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6년 3월 13일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가끔 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7km / 6시간 2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성목재-코리아테크앞-NO34 / 64송전탑-진주유씨가족묘-파평윤씨 직장공파 추모단
포도밭-금당정미소-엄나무공원-진선제2농장-금당1리갈림길-갈림길-남양홍씨 묘지
웃소고지-무명봉-135.8봉-행기실 도로-토토원룸-포도밭-굴고개 위(당성터널)-임도
당항성-구봉산(망해루)-신흥사-159봉-구봉터널 위-바리고개-헬기장-체육시설
봉화산-팔각정-여우재-안동김공 묘지-하내테마파크 후문-하내테마파크 정문(66번도로)
무명봉-절개지-안부-함경산-무명봉-아리랑고개-배수지 갈림길-갈림길-97.2봉-갈림길
진주정씨 묘지-한옥마을-담밭사거리-담밭성지길-갈림길-청주양씨 묘지-넓은 임도-김해김공묘지
78.5봉-임도갈림길-전원주택-제부도갈림길-무명봉-전주최공묘지-kt이동통신탑-76번도로-살곶이
☞소 재 재: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요즘 시대를 살아간다는게 참으로 끔찍하기만 하다... 세상사 모든게 막장 드라마를 보는듯 하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마치 자기의 소모품처럼 여기는지... 오늘도 계모와 친부의 손에 일곱살난 평택의
원영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구나... 천벌을 받을 인간들... 어찌 사람들이 이렇게 독할까?
그러는 사이에 늘 자기 잇속만 차리는 여의도의 금뺏지 다신 분들은 자기 밥그릇 싸움에 골몰하고 있을 때
민초들의 삶른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하니,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겪는 苦일까.
또 하나의 빅 이슈... 인간 VS 알파고(AI)라는 인간지능과의 바둑대결... 난 애초부터 힘들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구글이라는 기업의 상업적 목적에 천재기사 이세돌 9단이 희생양이 되는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에 내리 세판을 졌을때 안쓰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4국에 통쾌하게
이겨 인간승리를 안겨준 이세돌 9단에게 찬사를 보내면서도 자꾸만 세상사가 각박하고 험해지는 건
편리함과 능률적이란 이유로 기계적인 삶으로 변해가는게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휴머니즘을 잃어버린 사회...인간적인 삶으로 되돌아 가는건 이미 늦은 것일까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삼존리 버스정류장(07:35)
사당동에서 1008번 버스를 타고 남양읍 사거리에 내려서 다시 1004번 버스를 타고 삼존리에
내리니 식당이 보인다... 이곳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맞은편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다시 이곳에서 3번 버스를 타고 청원초등학교 향하는데 손님이라곤 달랑 나혼자다
세종수퍼앞 (08:55)
버스는 마도면 동네 골목골목을 돌아서 청원초등학교 앞에 내려달라고 하니
버스 기사가 내리라는 곳에 내려보니 청원초등학교 한 정류장 전인 세종수퍼 앞이다
하는 수 없이 3분정도를 걸어서 청원초등학교 정문앞인 명륜마트 앞에 도착한다
성목재(09:00)
지난 2월 10일에 이곳을 왔으니 한달이 조금 지났구나
이곳에 있는 명륜마트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서 마시고 산행을 준비한다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하고 잔뜩 흐리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다
대한노인회 마도분회를 지나고...
우주컨테이너 공장도 지난다
코리아 테크앞(09:07)
코리아 테크 공장앞을 지난 다음에...
317번 지방도를 버리고 우측 농로로 접어든다
등로로 접어들자마자 현오님의 반가운 시그널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예전의 인삼포였는데 지금이 수확이 끝났는지 맨살을 드러낸 황토밭으로 변해있다.
농로 좌측으로는 공장이 보이고...
농기계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조립식 주택을 지나고...
NO34 / 64송전탑(09:13)
진주유씨 가족묘(09:14)
송전탑의 좌측으로 돌아 오르니 진주유씨 가족묘가 나오고 묘지 아래로는 금당산업단지가 보인다
묘지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또 다른 묘지가 나오고...
천주교인 묘지도 지나고...
묘지지대를 지나자마자 초반부터 잡목의 저항은 시작되고...
현오님과 바랑산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또 다시 묘지를 만나고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지맥길을 이어간다
파평윤씨 직장공파 묘지(09:25)
파평윤씨 묘지 뒷쪽의 숲속으로 진행하니...
다올 방장님의 시그널이 잡목속에 걸려있다...잘 계시죠?
