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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새해 첫날 鐵의 삼각지대 능선을 걷다

by 범여(梵如) 2015. 1. 2.

 

☞ 산행일자: 2015년 1월 1일

☞ 산행날씨: 맑음... 엄청난 추위에 약간의 강한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11.1km + 어프로치 2.3km  / 6시간 0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철원여고-주차장-금학산정-임도-벙커봉-매바위-임도-전망대-벙커봉-금학산-대소라치

                 보개산(보개지맥 분기점)-문바위-암릉길-삼거리-폐헬기장-구헬기장-안부-군교통호-고대산

                 군부대-마여울 아래-표범바위-캠핑장-고대산 주차장

소 재 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철원읍 /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 연천군 신서면

 

지난 한 해는 제 개인적으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참으로 힘든 한 해였다.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곤두박질 치는 불경기로 인하여 내가하는 인테리어 업종은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어찌 버텨왔나 싶을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용케도 버텨온 내가 가상스럽기까지 하다

이제 새해를 맞아 훌훌털고 다시 일어나고 싶다

2015년 乙未年 靑羊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각오를 다질 겸 지난해의 힘든 추억을

뒤돌아보며 반성도 할 겸 해서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평소 가보고 싶은 산을

가기위해 오후늦게 제적사찰에 들려 送舊迎新 법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

부처님에 예를 올리고 은사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들리니 보살님이 은사스님이 출타중이시란다

추운 날씨에 집에와서 베낭을 챙기는데 또 친구들이 사무실로 찾아오는 바람에 저녁을 겸한

술을 늦게까지하고 집에 왔는데 1주일내내 마신 술 때문에 걸을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친구들이 혼자 댕기지말고 낼 같이 간단하고 산행을 끝내고 스크린 골프나 치자고

하건만 썩 마음에 내키지도 않고 또 다른 친구는 청계산에 일출을 보러 가자고 하는데

1년에 4~50번 산에서 일출을 보는데 새삼스레 사람들 북적거리는데 보다는

혼자 호젓하게 산을 걷는게 나을까 싶으서 정초부터 나홀로 산행을 준비한다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동서울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구글어스

새벽 05시 20분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어제까지 포근했던 날씨가 엄청나게 춥다

정문에 근무하시는 경비원 아저씨가 너무 추운데 걱정스런 눈빛으로 잘다녀오라 인사를 한다.

동서울→ 동송행 버스(06:40)

선릉역에서 지하철 첫차를 타고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여 평소에 들리는 식당에서 든든하게

식사를 한 다음 가져온 보온병의 물로 커피 한잔을 하고 양치질까지 한 후에  탑승구로 향한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밤에 잠을 설친 탓에 잠에 푹빠졌다가 동송읍에 도착할 즈음에야 잠에서 깬다

정확하게 1시간55분만에 동송터미널에 도착하니 이곳은 엄청나게 춥다

영월지맥의 많은 눈에 질려 이곳으로 왔건만 이곳은 혹한에 질려 버린다

난생 처음 밟아본 철원군 동송읍 추워도 너무 춥다.

동송 터미널 버스 시간표

동송시외버스 공용터미널(08:35)

동송 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이곳은 엄청나게 춥고

일기예보에 철원지방이 자주 나오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온도계를 보니-16.5도이고 바람까지 불어대니 체감온도는 20도가 넘을것 같다

너무 추워 터미널 대합실에 들어가 완전무장을 하고 금학산으로 향한다

철원여중.고 정문(08:45)

동송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약 1km 가량 도로를 걸어니 철원여고 정문이 나온다

철원여중.고 정문 좌측을 끼고 걸어간다

금학산을 바라보면 걷는데 얼마나 추운지 코마개를 했는데 입김으로 인해 금방 얼어버린다

금학체육공원(09:00)

金鶴亭이 있는 금학체육공원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금학산 정상까지

급경사의 깔딱고개인데 이른 새벽에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난다.

