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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아산(영인)지맥(終)

아산(영인)지맥 제3구간 - 39번 국도에서 공세리 성당까지

by 범여(梵如) 2016. 2. 21.

☞산행일자:  2016년 2월 20일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차가운 바람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2km+어프로치 약3km  / 6시간 20분소요

☞참석인원: 수헌님과 함께

☞산행코스:   아산지하차도(39번 국도)-은성환경-잡목지대-주차장 갈림길-어금니바위 갈림길(왕복)

                  어금니바위-전망봉-무명봉-291.3m봉(산불감시초소)-매표소- 갈림길-영인산수목원

                  갈림길-상투봉-갈림길-수목원온실-산림교육장지원센터-갈림길-산림복원지구-갈림길

                  스카이어드벤처-산림박물관-흐느재-산책로-연화봉-시련과 영광의 탑-쉼터-깃대봉-초소

                  영인산-갈림길-전망바위-무명묘지-363.3m봉-세심사갈림길-전망봉-잡목지대

                 비포장도로-아름다운 골프장 입구-231.4m봉-자작나무 조림지-갈림길-남양홍공 묘지

                 복흥골-냉정고개-평강사슴농장 철조망-안부-잔다리고개-수루네미고개-105m봉-133m봉

                 석산갈림길-입암정-입암산-천등말갈림길-천주교공원묘지 삼거리-공원묘지-114.1m봉

                삼도해운판관비-공세리 성당-버스정류장

소 재 지:  충남 아산시 영인면, 염치읍, 인주면

지난주 복하(독조)지맥을 같이한 수헌 아우님과 마지막 한구간 남은 아산(영인)지맥길을 나서기 위해

조금 느긋한 시간인 07시 35분 용산발 익산행 무궁화 열차를 타기위해 용산역을 가기 위해

도곡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옥수역에 내려 국철을 타려고 가는중에 용산행 열차가
출발해 버리는 바람에 가슴 조이며 20분을 기다렸다가 용산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아슬아슬~~~
0알에 요령 소리가 나도록 달려 열차에 올라타니  수헌아우님 여유롭게 들어온다.   

아산(영인)지맥 개념도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용산발→익산행 무궁화열차(07:20)

1주일만에 조우한 아우님과 맥산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온양온천역에 도착한다

온양온천역(09:10)

역에서 빠져나와 지난구간에 뒷풀이했던 국밥집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갔던니만 2주전에 들렸던 산꾼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한다

순대국집(09:15~09:40)

따뜻한 국밥 한그릇을 말아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커피한잔 마신다음 택시승차장으로 향한다

아산 1 지하차도(10:00)

온양온천역에서 택시를 타고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39번 국도 영인산 휴양림을 향한다

20여분만에 들머리에 도착하니 날씨는 맑으나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차갑다

택시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한 다음 산행을 준비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편하게 영인산 들머리로 올라설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원칙대로 지맥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좌측의 39번 도로로 올라간다

39번 국도는 충남 동북부 지역인 부여군, 청양군, 공주시, 아산시 지역을 잇는 핵심 간선도로 중

하나이며, 경기도 평택시부터 의정부시까지 구간은 서해안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평택~시흥고속도로와 나란히 노선이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고속도로 구간이 정체될 경우 이를 대체하는

주요 우회도로로도 활용되고 있다

39번 도로를 걷는데 차량이 너무 많은 차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바람에 상당히 위험하다

끊어진 영인지맥길을 바라보며 영인면에서 영치읍 구간으로 넘어서서 걸어간다

39번 국도를 벗어나  우측으로 들어서니 어금니바위 할배굿당 간판이 보인다

은성환경(주)(10:10)

건축 폐기물처리업체인 은성환경 건물 우측으로 올라선다

나같은 자영업자들에겐 수퍼 갑 노릇을하는 폐기물업체 1년에 50%씩

반입료를 올리는 바람에 죽을 맛이다... 올해도 1월1일부터 50%나 올렸다

잡목의 저항을 뚫고 등로로 들어선다

갈림길(10:20)

20분을 지나 오르막을 올라서니 들머리에서 헤어졌던 등로를 만난다

제도권에 접어들면서 등로는 무쟈게 좋아진다

주차장 갈림길(10:23)

이곳부터는 영인산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우측에는 해주최공 부부 묘지가 있다

어금니 바위 갈림길(10:28)

좌측 0.7km 지점에 아산(牙山)의 지명유래가 되었다는 어금니 바위가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간단 말인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어금니 바위로 향한다

안부(10:35)

안부에서 직진으로 오르면 100m 이상은 거리가 단축된다마는 사유지라

출입금지란다... 하는 수 없이 좌측으로 가는데 이곳 이정표에는 능인정사

라는 이정표에는‘능인정’을 없애 버렸고, 어금니바위와 정상 표지판에도

‘k’라는 글짜를 없애 버렸다... 어느 노무 쉬끼가 이런 짓거리를...

어금니 바위(牙巖:10:37)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39번 국도 윗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산시의 옛날 이름인

아산군(牙山郡) 이름을 낳게한 영인산의 북동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모양이

아기를 업은 모양처럼 보인다고 해서 아기업은 바위’로 부르며 또다른 이름은 

가장 큰 바위가 부처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처바위 또는 ‘불암(佛巖)’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지형도에는 음봉면, 영인면, 염치면의 경계에 부아암이 표기가 되어있다

 

어금니처럼 생긴 어금니바위-애기업은 바위- 혹은 부처바위가 있어서 '어금니 아()'자를 따서 아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옛 이름 아술()도 역시 '어금니처럼 생긴 바위(술-수리=봉우리)'를 뜻하는 이름이다. 이 지역은 백제의 탕정군(),

아술현(), 굴직현()의 3개 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아래에서 바라본 어금니 바위

명성에 비해서 주위의 조망은 별로이다... 아산의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는 바위가

홀대를 받는 느낌인데 아산시는 엉뚱한데 돈쓰지 말고 이곳을 관리 좀 해주쇼

남쪽에서 바라본 어금니 바위

위로 올라보니 진짜로 어금니 바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기없은 바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바위는 슬픈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고려 말, 염치읍 송곡리에 장자못이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어느 돈 많고 욕심도 많은 한 노인이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노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왔고, 늘 효성 지극하고 마음씨 넉넉한 이 집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쌀을 퍼주었는데 그만 심술궂은 노인네에게 들키고 말았다.

심술쟁이노인네는 스님에게 쌀을 빼앗고 자신이 시주를 하겠다며 쇠똥을 가득 담아주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스님은 아무 표정 없이 쇠똥으로 가득한 시주낭을 메고서 집을 나서니,

며느리가 너무 미안하여 스님을 마중하며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고 한다.