잡목속을 헤매면서 내려서니...포도밭이 나온다
포도밭(09:30)
포도밭을 지나니 황토밭이 나오고 저 멀리 금당정미소가 보인다
밭에서 내려 농로를 따라서 금당정미소로 향한다
금당정미소(09:40)
금당정미소를 지나니 좌측으로 녹슨 화장실이 보이고...
금당리(錦堂里) 마을회관으로 내려가는 길 옆에는 사각정자가 있다
마도면 금당리는 본면의 중심에 위치하며 산아래 골짜기에 있는 농촌마을이다.
신당이 있으므로 금당골, 금당 또는 금당곡, 금달이라 한데서 금당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금달, 대촌, 소고지 등이 있다. 대촌은 금당골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소고지는 곶으로 되어 붙은 이름이다.
엄나무공원(09:42)
진선 제2농장(09:43)
농장 옆길을 따라서 걸어간다
금당1리 갈림길(09:45)
갈림길(09:50)
남양홍씨(南陽洪氏) 묘지 갈림길(09:55)
남양홍씨의 시조는 삼국시대에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8명의 재사(才士)중에 한명이 이곳에 정착하여
남양홍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 성이 당나라 홍씨들이 쌓은 성이라 하여 당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남양홍씨 묘지 뒷쪽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남양홍씨 묘지에서 바라본 금당리의 모습
남양홍씨 묘지를 지나자마자 금새 등로는 험악(?)해지고...
웃소고지(10:05)
화성시 마도면 금당리와 해문리를 잇는 고개로 금당리 소고지는 곶으로 되어 붙은 이름이다.
마도면의 麻道는 마을 지명중 해문리(海門)라는 지명이 지금도 있는데,
지금은 화성호 방조제에(서신면 궁평리~ 우정읍 매향리 사이) 막혀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지 않지만
해문 포구(항구)를 통해 아주 먼 옛날부터 중국과 해상무역이 이루어진 관문이었다.
또한 중국의 사신들 일행이 해문 바닷 포구에 내려 한양으로 향하였던 길목으로 황토흙이
많이 산재하고 비가오면 길이 질고 빠져 걷기가 불편하며 포장도로가 없던 시절에 조상님들의
지혜로 베틀에 거친 삼베를 짜서 일정한 폭으로 길에 깔아 걷기 불편함을 다소 해소한 데에서
유래되어 마도면(麻道: 즉 삼베길)이라 지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웃소고지를 가로질러 등로로 올라서니 완전히 고속도로 수준인데 벤취 2개가 있다
날씨는 점점 어두워지면서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무명봉(10:17)
135.8봉(10:20)
135.8봉 삼각점(△대부 418 / 1990재설)
135.8봉 정상의 모습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건너편에 원룸이 보이고 가야할 원룸 2개동을 포스트 삼아 걷는다
우측으로는 코코포도밸리 아파트가 있다
주택 아래로 내려선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주택으로 내려서니 쥔장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선진종합가스 간판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행기실 도로(10:30)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에 있는 도로가 있고 도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원룸쪽으로 향한다
백곡리 행기실마을 뒤의 해발 90m 내외에 화성백곡리고분(華城白谷里古墳)이 야산
정상부 능선과 사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수원에서 서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다
해발 100m 내외의 야산이 발달하여 있는 곳으로서 유적의 서쪽에도 해발 250m의
야산이 해안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으며, 그 산 정상부에는 토성이 있다.
조금전에 걸었던 능선을 다시한번 뒤돌아 보고...
토토원룸(10:33)
원룸 담벼락 절개지를 끼고 올라선다
절개지를 치고 오르는데 웬 넘의 잡목은 태클을 걸어대는지... 힘들게 빠져나오니 농로가 나온다
농로를 따라서 송전탑과 당성터널을 바라보며 걷는다
임도를 따라서 내려가니...
