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3년 3월 2일
☞ 산행날씨: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2km +어프로치 5.4km / 5시간 10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동두천역-안흥교-평강요양원-그리심기도원-담안마을 갈림길-전망대-감악지맥 능선-마차산성
마차산-삼거리-NO42송전탑-댕댕이고개-밤골재431m봉-380m봉-300m봉-380m봉-서편말고개
무쇠봉-205m봉-임도-폐헬기장-임도-장구봉-군훈련장-암릉구간-아마니고개-164m봉-깃대봉
임도-226m봉-도감포
☞ 소 재 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동두천시 상봉암동, 하봉암동/연천군 전곡읍
이틀간의 산행 계획을 세우고 영산기맥을 2구간을 하려고 전라도 내려 갔다가 패잔병 신세가 돠어
귀경을 하니 마땅히 갈 데도 없고하여 늘 마음에 품고있던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문산(감악)지맥을 나선다.
지난해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한강봉에서 한탄강까지 구간을 끝내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마차산 지나 431m봉에서 도감포 구간을 걸어 보기로 하고 베낭을 간단히 하여 집을 나선다
문산(감악)지맥 도감포 구간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정맥,기맥, 지맥길을 걷다보면 늘 의문점이 나는 구간이 보이게 마련이다
흔히들 정맥이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봉우리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고
기맥은 강의 발원지에서 시작하여 강을따라 강이 끝나는 지점에서 끝나는 걸 말하고
지맥이란 정맥이나 기맥에서 갈라져 나와 강이나 하천의 합수점에서 끝나는 걸
말하지만 산경표를 만들면서 이와같은 원칙을 벗어나 만든 것이 보여서
전문 산꾼들이 논란을 가져오는 맥길이 종종있다.
그 대표적인 적인 곳이 금남정맥과 낙남정맥이다
금남정맥은 왕사봉에서 출발하여 남당산-천호산-미륵산-용화산-망해산을 거쳐
금강 하구언인 군산 앞바다에 입수해야 맞을듯 한데 지금의 금남정맥은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 부여 백마강으로 입수하여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혹자 어떤 분들이 현재 금남정맥을 부정하고 금남기맥을 금강정맥으로 부르는 이도 있다.
낙남정맥 또한 어떠한가? 창원 용지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불모산을 지나
낙동간 하구언인 남해바다로 입수해야 하는데 현재의 낙남정맥은 김해 신어산을
지나 상동면 매리마을 앞 고암나루터에서 낙동강으로 입수하지 않은가...
오늘 내가 걷는 문산(감악)지맥 역시 431m봉에서 도감포 구간도 거의 비슷한 처지인듯싶다.
이유야 어찌됐던 그건 산경표를 만들정도의 전문산꾼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난 그저 산길이 걷고 싶을 뿐이라 즐건 마음으로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행정지도
도봉산역 플렛홈(08:30)
집에서 출발하여 근처 편의점에 들러 빵 한봉지, 바나나 1줄과 캔맥주 하나를 사서
베낭에 넣고 7호선 강남구청역에서 도봉산역 가는 열차를 타고 도봉산역에 도착하니
08시 30분이다... 잠시후에 전철을 타고 동두천역에 도착을 한다
동두천역(09:20)
동두천역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으려니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결국 역 구내에서 있는 김밥집에서
김밥 한줄에 계란한개, 오뎅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고 후문격인 2번 출구로 나선다
동두천 산업단지
2번 출구를 나오니 동두천 산업단지인 공장들이 보이고 잠시후 안흥교가 나오면서
동두천을 우회하여 연천, 전곡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외곽도로가 나온다
외곽 도로를 지나서 아치형의 안흥교를 건넌다.
다리위에 걸려있는 안흥교 詩
안흥교 위에서 바라본 신천의 모습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서 발원하여 동두천시와 연천군 청산면을 거쳐 한탄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신천(莘川)라는 이름은 청담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앞을 흐르는 내를 신내·
신천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하고, 양주시 남면 신산리에서 시작한다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초촌천(哨村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강화천(江華川)이라고도 한다.
신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지류이며, 의정부시의 중랑천과 대비되는 양주시의 제1하천이다.