그 때 노스님이 뒤돌아 서서 며느리에게 말하길 죄 많은 이 집 노인과 이 집은 곧

큰비가 오면 물에 잠길 터이니 마음씨 착한 며느님은 어서 집을 나와 산 위로 피하세요.”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기를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안됩니다. 절대로~”

잠시 후 스님의 말대로 며느리는 산을 올랐고, 곧하늘이 열린듯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느 전설이나 그렇듯, 산 위로 다 올라간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걱정하는 효심에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 순간 며느리는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

그 바위가 염치면 서원리 뒷산에 있는 애기를 업은 형체의 바위다.

이 바위를 혹자는 어금니 모양이라 해서 어금니바위라고 칭했는데

어금니 아()자를 따서 아산(牙山)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다시 어금니 갈림길(10:53)

격려 감사합니다

전망암(11:00)

영인산의 전체 모습이 가장 잘보이는 곳이다

바로 아래로는 영인면 아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조선조 말기 풍운아 김옥균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의 호는 고균, 시호는 충달공으로 조선조 철종 2년(1851) 1월 23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 9년(187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1884년 조국 개화를 위해 갑신 개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부사 김만식(金晩植)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당시 사대주의 자들이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허세를 부리고 있어 나라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지라 김옥균은 이를 개탄하여 박영효,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과 협력하여 독립당을 조직하고 국정을 개혁하여 낡은 폐습을 타파하려고 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박영효, 홍역식 등과 협력하여 거사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 만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이와다휴사크(岩田周作)라

변명하고 오가사와라(小笠原)섬과 홋카이도(北海道), 도쿄 등지를 전전하면서 10년을 지냈다.

1894년 3월 28일 상해로 건너간 김옥균은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이듬해에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죄명을 씻기고

관직이 회복되었고 순종 때에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을 받고 관리를 보내서 제사지내는 대우까지 받았다.

 

묘는 일본 동경 청산외인 묘지(靑山外人 墓地)에서 1914년 9월 11일 의발(衣髮)을

영인면 아산리로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조금후에 가야할 아산(영인)지맥의 주봉격인 영인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등로 곳곳에 구조 이정목도 보이고...

무명봉(11:05)

산불감시초소는 나무에 포위되어 제 기능을 잃어 버렸다

291.3m봉(11:10)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연인산 휴양림 제2매표소(11:12)

웬 매표소!... 291.3m봉을 지나자마자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원이 모가지를 내밀고 입장료 2,000원을 달라고 한다

우린 휴양림 구경꾼이 아니고 맥산꾼인데 왜 입장료를 달라고 하느냐고

하면서 국립공원도 아닌데 돈을 받느냐고 하니까... 그래서 받는단다

뭔 개 풀떠어 먹는 소리란가... 그러면서 우린 아산시 탕정면에서 왔다고

하니까... 입장료를 1,000원만 달라고 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영인면

출신은 공짜이고, 아산시 주민은 1,000원, 그 외는 2,000원이란다

그래도 거짓부렁 한번하고 1,000원을 벌었으니... 옆에있는 아우님이 씨~익 웃는다

산꾼들이 뭔 돈이 있다고... 그래도 둘이서 2,000원 벌었다...ㅋㅋㅋ

갈림길에서 상투봉쪽으로 향한다

상투봉은 맥길에서 1km정도 벗어나 있지만 오늘 시간도 널널하여 입장료 1,000원 아까워서도 간다

영인산 수목원(11:20)

영인산수목원은 수목유전자원의 보전기능을 강화하고 수목 유전자원의 수집·
증식·보전관리 및 자원화를 위한 연구와 국민들에게 자연학습장으로 제공하고
영인산자연휴양림과 연계하여상호보완기능을 갖도록 함은 물론 일부 산불
피해지를 복원하기 위하여 2007년도부터 조성하기 시작하였으며
2012년 5월 개원하였습니다.

 

영인산수목원은 약52만㎡의 부지에 지구별 테마를 설정하고 중심지구,
습지학습지구, 계곡학습지구, 복원지구 등에 다양한 형태의 주제와 테마를
주어 암석원, 침엽수원, 약용식물원, 습지원 등 다양한 주제공간에
1,200여종의 식물종을 확보하여 차별화된 수목원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영인산 수목원 안내도

영인 수목원은  2000년도 대형산불로 인해 황폐화된 산림을 복구하고 시민에게 자연학습장을

마련하기 위해 2011년도에 개장했으며 휴양림지구, 계곡학습지구, 습지학습지구, 중심활동지구

산림복원지구,  산림박물관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 상투봉으로 가기 위해선 좌측으로 가야한다

바람의 언덕이라 사각정자도 있고... 수목원은 아산시에서 돈 엄청나게 갖다 발라놨

아산시의 재정자립도가 엄청 높은건지... 아님 시장나리의 치적사업인지도 몰라도

산을 사랑하는 정통 산꾼의 눈에는 상당히 비위가 거슬린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데...

늪지도 지나고...

상투봉 갈림길

나무 계단을 따라서 상투봉 정상으로 오른다

상투봉(上頭峰:299m:11:30)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에 있는 영인산의 남사면에 위치한

봉우리로 산의 모양이 상투처럼 보인다고 붙혀진 지명이다.

아산 영인향토지에 의하면 동림산의 주봉으로 기록되어 있는걸로 보아

동림산으로 불리워졌던 산으로 이곳에서 남쪽 60m 지점에 흔들바위가 있고

동림산에는 삼국시대에 동림사지터에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현재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낙조와 주변 전망이 일품인 곳이다

상투봉 표지석 뒷면

상투봉에서 바라본 염치읍(鹽峙邑)

충청남도 아산시의 중북부 곡교천을 경계로 북쪽에 위치한 읍으로  남쪽으로 곡교천이

흘러 신창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영인산 등의 잔구성 산지가 발달해 있으며

백암리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가 있다.

현재 염성리 · 산양리 · 강청리 · 서원리 · 중방리 등 14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본래 아산군 근남면()의 지역으로 금곡리 · 가곡리 등 23개 리를 관할하였다.

『1872년지방지도』(아산)에 근남면()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1년 원남면()의

대동 · 대서 · 대중 · 백암의 4개 리를 합하고 아산군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아남면()이라 하였다.

1914년 같은 군 삼서면(西)의 8개 리와 온양군 일북면()의 1개 리, 이북면()의 3개 리,

서면(西)의 일부를 합하고 염성리()의 염치(-소금산)의 이름을 따서 염치면으로 고쳤다.

