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에 가장 많이 자라는 나무, 가장 넓은 서식 분포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가 소나무이다
.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고 애국가의 가사에도 나타나듯 소나무는 한국인의 의·식·주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소나무가 한반도에서 자라기 시작 한 것은 대략 6,000 여 년 전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소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삶과는 밀접한 인연을 맺어 면서 자라온 나무이다.
소나무의 밑 부분에서 굵은 가지가 갈라지는 것을 『반송(盤松)』이라 하고, 여러 개의 붉은 줄기가 우산형태의 수형을 하는 것을
『다행송』이라고 하며, 강원도 태백산을 중심으로 자생하는 줄기와 마디가 곧은 것을 『금강송(金剛松)』이라고 하며
주요 조림수종으로 손꼽힌다.
어떤 소나무라도 수령이 많아지면 나무줄기 중심부의 빛깔이 짙고 단단한 부분인 심재(心材)가 발달되어
붉은 색의 비율이 반쯤 되는 것은 반백송(半白松)이라 한다.
특히 그 중에도 "소나무 중의 소나무", "백목의 왕(百木之王)"으로 일컫는 『춘양목(春陽木)』은 태백산맥 남부 일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을 중심으로 한 산악의 음산 지대에 자생하는 일명 『적송(赤松)』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
아주 좋은 질의 소나무에 대한 대명사로 불리는 춘양목은 수형이 곧을 뿐만 아니라 옹이가 없고 재질이 단단하여
뒤틀림이나 터짐이 일반 소나무에 비해 극히 적으며, 심재가 많아 일반적으로 적송이라고 부른다.
외관상 특징으로는 가지가 가늘고 적으며 나무줄기 상단부는 표피가 얇고 황적색을 띠며 하단부의 수피(樹皮)는
규칙적으로 거북이등 모양과 같이 육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다른 소나무와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자라는 춘양목의 재목은 색깔이 진홍색을 띠고 직사광선에도 변함이 없이 무늬가 아름다워 널리 이용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아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한다.
이로서, 옛날 궁궐의 신, 개축 재목으로 진상(進上)되고, 사찰, 관아(官衙)는 물론 부호(富豪)들의 대가(大家) 건축 자재로
널리 애용되어 왔다.
태백산 북쪽 강원도 지방은 소나무 원목의 운송에 어려움이 많아 개발이 늦었고, 남쪽에는 정감록 비결의
한국 십승지(十勝地)중의 한 곳으로 손꼽히고 예로부터 삼재 불입지(三災不入地)로 조선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史庫)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봉화군의 춘양면과 소천면을 중심으로 낙동강을 이용한
뗏목이 용이하여 개발이 시작되었다 한다.
당시 육로가 개발되기 전이라 낙동강 상류에서 벌채된 춘양목은 안동지방 및 평야지대로 공급되어 전국적으로 공급되었다 한다.
나라의 관리들이나 삼림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춘양목을 개발하기 위하여 이곳 태백산 근처인 소천면 쪽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곳이 춘양이었으니 그들의 입을 통하고, 또 적송이 춘양으로 집산(集散)된 관계로 『춘양목(春陽木)』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이 태백산 주위에는 일본시대까지만 하여도 춘양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2차세계대전 때 군용으로 쓰이면서 대량벌채로
수난을 당하게 되고 울창하던 삼림은 점차 황폐화되고 해방이 되면서 자유화의 물결과 함께 얼마 남지 않았던 춘양목을
마구 베어내 온통 벌거숭이산으로 만들었다.
