 붙여
숨을 쉬려고 하지 말고 그냥 관하면 된다. 실제로 호흡이 끊기는 것이 아니고 의식하지
못할 만큼 미세해지기 때문이다. 또는 코로 숨을 쉰다는 느낌이 안들고 피부로 숨을 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호흡관은 산란심을 잠재우고 고요하고 깊은 삼매로 이끄는 힘이 있다.
우리는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없다. 앞에서 수행은 언제나 깨어있음이라고 했다.
그 출발은 호흡에 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을 하다보면 호흡은 내가 아니다.
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참나는?하는 물음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호흡관은 지와 관은 함께 닦고 가장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모든
수행법의 기초가 되면서 생사해탈의 열쇠를 쥐고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그뿐아니라 심신이 경쾌해지고 수면이 단축되며 정신 집중력이 강해지고 삼매력을
키우는 터전이 굳어진다. <증일아함경 제17 안반품>에는 나운비구가 호흡관을 통해
삼매에 이르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한 나무 밑에 앉아 몸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잡고, 결가부좌하였다.
다른 생각이 없이 마음을 코 끝에 두고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길면 또한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또한 숨이 짧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는 것을 알고,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또한 숨이
따뜻하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숨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숨이 있으면 있다고 안다. 때로는 숨이 없으면 또한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알았다.
이때에 나운은 이와같이 사유하고 욕심이 곧 해탈을 얻어 다시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평안함을 얻는 초선에서 놀며, 깨닫고 관찰함에 스스로
기뻐하여 일심으로 깨달음이 없고 관찰함이 없는 삼매의 기쁨인 이선에서 놀며,
다시 기쁨조차 없고 오로지 몸의 즐거움을 알고 성현의 가호를 구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삼선에서 놀며 저 고락의 길이 멸하여 다시 금심이 없고 고가 없고
낙이 없고 생각이 청정한 사선에서 놀아 삼매 속에서 마음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증일아함경 제17 안반품>
② 몸에 대한 관찰
몸에 대한 관찰은 먼저 몸은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져 있음을 관한다.
뼈대와 살은 지대요, 피와 체액등은 수대요, 온기는 화대요, 호흡 및 기의 흐름은
풍대라 이렇게 사대로 이루져 있다가 죽으면 각기 흩어져 버리는 것이여서,
나라거나 내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세속적 욕심과 몸에 대한 집착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과 백골관을 통해
몸의 실상을 알고 집착을 떠나게 된다.(이하 내용은 대념처경을 인용한 것임)
* 부정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이 몸을 '위로는 머리끝에서 아래로는 발바닥까지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물질로 가득 차, 피부 주머니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구별하면서,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몸에는 머리털, 몸털, 손톱, 치아,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염통, 간, 늑막, 지라, 허파,
창자, 창자 내용물, 위, 위 내용물, 똥,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기름, 침, 콧물, 관절액,
오줌 등이 있다'고 관하라.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하고,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하며,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한다. 또 몸에서 생겨나는 현상을 관하면서 주하고,
몸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하면서 주하며, 몸에서 생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몸이다."라고 그 자각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한다.
* 백골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마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후 하루,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서 부풀고 검푸러지고 썩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이와 같은
현상(法, chamma)에 의해 이와 같이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마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에게 먹혀지고, 매에게
먹혀지고, 독수리에게 먹혀지고, 표범에게 먹혀지고, 늑대에게 먹혀지고, 다른 여러 가지
살아 있는 것들에 의해 먹혀지는 것을 보고, 이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이와 같은 현상에
의해 이와 같이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마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피와 살에 묻어 있는 채로 힘줄에
얽히어 해골로 변해 있음을 보고, 이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이와 같은 현상에 의해 이와 같이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고 생각한다.
③ 일상생활에서 관
* 행동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가면서는 '나는 가고 있다'고 관하고, 서서는 '나는 서 있다'고 관하고,
앉아 있으면서는 '나는 앉아 있다'고 관하고, 누워 있으면서는 '나는 누워 있다'고 관한다.
이와 같이 어떠한 상태로든 그의 몸이 놓여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놓지 말고 잘 관하라.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서 갈 때나 이를 완전히 알고, 앞을 볼 때나
뒤를 볼 때나 이를 완전히 알며, 구부릴 때나 펼 때나 이를 완전히 안다.
옷을 입거나 발우를 들 때도 이를 놓지 말고 완전히 관하여 알고, 먹고 마시고 씹으면서
맛볼 때도 이를 완전히 관찰하여 알며, 대소변을 볼 때도 이를 완전히 관찰하여 안다.
가면서나 서서나 앉아서나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말할 때나 묵묵히 있을 때도
한동작 한동작을 완전히 관찰하라.
* 느낌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어떻게 감각에서 감각을 관하면서 주하는가?
수행자는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고,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육체적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육체적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고,
정신적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정신적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육체적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육체적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며,
정신적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정신적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육체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육체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고, 정신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정신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밖으로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안팎으로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또 감각에서
생겨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감각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감각에서 생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감각이다."라고 그 자각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 마음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어떻게 마음에서 마음을 관하면서 주하는가?
애욕(愛欲)이 있으면 '내 안에 애욕이 있다'고 알고, 애욕이 없으면 '내 안에 애욕이 없다'고 잘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애욕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고, 이미 생겨난 애욕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며, 이미 멸해진 애욕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안다.
성냄(瞋表)이 있으면 '내 안에 성냄이 있다'고 알고, 성냄이 없으면 '내 안에 성냄이 없다'고 잘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냄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며, 이미 멸해진 성냄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안다.
나태와 졸음(昏沈)이 있으면 '내 안에 나태와 졸음이 있다'고 알고, 나태와 졸음이 없으면
'내 안에 나태와 졸음이 없다'고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나태와 졸음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고, 이미 생겨난 나태와 졸음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며, 이미 멸해진
나태와 졸음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안다.
동요(掉擧)와 걱정(悔)이 있으면 '내 안에 동요와 걱정이 있다'고 알고, 동요와 걱정이 없으면
'내 안에 동요와 걱정이 없다'고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동요와 걱정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고, 이미 생겨난 동요와 걱정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며, 이미 멸해진
동요와 걱정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안다.
의혹(疑)이 있으면, '내 안에 의혹이 있다'고 알고, 안으로 의혹이 없으면 '내 안에 의혹이 없다'고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의혹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고, 이미 생겨난 의혹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며, 이미 멸해진 의혹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안다.
이상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머무른다.
그리고 순간 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 등 여러 가지 심리적 현상들을 관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즉,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생겨났다가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나라거나 내것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집착으로부터 해탈을 얻게 된다.
④ 진리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현상을 관찰하라.
어떻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현상을 관찰하는가?
수행자는 "이것은 고통(苦)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如實)잘 관찰하고, "이것은 고통의 원인(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고, "이것은 고통의 소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고,
이것은 고통을 소멸하는 길(道)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직후 깨달음의 세계를 점검하시기 위해 12연기법(緣起法)을
순과 역으로 관찰하셨다. 그리하여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그런고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라는 그 유명한 연기법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의미와 방법으로 진리의 세계를 관찰하여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혹 어떤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제 마음이 깨끗하고 묘한 덕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여 닦아 익힌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나>라는 상에 굳게 집착하여 그 습기가
너무 무거움으로써 갖은 의혹의 장애를 일으켜 정을 잊지 못하는 이는, <사람들의 몸이나
마음은 사대와 오읍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로 난 것으로서 거젓이여 진실이 아닌 것이
마치 뜬 물거품과 같아서 그 속이 비었는데, 무엇을 나라고 하고 무엇을 남이라고 하겠는가?라는
공관으로 그 견해를 부수어야 한다. <보조국사 권수정혜결사문>
이와 같이 불법의 이치를 깊이 사유하고 관함으로써 사견과 여러 가지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사법법회에서 '주전자명상'이 있다. 대중들은 주전자를 보고 감사할 점을 찾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하면서 한두가지 적기 시작한다. 그러나 30. 50, 100가지를 넘어가면서
주전자 속에 우주가 담겨있음을 알게 되고, '하물며 이런 조그만 주전자도 이럴 진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사람이야' 하면서 인간과 자기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된다.
연기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연기의 존재이기에 무아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주인인 것이다.
모든 것의 은혜 속에서 살며 자리와 이타가 둘이 아닌 줄 알게 된다. 진리에 대한 관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깊이 사유함으로써 현실에서 그것을 재발견하는 지혜를 준다.
⑤ 자비관(慈悲觀)
사무량관법이 있다. 불도를 구하는 이는 사무량심을 행해야 한다.
그 마음이 무량하기 때문에 그 공덕도 무량한 것이다.
중생들 중에는 무릇 세 가지 부류가 있으니,
첫째는 부모.친척.좋은 벗 등이요,
둘째는 원수.도적.악인들로서 항상 괴롭히고 해치려는 부류이며,
셋째는 중인으로서 친하지도 않고 원수도 아닌 부류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 세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인자한 마음으로 보되 친족처럼 대해야 할 것이니
즉 늙인이는 아버지처럼 보고 젊은이는 아들처럼 보아 항상 이런 인자한 마음을 닦아 익혀야 한다.
사람으로서 원수가 되는 것은 나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니 나쁜 인연이 다하면 도로 친해지는
것으로 친함과 원수는 일정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이 세상의 원수로 후세에는 친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나운 분노는 큰 이익을 잃고 인자한 마음이 없으면 불도를 장애한다.
그러므로 미운 원수까지도 친족처럼 보아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원수로 말미암아 나는 불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원수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인내는 어디서 생기겠는가.
그는 곧 나의 선지식이 되어 나로 하여금 인욕바라밀을 얻게 하는 것이다.
원수에 대해 인자한 마음을 가지게 된 뒤에는 사방중생들을 인자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편안하지 못한 일체의 곤충에 대해서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중생으로서 이 세상의 즐거움과 천상에 나는 즐거움과 성현의 도의 즐거움을 얻는
이를 보면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중생들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보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지혜로써 스스로 제어하여 중생을 반연하더라도 사심(捨心)을
일으키면 이것이 사무량심으로서 그 자비가 시방 중생들에게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무량이라 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닦아 익혀 혹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내 몸에 대한 뱀이나
불이라 생각하고 빨리 제거해야 한다. 마음이 흩어져 다섯 욕심에 빠지거나 다섯 덮개에
덮이거든 지혜와 정진의 힘으로 껴잡아 돌아오게 하고 인자한 마음을 닦아 익혀 항상
중생들을 생각하여 부처의 즐거움을 얻게 하되 쉬지 않고 익히면 다섯 욕심을 떠나고
다섯 덮개를 버리게 될 것이다. <오문선경용용법>
방법1.
조용히 좌선자세로 앉아 먼저 가장 친한 사람을 떠 올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득 담아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 마음을 보낸다.
이때 배우자와 같이 애착이 강한 대상은 친한 사람들 중 제일 뒤로 돌리도록 한다.
참된 정신적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아야 한다.
다음에는 아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사랑하는 마음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적대적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보낸다.
처음에는 이 부분에서 마음에 저항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생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원한이라는 게 살아가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수행하는데 곧 장애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그리고 그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잘 느껴보라.
그러면 미움의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이해와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
자주 자비관을 하다보면 자비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싸고 사람은 물론 우주 전제의
모든 존재에 대해 감사와 사랑이 느껴질 것이다.
방법2.
먼저 마음 속에 자비의 마음, 행복한 마음을 갖는다.
그 자비의 기운으로 자신을 감싸고 점점 넓혀 방안, 집안, 우리동네, 우리나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지구, 우주로 점점 넓혀 가면서 분명하게 영상화시키고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의 기운을 전체에 방사한다. "그들이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지이다. 행복하게 살기를!" 이런 평화로운 마음은 수행의 진전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언제나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수행자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경지이기도 하다.
화두참구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자리 개념과 관념이 붙지 않은 진리의 당체를 찾아가는
관문으로써 불입문자. 언어도단의 선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한 언어아닌 언어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수행자의 面前에 들이대어 바로 볼 것을 촉구하는
이 수행의 과제 '佛祖의 言句'를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이라 한다.
공안이란 본래 관청의 공문서란 의미를 갖는 말인데, 범치 못할 확실한 법칙이라는 뜻이 있다.
그 법칙을 바로 아는데서 살아있는 진리가 들어나는 것이다.
화두는 그 본질이 불조(佛祖)의 깨달음 자체이므로 이러한 성격의 언구는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써 어림될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자신의 眞面目을 밝혀 낼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불조관문(佛祖關門)이라고도 한다.
1)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는 대개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나 언동으로 구성되는데, 다음에 몇 개의 공안을 들어본다.
