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자: 2015년 7월 9일 ~ 12일(3박 4일)
☞ 날 씨: 맑은 날씨에 무척 더움
☞ 인 원: 알파3050산악회 26명과 함께
☞ 코 스: 목단강~돈화~송강하~산림욕장~백계가일호텔(9일)~백두산 서파 37호 경계비
천지~고산화원~제자하~금강대협곡~이도백하 이동~발마사지~보석국제호텔(10일)
☞ 소재지: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의 백두산 일대
지난 33년간동안 내 청춘을 다 보낸 개포동 아파트가 재건축으로 지난 6월 30일자로
완전히 이주를 하고 난 요즘 허무함으로 인하여 약간의 우울증으로 밤에 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지난 4월말부터 시작한 학교공사를 6월 중순에 끝내기로 하였는데 자꾸만 이것저것
추가공사로 인해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새로 임차한 매장 인테리어 공사는
손도 대지 못하니 머리는 자꾸만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예정대로라면 5월말에 깔끔하게 공사를 마무리하고 6월에 새로 얻은 인테리매장 공사를
마무리 한 다음에 지인의 후배님이 산행대장인 알파3050산악회를 따라서 백두산을 가기로
신청을 하였는데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직원들에게 맡겨놓고 간다는게 조금은 미안하긴
하지만 어차피 현장은 내가 없더라도 돌아가게 되어있기에 눈딱 감고 공항을 향한다
백두산 여행 일정표
중국 동북 3성의 지도
7월 9일 06시 인천공항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한 다음에 어제밤 챙겨논 베낭과 캐리어를 끌고 가족들이
다 잠든 사이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매주 나홀로 산행을
하며서 새벽에 나섰기에 이제 이게 일상이 되어버려 아무도 일어나 배웅도 안해주니
조금은 섭섭하지만 5년을 넘게 독립군(나홀로 산행) 활동을 한 탓에 이 지경이 되버린 건
자업자득인데 누구에 원망하랴... 어쩌면 간섭받지 않고 사는게 더 편한걸 어쩌랴
공항에 도착하여 같이갈 일행들과 미팅을 하는데 아는 사람이라곤 대장이외 딱 한사람뿐(?)...
가족끼리 온 사람, 부부끼리 온 사람 등등이고, 그 이외엔 산악회에 늘상같이 산행을 한
사이인진 상당히 친해 보이는데 5년을 넘게 나홀로 산행을 한 탓인지 이런 분위기엔 상당히 어색하다
이 산악회에는 대장말고는 한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혼자 다니면서 한북 8정맥, 한남 5정맥 산길에서
시그널로만 만난 알프스 대장님이 나에겐 훨씬 친근감이 들었는데...
어색한 분위기에 꾸어다논 보릿자루처럼 있다가 가이드 미팅이 끝난 후 출국 수속을 밟고
공항 게이트로 들어서니 다른 동료들은 다들 면세점에서 쇼핑하는라 정신이 없지만 난 쇼핑에는
관심이 없으니 어쩌랴...원래 걸림없이 살고싶고 손에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동료들이 쇼핑할 시간에 난 커피 한잔 마시면서 가져온 책을보면 무료함을 달래다가 10시 25분발
인천발 목단강(중국명:두무장)행 비행기에 오른다
목단강(牡丹江)공항(12:10:중국시간: 시차 1시간)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중국 흑룡강성에 위치한 목단강공항에 착륙한다
이곳은 중국의 최북단 지역이라 선선한 느낌이 들줄 알았는데 이곳 역시 날씨는 상당히 덥다
국제선이 다니긴 하지만 비행장은 마치 우리나라 포항이나 무안공항처럼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말고 달랑 한대만 보일뿐... 그야말로 공항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중국의 보건요원이 비행기에 들어와 메르스 때문인지 모든 사람들에게
발열 체크를 한 다음에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송강하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한다
목단강공항에서 송강하(宋江河)로 가는 길의 지도(펌)
동경성진의 식당(13:00)
목단강 공항에서 관광버스에 오르는데 버스는 청소도 안되어 있고 기분나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조선족 가이드가 열심히 일정에 대해 설명을 하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우리나라 시골길보다 더 못한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정도를 달려 대조영이 발해국을 건설한
곳인 흑룡강성 녕안시 동경성진의 식당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맥주 한병을 마신다
식당의 위생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식사는 먹을만하다
동경성진의 거리
이곳은 러시아 국경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러시아 양식의 주택들이 많이 보인다
돈화(敦化)시내를 달리면서 바라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대정상불 좌상
돈화(敦化)시는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의 수도로서 저 멀리 육정산에는 대정불상이 보이는데
저 불상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비구니 사찰이라고 한다
돈화시내에서 4km정도 떨어져 있는 정각사는 제3대 계승자인 여미고승 법호(석불성)인
관숙금 대사가 1993년에 500만$을 들여서 재건되었다고 한다
돈화시를 지나서 한참을 달린 다음에야 버스는 휴게소에 도착한다
휴게소 건너편에는 말의 형상을 한 멋진 조형물이 보인다 (만물상님의 사진 펌)
흑룡강성을 지나서 이곳부터는 길림성으로 접어든다
길림성을 비롯하여, 조금전에 지나온 흑룡강성과 요녕성은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발해국의 중심지이기도 한 곳이며 돈화시는 발해의 건국 당시 수도이다
길림성 행정구역 안내도(지도및 글 - 펌). 길림성은 대략 크게 9개 지역으로 나눠지는 군요.-큰 시 안에 또 작은 시들이 많이 있으며 白城市。松原市。长春市。四平市。吉林市。辽源市。通化市。白山市。延边朝鲜族自治州
로 크게 9개로 나뉘면서 북한과 접해 있다.
