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헬기장 아래 원점으로 되돌아와서 헬기장으로 올라선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헬기장 정상에 병풍바위 표시를 해놓고 얼굴바위 보는곳이란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오늘 가야할 능선
헬기장에서 바라본 남선굴
병풍바위 아래 남선굴이라 부르는 곳에 무당들이 자리를 잡고
굿을 하는지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다
남선굴
은 양주시 남면 황방리 감악산 중턱에 있는 인공 석굴로서 봉암사(鳳巖寺)에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약 30분 정도 걸으면 다다르는 중턱에 위치해 있다.남선굴 앞에는
두 그루의 활엽수를 중심으로 돌무지가 둘러져 있다.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케 하는
기와 및 토기 조각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남선굴은 화강암 암벽을 뚫어 만든 인공 굴이며 높이 2.4m, 너비 4.5m, 길이 2m 정도의 규모이다.
굴 안에 다시 2개의 작은 굴을 팠는데 오른쪽 굴에는 웅덩이가 있어 물이 모이도록 하였다.
왼쪽 굴에는 안쪽에 3개의 굴이 있는데, 오른쪽 굴에는 바닥 부분에 4매의 판석을 깔아 대석으로 사용하였던 듯하다.
굴의 상부에는 ‘굴선남’이라고 우측에서 좌측으로 글자를 새겼다.
지금은 복을 비는 사람들의 기도소로 이용되고 있다.
고려 말 목은(牧隱)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사은(四隱)으로 불린 곡은(谷隱) 남을진(南乙珍)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고
이 굴에서 은거하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따라서 남선굴은 남을진과 관련하여 생긴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남을진(南乙珍) 선생은
고려말 충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공양왕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중의 한사람이다
성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등과 사귀었다.
고려말 정치가 문란하여 사천(沙川)에 은거, 1392년 조선의 개국 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사천백(沙川伯)으로 봉해지자 감악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屈)이라 했다.
헬기장 아래로 내려서니 군벙커가 보이고...
동광정사 갈림길 이정표(11:50)
개구리 입처럼 생긴 바위를 만나고...
이정표를 만나 능선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좌측 옆사면으로 내려간다.
이곳 능선에도 전곡읍 체육회가 띠지로 도배를 하다시피 해놨다.
휴계용 장의자 2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편안길의 안부 능선을 걸어가니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송전탑을 만나고...
이정표에서 송전탑 아래 좌측으로 꺽어진다.
NO 54송전탑(12:05)
송전탑에서 바라본 하늘아래 첫동네의 모습
송전탑에서 바라본 양주시 남면 황방리의 모습
이 아래 계곡 능선에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묘소가 있다.
조소앙(趙素昻)
1887년 4월30일~1958년 9월10일(추정) 경기도 교하군(지금의 파주시 월롱면 출생)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 종교인, 사상가, 정치인이었으며 납북후 북한에서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
일본 유학 중 무오 독립선언서의 기초에 참여하였고, 1919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 여운형 등과 시사 진책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 줄곧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바로 노선을 바꾸어대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 지지하였다. 해방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월25일 6.25전 당시 북한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북한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북한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교(성리학)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이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 창시자였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필명으로 사용하던 소앙이 후에 이름으로 굳어졌다. 자(字)는 경중(敬仲)이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호로 아은, 아은거사, 상담생, 소앙, 소앙생, 소해생 등을 사용했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삼균주의란
임시정부 창설시부터 주역으로 활동 조소앙이 제안한 국체(國體)로 1930년 이래로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주가 되었다.
삼균이란 1. 정치의 민주주의, 2. 경제적 평등, 3. 무상교육의 실시로 요약될 수있는데, 이러한 '삼균주의'가
나오게된 배경엔 1921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국제약소민족회의 참석후 대부분 공산주의로 돌아선 한국의
독립운동방향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여운형, 김두봉, 박헌영등의 공산계의 논리에 맞서 특정 이념에 경사되길 거부하며 민족현실에
맞는 대응논리로써 뿐만아니라, 삼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절대가치에 기본을 두고 개발되었다.
또한 이는 해방후의 임시정부가 건설해야할 국가체제의 중심 사상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우파적
진보사상이라고 볼 수있는 '삼균주의'는 조소앙이 6.25때 피랍된 이후 북의 고위직을
지내면서 공산주의의 아류로 몰리기도 했다. 조소앙은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에 몰입되길
거부하고, 민족통일운동을 위해 전통종교나사상에 제한을 두지 않고 포용하여 대종교, 유학, 불교,
이슬람까지 연구하였다.