결국 양주시는 북쪽의 임진강 유역권과 남쪽의 한강 유역권이 한북정맥으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천은 양주시 회천동, 남면, 광적면, 백석읍으로부터 흘러드는 지류를 모아 동두천시를 거친 다음 북상하여 한탄강에 합류한다.
양주시 백석읍 양주 대모산성에서 근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중랑천에 이어 한강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신천에
이어 임진강으로 유입된다. 장흥면과 양주동 일대를 제외한 양주시 거의 전역이 신천 수계에 속한다. 특히 백석읍에서
광적면으로 이어지는 신천 상류 분지에 형성된 충적지는 최근 공장이 많이 들어섰지만 오랜 기간 양주시의 농업 기반을
이루고 있는데 신천의 하천 연장은 33.34㎞이고, 유로 연장은 39.51㎞이며, 유역 면적은 344.1㎢이다
안흥교를 지나니 마차산 등산로의 표지판이 있다
평강요양원(09:50)
안흥마을을 가로질러 가다가 우측으로 들어서 계속 오르니 평강요양원이 나온다
평강요양원을 지나니 축사들이 보이고 전원주택들도 보인다.
잠시후 그리심기도원 가는길에서 좌측 비포장도로로 올라서니
안흥성당 신축현장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 개울을 건너 능선으로
오르니 뚜렸한 등로가 보인다
담안마을 갈림길(10:10)
동두천역에서 내가 조금전에 걸어온 길의 궤적
마차산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담안마을
동두천 안흥동 내안흥(內安興)에는 2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하나는 담안(潭安)으로 송우암(宋尤庵)의 문하생이 담(李 談)이
이곳 흥경암(興敬庵)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후손 이 유(李 兪)가 여기
주위에 넓게 돌담을 쌓고 살았다하여 '담안(談安)' 이라고 불리웠고,
영진(永進)은 약 260년 전에 안흥사(安興寺)가 있어 '내안흥(內安興)'이라
하다가 조선 말기에 사찰이 폐사된 후로 '영진부락'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망대(10:30)
전망대 주위에는 멋진 소나무와 암릉이 있지만 전망대라 표지판을 붙혀놨는데 전망은 아니올씨다
문산(감악)지맥 능선(10:40)
드디어 감악지맥 능선으로 들어섰다. 지난해의 아련한 추억이 밀려온다.
멋진 암릉을 우회하여 마차산으로 향한다
죽어서도 고고한 자태를 잃지않는 멋진 소나무를 4개월만에 다시 만나고...
마차산성 터(10:43)
마차산 정상 부근에는 지금도 마차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로부터 군사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정상 능선에는 드문드문 군부대가 설치한 참호가 눈에 띈다.
1950년 1월쯤 한국군도 북한의 군사동향이 심상치 않자 그들의 공격을 저지할 주방어선을 설정했는데,
이때 설정된 방어선이 주문진 남방~춘천 북방~마차산~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선이었다.
그러다보니 ‘마차산 전투’의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이곳은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마차산 계곡이 시신으로 덮일 정도였다고 전한다. 호젓한 마차산이 쓰라린 상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마차산(:摩嵯山:588.4m:10:45)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과 연천군 전곡읍 경계에 있으며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양주편 등에 ‘마차(摩嵯)’라고 표기돼 있고,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마차산(馬車山)으로 되어 있지만, 주민들이 세운 안내판에는 마차산(磨叉山)으로 되어 있다.
마차산(馬車山, 摩嵯山), 봉화산(烽火山), 摩嵯山이 맞는 이름이라 한다.
옛날 다산(多産)과 풍요를 베풀며 하룻밤 사이 산에 석성(石城)을 쌓았다는 삼신할머니(麻姑 · 마고)가
수리바위에 앉아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매무새를 고쳤다는 전설에 근거해 갈 마(磨)와 비녀 차(叉)를
붙여 마차산이라 이름 지어졌다는 말이 전해진다.
일제 강점 이후 행정구역 폐합 및 국토 전역의 세부 측량 당시 ‘馬車'로 오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산의 외형은 정상부로 올라가면서 암석으로 이루어진 뾰족한 삼각형을 취하고 있어,
높고 험준한 모양의 뜻을 가진 ‘摩嵯' 가 옳은 표기라 할 수 있다.
