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3년 11월 7일
☞ 산행날씨: 맑고 청명한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24km + 알바 1.4km / 10시간 55분소요
☞ 참석인원: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함께
☞ 산행코스: 수레네미고개-폐레이더봉-헬기장-무건리고개-268.7m봉-설머치고개(어룡고개)
부도골갈림길-540m봉-탑골재-640m봉-부도골재-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 병풍바위
헬기장-간패고개-안부사거리-늦은고개-410m봉-담안삼거리갈림길-510m봉(H)
마차산-댕댕이고개-밤골재-431m봉-양원리고개-봉암광산갈림길-승전교갈림길
구정산-291m봉-헬기장-한탄교
☞ 소 재 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남면 / 파주시 법원읍,적성면
동두천시 안흥동, 봉암동 / 연천군 전곡읍, 청산면
요즘들어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것만 같은 느낌이다.
어제 우연히 도반 스님과 통화를 하다가 요즘 심정을 이야기하니 마음이 울적할 땐
털어버려야지 가슴에 담고 있으면 홧병이 생긴다고 하면서 절에 한번 들리라고 한다.
그래서 절에 들렸다고 지난 추석 연휴에 마치지 못했던 문산(감악)지맥 2구간을 주말이
아닌 평일에 한 걸어보고 싶은차에 지난구간 동행했던 동료산꾼 젠틀맨님에게
통화를 했더니만 같이 가겠노라고 쾌히 승락을 한다.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저녁 6시30분에 도곡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불광역에
도착하니 때아닌 비가 꽤나 많이 내려서 불안하긴 하지만 젠틀맨님을 만나
목적지인 파주시 법원읍에 도착하여 인터넷에 검색한 찜질방의 위치를
물으니 이곳은 찜질방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서 저녁 9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조금은 난감하여 이 근처에 찜질방이 없느냐고 하니까...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금촌인데 버스로 40분이 걸린다고 하여 가까운 여관으로 가서 여장을 풀고
오랫만에 만난 젠틀맨님과 여관 앞에 있는 치킨집에서 맥주 한잔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감악지맥 전체지도
오늘 산행 구간의 지도
불광동에서 파주시 법원리가는 버스(11월 6일 20시 30분)
불광동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20분에 걸쳐서 파주시 법원읍에 도착한다.
법원읍에 내려 인터넷에서 검색한 찜질방을 찾으니 이곳은 저녁9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찜질방을 찿으니 가장 가까운 곳이 금촌인데 버스에서 40분 거리란다.
그러면 내일 아침 들머리와의 거리와 식사를 감안해서 정류장 건너편 여관으로 가서
숙박비 30,000원을 지불하고 여장을 푼 다음에 치킨집에 들려서 오랫만에 만난 젠틀맨님과
맥주 한잔을 한 다음에 내일 아침 식당을 알아보니 7시 넘어서 문을 연다기에 편의점에서
햇반과 라면을 사서 내일 아침에 여관에서 끓여먹을 계획을 하고 방에와서 깊은 잠에 빠진다.
법원읍(法院邑)의 유래
법원읍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술이홀현에 속한 곳이었으며, 통일신라 때에는 한주의 봉성현,
고려 전 기에는 양주, 후기에는 양광도의 서원현,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 파주군에 속한 곳이었다.
조선 말 당시에는 천현(泉峴[샘재])의 이름을 따서 천현면이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32)에
천현내패와 천현외패 2면으로 갈랐다. 1914년 4월1일 군면 폐합 때 천현내패·외패면과
파평면의 지천리 일부를 병 합하여 천현면이라 하였다.
1989년 4월 1일 군 조례 제1280호로 법원읍으로 명칭 변경과 함 께 승격하였다.
법원읍은 법원리에서 그 명칭을 딴 것인데 법원리는 법의리(法儀里)의 '법'자와
원기리 (院基里)의 '원'자를 딴 것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법원(法院)과는 한자만 같을 뿐 상관관계가 없다.