혜능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시심마(是心磨)로 불리우는 화두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無]"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자(無字)화두이다.
조사공안이 1천7백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써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두참구에는 사구와 활구가 있다.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 즉,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자기 문제로 다가 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이러한 과정을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치기'라고 한다.
공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천목중봉스님(1263~1323, 남송말 원초 스님. 임제종 양기파.)의
말씀은 너무도 정확하게 공안의 의미와 기능을 밝히고 있다.
공안이라고 한 곳운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이란 훌륭한 도를 깨달아 세상 사람들에게 그 길을 모두 함께 가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이란 성현들께서 그 도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지 관청을 설립하지 않을 수가 없고, 관청이
설치되면 자연히 그것을 운영하는 법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법령을 만들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박멸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공안이 시행되면 바른 법령이 통용되고, 바른 법령이 통용되면 천하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기강이 바로잡히면 왕도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를 공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위와 같은 뜻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묘지에 계합하여,
생사의 굴레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안은 언어나 문자로 따지는 것을 초월하며,
이것은 시방삼세의 수많은 보살과 함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아주 짂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이치로 알 수도 없으며, 언어로 전할 수도 없으며, 문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야지만 알 수 있는 도리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량분별이나 증진시키고 그저 이야깃거리의 밑천이나 삼으려고
공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공(公)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안(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공(空)해지면 불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공안인란 바로 번뇌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그런가 하면 공안이란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입니다. 조사들의 본뜻이 공안 때문에 분명하게 밝아지고,
부처님의 마음이 공안 때문에 드러납니다. 번뇌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불조의 혜명을 드러내는 데에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습니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 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합니다.
2) 화두(話頭) 참구의 세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다음의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더라도,
본성은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이와 같으며 이것은 영겁으로 변치 않고 어떠한 동요에도 상관이 없는 불멸의 법으로써
있으며 어떠한 강한 압력에도 흔들리거나 빼앗기거나 나위거나 때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비록 지혜가 없어 어리석음에 빠져 세간에서 낙인찍히는 악행을 했거나 다시
지옥에까지 떨어졌더라도 자기본성은 일찍이 때묻지 아니하고, 죄짓지 아니하고 그늘지지 않은
원래로 원만구족한 진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진리의 주체일진대 그에게는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원래로 충만하다.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뜻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원래로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상생활이 그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행이 될 수 밖에 없다. 밝음과 긍정과
너그러움과 용기는 선자의 기본표정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을 모르고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을 불태우는 불굴의 용진이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제불보살과 일체중생과 함께 함을 믿는 것이므로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한다. 원래로 자신과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애를 걸고
다시 세세생생을 던져서라도 이룩하고자 하는 큰 원과 정진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고
불국토 실현에 두는 것이다. 선자에 있어 이기적 타산은 금물이다.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 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ㅜ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은 무엇인가. 불조가 제시한 화두는 불조가 어려운 수수깨끼 처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 앞에 드러내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길래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제불보살의 영원한 생명이 내 자신에게 있어 조금도 덜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므며, 생생하게 지금 내 생명에 뛰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나는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여 보는 것, 듣는 것, 맛보고, 냄새맛고, 느끼는 것에
탐착하고 좋고 나쁜 것에 휘둘려 살고 있다. 일찍이 중생이 아니건만 스스로 중생을 환작하여
그것을 달게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전생도 이와 같았고 그 전생도 이와 같았는데 지금 이 생도 또 이와같다.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 무지와 고뇌의 과거생, 무능과 비소의 과거 무수생을
종말짓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당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그리고 큰 분심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킨다.
셋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큰 의심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왜? 왜?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져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덥는다.
없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조는 화두로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 것이다.
불조께서는 내게 있는 나의 물건을 내 앞에 들이댄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냐. 분명히 내게 있는 이 도리, 명백히 화두에서 밝혀 주었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렇게 큰 의정이 솟아나는 것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 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 데서 화두는 순숙하게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필경 본분을 밝혀낸다.
3) 좋은 화두가 있는가?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을 뿐 화두에는 없다.
다만 더 잘 들리는 것이 있을 수는 있다.
수 억겁동안 살아온 업이 달라 수행법 중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고 잘 안되는 것이 있다.
화두 중에서도 의심이 확 들어 화두참구에 빠지게 하는 것이 있고 좀처럼 의심이 생기지도 앉고
잡히지도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 스승은 화두를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주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심을 돈발시켜 주는 화두를 줄 것이다.
그러나 혹 스승에게 받은 화두라도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자주 찾아가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편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의정이 생기면 활구요 그렇지 않으면 사구이다.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화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디 자심의 솟구치는 의정에 따라 활구를 참구해야 할 것이다.
4) 화두 참구하는 모양
화두란 격외도리로써 불조의 지혜안목을 연 사람만이 알아듣는다.
그 밖의 범부들은 알아 들을 리가 없다. 오직 절벽에 맞부딪힌 것처럼 꽉 막힐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는 의정(疑情)의 벽에 맞서게 된다.
이것이 수행자가 공안에 대한 대응자세이며 그 표정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옛 조사들은 말하기를 공안을 가져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은산철벽(銀山鐵壁)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는 접근하면 얼굴이 타버리는 큰 불무더기(大火聚)라고도 하고 또한 금강으로
된 밤송이가 목구멍에 걸린 것과 같다 했다.
이 때 의심하는 모양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몸에 깊이 간수하여 애지중지하다가 홀연히 잃어버렸다.
그 사람은 모르고 있다가 손으로 보배 둔 곳을 만져보니 보배가 간데 없으므로 의심이 나서
보배를 어디에 두었는가? 하고 찾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또 어두운데서 이상한 물건을 주었는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으므로 그 사람이 의심이 바싹 난 것과 같이 화두참구하는 모양도 이와 같다.
혹 화두를 들 때 어떤 때에는 나귀를 끌고 우물에 들어가는 것도 같고, 어떤 때에는 뜨거운 불과 같이 번뇌가 끓고, 어떤 때에는 찬 어름과 같이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어떤 때에는 순풍에 돛단배와 같아서 술술 잘 된다.
그러나 공부가 잘되든지 못되든지 좋고 언짢은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화두만 참구한다.
또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 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운동하고 말하며, 움직이고 고요히 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담벽과 같이 하여 공부를 하지
말지니 이는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며, 혼이 흩어지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다.
오직, 왜?라는 의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공부를 일심으로 해가면 보고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나를 함께 잊어 산하대지가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지나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을 타파할 것이다.
또 망상이 일어나면 그 망상을 어떻게 제거할까?
망상이 일어나든지 안 일어나든지 가만히 두고 망상을 없애려 하지 말라.
망상을 없애려고 하면 망상이 더 일어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소가 달아날 때 소 고삐를
단단히 잡아당기면 소가 스스로 사람을 쫓아오는 것과 같아서 망상이 일어나든지 아니 일어나든지
상관 말고 화두만 들어 의심하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진다. 다만 화두를 들어도 망상을 걷잡지
못하겠거든 화두를 즉시 놓아 버리고, 마음도 쉬어 전과 같이 한 뒤에 화두를 들면 새롭게 다시 깨끗해진다.
또 화두를 들어 의심할 때에 몸과 마음을 다 놓아 항상 편안히 하고, 화두를 뚜렷이 의심하라.
화두를 너무 급하게 들면 심장이 움직여 가슴도 답답하며, 머리도 아프고 코에서 피도 나는데
이 병은 마음을 너무 조급하게 한 탓이다.
또 마음을 너무 방심하면 화두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이니 부디 화두를 너무 극도로 하지 말고 방심으로도 하지 말라. 거문고 줄은 늦추어도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너무 팽팽하여도 소리가 나지 않나니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첩첩 산중에 들어가다가 홀연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물러나거나 나아갈 곳이 없는지라 이런 때를 당하여 용단력을 다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꽃이 불긋불긋하고 버들이 푸릇푸릇한 곳에 별천지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공부는 다 마음으로 헤아려 궁구하거니와 참선공부는 단지 알지 못하는 이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헤아려 알고자 하면 만년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화두를 참구할 적에 무슨 재미를 찾지 말고, 모기가 쇠로 만든 소위에 앉아 부리를 내리지
못할 곳을 향하여 신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 번 뚫고 들어가면 몸조차 쑥들어가리라.
화두만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하고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봄이 돌아오면 꽃 피고 잎 피듯이 공부가 익으면 자연히 이같이 되는 것이다.
5. 참선수행의 공덕
일반적으로 참선수행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우수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사선은 점차로 닦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박에 깨닫는 돈오의 길을 제시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참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대해 홍인(弘忍)조사가 말하기를 『본래의 참마음을 지키는 것(守本眞心)이
일체 번뇌가 끊긴 대해탈에 이르는 근본이며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고 보살과 부처를 이루는 길이다.』하였다.
참마음 닦는 선수행 속에 일체 공덕이 원만구족하다는 말씀이다. 성불한다는 것은 자성불의 완전한 회복이다.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모든 경전이 필경 본성을 밝히는 가르침이니 본성을 보면 일체 경전은
빈 껍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는 "원만 청정한 자성(自性)이 본사(本師)이며 이를 깨닫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고 했다.
한편,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관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하시고 끝에 그 공덕으로 열반을 증득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동안 소승의 관법이라 하여 외면했던 관법이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수행법이고, 조사선과 상보적인 효과가 있으므로 참선수행법으로 새롭게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수행자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7년 동안 내지는 7일 동안만이라도 이와 같이 닦는 자는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것이나 한가지를 얻게 된다. 즉 현상(現法)에서 구경의 지혜, 또는 나머지 생애에서 아나함(不還:윤회에서 벗어남)의 경지가 기약된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은 중생의 정화를 위하고, 슬픔을 건너기 위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위하고,
진리의 길을 위하고, 열반의 증득을 위한 단 하나의 길, 즉 사념처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에 설해진 것이다. <대념처경>
참선수행이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그 뿐만 아니라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공덕총림이라고도 하니 무루복과 유류복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효용면에서 몇 가지 부언해 보고자 한다.
* 수행과정에서 나타난 효용(效用)
선의 효용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표를 향하여 닦아가는 과정에도 많은 공덕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나타나게 된다.
그 이유는 미혹중생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무명(無明)과 번뇌가 점차 소멸되므로써 번뇌로 인하여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진리의 공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단번에 흘연히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수행자의 성실성과 수행자의 기질과 수행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오늘날 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 선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용에 목적을 두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활주변에 나타나는 선의 효용이라 할 현상들은 선수행에서 부차적으로 나타나는
지엽적 현상이므로 그것이 선의 긍극적 목표일 수가 없다. 수행과정상의 효용을 목표로 삼아서는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고 선이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유의할 일이다. 여기서 수행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효용을 몇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열거해 보기로 한다.
1) 생활상의 효용
① 마음이 안정되고 두뇌가 맑아진다. 두뇌가 맑아지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② 마음이 맑아지고 안정되며 정신집중이 잘된다. 오래 독서해도 피로하지 않다.
추리력 기억력 이해력이 증진된다...피로회복이 빠르다.
③ 성격개조 능력개발 인간관계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된다.
④ 수면 시간이 단축되고 심신이 경쾌하다.
2) 건강상의 효용
① 관념적인 병의 뿌리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마음을 바꿈으로써
병을 고치는 원리다.
병을 고착시키고 양성시키는 관념적인 요인과 병의 뿌리인 정신상의 응결상태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② 참선하면 신체내의 적·백혈구가 증가되고 혈색소가 증가하였다는 연구결과 보고가 있다. 따라서
생활의 활력이 현저히 증대된다.
③ 참선수행이 다음의 병에 크게 유효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경쇠약· 부인과병· 심장병· 위장병· 신장병·
폐결핵· 천식·히스테리· 공포증· 축농증· 특히 만성적 질환에 유효하다. 이것은 생활자체가 갖는 생명력과
자연 치유력을 활발하게 하고 강화시킨 데서 오는 결과라고 본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거나
치우쳐 있는 상태를 선수행으로 인하여 제거되고 바르게 조절되기 때문이다.
④ 산소 탄산가스 산도(酸度) 포도당 등 혈액의 함유물은 호흡에 많이 좌우된다. 따라서 좌선을 하여
호흡이 깊어지면 뇌수 활동을 정상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⑤ 좌선은 정신상태를 전반적으로 급속히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뇌파(腦波)측정 결과 나타났다.
⑥ 종래 동양에서는 기(氣)를 중요시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기르라 하였다. 그것은 천지에 가득 찬
지극히 크고 강한 정신적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길러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원만하다고 보았다. 이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또한 병이 난다. 이런데서 병은 기의 부조화라고 보았다.