『조선지형도』에 온양면 북쪽에 염치면으로 기재되어 있다. 1989년 온양시 신동 일부를 편입하였고,

석정리() 일부는 온양시에 속하게 되었다. 1990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면 지명이 된 염치는 염성리의 으뜸이 되는 마을로 옛날 이곳까지 소금배가 들어와서 소금을

쌓아두었다는 소금산이 있는데, 일설에는 소금산의 돌이 모두 희어서 소금같이 보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였으므로 백제 시대 이후 소금을 생산, 저장, 공급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법정리인 백암리()는 뱀밭 또는 사전()이라고도 하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가

 있으며, 거기에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 공의 유물인 장검과 옥로, 요대 등이

보존되어 있어 사철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서원리에 어금니바위(애기 업은 바위)가 있다.

상투봉 정상에 서니 박무로 인해 모든 사물을 뚜렸하게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지만 전망하나는 정말 굿이다

광덕산과 설화산, 도고산이 아련히 보이고 바로 아래는 곡교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남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온양과 염치읍이 한 눈에 들어오고 아침에 내렸던 온양온천역도 보인다

아산!.. 이곳은 참으로 역사적을 참으로 많이 배출한 곳이 아닌가

좌측으로 보이는 염치읍 백암리에는 풍전등화 같은 조국을 구한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고 조선시대 청백리에 빛난 명재상... 맹사성은 이곳에서 가까운 신창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곳 출신은 아니었지만 아산 현감을 지낸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 선생

조선 후기에 3일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김옥균의 묘소도 이곳에 있고

조선 세종때 조선조 천재 발명가였던 장영실의 부모도 아산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묘소도 이곳 아산시 인주면에 있고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이셨던

윤보선 대통령도 아산시 둔포면 출신이다

상투봉 정상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흔들바위가 있지만 가지는 않았다

가야할 영인산 정상의 모습

예전에 이곳에 미군부대가 주둔했다가 철수한 곳을 복원하였다고 한 영인산

상투봉에서 산꾼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산을 완전히 버려 놓았다

엄청나게 많이 설치한 조형물에다가 갖가지 흉물스러운 시설들... 저걸 유지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돈이 필요할 터인데 조그만 아산시의 재정으로 저걸 감당할 수 있을까?

다시 상투봉 갈림길

조금전에 지났던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영인산으로 향한다

갈림길(11:40)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하여 영인산으로 향하는데 지맥길이 아닌 서울 남산을 걷는 기분이다

산 전체를 돈으로 쳐바른 느낌이다... 산꾼들은 이런 길을 가장 싫어하는데...

유리 온실이라는 곳으로 가본다

가는길에 이런 기념비를 만나는데... 돈낸 사람 이름이 쫘악~~~적혀있

온실 안으로 들어가 보려니 동절기라 관람불가란다

영인산휴양림사업소(11:45)

산림교육지원센터도 지나고...

 데크목 계단으로 올라간다

산림복원지구(11:50)

우측 도로를 따라서 간다

영인산이 좀 더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인산 정상 아래는 영인산성이 있고 계단이 보이는데 747계단이란다

지맥 산꾼들은 저기로 갈일이 없다

 조금 당겨본 영인산 능선의 모습... 뾰족하게 보이는게 시련과 영광의 탑이란다

스카이어드벤쳐(11:55)

저기까지 한번타고 내려가는데 요금이 10,000원이라는데 너무 바가지 쒸우는 느낌이다

나야 탈 일이 없으니까...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영인산 산림박물관(12:00)

영인산산림박물관은 산림과 임업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교육, 산림문화 창달을 통한

산림문화의 현장학습장으로서의 역할과 전시 및 연구를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영인산산림박물관은 대지면적 27,996㎡, 연견평 6,043㎡에 지하1층, 지상 2층 규모로

본관과 별관으로 구분되어 있고 본관은 2개의 전시실로 구분되며, 제1전시실은 '사람과 산'이라는

주제로 자연, 씨앗, 나무, 숲, 생태계, 산림환경보전을 테마로, 제2전시실은 사람과 자연의 만남이란

주제로 숲 속 놀이터, 생각의 숲으로 전시되어고 별관은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숲을 통해

휴식과 치유를 위한 장소로 조성되어 있는 신개념 산림박물관이라고 한다

수도꼭지를 물고 있는 거북이를 만나는데 겨울이라 물이 안 나온다

흐느재(12:02)

산림박물관을 지나면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흐느재라는 곳인데

예전에 영인산에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을 때 헬기장이 있었던 곳이란다

우측으로 내려가는 등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과 함께 바리게이트가 처져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아산향교와 김옥균의 묘소가 있는 영인면 아산리이다

 

아산시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온양향교·아산향교·신창향교와 정퇴서원(靜退書院)·

인산서원(仁山書院)·도산서원(道山書院) 등이 있었는데 온양향교는 조선 초기에 당시

온양읍 법곡리에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읍내동

재건해 현재에 이른다.

 

아산향교는 영인면 아산리 동쪽 향교골에 창건했으나, 1575년(선조 8)에 아산현감으로 있던

토정 이지함이 현재의 영인면 아산리 일대로 이전하였다. 신창향교는 조선 숙종 때 건립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이 없으며, 1872년(고종 9)에 당시 현감인 왕경렬(王景烈)이 도고면

진주사(震主寺)를 신창면 읍내리에 이전해 향교로 삼았다고 한다.


인산서원은 1610년에 염치면 서원리에, 정퇴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배방읍 중리 부근

정퇴동에, 그리고 도산서원은 1670년(현종 11년)에 도고면 도산리에 각각 창건되었다.

이 서원들은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훼철되었다

갈림길(12:05)

편하고 완만한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콘크리트 계단으로 올라서니 연화봉과 시련과 영광의 탑이 보인다

연화봉(蓮花峰:335m:12:14)

아산시 영인면과 염치읍의 경계에 있는 영인산의 한 봉우리로서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의 형상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라고 한다

봉우리 앞에는 높이가 24m나 되는 시련과 영광의 탑이라는 걸 세워놨는데

자연과의 부조화라 그런지 아둔한 범여가 보기엔 흉물처럼 보인다

시련과 영광의 탑(12:15)

1998년에 연화봉 정상에 24m 높이로 세워진 쌍둥이탑은 너무커서 주변과의 부조화를 이룬다

영인산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산으로 아산시내는 물론 가깝게는 안중과 평택, 멀리 천안까지

굽어볼 수 있어 전략의 요충지로 꼽혀 왔으며 나당연합군에 맞선 백제가 이곳에서 7년동안의 전쟁을

벌였고, 청일전쟁 때도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며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일장기를 꽂았다는 깃대봉도

이곳 옆에 있다... 6·25전쟁도 빗겨가지 않아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쟁 직후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미군부대가 80년대 말까지 37년동안을 주둔했다.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 명문

영인 현충으로 피어오른 민족의 담시 배달겨레 대한 땅 역사의 구비마다 그물길 거세었던

충절의 고장 서녘벌 그 험난 물결 일때마다 여기 산하의 정기도 사무치며 언제나 겨레의

큰 얼이 솟구쳤으니 이곳 아산땅은 진정 겨레의 큰 숨결이요 역사의 긴 터전이어라.

