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09년 11월 22일 10:30 ~ 18:20 총 24km(들머리 3km,날머리 3km)
산행구간: 희양산구간: 충북 괴산 연풍과 경북 문경 가은의 경계 구역으로 분지리-사다리골
사다리재-곰틀봉-이만봉-963m봉- 시루봉 삼거리-배너미평전-희양산성터-희양산 삼거리
희양산-삼거리-지름티재-구왕봉-오봉정고개-주치봉-은티고개-은티마을(6시간 50분)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읍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이제 서서히 백두대간 마무리 단계인것 같다. 그 와중에 중간에 행사(초등학교 총동창회) 땜에 빠진
구간인 사다리재에서 은티재 구간을 빼 먹은게 늘 마음에 걸렸다. 지리산에서 시작 강원도 2구간만
빼놓고 있는데 식사하다 늘 목에 가시 걸린것처럼 마음이 편치가 않은데 이 구간은 대간의 가운데
해당하는 부분이고 암벽에다 음지에 많이 얼어 있는 난코스 지역이라 대간 뛰는 산악회는 거의 봄이나
여름에 뛰는 곳이라 개인산행이 아니면 내년 6월이나 졸업해야 될것 같아 범여의 살아가는 방침과도
배치(?) 되는것 같아 산을 좋아하는 후배 산꾼을 꼬셔서 같이 산행을 했다
사당동에서 후배를 만나 내 차로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에 도착
은티마을 여시(여우의 경상도 말)아줌마 주막에 차를 세워놓고 아침 식사 마치고 산행 출발지인
분지리로 택시를 타고가 산행을 시작했다. 이곳은 음지라 눈이 많이 쌓였고 너덜지대에다 낙엽까지
쌓여 도저히 속력을 낼수도 없고 후배를 꼬셔왔고 차를 가져왔기에 빨리갈 이유가 없었다.
사진찍고 이야기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사다리재 주위의 조망권은 죽여준다. 저 멀리 월악산,
주흘산을 비롯한 이름모를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사다리 평전을 지나 희양산성 가는 길목
산죽으로 둘러싸인 양지바른 마당바위에 가져온 독한 평양소주에 오뎅국에다 쭈~욱 한잔하고
버너에다 가스오 우동을 맛있게 끓여 배터지게 먹고 거기에다 후식으로 사과에다 커피까지...
1시간 40분의 만찬을 끝내고 희양산으로 출발하니 기분은 너무 쿨하고... 운제 이렇게 대간을
타볼 수 있으려나(대간 식사는 20분이상 하지 않음) 대간에서 300m 정도 벗어난 희양산 찍고
구왕봉 가는 지름티재 코스(1.5km)는 말 그대로 지옥의 난코스 음지라 눈이 얼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고 구왕봉에 도착하니 16:55분 속력을 내야했다. 오봉정 고개를 지나니 어둠이 깔려오고
뒤따라 오는 후배가 지친 표정이 보이고 오늘의 종착지인 은티재에 도착하니 주위는 깜깜..
아직까지 마을을 가려면 3km이상 남았다. 이 코스는 지난 5월에 내려왔는 곳이라 자신했는데
여름과 겨울은 천지차이 부지런히 마을에 내려오니 온통 암흑 천지. 차를 주차시킨 죄로
또 여시 아줌마한테 주머니 또 털리고... 그래도 기분은 쿨하고 또 한구간을 마무리 했구나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나는 개인적으로 쉰중반이 되도록 충북 괴산과는 여태껏 인연이 없다. 갈일도 오라는 이도 없다
지난 5월에 악휘봉에서 은티마을 내려올 때 처음으로 괴산땅을 밟았고 그 처음이 은티 마을이다
온 사방이 산으로 들러싸인 은티마을. 그중 삼면이 백두대간이 찬란하게 휘감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느곳이 대간 산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각 산들이 패션쑈에서 모델 경쟁이라도
하듯 그 위용과 자태를 뽐낸다(희양산.구왕봉,시루봉,악휘봉, 장성봉, 이만봉, 그 이름도 다 세기 어렵다)
산이 크고 깊어 계곡도 좋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동네다. 산이 비스듬한 평지는 여유롭게 마을을
감싸며 아무 작물을 심기만 해도 작물이 좋을듯 하다. 풍수에는 초보지만(옛날 조금 배웠음)
조선시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이 곳을 다녀갔더라면 아마 이곳을 명당으로 꼽지 않았을까....