이곳 철원은 워낙 춥다 보니 산에 올라온 사람이 몇명 없다... 근데 추워도 너무 촙다

임도(09:05)

임도에는 이정표가 있고 이곳부터 직진으로 올라가는 등로는 코가 땅에 닿을만큼 급경사다

임도에 서 있는 이정표

금학산 마애불(사진 - 펌)

우측으로 1.5km정도를 가면 동송 마애불(문화재 자료 제33호)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금학산 중턱에 소재한 마애불상을 조성한 곳에 3층석탑과 부도탑을 구축하려던 유물둘과

사지(寺地)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와당들이 남아 있으나 이곳의 사찰과 불상, 석탑

등의 조성 연대는 문헌상 남아있지 않아 조성 연대는 알 수 없다.

 

여래상인 마애불상은  큰 자연석(화강암)을 이용하여 음각된 것으로 온화한 미소와

옷자락을 잡은 법의(法衣)가 양쪽으로 퍼지는 듯한 조각미의 형태는 신라시대 기법이다

불상의 머리부분은 육신 체위에 다른 암석으로 머리 형태의 자연석을 좌측으로 약간

비스듬히 올려져 있으며 불상 전체 높이는 3m, 폭은 2.5m, 머리는 90cm의 큰 석불이다.

벙커봉(09:30)

우리나라 최북단 지역이라 그런지 금학산 전체가 하나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매바위(09:35)

매가 바위에 앉아 드 넓은 철원평야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같다고  붙혀진 지명이란다

매바위에서 바라본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강원도 철원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읍으로 관내에는 철원팔경의 하나인 도피안사와

고석정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후삼국 시절에 궁예가 태봉국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여지도서』 철원도호부에 동면()은 관음동리() · 감물소리() ·

도피리() · 공학리() 등 11개 리를, 송내면()은 장족리() ·

번포리() · 지동리() 등 5개 리를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해동지도』 등 대부분의 철원부지도에는 현 동남쪽에 동변면(), 송내면(),

고석정(),금학산() 등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송내면에 장평리() · 상중리() · 오야산리() 등

24개 동리가, 동변면에 감우소리() · 천통리() · 대위리 등 16개 리가 수록되어 있다.

본래 철원군의 동변면과 송내면 지역인데 1914년에 두 면을 병합하여 동변면의 '동()'자와

송내면의 '송()'자를 따서 동송면이라 하였다.

지금 주민들이 거주하는 동리 지명은 대부분이 1914년에 통합되어 형성되었다.

전망대(09:43)

데크목 계단(09:50)

금학정부터 계속해서 급경사의 오르막에다가 매서운 추위에 바람까지 불어오니

이곳의 체감온도는 적어도 영하 25도는 되는듯 싶다... 사진 한장 찍으려고 장갑을 벗는

순간에 손은 금새 굳어버리고 어제 베터리를 충전한 디지털카메라는 금새 작동이 안된다

할 수 없이 카메라의 베터리를 뽑아 핫팩에 같다대고 베낭에서 세컨드 카메라를 꺼낸다

그 덕분에 등로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예감상 이 멋진 금학산을 신년초부터 전세(?)내야 할 듯 싶다... ㅋㅋㅋ

철원은 6·25 전쟁 당시 남과 북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곳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책을 펼쳐 보면 짧은기간이지만 한 국가의 수도로서 한반도 통일을꿈꾸던 도시이기도 하였던 곳이었다.

철원은 수도로서의 역사가 짧았던 탓인지 고려라는 중세 국가가 조명 받기 전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다.

 

궁예(弓裔:?~918)가 905년에 신라 치세말기에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애꾸눈의 한 사내가 
새로운 나라인 태봉국을 건국했는데  그의 이름이 궁예였다.궁예는 당시 많은 민초들은 불안한 마음에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믿었던 미륵불을 자처했지만 실상 그가 죽을때는 자비로운 미륵이 아닌
폭정을 일삼는 군주로서 민초들의 기억에 남는다.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어디가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고,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신라 왕족의 후예였지만 어릴때 왕궁에서 쫓겨나 거지, 나뭇꾼 등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겨우 배고픔을 달랬고, 나중에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그것 역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늘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하나는 ‘삼국통일’ 또 하나는 ‘모두가 잘사는 미륵정토 건설’이었다