율곡 이이의 장지도 이 지역에 있다
아침 5시에 모닝콜의 울림에 잠에 깨서 씻은 다음에 가져온 코펠과 버너로
햇반과 라면을 2개를 끓여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다음에 택시를 타고 오늘의 들머리인
수레네미 고개로 가는데 택시기사가 위치를 정확하게 모른다.
지도를 보여줘도 모르고해서 지난번 왔던 感으로 오산 사거리를 거쳐서 벌말로 가는데
어둠속에 훈련중인 군인들만 보이고 위치를 정확하게 몰라 다시 지난번 기억을 더듬에
군 훈련장을 지나니 포장도로가 나오면서 수레네미 고개에 도착한다 (06:40)
수레네미고개(車踰嶺:06:45)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거미울에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 수레가 끊임없이 넘나들던 고개라 하여 수레네미고개라 하였다.
또 지세가 험하고 도적이 많아 쉰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으므로 쉰고개
또는 쉰넘이고개라고도 하였다.처음에는 그 고개를 쉰넴이고개라고 하였는데
쉬르네미, 쉬르네미 하다가 수레네미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혹은 고개가 험해 몇 번을 쉬어야 넘을 수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차유령(車踰嶺), 수레너미고개라고도 한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차유령이 처음 보이기 시작하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 등에도 차유령이 나온다.
현재 수레네미고개는 이용되지 않고 그 옆에 새로 놓인 2차선 포장도로를 통해 차량들이 통행하고 있다.
거미울이라는 마을의 원래 이름은 ‘수레 거(車)’에 ‘말 마(馬)’자를 써서 거마울이었다.
거마울, 거마울 하던 발음이 거미울로 변형되어 거미울마을이 되었다.
여기에는 마차길이 지나는 곳이라 주막이 있었다.
장사꾼들은 고개를 넘기 전에 그 주막에 모여 잠을 자고 가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아주 유명한 고개인데 실제 와보면 아주 적은 임도에 불과하다.
거기다가 군부대 훈련장들이 있어서 민간인들의 출입은 거의 없는 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군부대 삼각점(06:55)
수레네미 고개에서 올라 등로로 접어드는데 지난번 이곳까지 올랐다가 되돌아와서
다시 돌아간 기억이 있는 군 삼각점을 만나는데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곧이어 벙커봉을 만나고...
벙커봉으로 내려서니 군 교통호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곧이어 우측으로 같이 올라온 임도를 가로질러 우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희미한 임도를 지나니 곧이어 조그만 봉우리가 나오면서 암봉사이로 오른다.
함석 건물(07:05)
조그만 봉우리에 오르니 우측 능선아래에 군 시설물인듯한 함석 건물이 보이고
레이더 시설인듯한 폐레이더 시설물과 최근에 설치한 송전탑이 지나간다.
최근에 장염으로 고생을 하여 열흘이상 술을 입에 대지 않아서 조금 나은듯 했는데
어제 저녁에 먹은 생맥주 탓인지 갑자기 배가 아프고 설사가 난다.
볼 일을 보고 나고도 계속 배는 아파오고 두번이나 볼일을 본 다음에야 길을 떠난다.
식별을 할 수 없는 삼각점도 있고...
최근에 설치한 듯한 송전탑
송전탑 시설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넓은 임도가 나오고...
가야할 감악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넓은 임도를 따라 무건리고개로 향한다.
ㅓ자의 임도가 나오고 문산(감악)지맥은 계속해서 직진으로 임도를 걸어간다
임도옆에 서있는 군부대장의 경고판
넓은 공터(07:20)
일출은 시작되고...
군부대 시설물을 지나서 좌측으로 꺽어져 계속해서 임도로 이어간다.
좌측 임도 위에는 수원백씨 묘소가 있고 계속해서 임도로 문산(감악)지맥길을 이어간다.
임도 우측에 헬기장을 끼고 계속 임도로 걸어간다.
계속해서 만나는 군시설물
무건리(武建里)고개(07:30)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 있는 고개로 옛날 설인귀가 이곳 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해서 무건리라 부른다고 하며 무건이,무건동이라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감굴, 모른말, 빈배이, 솥점 등이 있다. 감굴은 감악산 밑이 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모른말은 모퉁이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빈배이는 거르메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솥점은 솥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2002년 이곳 무건리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이동 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에
여중생 2명이 깔려죽는 일이 발생하여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일어나 사회적
이슈가 된 곳이도 한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 고개를 범여는 지금 걷고 있다.