이 산의 정상에는 동쪽의 포천 방향과 서쪽의 늘목리 봉수지와 연결된 삼국시대의 봉수지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마차산 정상석 뒷면에 써놓은 마차산의 유래
정상에는 지역 산악단체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다.
정상석 뒷면에 새겨진 표비기(標碑記)에는 ‘마차산은 삼신 할머니(麻姑·마고)께서 주재(主宰)하시는
갈뫼(磨岳·마악)로 삼신 할머니가 수리 바위에 앉아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매무새를 고치셨다는
전설에서 그 이름에 갈마(磨) 비녀차(釵)를 붙여 마차산이라 명명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어디서 나온 유래인지 설명이 없다.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마차산 정상에서
마차산 정상 삼각점(△ 포천 301 1997 재설)
마차산 정상의 모습
마차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두천
동두천은 본래 고구려시대에는 내을 매(內乙買) 또는 (內爾米)리고 불리었다.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백제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사천으로 변경하여 견성군(堅城郡, 현재 포천군)의 영현(領懸)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1081)에 양주에 예속 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 세조 12년(1466)
1월 관제개정(官制改正)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되어 진이 두어졌다. 그
당시 양주의 속현으로는 견주·풍양·사천이 있었으며 목의 34개 방리중의 하나인 이담이 동두천시의 근원이 되었다.
조선왕조 건국 초기에 지방 조직은 중앙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제도를 대개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그 뒤 국가의 기초가 서서히 잡혀 감에 따라 이른 바 8도체제(八道體制)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즉 전국을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함경(영안)·평안 등 8도로 나누어 각각
관찰사(觀察使, 종2품)를 두고 그 밑에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을 두어 부윤(종2품), 군수(종4품),현령(종5품),현감(종6품) 등의 수령을 파견하였다.
이같은 행정 조직의 구분은 취락(聚落)의 대소, 인구의 다과, 전결의 다소, 지역적인 특수성등를 기초로 하여 정해진 것이다.
이들 각 주(州)·군(郡)·현(縣)에는 자치적인 면·방·사를 두었고 그 밑에는 리·촌·동이 있었다.
마차산 삼거리(10:48)
마차산에서 댕댕이 고개가는 삼거리 아래에는 음지라
그런지 땅이 얼어있고 음지에는 아직도 눈이 간간히 보인다
NO42 송전탑(11:00)
송전탑 아래 간패리 지역에는 엄청나게 큰 채석장이 보인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함이 마차산을 집어 삼키지나 않을런지 걱정이다.
능선에서 바라본 감악산과 전곡읍 간파리의 모습
간파리에는 효자문이 있는 마을로 의령남씨(宜寧南氏) 집성촌이다
간파고개라 부르는 간파령은 19세기 초반 문헌인 만기요람(1808)에서 처음 등장,
간파현(干坡峴)으로 소개 되었으며 17세기 금석문에 감파(紺坡)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부근 황방리에는 조소앙 선생 묘소가 있으며 고개넘어 간파리에는 함석헌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댕댕이 고개(11:01)
옛날 이 자리에 댕댕이덩굴이 숲을 이뤘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한다.
지금은 댕댕이덩굴은 볼 수 없고, 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댕댕이덩굴
새모래덩굴과의 여러해살이 덩굴 풀. 줄기는 목질에 가깝고 잔털이 있으며 물체에 감기어 뻗는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이다. 초여름에 황백색의 잔 꽃이 잎겨드랑이에 취산(聚?) 화서로 피고,
열매는 핵과(核果)로 10월에 푸른 흑색으로 익는다. 뿌리는 약용하고 줄기는 바구니 제조용으로 쓴다.
산기슭 양지나 들에 나는데, 한국의 황해도이남, 일본, 대만, 중국, 필리핀 등지에 분포한다.
국립국어원의 자료인용
밤골재(11:05)
431m봉(11:10)
문산(감악)지맥에서 이 봉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한강봉에서 시작한 감악지맥이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서 구정산을 지나 한탄교로 떨어지는 곳이 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갈라져 도감포로 떨어지는 구간이 있다.
2013년 11월 7일에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둘이서 우측으로 가서 한탄교까지
걸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도감포까지 가보기 위해 왔다.
431m봉 정상 이정표
이곳 이정표에 지난해 11월에는 없었는데 이곳 431m봉을 꾀꼬리봉이라 붙혀놨다.