차창 밖의 길림성 농촌 풍경
돈화 휴게소에서 다시 계속해서 송강하로 향하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농촌 벌판이 인상적이다
간간이 차창밖으로 보이는 농촌 풍경은 우리나라의 60년대... 그러니까 내 어려었적 자랐던
고향의 풍경과 비슷해 보인다. 계속해서 버스는 비포장도로와 좁은 길을 달리는데 자욱한
먼지와 덜컹거리는 버스를 지금까지 5시간이상 타다보니 허리가 아파온다
간간히 만나는 마을 입구에 비석들이 보이는데 조선족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1900년대 우리가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이곳도 만주사변으로 인해 일본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 넓은 땅에 일본 놈들은 무조건 사람을 죽이고, 무조건 태우고, 무조건 부숴버리는 정책으로
이곳을 점령...지배했는데 그 때 희생당한 분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라고 하는데 우리 민족들도
많이 희생되었다고 하며 그 때 당시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일본을 상대로 대승한 청산리
전투지역이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휴게소(17:25)
휴게소에 내려서 화장실을 들린 다음에 다시 송강하로 향하는데 2시간정도
더가야 한다고 하는데 앞이 캄캄하다... 허리가 아파서 미치겠는데 아직도 2시간이나...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숲속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버스는 계속 달린다
이곳은 백두산의 자락으로 해발 1,100고지라고 하는데 백두산중에서 가장 동,식물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라고 하며 백두산에는 980여종의 식물과 1,000종의 곤충과 물고기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가이드는 설명을 한다
백두산의 식생대는 1,000~1,500m는 침엽수림대라 하여 잎이 뾰족한 침엽수들이
대체적으로 많이 자생하고 있으며, 1,500~2,000m 지대는 악화림대라 하여 자작나무,
사스레를 비롯한 고산식물들이 자생하고 있으며 2,000m급 이상 지역은 고산툰드라지대라
부르며 식물이 전혀 자랄 수 없는 황량한 곳을 말한다고 한다
송강하로 가는길에 여행 일정에 없는 최근에 문을 열었다는 자연휴양림이 일정에 포함된다
처음 계약에는 분명히 노옵션, 노쇼핑이라 했는데 가이드의 제안으로 일정이 추가되면서
입장료를 40$가 추가되는데 초반에는 기분이 상당히 불쾌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대장과 총무님이 첫날부터 가이드와 마찰을 빚으면 여러가지
불편할 것 같아 울며 겨자먹기로 결정했다는 말에 수긍하며 따라간다
자연휴양림(19:10)백두산 자연휴양림 앞에서
이곳에서 입장료 40$을 지불하고 전동차를 타고 2~3분을 달려서 입구로 들어선다
전동카에서 내려 다시 데크목 계단을 따라가는데 자연휴양림에다 온갖 조명을
들이대는 바람에 오지산행의 習에 젖어있는 범여로서는 어색하고 조금은 역겨웁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봐야 멋진 법인데 휘황찬란한 조명이 역겨울 수 밖에...
하였던 왕서방(중국사람)의 상술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九女神石을 지나고...
8형제 나무도 지나고...
흐르는 계곡물에도 호화로운 조명을 설치해놨다
임신수(姙娠樹)
임신한 여인의 배를 닮아서 그랬다나 어쨌다나... 왕서방은 이름도 잘 붙인다
복을 비는 나무를 지나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데 30분이 채 안걸렸다
이 짧은 시간에 입장료가 40$이라니...중국의 물가가 이렇게 비싸나...