궁예(弓裔)라는 이름도‘활 잘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후예’ 라는 뜻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경기, 황해,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904년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911년엔 태봉(泰封)으로 다시 고친다. 마진은摩訶震檀’의 줄임말.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주역에는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고, 봉(封)은 봉토를 뜻한다. 결국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즉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느니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게 낫다”고 설파한 궁예.
그는 철원(896년·현재 구철원 동송)~송악(898년)에 이어 905년 다시 철원(이곳 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으며
철원에만 두번이나 도읍을 정한 것이다. 궁예가 뜻을 폈던 시기에 신라 천년왕국이 뿌리째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고 상이 끝나는 날 홀연히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철원 환도 이후 궁예는 907년 무렵 삼한 땅의 3분의 2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그 후 폭정을 일삼다가 918년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왕건에게 멸망하고 만다 철원을 내려다보며 옛 역사에 대한 만감이 교차한다
역사란 예나 지금이나 승자의 역사인가 보다... 퍠한 궁예는 모든 역사책에 악역으로만 등장하니...

등로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철원평야는 한반도의 뱃살부위와 같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이 곳을 차지하는 자는 배고픔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궁예가 이곳 철원에 도읍을 정한 것도 그런 이유였지만,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항시 전란이 끊이지 않은 곳 역시 이곳 철원땅이었다.

철원평야는 6.25동란으로 두 동강이 난다... 그 가운데로 한탄강이 흘러간다

‘큰 여울’이란 뜻을 가진 한탄강은 평강, 철원을 거쳐 연천에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전망대(10:05)

전망대에 올라서니 금학산 전위봉인 벙커봉과 궁예가 자기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기면서

태봉의 재건을 위해 소원을 빌었다는 칠성대 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보이지만 겨울철엔

급경사에다 길이 없어 칠성대로는 접급하기가 불가능하다

금학산 능선에서 바라본 북녘땅

금학산 아래 전망대에 올라서니 북녘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기야 이곳 철원땅은 해방이후 6.25동란 이전에는 3.8선 이북이라 북한땅이었다.

그러기에 이 지역에는 아직도 분단의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철원노동당사, 김일성이 건설하다가 못한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건설했다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이름 한자씩 명명된 승일교, 끊어진 경원선 철길 등등...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난 지가 올해로 만 70년 아직도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갈라진

국토 언제쯤 통일을 이뤄 북한땅의 백두대간 길을 걸어볼 수 있으려나... 범여의 맘이 착잡하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고대산이 보인다... 요즘 산꾼들이 자주찾는 고대산과 금학산을 잇는 고금 능선이다

다시한번 뒤돌아 본 철원군 동송읍의 모습

이곳 동송에 대한 범여의 아련한 추억이 되새겨 진다

벌써 10여년은 됐나 싶다... 불알친구 淸眼과 도봉산 망월사를

내려오다 만난 사람... 그가 동송 출신인데 잘 사는지 모르겠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그냥 우연히 산에서 만나 지나친 인연인데

아직도 많은 여운이 남으니...

종간바위(얼굴바위:10:13)

궁예의 책사였었던 종간이란 사람 얼굴을 닯았다고 해서 종간바위,

또는 얼굴바위, 정승바위, 책사바위라는 여러 지명으로 불리운다

금학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화장실이 있고, 벙커가 있는데 벙커위엔 헬기장이다

화장실을 지나 벙커위로 올라서니 화생방 댕댕이종 산꾼 범여를 반긴다

들판 저너머 낮으막한 화개산에는 유명한 도피안사(到彼岸寺)가 자리잡고 있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에 자리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당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에 있는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암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

사방으로 찾아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어 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철조불상이 피안(彼岸:열반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1898년 불탔으나 당시의 주지 월운이 신도 강대용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고,

1914년에는 주지 김의권에 의해서 신축·개수되었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철조불상과 대좌 및 석탑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뒤 1959년 이명재 소장이 15사단 장병과 함께 재건했으며, 현재는 군에서 파견된 군승과 주지 김상기 스님이

관리하고 있지만 휴전선 북쪽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법당과 요사채,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철원 도피안사 3층석탑(보물 제223호) 등이 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63호 - 사진 펌)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으로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으며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금학산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풍향계가 있는데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가늠할 수가 있다

능선 정상에 오르니 콘크리트로 만든 커다란 헬기장이 있고 우측 공터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 2명이 비박을 하고 난 뒤 텐트를 철수하고 있는데

이 추운 날씨에 대단한 용기와 젊음에 참으로 많은 부러움을 느낀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지장산

옛 문헌을 보면 이곳 금학산과 저 멀리 보이는 지장산과 잠시후에 가야할 고대산이

모두 보계산의 한 봉우리로 기록되고 있으며 금학산이 “보개산(寶蓋山) 내에서 최고봉”이라 하였다.