그 터전 물뭍으로 배어나니 군자국의 지령위에 여기 영인산이 우뚝하고 태극의 광명 따라 해와

달도 해맑으니 불사조의 인걸이라 현충사도 저 멀리 성스럽다. 세계사가 서기로 열리던 바로

이천년전 그때 동방의 이 고장은 이미 비류백제의 도읍지였으니 인주면 밀두리는 유서깊은

미추홀 옛땅이요 그 문화 일찍이 바다 건너 왜 땅을 깨우치니 우리의 오랜문화 오늘도 저

일본 일으켜 온 문명의 참 씨앗이었네. 아산만 깊은 사연 서해안의  오랜 요로 그 옛날 칠세기에

백강으로 밀어 오른 나당의 연합군이 우리 왕조 백제를 힘으로 종말지니 조국의 명운앞에 이

고장은 언제나 국난 거세었던 애환의 여울목 하건만 같은땅 온정주는 예부터 충청 서역의 중요한

전략 요충 바로 이곳에서 팔년의 항쟁 끝에 끝내 그 당군을 이겨내니 여기서 민족사는 진실을 말하누나

 

삼국의 통일은 우리 백제 고구려의 멸망 그 뒤에서가 아니라 진정 동방의 이 겨레가 저 대륙의

강국 당과 싸워 이긴 민족적 승리위의 금자탑 이었다고 그 승리의 활력 정녕 이 역사의 지하수 였어라.

뒷날 저 무서운 수십년 대몽 항쟁 속에서 그 물길 더욱 세차게 다시 뿜어 오르니 이곳 영인산이 바로

그 끈질긴 항쟁의 본거지 여기에 저 천안 평택등의 주민까지 합해 이 충남 중서부의 한덩어리 되어

피흘린 입보처마저 이뤘으니 저 신성산성 무명산성 등에는 당시 생활속의 항쟁들이 그대로 온

백성의 의병으로 물결처 나왔다. 바로 그 속에서 우리 수군 이천장군의 큰 승리가 이곳 선장 지방에서

또한 빛났으니 대륙 몽고군에 대한 이같은 승리는 뒷날 틀림없이 임진왜란에서 저 해양의 왜수군을

물리치는 겨레의 더욱 큰 승리로 솟아 이겼다. 아 충무공 우리의 이순신 장군 그님은 분명 이기면서

죽었고 죽으면서 다시 이겼다. 이 몸이 죽기로써 싸운다면 온 겨레가 함께 살 것이니 그 큰 생명이

곧 필사즉생 여기에 모두가 제 한몸 살기만을 꾀한다면 온 민족사가 그대로 끝나리니 그 뼈아픈

교훈은 바로 필생즉사 그것은 참으로 생사를 초월하여 이 겨레를 영원히 살게하는 실로 값진 불사조의

활명수라 바로 그 활명수를 한몸에 가득 안고 장군은 이곳 그 극?의 영광만은 반드시 이 조국의 아만이

 거둘수 있는 법 여기서 세계는  지금 동방의 앞날이 새롭게 태평양 시대로 열리고 바로 중심에서 우

리의 신한국은 뜻깊은 서해안시대로 밝게 타오르고 있으니 저 일백년 전은 왕조말의 역사요 오늘은

그대로 새 역사의 앞머리라 여기서 지난 세기 왕조말의 황혼속에 세계사의 변두리로 밀리며 시달렸던

 이 곳 아산땅에는 바야흐로 이 조국 대한이 오늘의 양극 갈등을 초극하는 도덕적 통일의 승리를 통해

온 세계 십방으로 뻗으며 새세기를 열어가는 이 민족사의 여명 서광이 여기 너무나도 확실 무공하여라. 

 

최장규 지음 

시련과 영광의 탑을 지나니 쉼터가 나오고 詩碑도 보인다

지나온 상투봉과 가보지 못한 닫자봉도 보인다

깃대봉으로 향한다

 지나온  산림박물관과 상투봉이 보인다

깃대봉 오르는 길엔 흉물스런 폐초소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깃대봉(351m:12:23)

맥산행을 하면서 수없이 만났던 깃대봉이지만 이곳은 아픈 역사를 갖고있는 곳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폐초소처럼 생긴 건물은 옛 탄약 창고였고 정상에는 옛날 대공포를

보관했던 건물 잔해인 콘크리트 조각들이 많이 뒹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장기를 꽂았다고 해서 깃대봉이라 불렀단다

이곳 깃대봉은 그야말로 일제무제이다... 전망하나는 끝내주지만 흐릿한 박무가 아쉽기만 하다

 깃대봉에서 바라본 연화봉과 시련과 영광의 탑

가야할 입암산과 그 너머로 아산만과 아산(영인)지맥 종착지인

공세리 성당과 아산만 그 뒤로는 서해대교가 아련히 보인다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지난구간에 바라보았던 고룡산이 뚜렸하게 보인고

그 앞의 둔포면과 아산만 방조제 너머로 서봉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계두봉도 보인다

아산만 방조제 너머로 아련히 보이는 서해대교

고룡산 너머로 안중읍과 팽택 시가지도 흐릿하게 보인다

가야할 영인산 정상의 모습

영인산 정상으로 오르는데 좌측으로는 초소 2개가 있고 정상에는 배모양의 조형물이 보인다

영인산 정상의 조형물

범여가 보기엔 배모양처럼 보이는데 거대한 잎사귀 모양을 형상화 한 것이란다

예전에 미군부대 초소였다가 그 후에 한국군이 사용하던 것을 군대가 철수하면서

3층 규모의 대피소로 개조하였는데 3층은 전망대이고 1.2층은 대피소로 보이지만

이 건물로 인해 영인산 정상은 버렸다... 범여의 눈에는 흉물처럼 보인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현대자동차 아산 공장과 아산만의 모습

 

아산시 지도

예전에 아산군과 온양시로 나뉘어져 있던 곳인데 지금은 아산시로 통합이 되었다.

그런 곳이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쳐 사천시가 되었고,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쳐져

통영시가 된 것처럼...온양(溫陽)의 지명은 세종대왕이 지어준 지명인데 세종대왕은

3차례에 걸쳐 94일동안 온양에 머무시며 질병을 치료하였다

1441년(세종 23년)4월 17일 임금이 병이 나았으므로 특별히 온수현(溫水縣)을 승격하여

온양군(溫陽郡)으로 삼고 인하여 노비(奴婢)를 관호(官號)에 따라 채워 주도록 했다.