현재는 봉화군내 춘양목은 춘양면과 소천면 및 석포면의 일부 지역과 울진군 서면의 일부지역에서 일부 남아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로부터 송, 죽, 매(松竹梅) 또는 송죽이라 해서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극찬하고 있다. 강인재의 '화목구품(花木九品)'이란
책에는 꽃·나무를 등급화 함에 있어 일품에 소나무, 대나무, 연(蓮), 국화를 꼽았다. '화암(花庵)'이란 책에는 나무 등을
9등급으로 분류함에 있어 1등에 소나무, 국화, 연, 대나무 순으로 적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시대 선인(仙人) 술랑(述朗)등은 "바람이 불면 솔밭은 거문고를 타는 소리로 변하고 달이 뜨면
솔밭에 황금 모래알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한 표현은 소나무 숲의 풍치를 극찬 한 것인데 이러한 심성이 우리 민족의
성격을 만들어 갔기에 우리 나라 백성은 평화를 좋아했고 속기(俗氣)가 없는 깨끗한 정신 환경을 숭상하게 된 것이라 했다.
그런데 봉화군 전체 면적 1,201㎢의 83%를 임야가 차지하고 있고 군민들은 대대로 소나무와 함께 애환을 같이하며
살아왔기에 군의 나무를 춘양목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봉화군의 발길 닿는 곳마다 에는 소나무와 유래된 아름답고 향토색 짙은 지명들이 고을마다 숱하게
남아 이와 접할 수 있다.
봉화군 봉화읍(奉化邑)은 군청 소재지로 본래 내성(川城)이라 불리어져 왔다. 내성이란 봉화읍 소재지의 위치가 내성천의
하상 보다 낮은 천정천(天井川)으로 형성되어 하천의 뚝(제방)이 성곽과 같다하여 내성이라 불러 왔다.
그 후 내성(奈城)에서 내성(乃城)으로, 또 다시 봉화(奉化)로 변천해 왔다. 이 곳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삼남의 4대 길지(吉地)로 꼽았다.
이 같은 유래의 봉화읍 유곡3리를 찾으면 골이 깊고 질이 좋은 소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송생(松生)이』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솔밭이라 하여 『신기(神奇)솔』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또 같은 읍의 해저1리 바래미라는 마을에는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 1641∼1707) 선생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소나무를 심
었다고 하는 『솔밭』이 있어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좋은 안식처가 되고 있다.
산협(山峽)으로 우순풍조(雨順風調)하고 오곡백과 등이 풍성한 지방인 까닭으로 물야면(物野面)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성종 때 전국 최고의 초정 약수로 뽑혔다는 기록이 있는 오전(梧田)약수터가 있는 고장이 있다.
그 같은 유래의 물야면 오록2리 장터 마을을 가면 옛날 마을 주변에 솔이 무성하고 울창한 송림(松林) 속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하여 『솔안』또는 『송내동(松內洞)』이라 부른다.
역시 물야면의 가평1리, 압동1리, 수식1리, 북지4리와 소천면의 고선1리, 재산면의 남면1리 마을에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자시정(子時正 : 00시 - 1시까지)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밝아오는 새해 1년 동안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가가호호 소지를
올리면서 무사를 기원하는 『성황당 소나무』, 『당소나무』,『솔등지』등으로 불리어 오는 나무가 있다.
또 물야면 오전2리에는 소나무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솔골』이 있고, 압동3리에는 동네의 지형세가 와우형곡(臥牛型谷)이라 하여 소가 누워서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어야 동네 주민들의 의식(衣食)이 풍부하여 인심이 좋다는 설이 있어 소의 먹이를 상징하는 『식송목(食松木)』이라 불리는 부락도 있다.
그리고, 물야면 두문2리 샘실에서 가평리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하고 200여 년전 우계 이씨 선조가 심은 소나무의 모양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마을에서는 국보(國寶)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동네 주민전체가 보호하는 소나무라 하여 『동소나무』라 명칭이 붙은 소나무도 있다.
또한 같은 면 수식2리에는 마을 앞 500m 지점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마을이 생기면서 소나무를 또 심었는데 부석사(浮石寺 : 봉화군과 인근한 영주시 소재) 중수(重修)시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 사용하였다는 『식송(植松)거리』도 있다.
이 마을과 조금 떨어진 북지3리 마을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하여 『솔밭』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북지4리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오솔고개가 있어 『솔고개』라 했다.
