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12월 07일
☞ 산행날씨: 흐린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4km / 7시간 45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양재동 화물터미널-밤나무골-굴바위산-개나리골 입구-바람골-옥녀봉-원터골 갈림길-산불감시카메라
헬기장-돌문바위-특전사 위령탑-매바위-매봉-혈읍재-망경대-금정수-석기봉-헬기장-헬기장
절골삼거리-헬기장-이수봉-군부대-금토동 갈림길-봉오재-옛골-신구대학습림-산불감시초소
새쟁이마을 갈림길-청룡마을 갈림길-목동산-인능산-체육시설-신촌마을 갈림길-헌인가구단지 헌능I.C-푸르지오 아파트-헌인능 철조망-실로암 약수터-성지약수터-대모산-헬기장
교통감시초소-대천약수터-구룡마을 갈림길-구룡산-구룡터널-능인선원 갈림길-283봉-KOICA-버스정류장☞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강남구 / 과천시 / 의왕시 / 성남시 수정구
난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예전엔 너무나 완벽할 정도로 메모하는 습관이 이젠 모든게 귀찮을 정도로
단순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뭘 잘놓치는
편이지만 그래도 그 버릇을 바꾸고 싶지않을 정도로 단순하게 살고싶다
그러다가 이번주에 해프닝이 벌어진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모임이 이번주 일욜에 있는데 그걸 깜빡한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인테리어를 하는 17명이 이 모임을 시작한 지가 올해로
18년째인데 창립 후 여태껏 매달 2주째 월욜에 모임을 한 지라 별 신경을
쓰지않고 습관처럼 월욜이려니 하고 낼(12월 7일) 아침 일찍 영월지맥 2구간을
가기 위해 베낭을 꾸려놓고 자료를 준비하고 있는데 모임의 총무의 전화를 받는다
‘형님 내일 모임있는거 알죠?’ 하는게 아닌가... ‘야! 이 사람아 자다가 봉창 두드리나’ 하니까
‘내 그럴줄 알았다’ 하면서 카톡과 문자 메세지를 한번 보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12월 2주 일욜에 대학로에 모여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공연을 본다고
되어 있는게 아닌가... 부부 동반모임이라 마눌과 같이 다니는 건 하도 안다녀
어색하지만 모임의 분위기를 깨지않기 위해서 마눌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까
마눌에게 선약이 있다고 하면서 一言之下에 거절을 당하기에 총무에게 혼자가기
뭣해 불참하겠노라고 하니까... 내가 형수님한테 전화할 테니 무조건 참석하란다
허겁지겁 영월가는 걸 포기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갈데도 없고 하여 우리집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인 강남 4산(청계산, 인능산, 대모산, 구룡산)을 걷기로 하고
집에서 간단하게 우유 한잔 마시고, 물 한통과 밀감 3알에 바람막이 옷만 넣고 길을 나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서인협(서울 인테리어 협의회) 총무한테서 받은 카톡
사실 카톡과 문자 같은데 별 관심이 없다... 가급적 단순하게 살고시포서...
양재동 화물터미널(06:30)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집에서 버스를 타고 양재역에 도착하여 다시 안양가는
917번 버스를 타고 양재동 화물터미널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날씨는 꽤나 춥다
버스 정류장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건널목을 건너서 밤나무골(서울추모공원) 방향으로 간다양곡도매시장을 지나 옥션과 G-market 물류 창고를 지나 서울추모공원 입구에서 우측으로 들어선다
산행을 시작하다 (06:35)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1시간 가까이 있어야지만 이곳에서 스틱을 펴고 워밍업을 한
다음에 헤드렌턴을 켜고나무 계단을 따라서 산으로 접어드는데 생각보다도 상당히 춥다
이곳 들머리의 지명이 밤나무골(栗峴)인데 서울추모공원 들어서면서 지형이 이상해졌다
예전엔 이곳에서 밤을 많이 줍기도 한 곳이며, 청계산 기슭의 토양은 사질토양으로 밤나무가 잘 자란단다.
과천의 옛 이름이 율목현(栗木縣)인데, 이는 밤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행시작 20분정도 걸렸나... 손이 시려 미치겠는데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누가 걸어 놨을까?... 돌 대장은 백령도로 유배(?) 갔어 아닐테고 나의 代父(?)인 도강재 대장은
연락두절이라 아닐테고... 알송, 참이슬 아그들도 아닐테고... 혹 레인저 회장님이 아닐까.
굴바위산(06:55)
능선 삼거리에 도착하니 이정표(← 옥녀봉1600m → 화물터미널 1000m 서울 SEOCHO 24)가
나오는데 스마트폰 트랭글 앱에서 ‘굴바위산’이라고 하는데 아마 능선 윗쪽에 있는 봉우리인
모양인데 어둠속에 정상에 올라가는 걸 포기하고 옥녀봉으로 향한다
주암1동 갈림길(06:55)
이정표 옆에 어둠속에 무덤 1기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과천시 주암1동
장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이정표에는 ‘추사박물관길→’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개나리골 약수터 갈림길
주암1동 갈림길에서 1분정도 지나니 개나리골 갈림길이 나온다
개나리골 약수는 300여년전의 오랜 옛날부터 이용되어온 약수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먼 옛날 아랫마을에 김서방이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하루는 개나리골의
밭을 보러 왔다가 목이 말라 샘물을 찾던중 이곳에 이르러 샘물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하고 물을 마셔보니,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얼음처럼 차겁고 물맛이 좋아 그후 계속 떠다 마셧는데 곧 폐병이 씻은듯이 나은지라
이 소문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이 골짜기의 지명을 따서 개나리골 약수터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물맛이 좋고 폐결핵등 기관지 계통 질병에 효험이 있다하여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시흥, 성남,의정부등 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이곳 약수는 약알칼리성으로 미네랄이 풍부하고 물이 무거우며, 물맛이 좋아 이용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물을 떠다가 2주이상 보관하여도 물맛이 변치 않는다고 한다.