휴양림을 빠져나와 근처의 식당에서 끌적지근하게 저녁을 먹은 다음에
송강하의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백계가일호텔로 향해 방 배정을 하는데
부부와 가족들끼리 온 사람들이 많아서 먼저 방 배정을 하고나니 마지막엔
나혼자 달랑남는 바람에 혼자서 방 한칸을 차지하여 참으로 편하게
중국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대장님, 총무님 고마우이... 복받을 겨
중국에서 2일째(7월 10일)
백계가일호텔(06:00)
이른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호텔 주위를 돌면서 가볍게 몸을 풀고나서
다시 룸으로 들어와서 가방을 챙겨 버스에 싣고 호텔식당에 들려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다음으로 백두산 서파로 가기 위해서 버스에 오른다
우리가 태우고 다니는 버스
캐캐한 곰팡이 냄새가 푹푹나서 미치겠다... 장 따거(張兄:버스기사) 버스 청소 좀 하소
장백산 매표소(07:30:중국시간)
서파로 오르기 위해서 표를 예매해야하는데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표를 예매한 다음에 서파로 향한다
버스를 타기위해 가는 데크목 등로 가운데는 심어논 장뇌삼들이 많이 보인다
버스를 타고 청문봉 아래의 서파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백두산으로 오르는 서파주차장까지 왕복
차비가 125위안(25,000원)이고 또 다른 입장료 30위안(6,000원) 포함하여 155위안이다
이곳에서 청문봉 아래 서파 주차장까지 55인승 버스로 100여대가 계속해서 실어 나른다
차 안에서 바라본 백두산의 모습
날씨는 무지하게 좋다... 백두산 천지를 멋지게 볼 수있을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해발 1,500m를 넘어서니 나무들이 거의 보이질 않고 가끔씩 자작나무만 보이며 그 대신에
노란색으로 수놓은 미나리아재비와 산꿩의다리가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서파주차장(08:30)
서파주차장에 내려서 20여분간을 걸어서 천지로 향한다
서파 오르는 계단 곳곳에 인력거꾼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미나리아재비
서파 오르는 길의 풍경
서파란 뜻은 ‘서쪽의 비탈’이라는 뜻으로 백두산 서쪽에서 청석봉 방향으로 오르는 길을
말하는데 예전에 선답자들은 이곳이 아니 이곳 우측 넘어 있는 국경수비대에서 산행을 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정식적인 등산은 중국정부에서 허락을 하지 않고 관광만 허락한다고 하는데 산꾼이
산행을 하지 않고 관광을 하려고 하니 몸은 근질근질하고 싱겁기만 하다
서파주차장에서 천지로 향하는 관광객들
하늘매발톱
다소곳이 숨어서 피어있는 하늘매발톱
서파에서 천지로 오르는 등로 주위에는 하늘매발톱과 미나리아재비 등이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계단 옆으로 로프를 쳐놓고 곳곳에 감시원을 배치하여 멋진 야생화를 촬영할 수 없는
아쉬움이 아쉽다면 아쉬움일까... 야생화는 접사로 찍어야 하는데 도저히 찍을수가 없다
청석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 본 서파주차장
저 이는 뭔 수심(愁心)이 가득할까
가족 부양 때문인지 아님 오늘 허탕을 치지 않을까하는 고민일까?
축하합니다... 한 건 하셨군요
인력거를 타고 천지까지 오르는 왕복 비용이 1,000위안(200,000원)이라고 한다
천지 오르는 계단에서 청석봉을 배경으로...
서서히 나에게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는 청석봉(옥주봉)의 모습
해발 2,300m 이상의 지대로 올라서니 고산툰드라지대가 보이기 시작하며 백두산의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이 나오는데 고산 및 극지에서 수목이 존재할 수 있는 극한의 선.
즉 교목한계선(喬木限界線)이라고도 하며 환경 조건의 변화 때문에 수목의 생육이
불가능하게 되는 한계선으로 삼림 한계의 외측에 수목이 소생하는 추이대(推移帶)가 있어
이것으로 수목한계를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며 고산이나 고위도 지방에서는 저온, 습원(濕原)에서는
토양수분 과잉, 사막이나 사바나에서는 수분 부족, 극지방에서는 강풍이 한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북극권에서는 침엽수의 삼림 한계의 북쪽에 자작나무류 ·오리나무류 ·버드나무류 ·미루나무류,
침엽수가 소생하는 툰드라대가 있어, 수목한계를 넘어서 수목이 없는 툰드라에 이어진다.
삼림한계선의 높이는 지방에 따라, 또 산의 사면(斜面)의 방위에 따라 다르며, 보통 고위도가
될수록 낮아지고, 북극지방의 수목한계선은 평지에 있다.
수목한계선 밖에는 관목이나 초본류 ·지의류 ·이끼류만을 볼 수 있고 고산대의 하한(下限)이
삼림 한계인데 1년 중 가장 더운 달의 평균기온이 10 ℃인 선과 거의 일치한다.
이런 선은 북극으로 갈수록 평지에서 나타나며 고산대의 하한은 북위 42 °의 백두산에서는
1,700 m이고 만일 제주 한라산이 더 높았더라면 2,500 m에 나타날 것이다.