431m봉 정상에는 이정표(→초성교 6.0km ↓마차산1.6km ←간파리)가 있고 봉우리
아래에는 군 벙커가 있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며 도감포를 향한 첫발을 내딛는다
송전탑(11:15)
송전탑 아래를 통과하여 낙엽이 수북한 기맥길을 이어간다
종종 만나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왜이리 반가운지...
흔히 문산(감악)지맥하면 거의 다 구정산을 통과하여 한탄대교를
통과하기에 이 구간에 대한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431m봉에서 출발하여 10분정도를 걸으니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은 넘어진 나무가 등로를 막아서 우회하여 길을 걷는다.
안부 능선 오르다 만난 시그널
진주댁이 있는 산악회 시그널이라 반갑다.
신정때 지리산을 따라가 본 산악회이다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11:25)
능선에 있는 삼각점을 끼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도감포로 향한다
조금 지나니 우측으로 시야가 확보되면서 지난해 10월에 걸었던 감악지맥 한탄강
방향의 능선이 보이고 그 너머로 2년전에 걸었던 신천(왕방)지맥길도 보인다
반갑습니다... 한번도 뵙지 못했지만 기맥, 지맥길에서 자주 봅니다
어제도 영산기맥 능선에서 만났고요
등로에 서있는 멋진 암릉을 지나니 새로 설치하는 송전탑이 있는 봉우리로 오른다
철탑 능선으로 오르니 신천(왕방)지맥 너머로 올해안에 걸어볼 영평(명성)지맥도 시야에 들어온다.
좌측으로 감악산과 간파리를 다시한번 보고...
새로 설치되는 송전탑
문산(감악)지맥 한탄교로 이어지는 능선의 모습
송전탑을 가로질러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조금전에 지나온 마차산의 모습
조금을 더 지나니 벙커봉이 나오면서 급경사 절개지가 나온다.
벙커봉 아래로 내려서니 군 교통호가 나오고...
또다른 벙커를 만나고...
급경사를 미끄러지듯이 내려오니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등로를 만나고...
멋진 등나무들을 보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문패없는 묘지를 지나고...
무명묘지를 지나 조금을 더 진행하니 좌측에는 넓은 임도가 보이고...
다시 넓은 공터가 나오고 이곳에서 1시 방향으로 내려서니...
양원리 임도(11:50)
양원리(兩遠里)는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마을로 본래는 양주군 영근면 지역으로,
옛 양주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멀원리’라 불리워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존의 윗멀원리(上遠里)와 아랫멀원리(下遠里)를 병합하여
상원과 하원의 ‘원’자를 따서 양원리라 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남쪽이 되어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행정 조치법” 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 규칙개정”에 따라 연천군 전곡읍에
편입되었으며 1개의 행정리와 6개 반,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편말이 있는 윗양원리(上遠里)에는 약 300년 전에 경주정씨(慶州鄭氏),
공주이씨(公州李氏)가, 그 후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개성왕씨(開城王氏)
등이 차례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서편말은 윗양원리 중간말 서편에 있는 마을이 불리는 이름이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가 나있으며 우측으로는 폐교된 옛 전곡초등학교 양원분교장터에
홍 문택 신부님이 세웠다는 카톨릭 서울대교구 대안학교인 ‘花요일 아침예술고등학교’와
자연학습 체험장인 ‘산에 산에 산에는’이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절개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른다
수철성 봉수대가 있다고 이정표가 표시되어 있건만 어딘가를 확인이 안되었다.
이곳을 지나면서 만난 이정표가 이것으로 끝이었으니까.
오늘 산행중 처음으로 빡세게 급경사의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잠시후에 손가락 굵기보다 가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암릉을 지난다
멋진 소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는데 낙엽이 수북하여 먼지가 많이난다.
잠시후에 타이어로 만든 벙커를 만나면서 능선 안부로 오른다
마차산과 조금전 지나온 능선들이 보이고 능선 아래에는 花요일 예술고등학교와
산에 산에 산에는 학습체험장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타이어 벙커를 지나니 V자 형태의 안부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V자 안부에는 고로쇠 나무가 보이고 누군가 나무에 구멍을 뚫어 팻트병에 고로쇠 물을 받고있다.