이곳 약수는 1980년 수질검사가 시작된 이래 아직 한번도 불합격 판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주 좋은 약수물이다
입맞춤길(07:00)
‘입맞춤길→’ 등로에서 우측으로 10여m 떨어진 곳으로 가보니 돌탑 3개를 어둠속에 만난다
입맞춤길이란 곳에 오니 돌탑 3개와 벤치 2개가 있고 ‘입맞춤길’이라는데
이게 뭔 해괴망칙한 발상인가... 지자체(서초구)에서 풍기문란을 조장하다니...
바람골(07:03)
이 곳은 서초구 원지동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신원리였으나
1963년에 서울에 편입되면서 신원동과 분리되었으며, 바람골, 양수리, 원터골이 원지동으로 되었다
원지동은 현재 서초구의 남쪽 끝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계곡마을인데, 탄천의 지류인 여의천이 흐르고 있다.
이 개천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세원(신원동)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청계산 입구 에 조그만 마을
바람굴이 있는데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옥녀봉 정상에 올랐건만 아직도 어둠은 가시지 않고 있다
평소에 열심히 막걸리 팔던 친구도 아직 점빵문도 열지 않았다
하긴 이곳은 원터골에 비해 인적이 뜸하니 추운데 일찍 나와봐야 뭐 하겠노
화물 터미널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개미새끼 한마리 구경을 못했으니...
옥녀봉(玉女峰:375m:07:25)
서울 서초구 원지동과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의 경계에 있는 청계산의 한 봉우리로서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맞은편의 관악산과 북쪽으로 우면산이 한 눈에 보인다
옥녀봉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漢詩 무이구곡가 중 옥녀봉의 영향을 받아서 지명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 최고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만년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옛 문서에는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판서 김노경(金魯敬)의 묘터가 있던 곳이 이곳 옥녀봉이란다.
날이 밝아오면서 맞은편의 관악산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잠시후에 가야할 매봉과 그 너머 만경대도 보이기 시작한다.
옥녀봉을 내려와 넓은 등로 가운데 멋진 소나무를 만나는데 오랫만인지 무척이나 반갑다
원터골 갈림길(07:40)
조선시대에 원터가 있었던 곳으로 원지(院趾)라는 마을이 있어서 유래가 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먹고 잘곳을 마련해 주기위해 교통의 요지에
일종의 여관의 역할을 하는 원(院)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에는 한강변 잠원나루에서 말죽거리
지나 판교 이남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위해 큰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말을타고 원할하게 이동하기 위한 ‘역(驛)’과 사람의 이동에 도움을 주기위한
‘원(院)’이 있었는데 한양(서울)의 대표적인 역으로는 청파역과 노원역, 원으로는 이태원,
홍제원, 보제원, 진관원 등이 있었다.
이 아래에 있는 서초구 원지동 원터마을도 그러한 院이 있었던 자리로 1970년대까지도
원의 형태를 나타내는 석축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 아웃도어 시장의 바로미터가 될 정도로 커다란 등산용품샵이 많다.
원터골 앞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는 미륵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원터골 미륵당(미륵석불:彌勒石佛: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3호)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미래에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하며 미륵당의 미륵불(彌勒佛)은 원터마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옛날부터 영험한
능력이 있어 매년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한다
미륵석불은 약 2m 정도의 불상으로 모셔져 있는데 고려말, 조선초의 토속적인 석불 형태이며
불상은 커다란 원통 형태의 모습으로 얼굴이 몸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있고 특히 편평하고
넓은 얼굴에 입술이 삐죽 나와있어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호분이 뚜껍게 칠해져 있으며 흰색 두건과 옷을 걸치고 있고, 그 위에 붉은색 천으로
어깨를 감싸고 있다.
몸이 완전히 가려져 있으나 옷 안쪽을 살펴보면 옷주름이 투박하고 치졸하게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매우 큼직한데 오른손은 배에 대어있고 왼손은 그 위에 두어 둥근 형태의 기물을
들고 있으며 기물 안에는 붉게 채색된 정병이 놓여있다.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이곳에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휘파람 소리가 들려 기도하는
사람의 길흉화복을 계시했다고 한다...이런한 영험함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일본 관리들이
이 석불을 밀반출 하려다가 실패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서 신령스러움을 믿고 사람들이 계속 밀려오자 1926년에 혹세무민(惑世誣民) 을
예방한다는 구실아래 일본 경찰이 배꼽을 쪼아내자 그 이후로 영험함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곳부터 청계산 매봉 아래까지 1,400개가 넘는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난 이 코스로는 잘 다니지 않는다
참나리 군락지(07:45)
조금전에 지나온 옥녀봉의 모습
등로에서 만난 청계산 안내판
청계산의 유래도 알아보고...
산불감시 카메라(07:55)
이곳에서 좌측 급경사로 내려서면 원터골과 청계골로 가는 길이 나온다
갈림길 위에는 넓은 공터에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데크목 광장(08:00)
예전에 헬기장이었는데 지금은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넓은 광장이 되어 버렸고
가운데는 삼각점(△수원 404 / 768 건설부)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상적동 방향의 옛골로 내려서는데 계단이 없는 이 구간을 내가 자주 이용한다
헬기장에 있는 삼각점
헬기장 정상 이정표
돌문바위(08:05)
‘청계산의 정기(精氣)를 듬뿍 받아가셔요’라는 팻말이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스님이 ‘默言 精進中’이란 플랑카드를 걸어놓고 녹음기에는 천수경이 들려온다
이른 아침에 엄청 추운 날씨에... 하긴 이것도 수행의 한 방편이겠지
이 스님은 예전엔 원터골 입구에서 탁발을 하였는데 이곳까지 올라 오셨구나.