병에는 좌정을 하여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기를 기르기를 권하였다.
이것이 양생법의 하나이다. 좌선은 이러한 무심정좌보다 사뭇 뛰어난 양생적 효과를 나타낸다.
3) 성격상의 효용
① 자기중심에서 폭넓은 협동적 인간으로 확대된다. 이웃과 사회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성이 생겨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 개선된다.
② 들뜨고 조급한 현대인의 심리에 무심(無心)의 공간을 열어준다. 거기서 가슴이 열리고 참 자기와
만나므로써 본심에 돌아와 깊은 안정을 얻게 된다.
③ 자칫 화를 내어 생생한 자신을 잃기 쉽다. 선은 탐, 진, 치 삼독심을 깨고 생생하고 진실한 자신에 돌아가게 한다.
④ 혼란이나 충격에 동요됨이 없는 부동심이 함양된다
4) 정신상 효용
① 종교를 향하는 마음상태를 살펴보면 스스로가 인생을 깊이 반성하여 거기서 불안을 보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한다. 선은 불안을 해소하고 공허를 메우며 궁극의 의지처를
얻게 하고 근본적 안심을 얻게 한다.
② 선은 생사에서 살되 생사에서 초월한 자기를 발견케 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다.
③ 선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준다.
④ 선은 인간에게 최고의 권위를 실현시켜 준다. 인간이 갖는 지혜와 지극히 높은 덕성과 능력을 인정한다.
인간의 신성 존엄 내지 중생의 절대적 주권을 열어준다.
⑤ 선수행을 하면 마음이 맑아져 번뇌에서 해탈하여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열린다.
참선 수행(參禪 修行)
1. 참선(參禪)
불교 수행법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참선이다.
참선은 전통적으로 훌륭한 선사들이 이 방법을 통해서 도를 얻고 인격을 완성했다.
요즘은 많은 불자들이 참선을 자신의 수행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 참선에도 크게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지관참선(止觀參禪法)이다.
이것은 마음의 온갖 산란한 번뇌를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슬기로써 모든 존재(萬法)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흔히 관법(觀法) 혹은 비파사나(Vipasyana)라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는 묵조선(默照禪)이다.
이것은 참선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것이라는 데서 나온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갖지 않고 참선을 하는 방법을 묵조선이라고 한다.
셋째는 간화선(看話禪)이다.
이것은 화두(話頭)를 근거로 하여 참선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달마조사로부터 전해 내려온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방법이다.
간화선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참선법이다.
선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일사불란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인간의 실존과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진실한 생명을 바로 보는
방법으로 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선의 본래 목적은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있다.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이 선의 목적이다.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선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이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능하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람의 기본적인 동작에서부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어느 상태에서도 참선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앉아서 하는 선 수행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해서 흔히 좌선(坐禪)을 많이 행하고 있다.
참석의 방법 중 우리 나라에서는 화두를 들고 행하는 간화선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화두란 쉽게 말해서 하나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철저한 문제의식을 마음속에 새겨서 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속에 오로지 문제의식만을 남겨 놓고 다른 어떤 것도 떠올려서는 안된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지 오직 자신의 문제 삼고 있는 화두만을 새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곧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선을 행할 때는 아주 고요하고 맑은 생각으로 몰입해야 한다.
참선은 인생의 근본 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진지하고 철저히 행해야 한다.
전문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적게는 삼 개월 혹은 일년 이상씩 철저히 모든
일상사를 다 배제하고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계속 쌓는다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 참선(參禪)과 화두(話頭)
불교에서는 자기를 상실한 인간에게 참된 자기를 회복시키고,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參禪)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참선의 방법으로는 조용하게 앉아서 하는 좌선(坐禪)이 최상이라고 말한다.
한국 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참선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의 전통이 한국 불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간화선이란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화두(話頭)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수행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본래 참선법에는 간화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 (曹洞宗)의 선법인 묵조선(默照禪)의 전통도 있다.
그러나 한국 불교에서는 조동종보다는 임제종(臨濟宗)의 기풍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면 간화선의 선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화두(話頭)란 공안(公案) 혹은 고칙(古則)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은 본래 관청에서 사용되는 문서라는
의미이지만 공정하여 범하지 못하는 법령 정도의 의미이고, 고칙이란 옛 어른들이 남겨 놓은 법칙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화두는 진리를 깨우친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의 말씀이기도 하고 몸짓이기도 하다.
화두는 참선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참선 공부의 문제지라고도 할 수 있다.
참선하는 이가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화두에는 1,700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무자(無字) 화두'이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던 조주(趙州) 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무(無)"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조주 선사가 왜 "무"라고 대답한 것일까?
바로 여기서 조주 선사가 무엇 때문에 무라고 말한 것인지를 뚫어내는 것이 바로 화두가 된다
간화선의 좌선법
좌선을 하려면 조용하고 정갈한 곳이 좋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지나치게 장소나 환경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달마 선사는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이
되어야 가히 도에 들어 간다”고 하셨다. 육조 혜능 선사는 『육조단경』에서 “밖으로 모든
경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조사스님들의 고구정녕하신 가르침이다.
좌선하는 방법은 먼저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바른 법에 대한 신심이 견고하여 영원히 물러나지 않겠다.
나고 죽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결정코 본래 면목을 깨달으리라.
반드시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이러한 원력을 양식 삼아 좌선할 때만이라도 모든 반연을 놓아 버리고 화두를 면밀히 참구해야 한다.
1. 좌선하는 방법에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가 있다.
결가부좌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자세다.
이때 두 다리를 허벅지 깊숙이 올려놓아야 자세도 안정되며 오래할 수 있다.
반가부좌는 좌복 위에 앉아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거나(길상좌)
오른쪽 다리 위에 왼쪽 다리를 올려놓는다(항마좌).
2. 허리를 자연스럽게 반듯이 세우고 양쪽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양쪽 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코와 배꼽이 수직이 되도록 한다.
3. 손은 길상좌일 경우 오른 손바닥을 왼발 위 단전 앞에 자연스럽게 놓고
그 위에 왼 손바닥을 포개어 얹는다. 양쪽 엄지를 가볍게 서로 닿게 붙인다
(법계정인=t선정인). 항마좌인 경우 그 반대로 하면 된다.
4. 입과 이는 긴장을 풀고 살짝 다물며 혀를 말아 혓바닥 아래쪽이 입천장에 닿도록 한다.
눈은 반쯤 뜨되 부릅뜨지도 말고 감지도 말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머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1~2 미터 앞바닥에 시선을 내려놓는다.
5. 음식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약간 부족한 듯하게 하라.
허리끈은 여유 있게 하고 가능한 말을 많이 하지 말며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도록 하라.
6. 호흡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라. 약간 깊이 들이 마시고 천천히 내쉰다는
생각으로 하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화두만 참구하라.
7. 몸과 마음을 통째로 화두에 바쳐 버렸다는 마음가짐으로 온통 화두와 하나 되어야 한다.
좌선이 잘된다는 생각도 잘 안 된다는 생각도 모두 망상이니 오직 화두 참구만 애써 노력하라.
간절하고 진솔하게 하되 속효심도 해태심도 내지 말라.
8. 경책(警策)- 좌선 중에 졸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 자세가 흐트러지면 죽비로 경책을 한다.
경책은 바른 수행을 돕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이다. 경책을 할 때는 소임자가 경책 받을 사람의
오른쪽 어깨 위에 죽비를 가볍게 올려놓고 지그시 누르면서 경책할 것을 알린다.
그러면 경책 받을 이는 졸음에서 깨어 합장하고 머리를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여 어깨로 경책 받도록 한다.
경책 받은 다음에도 합장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바른 자세로 되돌아간다.
9. 좌선 시간은 50분 앉았다가 10분 포행하는 게 기본이지만 너무 시간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방선放禪 시간에 선방 안팎을 천천히 걸으면서 다리를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포행 시에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된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좌선을 하되 자세한 사항은 경험있는 이에게 배워서 하는 것이 좋다.
간화선(看話禪)이란 무엇인가?
간화선(看話禪)이란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본래 성품을 바로 보는 참선법이다. 본래 성품을 보면 깨닫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여 깨닫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견성성불이란,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간화선을 화두를 참구하여 깨치는 수행법이라 하여 일명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한다.
간화선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자기 성품을 깨닫는 여러 참선법 가운데 가장 발달된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간화선의 원류가 되는 조사선(祖師禪)은 4세기경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건너와 전한 것에서 유래한다.
7세기경 당나라 시대에 6조가 된 조계 혜능(638~713) 선사가 돈오선법을 제창하면서 선종의 실질적인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 이후 당, 송 나라 시대를 거치며 수 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하였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면 대혜 종고(1089~1163) 선사가
조사와 수행자 사이의 문답을 정형화한 화두를 일상 생활 가운데 참구하는 간화선을 제창하였다.
대혜 선사가 제시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한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는 생활 수행법이다.
간화선이 뛰어난 점은 깨달은 선지식이 깨달은 자리를 바로 보라고 제시한 화두를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견성 성불하기 때문이다.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화두(話頭)란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하신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긴 말이다.
이 말길과 생각의 길로는 알 수 없는 화두를 알기 위해 의심하여 온 마음이
화두가 하나가 되어 마침내 그 화두를 타파하면 견성성불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화두를 타파하면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다. 또 하늘에 백천 개의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깨달은 세계는 허공과 같이 무한히 넓어 한정이 없다.
그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평등해서 우열이 없고, 귀천ㆍ친소ㆍ시비가 없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한없이 자비로우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자유자재한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스스로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도 같다
초심자가 간화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발심(發心)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다.
정견을 갖추고 진정한 발심이 되어 있고 눈 밝은 스승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기초 수행없이
바로 간화선 수행을 해도 된다. 그러나 부처님 교법(敎法)에 대한 정견과 발심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간화선을 하려면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초심자들은 간화선 수행을
하기 전에 교법을 바르게 이해하여 확고한 신심(信心)을 세우고 수행을 통하여 기필코
깨닫고야 말겠다는 발심을 해야 한다.
간화선에서 정견을 중요시하는 까닭
부처님 가르침대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다.
정견正見을 갖추고 진정한 발심發心이 되어 있고 눈 밝은 스승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예비단계나 기초수행이 필요 없이 바로 간화선 수행에 들어가도 된다.
그러나 부처님 법에 대한 정견과 발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화두를 들고 애쓴다 해도
그 화두에 간절한 의심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초심자들은 바로 화두를 들기 전에 법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추고 진정한 발심을 하여 불퇴전의 신심과 크나큰 원력을 세워야 한다.
법에 대한 안목이란 정견을 갖추는 것이다. 정견正見이란 법에 의한 바른 가치관의 수립을 말한다.
그것은 중도 연기에서 바라보는 바른 세계관, 인생관의 정립이다. 그래야만 ‘불교란 무엇이고 어떤 가르침인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수행해야 하는가?’와 같은 불교 수행자가 갖춰야 할 기본을 충실히 갖출 수 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걷고 있다. 그가 길을 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가고자 하는 곳에 행복과 평화, 기쁨과 자유 그리고 휴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여러 길로 그 목적지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빠르고 편하게 효율적인 길을 가려 할 것이다.
목적이 정확하고 가는 길을 안다면 나그네는 주저 없이 당당하게 길을 갈 수 있다.
서산 스님의 게송에 이런 글이 있다.
눈 온 들길을 걷는 나그네여
갈팡질팡 걷지 말라.
오늘 그대의 발자국은
뒷날 후인의 이정표가 되리라.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광야란 삶의 현재 상황을 말한다.
그 눈 덮인 광야에서 어느 길을 가든 목적 의식을 가지고 똑바로 걸어가야 한다.
이리저리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 정견의 확립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정견을 바탕에 두고 간화선에 들어갈 때 방황하지 않고 바로 걸어갈 수 있다.
정견의 확립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연기·무아·공·중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기 전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는 삶의 본 모습이다.
여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 수행자로서 갈 길이 명확해진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수행자의 삶의 목표도 뚜렷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곧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가 아주 분명해 진다는 말이다.
연기와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면 그것을 자기 삶을 통해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생긴다.
그래서 연기와 무아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여 이것이 인격화되는 길을 열어 간다.
간화선을 비롯한 모든 불교 수행은 이렇게 연기법을 인격화하고 내면화하기 위한 길이다.
법 곧 진리를 확인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법이 자신과 함께 하여 내가 걷는 길이 곧 진리의 길이 된다.
그럴 때 어떤 장애에도 걸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사람의 발자국은 뒷날 다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훌륭한 귀감이 되는 것이다.