그런데 얼마전에 수거를 했는지 물은 종이컵에 한 컵 될까말까하여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팻트병에 있는 물을 마신다...훔쳐먹는 사과가 맛있다고 했던가... 물맛이 좋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넓은 공터가 보인다
폐헬기장인듯한 넓은 공터... 이곳이 무쇠봉이란다.
공터에는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안내판과 삼각점(△404)가 있다
무쇠봉 정상 삼각점
무쇠봉(水鐵峰:398m:12:10)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와 간파리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폐헬기장의 흔적인듯한
넓은 공터와 삼각점이 있고 한 현우님이 걸어둔‘무쇠峰’이란 코팅지로 만든 표지판이 있는데
예전에 이곳이 수철성이라 한다그러고 보니 이곳이 수철성이 있었던 자리인 모양이다
이곳에 있던 수철성은 건너편 감악산에 있는 아미성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고 하는데 이곳은 성의 흔적이 별로 보이질 않는다.
37번도로 적암3거리에서 감악산과 마차산 사이를 흐르는 간파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375번 도로다.
이 길을 따라 올라 간패고개(연천군 전곡읍과 양주시 남면의 경계)를 넘은 후 양주군에 진입하여
의정부 - 서울로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 역시 중요한 남하통로로 삼국시대에 간파천의 한 쪽인 늘목리의
감악산 자락에 아미산성을, 그리고 계곡 건너편인 간파리의 마차산에는 수철성을 쌓아 이 길목을 지켰던
군사적 요충지라고 한다.
무쇠봉에서 직진으로 내려서니 이곳은 고로쇠나무 군락지인지 곳곳에 고로쇠 나무에
구멍을 뚫어 팻트병으로 고로쇠물을 받고 있는데 남자 2명이 베낭을 갖다놓고
고로쇠물을 채취하고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불안하다.
조금전에 훔쳐먹은 물 때문에... 시치미를 뚝떼고 지금 뭐하냐고 물으니 고로쇠물을
채치하는 중이란다... 아! 이게 고로쇠이군요 하고 물으니 자기들도 친구가 설치한
것인데 가져 가라고해서 왔다고 하면서 물을 먹어 보란다.
공짜라면 양재물도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져간 수통에 반병 정도를 받아 먹으니
더 먹으라면서 아예 2L짜리 팻트병 하나를 준다... 이런 횡재를...
무쇠봉 아래에 있는 고로쇠물 채취 현장
고로쇠 군락지를 지나 직진을 하니 벙커봉이 나오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벙커봉 위에 있는 구조물
등로에서 바라본 양원리의 전경
벙커봉에서 내려서니 출입금지 표시판이 나오고 이곳에서 직진한다
관리가 안된 무덤을 지나니...
우측으로 잣나무 군락지가 나오고...
잠시후에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등로가 뚜렷한 좌측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간다
등로에서 바라본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와 독점말의 모습
마을 뒷산에 붉은바위(赤岩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고려때 적암향이 있었기에 적암향이라고도 한다.붉바위 적암향이라고도 한다
독점말은 좁은모탱이 북쪽에 있던 마을로 예전에 독을 굽던 마을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넓은 임도를 만난다
넓은 임도를 따라 3분정도 진행하니 송전탑이 나오고...
폐헬기장인듯한 넓은 공터가 보이고...
우측으로 옥녀봉인듯한 봉우리가 보인다... 지도상으론 옥녀봉 같은데 확신이 서질 않는다
임도(12:35)
임도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르니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고...
오름길에는 약 2억년전에 형성되었다는 퇴적암층들이 많이 보이는데 잘게 부쉬져 있다.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만나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장구봉이 나온다
장구봉(200m:12:45)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와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독점말 능선위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가 2개 잘록하게 있는데 형세가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봉우리 동쪽으로는 양원리가 조망되고 능선 북쪽으로 군부대 훈련장이 보인다
장구봉에 오르니 특별한 것은 없고 암릉이 있으면 우측에는 송전탑 공사중이다.
정상에서 다시 좌측으로 돌아와 직진으로 내려선다
낙엽이 수북한 넓은 등로가 나오는데 중간쯤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급경사로 내려오니 길은없고 낙엽만 수북한데 낙엽 아래에는 음지라 그런지 바닥은 얼어있다.