고개 우측에 있는 인삼밭이 수확이 끝났는지 철거된 시설물만 어지럽다.
무건리 고개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군초소와 군부대 후문을 끼고 임도가
나오고 직진으로 솔밭으로 지맥길을 이어가지만 곧이어 임도로 나온다.
무건리 고개에서 직진으로 솔밭으로 들어섰다가...
2분도 안되어 다시 좌측 임도로 내려선다.
개념없는 인간들
임도에는 송전탑을 설치하면서 남은 전선 피복들이 임도에 마구 버려져 있다.
공사를 끝내으면 마무리도 잘해야지... 참으로 개념없는 인간들이다.
오르막을 오르다가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타이어로 만든 벙커봉이 나오고...
레이더 벙커봉(07:40)
폐타이어 벙커 위에는 망가진 레이더가 방치되어 있다.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가 잣나무 단지를 가로 지른다.
잣나무 단지로 내려서니 다시 임도를 만나고...
오거리(07:43)
임도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조금 내려오니 넓은 시멘트로 포장된 오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 1시 방향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오르막으로 오른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오르막을 오르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좌측으로 꽤나 큰 공동묘지가 나오는데 묘비가 한결같이 지붕이 있다.
다들 벼슬을 하신 분들인가?
Y자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조그만 암릉이 나오면서 우회길로 올라선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젖은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능선위로 올라서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삼각점과 군 삼각점이 있는 368.7m봉에 도착한다.
368.7m봉 (07:55)
331FOB/C-8903 군삼각점
368.7m봉 3등 삼각점(△문산305/1996재설)
지난구간에 걸었던 노고산도 보이고...
봉우리에서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오니...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좌측으로는 군부대 사격장 후문이 있고 도로 건너편도 군부대다
직진을 하니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넓은 공터에서 좌측의 임도로 들어서는데 억새밭에 경고판도 있다.
넓은 공터에서 좌측 임도로 1분정도 걸어 올라가니 우측에 함석건물이 있고...
차량을 엄폐하는 벙커 4곳이 있는 곳을 지나 우측으로...
낙엽길을 호젓히 걷고있는 동료산꾼 젠틀맨님
잠시후에 Y자 임도가 나오는데...
가운데에 육군을 뜻하는‘육’자가 쓰여진 삼각점이 나오고...
잠시후에 군사 훈련에 쓰이는 간판들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잣나무단지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뚜렸한 임도를 버리고 좌측 희미한 능선의 임도로 걸어간다 (알바주의)
상산김씨 묘지를 뒤를 돌아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T자 임도를 만나고 이곳에서 상산김씨 13대손 표시석을 끼고 우측으로 올라간다.
오지 산행을 전문으로하는 백두등산클럽의 시그널도 보이고...
다시 잘 관리된 묘지가 나오는데 達城徐氏와 金海金氏 묘지 뒷쪽의 능선으로 걷는다.
낙엽이 너무 많이 쌓여 길이 아예 없는 능선우측으로 내려서니...
수로가 보이고 수로를 따라 절개지로 내려서는데 2번이나 넘어진 후에 설머치고개에 도착한다.
설마지 고개(薛馬馳:08:45)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에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양주에서 적성(현 파주시)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중요시됐던 고개로
이 지역 사람들은 사기막 고개라고 부르는데 4차선인 371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마치고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지원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근처에 제단이 있어 설마고개(薛馬峙)라 했다고도 하며, 어룡고개 혹은 어영고개라고도 불리었는데,
임금님이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설마치고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설마현(薛馬峴) 혹은 설마령(薛馬嶺)으로 나오며, 이 고개로 수십 리를 가면
적성현이 나온다고 하였다. 『해동지도(海東地圖)』[1760],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1767~1776] 등 에는
설마치(薛馬峙)로 나온다.