은티마을 유래비석과 장승
비석의 글씨가 너무 작아서 옮겨 적으면 조선 초기 연풍현 당시 현내면 연지동에 속해 있었으며
1812년에 작성된 동절목(洞節目)에는 인지동 의인촌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인(義仁)이라는 동리명이 한국의 민족 정신이 함유 되었다고 하여 은치(銀峙)로 개칭하였다.
1914년 일제 때 행정구역 통 폐합 시 주진리라 하였으며 8.15이후 행정구역 세분화 작업 시
이곳은 다시 주민들에 의해 “은티”라고 하였다.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여궁혈(女宮穴)로서
동리 입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건을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딸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입구 송림에 남근석을 세우게 되었다. 1996.6.20 은티마을 동민 일동
은티마을 남근석
풍수설에는 은티는 여궁혈이 자리잡고 있어 동구에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물체를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동구 송림안에 남금석을 세워놓고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은티마을 주막앞에서 - 이집 酒母(이름이 이종숙)가 울매나 여시인지 대간 산꾼들이 이 집 앞을 지나면서
그냥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혼을 빼고 있다. 산꾼들에겐 여시(여우)로 소문이 자자하다
여유롭게만 보이는 곶감
오늘의 산행시점인 분지리의 모습 - 은티마을에서 택시로 15분 거리인데 차비를 13000원 달라고 하니
어딘가 모르게 바가지를 쓴 느낌이고...
사다리골에는 엊그제 온 눈으로 인해 상당히 미끄럽고
오늘의 마루금 시작 지점인 사다리재에서
많은 구간들이 고개에서 마루금 산행을 시작하지만 오늘은 산 아래에서 마루금까지 일단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름길에서 적지 않은 힘이 든다. 분지리에서 사다라재 올라붙은 다음 곰틀봉-이만봉-희양산
-구왕봉-오정봉 고개 이어지는 마루금 길을 걷는다. 속리산 이후 청화산 대야산 장성봉 악희봉으로 이어지는
길과 오늘 올라가는 희양산 그리고 다음 코스인 조령산 등은 대간 마루금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조망과
경치를 제공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곰틀봉(960m)
사다리재에서 가파르게 5분 정도 올라가면 분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바위를 지나고,
곰틀봉 직전 전망대에 서면 다시 아래로 분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며, 뒤쪽(남쪽)으로는
가은읍의 원북리 마을이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조령산, 부봉, 주흘산이
보이고, 그 너머 월악산까지 보이며, 이어서 백화산, 뇌정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전망대에서 7∼8분이면 곰틀봉에 올라선다. 사다리재에서15분이면 된다.
곰틀봉은 예전에 이 부근에 반달가슴곰이 서식하고 있어서 곰을 잡는
틀을 놓았던 곳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곰틀봉에서 찬란한 희양산의 옆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주흘산이 손에 잡힐듯이 조망권이 좋고 (곰틀봉에서)
이 구간의 마루금 길 자체는 매우 인상적이다. 성벽(희양산성 길 포함 : 신라과 후백제가 국경을 다투던 접전지)
처럼 깍아 지른 듯한 길이면서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바위덩어리이면서도 대형 분재 같은 아름다운
소나무를 품고 있다. 여기에다가 단풍나무는 茶毘(다비)를 준비하고 있으니 호젓하다는 길이 바로 이런
것으로 두고 하는 말일게다. 안개가 앗아간 조망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이런 길은 희양산 정상
직전까지 지속된다.
지난 5월에 종주했던 황학산, 백화산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사다리재에서 가풀막을 5분 정도 올라가면 분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바위를 지나고, 곰틀봉 직전 전망대에 서면
다시 아래로 분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며, 뒤쪽(남쪽)으로는 가은읍의 원북리 마을이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조령산, 부봉, 주흘산이 보이고, 그 너머 월악산까지 보이며, 이어서 백화산,
뇌정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만봉(二萬峰:990m)
문경 가은읍과 괴산 연풍면의 경계로 하며 백화산과 희양산 사이에 우뚝 솟아 있으며
곰틀봉에서 10분이면 이만봉에 닿는다. 까만 오석의 표지석에 '해발 990m, 백화산 4.7km,
시루봉 2.1km'라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 증평소방서에서 세운 119 표지판(이만봉 제5지점)이 서 있다.