기(氣)란 무엇인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인 기운을 말한다.
기(氣)는 생활 활동의 힘이요, 원기요, 정기, 생기, 기력을 말한다
저 돌문바위 밑에 넓은 너럭바위가 있는곳이 예전에 나의 아지트였는데...
예전에 내가 부도를 맞아 힘든 시기에 이곳에 올라 막걸리 한병 마시고 저 아래
너럭바위 위에 누워서 온갖 생각을 다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힘들게 보낸 생각이
아련 하건만... 요즘 맥길에 미쳐 몇년을 外道(?)한 사이에 스님에게 아지트를 뺏겨 버렸으니...
돌문바위를 지나 넓은 공터로 내려오면 우측 50m에 특전용사 충혼비가 나온다
특전용사 충혼비(08:07)
세계최강 대한민국 특전사의 특전용사로 태어나기 위해서피나는 훈련을 받던 중 불의의 기상조건으로 그 꿈을 채
피우지도 못한채 산화한 공수기본 250기.
이 비는 1982년 특전사(공수부대) 교육생 44명과 교관, 그리고 행정 군인 몇명... 총 53명이 낙하산 하강 연습을 위하여 수송기 C-123 를 타고 성남비행장에 착륙을 준비하던 중 심한 안개에 휘말려 비행기가 청계산에 추락하였던 엄청난 사고였다. 이 사고로 53명의 젊음이 국가의 가슴에 피끓는 아픔을 묻었다. (충혼비 안내문에서)
매바위(578m:08:10)
매바위에서 바라본 이수봉과 만경대
청계산의 최고봉 망경대(618m)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천지개벽을 할 때 큰 비로 홍수가 났는데, 관악산 꼭대기를 빼고는 모두 물에 잠겨 배를 탔다.
당시 관악산 꼭대기인 영주대(연주대)에 배를 대고 돌을 모아 그 돌로 청계산 정상을 만들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경승을 감상할 만한 터라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 불렀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 충신 조견이 이성계를 피해 이곳에서 막(幕)을 치고 지냈는데,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래 망경대(望京臺)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망경대’와 관련된 색다른 민담도 전해져 내려온다.
예부터 청계산 망경대 아래 용의 허리 되는 곳에 묘를 쓰면 경기도 일대에 비가 오지 않는단다.
한번은 일대가 가물어 주민들이 그곳에 가봤더니, 막계리에 살던 권씨네가 그곳에 묘를 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묘를 파헤친 것은 물론 권씨네는 몰매를 맞고 그 집이 부서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매바위에서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눈이라도 내릴듯한
찌뿌등한 날씨가 모든 걸 다 회색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저 멀리 1988년도에 신도시를 만들면서 급조된 분당 신도시가 희미하게 보인다
한참 부동산 붐이 불 때에는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천당아래 분당이란 말도 생겼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인능산, 대모산, 구룡산도 보이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니 오늘 어둠속에 걸었던 굴바위산과 옥녀봉, 그 너머로 우면산도 보인다
매바위에 잠시 서 있는 사이에 손가락이 빠질듯이 손이 시려 서둘러 매봉으로 향한다
청계산 매봉(鷹峰:582.5m:08:13)
서울 서초구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과천시에 걸쳐 있는 봉우리로 청계산에서 높이는
망경대보다 낮지만 망경대는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청계산 주봉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매처럼 보인다고 해서 매봉(鷹峰)이라고 한다.
청계산의 유래를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 청계산(淸溪山)이라 되어 있고,
관천현 산천조에는 청계산이라 쓰고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라 한다고 써있다.
과천읍지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다.
좌청룡 우백호의 개념으로 오른편에 있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 부르고,
왼편에 있는 청계산을 청룡산이라 불렀을 것이다.
17세기에 세워진 청계사 사적비 등 여러 곳에 청룡산이라 되어 있고,
택리지 산경표 대동여지도 등에는 청계산(靑谿山)이라 되어 있다 한다.
맑을 청(淸)자가 아니라 푸를 청(靑)자를 썼고, 시내라는 뜻이 같기는
하지만 골 곡(谷)자가 붙은 계(谿)자를 쓴 것이다. 옛날 청룡이
이 산의 허리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가서 청룡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과천에 있는 막계동은 맑은 개울이 있다 해서 '맑은 개울', '맑은 계곡'이 '막개'가 되고
한자로 '청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또는 시내가 있는 산' 이라는 뜻의
청계산의 이름이 예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계산은 또 청제산(靑帝山), 청청산(靑靑山), 청한산(靑漢山)으로 쓰인 기록도 있다 한다.
맑고 깨끗한 곳을 선비들은 즐겨 찾는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분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조선조 연산군 때 일두 정여창도 이 산자락에 숨어 살며 무오사화의 고비 때만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만년을 지냈다고 한다.매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서둘러 협읍재로 향한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막걸리 장사 창수氏를 만난다
매봉 아래 막걸리 장사 창수氏
이 친구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행님아! 와 오랫만이고’ 하면서 반가움을 나타낸다.