포도밭(10:43)
포도밭과 인삼밭사이를 가로 지르는데 이곳은 포도밭이 많이
보이는데 그 유명한 송산포도의 생산지가 이곳이다
포도밭을 지나 당성터널 방향으로 가는 길엔 망해버린 포도밭도 나온다
해운분맥 분기봉(10:50)
망해버린 포도밭을 지나 당성터널쪽으로 오르니 묘지 한기가 있고 좌측엔 121봉이 보인다
이곳은 예전의 굴고개로 좌측 방향은 태행지맥에서 갈라져 나온 해운분맥의 분기점인데
해운분맥은 이곳에서 분기하여 청명산, 해운산을 거쳐 궁평항으로 가는 분맥이다
굴고개(당성터널 ) 위(10:51)
굴고개는 화성시 서신면과 송산면을 잇는 고개로 지금은 고개밑에
당성터널이 개통되어 4차선의 309번 지방도가 지나가고 있는 곳이다
당성터널 위에서 바라면 송산면 육일리(六一里)
육일리의 유래는 ‘교리’라는 벼슬을 한 사람 6명과 1명의 영의정을 배출했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밭이 나오는데 밭 가장자리에 언 넘이 해치웠는지 노루 한마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얀집을 지나 임도를 따라서 걷는다
임도를 따라 걷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쥐불알만한 개쉬끼 한마리가 생지랄을 하면서 달라든다
임도를 버리고 좌측 밭가운데를 가로 지른다
밭을 가로질러 잡목으로 헤치고 올라서니 반가운 시그널이 산꾼 범여를 반긴다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니 당성 성곽이 보이고...성곽위로 오른다
당성(唐城:사적 제217호:11:05)
화성시 마도면과 서신면, 송산면에 걸쳐있는 당성은 당항성으로도 불리는데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당성군이던 것을 다시 신라가 점령하면서 당항성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은 서해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류를 하던 출입지역으로 군사적으로 보나 교역으로 보나 매우 중요한
요충지여서 이 구봉산 일대에 성을 쌓게 되는데 그 성이 당성으로 마지막 쌓여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또 그 유명한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에 대한 일화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 당성이기도 하다.
문무왕(文武王) 1년(661)에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도반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항성, 당성)이며,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 노숙하였다.
깊은 밤 목이 말랐던 원효대사는 머리맡에 바가지의 물을 마시게 되는데 자고 일어나니
두 스님이 묵었던 동굴은 무덤 속이었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대사는 아침에 일어나 어제 저녁에 마신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깨달아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 간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되돌아와 무애행으로 불교 포교에 전념하였다.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는 중국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법상종을 일으키고 훗날 우리나라와
일본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당성>자료집에는 신라의 문호 최치원(879~?)에 대한 이야기와 시도 한 수 적혀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지만, 고국에 돌아와 봉사하려 했으나 현실은 따돌림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는 여생을 전국을 유랑하며 살았는데, 그 유랑시기의 어느날 당성에 왔다가 알고 지내던 악관(樂官)을 만난다.
그도 최치원처럼 따돌림을 당하다 당나라로 돌아가던 중이었고, 둘은 술자리를 벌였고, 악공이 두 어 곡을 연주하더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최치원은 그의 재주와 이런 인재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버림 받는
현실이 안타까워 하는 심정을 담은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인생이란 성했다가도 쇠퇴하니덧없는 인생이 참으로 서럽구나글쎄, 저 천상의 곡을뉘 알았으리,
이 해변에 와서 볼 줄이야물가 궁전(안압지?)에서 꽃을 보며서늘한 난간에서 달을 보며 불기도 했었지
선왕을 이제 뵈올 수 없으니이 몸도 그대 더불어 눈물 줄줄 흘리네
(동문선권9, 오언율시)
갈림길(11:08)
화성(태행)지맥을 걸어면서 가장 혼란스러운 갈림길이며 분란의 소지가 있는
곳이지만 딱히 어느곳으로 가야만 맞다는 결론이 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산행 고수들도 어떤 분들은 우측의 송산면으로 가서 승학산과 와룡산으로
가서 전곡항으로 가는게 맞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 뷴들은
구봉산, 봉화산, 함경산을 거쳐서 살곶이 방향이 맞다고 하지만 정확히 규명은 안된다
흔히들 낙남정맥길에 용지봉에서 녹산수문으로 떨어지는게 맞느냐 아니면
신어산을 거쳐서 고암나루터로 가는게 맞느냐는 것과 또하나 금남정맥이
702봉에서 왕사봉, 천호산을 거쳐 군산앞바다로 가는냐, 아니면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 부여 구드레 나루로 입수하는게 맞느냐는 식인데 딱히 결론은 없다고 본다
나 역시 확신은 서지 않아 오늘은 좌측의 제부도 방향으로 가고 다음
구간에 우측의 승학산과 와룡산을 지나 전곡항으로 걸어볼 생각이다
당항성(黨項城)으로 오르는 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당성(黨城)이라고도 하며 둘레 1,200m로, 1971년에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는 테뫼형(山頂式)과 포곡형(包谷形)을 결합한 복합식으로, 현재 동문ㆍ남문ㆍ
북문의 터와 우물터, 건물지가 남아 있다.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던 지역는데,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 백제의 영향을 받아 복합형 산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항성이 있는 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唐恩郡)이었다.
