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은 신라 때는 올곧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실직(悉直)1)에서 꼭 지켜야만 할 땅이라는 북진(北鎭)2)으로 바뀌더니 고려 때는 오름의 땅이라는 척주(陟州) 그리고 따로 보배로운 땅이라는 진주(眞州)라고 하는 곳3)이더니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숫자 三이 들어간 세 가지 오름4)의 땅 삼척(三陟)이라 하는 곳이다.
이곳은 한때 군(郡)의 넓이나 인구, 세수(稅收)규모가 남한에서 최고였다. 지금의 태백시와 동해시의 남부 북평 지역이 모두 삼척에 속했다. 남평이라 하지 않고 북평이라 함은 삼척을 기준으로 ‘뒤뜰’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짐작을 해보면 강릉이 ‘하슬라’로, 삼척이 ‘실직’으로, 두 지역은 국경도시로 북진과 남진을 시도하기 위한 동해안 전초기지로 서로 경쟁관계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나타내는 화강암으로 된 1.5M 높이 정도의 지줏돌이 부곡동 승지골에 가면 보인다. 향로봉과 송이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고구려 군사가 매복하고 평릉과 부곡에는 신라군사가 매복하여 국경충돌이 자주 벌어진 곳이다. 근처에 위치한 사문치라는 고개도 삼국통일 후 김유신이 死門峙에서 士文峙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삼척은 묵은 한 왕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왕조가 창업의 꿈을 키운 예사로운 땅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의 외향이기 때문이다.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와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가 삼척에 있다. 전주지방 호족이었던 이안사가 기생 한 명을 두고 산성별감과 다투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몸을 숨겨 찾아온 첩첩산중인 삼척시 미로면 할기리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묘자리를 찾던 중 “여기다 소 백 마리를 잡아 개토제(開土祭)를 올리고 금으로 관(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면 5대 후에 창업할 귀한 인물이 나올 명당이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고승의 말을 따라 백 마리의 소 대신에 하얀 소[白牛]와 금관 대신에 금빛 나는 마른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 묻었다는 무덤이 이른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2년(1393년)에는 현에서 부(나중에 삼척도호부)로 행정구역의 격이 승격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려왕조가 마직을 고한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부자가 1차 원주에서 2차 간성을 거쳐 다시 이곳으로 3차로 유배된 곳인데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을 집행한 ‘살해재’가 ‘싸리재’ 또는 ‘사래재’가 있는 곳이다. 근덕면 궁촌(宮村 Kimgdom-village)에 가면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어명을 받은 사형집행관 일행이 사형을 집행하고 머리만 증거물로 가져가 버린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추정되는 공야왕의 능이 있고, 경기도 고양에서도 공양왕의 능이 있다. 후손들이 능을 이장했다면 시신이 없는 빈 묘가 궁촌에 있는 것이요, 아니면 이곳에는 목이 없는 시신만 묻혔는지 모를 일이다.
또 삼척은 우리민족의 억눌린 기상이 펼쳐진 곳이다.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1224-1300)에 의해 두타산 천은사에서 고려 충렬왕 13(1287년)에 칠언시(七言詩)로 된 ꡔ제왕운기(帝王韻紀)ꡕ를 완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갈야산(葛夜山)
삼척5)의 진산(鎭山)6)으로 알려진 성북동 북편의 갈야산(해발 111.0m)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 동쪽 중턱에는 삼척 김씨 시조 묘인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葛夜陵 : 지방기념물 제15호)과 성황사가 있다. 삼척시 성북동, 당저동, 마달동, 원당동, 자원동에 걸쳐있다. 옛날에는 대밭[竹林]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밭이 삼척여자중학교 옆에 일부 대밭이 남아있고 옛 성터가 조금 남아 있는데 실직국의 성지라 전한다.
근산(近山)
삼척시에서 남서쪽으로 우뚝 솟은 산으로서 그 모양이 우산을 세운 것 같아 건산이라고도 한다. 삼척시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의 정상은 삼척시 조비동, 건지동 그리고 미로면과 경계를 이룬다. 근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진주 초등학교 뒤 남산에서 시작하는 길, 근산동에서 오르는 길, 조비동에서 오르는 길 그리고 미로면 구방사 뒤로 오르는 길이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삼척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토요일, 일요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산의 서쪽 중턱에는 구방사라는 절이 있으며, 절의 샘터는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옛사람이 죽서루에 올라 남서쪽의 근산과 동쪽의 광진을 보고 시를 읊었는데 東台東廣津瘦西樓西近山遠, 곧 동쪽에 광진이 크고 넓은 줄 알았더니 아주 협소한 작은 마을이고, 죽서루 서쪽에 근산이라 하여 가까운 줄 알았더니 먼 곳에 있는 산이다. 정라진 방파제 끝 부분에 작은 암초가 돌출이 되어 있었는데, 만리도(萬里島)라 한 것과도 통하는 이름이다.