졸지에 미끄러져 한바퀴 굴러고 난 다음에 일어서는데 오늘은 계약금도 안가지고 땅을샀다 ㅋㅋㅋ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군부대 훈련장이 나오고...
훈련장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올라선다
훈련장(12:55)
훈련장을 통과하면서 뒤돌아본 장구봉의 모습
낙엽사이로 도마뱀 몇마리가 보인다... 봄이 오는가보다
진주댁이 다니는 산악회의 시그널이 바뀐 모양이네
훈련장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빡세게 10여분을 치고 올라 우측으로 꺽어지니 멋진 암릉들이 즐비하다
좌측으로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암릉을 보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마지막 암릉을 지나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능선으로 내려오니 돌로 만든 벙커가 보이고 곧이어 군교통호를 만난다
군 교통호를 따라 내려오니 멋진 소나무를 만나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37번 국도가 보이면서 차량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아마니 고개를 도착한다
아마니 고개(13:10)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와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37번 국도가 지나간다
이 고개에는 과부전설이 전해 온다. 예전에 양원리에 어떤 과부가 어린 아들을 하나 데리고 살고 있었다.
과부는 살기도 어렵고 남자 생각도 나서, 이 고개를 넘고 고릉리 쪽에 있는
서방고개를 넘어 밤나들이를 다니면서 몰래 남자를 사귀었다.
이 사실을 안 어린 아들이 어머니를 말리기 위하여 기와마을 뒤의 고개에 올라가 어머니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그 고개를 ‘부른고개’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말소리가 바뀌어 ‘부릉고개’가 되었다.
또한 그 어머니가 넘어 다니던 고개는 ‘어머니고개’라고 불렀는데, 역시 오늘에 이르러는
말소리가 바뀌어 ‘아마니고개’라고 불려진다는 것이다.
도로를 건너서 능선으로 올라선다
동두천역에서 김밥과 오뎅 하나먹고 여기까지 쉬지않고 왔더니만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아마니 고개 능선위 양지바른 곳에서 아침에 편의점에서 산 빵과 바나나 하나, 캔맥주에다
커피 한잔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다... 어제 영산기맥을 타면서 하루종일 비맞고
개고생한 것 생각하면 정말 호강하면서 점심을 즐긴다... 15분의 여유를 부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능선에서 바라본 아마니 고개의 모습
능선으로 올라서니 양호한 등로가 나타나고...
망가진 벙커를 끼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163.9m봉(13:35)
163.9m봉 정상에는 잡풀만 무성하고 삼각점 표시판과 삼각점이 있다
163.9m봉 삼각점(△포천 403 / 1998복구)
163.9m봉을 조금 지나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내리막 길은 낙엽이 수북해서 양탄자처럼 푹신하지만 사람들의 발자국은 없다
平山白公의 묘지를 지나 야트막한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멋진 소나무가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녹슨 철조망이 길을 가로 막는 바람에 우회한다
원형 철조망을 피해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나물과 약초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다올님의 시그널을 만나는데
상당히 반갑다... 내년부터는 나도 좀 델고 댕기소
조금을 더 내려가니 봉분에 잔디가 하나도 없고 황토만 드러나 있는
묘지가 나오고 그 아래에 시멘트 포장으로 된 꽤나 넓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 삼거리(13:50)
임도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포장도로 좌측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군부대 감시초소가
보이고 임도 옆에는 잘 관리된 묘지들이 보인다
임도 삼거리에서 3분정도를 올라오다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군 교통호를 따라 봉우리 정상으로 오른다
군 레이더봉이 있는 봉우리를 만나는데 엄청나게 큰 구덩이가 방공호를 연상케 한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서 걸어간다
다시 넓은 공터가 나오고 공터를 지나 군 교통호를 따라 능선으로 오른다
226m봉(14:10)
431m봉에서 이곳 문산(감악)지맥 마지막 구간이 226m봉까지 약 12km의 거리를 걸어
저 아래 한탄강과 임진강의 합수점인 도감포를 바라보니 감회가 깊다.