또 관찰사 이맹상(李孟常)·도사송취(宋翠)에게 각각 옷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아산(牙山)의 지명은 옛날에 돈 많은 욕심 장이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가 삼천석 지기나 되어 인근에서는 제일 부자 이었으나,

세상에 둘도 없는 옹고집 구두쇠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 며느리는 착하고 어여뻐서

동네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살았습니다.어느 날, 이집에 늙은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왔었는데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쌀 한 됫박을 시주하려 할 때

심술이 많은 시아버지가 나타나 쌀을 빼앗고 대신 외양간의 똥을 담아주며 스님을 쫓아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며느리는 스님을 불쌍히 여겨 뒷문으로 몰래 나가 스님에게 다시 쌀을 시주 하였다.

이때 스님이 며느리에게 하는 말이 이 집에 큰 액운이 깃들어 촌각도 지체 할 수 없으니 지금 곧 이곳을

피해야 하니 나를 따라 오시오. 그리고 뒤에서는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이렇게 당부하며 얼마를 가던 중 뒤에서 우뢰와 같은 굉음이 들려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그 으리으리한 자기 집이 불기둥에 휩싸여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며, 며느리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큰 바위로 변하였고 이 집이 있던 곳에는 지금 큰 연못이 생겨 장자 못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며느리가 변하여 바위가 된 형상이 아기 업은 모양을 하고 있어 아기 업은 바위, 또는 어금니와

같다하여 어금니 바위, 그리고 부처와 같다하여 불암이라 불러지고 있으며 현재의 아산시라는 지명도

이 바위의 어금니 아(牙)자에서 유래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설화산(雪華山)인 아산(牙山)은 아산시에 있는 명산(名山) 중에 명산(名山) 이고

정상에 새겨진 명문에도 있듯이 아산(牙山)은 칠승팔장(七丞八將)지지(일곱 명의 정승과 여덟 명의

장수가 나오는 명당을 이르는 말)로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중에 대명당이 아산(牙山)인 것이다.

 산 정상에는 산불감시탑과 허물어져가는 건물이 하나 서있다. 한때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부대의 건물이다.

 

산중턱의 청소년수련원도 미군 막사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사실 영인산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산이다.

아산시내는 물론 가깝게는 안중과 평택, 멀리 천안까지 굽어볼 수 있어 전략의 요충지로 꼽혀온 탓이다.

영인산 정상의 산불감시초소와 구조 이정목의 모습

영인산성으로 가는 이정표

영인산성 안내판

영인산 정상 2등삼각점

영인산(靈仁山:363.6m:12:33)

아산시 영인면과 영치읍, 인주면에 걸쳐있는 아산지방의 명산으로서 신선봉으로 부른다.

산이 높고 험준하지만 높이는 낮지만 서해바다와 가까운 들판지대에 솟아있기 때문에 조망이 빼어나게 좋다

 

이 때문에 옛부터 전략적 요충지여서 청일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고 6.25때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6.25이후에는 미군부대가 37년간 주둔하기도 했던 곳이다

또 산꼭대기에는 용샘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가뭄이 들때 기우제를 지내면 매우 영험하므로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영인면이라는 지명도 이 산에서 유래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신성산(薪城山 - 섶재산의 뜻)이라 수록되어 있고, ‘산마루에 옛성 2개가 연해서 쌓은 신성산성이 있는데그 북쪽 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주위가 480척에 높이가 10척이며, 남쪽 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위가480척에 높이가 4척인데, 옛날에 평택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우거한 사실이 있어 평택성(平澤城) 이라이름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영인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산 중턱에는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세심사가

있으며 이 산의 남쪽 산줄기가 동심산으로 고려 공민왕의 태를 봉안했던 곳인데 후에

영남의 금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영인산 정상석 뒷면

영인산 이곳 저곳을 두루 두루 살핀 다음에 초소옆으로 돌아와서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영인산을 내려오니 멋진 전망암이 보이고...

영인산 내림길에서 바라본 곡교천(橋川)의 모습

천안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대응리에서

삽교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옛날에 아산시 염치읍 일대의 하천에 나무로 놓은

굽은 다리가 있어서 하천 앞 마을을 고분 다리라 부르고 한자로 곡교리()라고

불렀으며, 마을 앞 하천을 고분 다리천 또는 곡교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1872년 지방 지도(1872)』에 곡교()와 곡교점()이 나타나고,

『대동여지도(輿)』에도 곡교가 나타나고 있으나 하천의 명칭은 미륵천()으로 표시되어 있다.
곡교천은 일부 구간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 풍세면에서는 한천(), 한내 또는

봉강천()이라고 부르고, 아산시 배방읍에서 쑥개, 봉호(), 봉강() 또는 봉강천이라고 부른다.

 영인산을 내려와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묘지(12:45)

 지나온 영인산의 모습

363.6m봉(12:47)

세심사 갈림길(12:50)

전망암(12:55)

망암에서 바라본 세심사(洗心寺)의 모습 

세심사(洗心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백제 때 창건해

654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자장스님이 중창했다고 하지만 입증할 문헌은 아직 찾지 못했다.
654년 창건사실이 입증된다면 무려 1359년의 역사를 간직한 현존하는 손에 꼽을 만한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다.

1530년(중종 25년)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 '여지도서' '범우고' 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1968년 일타(日陀)와 도견(道堅)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빌려 세심사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해 영산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소조(塑造)아미타좌상이 봉안돼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 18년) 조성한 것으로 승초(勝初)·원정(元正)·보심(普心)·품관(品寬)·대운(大云) 등이 그렸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돼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

산신각에는 1935년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다.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 유행하던, 청석(靑石)으로 만든 구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231)이 있는데,

상륜부(相輪部)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松梅堂)' 부도 2기만 있다.

이밖에도 1563년(명종 18년)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 의식집인 청문판(請文板) 4매가 남아 있다

멋진 전망암의 모습

전망암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C.C

 

아름다운 골프장은 당초 104만8526㎡를 체육시설로 인가받아 이 중 86만7448㎡를 18홀

골프장으로 개발해 2009년부터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예전에 저축은행 비리사건으로

얼룩졌던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각종 비리사건이 연루된 골프장이었다고 한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라운딩하는 골퍼들이 많이 보인다 

뚜렸한 등로에서 내려선다

안부에서 내려섰다가 오르는 길 우측... 깃대봉 아래는 엄청난 채석장 때문에 깃대봉 절반이 잘려져 나갔다

무명봉(13:00)

멋진 소나무를 지나니 이곳부터는 아예 등로가 보이질 않는다

보이지 않는 등로를 내가 길을 만들어 나가는데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내려서니 비포장 도로가 보인다

비포장도로(13:15)

비포장 도로 좌측에는 골프장의 쓰레기장이 보이고 도로를 따라서 올라간다

아름다운 C.C 입구(13:18)

점심식사(13:18~45)