제1장 조사선과 그 역사전 전개
1. 조사선의 의미와 그 흐름 |
조사선의 의미
죽이는 칼(殺人刀)과 살리는 칼(活人劍), 이것은 존재의 본래 모습이자 살아 흐르는 삶의 알맹이다.
그러니 죽임에 대해 말하더라도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삶에 대해 말하더라도 곧 목숨을 잃고 만다.
깨달음 그 자리는 어떤 성인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니 어거지로 깨닫고자하는 이는 물 속의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와 같다.
殺人刀活人劍 乃上古之風規 亦今時之樞要. 若論殺也 不傷一毫. 若論活也
喪身失命. 所以道 向上一路 千聖不傳 學者勞形 如猿捉影. - 『벽암록』제12칙.
洞山麻三斤 조사선祖師禪이란 깨달음을 완성한 모든 조사들이 본래 이뤄져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바로 눈앞에 들어 보인 법문이다. 이 법문에 들면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명확히 깨달아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재한 삶을 누리게 된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말이있다.
가을 바람에 잎이 다 떨어지면 나무의 본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에 맑은
가을 바람이 충만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이와 같이 누구라도 조사선의 법문을 들으면 말과
생각이라는 자아의 존재방식이 허물어져 법계의 참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조사선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흔다섯 해 동안 길에서 길로 다니며 쉼 없이 가르침을 펴다가 마침내
스스로 체득하신 깨달음의 세계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으로 마하가섭 존자에게 전하니, 이 일의 기연(機緣)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많은 대중 앞에 보이셨는데 그 대중들
가운데 오직 마하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마음을
보이시자 가섭존자가 그 마음을 바로 깨닫고 미소로 화답해 드린 것이다.
‘꽃을 드시자 빙그레 웃네’ 이른바 ‘염화미소(拈花微笑)’가 바로 이것이다.
선(禪)은 염화미소의 뜻 깊은 기연으로 탄생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 염화미소의 기연 외에도 두 번 더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하였으니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전해주신 법은 그 뒤로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 끊어짐이 없이 계승되었다.
인도에서 스물여덟 번째로 이 법을 물려받은 분은 보리 달마(菩提達摩) 조사이다.
달마 조사는 중국으로 건너와 부처님의 진정한 선법(禪法)을 전하여 동토(東土)의 첫 조사가 되었던 것이다
조사선의 흐름
중국의 선종(禪宗)은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조사이자 중국 조사선의 첫 번째 조사인 달마선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리 하여 부처님께서 전하신 선법은 초조 달마(達摩 ?~?), 이조 혜가(慧可 487~593), 삼조 승찬(僧璨 ?~606),
사조 도신(道信 580~651), 오조 홍인(弘忍 594~674), 육조 혜능(慧能 638~713) 선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어 선종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마하가섭 존자로부터 혜능 선사까지 선법을 이어온
전법조사들은 모두 서른세 분이다. 그래서 삼십삼 조사 또는 삽삼조사?(三祖師)라 일컫고 있다.
선은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마하가섭 존자에게 마음을 보여주신 일에서 싹이 텄다.
이 선법이 여러 조사들을 거쳐 중국에 이르게 되었으니, 달마 조사께서는 소림사에서 면벽구년(面壁九年)으로
마음자리를 보이셨고 역대 조사들께서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가며 전해 왔기에 이를 조사선이라 한다.
조사선을 중국에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분이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이다.
혜능 선사는 모든 사람이 본래 지닌 자성(自性)을 직시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몰록 깨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천명하였다. 중국의 선종이 면면히 흐를 수 있었던 것은 혜능 선사가
이러한 돈오 선법을 온몸으로 펼쳐 냈기 때문이다.
혜능 선사의 선법을 확고히 다진 분은 선사의 제자인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 선사이다.
그는 오조 홍인 선사의 문하에서 선법을 익혔던 신수(神秀 606~706) 선사와 그의 문하
보적(普寂 651~739) 선사가 가르친 선을 북종선(北宗禪)이라 부르고, 혜능 선사의 선법을
남종선(南宗禪)이라 하였다. 신회 선사는 북종선이 점차적인 닦음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점수법(漸修法)으로 조사선의 방계(傍系)이며, 혜능 선사의 남종선이 달마 조사가 전한
돈오법(頓悟法)으로 정통이라 하였다. 곧 신수 선사의 북종선은 점차적으로 이르는 점수법인
반면 혜능 선사의 남종선은 마음을 단도직입하여 견성하는 돈오법으로 이 두 선법은 수행과
깨달음의 길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신회 선사 이후 조사선을 크게 융성시킨 분들은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와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 문하의 선지식(善知識)들이다. 이들은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강서(江西)와 호남(湖南)지방을 중심으로 조사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마조 선사의 법은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가 전했고, 석두 선사의 법은
청원 행사(靑原行思 ?~741) 선사가 전했다. 마조와 석두 선사는 조사선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거두어 선종을 역사 속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하였다.
예를 들면 마조 선사의 많은 제자 중에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가 있다.
백장 선사는 선원(禪院)의 청규(淸規)를 제정하고 중국에 최초의 선 수행공동체인 총림(叢林)을 만들었다.
또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생활 원칙을 스스로 실천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선원공동체의 기틀을 다져 선종을 역사의 반석 위에 우뚝 서게 하였다.
마조 선사와 석두 선사 문하의 많은 선지식들은 또 그 문하에 수 많은 선사들을 배출하여 선법이
중국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널리 확산되게 하였다. 9세기에서 10세기 중반에 이르면 석두계에서는
조동종·운문종·법안종이, 마조계에서는 임제종·위앙종의 오가(五家)가 성립되었고, 다시 11세기
중반에 들면 임제종에서 황룡파와 양기파가 분립되니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중국
선종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이후 오가칠종이 점차 쇠퇴하여 12세기 중반이 되면 조동종 계통의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
선사가 묵조선(?照禪)을 선양하게 되었고, 임제종 계통의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 선사는
이를 비판하면서 간화선(看話禪)을 체계화하여 널리 확산시켰다.
그러므로 조사선은 다시 수행방법상 묵조선과 간화선으로 나뉘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대혜 종고 선사가 체계화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즉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스님들께서
마음의 본래 면목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다.
2. 한국선의 역사와 전통
선의 전래와 조사선의 수용
한국의 간화선은 육조 혜능 선사가 정착시킨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조사선의 정맥이다.
한국에 이 선법이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기로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선법을 받아와 이 땅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왔고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혜능 선사의 선법을 이은 선종이라는 뜻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조계종’이라는 종명 또한 혜능 선사가 머물며 돈오선법을 펼쳤던 산 이름에서 유래한다.
당송시대부터 혜능 선사를 조계 혜능(曹溪慧能)으로 불려 온 점 으로 볼 때 조계종은 그 정체성을
조사선의 정맥을 잇고 있는데 두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구산선문과 그 선문을 연 개산조(開山祖)는
『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1600年 正月 八公山 夫人寺 開板 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① 가지산문 도의(道義 783~821) 국사
② 사굴산문 범일(梵日 810~889) 국사
③ 사자산문 도윤(道允) 국사
④ 성주산문 무염(無染) 국사
⑤ 봉림산문 현욱(玄昱 787~869) 국사
⑥ 희양산문 도헌(道憲 824~882) 국사
⑦ 동리산문 혜철(惠哲 785~861) 국사
⑧ 수미산문 이엄(利嚴 870~936) 국사
⑨ 실상산문 홍척(洪陟) 국사
『선문조사예참문』에서는 가섭 존자로부터 육조 혜능 선사에 이르는 서른세 분의 삽삼조사
법계를 기록하고 난 뒤 구산 산문의 개산조를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 국사는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선법을 받아왔다.
도의 국사는 지장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참구하여 의심 뭉치인 의단(疑團)을 풀고 드디어 막힌 체증을 뚫었다.
이를 본 지장 선사는 마치 돌 속에서 아름다운 옥을 고른 듯, 조개 껍질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
기뻐하면서 “진실로 이런 사람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누구에게 전하랴!”
洪州開元寺, 就於西堂智藏大師處, 頂謁爲師, 決疑釋滯. 大師猶若?石間之美玉, 拾蚌中之眞珠 謂曰 ...
“誠可以傳法, 非斯人而誰” -『조당집』제17권. 하면서 법명을 ‘도의道義’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조사선은 우리나라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도의 국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도의 국사가 의단을 풀었다는 내용을 보면 국사는 지장 선사에게 참문(參問)하여
가르침을 받고 스승이 전해준 말씀을 간절하게 참구하다가 깨달았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당시 조사선의 수행법은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전의 선법이었다.
그렇지만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이전 조사선에서도 화두 참구와 같은 방식의 수행법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건국이념은 불교였다.
성종 이후에는 유학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불교는 지금까지 기능해 왔던 역사 형성력이
약화 되었고 기존의 문벌 귀족과 유착되면서 보수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각 국사 의천 스님 이 출현했고 스님은 문벌귀족과 결탁한 왕권강화라는
왕실의 정책에 부응하여 경전을 수집하고 속장경을 조판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한편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천태종의 출현으로 선종은 다소 위축되었는데, 12세기에
접어들어 교단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기반을 다져 나갔다.
가지산문의 원응 학일(學一:1052 ~1144) 국사와 사굴산문의 대감 탄연(坦然:1070~1159) 국사는
선종의 부흥을 위해 활약 했던 분들이다. 또한 선승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당시 고려 선에
사상적 영향을 크게 미쳤던 이자현(1061~1125) 거사는 활기찬 거사불교시대를 꽃피웠다.
이러한 두 흐름은 사상과 실천에서 상호 교류를 통해 북송에서 들어 온 새로운 선사상을 수용하면서
이전의 선풍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갔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능엄경』이 유행했는데 중국에 유학한
의천 스님은 『능엄경』을 들여와 능엄도량을 개설하고 주석서를 정리하여 『능엄경』을 크게 펼쳤다.
이자현 거사는 이 영향으로 처음에는 선사상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능엄경』을 받아들였으나
뒷날 설봉(雪峰:991~1067) 선사의 어록을 이 무렵의 고려 선승을 대표하는 선사 가운데는 담진(曇眞)선사가 있다.
선사는 송나라에 세 해 동안 유학하면서 부산 법원(浮山法遠 991~1067) 선사에게 선법을 받고 변경에 있는
정인사(淨因寺)의 주지로 주석하기도 했다. 스님은 유학을 통해 북송 선종 계의 동향과 사상적 흐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님은 예종 13년 안화사(安和寺) 주지로 있으면서 유학생활을 통해 익힌 선법과
좌선규칙을 폈는데 이것은 고려 선풍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성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담진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들이 왕사, 국사에 오르면서 담진 선사 문하의 선승들이 불교계를
이끄는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탄연 선사도 임제종의 황룡 혜남의 선법을 이은 개심(介諶:1080~1148)에게
서신을 통해 인가를 받고 그의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선사가 개심 선사에게 인가
받은 일은 선종사서인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담진 선사를 비롯한
탄연 선사와 학일 선사 같은 분들이 북송의 선사들과 교류 하면서 고려에는 새로운 선적(禪籍)이
들어와 송의 선문학이 도입되었고 공안선이라는 새로운 선풍이 자리를 잡게 된다.
간화선의 수용과 정착
고려시대 무신집권기에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선사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선풍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보조 국사가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순천 송광사)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운동인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전개하자, 선을 닦는 수행자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
이때 비로소 대혜(大慧 1089~1163) 선사가 세운 간화선법이 보조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다.
국사는 수행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더불어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세웠다. 여기서 간화경절문이란 화두를 들고 바로
질러가는 간화선 수행법을 말한다. 국사는 뛰어난 근기의 수행자를 위해 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국사는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대혜어록』은 중국에서 간화선을 정착시킨 대혜 선사의 어록이다. 이 글을 읽고 깨친 보조 국사는 간화선의
수행법과 이치에도 저절로 눈이 열렸을 것이다. 국사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절요사기(節要私記)』에서
간화선 수행의 필요성과 무자(無字) 화두를 들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간화선을 고려불교에 본격적으로 수용한 분은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 국사이다.
혜심 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안(公案)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 『선문염송(禪門拈頌)』 을 편찬하였다.
이 공안집은 수행승들이 화두(話頭)로 공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혜심 선사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저술하여 수행자들이
‘무자화두(狗子無佛性話)’에 들어 공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병통과 그 증상에 대하여 자세히 밝혀 놓았다.
혜심 선사 이후 간화선의 수행법과 가풍은 수선사의 열여섯 국사를 통하여 계승되었다.