늘목리 갈림길(12:17)
이곳에서 이정표와 등로가 뚜렸한 늘목리쪽 방향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늘목리는 연천군 전곡읍 간패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고려말 눌처사가
살았다하여 눌목동으로 불리었다가 늘목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감악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늘아래 첫동네라고 부른다.
늘목리 갈림길 이정표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능선 우측으로는 계속해서 송전탑과 같이 걸어간다.
교통호를 지나니 또다시 송전탑을 만난다.
NO 51 송전탑을 지나니...
밤나무 단지가 나오고...
공동묘지가 나오고 우측으로 황방리가 보인다.
공동묘지에서 가야할 능선을 그려보고...
공동묘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꺽어지며 간패고개로 내려선다.
뒤돌아 본 공동묘지
잠시후 걸어야 할 능선
간패고개를 통과하는 368번 지방도로
드디어 간파고개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로 우측에는 ‘양주시청 20.5km↑’ 표지판이 서있다.
간패고개(干坡峴:12:35)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에서 양주시 남면 황방리를 잇는 고개로
368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간파령 또는 황방리 고개라고도 부른다.
간파리에는 효자문이 있는 마을로 의령남씨(宜寧南氏) 집성촌이다
간파령은 19세기 초반 문헌인 만기요람(1808)에서 처음 등장, 간파현(干坡峴)으로 소개 되었으며
17세기 금석문에 감파(紺坡)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지금의 간파고개 일대의 명칭이라 추정되고 있다
고개 부근 황방리에는 조소앙 선생묘소가 있으며 고개넘어 간파리에는 함석헌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간패고개 도로를 건너서 임도롤 올라서는데 이곳은 지금 군인들이 동계훈련중이라
곳곳에 수송차량과 위장막이 쳐진 포와 군인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임도로 올라서는데 알바하느라 40여분을 허비하는 바람에 배가 상당히 고프다.
잠시 후 우측에 있는 독립지사의 묘지의 상석에서 늦은 점심상을 펼친다.
망자에게는 미안하나 죽은 자의 밥상을 잠시 빌려서 점심상을 펼친다.
늦은 점심식사(12:40)
젠틀맨님이 싸온 도시락에다가 떡라면을 끓여서 밥을말아 먹으니 좋다.
거기다가 오랫만에 소성막걸리 맛을 보려 했으나 설사 때문에
포기를 하는데 젠틀맨님은 혼자서 맛있게도 먹는다. ㅋㅋㅋ
지나온 능선의 모습
능선에 오르니 송전탑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안부에서 포장도로 떨어지니 이곳이 늦은고개란다.
능선 좌측 아래에는 엄청나게 큰 건축폐기물 처리장이 보인다.
포장도로를 건너서 직진으로 계속 지맥길을 이어간다
늦은고개(14:00)
경기도 양주시 남면 봉암리에서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를 잇는 고개로
이정표(↑마차산정상 2.8km /↓동광교6.1km, 아홉골0.7km /→웃안흥리0.7km)기둥에 늦은고개라고
써놓은 게 보이는데 늦은고개의 의미는 낮은 산등으로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고개를 늦은(목이)고개라
하는데 아마 그 뜻이 아닌지 싶다.
백두대간 길 봉화군 물야면에 있는 늦은목이와 비슷한 뜻이 아닐까?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계속 올라가니...
임도사이로 가야 할 마차산이 보이고...
다솜농장 갈림길(14:15)
늦은고개에서 이곳까지 15분을 넓은 임도를 따라서 편하게 왔다.
Y자 도로에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올라서니 이정표가 있고
능선 위에는 사각정자 쉼터가 나오는데 가야할 길이 멀어 그냥 지나친다.
다솜농장 갈림길 이정표(↑마차산정상1.8km/↓동광교<동두천>7.1km/→다솜농장1km)
사각정자를 지나니...
y자의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 능선의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담안삼거리 갈림길(14:27)
이정표(↑마차산정상1.2km/↓동광교<동두천>7.7km/→담안삼거리1.3km)
정말 오랫만에 만난 시그널... 그만큼 지맥꾼들이 안다닌다는 이야긴가?
410m봉(14:32)
능선 정상에는 산꾼을 위한 벤치가 있고 송전탑이 있다.