오늘 아침을 온양온천역 앞에서 늦게 먹었고 산행 거리도 그리 길지 않은 탓에

간단한 행동식으로 점심상을 펼치는데 바람이 불지 않은 묘지에서 용산역에서

산 김밥과 캔맥주 하나, 그리고 따끈한 양송이 스프로 점심을 먹은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오늘은 수헌아우님이 동행해 주는 바람에 외롭지가 않다

20분 조금 넘게 식사와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아름다운 골프장 입구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산으로 오른다

벌목지를 치고 오르는데 간벌을 해논 탓에 그리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조금 힘든곳도 있다

신갈나무 사이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오르니...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개념도상의 231.4m봉이다

231.4m봉(13:53)

멋진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

자작나무 군락지 가운데를 지난다

우측으로 영인저수지와 고룡산이 보이고...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해 깃대봉 북사면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무명봉(13:57)

갈림길(14:00)

독도에 아주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 이곳에서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져야 하는데 우측으로 들어서니 등로는 아예 보이지

않고 잡목과 가시 넝쿨로 인해 베낭이 뜯기고 몸뚱아리는 할키고...

앞에가던 수헌아우가 잡목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아우님도 미치겠는가 보다...

맨발님! 대단혀요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남양홍공 묘지(14:10)

남양홍공 묘지 앞으로 내려가니 뚜렸한 길이 보이고...

민가로 내려선 다음에...

복흥골로 내려서서 감나무밭을 지나간다

가야할 길의 모습

냉정고개(冷井峴:14:20)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있는 고개로 628번 지방도가 지나가고 우측으로는 아름다운

골프장가는 길이고 고개에 우측에는 평강사슴농장 표시석과 버스 정류장이 있다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내정리는 동남쪽으로 덕흥산이 있어 낮은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 냉정저수지가 위치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복흥골, 잔다리 등이 있다.

복흥골은 냉정리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전에 그릇점이 있어서 점말이라 불렸는데

후에 점말을 다시 일으킨다는 뜻으로 복흥골이라 개명하였다.

잔다리는 냉정리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가는 다리가 여럿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어로 세교(細橋)라고도 한다

냉정고개 버스 정류장

아산(영인)지맥은 버스 정류장 우측의 평강사슴농장 뒤로 이어지는데 길이 막혀 갈수가 없다

입암산으로 향하는 이정표도 평강사슴농장쪽이 아닌 논두렁 가운데로 표시되어 있다

논두렁 가운데로 걸어 우회길로 향한다

논두렁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철조망이 막혀 또다시 좌측으로 우회한다

등로로 오르면서 바라본 복흥골의 모습

복흥골은 냉정리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전에 그릇점이 있어서 점말이라

불렸는데 후에 점말을 다시 일으킨다는 뜻으로 복흥골이라 개명하였다.

사슴농장 좌측 끝으로 간 다음에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14:33)마루금으로 접어든다

등로는 생각보다 무쟈게 좋다

능선 좌측으로 가야할 입암산이 보이고 바로 아래는 영광ENG 공장 지붕이 보인다

안부(14:40)

잡초가 무성한 안부를 지나...

목계단을 올라서니...

좌측으로 묘지가 나오는데...

경주이씨 舍人公派 가족묘가 나온다

경주이씨 가족묘 제단

묘지를 지나니 또다른 공장지대가 나오고...

공장의 끄트머리 지점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잔다리고개(細橋峴:14:45)

인주면 냉정리 잔다리마을에 있는 고개로 잔다리는 냉정리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가는 다리가 여럿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어로 세교(細橋)라고도 한다

잔다리고개 이정표

잔다리 고개에서 올라서니 좌측엔 남원양공과 목천마씨 부부 합장묘가 보이고...

묘지 위에서 바라본 잔다리 마을

마을 모습은 보이질 않고 보이는 건 공장 지붕밖에 없다

오랫만에 진혁진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우리나라 맥 산꾼들에게 산행지도를 제공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는데 요즘에

트랭글이나 오룩스같은 맵지도가 나와 옛 명성을 많이 잃어 버린듯 하다

그래도 산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나같은 사람은 아직도 님의 지도와

나침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새로 입문하는 초보 맥산꾼들도 지도나 나침판보다는 전자지도를 의존하는데

기계에 너무 많이 의존하지마소... 그러면 자꾸만 뇌만 퇴화되오... 독도법을 알줄은 알아야지

안부에서 올라서니 우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입암산과 십자가가 서 있는 공동묘지도 보인다

지나온 영인산 줄기도 보이고...

가족묘지를 끼고서 내려서니 지도상의 수레너미 고개가 나온다

수루네미 고개(車峴:15:00)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서 영인면 신현리로 넘어가는 고개라는데

고개의 역할은 잊으지가 오래된 듯 흔적도 보이질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영인면 신현리의 ‘현’은 한자어 이름 차현(車峴)에서 온 것이며 영인면 신현리와

인주면 냉정리 사이를 넘어 다니던 이곳의 두 고개 역시 수레너미(수루너미,수레너머)인데

한자어로 기록하면서 차현이라 했고 그 아래 마을의 이름은 차현리라 했다.

이 수레 차(車)로 인해 그 뒤에 ‘수레가 넘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덧붙게

되었고 그 이야기가 정설인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물론 그 고개로 실제 수레가 넘어 다녔다고 해도 원래는 산을 뜻하는 술(수리)에서 비롯된 고개 이름이다.

수레네미 고개에서 오르니 우측으로 묘지가 있고 전망이 트이는데 고룡산과 영인면 일대가 다 보인다

105m봉(15:02)

105m봉으로 올라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나 우측으로 가본다

우측 끄트머리에 가니 절개지가 나오는데 입이 딱 벌어진다

 

채석장이 있고  마당에는 쓰레기가 지저분하게 널려있는데

바로 앞에는 파먹다가 남은 채석장이 하나의 암봉으로 변해있다

오늘은 유난히도 채석장을 많이 만나는데 이제 파먹을만큼 먹었으면 그만 묵으라

절개지에서 바라본 아산만(牙山灣)

 아산 위치. 네이버 지도 참조

 

아산 위치. 네이버 지도 참조

우리 한반도를 토끼 한 마리가 앞뒷발을 가지런히 곧추세우고 서있는 형상으로 곧잘 비유한다.
그 내복부 가장 오목하게 또 깊이 들어가 있는 곳이 바로 아산만이다.
평택·아산·당진 세 고을이 그 아늑한 해만을 둘러싸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와의 해상교통은 이 아산만을 통해 이루어졌음은

당나루란 뜻인 당진이란 지명만 보아도 알 수 있드시  이 아산만에만

당진포(당진), 당포(아산군), 당항(평택군) 같은 지명이 세 개나 있다.

예부터 국제항구였을 뿐 아니라 충청도 40고을의 모든 세곡은 모두
이곳에 모아 서울로 운반했던 유수한 국내항구이기도 했다.