‘추운데 뭐하로 일찍 나왔노’ 하니까 ‘먹고 살라면 우짜노’ 하는데 니야 토끼같은 새끼가 있나
여우 아니 호랭이 같은 마눌이 있나... 혼자 사는 넘이 뭔 걱정이고 하니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그래도 우짜노 하면서 프로 정신을 나타낸다
이 친구를 안 지는 참으로 오래됐다... 고향이 서로 비슷하고(경남 합천군 초계면)
나이가 비슷한 연배이다보니 친하게 지냈지만 그 친구는 내 이름도 성도 모른다
그냥 얼굴만 알고... 나보고 항시 형님이라 부르는 사이다
오랫만에 와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니 속이 짜리하다
자기가 아침 먹을려고 오뎅을 넣고 끓인 라면을 막걸리 잔에 담아 주기에
막걸리 한잔을 더 마시고 다시 혈읍재로 향한다
창수氏 막걸리 가계(?)에서 바라본 만경대혈읍재(血泣峙:08:30)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과 과천 서울 대공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역사적 질곡이 많은 고개이다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인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이 성리학적 이상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 은거지인 금정수 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통분해서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협읍재라 명명하였다
선생은 망경대 아래 금정수(金井水)에서 은거하다 결국 연산군의 무호사화에 연루되어
스승 김종직, 벗 김굉필과 함께 함경도 종성땅으로 유배 후 사사되었고,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시신이 찢기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혈읍재는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미끄러운 눈길에 올라가기 편하다
협읍재에서 만경대 오르는 길은 이곳이 청계산에서 가장 높은 곳일 뿐 아니라 음지라
항시 눈이 쌓여있고 얼어 있어서 청계산에서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다
이곳은 북한산 염초봉을 연상케 할 정도로 청계산에서 헬기가 떳다하면 절반정도는 이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엔 좌측 군부대(미군부대)으론 등로가 없었는데 지금은 새로 등로가 생겼다
엊그제 내린 눈으로 인에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망경대(望京臺:618m:08:37)성남시 수정구와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청계산에서 가장 높으며
정상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주봉 역할을 못하고 있다.
청계산의 주봉 망경대(望京臺)의 옛 이름은 하늘 아래 만 가지의 경승을 감상할 만한
터라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는데 그러다가 고려 유신들이 맥수지탄(麥秀之嘆)하면서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여 망경대(望京臺)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망경봉이였는데 망경대로 이름이 바뀐 것은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 등고려 유신들이
이 바위봉우리에서 망한 고려의 서울(개성)을 바라보며 그리워한 터라 해서 정여창이 고쳐 불렀다 한다.
망경대 정상에서 바라보니 과천과 평촌, 산본 그 너머로 수리산이 아련히 보인다
이른 아침에다가 날씨마저 춥고, 등로가 얼어있는 탓인지 개미새끼 한마리 없어서
오랫만에 만경대를 전세(?)내어 홀로 호젓함을 맛보는 여유를 즐긴 다음에 조심스레
암릉 구간을 내려서는데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망경대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대공원
현재 청계산 아래엔 동물원이 생겨 온갖 동물이 있지만, 청계산은 예로부터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짐승이 많아 ‘왕의 사냥터’로 유명했다. 단종은 청계산에서 두 번 사냥했고, 세조‧성종은
청계산에 와서 주로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고 한다. ‘세조실록’에 보면 ‘짐승 잡은 것이 많았다’
‘새를 잡은 것이 많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들이 잡은 동물의 종류로는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등이 있다.
연산군은 청계산에서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즐긴 대표적인 왕이었다.
1506년(중종 1년) 경기 관찰사 윤금손이 “청계산 기슭에 나무가 빽빽해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나무를 베어 소통시키소서”라고 아뢰니 왕이 그리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30세의 송유진이란 자가 속리산에서 나와 도적의 무리를 모아 청계산에서 주로 머물렀다.
당시 그를 따르는 무리는 무려 2000여 명에 달했다. 서울의 서얼 출신이었던 송유진은 자칭 의병대장이라 칭하며
“나라에서 소인들만 등용한다” “어진 수령은 쫓겨나고 무능력한 사람이 등용된다”며 역모를 꾀했으나
송유진을 포함해 주도자 8명(오원종, 김천수, 유춘복, 김언상, 송만복, 이추, 김영)은 모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반면 청계산은 고려 충신 조윤이나 정여창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충신과 대학자가 머물던 ‘은둔과 지조의 땅’이기도 했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말년을 지냈다.
군부대 때문에 만경대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우회하여 내려서니 석기봉이 보인다
군부대의 낡은 철조망을 따라가다 우측으로 꺽어져 정여창 선생이 은거했다는 금정수(金井水)로 향한다
금정수(金井水:592m:08:45)
만경대와 석기봉 사이의 암릉 아래에 있는 샘으로 군부대를 따라 난
등로를 가면 금정수를 만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금정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금정(金井)이란 금빛 우물이란 뜻으로, 바위틈에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질 때
그 물빛이 마치 금빛 같아서 금정수라 이름 지었다. 정여창(鄭汝昌)이 참형을 당한 뒤
금정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가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복권(復權)된 후 다시 황금빛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금정수는 하늘 아래 있다 하여 하늘샘이라고도 한다.
마왕굴샘, 오막난이굴샘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에 맥(貘: 짐승이름,
표범의 딴 이름, 북방민족)이라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떼를 지어 이 굴로 들어갔다고 해
오막난이굴로 불린 것에 유래한다
마왕굴은 마왕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나 내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금정수에서 석기봉 오르는 길은 암릉구간에다 눈이 쌓여 상당히 미끄럽다
그런데다 이곳 등로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로프가 있어 다행이다
석기봉(石基峰:608m:08:50)
청계산 봉우리중에 2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망경대와 마주보고 있다.
석기봉의 유래는 망경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 의해 영문낙서가 심해지자
향토사학자들이 석기봉(石基峰)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좀 명분이 어색하다.