금학산, 고대산, 숙향봉, 지장산 등의 보개산의 한 봉우리로 친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많은 자취가 남아있다... 고려말 목은 이색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살았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 성계의 장남인 이 방우가 아버지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개국한데 대한 반감으로 이곳 보계산으로 들어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금학산(金鶴山:947m:10:30)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과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태가

학(鶴)의 막 내려앉는 형국이라 하여 금학산(金鶴山)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북으로는

숙향봉(淑香峰:473.2m)과 수정봉이 연결되어 있으며 남으로는 용정산(龍井山:672m)이 있다.

 

궁예(弓裔)가 철원을 도읍을 정할 당시 풍수지리의 大家였던 도선국사가 금학산을 진산(鎭山)으로

정하면 300년의 국운(國運)을 예언하였으나 궁예의 고집으로 고암산(高巖山)을 진산으로 정하자

국운이 18년밖에 못갔으며, 금학산의 수목(樹木)을 죽지 않았는데도 3년간 잎이 나지 않았으며

곰취는 써서 먹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는 산이다

 

『여지도서』 철원도호부에 "금학산()은 부 남쪽 15리에 있으며 수정산()에서 와서

고남산()의 주맥이 되었고 다시 우뚝 솟아 하늘에 뻗어 지방의 명산이 되었다.

산 위에 기우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동지도』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부의 남쪽 경계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다.

산의 형세가 학이 내려앉은 모양을 하고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 한다.

즉 오지리 방향으로 뻗어 내린 줄기는 학의 오른쪽 날개에, 이평리 방향의 줄기는 왼쪽 날개에

비유하며, 그 날개 품안에서 뻗어나온 지역인 초장족() · 이장족() 등의

마을은 학의 발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궁예가 송학으로부터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궁을 짓되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통치할 것이지만,고암산(高巖山)으로 정하면 국운이 25년 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1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고 전해온다.

산의 정상인 기봉(, 깃대봉)에는 남이장군의 용마가 나왔다는 용탕()과 기우제를 지내던 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마애석불 · 부도석재() 등이 남아 있다. 북쪽 산록에 위치한 칠성대()는 궁예가

소원을 빌던 곳이라고 전해오며 산세는 부드럽지만 산속으로 들어서면 곳곳에 매바위 · 용바위 ·

칠성바위 · 탱크바위 등 기암들과 암봉들이 많이 나타난다. '산자락 반은 단풍, 반은 진달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을 단풍과 봄 진달래꽃이 아름다운 곳이다.

철원 벌판에서 바라본 금학산은 평원에 삼각뿔처럼 우뚝 솟아서 보개산,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형세의 산이다.

북쪽 담터계곡이나 안양골이라면 몰라도 알을 품기에는 너무 우뚝하다. 고문헌에 산 이름은 쇠금 자 금(金)으로

쓰는데 1672년 임자년 이 산의 남쪽 관북대로를 따라 금강산 유람길에 이 산을 바라본 우암 송시열의 정적(政)

백호 윤휴는 풍악록(楓岳錄)에서 이 산을 금학산(琴鶴山)이라 적었다고 한다

 

금학산 정상에서 언제 또올까 싶어서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누구한테 사진 한장

찍어달라 부탁할 수 없어서 독립군(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가지고 다니는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기는 사이 손은 꽁꽁 얼어 버린다... 추위를 무릅쓰고 인증샷을

남긴 다음에 서둘러 보개산 방향으로 하산을 재촉한다

금학산 정상 아래에서 만난 이정표

해발 900m고지에 6사단에서 설치한 문구

이곳은 음지에다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적설량은 많지 않다

지난주 영월지맥 구간에서 많은 눈 때문에 개고생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치는데 ㅋㅋㅋ

금학산에서 대소라치 내려가는 길은 눈의 양도 그리많지 않지만 군장병들이 깔끔하게 눈을

치워놓아 급경사에 미끄럽긴 해도 생각보다 편하게 능선을 걷는다... 아들들아 고마우이

등로 좌측에는 정상 군부대로 군수물자를 올려 보내는 모노레일이 등로와 같이한다

데크목 계단을 내려서니...

