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는 중부지방은 비가 온다고 예보하질 않아서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판초우의를 빼놓고 출발을 했는데 釜峰에서 부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점심도 못먹고
육포 한조각, 우유 한팩, 도너츠와 초골릿 하나로 식사를 대신하고 산행을 했다.
거리는 들머리 6km, 마루금 8.6km 날머리 2.3km 총 15.9km를 5시간에 걸쳐 산행 마무리하고
충북, 괴산과 충주, 경북 문경의 경계를 거치는 고사리 마을-조령3관문-마패봉-북암문-동암문
부봉-959봉-평천재-월항삼봉(탄항산)-하늘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산세는 그리 험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내륙지방의 산이라 만만치는 않았다. 급경사가 많고
암벽을 타야하는 위험한 코스도 많았고 더욱이 비가와서 산행은 배로 힘이 들었다
거기다가 德이 모자람인지 비와 안개땜에 조망권은 視界 제로인 상태이다
하늘재 하산할 즈음 선두대장한테 무전이 왔다. 하늘재에서 단속을 하니 3시이후 하산하란다
걸리면 벌금 50만원. 언제까지 백두대간 종주팀을 죄인 취급을 하려는지?
생쥐꼴로 단속요원 퇴근만 기다리다 3시5분에 하산 하였다. 거지같은 몰골(?)로 말이다.
그래도 하산하여 사랑하는 이슬이(?)로 대간길의 피로를 푸는 이 맛에 산에 다니죠 하하하
고사리 마을(충북 괴산 소재)에서 산행을 준비하고
조령산 휴양림 관리 사무소
신비롭기만한 신선봉
조령3관문에서 출발하여 하늘재까지 가는 길이 오늘의 노정이다. 오늘 구간은 지나온 대야산, 희양산 및 조령산 구간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조망을 제공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마패봉 인근 신선봉은 마루금 상의 봉우리는 아니지만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꼽히기도 한다. 조령3관문에서의 출발을 버리고 바로 신선봉으로 올라간다. 신선봉 올라가는 길이 제법 까탈스럽지만 조망은 기대했던 대로다. ‘뭔가를 얻으려면 무겁게 구해야 하는 법!’ 평범하다 못해 상식이 되어버린 가르침을 신선봉을 통해서도 깨닫는다.
신선봉을 배경으로
조령관문 오른쪽 군막터 가는 길을 오른쪽으로 올라서서, 마역봉이라 새겨진 烏石 정상표지석이 있는 마패봉(927)까지의 된비알을 30여분 만에 힘겹게 올라서니, 지나온 조령산과 그 이후의 암봉들이 아쉬운듯 물결처럼 다가온다.
약간의 황사 섞인 흐린 날씨가 매우 아쉽다. 가히 절경이라 이를 수 있는 도립공원을 벗어나 이젠 월악산 국립공원으로 접어들어 바로 뒤 돌무덤에서 휴식하며 기다리던 벗들과 기념사진 한장 남기고, 후미를 점하며 천천히 부봉을 향한 가파른 내림길을 밟는다.
마패봉 정상에서의 범여마패봉에서는 사방으로 명산들이 하늘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부봉, 서-신선봉, 남-조령산, 북-월악산이다. 모두들 바위로 자기를 드러내는 산들이다. 마패봉을 지나 북암문에서부터 동암문에 이르기까지는 산성과 함께 부드럽고 호젓한 흙길이 발목을 잡는다. 여기에다가 그저께 내린 눈이 북사면에 그대로 쌓여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바위의 아름다움이 화폭을 채우고 있는 구간이라고 해야겠다.
30분동안의 깔닥고개를 치고온 탓인지 부봉은 멀어 보이기만 하고 뛰어난 조망을 신선봉에서 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전구간에서 만끽할 수 있다. 특히 부봉의 자태는 단연 압권이다.