한국의 고산대는 눈잣나무대라고도 하는데, 고산대를 상부와 하부로 나누면 하부에는
눈잣나무 군락이 나타나고, 상부에는 고산초원이 나타난다 (위대한 여정님 블로그 인용)
청석봉의 모습
아!~~~ 백두산(09:00)
드디어 청석봉 아래에 설치된 37호 표시석 아래에 있는 천지 표시석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10여년전 초딩이 동창들과 북파쪽으로 천문봉에 올랐을 때 강한비에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만큼 세찬 바람에 천지 물을 2분이나 봤을까 하는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멋진 仙景을
감상하다니 올 하반기에는 존일이 있을라나...
흔히들 3대가 德을 쌓아야만 지리산의 멋진 일출을 감상할 있다고 했는데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이렇게 깨끗하게 천지를 볼 수 있다니... 5代가 德을 쌓았을까 아님 앞으로
5대 이상 덕을 쌓으란 뜻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가피력인가.
백두산 정상의 등산로(위대한 여정님의 블로그 인용)
사실은 난 저 길을 걷고 싶으면 백두산을 왔건만 산행이 아닌 관광을 하고 있으니 맘은 콩밭에 가있다
여행 안내 팸플렛에는 300$을 내면 산행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원칙적으로 산행은 중국정부에서
안전을 염려해 허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며 같이온 일행들이 아무도 신청하질 않아 혼자서 입맛만 다신다
백두산(白頭山:2,750m)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三池淵郡)과 중국 지린성(길림:吉林省)에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중국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으며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
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 왔고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
(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으며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의 주봉인 장군봉을 배경으로...천문봉을 배경으로도 한 컷
청석봉(靑石峰:2,664m)
서파주차장에서 천지로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백두산의 16개 봉우리중의 하나로 천지 서북쪽에
위치한 백두산 제2봉인 백운봉에서 약 1.3km 떨어져 있으며 가까운 남쪽엔 제운봉이 있다
옥주봉(玉柱峰)이란 이명(異名)도 가지고 있는데 정상을 바라보면 오형제처럼 다섯봉우리가
뭉쳐 선 것이 마치 하늘이 무너지면 버티고 있는듯한 형국이라 “옥기둥(玉柱峰)” 이라 한다
그 다섯 봉우리가 푸른 암석이로 되어있어 청석봉(靑石峰)이라 부르며 이 봉우리들은
천지쪽을 향해 깍아지른듯이 서 있으며 ‘一’자로 그은듯한 단층을 형성하고 있다
청석봉 동쪽에서 솟는 샘이 금실같이 천지로 흘러드는데 금선천(金線川)이라 부른다
백두산 천지(天地)의 모습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로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며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장백폭포에서 이도백하를 흘러 송화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며 장백폭포는 현재는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다.
높이가 68m이고 여름철은 물론이고 겨울철에서 얼음과 눈속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매우 장관이다.
밀림 속에 자리 잡은 악화폭포는 그 높이가 50m이고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백두산 지역은 강수량이 비교적 많으며 그 원인은 해양과는 거리가 가까우며,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이며 천지 주변의 연평균 강수량이 1,340.4mm이며, 연 강수일수는
209일쯤 되고, 특히 우기는 7,8월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은 불과 며칠되지 않는다.
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7.3도이고 극단적인 최저 기온은 -44도로 9월 초순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온통 겨울 설원으로 변한다. 계곡엔 눈이 매우 두껍게 쌓여 이듬해 7월에도 채 녹지 않은 눈을 볼수 있다.
서풍이 강한 백두산은 연 평균 풍속이 초속 11.7m에 달하고 8급 이상의 폭풍 일수는 267일이나 된다.
폭풍이 가장 많은 달은 12월로서 29일쯤 되고,최대 풍속은 초속 70m가 넘을 때도 있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며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해발고도 2,000m 이상은 키가 작은 관목류와 초본들이 자라는 고산대로, 산악툰드라 지대이다.
이곳에 자라는 초본류는 두메자운·담자리참꽃·바위돌꽃, 눈속에서 꽃이 피는 노란 만병초 등이다.