맞은편엔 잠시후에 올라야 할 보개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군 교통호를 지나 군사도로로 내려서니 금학산 종합 안내도를 만나고...

대소라치 고개가 보이고 등산객 10여명이 금학산을 오르려고 산행을 준비한다

대소라치(大松亭峙:547m:11:20)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약천동에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윗대광골 넘어오는 고개로, 고개 아래에 있는 대송정(大松亭) 마을에 있는

큰 소나무로 인하여 ‘대(大)+솔(松)+치(峙)’의 합성어로 이루어져는데

앞 음절과의 연결과정에서 매개모음‘아’가 동반되어‘ㄹ’이 뒤로 옮겨오면서

대솔아치’로 불리웠는데 變音이 되어 ‘대소라치’ 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대소라치(大松亭) 마을은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백천조씨(白川趙氏)들이

산제사를 모시던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지명은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개 주위로는 군 탱크 훈련장이 보이고 대전차 방어진지와 넓은 도로가 있다.

오늘은 산행거리가 짧거니와 너무 추워서 잠깐만 서있어도 춥고 땀이라곤 한방울도 안난다.

대소라치 고개에서 금학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보개산으로 오르는 곳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군벙커 양지바른 곳에서 보온통에 가져온 물로 커피한잔을 타서 빵 한개와

밀감 2개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후 보개산으로 향한다

벙커 옆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선다

등로에 접어드니 안내 산악회의 시그널들이 산꾼을 반겨준다

금학산 올랐던 길과는 달리 등로는 완만하고 유순하여 편안한 걸음을 한다

등로에 올라 양지방향의 능선에는 눈이 없어 참으로 편안 걸음으로 걷는다

잠시 후에 헬기장에 도착하는데 스마트폰 앱에서 보개산이라 알려준다

개산(山:752m:12:00)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과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그리고 연천군 신서면에

걸쳐있는 보개산 보개봉의 동쪽방향으로는 금학산과 남쪽방향으로는

지장산으로 이어지는 보개지맥의 산줄기가 보이고있다.

 

금학산과 고대산은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준령급 산으로 DMZ와 청정지역 철원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금학산은 6·25 때 (평강을 중심으로 철원과 김화지역 일대를 아울러

이른바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로 불린 곳이며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데 요충지였다. 때문에 6·25 때 중공군과 북한군이 이곳 철원지역에

군사물자와 병력을 대거 투입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6·25때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 바꿔가며 선배 군인들에 고귀한 영혼들이 뭍힌곳이다

보개봉 헬기장

보개봉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에 눈이 조금 쌓여있고 그 흔한 정상석 하나없이

이정표에는 ‘헬기장 갈림길’이라 써있어 처음 온 산꾼들에겐 약간 혼란스러운 곳이다

동쪽으로는 조금전에 지나온 금학산이 멋진 모습으로 서있고 서북쪽으로는 가야할 고대산이,

남쪽으로는 수정산에서 시작하여 금학산을 거쳐 이곳에서 갈라져 지장산으로 향하는 보개지맥

능선이 멋진 모습으로 산꾼을 유혹하고, 동북쪽으론 숙향봉과 수정산 너머 북한의 산이 보인다

 

보개지맥 지도와 개념도

 백두대간이 금강산으로 뻗어 내리다가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꺾이면서 이어내리는데,

가지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현재 휴전선 북쪽의 백봉, 백암산을 거쳐서 장암산에서

서쪽으로 산줄기를 떨구어서 왕재봉, 발리봉을 지난후

(발리봉에서 수정산을 지나서 금학산 갈림길인 대소라치까지는 비무장지대와 군부대 등으로 출입금지 지대)