‘白雲抱幽石(백운포유석: 흰 구름이 바위를 안고 있다)’ 詩와 禪을 결합하여 자연을 곧잘 노래한 것으로 알려진 당나라 寒山의 詩 한 구절로서 深山幽谷(심산유곡)의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보는 부봉이 이러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다만 오늘은 날씨가 청명하니 碧空抱幽石(푸른 하늘이 바위를 안고 있다)라고 해야 할 듯이다. 그러나 하늘에 구름이 조금 걸려 있거나 옅게 흐린 날씨면 부봉은 영락없이 白雲抱幽石의 모습일게다. 산속에서 도를 추구하는 신선들에게 딱히 어울리는 경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오늘의 전 구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신선봉이 마루금 밖에 서 있는 것일까!
나와 인연이 있는 有情無情의 모든 님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동암봉 가는 길에 포토라인 소나무 앞에서 북암문터에 내려서서 750,묘, 764,763등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모처럼 편안한 트래킹을 즐기고, 1시간 여의 트래킹 끝에 동암문에 도달하여 선두조와 합류하여 10분간 휴식을 취한다.
평천재로의 지름길을 택할 유혹도 받지만 마루금 밟기의 고집을 지켜야 한다. 20분이면 갈길을 1시간동안 부봉과 주흘산 입구를 힘들게 거쳐 돌아 내려야 한다. 간식을 나누며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부봉을 향한 된비알 능선으로 올라서니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친다
주흘산쪽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소나기가 쏱아지고
959봉을 배경으로 예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심미적 대상이자 교감의 대상이었다. 심미적 대상을 넘어 자연과 교감했던 이유는, 자연을 인간이 포함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道(도)가 구현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단지 마주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똑 같이 생명을 가지는 유기체로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 가운데에는 ‘바위’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옛날의 많은 현인들은 바위를 찬미하곤 했을것이다. 윤선도 五友歌에 나오는 바위 구절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바위를 인간과 평등한 관계로 보는 데에는 蘆溪(노계) 박인로의 立巖別曲(입암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無情(무정)히 서있는 바위 有情(유정)하여 보이는구나 最靈吾人(최령오인)도 直立不倚(직립불의) 어렵거늘 萬古(만고)에 곧게 선 얼굴이 고칠 적이 없구나
초장은, 바위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유기체라는 것을 뜻하고, 중장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지내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종장에서는 인간이 결코 최고의 반열에 올라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위의 영구적인 모습에서 초연(超然)하고 달관한 군자의 모습을 보여 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환경 위기는 ‘인간중심 사고에서의 탈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수백년 전에 예견하고 있다 하겠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 바위가 유난히도 두드러지는 오늘 대간의 훈계이다.
부봉(해발 917m) 정상에 있는 묘지 - 저 분도 生前에 백두대간을 탔던 산꾼이었을까
부봉 정상에서 - 釜峰(가마솥을 엎어 형태라 하여 부봉이라고 부른단다) 언제 누가 起名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조령산에서 보면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가마솥(釜:부)봉이라고 이름지어진 봉우리. 전혀 개성이 없다.
게다가 주봉의 진면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하늘에 떠있고, 날씨가 흐린 날이면 구름
위에 떠 있을 것이니 차라리 浮峰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나을 듯 하다.
갑자기 내린 소낙비로 인해 산행은 자꾸만 힘이들고
959봉으로 향하는 절벽의 줄잡이는 새것으로 갈아 놓은 것과 또 한 줄을 더 설치해 놓았다. 매우 위험한 건너뛰기를 줄잡이를 하며 시도하지만 사실 매우 아찔한 오른쪽 절벽에 조곡골 깊은 경치마저 눈에 잘 들어 오질 않는다.
무사히 돌아 오른 조망바위 안부에서 부봉 1,2봉을 디카에 담고 959봉을 향해 힘겹게 차고 오른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일 있을까...
소낙비 쫄딱 맞고 생쥐 모습으로 탄항산 정상에서 비를 쫄딱 맞고 비교적 완만한 능선을 지그재그로 암릉을 피해 오르니 炭項山이라 적은 작은 표지석이 예쁘다. 월항삼봉(月項蔘峰)이란 이름이 멋지지만 어디엔가 더덕 밭이 크게 있다는 얘기가 실감을 더해준다. 대간 구간의 마지막 정상에선 늘 그렇듯이 피로와 함께 몰려오는 아지못할 아쉬움에 휴식을 취하며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쉽질 않다.