설마치고개가 시작되는 신암리 동쪽에 신암저수지가 있다.
고개가 끝나는 파주시 적성면의 설마리도 설인귀와 관련된 마을이다
설마지 고개 다른 이름이 어룡고개인데 신라의 삼국통일을 지원하러 온 설인귀가 말을타고
달리던 고개라는 설을 가졌지만 청나라 말기에 유행한 군담소설(軍談小說)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선후기 이를 개작한 "설인귀전"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서 호사가들의
꾸밈 얘기의 결과물이 아닐까? 고 생각해본다
설인귀는 산서성에 있는 강주 용문사람이다, 영류왕4년 당이 고구려를 칠때 북부욕살 고혜진의 진영을 종
횡무진으로 짓밟아 이름을 날리고 이를 본 당태종이 유격장군으로 임명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나당전쟁 발발2년째인 문무왕11년(671년) 대당총관이 되어 왔다가 패하여 돌아가고 4년 후 675년 당의 대규모 공격때는
수군을 이끌고 참가, 당의 최후 공세인 이듬해 기벌포 해전에서 대패한뒤에 다시는 오지 못했으니 이곳에 설인귀의 흔적이
남을 이유가 없는것이다
그 보다는 경상도에 "세마지"라는 땅이름이 있는데 사직단이 있는 고개를 가르키고 있다 하는것으로 미루어
적성현의 사직단, 혹은 감악산 제당이 있는 고개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아닐까? 는 설이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일설에는 임금이 넘었다 하여 어룡고개라 부르며 고개아래 임금이 마시던 어수정도 있다고 전해진다
설머치 고개를 가로질러 지금 도로공사중인 절개지로 올라 서면서 설머치고개로 뒤돌아 본다.
그런데 이곳에 당나라 장수였던 설인귀(薛仁貴) 장군의 유래가 많은 걸 이해가 안된다.
지난핸가 얼마전에 방영된 사극 드라마 연개소문과 주몽,대조영 같은 드라마를 보면 작가들의
정확한 역사의식 없이 드라마 대본을 썼는지 왜곡이 심한 것 같다.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설인귀(薛仁貴) 장군의 유래를 보면
설인귀는(613~682) 용문출신으로 서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군졸을
응모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후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랑장 소정방과
고구려 적봉진을 침략 658년(보장왕 17)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되어 주장 이세적과 육군을 이끌고
봉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제성을 공략하였다.
666년(보장왕 25) 고구려장수 막리지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에게 쫓겨
그를 입당시킨 사실과 신라에서 구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으로 요동안무대사 契芯何方을 도와 내침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 목저, 창함성을 협공 드디어 남산은 중신 등과 당영에 나가 항복함에 따라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9월 21일 역사적인 최종의 치욕일(始祖 朱蒙으로부터 28왕)로서 705년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 설인귀는 검교 안동도호부 총독이 되었다.
648년 이때 신라무왕(제30대왕)의 의도(意圖)를 책망하는 장문을 보내자 진덕여왕(38대)은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 토지를 모두 그대에게 주어 편안하게 하려한다는 내용에 변명서를 보내 왔으며 신라의 정당한
요구에 대변을 삼았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땅을 대부분 점령한 후 설인귀는 671년(신라문무왕 11) 계림도 행군 총관으로서 신라에
내침하였으며 이어 675년(문무왕 15) 신라 숙위학생 풍훈을 향도로 삼아 풍성강을 침공하였다.연이어 나장문훈에게
대패 이듬해 문무왕 16년 11월 금강하류 소벌포에서 거듭 패전 후 678년(문무왕 17)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무순(봉천)으로 이치함으로 나당간 무력 충돌이 종식되었으며 설인귀는그 후 본위대 장군이 되어 평양군공에 봉해졌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장군은 적성면 주월리 백옥봉하 오환면적오제갈지에서 가난한 집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명기한 용문은 바로 이곳인지도 모를 일이다.
설인귀는 구척 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 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한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무건리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무건리로 호칭하였다.
설머치 고개에 대한 의문을 품고 절개지를 올라서 감악산으로 향한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에 달성서씨의 묘지 1기가 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힘들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군벙커봉이 보이고...