물론 이분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중국에서 간화선 수행법이 몇 차례 고려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본격적으로 원나라의 간섭기에 접어들게 된다.
무신집권기에 고려불교를 주도하던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이 퇴조하고 충렬왕 이후 선종의 가지산문과
천태종의 묘련사 계열과 법상종 계통이 고려불교의 역사 전면에 새롭게 떠오르게 된다.
수선사가 퇴조하면서 간화선의 흐름은 새롭게 떠오른 일연一然(1200~1289) 선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이 주도하기에 이른다. 일연 선사는 젊은 시절 밀교와 관음신앙에 뜻을 두었으나 그 뒤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멀리 목우자 화상의 법을 잇고(遙嗣牧牛和尙) 1249년에는 남해 정림사에서
『선문염송』을 열람하고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을 저술하였다. 이 무렵 고려의 많은
선승들은 원나라에 들어가 구법활동을 하였고 이들을 통해 많은 선적과 새로운 선법이 도입되면서
고려 선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간화선의 발전과 완전한 정착
간화선이 이 나라에 확고하게 정착된 것은 고려 말에 활약한 세 선지식에 의해서였다.
이 세 선지식은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1),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5) 선사를 말한다.
이분들은 몸소 중국으로 들어가 선문의 진정한 종사들과의 거량을 통해 임제종의 바른
법맥을 이은 뒤 고려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세 선지식은 당시 고려 선문의 새로운 가풍으로
형성된 몽산 선사의 가르침대로 깨달은 뒤 본색종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는 엄정한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태고 보우 국사는 스무 해 동안의 뼈를 깎는 정진으로 서른일곱 살에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고
서른여덟 살 때 활연히 대오(大悟)했다. 선사는 그 뒤 원나라 하무산(霞霧山)에 머물던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를 찾아가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 왔다.
나옹 혜근 선사는 스물일곱 살에 크게 깨치고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십 년 동안 머물렀다.
스님은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처음에는 평산 처림(平山處林 1279~1361)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拂子)와
함께 그의 선법을 전해 받았고, 다음에는 인도에서 건너온 선지식인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사와
불자 및 범어로 쓴 서신을 받아 왔다. 백운 경한 선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크게 깨달은 뒤 중국에 가서
태고 국사와 마찬가지로 석옥 청공 선사의 법을 받아왔다. 백운 선사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 선사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사실이지만 간화선을 고려 말에 널리 확산하여 정착시킨 분은 역시 태고 보우 국사이다.
보우 국사는 본분종사의 가풍으로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초불월조(超佛越祖)의
격외선지(格外禪旨)에 따라 ‘대장경의 모든 가르침과 천칠백 공안과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일지라도
본분상에서 볼 때 다 부질없는 것’이라 설파했다. 국사는 간화선 수행을 하되 화두를 참구하여 의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화두를 타파한 뒤에는 본색종사를 찾아가 깨달은 경지를 확인받으라고 가르쳤다.
곧 태고 선사는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은 뒤 본색종사를 찾아가 묻고 바른 깨달음인지 아닌지를 결택
받아야 한다는 간화선 수행체계를 명확히 세워 놓은 것이다. 태고 보우 국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로 숭앙받는 이유는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 체계를 확립한 점과 더불어 중국에서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 와서 이 법맥이 조선불교를 통해 끊어짐이 없이 전해 내려 왔기 때문이다.
다음은 보우 국사가 석옥 청공 선사를 만나 법을 거량하여 임제선법을 전해 받은 내용이다.
석옥 화상이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면서 물었다.
“우두(牛頭) 선사가 사조(四祖)를 만나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온갖 새들이 꽃을 입에 물고 왔는가?”
“부귀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기 때문입니다.”
“사조를 만난 뒤에는 무엇 때문에 꽃을 입에 문 새들을 찾아볼 수 없었는가?”
“가난하면 아들도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공겁(空劫) 이전에도 태고(太古)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석옥 화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화상은 다시 가사를 주며 믿음을 표하며 말했다.
“이 가사는 오늘 전하지만 이 법은 부처님께서 전하시어 오늘에 이른 것이요.
이제 그대에게 전해 주니 잘 보살펴 지녀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오.”
또 주장자를 집어 들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것은 노승이 평생토록 지녔던 것이오. 오늘 그대에게 주니 그대는 이것으로 길잡이를 삼으시오.”
屋跋 所獻歌以授 乃問牛頭未見四祖時 因甚百鳥啣花 曰富貴人皆仰 曰見後因 甚百鳥啣
花覓不得 曰淸貧子亦?屋又問 空劫已前 有太古耶 無太古耶 曰空生太古中 屋微笑云
佛法東矣 遂以袈裟表信曰 衣雖今日 法自靈山 流傳至今 今附於汝 汝善護持 毋令斷絶拈?
杖囑云 是老僧平生用不盡的 今日附? ?將這箇 善爲途路. - 『太古和尙語錄』『韓國佛敎全書』
조선시대의 간화선 전승과 근세의 간화선 재흥
간화선법은 보우 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완전히 정착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보우 국사의 선맥은 환암 혼수(幻菴 混修 1320~1392),
구곡 각운(龜谷覺雲), 벽계 정심(碧溪正心),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 1534), 부용 영관
(芙蓉靈觀 1485~1571) 선사로 이어졌고, 영관 선사에 이르러 다시 청허 휴정
(淸虛休靜 1520~1604) 선사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선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서산 선사 문하에는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선사와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두 거장이 나왔고 나왔고 이 가운데 편양 언기 선사의 문파가 뒷날까지 번창하게 되었다.
이 선맥은 다시 편양 선사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55),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 1704),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선사로 이어진다.
근세에 와서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분은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와
용성 진종(龍成震鍾 1864~1940) 선사이다. 경허 선사는 용암 혜언(龍巖慧彦) 선사의 법을 이었다.
경허 선사의 출현은 꺼져가는 간화선의 선풍을 되살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경허 선사의 제자로는 수월(水月 1855~1928)·혜월(慧月 1855~1928)·만공(滿空 1871~1946)·
한암(漢岩 1876~1951) 선사 같은 분들이 있다. 용성 선사는 환성지안 선사에게 법맥을 이었다.
간화선에서는 무엇보다도 법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환성 선사 이후 적막하던 종
문이 이분들로 말미암아 다시 활기를 되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분들의 선풍은 모두 조사선에
바탕을 둔 간화선 일맥이었다.
재개자도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는가?
간화선은 출·재가를 구별하지 않는다.
선 수행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다.
이 점은 혜능 선사가 『육조단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재가도 할 수 있으니 수행하려고 꼭 절에 있을 필요는 없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는다면 서방정토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고, 재가에서도
만약 수행하면 동방예토의 사람이 선善을 닦는 것과 같다. 다만 스스로 원을 세워 집에서도
청정함을 닦는다면 그곳이 곧 서방정토이다.
善知識 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 在寺不修 如西方心惡之人
在家若修行 如東方人修善. 但願自家修淸淨 卽是西方. - 『六祖壇經』
이렇듯 혜능 선사는 수행하는 데에 재가와 출가, 마을 집과 절의 구분이 없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든 진정으로 발심하여 간절하게 마음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사선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간화선에서도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없다.
이는 대혜 선사의 『서장』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대혜 선사와 편지를 주고받은 증시랑·강급사·부추밀·이참정 같은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재가자였다.
또한 태고 보우 선사의 『법어』를 봐도 선사가 법어를 베푼 대상이 공민왕·오수·장해원사·최진사·
백충 거사 같은 재가자들이 많다. 대혜 선사와 보우 선사 당시 간화선을 수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대부나 거사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대 선사 스님들은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재가자들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자상하게 지도하였다.
이러한 점은 간화선이 살림살이를 하며 살아가는 재가자들도 수행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행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는 일상 속에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로 보면 간화선을 출가수행자들만이 하는 특별한 수행법으로
여기거나 간화선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선원에 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출가하여 선지식을 모시고 오롯하게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출가자들이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두 공부는 재가자라고 하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다.
선의 본질에서 보면 세상사 모두가 불법이 팔팔하게 드러나 있는 법의 현장이다.
그래서 일찍이 부대사(傅大師)는 『행로난行路難』에서 “불성의 온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全體現前)”고 했으며, 마조 스님은 “평상시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 했다. 장작 패고 나물 캐는
일상생활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진리는 그저 평범하다.
그것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데에 있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들의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어디에나 현전해 있다.
이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도가 없기에 일상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선수행의 바른 길이다.
서산 선사의 다음 말씀은 이러한 수행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자네.
맑은 물 푸른 산을 내 멋대로 오가고
어촌과 주막거리도 내 집인양 편쿠나.
세월이 가나오나 내 알 바 아니건만
봄이 오니 옛처럼 풀잎 다시 푸르네.
飢來卽食 困來卽眠 緣水靑山 任意逍遙 漁村酒肆
自在安閑 年代甲子 總不知 春來依舊草自靑. - 『禪家龜鑑』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도 말한다.
현전하고 있는 큰 작용에는 특별한 법칙이 없다.
두두물물 모든 것이 진리가 드러난 모습이다.
大用現前不存軌則. 物物皆眞現. - 『雲門錄
운문 선사는 ‘현실에 있는 현상세계 그대로가 공안’이라는 말이다.
일상과 진리의 세계는 둘이 아니다. 다만 착각에 빠져 둘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화두 공부는 바로 이 둘로 나누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 선사는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을 하던 끊임없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선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어떤 사람은 ‘간화선은 농경문화 속의 목가적인 옛 풍경 속에서나 가능한 수행법이 아니냐’고
묻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진리는 농경문화 속에만 있고 산업사회에는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간절히 수행해 나간다면 이 척박한 삶의
현장이 바로 극락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세계가 펼쳐지는가?
화두를 타파하여 깨치게 되면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고 하늘에 백천 개의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그 세계는 허공과 같이 무한히 넓어 한정이 없다.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평등해서 우열이 없고, 귀천도 없고, 친소도 없고, 시비도 없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또 모든 존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에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 된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내게도 남에게도 한없이 자애로우며, 모든 순역 경계에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어떤 별천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력하게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일러 준다는 것조차 맨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조주 선사가 말했듯이 차나 한잔 마시는 일이다. 더 이상 다시 보태고 얻을 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완전히 갖추어져 있기에 불가득(不可得)이요 불가설(不可說)이다.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급해 놓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혜 선사는『서장』에서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확철대오하면 가슴 속이 환히 밝음이 마치 백천의 해와 달 같아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밝게
요달하며 가는 털끝만큼의 다른 생각도 없으니, 비로소 구경과 상응하게 된다. ……
모름지기 당사자가 스스로 볼 수 있고 깨칠 수 있다면 자연히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도리어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
廓徹大悟 胸中皎然 如百千日月 十方世界 一念明了 無一絲毫頭異想
始得與究竟相應. … 須是當人 自見得自悟得 自然不被古人言句轉 而能轉得古人言句. - 『書狀』
이렇듯 깨치면 환하게 밝아진다.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 길이 정확하고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불안해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고 앉는
자리 자리마다 완성된 삶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인다. 또한 홀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다. 이것을 독탈무위(獨脫無爲)라고 한다.
그는 의존할 바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깨달은 이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대혜 선사의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는 무심무념(無心無念)의 본래면목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바른 깨달음이며 이 무심무념의 경지가 바로 견성성불이라 하였다.
그는 깨달은 사람을 대요사인(大了事人)이라고 했다. 대요사인이란 모든 일과 현상을 남김없이
요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오 선사는 이 대요사인의 경지를 이렇게 말한다.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 이르러 근원을 사무쳐 꿰뚫으면 흘연히 본체가 허공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지라 삼라만상도 그것을 가두지 못하고 성인과 범부도
그것을 어찌하지 못한다. 언제나 남김없이 드러나고 어디서나 숨김없이 드러나니 본래면목이 바로
이것이며 본지풍광이 바로 이것이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것이니, 오는 시간이 다하도록 깨달은 이를 얽어 멜 생사윤회가 어떻게 있겠는가?
이와 같은 무심한 경계와 무념의 참된 가르침은 참으로 날카로운 사람이라야 거뜬히 실증하게 된다.
본래의 현묘한 마음을 바로 꿰뚫으면 옛과 지금을 꿰뚫어 담연히 움직이지 않으니 만년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만년이다. 영원히 세어나감이 없이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 뒤바뀌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마음을 가리킴에 자성을 보고 바로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대도를 체득한 이는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이다. 그러니 만 가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더라도
어찌 그의 정신을 흔들어 생각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다만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키는
것이 마치 바보 같고 천치 같으나, 문득 일에 부딪치면 회오리바람 돌고 번개치듯 하여 깨달음의
기틀에 합당치 않음이 없다.