이 지대는 특히 꽃이 피고 씨가 만들어지는 기간이 짧아서 7~8월에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아름다운 꽃밭을 이룬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역사상 단군조선·부여(夫餘)·고구려·발해(渤海)·금·청(淸) 등 이곳과 관련을 갖지 않은 나라가 없었으며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왔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으며,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의해 단군신화의 탄생무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두산이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한민족의 직접적인 거주지였다기보다는 불을 뿜어내는 성역으로 간주되어,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선사시대에 민족의 시원(始原)을 말해주는 신화의 무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민족의 기원설화를 안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거주가 제한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의 발굴을 기대하기 힘들며 발견·보고된 바도 없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남서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부여, 북쪽에는 읍루, 북동쪽에는 숙신(肅愼), 동쪽에 동옥저(東沃沮) 등의 북방유목민족이 주변에 흩어져 살았다. 고구려가 강성해진 이후에는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으며, 발해의 영토 안에 있었다. 연변지역에는 발해가 건설한 많은 성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발해 전기의 도성인 구국(舊國;돈화현 오동성)과 5경중의 동경 용원부(龍原府;훈춘현 팔련성), 중경 현덕부(顯德府) 등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있다. 이후 백두산은 통일신라나 고려의 영역외곽에 위치하여 북방 이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요(遼)를 건국한 거란이나 금을 건국한 여진족의 발상지도 이곳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금은 1172년(명종 2)에 이곳을 산신으로 봉하여 영응왕(靈應王)이라 하였고, 1193년에는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였다. 고려 말∼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이 백두산을 경계로 흥경(興京)을 중심으로 압록강·두만강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후금이 건국되자 그들의 시원지로 간주하여 영경(靈境)이라는 제사를 지냈다. 청나라 때에는 이곳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금봉책(禁封策)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세종(世宗)은 북방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해 1434년(세종 16) 두만강 일대에 6진(경원·경흥·회령·부령·온성·종성)을 설치하였고, 1443년에는 압록강변에 4군(무창·자성·여연·우예)을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으나, 백두산 일대는 너무 광활하여 국경선을 확연히 할 수 없었다. 조선과 중국의 문헌 중 1677년(숙종 3;淸 康熙 16)에 무목납(武木納) 등 4인을 백두산에 파견하여 실황을 조사·기록한 《장백정존록(長白征存錄)》이 백두산 답사기록으로는 최초일 것이다. 1712년(숙종 38) 5월에는 국경을 확실히 하자는 청의 제의에 의해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금석문으로서는 최초의 유적이며 이 정계비는 높이 72㎝의 6각기둥으로, 비문에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라고 새겼다. 그 후 1880년(고종 17)부터 청나라는 돌연 토문이 두만(豆滿)을 뜻함이라는 억설을 주장하여 논란이 되더니, 1909년(순종 3) 만주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본이 북경에서 청나라와 회담하고 토문강에서 훨씬 남하하여 두만강이 한·청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영토이던 간도(間島) 전역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선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백두산은 현재까지도 중국과 북한의 영토로 양분 되어있는 상태이다. 일제강점기의 백두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기지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 되었다. 1920년 6월 백두산 기슭의 봉오동(鳳梧洞)에서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과 격전 끝에 최대의 승전을 하였는데 백두산은 이처럼 항일의 전승지로서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이 빛날 뿐만 아니라 6·25 때에도 개마고원유격대가 전투부대를 조직하여 인민군과 싸웠던 활약은 유명하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북한과 중국 간의 담판 과정에서 ‘백두산천지의 55%는 중국령, 45%는 북한령’ 등으로 영토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
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으며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으며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국내 백과사전이나 전문가 견해에 따르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은두만강과 압록강이다.
그런데 두 강의 발원지가 곧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다. 따라서 두만강과 압록강의 발원지를
끼고 있는 백두산은 필연적으로 중국과 한국 두 개 국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백두산 천지는 원형화구로 안쪽을 내륜, 바깥쪽을 외륜이라 하며 백두산의 정상부에 있는
천지는 원형화구로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16개 봉우리들에 의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천지 수면으로부터 500-600m 높이로 천지를 둥그렇게 둘러 싸고 있는
이 봉우리들을 외륜봉 또는 외륜산이라고 한다.
즉 중앙의 분화구(噴火口)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 모양의 산이 외륜봉이다.
천지 안쪽으로는 천지수면까지 이르는 경사를 내륜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 바깥쪽이 외륜 안쪽이 내륜이다. 내륜(內輪)은 경사가 급하고
외륜(外輪)은 내륜보다 완만하며
천지의 동남쪽은 북한, 서북쪽은 중국 지역,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 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문제는 일제의 조선반도 침략 이전엔 백두산 전체가 우리 땅이었 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래 두만강 이북의 간도는 우리의 영토(‘백두산 정계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이 철도부 설권에 대한 협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간도를 중국영토로 편입 시킨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며 학계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중국과 백두산 영토를 공유하게 됐고 이는 곧 일제에 의한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북한과 중국 간의 담판 과정에서 ‘백두산 천지의 55%는 중국령,
45%는 북한령’ 등으로 영토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백두산의
절반이 중국으로 넘 어간 것은 이미 그때였다는 뜻이다.