갈천동(葛川洞)
해안에 갈대와 물억새(蘆荻)가 무성하여 갈내(蘆川) 혹은 가을천(加乙川)7)이라 일러 오더니 이것이 갈천(葛川)으로 변했다. 삼척문화방송과 중앙초등학교가 있다.
건지동(乾芝洞)
건지곡(乾芝谷) 혹은 건지동(乾地洞)이라 하는데 근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하상계수(河狀系數)가 높은 까닭에 자주 말라 붙여진 이름이다. 삼척중학교 건너편 쪽을 이른다.
남양동(南陽洞)
1916년까지 광구(廣丘)라고 하다가 현재의 남양리(동)로 바뀌었다. 그런데 속칭 ‘통베기’라고 한다. 통나무를 파서 시냇물을 논밭에 대던 곳이라는 데서 온 말이다.
당저동(塘底洞)
성내리 두랑산(斗郞山)에 있던 두랑당(지금 천주교 성당)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 밑거리’[堂底里]라 했는데, 한 때 월계동이라 개명하였다가 1992년 10월 15일에 다시 원래의 塘底洞이라 하였다
도경동(桃京洞)
삼척 자원동에서 미로와 동해로 갈라지는 방향에 위치한 이 마을은 이웃의 다른 마을보다 지세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처음에는 돈경(敦境:돋은 곳)이라 하였으나 그 후 도경(桃京)으로 땅의 폼새를 나타낸 본래 뜻과는 다른 한자말로 바뀌었다.
마달동(麻達洞)
마을 서쪽에 움폭 꺼져 들어가 있는 땅에 큰 못(池)이 있어, 못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알’이 와전되어 본래의 뜻과는 다른 지금의 ‘마달’이 되었다.
마평동(馬坪洞)
삼척으로 유입하는 오십천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관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시킨 곳이라 하여 ‘(들어가지 못하게)말린 들[禁山坪]’이라 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와전되어 ‘말들’이 되었고 한자로 지금의 ‘마평(馬坪)’이 되어 말과는 무관하다.
북정산(北亭山)
삼척시 교동8), 당저동, 갈전동에 위치하며 구숙치(狗宿峙, 고살재, 고사리재)9)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이다. 산의 남쪽 중턱을 깎아서 삼척시청과 시청 별관을 지었으며 또한 양지바른 곳에 삼척향교10)가 자리잡고 있다. 산의 북서쪽에는 마달동이 있고 산의 북동쪽은 7번 국도가 지나가며, 산의 중심에는 삼척산업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삼척시청부터 삼척산업대학교로 연결되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산의 남서쪽은 갈야산으로 이어진다. 당저동에서 마달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도 있으며 동남쪽은 삼척시 정상동에 위치하며 끝자락에는 척주동해비가 위치한 육향산이 있는데 옛날에는 죽관도라 했다. 지금은 삼척대학교와 시내를 연결하는 도로가 공사 중이다.
사직동(史直洞)
사직은 삼척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그 유래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인용해서 고민을 해 보고자 한다.
첫째, 최범영설
최범영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한겨레신문』「말리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에 밝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 때 직(直)이 지(旨)와 엇갈려 쓰인다. 조선 때 책인『유합(類合)』에 旨의 새김을 ‘’라 적고 있음을 볼 때 삼척은 본디 ‘실모로/시모로’ 쯤이었다. 삼국 때 ‘三/蔘/彡’의 소리 값은 ‘삼’이다. 요즘 陟은 ‘오르다’의 뜻을 지닌다. 뒤에 땅이름을 고칠 때 ‘실모로/시모로’를 ‘심(三)+오로(陟)’에 맞춰 삼척으로 지었던 것 같다. 史의 소리 값은 ‘시’였다. 정리를 해 보면 관련 지명에 대한 중국말은 다음과 같이 발음이 된다.