到一念不生處 透徹淵源 忽然自得 體若虛空. 莫窮邊量 亘古亘今 萬像羅籠不住
凡聖拘碍不得 淨裸裸赤灑灑 謂之本來面目 本地風光. 一得永得 盡未來際 更有甚生死
可爲滯碍. 此箇無心境界 無念眞宗 要猛利人 方能著實. 直透本來妙心 亘古亘今 湛然不動
萬年一念 一念萬年. 永無?漏 一得永得 無有變易 乃謂之直指人心 見性成佛. 得道之士
徹證無心 雖萬機頓赴 豈撓其神干其慮哉. 只守閑閑地 如痴似兀 及至臨事 風旋電轉 靡不當機. - 『圓悟心要』
깨달은 이는 허공과 같아 어떤 사물도 그를 가두지 못한다.
깨달은 이는 범부에도 성인에도 구속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
이렇게 깨달음은 크나큰 자유로 어떤 경계에도 구속 받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마음이 쉬고 무심한 일 없는 도인인지라 만 가지 일들이 함께 닥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인은 일이 없는 세상 밖에서 노니는 한가한 신선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달은 이는 그 한가한 마음, 일 없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빈틈없이 바르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전국 선원(禪院) 현황
선원은 참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사미·사미니, 비구·비구니들이 오도에 들기 위해 화두
참선에 들어 수행 정진하는 기관으로 우리나라에는 총 90여개 선원에서 1800여 명의 납자들이 안거에 들어 정진하고 있다.
강원지역 | 비구 선원 | 백담사 무금선원, 상원사 청량선원, 신흥사 향성선원, 용화사 법보선원(인제) |
비구니 선원 | 육수암 칠보선원, 지장암 기린선원 | |
서울, 경인지역 | 비구 선원 | 상원사 용문선원, 용화사 법보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망월사 천중선원, 보덕사 보덕선원, 보광사 보광선원 |
비구니 선원 | 회룡사선원, 화운사 능인선원, 승가사 제일선원 | |
경남지역 | 비구 선원 | 해인총림선원, 영축총림선원, 쌍계사 금당선원, 용화사 당래선원, 극락암 호국선원,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원, 정각사 죽림선원, 두방사 남명선원, 칠불암 운상선원, 표충사 서래각선원, 벽송사 벽송선원 |
비구니 선원 | 선원/ 대원사 동국제일선원, 영각사 극락선원,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보현암선원, 삼선암 반야선원, 약수암 죽림선원, 석남사 정수선원 | |
경북지역 | 비구 선원 | 부석사 봉황선원, 대승사 대승선원, 기기암선원, 봉암사 태고선원, 고운사 고금당선원, 불국사선원, 각화사 태백선원, 수도암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운부암선원 |
비구니 선원 | 금선선원, 윤필암 사불선원, 불영사 천축선원, 용흥사 백운선원, 흥륜사 천경림선원, 은해사 백흥암선원, 금련선원, 운문사 문수선원 | |
대구지역 | 비구 선원 | 동화사 금당선원, 도성암선원 |
비구니 선원 | 부도암선원, 내원암선원, 양진암선원 | |
부산지역 | 비구 선원 | 범어사 금어선원, 해운정사 금모선원, 묘관음사 길상선원 |
비구니 선원 | 대성암선원 | |
전남지역 | 비구 선원 | 조계총림선원, 고불총림선원, 천은사 방장선원, 대흥사 동국선원, 태안사 원각선원 백련사 만덕선원, 불갑사 무각선원, 화엄사 선등선원, 운주사 운주선원, 성륜사 금강선원 |
비구니 선원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금탑사 금탑선원, 연흥사 금장선원 | |
전북지역 | 비구 선원 | 금산사 서래선원, 실상사 백장선원, 월명암 사성선원, 성관사 대각선원, 내소사 봉래선원, 선운사 참당선원 |
비구니 선원 | 승연사선원, 신광사 조인선원, 위봉사 위봉선원, 팔성사 성적선원 | |
충남, 대전 지역 | 비구 선원 | 덕숭총림선원, 갑사 대적석원, 개심사 보현선원, 대자암 무문관선원, 향천사 천불선원, 학림사 오등선원, 마곡사 태화선원, 천장암 염궁선원 |
비구니 선원 | 보덕사선원, 견성암선원, 세등선원, 법계사선원, 복전암 복전선원 | |
충북지역 | 비구 선원 | 법주사 총지선원, 복천암선원, 광명선원, 공림사 심인선원 |
비구니 선원 | 미타사선원, 수정암선원, 탈골암 대휴선원 | |
제주지역 | 비구 선원 | 남국선원 |
해외지역 기본선원 | 비구 선원 | 하와이 무량사 태평선원 |
기본 선원 | 동화사 기본선원 |
선 원 | 주 소 | 우편번호 | 전화번호 |
해인총림선원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 678-895 | 055)934-3121 |
조계총림선원 |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 | 540-933 | 061) 755-0107 |
영축총림선원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통도사 | 626-861 | 055) 384-6760 |
덕숭총림선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정혜사 | 340-921 | 능인선원 041) 337-6014 |
고불총림선원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백양사 | 515-854 | 고불선원 061) 392- 7502 운문선원 061) 392-7706 |
선 원 | 주 소 | 우편번호 | 전화번호 |
각화사 태백선원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53-9 | 755-844 | 054)672-2207 |
갑사 대적선원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 314-835 | 041)857-3878 |
개심사 보현선원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 개심사 | 356-833 | 041)688-4583 |
고운사 고금당선원 |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고운사 | 769-822 | 054)833-2324 |
송림사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 367-841 | 043) 833-1029 |
광산사 통지선원 |
경남 마산시 내서읍 신감리 474 | 630-851 | 055)231-1601 |
극락암 호국선원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통도사 | 626-861 | 055)382-7083 |
기기암선원 (은해사) |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540 은해사 | 770-892 | 054)335-1514 |
남국선원 | 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 산39 | 697-050 | 064)733-2278 |
남산사 고경선원 |
경남 함양군 박전면 양백리 | 676-873 | 055)964-2230 |
내소사 봉래선원 |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내소사 | 579-890 | 063)583-4233 |
대승사 대승선원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 대승사 | 745-832 | 054)552-7105 |
대자암 무문관선원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 314-835 | 041)857-5880 |
대흥사 동국선원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 536-811 | 061)535-0767 |
도성암선원 |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양동 115 | 711-883 | 053)614-9167 |
동화사 금당선원 |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 | 701-430 | 053)982-0101 |
두방사 남명선원 |
경남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325 두방사 | 660-845 | 055)761-6351 |
마곡사 태화선원 |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 314-872 | 041)841-6221 |
망월사 천중선원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3 망월사 | 480-855 | 031)873-7744 |
묘관음사 길상선원 |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1 묘관음사 | 619-951 | 051)727-2035 |
백담사 무금선원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690 백담사 | 252-821 | 033)462-3351 |
백련사 만덕선원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11 백련사 | 527-883 | 061)432-0837 |
범어사 금어선원 |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 | 609-844 | 051)508-3722 |
법주사 총지선원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 376-863 | 043)543-0481 |
벽송사 벽송선원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 | 676-914 | 055)962-5661 |
보광사 보광선원 |
서울시 도봉구 우이동 산 63-9 보광사 | 142-090 | 02)993-3808 |
보덕사 보덕선원 |
서울시 성북구 정릉 4동 보덕사 | 136-849 | 02)914-4235 |
복천암선원 (법주사)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 376-863 | 043)543-4774 |
봉암사 태고선원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 | 745-903 | 054)571-9088 |
부석사 봉황선원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 750-824 | 054)633-3464 |
불갑사 무각선원 |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불갑사 | 513-832 | 061)352-8097 |
불국사선원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 780-400 | 054)746-6361 |
상원사 용문선원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상원사 | 476-840 | 031)773-4634 |
상원사 청량선원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 상원사 | 232-941 | 033)332-6666 |
서운암 무위선원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통도사 | 626-861 | 055)382-7082 |
선운사 참당선원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05 참당암 | 585-932 | 063) 563-3440 |
성관사 대각선원 |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성관사 | 597-841 | 063)353-0396 |
성륜사 금강선원 |
전북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1 성륜사 | 516-911 | 061)363-0081 |
수도암선원 |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2 | 740-962 | 054)437-0700 |
신흥사 향성선원 |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170 신흥사 | 217-120 | 033)636-7044 |
실상사 백장선원 |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산28 실상사 | 590-851 | 063)636-3598 |
쌍계사 금당선원 |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쌍계사 | 667-824 | 055)883-1904 |
용주사 중앙선원 |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 188 용주사 | 445-975 | 031)234-0040 |
용화사 당래선원 |
경남 통영시 봉평동 404번지 | 650-140 | 055) 643-0589 |
용화사 법보선원 |
인천시 남구 주안 5동 16-113 | 402-836 | 032) 872-6061~4 |
용화사 법보선원 (인제) |
인제군 인제읍 하추리 175 용화사 | 252-830 | 033)462-6061 |
운부암선원 |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은해사 | 770-892 | 054)335-9236 |
운주사 운주선원 |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70 | 519-841 | 061) 375- 0229 |
월명암 사성선원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월명암 | 579-852 | 063)582-7890 |
정각사 죽림선원 |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 | 666-931 | 055) 972-1109 |
조계암 대적선원 |
경남 양산시 웅상읍 주남리 산 | 626-840 | 055) 365-1578 |
직지사 천불선원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직지사 | 740-812 | 054)436-6013 |
천장암 염궁선원 |
충남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산1 | 356-815 | 041) 663-2074 |
칠불사 운상선원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 칠불사 | 667-821 | 055)883-1869 |
태안사 원각선원 (구.금강선원)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산20 태안사 | 516-832 | 061)362-8088 |
표충사 서래각선원 |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표충사 | 527-822 | 055)352-1150 |
학림사 오등선원 |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14 학림사 | 314-924 | 042)825-1724 |
해운사 재하당선원 |
경북 구미시 남통동 산 94번지 | 730-050 | 054)452-4917 |
해운정사 금모선원 |
부산시 해운대구 우1동 412 | 612-819 | 051)746-2256 |
향천사 천불선원 |
충남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 향천사 | 340-809 | 041)335-3556 |
화엄사 선등선원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 542-853 | 061)782-4145 |
환성사 무학선원 |
경북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 150 | 712-901 | 053)852-6561 |
하와이 무량사 태평선원 |
2420 Haleaau Place, Honolulu Hawaii 96816 U.S.A | 001-1-808-735-7858 |
선 원 | 주 소 | 우편번호 | 전화번호 |
견성암선원 (수덕사)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 340-921 | 041)337-6007 |
광명선원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장자동 | 678-895 | 055)934-0805 |
금당선원 | 전남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금탑사 | 548-884 | 061)832-5888 |
금련선원 | 경북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354-57 | 780-920 | 054)775-0558 |
금선선원 | 경북 경주시 충효동 193-2 | 780-250 | 054)772-7171 |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91 | 626-862 | 055)374-6466 |