청계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이곳이지만 오늘은 추워서 오르지 않고 헬기장으로 향한다
석기봉 헬기장(08:53)
석기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주변의 산그리메
청계산 국사봉, 그너머로 백운산, 수원의 광교산 우측으론 수리산과 모락산도
보이지만 잔뜩 찌푸린 날씨로 인하여 가시거리가 그리 좋지 않음이 아쉽기만 하다
두번째 헬기장(09:00)
절고개(寺峴:09:03)
헬기장에서 부드러운 계단을 따라 3분정도 오르니 절고개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고개 우측 아래에 청계사라는 절이 있어서 절고개라 부른다
난 좌측의 이수봉으로 향하는데 여기에 있는 막걸리집도 아직 문이 닫혀있다
이곳은 관악지맥 능선이기도 한 곳이다
절고개 정상 이정표
청계사 와불(사진 - 펌)
청계사는 동국여지승람이나 읍지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봉은본말사지 청계사 편에 절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원통사지(圓通寺址): 절 서쪽 5정(550m) 쯤에 있는데 석축이 남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에 의왕문화원에서 수원대에 이곳 원통사지에 대한 학술조사를 의뢰하여
문헌과 명문 기와편을 찾아내는 의미 있는 조사연구가 이루어졌고 아울러 학술대회도 열렸다.
그 결과는 세종대왕 비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가 발원해 중창한 조선왕실 원찰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조선 초 신미(信眉)대사의 동생인 김수온(金守溫)의 문집 식우집에 소헌왕후가 발원해 중창하고,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이 크게 중창한 사실이 ‘원통암중창기’(圓通菴重創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중창기에 따르면 원통사(당시 원통암)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홍희(洪熙) 을사(乙巳)년,
즉 1425년(세종 7년)에 한 도인(道人)이 암자를 중건하려고 서울로 와 시주를 구하던 중에
내전에서 알게 되어 소헌왕후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내탕금을 출연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업을 주관할 사람으로 승려 해당(海幢)을 대표로 뽑았다 한다.
소헌왕후 사후에는 영응대군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 해서
용문사 주지 출신인 대선사(大禪師) 계안(戒眼)을 초빙해 사찰 면모를 대대적으로 일신해
1462년(세조 8) 음력 8월에 중창 낙성식을 기념한 대규모 법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왕조가 들어서자 거지같은 차림에 초라한 선비가 망경대에 오른후에
만경(萬京)이 망경(望京)으로 바뀌었으니 그가 바로 고려말엽의 충신 조견(趙遣:본명:趙胤)이었다.
조견은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아우로 이색, 길재, 원천석 등과 함께 고려를 빛내
명유(名儒)이자 충신이었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황급히
두류산(頭流山: 지금의 지리산)으로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호조전서 교지와 개국공신
2등으로 평안군을 봉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이를 거절하고 “송산에서 고사리 캐먹는 것이 소원이요
성인(임금)의 신하되는 걸 원치 않는다” 하면서 이름을 조윤에서 조견으로 자를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나라가 망했는데 구차하게 목숨만 살아있으니 개와 같다하여 견으로 고치고 개도 주인을 연모하고
의리를 쫒는다고 해서 자를 종견(從犬)으로 고친 것이다.
그후 그는 두류산에서 청계산으로 거쳐를 옮겼고 이곳은 증조부인 조인규가 중창한 청계사가 있고
영정을 모셔둔 영당이기도 하다.
이 청계산 산정에 올라 송경(松京)을 보고 통곡하므로 그후부터 사람들은 만경대(萬京臺)를
망경대(望京臺)라 불렀다고 한다.
조견이 청계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 이성계는 친히 청계산을 찾아 그에게 조선왕조에
들어와 같이 일하기를 권했으나 멀리 종경(終境: 땅의 경계가 끝나는 먼지 점)만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않자, 조견의 마음이 금석(金石)같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가 울던 자리에
초막을 지어주었으나 이를 마다한 조견은 곧 청계산을 떠났다고 하며 바로 초막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의 망경대라고 한다.
절고개 능선에서 바라본 만경대
이곳 능선에는 조견 선생과 만경대의 관한 이정표가 있다
려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이었던 송산 조견(1351~1425)선생은 유년에 출가하여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나이 30이 넘어 환속하여 승직(僧織)경력으로 인하여
좌윤(左尹)에 서용되었으며, 고려말에는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두류산(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을 견으로 자를 종견이라 바꾸었고 조선조 태조가 선생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주를
아껴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은거하여 망경대에 올라 고려 송도를
바라보고 통곡하며 일생을 마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헬기장(09:05)
넓은 헬기장 데크목 평상위에는 젊은 친구가 비박을 하고 있는데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이수봉(貳壽峰:545m:09:12)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과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상적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조선조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 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무오사화는 어떤 사화(士禍)이며 정여창 선생에 대해 알아보면...
조선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찬위(簒位)할 때 이를 도와 막강한 세력을 잡은 파에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강희맹 등 훈구파(勳舊派)가 있었다.
이에 맞서던 파로 전원에 묻혀 유학을 공부하면서 도학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던
사림파(士林派)가 있었는데 고려의 유신 길재의 제자로 영남 유학의 사종 김종직과 김굉필,
정여창, 조위, 김일손, 유호인 등이다.
이 두 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사림파는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였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며 앙앙불락하였다.
조선 연산군 4년에 훈구파 유자광이 성종실록에 실린 김종직이 쓴 사초의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트집 잡아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이 글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은근히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은 평시에 선왕인 성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림파를 좋지 않게 보던 참이라,
이는 김종직( 金宗直)이 선동한 것이라는 훈구파의 말에 격분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이에 연루되어 그의 문하 정여창,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배 후 사사하였다.