1982년 6월 21일자 국내 신문에는 백두산 천지의 북쪽 부분 거의 절반이 중국영토로
표시된 중국 발행의 지도와 기사를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산 자연보호관리국에서 간행한 《자연보호》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백두산 부근 지도는 동쪽의 비류봉(沸流峰)에서 남서쪽 마천우(麻天隅)를 향해 일직선으로
줄을 그어 ‘국계(國界)’라는 국경선 표시를 하고 있다.
북한은 1962년 초부터 1963년 4월까지 국경선 비밀협상을 벌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은 밝혔으나 백두산에 대해서는 일체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위대한 여정님 블로그 인용)
청석봉 아래에 있는 넓은 데크광장... 천지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청석봉 아래에 광장에 서있는 37 표시석
청석봉 아래의 넓은 광장같은 공터에는 ‘37 표시석’과 天地 표시석이 있는 곳에서는
왕서방(중국사람)들이 좋은 위치를 점령하여 사진을 찍어주면서 장사를 하는데
사진 12장 찍어서 CD에 구워주고 4만원이라는 거금을 챙기는데 짱깨들의 상술은 알아준다
이곳에서 주의 할 점은 이곳이 한국땅을 의미하는 노래나 만세,술을 놓고 절을 하면서
백두산이 한국 것임의 의미하는 행동을 취하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국경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다고 한다
보면 볼수록 환희심이 생기는 천지의 모습
착잡한 마음으로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을 바라보는 범여
내 나라 내땅에 있는 민족의 정상인 백두산 장군봉을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서 바라보는 범여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는데 비단 그게 나만의 생각일까...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이고 지금도 강대국 사이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면서 넛크래커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지도자임을 자임하는 여의도 나리들은 아직도 국가와 민초들의 안위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사리사욕이 우선이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나라잃은 설움을 꼽씹으면서 이곳 만주땅 하얼빈(合爾濱)에서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사살한 안중근 의사, 청산리 대첩에서
대승을 이끌었던 김좌진,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이름없이 사라져간 우리 선조들에 볼 낯이 없구나
전 세계에서 개인적으로는 유태인 못지않은 총명함을 갖춘 한민족은 왜이리 모래알일까
저 천지는 그 비밀을 알고 있을까...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진부령까지 와서 멈춰버린
범여의 백두대간 북진길... 내 생애에 북녘땅의 백두대간길을 걸어서 장군봉에 휘날레하고
천지에서 손을 씻는 그 날이 올 수 있을까...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아 ~~~ 백두산
장군봉을 뒤에다 두고 천지를 향해 연신 카메라 셧터를 눌러대는 저 카메라맨도 나와같은 생각일까?
서파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본 마천우(2,459m)의 모습
고산툰드라지대라 그런지 나무 한그루, 풀한포기도 보이질 않는다
청석봉 아랫쪽 옆 사면에는 아직도 잔설이 보인다뒤돌아 본 청석봉의 모습
아쉬워서 다시한번 쳐다본
마천우의 모습
바위돌꽃 씨방
호범꼬리
계속해서 천지로 올라오는 관광객들
두메양귀비
서파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두메냉이
구름국화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미나리아재비
서파주차장 옆에는 미나리아재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서파에서 천지로 오르는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다시 서파주차장(10:30)
서파주차장에서 꼬부랑길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자작나무와 야생화군락지
버스는 서파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잠시후에 야생화 군락지인 고산화원에
내려놓고 관람시간은 5분이란다... 이보시게 가이드 선생 장난치나...
야생화 한 컷 촬영하는데도 접사로 제대로 찍어려면 5분은 걸리겠다
그것도 로프를 쳐놓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면서...일행들에 민폐를 안끼치려고
주마간산격으로 고산화원을 둘러보고는 다시 버스에 오른다
원추리인가?... 조금은 아리까리하다
털쥐손이
개당귀(?)
제자하(梯子河:11:00)
제운봉(梯雲峰) 양측에서 발원한 대.소(大.小) 제자하가 합쳐진 협곡이다
바닥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횡단면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으며 발원지의
하상(河床)이 험난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층층으로 나누어 보이는 모습이 게단과
같다고 하여 제자하(梯子河)라 불리며 또다른 명칭으로 지하하(地下河)로도 불리는데
물이 지하 깊숙히 스며들어 흐르기 때문에 지면 위에서 구비구비 굽어 흐르는 작은
개울모양으로 넓이가 2m 안팍인 모습만 보이고, 일부는 그 조차도 암석으로 가려져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우리로는 구름다리가 하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야생화가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는데 출입금지란다
제자하에 내리자마자 조선족 가이드 얼른 버스를 타라고 재촉한다
가이드한테 조금은 못 마땅하다... 여행이란 여유롭게 감상해야 하는데 모든걸 처삼촌 벌초하듯
자기 일정에 맞추라니...
거기다가 야생화 한 컷을 제대로 찍을만한 곳은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고...