남쪽으로도 산줄기를 하나 분기한 수정산, 금학산, 보개봉, 보개산 지장봉, 화인봉, 북대성산, 오봉산 거쳐서

남봉고개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31.2km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보개봉 정상에서 바라본 보개산(지장산)의 모습

보개산은 일반인에게 등산이 허용된 남한 최북단의 산으로 ‘보개산’보다는 ‘지장산(地藏山)’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잘못 붙인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산 입구에 있는 음식점도 40년 원조를 강조하며 ‘지장산 막국수’ 등으로 표기한 것을

봐서는 ‘지장산’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은데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동국여지지도 등 모든 지리 관련 옛 문헌에는 ‘보개산’으로 표기돼 있다.

경기 연천군 신서면과 포천시 관인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최고봉인 지장봉이 마치

승려의 머리같이 생긴 바위를 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와 인근 지역에 지장신앙의 본산으로

불리는 석대암 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해방 이후 38선 이북인 이곳은 북한 땅. 보개산 일대의 사찰은 6·25전쟁 때까지 북한정권 치하에서

여러 차례 ‘법난’을 겪었다고 하며 6·25전쟁 때 이곳은 피아간 1만3000명의 생명을 앗아간 격전지였다.

석대암을 비롯한 암자들은 6·25전쟁 중에 대부분 불에 타거나 유실됐다.

다행히 지장보살상은 행방이 묘연하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지금의 심원사(철원군 동송읍 상노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육도중생(六道衆生·미혹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는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이다.

그런 면에서는 일제 때 붙여진 이름이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장보살에게 ‘통일의 원력’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장산’으로 부르는 것 역시 크게 꾸짖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개산의 ‘보개’ 역시 불보살의 머리를 장식하는 화려한 장엄으로 곧 원심원사가 불보살을 의미하게 된다.

고려시대에 대종불사를 통해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다는 영험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보개봉에서 바라본 고금능선

대동여지도에 보개산은 금학산과 수정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의 지도에서는

수정산과 보개산을 찾을 수 없고 다만 금학산만이 표시되어 있다.

이 보개산에는 심원사를 비롯하여 석대암, 지장암, 성주암 등의 사찰이 있었다.

특히 지장암은 목은시고(牧隱詩藁)에 보개산지장사(寶盖山地藏寺)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목은 이색이 고려말 사람임을 감안해 볼 때, 고려시대에는 지장암도 암자 규모가 아니라 사(寺)의

규모였지 않았나 추측하여 볼 수 있으며, 이 지장암은 신라 헌안왕(憲安王)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목은 이색은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와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인물로 특히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서 친명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그의 문하에는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목은이 언제 철원 보개산 지장사에 왔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시에 깊게 배어 있는 인간의 고뇌를 읽을 수 있으니 아마도 정치의 부침이 심했던 말년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遊山如啖蔗(유산여담자) 산에 노닐음은 맛좋은 음식 먹는 듯하니,
最愛入淨境(최애입정경) 정토의 경계에 들어감을 무엇보다 좋아해.
雲望共無心(운망공무심) 구름 바라보면 함께 무심해지고,
溪行獨携影(계행독휴영) 시내 거닐면 그림자만이 친구가 되는구나.
鍾魚林壑空(종어임학공) 숲 속 계곡에 종소리 목어소리 퍼져나가며,
殿宇松杉冷(전우송삼냉) 불전과 소나무 삼나무 차기만 하구나.
甚欲辦靑纏(심용판청전) 깊이 좋은 세상만을 얽으며 살고 싶어져,

臨風更三省(임풍경삼성) 바람을 쐬며 다시금 나를 돌아본다.


 <이색(李穡 : 1328 -1396) 보개산지장사(寶盖山地藏寺)>

강원도민일보 자료 인용

보개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고대산으로 향한다

암릉계곡 아래에서 능선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듯 차갑다

고대산 가는 길엔 멋진 암릉들의 요염한 자태는 계속되고...

힘들땐 쉬어가기 좋은 나무(?)