이화령에서 이만봉까지 11.6km, 산행시간은 5시간∼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임진왜란 때 아래 골짜기(현 분지리의 중간 부분)에 2만여 가구가 난을 피해 와서
살았다는 설과 만호라는 벼슬을 한 이李 씨가 이곳 동리에 살았다는 설 등이 있다.
만호(萬戶)라는 벼슬은, 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종4품, 무관)으로서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초기에는 수군을 중심으로, 나중에는 지방에도 외침에 대비할 목적으로 직책과 임무가 부여 되었다고 한다.
호젓하기만 한 백두대간의 낙엽길
이만봉에서 서북쪽으로 내리막을 약간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밧줄이 매여 있는 굉장히 넓은
마당바위와 용바위의 암릉지대를 지나게 되며, 이곳에서 희양산을 바라보는 조망이 아주 멋지다.
백두대간의 문경 구간이 참으로 넓고도 길다. 백두대간을 거쳐가는 마루금이 116km라고 하니
엄청나게 길게 통과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중에 문경에 있는 산이 가장 많다고 한다.
대간 벌재에서부터 안생달리, 차갓재, 하늘재, 이화령, 은티, 버리미기재, 늘재까지 여러 구간에 걸쳐 있다.
예전에는 안생달리 조금 지나서 대미산 이전까지는 예천군 이었는데 해방 후 행정구역 조정으로 문경으로
편입 되었다고 한다.
시루봉과 희양산 사이에 있는 배너미평전
편안한 능선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전진하다가 보면 참나무 숲 속의
초원지대를 지나서 '희양산 사선봉(964m)'이라는 팻말이 나무에 걸려 있는 곳에 이른다.
등산로는 북쪽을 향해 내리막을 내려가기 시작하고, 점점 습한 지역에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바로 배너미평전으로 내려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0분 정도 내려가면 안부에 이르면서 다시
등산로는 잠시 동쪽을 향해 진행하게 되며, 낙엽송 숲 속에 이르면 길이 갈라지면서 오른편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일대가 배너미평전이다. 거리 상으로는 이화령에서 버리미기재까지의 중간 정도가 되는 곳이다.
배너미 평전,
지리산 세석 평전에 이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평전(平田)이라는 지명답게
이곳부터 시루봉 갈림길, 그리고 은티 마을 갈림길까지는 넓고 평탄하다.
시루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노란 소나무 잎이 길을 덮고 군데군데 박석이 쌓여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박석(薄石)은 경복궁 근정전 앞 마당에 깔아 놓은 검고 얇은 돌로서
균일한 두께로서 단단하고 크기도 적당하여 아주 용도가 많으며 강화도에 많다고 한다.
첫 봉우리에 올라서서 좁은 길을 20여 미터 지나니
좌우 전면으로 트인 시루봉(914.5m) 정상의 조망에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연풍읍에서 분지리로 이어지는 산골 마을은 그 폭이 한 뼘 정도이고
조령산과 이화령을 따라 아침에 지나온 산 마루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 시킨다.
이화령으로 올라가는 구 3번 국도에는 버스가 장난감 기차 같이 꼬물꼬물 이어간다.
희양산 가는 길이 너무 이뻐서 산죽을 배경으로...
개울 쪽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시루봉 밑 갈림길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개울을 따라 북쪽으로 더 내려가면
1시간 거리의 은티마을로 이어진다. 그러나 대간 길은 배너미평전에서 서남쪽을 향해 가풀막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888m봉을 넘어 내리막을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가풀막을 올라가면 성터가 나타난다.
희양산성터 - 삼국사기에 견훤이 희양산성에서 가은땅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했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다
신라말에 경순왕이 봉암사로 피난 왔다가 이곳 희양산성 중턱 성골(城谷)이라는 곳에 피신했는데
성터가 지금도 성 아래 있느데 수백명이 들어가는 굴이 있다고 한다
이 성터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바로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자
그 아비 아자개(阿慈介)의 세력 기반이었던 곳이 바로 남쪽의 가은읍 일대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2∼3분 후 흐무러진 성터에 119 표지판(제4지점)이 있는 4거리 갈림길에 이른다.