이곳은 신라가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통했던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영유왕 때 당나라로부터 8학사가 왔는데, 그 가운데 홍씨 성을 가진 학사가 이곳에
살아서 당성후(唐城候)가 되고, 이후 당성 홍씨(나중에 南陽洪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고려 초에 성을 쌓았는데, 조선 성종 때에 과수원으로 바뀌어 장원서(掌苑署) 관할에
두었으나 이후에 과수원은 폐지되고 성도 거의 폐허로 변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구봉산 정상에 지금은 성지만 남아 있고 성내의 망해루도 초석만 남아 있다.
신라가 점유한 후에는 중국 교역의 관문이었으며, 신라 말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강화의 혈구진, 완도의 청해진과 더불어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당성에서 바라본 송산면 사강리(沙江里)의 모습
사강리는 예전에 바닷물이 주변까지 들어와 모래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며
남양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사강리는 송산면, 서신면, 마도면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구봉산(九峰山:158.6m:11:13)
화성시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양반도 중앙부에서 서남쪽의
바다 방향으로 비스듬하고 길게 늘어서 있는데, 구봉산이란 산 이름도 길게 늘어선
산줄기의 봉우리가 9개 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삼국시대의 당성(唐城)을 품고 있어며
지금은 당성을 보수하느라 완전히 공사판이다
망해루지 추정 안내판이 서있고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다.
망해루지(望海樓址)
서해도서와 해안이 조망되는 당성의 가장 높은 지점인 구룡산 정상에 위치애 있던
누각인 망해루(望海樓)가 있었던 옛 터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南陽府 望海樓記)”에 의하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鄭乙卿)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2001년 발굴 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계단및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장방형의 장축 11m, 단축 8m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한편 유구 노출과정에서 인화문 토기류와 고식(古式)의 기와들이 확인되어 1차 성벽
(석축성벽:통일신라)과 관련된 건물지가 중복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구봉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독립군의 시산제
1년에 70여번의 산행을 하면서 늘 산에 대한 고마움을 山王大神에게 술한잔
부어놓고 간단한 예를 올리며 올 한해도 무탈하게 지켜주길 기원해본다
산왕대신에 간단한 예를 올리고 막걸리 한잔으로 음복한 다음 봉화산으로 향한다
구봉산 정상의 모습
남양부 망해루기
당성인(唐城引) /문정공(文正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지음
당성 해안은 화개와 같으니 포구는 이를 둘러 안팎으로 나뉘었네
영령이 모인 곳에 인물이 나고 곧고 웅위한 큰 인재 다 당대에 뛰어났네
덕산 촌 주는 강남에서 자라 요동에서 백모 쓰고 처음 가서 참여하였네
학야 에 양과 개가 가까이 하는 것을 혐오하네
해외에 삼신산을 찾고자 하며 배를 경랑에 뛰워 딴 세상을 만나니
두 눈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는 돋을 멈추고 해안에 내려 해를 점치고 세대를 점쳐보니
남마다 동방을 도와 천만년 길이 가리
신라 이래 우리 고려에 이르기 까지 예악과 시 서로 군자를 내었네
수재는 강도 말에 독보적인 존재여서 반란 기운 쓸어 없애 대궐 문을 열었네
기강이 다시 떨쳐도 벼슬을 사직하였고 쥐들이 다시 설치는 것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태사 가 탄생하사 왕실에 배필 되니 성자 신손 이 오늘에 이르렀네
아 덕산은 출중한 인물이어라
저절로 어울러져 좋은 일만 이루어 지고 푸른 솔 뜬구름은 젖은 듯이 푸르구나
내 일찍 말을 세워 멀리서 우러러 읍 했어 라
양파 선생은 어디에 계시는가
높은 위풍은 천년가도 미칠 자 없으니 뛰어남을 본받지 않는 것은 자손 없는 것과 같고
문하에 사람이 있으나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네
구봉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서 50m 정도 내려간 다음 우측으로 꺽어진다
임도를 따라서 내려서니 굉장히 큰 규모의 신흥사가 보이고...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서 등로를 벗어나 신흥사로 내려간다
신흥사(新興寺:11:50)
신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원래는
당성 안에 있던 사찰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며 절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구봉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던 한영석이란 거사의 꿈에 위풍당당한 도승이 나타나
이르기를 “당성 안에 옛 고려시대의 석불이 계시니 모셔다가 새로이 절을 일으키라”라는
말을 듣고 당성 안의 옛 절터에서 석불을 찾으니 키가 2m에 이르는 불상이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그 도승이 꿈에 나타나 이번엔 대부도 앞 바다의 불도라는 섬에도 석불이
계시니 모셔오라는 계시를 받고 모셔오고 보니 그 모습이 같은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한영석 거사는 전답과 임야를 시주해 신흥사를 세우게 된다.