지금도 아산에 '관창'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기에서 서울까지는 뱃길
로 500리 잡았다. 옛 말에-아산창지기 평양감사보다 낫다했음은

흥청 거렸던 옛 아산항을 연상케 해준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서인지 서해안 유수의 군항이기도 했던 아산만은 
일본해적인 왜구의 약탈이 혹심했기로 선조 연간에는 아산만 일대가
폐허가 되어 아산이라는 고을(현)을 폐하고 직산(稷山)현에 소속시키기
까지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아산만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에는 옛 산성이
쌓여 있지 않은 산이 없고 이를테면 어라항산성·앵리산성·수한산성·신성산성·

복부산성·연암산성· 월주산성·천덕산성·학성산성·고용산성··· 등등.

한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와 통상거부에 앙심을 품은 프랑스주교
페롱과 유태상인 오페르트가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해 도굴선을 갖다댄 것도 바로 이 아산만 구만표였다.
아산만의 썰물 시간까지 도굴을 못다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

그후 강화도의 운양호 포격사건의 보상책으로 일본은 동해안과 서해안
두 군데의 개항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 화방의질(花房義質) 일본공사는 직접 군함 고웅호를 타고 서해안
의 개항지를 물색하고 다녔는데 당시 답사보고기록에 보면 목포·군산·
아산·남양·강화·제물포의 장단점을 거론하고 결국 군산이냐 아산이냐
제물포냐 하는 삼자택일로 압축시키고 있다.

그 보고서에 보면 도이(桃李)도에 정박, 한 달에 걸쳐 아산만을 측량했
는데 '인근에 거읍명촌(巨邑名村)'이 적고 주선(舟船) 출입이 한산하며
만내에 사주(砂州)가 있어 양항(良港)이랄 수 없으나 산과 섬으로 아늑
히 둘러 있어 외해의 큰파도를 막아주고 또 배를 댈만한 기슭도 있다'
고 했다. 하지만 전략상 서울에 가장 가까운 제물포에 눈독을 들여 끝내

아산 개항은 좌절되고 만 것이다.

그후 동학난리가 나고 청 · 일 간에 전운이 감돌 때 청나라에서는 엽지초
(葉志超)를 사령관으로 하는 3,500의 병력을 아산만 백석포에 상륙 주둔
시키고 정여창의 북양함대 8척으로 아산만을 지키게 했다.
개전과 더불어 아산만의 바다와 내륙에서 이 함대는 박살나고 말았지 만 …

아산만의 역사는 그래서 기구하고 무상하다 (펌글)

133m봉(15:10)

엉터리 이정표가 133m봉을 지키고 있는데 위치가 반대로 되어있다

입암산 쪽엔 냉정고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우측에 설치해야 하는걸

좌측으로 설치해놨는데도 아산시 담당자는 확인도 안하고 결재한 모양이다

 

하기야... 책상머리에 앉아서 현장 확인도 않아고... 그런 공무원들에게

그런걸 바란다는 자체가 어쩌면 무리인지도 모르지...복지부동한 나리들

제발 민초들의 피땀흘려 낸 세금으로 녹을 받으면서...제발 정신들 차리소 

133m봉을 지나서 잡목을 헤치고 나가니 엄청난 채석장 절개지가 산꾼 범여의 앞을 가로 막는다

난 처음 지난해 12월 중국 태항산갔을 때의 태항산 대협곡인줄 알았는데 채석장이다

석산 갈림길(15:20)

수로를 따라서 입암산 방향으로 향한다

지맥길을 완전히 짤라먹은 채석장

입암정 정상의 이정표

잠시후에 가야할 입암산의 모습

입암정에서 바라본 아산만과 냉정저수지

입암정(笠岩亭:15:40)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위치한 입암정은 팔각정자로 주위에는 멋진 암릉과

운동기구와 쉼터가 조성되어  아산만과 냉정저수지가 한 눈에 보인다

입암산 가는길에서 바라본 입암정의 모습

입암산 정상에 도착한다

입암산(笠岩山:207.4m:15:43)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와 인주면 공세리의 경계에 있는 나즈막한 산으로

산의 형상이 갓의 형태로 보인다해서 갓바위산(笠岩山)이라고 부르며넓은

공터에 인식을 제대로 할 수 없는 3등삼각점이 있다

입암산 3등 삼각점(△ 아산309)

공세리로 향하는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멋진 암릉구간을 지나고...

천등말 갈림길(15:50)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천등말은 서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등혈()"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등말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향한다

묘지를 만나고...

입암산 아래의 엄청난 채석장

토석채취업체인 용하산업이 운영하는 곳이라는데 아무래도 입암산은 지도에서 사라질듯 싶다

천주교공원묘지 삼거리(16:00)

공원묘지 가기 직전에 넓은 도로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천주교공원묘지

개화기에 이곳 아산과 당진, 서산쪽으로 천주교가 유입된 탓인지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천주교 묘지 맨 위의 능선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114.1m봉(16:03)

아산(영인)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114.1m봉을 지나서 직진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길이 없는 등로를 헤치고 내려가니...

좌측으로는 천주교공원 묘지에서 내려오는 포장도로와 만나는 길엔 밭이 보인다

편안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면 인주파출소가 나오고 공세리 성당으로 가는 편한

길이지만  난 내 스타일대로 우측의 밭 가장자리로 내려간다

가야할 공세리 성당이 보인다

인주면 공세리(貢稅里)의 모습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는 바다를 마주보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동남쪽에는 농경지가 분포하며 공세창이 있었으므로 공세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공세지, 동강, 서강, 새원, 천등마을 등이 있고 공세지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 유래 또한 공세리의 그것과 같다. 동강마을은 공세지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배가 닿았었다고 한다. 서강마을은 공세지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에는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와 조세를 배에 직접 실어 냈다고 한다. 새원마을은

공세지 북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새로 언(뚝)을 막고 마을이 되었으므로 새원이라 하였다.

천등말은 서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등혈()"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세리 마을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좁은 2차선 도로가 나온다

삼도해운판관비 (三道海雲判官碑:충청남도 문화재자료:14:10)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비(碑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었으며 해운판관()의 청렴한 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해운판관은 조창()을 돌며 세수미의 선적을 감독하고 배가 조창()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관리하는 조운() 업무를 맡았다. 비는 모두 9기인데 흩어져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모아 놓았다.

이중 3기는 현감의 선정비이고 6기는 해운판관비이고 비에는 모두 라고 새겨져 있다.

9기의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이고, 가장 최근 것은 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이다

아산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조선 중기 조창이 있었던 터로서 충청남도 기념물 제21호다

공세곶창이 설치된 것은, 1478년(성종 9) 면천() 범근내포()의 것을 폐지하고 이곳에

새롭게 정한 뒤 부터이며 현재 창고지 주변에 축조한 성지로 약 300칸 정도의 창지()를 볼 수 있다.