이것이 4대 사화의 최초인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이수봉 정상 이정표
이수봉에서 우측으로 가면 국사봉으로 통하는 관악지맥 능선이자
흔히들 청.광 종주(청계산, 바라산, 우담산, 백운산, 광교산)길이다
7년전 겨울 광교산에서 청계산까지 오면서 폭설에 개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데. ㅋㅋㅋ
군부대를 만나 좌.우로 갈라지는 능선을 만나는데 어디로 가던 금방 다시 만난다
국사봉(國思峰:540m)은 고려 말 이색(어떤 곳에서는 조윤)이 망한 고려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봉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전국에 많은 국사봉이 ‘선비 사(士)’를 쓰지만, 이곳 국사봉은 ‘생각 사(思)’를 쓴다.
옛골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목배등 삼거리(09:30)
목배등이란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철쭉 능선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으로 청계산 정상을 오르면 계단이 없어서 내가 가장 즐기는 코스이다
봉오재(09:50)
청계산 등로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月峴)
판교에서 말죽거리로 통하는 옛날 삼남지방 사람들이 한양가던
길이었으며, 달맞이 하던 고개. 현재는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되었다
경기도 수정구 상적동의 옛골마을과 금토동을 지나는 이 고개는 원래 작은 도로였으나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게 되면서 성남시와 서울시 구간을 구분 짓는 실질적인 경계가 되었다.
옛날 이 마을에 ‘달아’와 ‘달오’ 라는 남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살아가고 있었다.
달오가 누나를 보러 시냇가까지 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듯이 쏟아졌다.
동생을 보고 반가워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는 달아의 모습은 비에 흠뻑 젖어 몸매가 다 드러난 여인의 모습이었다.
비에 젖은 누나의 몸매에 성적 욕구를 느낀 동생이 죄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의 생식기를 돌로 찧어 죽고 말았다.
이를 안 달아는 자신의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이 동생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차라리 달래나 보지’하며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하여 ‘달래내 고개’ 라고 부른다고 전해진다
살레와 청계산 옛골점
저 집 쥔장이 우리동네에 살면서 제발 자주 좀 들려 달라고 하는데 청계산에
올 일이 별로 없으니 들릴 일도 없고, 돈도 없어서 오늘도 그냥 지나간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라곤 막걸리와 순대국 먹을 10,000원짜리 달랑 하나다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하여 인능산 방향으로 향한다
옛골(10:05)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을 일컬는데 일반적으로 상적동이라면
잘 모르고 등산객들에게는 옛골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좌.우로 청계산과 인능산이 자리잡고 있는 산지 지역으로 대부분이
그린벨트와 군사보호지역으로 묶혀있는 곳이라 개발이 더디다
내가 다니고 있는 정토사도 청계산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옛골의 지명 유래는 옛날에 호걸들이 피리를 불며 유람하는 곳이라 하여
적촌(笛村), 저푸리, 적취리라 하였으며, 노상동(路上洞: 옛골(禮谷)과
노하도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 졌는데 노상동의 ‘상(上)’자와 적취리(笛吹里)의
‘취(吹)’를 합하여 상적동이라 불렀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에
속해 있었다.
또 다른 설은 이곳에 많이 살고있는 덕수이씨들이 잦은 과거급제로 인하여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붙혀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도로를 나와서 삼거리 맞은편에 있는 한국 순대국 옆골목으로 가야 인능산으로 오를 수 있다.
아침식사(10:20~10:40)
이른 아침에 산행을 시작하여 이곳까지 거의 쉬지않고 왔더니만 배고 고파서
순대국집에 들려서 순대국 한그릇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다시 인능산으로 오른다
순대국으로 아침 식사후에 커피한잔 마시고 다시 행장을 꾸린 다음에 인능산으로 오른다
이정표를 따라 공사 현장을 뒤돌아서...
멋진 주택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청계 몽베르란 주택 단지가 나오고...
주택단지를 지나 화훼 비닐하우스를 지나 인능산 들머리로 접어든다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꺽어지니 잘 관리된 묘지 3기를 만나고...
인능산 입구(10:50)
본격적으로 인능산 입구로 접어드는데 이정표는 참으로 잘되어 있다.
서울 강남에서 40여년을 살았지만 인능산은 처음이다
청계산의 명성에 가려져 등산객에게는 잊혀진 산이 되어 버렸다
반가운 현오님의 시그널
우리나라 산줄기 찾으시느라 고생이 많소이다
청계산 이수봉에서부터 계속 만나는 시계 표시목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산불감시초소(10:55)
인능산 입구에서 부터 헌릉 I.C를 걸쳐서 대모산 오를때까지 화살 표시를 만난다.
어느 단체에서 행사를 하면서 붙힌 모양인데 행사가 끝났으면 회수하셔야죠... 이게 뭡니까
반가운 빛바랜 시그널... 레인저 회장님이시겠죠?
넘밑골(150m:10:58)
서울 서초구 신원동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의 경계에 있는 곳으로
좌측에는 새쟁이 마울이고 우측에는 신구대학 학습림과 식물원이 있고
예전에 없었던 음식점들이 많이 생겼으며, 그 아래에 대왕 저수지가 있다
오동나무가 많은 넘밑골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오르는데 휀스로 막아놨다
신구대학 관계자들! 참으로 바보다... 그런다고 안 다니나
신구대학 학습림 안내판
넘밑골 이정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청계산과는 달리 이곳은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봐도 보이질 않는다
혼자서 능선을 전세내다시피 호젓한 길에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275m봉(11:10)새쟁이 마을 갈림길
새쟁이 마을은 신원동 남쪽에 있던 마을로서, 느티나무가 정자같이 서 있으므로신정(新亭)이라 한 것을 '새쟁이' 라 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 지고 있다.