오늘 지나온 능선의 모습
감악산 아래에 있는 늘목리의 모습
희한하게 생긴 나무뿌리
헬기장(510m:14:40)
헬기장에 오르니 동남쪽으로 동두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두천은 본래 고구려시대에는 내을매(內乙買)또는 일명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리었다.
대동지지에는 백제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사천으로 변경하여
견성군(堅城郡, 현재의 포천)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9년(1081)에 양주에 예속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 세조12년(1466) 1월 관제개정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되어 진이 두어졌다.
그 당시 양주의 속현으로는 견주·풍양·.사천이 있었으며 목의 34개 방리중의 하나인 이담이
동두천시의 근원이 되었다.
조선왕조 건국초기에 지방조직은 중앙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그 뒤 국가의 기초가 서서히 잡혀감에 따라 이른바 8도체제(八道體制)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즉 전국을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함경(영안)·평안 등 8개도로 나누어 각각 관찰사(종2품)를
두고 그 밑에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두어 부윤(종2품), 군수,현령,현감,등의 수령을 파견하였다.
이담면의 지명과 편제도 이때에 이루어 졌으며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지방의 조직 편제도 여러번 바뀌었고
일담(一潭), 가정자, 이담, 이담면, 등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어 온 것이다.
멋진 암릉을 지나니...
老松 한 그루가 말라죽어 있는데 안타깝다. 잠시 후 마차산이 있는 마차산성으로 오른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은 마차산성의 모습
산자락에는 삼국시대의 군사시설인 산성과 봉화대 터도 남아 있다. 그만큼 이 산은 예전부터 군사요충지였다.
마차산은 바로 38선과도 인접해 있다. 6·25 직전에는 북한군의 남침을 눈치 챈 한국군이 구축한 방어선이
북위 38선으로 연결되는 주문진 북방~춘천 북방~가평 북방~포천 북방~소요산~마차산~감악산~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선이었다. 그래서 38선 방어선 한 축이었던 마차산도 격전지였으며 ‘마차산 전투’의 기록도 전해진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늘어진 능선 곳곳에는 6·25 때 한국군과 북한군이 구축한 참호(塹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격전지였음을 말해 준다.
1950년 1월쯤 한국군도 북한의 군사동향이 심상치 않자 그들의 공격을 저지할 주방어선을 설정했는데,
이때 설정된 방어선이 주문진 남방~춘천 북방~마차산~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선이었다. 그러다보니 ‘마차산 전투’의
기록 이 남아 있을 만큼 이곳은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마차산 계곡이 시신으로 덮일 정도였다고 전한다.
호젓한 마차산이 쓰라린 상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마차산(:摩嵯山:588.4m:14:55)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과 연천군 전곡읍 경계에 있으며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양주편 등에 ‘마차(摩嵯)’라고 표기돼 있고,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마차산(馬車山)으로 되어 있지만, 주민들이 세운 안내판에는 마차산(磨叉山)으로 되어 있다.
마차산(馬車山, 摩嵯山), 봉화산(烽火山), 摩嵯山이 맞는 이름이라 한다.
옛날 다산(多産)과 풍요를 베풀며 하룻밤 사이 산에 석성(石城)을 쌓았다는 삼신할머니(麻姑 · 마고)가
수리바위에 앉아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매무새를 고쳤다는 전설에 근거해 갈 마(磨)와 비녀 차(叉)를
붙여 마차산이라 이름 지어졌다는 말이 전해진다.
일제 강점 이후 행정구역 폐합 및 국토 전역의 세부 측량 당시 ‘馬車'로 오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산의 외형은 정상부로 올라가면서 암석으로 이루어진 뾰족한 삼각형을 취하고 있어,
높고 험준한 모양의 뜻을 가진 ‘摩嵯' 가 옳은 표기라 할 수 있다.
이 산의 정상에는 동쪽의 포천 방향과 서쪽의 늘목리 봉수지와 연결된 삼국시대의 봉수지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마차산 정상석 뒷면에 써놓은 마차산의 유래
정상에는 지역 산악단체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다.