문산(감악)지맥의 마지막 구간을 오늘에야 마무리 하니
늘 찜찜한 마음이 오늘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곳에 조금 서 있으니 싸늘한 바람으로 꽤나 춥다
그러나 어제 영산기맥에서 개고생한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 잡목에다 급경사 길이없다... 이틀동안 이래저래 수난이다
문산(감악)지맥 마지막 봉우리에서 바라본 도감포(都監浦)의 모습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합수점인 도감포는 예전에는 포구였다고 한다
한강에서 출발한 새우젓배가 임진강을 지나 이곳 에 도착하여 육지에서 생산하는
농산물과 물물교환하는 나룻터였는데 항아리 형태의 지형안에 있는 포구란 뜻이로
‘독안포’로 불리다가 한자로 옮겨쓰는 과정에서 변음되어 독안포에서 도감포로 바뀌었단다
226m봉에서 바라본 한탄강(漢灘江)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에 있는 한탄강의 수계는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산정리에서
발원하여 북한의 땅을 적시고 지뢰투성이인 비무장지대를 유유히 통과하며
들짐승들의 목을 축이고 남한땅 강원도 철원군으로 흘러와서는 한반도에서 호남평야와
더불어 지평선이 보이는 두군데중 하나인 철원 평야의 젓줄이된 다음에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남계리의 임진강으로 유입하는 총길이 136km의 큰강이다.
맑은물과 깍아지른 절벽, 그리고 울창한 수목이 어울려 뛰어난
풍취를 이루고 있는 이 한탄강의 유래는 다양하다.
옛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경덕왕 16년(757년)에 당나라제도를
도입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대부분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기 전에 구전된 이강의
이름은 섬내, 한여울, 큰개울 등으로 불러오다가 체천,또는 대탄으로 한자로 기록되었다.
또한 맑고 큰냇물이 흘러 대탄(大灘)이라 한것등은 실체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한탄강이라는 이름에는 역사적 배경등 여러 유래담이 전해오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탄강이란 본래 "한여울" 즉 "큰여울"의 뜻으로 은하수와같이 깨끗하고
넓고 길다고하여 은하수한(漢)자와 계곡(溪谷)과 절벽(絶壁)을 휘돌아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에서 여울탄(灘)자를 붙여 한탄강이라 명명하였다.
이강은 강화도에서 생성과 젓갈등을 실은 짐배가 임진강,한탄강을 거슬러 올라와
전곡에서 차탄천의 유역을 이용 용담에 이르러 상인들은
이고장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도자기 등과 물물교환을 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므로서 큰시장을 형성했던 강이기도 하다.
이 강을 또한 한탄강(恨嘆江)이라고도 하는데 후삼국시대에 철원에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부하인 왕건에게 쫓기어 명성산으로 갈때 이 강을 건너가며 한탄(恨嘆)하였으므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탄강(漢灘江)보다 한탄강(恨嘆江)으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비극이 이강에 깊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은 조국이 날카롭게 대립된 자유,공산 양 진영의 대치장소로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자
자유를 갈구하는 많은 월남인들이 이 강을 건너다가 한맺힌 최후를 마쳤고 6.25사변때는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간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이 산하를 피로 붉게 물들기도 한 한(恨)맺힌 강이기도 하다
6.25이전에는 38도선 이북이라 김일성의 지배하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한국전쟁시
철원평야를 둘러싼 "철의삼각지대"에서는 세계 전사에 유래없는 전투로 시산혈하를 이루었다.
지금 남북으로 갈린 1천만 이산가족의 한이 이강에 맺혀 민족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한탄강으로 더더욱 그유래가 남아있을것만 같다.
226m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길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내가 길을 만들어서 내려가다시피 하는데 잡목이 장난이 아니다
군 교통호를 따라서 내려오니 한반도 통일미래센터 공사장이 나온다
226m봉에서 내려온 길의 궤적
이곳은 지금 이 한반도 통일미래센터로 연결하는 교량공사가 한창이다
포트레인과 덤프트럭 사이로 끝까지 가보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도감포 합수점(14:30)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엄청난 낭떠러지에다가 발파작업으로 통제를 한다.
정말 아쉽기만 하다... 저 아래 한많은 비극을 안고 있는 한탄강에 손을
담그는 의식으로 감악지맥의 멋진 마무리를 하고 싶었는데...
잠시 사이에 공사인부가 소리를 지른다... 위험한 곳에 들어왔다고...