이곳이 예전에 은티마을에서 가은의 성골과 홍문정으로 넘어가던 고갯마루이다.
희양산 성터(4거리)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신라(혹은 고려)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은티 마을에서 좌측 가은읍
봉암사 옆 성골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가은 방향으로는 봉암사에서 길을 막아 놓아서 통행이 금지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성(古城)이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자세한 내력은 없다.
희양산 정상에서 범여
희양산! 오늘 마루금 산행의 백미다. 불교에서는 희양산을 우리 국토의 사리라고도 하며, 혹자는 희양산은
우리 국토의 丹田이라고도 한다. 버리머기재에서 희양산을 거쳐 하늘재에 이르는 마루금은 여타 마루금과는
달리 인체 內臟처럼 동서로 반복적으로 휘어지며, 이 가운데 희양산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호칭이다. 그래서 그런지 희양산 아래에는 한국 선불교의 대표 사찰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이지만 근대와 와서는 한국 현대불교의 탯 자리로도 유명하다.
해방 직후 성철, 청담, 자운 등의 스님들이 “부처의 법대로 살아보자”며 용맹 정진한 곳이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이 봉암사의 기본
수칙이 되었다.
희양산 정상에 서면, 오늘 비록 조망은 시원찮지만 정상 그 자체의 자태만으로도 명산 반열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래로 내려다 보면 풍수에 문외한이라하더라도 봉암사 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다. 희양산과 봉암산. 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산과 사찰을 없을 게다.
이런 희양산의 화강암 덩어리는 한북정맥(광주산맥)에 있는 산들에서 볼 수 있는 판상절리(板狀節理) 현상의
박리(剝離) 작용으로 생긴 돔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언뜻 보면 서울의 불암산을 확대시켜 놓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불암산의 불암사도 지증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지름티재 갈림길에서 희양산 정상은 대간코스에서 약500m 떨어져 있다
성터를 따라 12∼13분 정도 올라가면 다시 오른편(북쪽) 아래로 밧줄이 드리워진 내리막 갈림길이 나타나난다.
거기가 희양산 정상으로 가기도 하고, 지름티재로 내려가기도 하는 삼거리 갈림길(980m)이다.
거기서 직진을 하면 희양산 정상인 백운대로 갈 수 있다.
봉암사(鳳巖寺)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국사(智證國師) 도헌(道憲)이 창건했다.
그리하여 봉암사에 선풍이 크게 떨치니 이것이 바로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국정쇄신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런 헌강왕의 개혁의지를 심어준 이념이 곧 지증국사의 선사상이었다.
그리고 특기할 사항은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소위 '봉암결사'라 하여 한국 현대불교의
초석을 다져놓은 획기적인 불사가 봉암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종단에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뜻에 부응하여 문경시에서는 사찰 경내 땅을 확정 고시했다.
즉 희양산 봉암사의 법당을 중심으로 반경 4km 이내는 특별수도원 지역으로 고시함으로써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봉암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불교계의 염원이 담긴 사찰이므로 그 배후가 되는 희양산에 대한 특별관리를
등산객들은 이해해야 할 줄 믿는다.
지름티재에서 400여m 뚝 떨어지는 직벽으로 상당히 위험하고 힘든 난코스다. 1km를 내려오는 거의 1시간이
소요가 됐다. 거기다가 음지라 눈이 얼어 상당히 고생했다.
희양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서면(지름티재) 이내 가파르게 구왕봉을 오른다. 구왕봉에서 서서 뒤돌아 보는
희양산의 모습은 눈을 의심케 한다. 어줍 짢은 형용사로는 희양산의 위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숨이 막힌다’는 생각밖에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장성봉에서 마루금을 따라오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던 희양산의 모습이 여기 구왕봉에서 결정판을 빚어내고 있다.
희양산(998m)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바위덩어리 희양산은 어느곳에서 본들 과연 희양산이구나 수식어가
붙을만큼 위엄하고 고귀한 인상을 주는 산이다.