悉直 [xi zhi] |
史直 [shi zhi] |
社稷 [she ji] |
三陟 [san zhi] |
그러나 ‘실모로/시모로’ 는 도대체 무슨 뜻을 지닌 말인지 어디서 온 말인지 과문한 탓인지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지명에는 역사나 지형지세, 당시 민중들의 살아 숨쉬는 소리가 담긴 것인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둘째, 『척주지(陟州誌)』
『삼척시지』에 ‘史直은 원래 실직곡국(悉直谷國)의 터전으로 실직(悉直)의 방언이 와전되어 사직(史直)이라 한다’ 하니 소리는 그대로다. ‘실직곡(悉直谷)은ꡐ실즉곡․실륢골․시륢골․시덕골ꡑ등의 옛말이 아직 이 마을의 고노(古老) 부녀사이에 사용되고 있으니 시륢골(史直谷)은 지금 사직리에서 유판치(有坂峙)를 넘어 조비리로 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이른바 시륾골은 유판치의 坂이라는 것은 걸어 넘기에 험한 재가 있었다는 뜻으로 보아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당시 주민들의 애환이 담긴 말에서 온 것 같다. 산적이나 맹수의 출몰로 목숨을 잃거나 다치거나 성내로 들어와 농사지은 푸성귀를 팔아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힘들여 장만한 물건을 갖고 가다가 빼앗겨 잃어 시름에 잠겨서 터져 나오는 탄식의 골짜기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고개를 넘기가 힘들어 넘기 싫은 골이라는 뜻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실직(悉直)이라는 지명은 애환이 서린 말이 된다.
그러나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許穆)이 1662년도에 편찬한『척주지(陟州志)』부내조(府內條)에 ꡒ삼척부는 옛날 실직씨의 나라로 신라 파사왕 23년(102년) 임인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 지증왕 6년(605년) 기유년에 처음으로 실직주를 두고 김이사부를 군주에 임명하였다. 실직곡국을 지금 사직이라고 한다 史直古悉直氏之國新羅婆娑王二十三年降新羅智證王六年初置悉直州以金異斯夫爲軍主悉直國或曰悉直谷國今史直(下略)ꡓ이라 하였다.
이를 본다면 지금의 사직동은 삼척의 옛 이름인 실직을 그대로 이어 받은 이름을 간직한 마을이다. 그러나 실직씨는 지금의 어느 성씨로 바뀌었는지 의문점으로 남는다.
성남동(城南洞)
삼척문화예술회관, 시립박물관 , 동굴엑스포 주제관 등이 자리한 마을. 엑스포 주제관 뒷산에서 조선 최고의 화공들이 찾아와 죽서루를 그린 그림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전해준다. 죽서루 아래 오십천에는 나룻배가 오가고 죽서루 현판에는 갈매기11)나 고니12)가 날아드는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시를 적은 유명인사들의 글씨가 걸려있다.
성내동(城內洞)
글자 그대로 성안에 있는 마을로 총길이가 5485자이니 1645미터나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형태가 남아있지 않다. 물론 죽서루나 동헌(東軒)도 성내에 있었다.
성북동(城北洞)
마을 북쪽에 갈야산이 우뚝 솟아있고 산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였지만 삼척여자중학교 귀퉁이에 대나무 밭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의병장 김헌경이 이끄는 영동의병부대가 1896년 이곳 전투에서 패한 아픈 역사가 남아있다.
자원동(紫園洞)
삼척중학교 부근으로 이곳 토질이 자적색(紫赤色)으로 인하여 자지전(紫芝田) 혹은 자지리(紫芝里)라 하였다가 자원동(紫園洞)이라고 개명하였다.
적노동(積老洞)
원래 무리실이었다는데 무리실은 한자어로 무노곡(無老谷)이다. 그렇다면 노인이 없는 고을의 뜻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적노리(積老理)’로 바뀐 것은 무병장수의 염원이 담긴 지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리실이 무노곡으로 바뀐 과정은 본래의 뜻을 무시하거나 귀하고 높은 뜻을 폄하시킨 일제 치하 다시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무리하게 갖다 붙인 느낌이 든다. 오히려 홍수 때 계곡 물이 급격히 늘어나는 곳으로 물이 많이 흐르는 물이골에서 온 것이 이곳 지형에 맞추어 부른 지명으로 판단된다.