옛날 봉화에는 금륜산(金輪山)의 성곽 앞에 오동나무가 밀림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오동나무에는 봉황새가 서식한다 하여 봉성(鳳城)이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봉성면(鳳城面)의 금봉2리와 석포면의 석포3리에는 큰 소나무가 여섯 그루가 쌍둥이처럼(정자처럼) 웅크리고 서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 좋은 곳으로 『육송정(六松亭)』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군소(群小)하천이 나열 분포된 까닭으로 소천(小川)이라 이름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있는 소천면 고선1리 마을에는 500년 묵은 춘양목 한 그루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어 보호수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같은 면 임기2리에는 임기역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주위의 산에 작은 숲이 우거져 있다하여 『소림(小林)』, 북쪽으로는 송림이 많이 우거져 있다하여 『대림(大林)』이라 불렀으나 요즘은 구별 없이 『임기(林基)』 또는 『숲터』라고 부른다.
또 두음2리라는 마을에는 오동나무와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하여 『오송(梧松)골』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전지역이 암석과 계천(溪川)으로 형성되고 많은 목재를 뗏목으로 운반한 까닭으로 석계(石溪)라 하다가 다시 석포(石浦)라 부르게 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포면(石浦面)이 있다. 이 석포면 석포1리에는 약 200년전의 춘양목이 자생한 밀림 형태로 보존되고 있어 1982년 10월 29일 군나무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같은 면 석포2리와 승부리에는 소나무가 자생 울창한 산림으로 주위 경관이 아름답다하여 『솔밭골』, 『솔밭재』로 각각 불리고 있는 곳이 있다.
산세가 오묘하게 웅립(雄立)하고 있어 풍수 지리학상 봉화의 8대 명산이 재산에 있었다는 선인들의 예언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재산면(才山面)이 있다. 이 재산면의 현동3리에는 상호 부조를 위해 계(契)를 조직한 후 산을 매입해서 계를 운영한다 하여 『송계산(松契山)』이라 하고 그 고을를 『송계골』이라 이름한다.
도립공원 청량산(靑凉山)이 소재하고 있고 낙동강과 운곡천이 합류하여 수량도 많고 강물이 수정과 같이 맑고 깨끗한 호수 같은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곳이라 하는 명호면(明湖面)이 있다. 이 면의 도천4리에는 약 200여 년전 청주 정씨가 개척하고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싸여 둘러 싸여 있다 하여 『솔골』또는 『송곡(松谷)』으로 불리고, 풍호2리 마을에는 큰 노송 4∼5그루가 있어 주위 경관이 좋다하여 『보송곡(寶松谷)』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또 같은 면 고계2리에는 마을 뒤에 수 백년된 소나무가 큰 무리를 이루고 있어 경관이 아름다워 이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곳으로『솔밭등』이라 한다.
봉화군 상운면(祥雲面)의 가곡리에는 까치골(鵲洞)이 있으며 까치는 상서(祥瑞)로운 조수의 '祥'자와 운계리의 구름재(雲峴)의 이름에서 '운'자를 각각 떼어 상운면이라 명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다.
그와 같은 상운면으로 발길을 옮겨 가곡1리를 찾으면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가 울창하여 위가 쟁반모양으로 생겨서 선녀가 옥녀봉(玉女峰)에 내려와 감주를 먹다가 남은 것을 부어 떨어지는 방울을 받아 먹게되면 이 마을에 선비가 난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반송(盤松)』이란 곳이 있다. 상운면의 문촌1리와 토일리, 구천리, 설매리 마을 앞 하천으로 큰 소나무가 각각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송실(松室)』, 『송골』, 『솔고개』, 『큰솔』, 『솔뱅이』, 『솔뱅』등 봉화의 솔 내음이 솔솔 풍기는 땅 이름들로 지켜 오고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의 대대로 면면히 이어져 오는 역사의 꺼풀들을 고이고이 간직한 채 삶의 어지러움과 질곡, 애환과 환희를 함께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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