옛골에서 양재동 가는길 우측에 자라잡고 있는 자연부락이다
내곡터널 위(301m:11:12)
이 능선 아래로 서울 강남과 분당을 잇는 내곡터널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원터골과 원지동 청룡마을 내려가는 길이다
우측으로 꺽어져 인능산으로 향하는데 좌측으로는 예비군 훈련장이 보인다
좌측 능선 나뭇가지 사이로 대왕저수지가 보이고...
철조망 너머로 예비군 훈련장이 보인다
70년대 후반부터 이곳으로 예비군 훈련을 받았던 곳인데 그 당시는
거여동에서 이곳으로 옮긴지 얼마 안되어 훈련보다는 사역을 더 많이한 기억이 있다
목동산 아래에서 만난 이정표(←상적동, 옛골 ↑신촌동 → 고등동)
고등동(高登洞)은 서울공항 끝 부분부터 옛골아래 대왕저수지 근처의 동네로
옛날에 고산동(高山洞)과 등자리(登子里)를 합해져 두 동네에서 첫자를 하나씩
떼와서 두 동네가 합쳐지면서 고등동으로 행정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고산동에는 주막거리가 유명했는데 6.25 동란 이후에 주막거리에 술집이 새로 생겨
새술막이란 지명이 생겼고, 인능산 아래 등자리에는 덕수이씨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잇달아 생겨서 붙혀진 지명이란 설이 있다.
이정표에서 우측으로난 넓은 임도를 버리고 철조망을 통과하여 오르니 헬기장이 나온다
목동산(300.1m:11:25)
정상은 헬기장으로 너른 공터에 H자가 표시되어 있으며, 북서쪽에 이정표 하나,
남쪽 아래에 이정표가 있는데 그 옆에는 예비군 훈련용 구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남쪽으로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우측으로는 고등동으로 내려가는길이고 좌측으로는
신촌동 가는 길이다... 난 신촌동 방향으로 걸어 인능산으로 향한다
이곳을 지도상에는 목동산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유래는 알 길이 없다
헬기장으로 내려서니 우측에 군부대 시설물이 보이고...
좌측에 예비군 철조망을 끼고 한없이 걸어간다
성남시에서 새로 만든 市界 표시판
인능산(仁陵山:326.5m:11:38)
청계산·국사봉·바라산 등의 산지와 연결되어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과 신촌동
서울 서초구 내곡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군부대와 그린벨트로 묶여있고 인근 청계산과
대모산, 구룡산의 명성에 밀려 잊혀진 산으로 강남에서 40여년을 산 범여도 오늘 처음 와 본 산이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에는 천림산(天臨山)이라는 명칭으로 표기
되어 있다. 인릉산이라는 명칭은 산 북쪽에 있는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의 조산(朝山;신하산)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고,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무단으로 왜곡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서울시 강남구의 구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합쳐져 세곡천을
이루어 탄천으로 유입되며 산지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에 속하여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남시 방면의 사면에는 심곡동과 고등동이 있고 오야동과 둔전동의 충적 평야지대로 이어지며,
서울 방면의 사면에는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과 강남구 세곡동의 율암마을 등이 형성되어 있다
인능산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고 인능산 구간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아마도 산 아래에 있는 사람이 운동을 온 모양이다... 운동복 차람에 운동화다
약수터 갈림길(11:42)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니 운동시설이 나오고 길은 무지좋다
오후 2시반까지는 집에가서 씻고 옷갈아 입고 대학로를 가야 하기에
맘이 급해진다... 이런 길에는 산악 마라톤 하듯 산행 속도를 낸다
이정표에는 계속해서 신촌동(新村洞)을 가리킨다
서울 공항 옆에 있는 동네로 인능산 아래에 위치하는데 1925년(을축년) 대홍수 때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일대)가 침수된 이후 이곳으로 이주해온 수재민들로 이루어진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마을, 새말로 불리다가 한자화하여 신촌동이라 부른다
범바위산(虎巖山:274.8m:12:00)
서울 서초구 내곡동과 경기도 성남시 신촌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공터에 꽤나 큰 암릉이 있고 좌측으로는 예비군 부대가 자리잡고 있고
우측으로는 서울공항이 보이며 북쪽으론 구룡산과 대모산이 한 눈에
들어오지만 그리 특징있는 산이 아닌 그저 그런 산이다
범바위산을 내려오니 운동 시설이 있고 이정표엔 계속해서 오야동 능선이라 표기되어 있다
성남시 수정구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오야동의 옛지명은 와실(瓦室), 왜실, 오야소라고 하였다.
예전에 이 지역에서 기와를 구웠으므로 와실 또는 왜실이라 칭하던 것이 오야실로 변해서
된 것이라는 설이 있고, 이 지역이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야소(梧野所)라 하고, 오동나무
열매가 잘 열렸으므로 오야실(梧野實)이라 칭하던 것이 오야동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갑자기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서니... 임도 사거리가 나온다
임도사거리(12:10)
이곳에서부터 성남시계를 벗어나 온전히 서울땅으로 접어든다
좌측 비포장 도로로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는 헌인가구단지이다
직진을 하니 블록으로 쌓은 폐건물이 보이고...
넘어진 아카시아 숲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며 내려오니 좌측으로 헌인가구단지가 보이고...
저런 경고문 겁나면 산 안다니고 말지... 너무 겁박하지마소... 피해 안주고 댕길테니...
세곡터널 위
내가 서있는 이 아래로 서울 ~ 용인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마주 보이는
대모산 아래는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파트가 대모산 중턱까지 침범하고 있다
강남구의 허파인 대모산이 저러다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헌릉I.C(12:20)
기구단지 입구로 내려선 후에 도로를 건넌다
도로를 건넌 다음에 다리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꺽어진다
농업기술센터를 휀스를 따라 가다가...
서울 ~ 용인간 고속도로 램프 아래를 통과하니...