군 벙커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으로 오르니...
작은 암릉사이로 등로를 이어가고... 전망바위가 나오는데 지나온 능선이 보인다.
조금전 내가 지나온 능선의 궤적
낭바위 전망대(09:05)
본격적인 감악산 능선에 올라서니 우측 부도골에서 올라오는 능선과 합류하고 감악산 이정표와
벤취가 설치되어 있고 능선 아래로는 신암저수지가 시원스레 보이는 낭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원래 낭떨어지 바위라 부르다가 낭바위가 되었다
높이 10m, 폭 20m정도 병풍을 두른듯 하다하여 병풍바위라고도 한다
능선아래 시원스레 보이는 신암리에 있는 신암저수지
신암리 [神岩里)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 위치한 리(里)로써감악산(紺岳山)에 있는 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부도골, 서뉘골, 주막거리 등이 있다.
부도골은 부두골이라고도 하며 절과 부도가 있다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서뉘골은 서뉘재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거리는 주막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낭바위 갈림봉 이정표
낙엽이 수북한 임도를 따라 감악산으로 향한다.
군부대 유격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잠시후에 임도를 만나고 다시 직진으로 올라선다, 임꺽정봉과 장군봉이 보인다.
잠시후에 가스실이 있는 건물로 가지 못하게 군부대에서 우회도로를 만들어 놨으나
원칙을 고수하면서 가스실이 있는 능선으로 직진을 한다.
가림막 개구멍을 뚫고 가스실로 들어선다.
가스실(09:35)
가스실을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직진으로 오른다.
임도가 끝나면서 본격적인 감악산 오르막의 암릉지대가 시작되는데 또다시
배가 아프면서 설사가 나기 시작하는데 정말로 미칠것만 같다.
엊저녁에 마신 생맥주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감악산 가는 이정표
암릉을 우회하여 오르는데 시원한 조망을 볼 수 있는 곳이 나오는데
파주시 적성읍과 한탄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노고산과 저멀리 도봉산과 북한산도 아련히 보인다.
암릉을 우회하여 올라...
로프를 타고 오르니 탑처럼 생긴 군 벙커를 만나고...
좌측에는 칼로 쪼갠듯한 바위가 있고...
이정표를 끼고 우측으로 암릉으로 올라서니 640m봉이다.
640m봉(10:10)
640m봉에서 바라본 파주시 적성과 한탄강의 모습
감악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탑골재(10:12)
이정표(↑정상 0.7km/→신암저수지 2.5km)
테크목 계단으로 올라서서 우측으로 보니...
지석묘처럼 생긴 암릉이 보이고...
지나온 문산(감악)지맥의 능선과...
설머치고개가 시원스레 조망이 된다.
잠시후에 도착할 임꺽정봉
부도골재(10:18)
이정표(←법륜사/↓신암저수지2.4km/↘부도골0.5km/→정상0.6km)/현위치4-3(징군봉데크)
다시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서니 잠시후에 장군봉 정상이 나타난다.
좌측 능선 아래에는 법륜사가 있다
한국 불교 태교종에 속하며 원래 감악산에는 감악사,운계산,법륜사,운림사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법륜사는 1970년에 옛 운계사터에
재창건 되었고 창건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성종 12년 (1418)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절이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1799년 정조 23년에 편찬된 범우고 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 되었을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중앙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미타전과
동양 최대의 백옥 11면 관세음 보살상과 전면에는 9층 석탑과 자연석으로 세운 세계평화비가
있고 절입구에는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고 경내에는 하얀 불상이 우뚝서 있으며 절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는데 그안에서 시원한 석간수가 흘러나오며 절 바로밑에는 높이 20 m여의
운계폭포가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100대 명산 산행시 한번 가볼 예정이다.
능선 아래로 신암저수지와 원당저수지가 시원스레 조망되고...