조비동(鳥飛洞)
조비리(鳥飛里)는 처음 아름다운 뜻을 간직한 ‘샛별고을’이었다. 왜냐하면 명성곡(明星谷)이라는 지명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샛별고을이 1759년 <여지도서(與地圖書)>에 한자의 뜻과 무관한 ‘샛별리’가 ‘새비리(沙飛里)’로 바뀌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본래의 뜻을 살리지 못하고 ‘새’자만 한자로 ‘조(鳥)’자로 바뀌어 조비리(鳥飛里)가 된 것이다.
증산동(甑山洞)
동해시와 삼척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여 동해시 추암 촛대바위가 가장 잘 바라보이는 삼척시의 가장 북쪽 바닷가 마을.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해가(海歌)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주위에 있는 산형지세의 모습이 시루(甑)와 같아서 ‘실뫼’ 또는 ‘시루뫼’라 하였는데 뜻을 살려 한자로 ‘증산(甑山)’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관련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聖德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 [今溟州], 行次海汀晝饍. 傍有石嶂, 如屛臨海, 高千丈, 上有躑躅花盛開. 公之夫人水路見之, 謂左右曰 折花獻者其誰 從者曰 非人跡所到 皆辭不能 傍有老翁牽牸牛而過者, 聞夫人言, 折其花, 亦作歌詞獻之, 其翁不知何許人也. 便行二日程, 又有臨海亭. 晝饍次海龍忽攬夫人入海, 公顚倒躄地, 計無所出. 又有一老人, 告曰 故人有言, 衆口鑠金,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以杖打岸, 則可見夫人矣. 公從之, 龍奉夫人出海獻之. 公問夫人海中事, 曰, 七寶宮殿, 所饍甘滑香潔, 非人間煙火. 此夫人衣襲異香, 非世所聞, 水路姿容絶代, 每經過深山大澤, 屢被神物掠攬. 衆人唱海歌詞曰,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綱捕掠燔之喫.
老人獻花歌曰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13)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밥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기암봉우리가 있어 병풍처럼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장14)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누가 저 꽃을 꺾어 오겠느냐?’ 하니 종자들이 대답하기를, ‘사람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이라면서 모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곁에 한 늙은이가 암소를 데리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다 주면서 노랫말을 만들었는데,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이틀을 수월하게 지난 뒤에 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데서 점심밥[晝饍]을 먹다가 해룡이 나타나 홀연히 바다로 끌고 갔다. 공이 허둥지둥 발을 굴렀지만 마땅한 계책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옛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 하니 이제 해중의 짐승인들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사람들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 부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되 칠보궁전에 음식이 맛있고 향기로워 인간의 요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인간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던 향기가 풍겼다. 원래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녀라 높은 산과 큰 못을 지날 때마다 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했다. 여러 사람이 부르던 <海歌(詞)>는 이렇다.
<海歌(詞)>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 놓아라
남의 부인 빼앗아간 죄 얼마나 큰 줄 아니.
네 만약 거역하면
그물로 잡아 구어 먹을 거다’
<獻花歌>
붉은 바위 가에
어미 소 붙잡은 손놓고
나를 부끄러워 않으신다면
꽃 꺾어 드리오리다
<헌화가>와 <해가(사)>관련하여 작품의 배경이 되는 위치에 대해서 삼척시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 편의 향가인 <헌화가>와 <해가(사)>는 지금까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모든 상황과 주변 환경으로 미루어 볼 때 <헌화가>는 임원지역, <해가(사)>는 증산 또는 추암지역의 해안 어느 지점으로 추측하여 증산동에는 <해가(사)>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강릉까지 올라오는 길에 절벽이 병풍처럼 바닷가에 둘러쳐진 곳은 임원과 용화 사이의 해안입니다. 