고대산 가는길의 양지바른 등로는 눈이 하나도 없다

多福한 신갈나무

群木一松

삼거리(12:39)

편안한 능선을 걸으니 휴게용 벤치를 만나고 삼거리란 이정표가 나온다

폐헬기장(12:40)

보개지맥 능선

지장산 너머로 2년전에 올랐던 종자산이 아련히 보인다

구헬기장 이정표(12:50)

구헬기장에서 바라본 잠시후에 가야할 고대산의 모습

구 헬기장에서 안부로 떨어졌다가 교통호를 따라서 고대산 정상으로 향한다

돌담으로 만든 군 교통호

군 교통호를 지나 데크목 계단을 올라 고대산 정상으로 향한다

고대산 정상 가는 길에서 바라본 백마고지 방면의 모습

백마고지전투(白馬高地戰鬪)

 

철원평야 뒤로 보이는 백마고지(해발395m)는 광활한 철원평야와 서울을 잇는 우리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국군과 중공군이벌인 최대의 적전지이며

세계 전사에 기록될 전투였다... 장융후이가 지휘하는 중공군 제 38군단의 6개 연대

45,000명, 각종 포55문으로 무장한 군사력으로 대공세를 감행하였다.

 

당시 우리 국군은 김종오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28,29,30연대의 2만명의 병력과 국군 포병대대, 전차중대,

미군 자주포병대대, 전차대대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1952년 10월 6일 저녁부터 10월 15일 오전까지 강원도 철원 서북방 백마고지(해발395m)에서

열흘 동안에 열두 차례에 걸쳐서 격렬하게 전개된 피 비린내 나는 공방전에서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낸 살육의 현장을 연출하면서 피아간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고지는

주인이 24번이나 바뀌는 아비규환의 최대 격전지였다.

결과는 우리 국군이 약 3,500명, 중공군이 약 14,000명의 사상자를 낸 유래없는 대 전투였다.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의 전력으로 백마사단이라는 부대명을 얻는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격렬했던 백마고지 전투는 피아간 포격에 의해 해발 395m봉의 백마고지는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하여 그

이름이 백마고지로 불리우게 되었다.

데크목 계단을 지나 고대산 정상에 오른다

오늘까지 해서 고대산을 4번째 오르는데 마지막 오른게 8년전이었는데

정상은 많이도 바뀌었다... 헬기장 바닥을 목재로 해놨는데 헬기 앉아도

괜찮은지 약간의 의문이 든다... 이곳 정상 역시 나홀로 전세를 냈다.

조금전에 등산객 소리가 들리기에 부지런히 올라왔건만 몇명의 등산객이

좌측 대광봉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바람의 세기가 강풍 수준이다

고대산(高臺山:832m:13:10)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과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쪽 철도 경원선의 최북단 역인 신틴리역 동북쪽에 있으며 정상에는 고대산의 최고봉인

고대봉이란 정상석과 넓은 헬기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상에서는 넓은 철원 평야가 한 눈에

보이고 북쪽으로는 백마고지, 능선 아래는 신탄리 역이 보인다

주변으로는 금학산, 지장봉, 보개봉, 북대산, 향로봉, 종자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휴전선 남쪽의 전략적 요충지여서 예전에 오를수 없는 산이였으나 문민정부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산이다

 

고대산(高臺山)의 유래는 "큰고래"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것은 신탄(薪炭)지명에서

연루된 것으로 보이며 "방고래"(땔나무를 사용하는 온돌방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고랑을 고래하고 함)를 이르는 것으로 고대산은 골이 깊고

높아 고대산 (高臺山)이라고 한다.

 

지형도에는 '높은 별자리와 같다'는 뜻과 의미가 담긴 곳이라 하여 고태(高台)라고도 표기하였다.