가이드에게 약간의 불만족스런 표현을 했더니만 버스를 타고 조금을
더 가다 또다른 야생화 군락지에 내려주는데 이곳에서도 시간은 5분이다
이 친구! 번갯불에 콩구어 먹으란 얘기인가...
제자하(梯子河)야생화 군락지 입구의 모습
털쥐손이
인가목(생열기)
하늘말나리
산꿩의 다리
불자동 야생화 군락지의 습지 비슷한 곳에는 보라색 붓꽃과 미나리아재비, 산꿩의 다리를
비롯한 각종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그 너머로는 백두산의 봉우리가 살짝 보인다
하늘말나리 봉오리
울님의 입술만큼이나 진한 빨간색의 인가목(생열기)
다시 버스에 올라 금강협곡으로 향한다
금강대협곡 매표소(11:30)
금강대협곡(錦江大峽谷)이라는 곳에 중국은 ‘長白山大峽谷’이란 팻말을 걸어놨다
금강대협곡은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여 분출된 용암이 흐르면서 V자 계곡을 형성한 곳으로
뾰족하고 기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금강대협곡은, 백두산 서쪽 관광의 또 다른 묘미로
1997년 5월, 큰 산불로 중국군이 동원되어 진화 과정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동양의 그랜드 캐넌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협곡 길이만도 6~70여km 폭 최대 100여m 깊이 최대 200여m의 거대한 협곡으로 계곡 허리쯤
데크길이 만들어져 1 km 정도가 공개 되어 있고 서백두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가는곳마다 입장료를 내야하는데 중국에는 입장료가 엄청나게 비싸다
전 세계적으로 유태인 못지않은 왕서방의 상술에 그저 놀랄뿐이다
개승마
忍苦의 세월을 겪어낸 나무
산꿩의 다리 입구에서 금강협곡가는 길은 데크목 계단인데 좌측 아래를 보니 크기와 깊이에 놀란다
물이 흐르며 약한 부분은 부서져 쓸려내려가고 강한 부분만 남은 기묘한 형태의
송곳바위가 누군가의 조각작품처럼 느껴지며 아찔한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천길
낭떠러지속으로 흐르는 계곡수는 더욱 하얗게 보여 오삭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협곡 저 건너편은 북한땅이라고 한다.
무송현 송강하 어느 마을의 이야기
옛부터 이마을사람들은 6.7월이 기다려진다.
이때가 되면 마을앞 냇가에서는 원인도 알수없는 늑대. 산돼지.사슴등 온갖 동물들이
냉동이 된 동물들의 사체가 떠내려 오는데 주민들은 이 동물들을 건져 마을 잔치도 하고
남는것은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하는데 그 중에는 호랑이도 있었다고 한다.
1997년 금강 대협곡이 발견이 되고부터 그 원인을 찻을수가 있었다.
겨울이면 백두산 밀림지대내 먹이를 찻아 헤메던 온갖 동물들이 밀림지대 중앙을 6~70km를
가로지르는 이곳 금강 대협곡에 빠져버린것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날길이 없었고 협곡에서 헤메다 동사를 해버린뒤 6~7월이 다가오면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떠내려 온 것이었다.
볼면 볼수록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데 자연의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낱 미물중생에 불과한 인간들의 오만함을 이곳에 두고 가야겠다... 그 대신에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가야지
계속 이어지는 협곡
구름다리도 지나고...
낙타바위
계속되는 금강대협곡... 입이 절로 벌어진다
금강대협곡 끝나는 지점에서 베낭에 있는 포켓소주를 꺼내 일행들과 나눠 마시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가이드와 일부 일행들은 사라져버리고...
멋진 금강송 한 그루를 만나는데... 紅松王이란 팻말이 붙어있다
넘어져 있는 고사목 노거수도 관광상품화하는 왕서방의 상술은 참으로 대단하다
저런건 우리나라 국립공원 어디든지 지천으로 깔려있다
노랑매발톱
커다란 노거수 주위에는 행운을 비는 부적과 함께 열쇠들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금강대협곡 휴게소(12:00)
피톤치드 향을 내뿜는 우거진 숲사이를 걸어서...