대우 푸르지오 아파트를 끼고 좌측으로 올라선다
푸르지오 아파트 화단을 지나 고속도로 방음벽을 끼고 대모산으로 올라선다
내가 헌릉 I.C를 통과한 궤적(백야행님 블로그 인용)
고속도로 휀스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져 대모산으로 올라선다
대모산 오르는 길에 등산객들이 비닐하우스를 치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마구잡이 난개발로 인해 대모산이 계속해서 잠식을 당하고 있다.
이젠 신규 아파트가 아닌 구도심 재생사업으로 자연을 그만 훼손했으면 한다
나 역시 건축업에 종사하지만 무분별한 개발을 볼때면 넌더리가 난다
헌.인능 휀스 시작점(12:45)
헌.인능 휀스 끝지점(12:55)
이젠 본격적인 대모산 능선에 올라서면서 내 나와바리 구역에 들어선다.
6년전 맥 산행하기전에 매일 아침에 이 능선으로 올라와 1시간 반정도
운동을 한 다음 출근을 했으니 완벽한 내 나와바리 구역이다
실로암 약수터 갈림길(12:58)
성지약수터 갈림길(13:00)
계단으로 올라서니 대모산이 나온다
대모산(大母山:293m:13:05)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과 일원동 남쪽에 위치하는 산으로 대모산(大母山)이라는
명칭의 산의 모양이 늙은 할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할미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그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 묘인 헌릉(獻陵)이 대모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왕명에 의해 대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설은 서쪽에 있는 구룡산(九龍山)과 함께 두 봉우리가 여자의 젖가슴을
닮아 대모산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며 대모산은 조선시대 때 명당으로 알려져
대대로 왕족의 묘터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4번째 왕인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능도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세종의 능은 1469년 예종(睿宗) 때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조선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仁陵)이
헌릉의 서쪽에 조성되었고 능참봉의 한옥이 남아있다.
그리고 대모산 북쪽에는 세종대왕의 5번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광평대군의 양아버지인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 내외의 무덤과 함께 가족의
공동묘역으로 조성된 곳이며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모산 정상의 모습
대모산 정상 헬기장과 교통관제탑
이곳은 해마다 1월1일 강남구에서 해돋이 행사를 하는 곳이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강남구의 모습
저 멀리 아차산이 보이고 동북쪽으로 100층이 넘는 건물이라는 롯데월드가 보이며
바로 아래에는 삼성병원이 보이는데 삼성의 총수인 이 건희 회장님은 우짠지 걱정이다
요즘처럼 이렇게 힘든 시기에 얼른 쾌차하셔서 한국 경제의 방향타를 제시해야 할터인데?
우짜든지 건강이 최곱니다... 아픈 이 회장님보다는 두 발로 온 산을 다 다닐수 있는 내가 낫지
이곳에서 우측으로 15분정도 내려가면 우리집이다.
근데 이곳에서 우리 아파트 사람을 만난다... 반갑다는 인사만 나누고 헤어진다
대모산성 터
대모산 정상에 584m 둘레로 쌓은 대모산성. 정확한 축조 시기·성격은 가려져 있지만,
신라~고려시대 방어체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 남한산성 등이 일직선상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대천 약수터(13:15)
구룡마을 갈림길(13:23)
구룡터널 갈림길(13:35)
구룡산(九龍山:306m:13:40)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산으로 지명의 유래는 옛날 임신한 여인이 용 열 마리가 승천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한 마리가 떨어져 죽고 아홉 마리만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졌다.
하늘에 오르지는 못한 한 마리는 좋은 재목, 좋은 재산인 물이 되어 양재천이 되었다고 한다.
주봉(主峰)은 국수봉(國守峰)이다. 조선시대 전부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국가를 지킨다 해서
붙여진 것으로 이 곳에는 바위굴 국수방(國守房)이 있어 봉수군(烽燧軍)이 기거했다고 한다.
또한, 이 곳은 세종대왕 초장지(初葬地)로, 세종대왕 초장지였던 영릉터가 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가1469년(예종 1년)에 경기도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신갈나무, 리기다소나무, 아카시아, 현사시나무 등이 산재해 있으며, 희귀한 '물박달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껍질이 종잇장처럼 너덜너덜 벗겨지는 특징이 있으며
한국 전역에서 자랄 수는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라고 한다
구룡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 가운데 동판으로 정상 표시판이 있다.
그리고 강남구 전체와 서울시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전망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날씨가 좋은 날은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저 아래에 우리집도 보이넹
구룡산을 내려서자마자 돌탑을 만나고...
강남그린웨이 갈림길(13:45)
284.1m봉(13:47)
정상에는 특이하게 생긴 사각철탑으로 만든 3등삼각점(△수원 303 / 1976복구)과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멋진 전망바위가 나오는데 서울 강남이 한 눈에 보인다
전망바위에 올라서니 서울 강남이 한 눈에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한국 불교포교의 요람인 능인선원이 보인다
능인선원 갈림길(13:50)
산악 기상 관측소(13:55)
서울 둘레길(14:00)
서울 둘레길에서 직진하하여 KOICA 방향으로 향한다
KOICA 월드프랜즈 교육원 뒷문을 통과하여 정문으로 나온다
KOICA 정문을 빠져 나오니 하나로 양재점과 현대자동차 본사가 나온다
이곳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스틱을 접으면서 산행을 종료한다
양재동 버스 정류장(14:15)
산행 장비를 정리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와서 샤워를 하고 부지런히 송년회 장소인 대학로로 나간다
오늘 산행 기록
대학로에서 송년회를 마친 다음에 모임의 총무 아들이 한국 현대무용을 하는데
오늘 작품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에 약 2시간의 공연을 보고 맥주 두어병 마시고 집으로 향한다
막걸리 장수가 이제사 출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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