멋진 자태를 뽐내는 낙락장송
장군봉(將軍峰:10:20)
장군봉 아래에는 조선 명종때 구월산 청석골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이꺽정의 중간거점이
있었던곳으로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 굴도 있으며 6.25때
치렬한 겪전지로 설마계곡 입구에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을정도로 역사적으로
전쟁의 아픔이 서린곳으로서 80년대 까지는 등반이 금지되었고 "靈山"이라고
전국의 무속인들이 모여들기도 하는 곳이란다.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우측 능선으로 떨어져 임꺽정봉으로 향한다.
임꺽정봉(676.3m:10:25)
감악산 정상 400m 직전에 있는 봉우리로 매봉재 또는 응암봉(鷹巖峰)이라고도 부르며
임꺽정봉 밑에있는 석굴(石屈)로 6~7m 깊이의 사각기둥의 수직굴로 바닥은
3~4평 넓이로 남동쪽 한 면이 트여있다고 한다.
이 굴안 쪽으로 다섯걸음 정도 들어가면 구덩이가 나오는데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의적 임꺽정이 관군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를 치러 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 설인귀굴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고려말 충신 남을진 선생이 은거했던 남선굴이 임꺽정굴이라고도 한다
(현재 남선굴은 비봉 남쪽 병풍바위 아래에 있다)
임꺽정봉에 서 있는 안내판
이곳에 매가 살았다거나 모양이 매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 오는데 정상석은
임꺽정봉이라고 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다.
매봉재 밑에 굴이 하나 있으며 이를 설인귀굴 또는 임꺽정굴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말의 충신 남을진(南乙珍)이 은거한 남선굴이 바로 이 굴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는 의미에서 응암봉(鷹巖峰)이라고도 한다.
임꺽정봉 정상 삼각점(△삼각점(문산22/1982재설)
임꺽정봉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의 모습
임꺽정봉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구간의 모습
감악산 정상에 서있는 25사단에서 세운 통일기원 정상탑의 모습
임꺽정봉 아래에서 만난 이정표
감악정 아래에 있는 고릴라 바위
감악산 정상가면서 뒤돌아 본 임꺽정봉의 모습
임꺽정(林-? : ~1562)
조선 중기 양주(陽州)의 백정(白丁)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조선 13대 명종(1545~1567)때에 정치적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등 의적행각을 벌였다.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을 꼽는다.
내년에 한번 걸어볼 소요지맥 능선의 주봉인 소요산도 보이고...
감악산 가기 직전에 만난 양주 감악정 정자의 모습
감악산(紺岳山:675m:10:40)
경기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여암선생이 기록한
山經表에 의하면 한북정맥의 한강봉과 연결되어 그 지맥을 이루고 있다.
감악산은 옛부터 바위사이로 검은 빛과 푸른 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렸다.
파주시 적성면에서는 어디서나 보이는데, 멀리서 보면 순해 보이지만 일단 정상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면
암봉과 낭떠러지가 도처에 널리 있다. 그래서 가평 화악산, 개성 송악산, 과천 관악산, 포천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고 한다. 감악산은 서울과 개성의 중간지점에 솟아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의 산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맑은날에는개성의 송악산과 서울의 북한산, 동두천의 소요산이 보인다고 한다.
정상에는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古碑(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 25번 지, 높이 170cm)가 서 있는데,
일명 '빗돌대왕비 또는 설인귀비'라고도 한다. 이 비석의 글자는 마멸되어 있는데, 그 생김새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하여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도 있고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설인귀비라는 설도 있다. 정상 서쪽아래 산자락에는 법륜사 사찰과 운계폭포가 자리잡고 있으며,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 굴도 있다.
6.25 때 치열한 격전지로서, 설마계곡 입구에 영국군 참전기념비가 서 있을 정도로 역사적로으로 전쟁의
아픔이 서린곳으로서 1980년대 초까지도 등반이 금지되었었다. '영산' 이라고 전국의 무속인들이
모여들기도 하며, 봄 시산제를 지내기 위해 전국의 산악회에서 몰려들기도 한다.
감악산 정상에서
감악산(紺嶽山)은 매우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짐작된다.