대성암선원 |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 | 609-844 | 051)508-4424 |
대원사 동국제일선원 |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2 | 666-922 | 055)972-8068 |
동화사 내원암선원 |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 | 701-430 | 053)982-0225 |
미타사선원 |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 369-873 | 043)872-0522 |
백흥암선원 |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칠일동 479 은해사 | 770-890 | 054)335-2988 |
법계사선원 | 충남 논산시 양촌면 오산리 18 | 320-852 | 041)741-9800 |
보덕사선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277 보덕사 | 340-924 | 041)337-4350 |
보현암선원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 678-895 | 055)932-7243 |
복전암 복전선원 |
대전시 중구 석교동 산 17-1 복전암 | 301-091 | 042)271-0029 |
부도암선원 |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 | 701-430 | 053)982-0210 |
불영사 천축선원 |
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 120 | 767-882 | 054)783-5004 |
삼선암 반야선원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 678-895 | 055)932-7278 |
석남사 정수선원 |
울산시 울주구 상북면 덕현리 1064 | 689-823 | 052)264-8900 |
세등선원 | 대전시 서구 탄방동 191-3 | 302-857 | 042)485-0334 |
수정암선원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 376-860 | 043)543-3713 |
승가사 제일선원 |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2 | 110-802 | 02)379-2996 |
승연사선원 | 전북 남원시 산동면 식련리 221 | 590-872 | 063)626-7025 |
신광사 조인선원 |
전북 장수군 천천면 와룡리 38 | 597-851 | 063)353-0598 |
약수암 죽림선원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 678-895 | 055)932-7305 |
양진암선원 (동화사) |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 동화사 | 701-430 | 053)982-0224 |
영각사 극락선원 |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47 | 676-843 | 055)963-0777 |
용흥사 백운선원 |
경북 상주시 지천동 722 | 742-160 | 054)533-7728 |
운문사 문수선원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 | 714-883 | 054)371-0605 |
위봉사 위봉선원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21 | 565-841 | 063)243-7657 |
육수암 칠보선원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 232-941 | 033)332-6669 |
윤필암 사불선원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17 윤필암 | 745-832 | 054)552-7110 |
지장암 기린선원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 월정사 | 232-941 | 033)332-6668 |
천진암 백암선원 (구.동천선원)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14-2 백양사 | 515-854 | 061)392-0533 |
탈골암 대휴선원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산1-1 | 376-860 | 043)543-4780 |
팔성사 성적선원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1267 | 597-804 | 063)351-2110 |
화운사 능인선원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 449-060 | 031)335-2576 |
회룡사선원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304 | 480-855 | 031)873-3391 |
흥륜사 천경림선원 |
경북 경주시 사정동 281 | 780-940 | 054) 772-4834 |
선 원 | 주 소 | 우편번호 | 전화번호 |
동화사 기본선원 |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 동화사 | 701-430 | 053) 985-2705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서울 묘심선원 | (02)523-8005 | 60명 | 자율시간 |
서울 안국선원 | (02)732-0772 | 780명 | 하루 2시간 4번 |
서울 공생선원 | (02)900-2448 | 130명 | 하루 2시간 4번 |
서울 전등사 전등선림 | (02)762-0643 | 20명 | 하루10시간 |
서울 임제선원 | (02)883-6397 | 10명 | 하루 2시간 |
경기 일산 무상선원 | (031)903-9627 | 20명 | 하루 2시간 |
인천 용화사 보상선원 | (032)872-6061 | 150명 | 하루 7시간 |
부산 안국선원 | (051)583-0993~4 | 700명 | 하루 2시간 4번 |
부산 혜원정사 원돈선원 | (051)866-7771 | 35명 | 하루 7시간 |
부산 정오사 | (051)459-5597 | 10명 | 하루 5시간 |
대구 보현사 보현선원 | (053)254-6966 | 20명 | 하루2시간 2번 |
양산 통도사 취운선원 | (055)383-6479 | 40명 | 하루 8시간 |
양산 통도사 부산포교원 시민선방 | (051)816-2241 | 50명 | 하루 7시간 |
창원 안국선원 | (055)281-0772 | 110명 | 하루2시간 3번 |
밀양 표충사 대흥선원 | (055)352-1150 | 20명 | 하루11시간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서울 길상사 시민선방 | (02)3672-5945 | 30명 | 자율시간 |
서울 봉은사 시민선방 | (02)512-9171 | 40명 | 자율시간 |
인천 용화사 시민선방 | (032)872-6061 | 230명 | 하루2시간 4번 |
경기 양평 법일정사 | (031)771-7745 | 20명 | 하루10시간 매월마지막주 철야정진 |
수원 공소사 시민선방 | (031)246-1001 | 10명 | 자율시간 |
경북 영불선원 | (053)782-0120 | 20명 | 하루2시간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대구 영남 불교대학 시민선방 | (053)473-5802 | 50명 | 매주 회 목요일 2시간 |
서울 불광사 참선방 | (02)413-6060 | 20명 | 매주 월 금요일 4시간 |
서울 화계사 시민선방 | (02)902-2663 | 80명 | 매주 일요일 2시간 |
서울 |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미타사 | (02)662-4736 | 매주 토 | |
보림회 | (02)914-6187 | 매주 토 | |
법련사 | (02)733-5322 | 매월 마지막 토 | |
수선회 | (02)517-3108 | 매주 토 | |
선학원선정회 | (02)732-3327 | 매월 셋째 토 | |
화계사 선우회 | (02)900-4326 | 매주 토 | |
부산ㆍ경남ㆍ경북 |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범어사 | (051)508-3122 | 매월 첫째 토 | |
통도사 극락암 | (055)382-7083 | 매주 토 | |
통도사 부산포교원 | (051)816-2241 | 매주 토 | |
해운정사 | (051)746-4812 | 매주 토 | |
해인사 백련암 | (055)932-7300 | 매월 넷째 토 | |
해인사 원당암 | (055)963-9551 | 매월 첫ㆍ셋째 토 | |
대구구도회 | (053)654-8533 | 매월 마지막 토 | |
부석사 | (054)633-3464 | 매월 마지막 토 | |
대전ㆍ충청 |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대전구도회 | (042)527-0559 | 매월 셋째 토 | |
공림사 | (043)833-1029 | 매월 셋째 토 | |
법륜사 | (043)878-6122 | 매월 둘째 토 | |
학림사 오등시민선원 | (042)825-0515 | 매주 토 | |
기타 | |||
선 원 | 전화번호 | 참여인원 | 운영시간 |
장안사 | (031)703-7766 | 매월 마지막 토 | |
홍련암 | (063)263-6072 | 매월 첫·셋째 토 |
선종사(禪宗史)
1. 선(禪)의 의의
禪이란 범어로 드야나(Dhyana)인데 이를 음사해서 한자로 선나(禪那), 다시 줄여서 선(禪)이라 합니다.
그 뜻을 해석하면 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으로 닦음(思惟修)입니다.
그리고 참선(參禪)이란.
"첫째는 禪하는데 참여한다는 뜻이 있고,
둘째는 "참례선지식(參禮善知識)하여 문선(問禪)한다"고 하여 이 말을 줄여서 "참선"이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곧 선지식을 찾아 묻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이러한 참선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고락(苦樂)의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수행법인 것입니다.
2. 선(禪)의 기원
전통적으로 선의 기원은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에서 찾는다.
삼처전심이란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고 하여
선가(禪家)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
①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부처님이 중인도 북쪽에 있던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고 계실때 남루한 차림의 마하가섭이 늦게 도착하자
제자들이 멸시의 눈초리를 보낼 때 부처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반쯤 내어 주어 같이 앉으신 일.
② 영상회상 거염화(靈山會上 擧拈花):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말없이 꽃을 들어보인 마음을 읽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말없이 미소를 지은 일.
③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
부처님이 80생을 마감하시고 사라쌍수 밑에서 조용히 열반에 잡겨 법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을 때
가섭이 늦게 도착하여 열반하시는 모습을 못본 것을 안타까워하며 울자 부처님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인 일.
3. 선의 종지(宗旨)
가) 불립문자(不立文字)
나) 교외별전(敎外別傳)
다) 직지인심(直指人心)
라) 견성성불(見性成佛)
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합니다.
언어이전의 생명 그 자체, 다시 말해서 활발발한 깨달음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언어와 문자, 형식과 논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심인(心印)으로 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또한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 라는 말마저 버려야 합니다.
불립문자의 진정한 뜻은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결코 문자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 교외별전(敎外別傳)
진정한 법(法)이나 도(道)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경전은 단지 우리의 참된 면목을 바르게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인 것입니다.
물맛을 직접 보아야 제 맛을 알 수 있듯이 설명만으로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공부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언어나 문자가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처전심은 부처님과 제자 가섭 사이에 이루어진 마음의 형태입니다.
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직지인심이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뚜렷이 밝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으로서의 마음은 결코 참마음(眞心)이 아니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참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대상화되면 벌써
그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라) 견성성불(見性成佛)
자신이 지닌 본래의 성품을 철저하게 보는 것을 견성이라 하였습니다.
본래의 성품이란 어느 때나 청정무구하여 절대의 그 경지이며 영원불변한 것입니다.
이런 차별 없는 본성을 보았다 함은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것은 내심의 부처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4. 선의 전래
삼처전심 이래로 부처님의 법은 마하가섭에게로 전하여 졌고, 마하가섭은 아난존자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에게 그리고 28대 보리달마존자까지 인도에서 전하여져 오다가
보리달마존자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혜가대사, 승찬대사, 도신대사, 홍인대사, 혜능대사 까지는
법의 전수를 의미하는 의발(衣鉢)을 오직 한분에게 전해져 내려 왔지만 혜능대사 이후로는
의발을 전하는 전통이 끊어지고 法을 여럿에게 전하게 되어 禪의 황금시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조도일(馬祖道一)下의 법을 이은 석옥청공선사에게서 태고보우국사가 법을 전해 받으니
해동에 선종이 발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중기 서산과 부휴로 나뉘어지게 되고
서산문하에서 환성지안선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오다가 잠시 그 전등의 불꽃이 희미해지던
차에 구한말 경허선사가 근대선의 중흥조로서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린 이후 만공, 혜월, 혜봉 등의
선지식이 배출되었고 만공선사의 법을 전강선사께서 이으셨던 것입니다.
법맥이란 법(法)을 바탕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어지는 견고하고도 도도한 흐름을 의미합니다.
법이란 진리인 것입니다. 특히 선종에서는 법맥을 선맥이라고 하여 강조하고 있고 어느 종파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선종에서의 법은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역사가 선종의 역사이며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선맥인 것입니다.