사모바위 앞에서 한컷 멋을 부려보고 - 저 나온 배는 언제쯤 없어지려나 굴바위를 지나고 멋진 이층 사모바위(네모바위)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본다. 날씨는 다시 맑아지고 어디선가 청아한 독경이 들리니
미륵사지가 가까운 모양이다. 오른쪽 문경 관음리(현세)에서 왼쪽 충주 미륵리(미륵내세)로 넘어가는 하늘재를 향해 날아 오르는 발길이다. 멸망한 신라를 가슴에 묻고 덕주공주와 마의태자가 저 밑 하늘재(백재)에 다다라 손을 놓고 이별한다.
산으로 오르는 마의태자의 발걸음이 가볍다. 버리면 저리 가벼운 것을...
하늘재에서 포함산을 배경으로
내 사랑하는 여인만큼이나 고운 패랭이꽃
백두대간 27구간 종점 하늘재(해발 520m 경북 문경읍 소재)에서 하늘재는 바위가 가져다 주는 장엄함 또는 기묘함은 없지만 많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연 이래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남진을 위해 이 길을 다녔고, 망국의 한의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도, 홍건적을 피해 내려온 고려 공민왕의 피란행렬(봉화소재 청량산 인근 축융봉으로 피신했다)도 이 길을 밣았다.
그런가 하면 하늘재 북쪽 마을 이름이 미륵리, 남쪽 마을 이름이 관음리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를 통한 불교 전래도 하늘재가 매개 역할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대간을 가장 많이 이해하는 이는 공민왕이 아닌가 싶다. 조선의 풍수(전통지리)가 충 ․ 효 중심의 유교를 바탕으로 한 묘지 풍수인 반면 고려의 풍수는 불교 풍수이자 國域풍수이다. 그러니 최고권력자인 공민왕 그 자신이 풍수의 대가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당시의 사회 개혁을 위해 풍수(地氣衰旺說)를 이용하기도 했다. 신돈을 내세워 서경천도론을 주장하는 동시에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고자 애를 섰다. 풍수가 대간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민왕 그 자신이 원나라에 쫓겨 고려로 침입한 홍건적의 난을 피해 신성한 영역인 대간 마루금을 넘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하다.
하늘재에서 마루금을 지나서 문경쪽으로 2.3km나 더 가야 버스는 기다리고
하늘재에 내려서기 직전 철조망 쳐진 농장 옆에서 지하수 펌프물에 더위를 씻으니 피로가 온통 물러갔다. 더덕밭으로 소문난 언덕 너머에 자꾸 눈길이 간다. 밤꽃이 흐드르지게 피어있다.
선두대장에 연락이 왔다. 빨간모자 아저씨(산불감시요원)가 3시면 퇴근하니 10분만 기다렸다 내려오란다. 서서본 생쥐꼴의 내 몰골이 우수꽝스럽기만 하다
계립령, 마골령등 숱한 전설을 담은채 조령, 죽령보다 먼저 이루어진 이 길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요충지이다. 또한 서민들의 자유로운 왕래 속에서 미륵을 가꾸는 한가로운 길이다. 과거보러 가는 길도 아니요, 돈 벌러 떠나는 상인들의 길도 아니다..
그냥 답답하리 만큼 속이 차오르는 한이 있거들랑 이 길을 오가며 적송 깊은 골에 낙엽송 사열을 받으며 삼림욕을 즐길 뿐이다..
범여의 맘을 편케 해주는 문경 오지의 계단논 멀리서 봉사하는 어느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인생의 마무리 시점에서 남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큰 보람을 느끼게 할지 부럽다.. 돕는다는게 꼭 우산을 들어주는 건 아닐지라도, 함께 비맞으며
걷지는 못할 지라도, 공감하고 연대하는 노력은 필요하리라...
오늘도 그 친구들 덕분에 한잔의 이스리에 행복을 느끼며 잠시후 서울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범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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