정상석 뒷면에 새겨진 표비기(標碑記)에는 ‘마차산은 삼신 할머니(麻姑·마고)께서 주재(主宰)하시는
갈뫼(磨岳·마악)로 삼신 할머니가 수리 바위에 앉아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매무새를 고치셨다는
전설에서 그 이름에 갈마(磨) 비녀차(釵)를 붙여 마차산이라 명명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어디서 나온 유래인지 설명이 없다.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마차산 정상에 군 삼각점과 3등 삼각점(△ 포천 301 1997 재설)
마차산 정상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음료수와 초코파이 하나로 허기를 면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젠틀맨님은 혼자서 막걸리를 마시며 여유작작하다
뒤돌아 본 마차산 정상의 모습
마차산 개념도
이곳부터 문산(감악)지맥 능선 우측으로는 동두천과 소요산역으로 통한다.
마차산 삼거리 이정표(15:00)
(↑초성교7.5km,/↓마차산정상0.1km/→버섯재배장1.2km/↗신흥교회2.9km)
능선 좌측 아래 간파리쪽은 엄청나게 큰 채석장이 보인다.
댕댕이 고개(15:10)
옛날 이 자리에 댕댕이덩굴이 숲을 이뤘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한다.
지금은 댕댕이덩굴은 볼 수 없고, 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댕댕이고개를 지나면서 드문드문 군부대가 설치한 참호들이 나타나는데
지금 동계 훈련중인지 위장막을 쳐놓고 매복을 군인들이 보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 많이 남은 탓인지 마음이 급하다.
감악산 아래에서 40분간 헤맨것이 두고두고 아쉽다.다행히 길은 좋고
고도차가 없어서 산행 속도가 낼 수 있다는게 다행이다.
밤골재(15:15)
431m봉(15:20)
문산(감악)지맥에서 이 봉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한강봉에서 시작한 감악지맥이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서 구정산을 지나 한탄교로 떨어지는 곳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갈라져 도감포로 떨어지는 구간이 있다. 차후에 함 걸어볼 예정이고
오늘은 대부분의 산꾼들이 걷는 한탄교로 걸어간다.
봉우리 정상에는 군인들이 동계 훈련 중이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벙커봉(15:25)
벙커위에 군 삼각점이 있다.
소망기도원 갈림길(15:35)
안부에 벤치 2개가 있고
소망기도원 갈림길 이정표
이정표(↑초성교5.3km,/↓마차산정상2.6km/→소망기도원 1km)가 서 있는데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양원리 고개(15:45)
벙커가 있는 봉우리를 올라 좌측으로 내려간다.
봉암광산 갈림길(15:50)
임도 갈림길(16:00)
이정표(←웃양원리/↓마차산정상4.5km/→초성교3.4km)
이곳에서 구정산 직전 임도 합류점까지 임도로 걸어간다.
이정표(←초성교2.8km/↓마차산정상5.0km)가 서 있는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오르니
태양광 시설, 그리고 이동화장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헬기장(16:35)
헬기장에서 만난 태양광 시설물
헬기장을 지나니 벤치와 이동식 화장실을 만나고...
임도합류지점(16:45)
임도합류지점 표지판
410m봉(16:52)
임도 합류지점에서 빠르게 7분정도를 걸어오니 숲이 자욱한 봉우리 위에 삼각점(△포천302)과
국립지리원에서 세운 표지판이 있으며 깃대봉이 있는데 갑자기 봉우리 아래에 훈련중인
군인들이 산행을 제지한다... 그래서 선임하사를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산행을 허락한다.
지도상 능선으로 봐서는 이곳이 구정산인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고 군 시설물만 있다.
구정산(鳩頂山)은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풍수가 명당을 찾으러 각처를 다니는 중에
이곳에 와서보니 이 산의 형상이 정승이 아홉이 나올 명당자리가 되어
산에 올라 그 혈(穴)을 찾았으나 멀리서 보기와는 전혀 다른 명당터가
되지 않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양주의 옛지리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이 산이 영근산(嶺斤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구정산 산신 제단(17:02)
거송산악회에서 구정산 제비를 세웠 놓았는데 한문에 구(九)자와 정(政)가 틀린것 같다
아홉 구(九)가 아닌 비둘기 구(鳩)와 정사 정(政)이 아닌 정수리 정(頂)이 맞은것 같은데...
5분정도를 빠르게 걸어오는데 또다른 산악회에서 등로에 祭碑를 세워놨다.
김치마을 이정표(17:20)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카메라가 어둠땜에 포커스 잡기가 힘이든다.
어둠이 깔리면서 한탄대교 주변은 조명으로 뒤덮인다.
사진이 잘 안나와서 한탄교 입수점은 예전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한다.