임원항 회 센타 남서쪽 산을 ‘수리봉’ ‘수로봉’이라 부르는데 그 지역 노인들에 의하면 예전에 철쭉꽃이 많이 피었던 곳이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곳의 해안가 벼랑은 <헌화가>의 작품 배경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또한 삼척시내와 인접한 와우산 자락의 해안마을인 증산과 추암 지역에는 암소를 끌고 와 철쭉꽃을 꺾어 바치던 노인, 해룡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해내는 계책을 일러준 노인을 연상케 하는 ‘신우(神牛)의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었다는『척주지』의 기록이 보이고, 그 지역 굴암이라는 곳에 용묘(龍墓)가 있으며, 마을사람들이 막대기로 땅을 치던 것과 흡사한 ‘떼불놀이’와 거북의 껍질을 문 위에 걸어두고 액을 막는 민속이 전해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1991년 이어령 박사께서 문화부장관 재직 시 죽서루 경내의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 제막식 참석차 삼척을 방문하여 삼척을 ‘헌화가와 해가사의 고장’으로 가꾸고 홍보하라는 조언에 힘입어 삼척시에서는 철쭉을 시화(市花)로 삼고,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헌화가를 배경으로 한 ‘실직국 철쭉놀이’란 작품을 출품하여 널리 홍보하기도 하였습니다.※참고자료 : 삼척문화원, 『실직문화』, 제3집, 1992
그런데 강릉 정동진 해안도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심곡항이 있는데, 심곡항을 지나 옥계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헌화로’라고 강릉시에서 명명한 자연석에 새긴 표석이 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속 주인공 순정공과 수로부인 일행은 서라벌에서 강릉으로 부임하면서 신이한 체험을 한 것이 아니고 강릉 쪽에서 서라벌 방향으로 남하를 하다가 <헌화가>와 <해가(사)>의 사건을 체험한 꼴이 된다. 삼척과 강릉의 두 지방자치단체가 객관성이 있는 학술조사를 마치고 상호 합의하여 일한 결과가 되지 못하고, 단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조형물 설치를 성급하게 해버린 단면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재[大峙]
삼척시의 오분동과 근덕면 맹방리와 경계를 이루며 바다와 접하여 험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한’이란 크다는 뜻이다. 대전이 한밭이라는 것과 같다. 한자로는 ‘대치’가 되고 '한峙'라면 국한문 혼용표기로 바람직한 표기가 못된다. 그러나 미로면에 있는 ‘댓재’는 대나무 숲의 뜻을 지닌 ‘竹峙’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하니 별개이다. 한재에서 근덕 방향에서 보이는 해안 경관은 삼척의 으뜸가는 해안명소다.15) 옛날 정상에 元帥臺가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해안 경계를 위한 군사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산 속으로 터널16)이 뚫어져 이곳을 찾는 발길이 드물다.
참고문헌
김부식 저, 이강래 교감,『三國史記』(서울: 한길사, 2003)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편, 『譯註 高麗史』, (서울: 태학사, 1987)
삼척문화원,『悉直文化』3집, 1992
삼척시청 홈페이지
삼척시청, 『三陟市誌』, 1997
이가원 역, 『三國遺事』, (서울: 태학사, 1994)
이병도 역주, 『三國遺事』, (서울: 명문당, 1992)
허 목 저, 배재홍 역,『陟州誌』삼척: 삼척시립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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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三國史記』卷35 雜志 第4 地理2
2)『三國史記』卷 5 新羅本紀 5 太宗武列王 5年 3月
3)『譯註 高麗史』卷 5 志 1 623쪽 “成宗 14年 陟州團練使로 고쳤고(中略)別號로 「眞珠」라 한다”
4) 해와 달과 氣
5) 허목이 저술한『척주지』에는 경덕왕 18년 759년에 ‘삼척’으로 개명되었다고 기록됨
6) 나라의 각 고을 뒤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큰산으로 주산(主山)이라고도 한다
7) ‘갈내’를 ‘가을천’으로, 다시 이두식 한자로 ‘加乙川’이 된 것
8) 교동(校洞)이란 대부분 향교주변 마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곧 교동이라는 마을에는 어김없이 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9)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는 고개로 보인다. 나머지 구숙치나 고살재는 우리말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지명으로 이두식 표기로 보면 될 것이다.
10) 향교란 각 고을에 공자의 사상을 받들기 위한 문묘와 거기 딸린 학교를 말한다. 삼척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 고사리재 동쪽 기슭(현재의 삼척초등학교 옆)에 건립한 것을 태종 7년(1407) 월계골 곧 지금의 당저동으로 옮겼다가 세조 14년(1468)에 다시 원위치로 옮겼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02호
11) 이이의 싯귀, ‘碧崖西畔弄眠鷗’
12) 이승휴의 싯귀 ‘斜倚翠巖看鵠擧
13) 李丙燾 譯註, 『三國遺事』, (서울: 明文堂, 1992), 60쪽에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원문을 옮김.
14) 출발지 서라벌에서 해안을 따라 명주로 오는 도중에 어른 키 천 배이나 되는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15) 백사장이 무려 15리, 소나무 숲과 해당화 숲이 10리나 뻗어있는 명소다.
16) 6.25 한국동란 때 미군의 함포사격을 많이 받아 새로 만들어진 터널의 안전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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