5. 부처님의 법맥(전등의 역사)
법 맥 | 게 송 |
가섭 존자 | 법이라는 본래 법은, 법도 없고 법이 아닌 것이 없음이니, 어찌 한 법 가운데 법과 법 아닌 것이 있으랴. |
아난 존자 | 본래 있음의 법(有法)을 전했더니, 전한 뒤엔 없음의 법(無法)이라 하더라. 제각기 깨달았으니, 깨달은 뒤엔 없음의 법(無法)도 없더라. |
상나화수 존자 | 법도 아니요,마음도 아니며, 마음도 없고 법도 없도다. 이 마음의 법을 말할 때에, 이 법은 마음의 법이 아니다. |
우바국다 존자 | 마음은 본래부터 마음이니, 본래 마음에는 법이 없도다. 법도 있고 본래의 마음도 있으나, 마음도 아니요 본래의 법도 아니다. |
제다가 존자 | 근본 법과 그 마음을 통달하면,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다네. 깨달았다고 하면 깨닫지 않음과 같나니, 마음의 법도 본래 없기 때문이라네. |
미차가 존자 | 마음은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나니, 얻을 수 있다면 참된 법이 아니라네, 마음이 마음 아닌줄 깨달아 알면, 마음과 마음의 법을 알 수 있으리. |
바수밀 존자 | 마음은 허공 같아, 허공 같은 법을 보인다. 허공의 묘한 법을 알면, 옳고 그름도 법도 없다. |
불타난제 존자 | 허공이 안팎이 없듯, 마음의 법도 그러하다. 허공의 이치를 밝게 깨달은 것, 그것을 참된 이치를 바로 안 것이라 한다. |
복타밀타 존자 | 진리는 본래 이름이 없지만, 이름에 의해 모습을 드러 내나니, 진실된 이치를 깨달으면, 참도 거짓도 사라지고 없네. |
협 존자 | 진리는 본래 이름이 없지만, 이름에 의해 모습을 나타내나니, 진실한 법을 알아 들으면, 참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 |
부나야사 존자 | 미혹과 깨달음은 숨음과 드러남, 밝음과 어둠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 이제 숨음과 드러남의 법을 너에게 전하노니,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니라. |
마명 존자 | 들어나고 숨음이 한 집안 소식이요, 밝고 어두움이 원래 둘이 아니로다. 이제 네게 깨달은 법을 주노니, 갇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
가비마라 존자 | 드러남도 숨음도 아닌법을 ,진실의 경지라고 한다. 숨고 드러남의 이치를 깨달으면, 지혜롭고 어리석음을 넘어서리. |
용수 존자 | 숨고 드러나는 법을 밝히려고, 해탈의 이치를 말하네. 법에는 마음도 얻을 수 없나니, 성냄도 기쁨도 본래 없는 것이라네. |
가나제바 존자 | 사람에게 법을 전하는 뜻은, 해탈의 이치를 설하기 위함일세, 법에는 진실로 얻을 것이 없나니,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네. |
라후라다 존자 | 법에는 진실로 증득할 것이 없어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네, 법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니, 어찌 안 밖이 생기리. |
승가난제 존자 | 마음의 법이 원래 나는 것 없으나, 인(因)의 땅에 연(緣)을 따라 일어난다네. 인연과 종자가 서로 방해하지 않듯, 꽂과 열매도 그러하네 |
가야사다 존자 | 종자가 있고 마음땅(心地)이 있으니, 인연이 싹을 나게 하도다. 싹이 나건 안 나건,인연의 법칙은 걸림이 없도다. |
구마라다 존자 | 성품에는 태어남이 없지만, 구하는 이를 위해 말하는 것이다. 법에는 이미 얻을 것이 없거늘, 어찌 결정하고 못함을 걱정하리요. |
사야다 존자 | 말끝에 무생법(無生法)에 맞으면, 법계의 성품과 같아지리니, 이렇게 바로 알면, 사(事)와 이(理)를 통달하리라. |
바수반두 존자 | 거품도 허깨비도 걸림이 없거늘, 어찌 알지 못하는가 법이 그 가운데 있는 줄 알면, 지금도 옛도 아니리라. |
마노라 존자 | 마음이 만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그윽하다. 흐름에 따라 본 성품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
학륵나 존자 | 마음을 깨달을 때를, 부사의(不思議)하다 말 할 수 있나니, 분명하되 얻을 수 없고, 얻을 때는 안다고 할 수 없다. |
사자 존자 | 깨달음을 말할때, 지(知)와 견(見)이 모두가 마음이다. 이 마음이 바로 지견이니, 지견은 언제나 지금 속에 있다. |
바사사다 존자 | 성인이 지견을 말씀하시니, 경계를 만날 적마다 그 아닌 것 없도다. 내가 이제 참 성품을 깨달으니, 도도 없고 이치도 없도다. |
불여밀다 존자 | 참성품이 心地에 숨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도다. 인연따라 중생을 교화하니,방편으로 지혜라 부른다. |
반야다라 존자 | 마음 땅이 숱한 종자를 내네, 일이 일어나면 다시 이치도 생기네. 수행의 열매가 무르익어 깨달음이 원만해지니,꽂이 피듯 한 세계가 열리네. |
보리달마 존자 |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려는 것인데, 한송이의 꽃에 다섯 꽃잎이, 열매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
혜가 존자 | 본래부터 마음 땅이 있었기에, 그 땅에 씨를 심어 꽃이 피지만, 종자도 있는 것이 아니며,꽃도 나는 것이 아니다. |
승찬 존자 | 꽃은 땅을 의지해 심고, 땅에 심었던 꽃이 피지만, 씨를 뿌려주지 않는다면, 꽃도 땅도 나지 않는다. |
도신 존자 | 꽃과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나니, 땅에 의하여 꽃은 나고 또 난다. 큰 인연과 믿음이 어울릴 때에 나지만, 이 남은 남이 없는 것이다. |
홍인 존자 | 유정(有情)이 와서 씨를 뿌리니, 인연의 땅에 열매 절로 열리네. 무정(無情)은 이미 종자가 없으므로, 성품도 태어남도 없다. |
혜능 존자 |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도 집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찌 먼지를 일으키랴? 지각 있는 존재의 씨앗이 뿌려져, 밭마다 열매를 맺게 되리라. 지각 없이는 씨앗이 자랄 수 없고, 성(性)없이는 생(生)도 없다. |
6. 선의 유형
가) 닦는 사람의 마음에 따른 분류
나) 깨침의 정도에 따른 분류
다) 지역에 따른 분류
라) 수행하는 방법에 따른 분류
가) 닦는 사람의 마음에 따른 분류
⑴ 외도선(外道禪): 외도들이 천상에 나기위해 닦는 禪
⑵ 범부선(凡夫禪): 건강을 위하거나 액난을 소멸시키기 위해 범부들이 닦는 禪
⑶ 소승선(小乘禪): 무상을 관(觀)하고 부정관(不淨觀)등을 하면서 세상을 멀리하며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며
고요한 것만을 즐기는 禪
⑷ 대승선(大乘禪): 법계의 공(空)을 관(觀)하고 중도와 실상을 관하는 禪
⑸ 최상승선(最上乘禪): 관(觀)하는 선이 아니라 그대로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禪
나) 깨침의 정도에 따른 분류
⑴ 의리선(義理禪): 경전이나 禪의 이론을 보고 눈치채서 체득하는 禪
⑵ 여래선(如來禪): 여래선이란 말은 <능가경(能伽經)>에서 규봉종밀(圭峯宗密)스님은 이것으로써
교선일치라 주장하여 최상승선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래선의 판별은 오히려 문자의
알음알이인 이(理)에 떨어져 달마가 전한 선과 다르다고 하여 여기에서 조사선(祖師禪)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⑶ 조사선(祖師禪): 남종선(南宗禪)이라고도 합니다. 육조인 혜능스님에 게서 시작된 선종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은 전부 이 조사선에 포함 됩니다. 조사선은 조사의 언행을 실마리로
삼아 선을 실수(實修)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도로부터 전래된 경전보다는 가까운 조사의 언행을
중시하고 그것이 일종의 공식과 같은 것이 됨으로써 공안(公案)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공안에는 의미상, 과거의 조사들이 남긴 언행을 내용으로 하는 고측 공안(古則公案)과
현재 생성되어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고 보는 입장에서 생긴 현성공안(現成公案)이 있습니 다.
다) 지역에 따른 분류
하나는 인도선이고 두번째는 중국선인데 중국선은 법화종 계통에서 하는 천태선과
달마선사(達摩禪師)이후의 달마선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체적 유형은
인도선, 천태선, 달마선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⑴ 인도선(印度禪)
인도선의 기원은 요가(Yoga)에서부터 찾아집니다.
요가는 인도 고유의 수련법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禪과 요가의 다른 점은 요가수행의 최고 경지는 마음의 움직임이 일체 끊어진
지멸(止滅)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요가의 최고 경지를 의식이
없으면서 의식이 없는 그것마저도 아닌 상태인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볼 때는 이것은 완전한 해탈의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인도선에서는 수식관(數息觀), 부정관(不淨觀), 백골관(白骨觀)등이 있습니다.
수식관(비파싸나, Vipasvana)은 좌선하는 자세로 자신의 호흡을 세는 데에 집중하여
마음의 산란함을 방지하는 관법입니다. 부정관은 육신의 부정한 모양을 관하여 탐욕을
다스리는 관법이며, 백골관은 인간의 백골을 관하여 집착을 없애는 관법입니다.
⑵ 천태선(天台禪)
천태선은 중국에 와서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538-597)가 세운 법화종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천태선은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교리가 그 내용이 되고 방법에 있어서는 인도의 요가 수련법을
그대로 형식상으로 옮겨와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리하여 천태선은 법화경 사상과 인도의 요가
형식이 한데 어우러져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태선에서는 지관법(止觀法)을 쓰고
있는데, 즉 마음을 거두어 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깊은 진리의 마음의 세계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 다.
⑶ 달마선(達摩禪)
달마선의 기원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견해와 학술적인 입장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부처님의 삼처저심(三處傳心)이 달마선의 기원이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법을 설하고 계셨는데 가섭존자가 늦게 왔습니다.
가섭존자가 자리가 없어서 앉지 못하고 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무 말없이
앉아 계시는 자리의 반을 내어주자 가섭이 아무 말없이 앉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같이 앉은 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음을 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달마선은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하며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 등이 있습니다.
묵조선은 정려(靜慮), 즉 생각을 고요히 맑히는 禪이고, 간화선은 1700공안(公案)을 사용하여
화두를 간(看)하는 禪입니 다.
라) 수행하는 방법에 따른 분류
부처님으로부터 28대 조사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전한 선(禪)은 순수한 인도의
관심선(觀心禪)이었지만 차츰 중국적인 것으로 면모를 바꾸면서 체계화되어 갔습니다.
달마대사로부터 전승된 선(禪)이 6조 혜능(慧能)대사 이후에는 여러 계파가 형성되어 9
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5家 7宗이 생겨나 선풍(禪風)을 드날리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南宋이후에 청원계(靑原系)의 조동종(曹洞宗)에서 나온 천동정각(天童正覺)선사가
널리 편 묵조선과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大慧宗)가 확립한 간화선이 가장 대표적인 선풍이었습니다.
⑴ 묵조선(默照禪)
오로지 침묵만을 지언(至言)으로 삼는 것으로서 묵묵히 안으로 관찰하여 그 마음을 청정케 하고
그 법(法)의 근원을 철견(徹見) 하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이란 묵조(默照)하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지
화두를 가지고 의심하고 참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으로 묵조선의 입장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로 지관타좌(只管打坐)란 말이 있습니다.
지관이란 '오직 한 길' 의 의미이며, 타는 '강조' 의 의미이고 좌는 '좌선'의 뜻으로, 잡념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한 마음으로 좌선할 따름이라는 말입니다.
묵조선이란 이름은 묵조선가(默照禪家) 자신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묵조선의 거장 천동정각(天童正覺,1091-1157) 선사가 '오직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쉬어가고
쉬어가게 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혜선사(大慧禪師)께서 그의 가르침을 비난하여
'묵조사선(默照邪禪)' 이라 지칭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⑵ 간화선(看話禪)
간화선(看話禪)이란 우주와 인생의 근원을 규명해 나가는데 있어 화두(話頭)라는 문제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간(看)은 '본다' , '참고한다'는 의미이고
화(話)는 화두로 '말'입니다. 여기서의 '말'의 의미는 보통의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말"이고
"말 밖의 말"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화두는 부처님과 祖師스님들의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문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풀 수 없고 생각이 끊어진 세계를 나타내는 말 이전의 말인 것입니다.
이러한 화두를 참구하여 항상 그것을 의심해 나감으로써 궁극에 가서는 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이
타파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흔히 간화선하면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을 일컫는데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선법의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 사구선(死句禪) ; 화두를 부처님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해 들어가는 죽은 參禪
① 활구선(活句禪) ; 이치길(理路)도 없고 말길(語路)도 없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禪. 語句에 대해 배우면서도 그 어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고
어구의 참된 의미를 체득하는 것이 중시됩니다.
해동선사(海東禪史) = 선의 한반도 전래
가) 삼국시대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중국의 전진왕 부견이 순도스님과
불상, 불경을 고구려에 보냄으로써 비롯되었고,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에
마라난타가 인도로부터 들어옴으로써 전파되었으며, 신라는 제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옴으로써 전래되었으나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국교로 인정되게 되었습니다.
나) 통일신라시대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불교도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으니,
교종(敎宗)은 열반종(涅槃宗), 율종(律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의
오종(五宗)이 흥성하여 이를 오교(五敎)라고 합니다.
선종에 있어서는 신라 선덕여왕 당시 당나라에 건너가서 4조 도신(道信) 선사의 법을 이은
법랑(法郞)스님을 들 수 있으나 그의 귀국년대가 확실치 않아 그 다음에 선(禪)을 우리나라에
전래한 도의국사(道義國師)를 해동선(海東禪)의 초조(初祖)로 삼게 됩니다.
도의국사(道義國師)는 법명이 명적(明寂)으로 선덕왕5년(서기784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강서(江西)의 개원사에 이르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법호를 도의(道義)로 받았으며 백장회해(百丈懷海)께 나아가 뵈오니 "강서의 선맥이
모두 해동의 스님에게로 돌아간다"라는 격찬을 들었습니다.
이후 헌덕왕13년(서기821년)에 귀국하였으나 교종의 융성으로 선(禪)을 신봉하는
이가 없어 강원도 진전사에 은둔하시다가 법을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전하시고 입적하셨습니다.
또한 도의국사(道義國師)와 동시대인으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전해 받은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계시며, 홍척국사(洪陟國師) 이후에 선종(禪宗)에서도 고승대덕이 배출되어 흥덕왕조부터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약 130여년간 선(禪)의 구산(九山)이 형성되었으니 교(敎)의 5宗과 함께 신라불교를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九山은 모두 6조 조계혜능(曹溪慧能)선사의 법손에 해당하므 로 조계종(曹溪宗)이라고도 합니다.
다) 고려시대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구산(九山)은 점차 쇠퇴해 가다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수입한 천태종이 선의 재부흥을 일으켜 바야흐로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뒤 해동선(海東禪)의 중흥조 보조지눌국사(普照知訥國師)가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종지를 내세워 종풍을 회복하였으며, 혜충왕때 가지산문의 법손인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는 선의 구산문을 통일하여 조계일종(曹溪一宗)을 만들었으니
한국의 수행자들은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의 법손(法孫)이 아닌 이가 없다할 것입니다.
라) 조선 및 현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부의 배불정책으로 불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다시 나뉘어졌고
일제시대에 이르러 전국 31본산이 통합되어 조계종(曹溪宗)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니
우리 해동선(海東禪)은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를 종조(宗祖)로 삼고 총본산 사명(寺名)도
태고사(太古寺)로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60년대 비구·대처의 대립으로 총본산이 조계사(曹溪寺)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와같이 한국불교는 오교구산(五敎九山) → 오교양종(五敎兩宗) → 선교이종(禪敎二宗)에서
조계일종(曹溪一宗)으로 변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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