감악산의 ‘감’자를 ‘가미’의 음차로 보아 ‘감악’을 가미[神]의 산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멀리서 보면 감색이어서 감악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여러 측면에서 보건대 감색이어서 감악산이라 했다는 말보다는 산신 가미가 있는 신령스런 산이라는
의미에서 ‘감’이라는 글자를 택하였고, 그것을 감(紺)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감악산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1121]에 처음 등장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이후 『고려사(高麗史)』[145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대부분의 지리서와 읍지(邑誌) 및 관찬(官撰) 문헌에 등장한다.
1760년에는 감악산(紺嶽山)이라는 이름 대신 한자의 획수를 줄여 감악산(甘嶽山)으로 표기한 사례가 있다.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소요산(동두천시), 칠봉산(양주시), 왕방산(포천시)과 더불어 유명한 산으로
양주시를 대표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로부터 경기오악(京畿五岳:관악산, 화악산,감악산,운악산, 송악산)의
하나로 숭배되어 왔으며 수덕(水德)을 상징하는 산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 해마다
2월과 8월 중순에 왕이 향축(香祝)[향과 축문]과 신하를 보내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있었다.
양주시 주민들은 물론 인근 연천군과 파주시 적성면 주민들도 감악산을 신령스러운 산으로 인식해 왔다
감악산 정상의 모습
평일이라 산꾼이라봐야 동료산꾼 젠틀맨과 임꺽정봉에서 만난 등산객 한명이 전부이다.
철책 넘어의 초소에서 초병 2명이 날카롭게 째려보고 있지만 특별한 재제는 없다.
능선 동쪽으로는 저 멀리 한북정맥 능선과 지난해 걸었던 왕방지맥의 종현산과 개미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애뜻한 사랑이 서려있는 소요산도 보인다.
25사단 장병들이 세운 통일한국 기원탑이 높게 보인다.
이곳에서 5분정도 서 있으니 차가운 바람에 체온이 빼앗겨 서둘러 길을 떠난다.
연천군에 세운 마스코트
감악산 몰자비(沒字碑)
감악산 정상에는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고비(古碑),빗돌대왕비,설인귀사적비라고도
하며 비문의 글자는 마멸되어 있는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고장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설인귀 비라는설도 있으며 1982년 6월5일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발견하였고 학계에서는
비의 양식이나 건립 추정연대 지형적 조건 등 으로보아 또하나의 진흥왕 순수비로 추정하며
그 구체적인 이유로는 비의 형식이 북한산비(北漢山碑)의 전체적인 외형과 흡사하고 기단(基壇)의
경우 자연암반에 축을형성하여 건립한 양식이 똑같으며 크기는 감악산비가 높이 170cm두께
19cm너비 78cm인데 비해 북한산 비는높이 155cm 두께 20cm 너비 71cm로 거의 비슷한 크기를
보이고있기 때문이며 고산자 선생은 대동지지(大東地志) 적성조(積城條)에서 감악산단(紺岳山壇)을
기술하면서 산유고비(山有古碑)라 기록하였고 조선시대에 발간된 적성군志 에도 그 소재를 밝히면서
명문(銘文)의 판독이 불가능 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상에 있는 연대 미상의 감악산 비와 감악산 산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숭배의 대상이었다.
감악산 비는 명문(銘文)이 모두 닳아 없어져 고증할 수 없는 몰자비(沒字碑)이다.
비스듬하게 서 있어서 삣돌대왕비 혹은 빗돌대왕비라고도 불렀다.
일설에는 이 비가 설인귀(薛仁貴)의 공적을 기리는 사적비라고도 하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의 비라는 말도 있다.
빗돌대왕에 있는 비석의 갓이 제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는데, 원래 절에 있던문씨 삼형제가 팔아먹은 뒤로
다시 만들어서 올려놓았다는 이야기이다.빗돌대왕는 비석에 갓을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어 갓이 올려졌고,
1960년대까지 이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감악산비의 안내문
임진강 유역, 한강 유역은 본래 마한(馬韓) 땅인데 백제가 이어 받았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 때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신라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잠시 수복하였다가 신라의 배신으로 이 땅을 다시 신라에 빼앗겼는데
배신으로 빼앗은 땅에 신라는 신주(新州- 남천주 - 북한산주)를 설치하고 삼각산 비봉에는
신라의 강역(疆域)임을 선언하는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이 때 세 나라가 빼앗고 빼앗겼던
성과 보루가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칠중성도 그 중 하나였다.