참으로 좋다... 이 상쾌함
호젓한 길을 따라서 아침에 버스를 탔던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13:00)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이곳 날씨도 상당히 무덥다
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조선족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강원도 식당(13:20)
이곳에서 한식으로 점심을 먹는데 여행 이틀째이다보니 이제 어느정도 안면을
익힌탓에 같이 온 일행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션한 맥주 한잔으로 우의를 다진
다음에 다시 버스에 올라 송강하에서 이도백하에 있는 발마사지를 하러 간다
발마사지 가게(14:35)
이곳에서 원래 발마사지만 하기로 했는데 가이드의 농간(?)에 놀아놔서 요금을 더주고
전신마사지를 받는데 마사지사가 초보인지 영 맘에 들지도 않아 마사지를 한 것 같지도
않지만 어쩌랴... 내 복이 그것밖에 안되는 걸
이도백하(
二道白河) 거리의 모습10여년 왔을 때와 비교했을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된 느낌이며 도시 전체가 공사장이다이도백하란 "백두산천지에서 두갈래로 흘러내려오는 깨끗한 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는 연변자치구에 속해 있었지만 최근 동북공정때문인지 길림성으로 소속이 바뀌어 연변동포들의 수입원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이도백하는 백두산[白頭山, 중국명 長白山] 북쪽 비탈에 위치하여 백두산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현 아래 진(鎭)으로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松花江)상류의 이도백하(二道白河)강변에 있어 이런 지명이 붙었다. 진정부 소재지는 얼다오(二道)이다
.
삼림이 전체 면적의 94%에 달하며 삼림자원이 풍부하고 특히 장백낙엽송을 비롯한 경제적 가치가 높은 30여종의 수목이 자라며 광물자원으로는 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생긴, 구멍이 많고 가벼운 돌인 부석(浮石)이 풍부하다. 건축재료등으로 쓰이는 부석은 홍콩,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된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며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약 1km)인 백하(白河)마을과 함께 백두산 관광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장거리 버스와 열차가 오갈 뿐 아니라 저렴한 가격의 숙소나 식당이 많아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택시를 이용하거나 관광버스를 탈 수도 있어서, 백두산 관광 성수기인 6~9월에는
여행객들로 붐비며 마을 곳곳에서 보이는 미인송(美人松)도 이도백하의 명물이다.
미인송은 곁가지가 많지 않고 위로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다.
이도백하는 백두산의 도시로 백두산을 가려면 무조건 이 도시를 거쳐야 한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창빠이산)이라고도 하고, 그냥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도백하는 백하(白河)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두 '백하'라고하는데 하천이 너무 많다보니 순번을 부여해 투도(일도), 이도, 삼도…십팔도, 이십 몇 도까지 있다.백하는 이도백하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백두산의 모든 시내를 뜻하기도 한다.
발마사지를 마치고 건물 뒤를 돌아가니 우리나라 60년대의 5일장을 연상케하는
재래식 시장이 보이는데 마치 내 어렸을적 고향장에 온 것 같아 정겹기 그지없다
조선족인듯한 여인이 능숙한 한국말로 산삼이라고 하면서 사라고 나를 붙잡는다
백두산이 가까운 탓인지 노점에는 약초와 버섯종류들이 많이 보인다
야채와 과일을 파는 노점
젊은 여인은 파를 다듬는데 여념이 없다
중국의 노점에 특이한 점은 뭣이든지 저울로 달아서 판다는 점이다
고단해 보이기만 하는 조선족 할머니
고향을 등진것도 서러운데 삶까지 힘든 여정이니...
약초와 버섯 노점상
과일을 고르는 일행들
우리 일행중에 누군가가 수박 한통을 사는 바람에 맛있게 수박을 얻어 먹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이 보시공덕... 세세생생 복받을깁니다
리어카에 뭘 실고 중국말로 외쳐되는데 뭔 뜻인지도 뭔지도 모르겠다
중국 여인이 그걸 사먹는데 자세히 보니까 순두부 같은 것인데 파와 간장을 넣어서 먹는다
핸드백 노점상
시계 노점상
찐빵 노점상
재래식 시장을 두루두루 살펴본 다음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데 자세히 보니
일행중에서 참깨를 비롯한 농산물을 사기위해 가이드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는 모양이다
이곳은 이도백하 중심지인지 건물도 깨끗하고 화려하다
북한특산물이라고 이름 붙혀진 가게에서 일행들은 참깨를 비롯한 농산물을
사가지고 나오는데 난 여행하면서 쇼핑하는 건 딱 질색이라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본다
이도백하 중심지의 모습
일행들이 쇼핑하는 사이에 옆 가계에서 2위안(40원)짜리 아이스께끼 사서 먹는데
내 어렸을 적 시골에서 떨어진 고무신을 사먹던 아이스케끼다
다시 버스에 올라 호텔로 와서 여장을 푼 다음에 호텔에서 20여분 거리인 식당으로 향한다
이도백하 보석국제호텔(17:30)
보석국제 호텔 로비에 있는 포대화상
외부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다시 인연이 되는 사람끼리 호텔
야외에서 양꼬치로 고량주를 마시는데 나말고는 전부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오랫동안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하다가 보니 자꾸만 외톨이가 된 느낌인
범여를 끼어 주는것만 해도 고마운데 오늘 처음만난 닉이 스쿠버라는 분이 많은
사람들을 우끼는 바람에 한바탕 박장대소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후에
호텔로 돌아와 이틀째의 꿈같은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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