 

최초에는 창고가 없이 노적하였으나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하였다.

이곳에는 공주목 이하 임천ㆍ한산ㆍ정산ㆍ회덕ㆍ진잠ㆍ연산ㆍ이산(노성)ㆍ부여ㆍ석성ㆍ연기 등

12군현의 세미와 홍주목 이하 서천ㆍ서산ㆍ태안ㆍ면천ㆍ온양ㆍ평택ㆍ홍산ㆍ덕산ㆍ청양ㆍ대흥ㆍ

비인ㆍ남포ㆍ결성ㆍ보령ㆍ아산ㆍ신창ㆍ예산ㆍ해미ㆍ당진 등 19군현의 세미를, 그 외 청주목 이하

천안ㆍ옥천ㆍ문의ㆍ직산ㆍ회인 등 6개 현의 공세미 등 합계 39개 목ㆍ군ㆍ현의 것을 납고시키고

다시 경사로 수로 500리 길을 선박으로 조운하였다.

 

해운 판관을 두어 주관케 하였다. 현재 1672년(현종 13) 3월 ‘(삼도해운판관비)

’(높이 125㎝, 넓이 72.6㎝, 두께 49㎝)와 1708년(숙종 34) 해운판관 이의만()의

불망비(, 높이 150.5㎝, 넓이 55.7㎝, 두께 13.4㎝), 1653년(효종 4) 판관 한진의()의

선정비(높이 106.5㎝, 넓이 44.5㎝, 두께 18㎝) 등 8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산시의 문화재 관리수준은 빵점에 가깝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공세곶고지 맞은편에는 이명래 고약 만들었던 집이 보인다

이명래 고약의 고향이 바로 이곳 공세리라고 한다

예전에는 왜 그리몸에 종기가 많이 났는지, 지금의 30-40대도 몇 번 경험을해 봤을 듯 한데, 종기가 낫다 하면

누구나 쓰던 약이 바로 이명래고약이다. 80-90년대만 해도 집안 상비약에는 이명래 고약이 꼭 끼어 있었는데,

실은 이명래 고양의 개발자가 바로 공세리 성당을 세운 드비즈 신부다. 비즈 신부는 프랑스에서 배우고 익힌

방법으로 원료를 구입해 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 당시 신부님 곁을 보좌했던 이명래(요한)에게

비법을 전수해서 전국적으로 보급되게 된것이다

 

도로에서 공세리 성당으로 향한다

공세리 성당가는 길은 마치 유원지를 가는 느낌이다

공세리 성당 안내판

성당 이곳저곳을 두루 관람한다

공세리성당(충남 문화재 제144호:16:20)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인주면 공세리 언덕 위에 세워진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의 본당으로

초기 선교사들이 포구에 상륙하여 전교를 시작한 곳으로 1894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동네 가운데 민가를 교회로 사용했으나 1897년에 사제관이 세워졌고 본당은

1922년에 완공되어 충청남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공주 본당, 안성, 온양,

둔포 본당이 분할되었다. 경내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429.75m²(130평) 규모의 본당과 사제관, 피정의 집, 회합실 등이 있으며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각종 수림으로 쌓여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성지다.

이곳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곶고지가 있던 곳이다.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우리나라에서가장 아름다운 성당인 공세리 성당이 있다.

드라마와 영화, CF를통해 눈맞춤을 한 곳이라 유명세를 타지만, 공세리 성당은

TV화면에도 자주 노출되고 예전에 드라마 모래시계’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드비즈(Devise, )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으며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공세리 성당내에는 수백년씩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팽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공세리 성당 마리아상

32위 순교 현양비

경내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429.75m²(130평) 규모의

본당과 사제관, 피정의 집, 회합실 등이 있으며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각종 수림으로 쌓여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성지다. 이곳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곶고지가 있던 곳이다

순교자 묘지

마치 절에 온 느낌이다... 한국 천주교는 불교를 많이 닮아가는 중인것 같다

공세리 성당 이곳저곳을 두루 살핀 다음에 수헌 아우님과 함께 성당앞 쉼터에서 앙꼬빵에다가

쥬스하나를 마시면서 공세리 성당에서 마무리할게 아니라 아산만에 가서 발을 담가야 지맥길이

끝나는게 아닌가하면서 아우님을 꼬시는데 순순히 가자고 한다

공세리 성당 십자가의 길

성당의 본당 뒷쪽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는데 10개의 예수가 로마군에 박해당하는

조각상이 있는데 아무리봐도 길은 보이질 않아 중간에서 절개지로 내려서니

인주에서 평택으로 나가는 34번 국도가 나오고 차량 통행량이 엄청나게 많다

34번 도로를 건너야 아산만으로 가는데 무단횡단 했다가는 개죽음 당할것 같고

하여 지하관로의 개구멍도 보이질 않으니...난감하다

왜 선답자들이 공세리 성당에서 산행을 마무리 하는지 이해가 된다

날씨는 자꾸만 춥고 바닷가라서 그런지 바람이 세차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공세리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 간다

공세리 버스 정류장(16:50)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바람은 세차고 버스 시간표를 보니

이곳에서 온양온천 가는 버스가 17시 30분이 되야 온단다

하는 수 없이 정류장에다가 베낭을 벗어놓고 바로 파출소로 들어가서

너무 추워서 그러니 따뜻한 커피 2잔만 달라고 하니 부소장(계급:경위)쯤

되어 보이는 분이 커피 2잔을 타 주는 바람에 아우님과 커피한잔 마신다

17분 30분 버스를 타고 온양온천역으로 향한다

온양온천역(18:05)

온양온천역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19시 25분 열차표를 예매한 다음에 아침을 먹었던 식당으로 향한다

온양온천은 현존하는 문헌기록상 그 출전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여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이라 칭하여졌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온 기간은 약 600여 년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온양행궁)을 짓고휴양이나 병의 치료차 차 머물고 돌아간 사례가 많고

신정비, 영괴대 등 다수의 관련 유적들이 남아 있어 왕실온천이라 일컫는다.

 

정조 19년(1795)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영괴첩』의 온양별궁전도에는

내정전, 외전전, 탕실 등의 중앙 내부전각은 크고 자세히 그려져 있고, 외각 사면의

궁장, 사문, 각사는 작고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 아산에는 왕실온천 온양온천 외에신라시대부터 약수로 이름난 도고온천과

1987년에 발견되어 1991년에 관광지ㅣ로 지정된 아산온천까지 3대 온천특구가

조성되어 있다 

아침을 먹었던 식당에 또다시 들려 전골에다 소주에 맥주를 말아서 저녁까지 든든하게 먹고 서울가는 열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