민간에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감악산신으로 여겨 왔다.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고구려 멸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수나라 당나라의 30만 대군,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와도 고구려는 끄떡없이 이들을 물리쳤다.
그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선 장수가 설인귀였으니 설인귀는 당나라의 영웅이 되고
평양에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두자 군정 총독이 되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 장자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치는 전투에 당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을 인간의 욕심이 망친 것이다.
150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역사는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설인귀가 이 지방 출신이라는 소문에 편승하여 민간에서 감악산신으로 천 년을 지내 왔던 것이다.
세계 초일류 통일한국 기념탑
5분정도 감악산 정상에 서 있으니 너무 추워서 철조망을 끼고 지맥길을 이어 간다.
철조망을 끼고 1분정도 내려서다가 우측으로 꺽어지니...
성모마리아상 앞을 지나...
군 교통호를 따라서 미끄러지듯 내려서니...
군인들이 훈련 받을때 취사시설로 이용되는 장소를 지나니...
이정표↑하늘아래첫동네 2.24km, 늘목리 3.61km/↓정상 0.24km
간패고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임꺽정봉의 모습
이정표↑동광정사 1km/↓정상 0.5km) / 로프시설이 되어 있는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병풍바위(11:20)
병풍바위 라고 써놓은 곳에 도착하니 윗쪽은 밋밋한데 아래로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찍한 암릉이 병풍처럼 보인다.
감악산에는 임꺽정굴 말고도 또 하나의 굴이 있는데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병풍바위 아래에 있는 남선굴(南仙窟)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출사(出仕)하기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이 굴에 은거했다는 사천백 남을진(沙川伯 南乙珍)선생의 흔적이 남은 굴이다.
이 분은 서울 청계산에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남게 한 또 한 명의 고려 충신 조견 선생과 함께
감악산 남쪽 정절사(旌節祠, 사천서원)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병풍바위에서 바라본 소요지맥 능선의 모습
가야할 능선의 모습
이정표↓정상 0.5km/→ 감악산신당 2.8km, 초록지기 마을 4.0km,동광정사 0.9km
동광정사 가는 길
예전에는 봉암사(奉岩寺)였는데 동광정사로 사찰명을 바꾼 모양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는 감악산에 감악사(紺岳寺), 운계사(雲溪寺), 신암사(神岩寺)가 기록되어 있다.
봉선본말사지 봉암사 편에 의하면 봉암사의 전신이 감악사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철종 9년(1858년) 화주 창헌(暢憲)이 중창했음을 적고 있다.
우측 병풍바위 아래에는 무속인들이 굿을 하는지 징과 꾕과리 소리가
요란하고 사람소리가 시끄럽게 들닌다. 이곳이 무속인들이 聖地임을 알것만 같다.
헬기장 직전의 이정표(11:00)
←하늘아래첫동네 2km/↑늘목리 3.42km/↓정상 0.45km
이곳에서 늘목리를 가야하는데 잠깐의 방심으로 헬기장에 올랐다가 좌측으로
전곡읍 주민자치 위원회의 시그널로 도배한 좌측 능선으로 20분 정도를 간다.
문산(감악)지맥은 지맥 정상에 군부대가 자리를 잡고있어 우회길이 너무 많다.
이곳에서 헬기장을 지나 늘목리 이정표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좌측 능선으로
20분 정도를 갔는데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여 다시 헬기장 입구로 되돌아 온다.
20분 정도 알바를 한 다음 다시 헬기장 입구로 되돌아오니 다리에 힘이 빠진다
왕복으로 40분 이상을 이곳에서 허비를 한다
등로에 전곡읍 주민자치 위원회에서 달아논 시그널이 1~3m 단위로 달려 있는데
이건 이정표 역할이 아닌 공해 수준이다... 정말 이해가 안된다,
다시 헬기장으로 되돌아와서 헬기장을 넘어 간패고개로 향한다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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