고대산은 옛부터 광범한 산록과 울창한 산림으로 말미암아 임산자원이 풍부할뿐만 아니라,

목재와 숯을 만드는데도 적합한 곳으로, 부락으로 형성된 주막집들이 있다하여 신탄막(薪炭幕)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웠으며, 실질적 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참숯이 유명했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또한, 1907년 11월 4일 의병진 150명과 임진강에서 의병들을 토벌하러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 20연대 8중대와 연천에서 격전한후, 신탄막에서 흩어지고 의병진 60명이 고대산에서 다시

일본군대와 치열하게 교전한 곳으로써 우리 선열들의 용맹스러운 민족정기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는 고대산 정상에서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서둘러 하산한다

고대산에서 신탄리로 하산하는 등산로는 3곳이다

난 오늘 3코스를 택한다... 이 구간은 거리는 가장 길긴해도(4km) 등로가

완만하고 부드러워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구간으로 하산을 결정한다

고대산 정상 유해발굴지역

이곳 고대산(832고지)은 6.25 전쟁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전초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와이오밍선(유엔군 친선 한계선)을 확보하기 위해1951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간

국군9사단 3개 연대가 중공군 제165사단에 맞서 싸워 적 923명 사살, 포로 26명, 기타 장비

수점을 노획하는 등 큰 성과를 얻었으나 국군 또한 전사 31명, 부상 127병의 피해가 발생하는 등

당시 한 치의 영토하도 더 확보하기 위해 혈전을 벌인 격전지로 국군장병들이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구국의 현장이다.

 

특히 이지역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무한책임을 확보하기 위해

2010년 9월에 "6.25전사자 발굴사업" 을 실시하여 당시 이곳에서 수습하지 못한 국군 유해 12구를 발굴하여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모실 수 있었다.

벙커봉(13:20)

군부대 갈림길(13:25)

봉우리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어 좌측으로 우회한다

적설량은 얼마되지 않으나 눈 아래에 빙판이라 상당히 미끄럽다

목재계단(13:45)

마여울 아래 이정표(13:55)

계속 아래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우측으로 표범바위봉 (410m)이 있고...

능선에 올랐다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표범폭포 갈림길이 나온다

표범바위 이정표에서 데크목 계단으로 50m 정도가면 표범바위봉 아래 표범폭포가 있다

표범바위봉의 모습

표범폭포 안내판

표범폭포(14:05)

표범폭포를 보고난 뒤 다시 등로로 복귀하여 내려가는데 고대산 등로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나는데 아이젠도 착용 안하고 스틱도 없이 걸어가는게 불안해 보인다

용기인지 만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치면 당신만 손해여...

고대산 약수터(14:15)

계곡을 지나 목재 다리를 건너니...

갈림길(14:20)

우측 캠핑장으로 내려선다

예전에 없던 캠핑장이 생겼고 예전의 고대산 주차장도 캠핑촌으로 변해 버렸다

고대산 주차장(14:30)

철길옆 주막집(14:40)

고대산 주차장에서 열차를 타기 위해서 역으로 향하는데 열차가 막 출발해 버린다

다음 열차를 타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대합실에서 벌벌 떨일도 없고 해서

철길옆 주막집에 들려서 점심겸 해서 막걸리 2병에 두부를 시켰는데 마침 이 집에

정초라서 친척들이 찾아온 모양이라 옥수수 부침개를 하는데 손님아라곤 달랑 나혼자다

자기들이 구워먹던 커다란 부침개를 하나를 주는데 배가 고팠던 탓인지 하도 맛있게

먹으니까 또 하나를 더준다... 맛있게 배불리 먹고 난로가에서 15분정도 졸다가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내고 신탄리역으로 향한다

(신탄리역에서 동두천가는 열차는 매 시간 38분에 출발)

오늘 산행구간의 기록

신탄리역(15:30)

신탄리역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 소재한 역으로 최근에 생긴 DMZ 안보관광을

위해 생긴 백마고지역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경원선의 한 역이다.

한국전쟁 이전에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던 기차는 이젠 신탄리역에서 회차한다.

신탄리역에서 옛 철원역을 지나 휴전선 너머 평강 사이에는 철길이 없어진 상태이며. 북한에서는

평강-세포-고산-통지원-원산 등을 지나 고원까지 이어지는 경원선을 '강원선'으로 바꿔 부른지 오래다.

현재 신탄리역 근처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경원선 철도의 남쪽 중단점을 알리는 푯말이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신탄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동두천역까지 오는데 열차요금이 1,000원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산꾼 범여에게는 참으로 착한 가격이다

열차의 좌석은 많이 비어있고 동두천 오는 동안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동두천역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집에오니 식구들은 아무도 없고 혼자서 떡라면 끓여서 소주 한병

마신 다음에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