그래 나는 간을 집에 빼놓고 다닌다 어쩔래... ㅋㅋㅋ
공사현장에서 비포장도로를 타고 1.5km 정도를 걸어나와 파주 적성에서 연천
전곡으로 잇는 고속도로 다리공사 현장으로 나와 우측 임진강과 합수지점으로 간다
공민왕의 애첩 반야를 수장시킨 신지강(임진강)
요즘 KBS 주말 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 우왕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도 이곳이다
신지강의 맑고 맑은 물은 양면에 푸른 돌이 암벽으로 수십리를 거쳐 둘러 싸여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고려 태조가 자주 찾아 궁중악으로 선유하였던 곳이라 한다.
또한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3月에 왕이 장단에 나가 대장군 이화(大將軍 李和)에게
명하여 공인을 시켜 강가 산언덕에 정자(降仙亭)을 건립케 하고 배를 타게 하여 상류를 오르내리며
기악(技樂)에 참여 즐겼는데 이때 상장군 김흥경(上將軍 金興慶)은 왕께서 손수 배를 저어 보시겠습니까
하니 나는 비록 즐기기는 하나 배를 저을 줄은 모른다 하였다하며 수시 배를 타고 여락(女樂)을
즐겼다는 아름다운 절경이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천하일색 미모가 아름답고 절색미인으로서 예절이 특이한
반야(般若)를 가까이 하여 모니노(牟尼奴)를 낳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신돈의 아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우왕(隅王)인 것이다. 고려왕조에서는 우(隅)를 빼앗아 왕후한비(王后韓妃)의 소생으로 하고자 하니
반야는 밤에 몰래 태후궁(太后宮)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내가 낳은 자식을 어찌 한씨를 어머니로
하시겠느냐며 항의를 하니 태후(太后)가 반야를 하옥시켜 대간(臺諫)과 순위부(巡衛府)에서
감시케 하였는데 반야는 새로 지은 중문을 가리키며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한 것을 안다면
이문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더니 잠시 후 과연 문이 무너지니 사람들은 이상히 여겼다 한다.
삼사우사 김속명(三司右使 金續命)이 탄식하며 천하에 그 아비를 분간 못하는 자는 있어도
어미를 분간 못하는 자는 듣지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이인임(李仁任)등이 반야를 신지강으로
데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고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강(臨津江)
우리나라 한반도 허리를 동서로 가로질러 함경도 마식령 발상 안변과 삭영, 만전땅을 거쳐 흐르는
임진강은 연천과 동두천 포천에 모인 물은 한탄강이 되고 도간포에서 합류 교하 삼도품에서 한강과
합류 조강이 되어 서해바다로 이은 강물줄기는 약 700리(274km)에 달한 기나긴 젖줄이라 하겠다.
임진강의 원래 지명은 신지강(新知江)이었는데 임진왜란때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가
왜군에게 쫒겨 의주로 몽진갈 때 이곳 신지강에 도착하니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엄청나게 몰아쳐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이곳에서 가까운 파평에 있던 율곡 이이의 제자들이 율곡에게서
신지강에 있는 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에 불을 밝히어 겨우 건넜다고 한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나 한양으로 환도할 때 신지강에 당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장병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에 제물을 차려놓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의주로 파천 당시 폭풍우속에 그날의 아픈 기억을 이 강을 지키고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충신들의 명복을 빌며 통곡한다... 그래도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루를
돌아왔다하여 신지강(新知江)을 임진강(臨津江)으로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꿩대신 닭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곳 임진강변에서 손을 담그는 의식을 마치면 감악지맥 구간의 스틱을 접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비포장 도로를 따라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 잠시 후에 교량공사 현장에서 나오는 승용차 한대가 지나가기에
히치를 시도하는데 그냥 태워준다
도봉산역까지 태워주신 고마우신 분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그 분이 이곳에 산도 없는데
혼자 어떻게 왔댜고 물으시길래 설명을 하니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 분은 토목공사를 하청받아 하시는 사장님이신데 인부들 땜에 속이 많이 상한다고 하신다
나 역시 비슷한 업을 하는 사람이라 남의 일같지 않다.
그러면서 집이 어디냐고 묻기에 개포동이라 하니 7호선 환승역인 도봉산역까지 태워준다.
도봉산역(16:50)
고마우신 덕분에 정말 편하게 귀경을 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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