내려오는 교통호 주변에도 훈련중 매복한 군인들이 많이 있는데 젠틀맨님과
둘이서 한탄교를 향해서 카메라 후레쉬가 터트리니까...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는다.
한탄강(漢灘江)
강원도 평강군 남면에서 발원하여 연천군 전곡읍을 곡류하여 군남면과 왕징면의 경계부에서 임진강에 합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탄(大灘)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주 북쪽 74리 지점인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로 되어 있다.
또한, 대탄진(大灘津)이라는 나루터가 있으며 양주와 연천을 통과할 수 있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루터에는 상선의 출입이 용이하리만큼 수심이나 강우량이 충분하였다 한다.
『해동지도』 「적성현」 편에서 대탄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고, 『여지도』와 『광여도』 등에는 양주에 대탄(大灘)이 표기되어 있다.
연천의 지도에 표기된 것은 『팔도군현지도』에서부터이다.
형상이 은하수같이 넓고 큰 여울[灘]이라 하여 한탄(漢灘)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전곡리 일대에는 한탄강 국민유원지가 있으며, 경원선 철도의 '한탄강역'과 '한여울 철교'가 있다.
한탄대교 사거리
어두워서 예전의 사진을 가져왔다.
한탄교(17:40)
짧은 거리의 지맥길이지만 북한땅과 가까워 지맥길에 군부대가 너무 많아서
지맥길이 상당부분 왜곡되어 있는 점이 아쉬웠고 힘이 들었지만 또다시
무사히 마쳤다는 점에서 참으로 고맙다... 동행한 동료산꾼 젠틀맨님께도 감사드린다.
또 한구간을 마쳤다는 뿌듯함에 희열을 느끼며 너무 늦은 시간이라 강물에 발을 담그지
못해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마지막 1시간을 시간이 촉박하여 뛰다시피 하여 산행을 한 탓이라
목이 무척이나 마른지 가져온 막걸리를 통채로 마시며 차축을 하는
동료산꾼 젠틀맨님... 닉만큼이나 젠틀하다.
한탄교 입구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인증샷을 남기고 버스를 타기위해
사거리를 향하는데 갑자기 길건너에서 총을 든 젊은 군인 3명이 행동을 멈추란다.
왜그러냐고 하니까 조금전 하산길에 사진을 찍은 이유가 뭐냐고 하면서
카메라를 보자고 한다. 작전중 위장을 하고 있는데 노출되면 안된다고 하면서...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돌려 보여주니 자기들 사진이 없는걸 확인하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가시라고 한다... 10년 감수했네그려
어둠속에 만난 3.8선 경계 표시석
해방 이전에는 이곳이 이북땅이란 얘기이다.
한탄대교 사거리 선사유적지 조형물 - 예전 사진 인용
이곳은 구석기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한탄강변의 용암대지 위에 형성된 고인류의 점거지다.
1978년 주한미군 병사 그렉 보웬이 발견하고
그 다음해인 1979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 되어 세계 학계에 알려진 구석기 유적이다.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그렉 보웬이 한탄강유원지를 여행차 들렀다가
우연히 유원지 주변에서 석기로 보이는 유물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눈에 이 뮤물들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발견한 석기의 사진과 발견 경위를 소상히 적어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전문가인 보르드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게 된다.
보르드 교수는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임중이던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도록 권유했다.
그렉 보웬이 가져온 석기를 살펴본 김원용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곧바로 전곡리 일대에 대한 조사계획이 수립되었고 1978년 5월 14일 서울대 김원용 교수,
윤대인 조교, 권학수 조교를 중심으로 조사단이 구성되어 전곡리 일대에 대한 최초의 자료조사가 실시 되었다.
지표 조사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곡리선사육적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글&사진 - 펌)
학담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소요산역에 도착하여 역앞에 있는 식당에서
버섯전골에다가 소주 2병을 젠틀맨님과 나눠 마시고 한 구간 마침을 자축한다.
이번 산행에 장염으로 고생을 하여 우려를 많이 했는데 무사히 마침을 감사하며
어젯밤 여관비와 뒷풀이를 쏘신 젠틀맨님 고마워요... 복받을겨
술이 취해서 그런지 카메라 앵글이 자꾸만 흔들린다.
소요산역에서 출발하여 도봉산역에서 7호선을 갈아탄 다음 난 강남구청역에서
내리고 젠틀맨님은 부평구청역으로 가면서 아쉬운 작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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