또한 천년가람 봉암사는 신라 헌덕왕 5년 지증대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중 하나이며
성철,한암, 청담스님을 비롯한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깊은 사찰로 오늘까지 계보
가 이어지며 1년중 사월초파일 딱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사찰이다
희양산의 참모습을 희양산이 아닌 인근 구왕봉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희양산이 국토의 ‘사리’면 구왕봉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리 항아리!’ 아니면 ‘들러리!’ ………
여기서 잠시 축융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으로 갈라진 다음 덕산지맥으로 가지를 치고 여기서 다시 작은 가지를 형성한
산줄기 끝에 청량산(경상북도 봉화군 소재)이라는 곳이 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산이 화강암으로 구성된 데
반해 청량산은 돌연변이(?)라도 한 듯 석회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축융봉은 이러한 청량산을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청량산의 절경에 대해서는 어떠한 세련된 붓이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량산이 감정이 있다면 설악보다 아름답다고 우길 수 있는 그런 산이다.
이미 천년이 지난 신라시대 명필가 김생을 비롯하여 최치원, 이황, 주세붕 등 역사에 이름이 전하는 수많은
거물들도 이산을 보고 그저 감탄을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죽하면 최치원이 마시고
총명해졌다는 ‘총명수’까지 있을까.
청량산 맞은편에 위치한 축융봉은 이름부터가 다소 생소하다. 중국 남방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제갈량이 배후(지금의 운남성으로 추정)를 정리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7종 7금,
그리고 7종 7금 가운데 한명의 주인공이었던 축융부인의 이름에서 온 듯하다. 어쨌든 여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숨어 지내며 쌓았다는 산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축융봉 오르는 길은 험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냥 밋밋한 산일뿐이다. 그러나 정상에 서면 축융봉의 가치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청량산의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을 축융봉
정상에 서야 만이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구왕봉과 축융봉은 비슷한 데가 있다. 희양산이
청량산에 비유할 수 있다면 구왕봉은 축융봉이다. 희양산과 청량산의 존재가치가 구왕봉과 축융봉으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구왕봉 정상에서
구왕봉은 희양산 아래 봉암사 창건 당시 각종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모양새나 경치로 보면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산이다. 그저 일반 산이나 다름없이 둥그스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양산보다 구왕봉이
더 마음에 든다. 나는 ‘사리’가 아니라 ‘사리 항아리’ 혹은 ‘들러리’라도 좋다. 가능하다면 구왕봉을 닮고 싶고,
구왕봉처럼 살아가고 싶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산 ………
살아가는데 필요한 평범한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산이기 때문이다.
봉암사 창건 설화에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지으려 할 때 지금의 봉암사 터가 연못이어서 그 연못을 메우려고 하니
거기에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증대사가 도술을 부려 용을 쫓았더니 뒷산으로 올라가서 그 산을
구룡산(九龍山)이라 했던 것이 변해서 지금은 구왕봉(九王峰)이 됐다고 한다.
오봉정 고개에서 바라본 낙조(落照)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해 리본을 찾으나 대간 길 표지 리본을 누군가 몽땅 제거하여 은티재 내림길 쪽에다 매어놨다..
참 심술궂은 고얀 놈들 같으니라구..오봉정고개라 불리우던 이 고개가 어쩔 수 없이 봉암사 길이 막혀
삼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대간 꾼들의 사랑을 받는 은티마을 이름을 붙이는게 옳은 것 같다. 참나무 숲으로
울창한 남쪽 사면과 북쪽의 활엽림이 대조를 이룬다.
오늘의 마루금 하산지점 은티재(540m)의 모습
구왕봉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작은 봉우리를 하나 넘어 내리막을 내려가면 안동 권씨 무덤이 있고,
조금 더 내려간 안부에 지형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고개가 또 있다. '호리골재'라는 곳으로 이곳 역시 은티마을
쪽에서 올라와서 봉암사 쪽으로 내려가던 고갯마루였으나 지금은 여기도 목책으로 막아놓고 통행금지 간판이 서 있다.
은티 주막에서 하산주 한잔하면서 - 근데 여시 아지매가 안주로 개구리탕을 주는데 비위가 거슬려 입에도
못대는 바람에 후배 산꾼이 정력에 좋다면서 게눈 감추듯이 다 먹는 바람에 범여는 김치만 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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