등로에서 내려가 처음으로 만난 전각이 삼성각이다
신흥사 삼성각
삼성각은 칠성, 독성, 산신을 모신 전각으로 중앙에 모신 칠성(七星)은 북두칠성을 말하며
칠원성군(七元星君), 또는 칠성여래(七星如來)라고 하며, 우측의 독성(獨聖)은 옛날 천태산에서
홀로 도를 닦아 연각(緣覺)을 성취하신 나반존자(빈두로파라타 존자)이며 홀로 깨달았다고 하여
독성님이라 부르며, 좌측의 산신(山神)은 이 세상 만물에는 다 주인이 있는데 산에 주인은 산신이라
부르는데 이건 불교의 원래의 모습이 아닌 토속신앙이 불교에 흡수된 산신을 모셨다고 보면 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987년도에 건립되었으며, 맞배지붕 건물로 양쪽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으며 벽화및 단청은 통도사의 동원스님이 그렸다고 한다
전각 내부에는 존상을 봉안하지 않고, 칠성, 독성, 산신의 탱화만 봉안되어 있다
신흥사 석조약사여래입상
옛 절터에 있던 파불을 옮겨와 상호를 복원하여 모신 부처님으로 현재 절에서는
석조약사여래 부처님으로 모시고 있지만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왼손은 가슴에
모시고 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관음보살에 더 가까워 보인다
상호를 복원하여 옛 모습을 알 길은 없지만 의습선을 비롯한 전체적인 비례감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관음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어린이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20여전 목조 10평의 작은 건물에서 어린이 불교학교를 시작하여 매주 일요일마다
어린이 법회를 열고 있으며, 1994년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수선당
ㄷ 자 형태의 팔작 지붕형태이며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신흥사 큰법당
신흥사 주법당인 큰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0년에
건립되었으며 한글로 쓴 큰법당의 편액과 주련은 석주스님이 쓰신거라고 한다
화려한 닫집과 단청으로 장식된 법당의 내부에는 당성(唐城)과 불도(佛島)에서
모셔왔다는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 그리고 새로 조성된
석조대세지보살상과 함께 삼존불 뒤로 삼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신흥사 큰법당 내부의 모습
범종루
신흥사 이곳저곳을 주마간산격으로 훓어본 뒤 갈길이 바빠 서둘러 길을 떠난다
부처님교화공원
부처님 교화공원은 부처님의 위대한 생애와 사상 그리고 중생교화사(敎化事) 중에
중요한 사례 15테마를 형상화하여 중생을 위해 고행하시고 중생에게 삶의 지혜를
주신 부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듯 느껴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교화공원은 부처님의 진신사리 108과가 열 한분의 부처님 복장에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이다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삼일 마음을 닦으면 천 년의 재물을 갖고, 백 년 탐으로 얻은 재물은 하루아침 이슬과 티끌과 같다
신흥사 바드나시 사르나트(녹야원) 모습
지나온 신흥사를 바라보며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지맥길로 들어선다
159봉(12:05)
구봉터널 위 (12:07)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바리고개로 향한다
바리고개(12:10)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와 상인리를 잇는 고개로 좌측으로는 뚜렸한 길이 보이지만 우측은 희미하다
전곡리(前谷里)는 구봉산 앞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산 앞 골짜기에 있다하여 앞실이라 한데서 전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노가리, 무두리, 은쟁이 등이 있다. 노가리는 갈대꽃이 많이 피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두리는 갯물이 드나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은쟁이는 산이 둘러싸서 숨은 것같은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헬기장(12:17)
체육시설(12:18)
봉화산(烽火山:163m:12:20)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광평리, 전곡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석과
3등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서신면 일대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봉화산의 원래 이름은 <여지대전도>에는 염불산(念佛山)으로 불리며 예전에 봉화를 올려 붙혀진 이름이며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으며(지금은 없음) 직경이 5.4m이고 토만두형(土饅頭形)의 봉수로 옛 이름은
염불산봉수(念佛山烽燧) 라고 하며 남쪽으로 우정읍의 봉화산(흥천산:興天山)봉수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송산면 해운산(海雲山) 봉수와 연결되며 바다쪽으로는 제부도(濟扶島) 봉수와 연결되는 중요한 봉수이다
조선시대 봉수로는 오로직봉(五路直烽)인데 그 중에 제5로인 서해안 봉수를 살펴보면
흥천산봉수(수원)→해운산봉수(남양)→정왕산봉수(안산)→성산봉수(인천)→백석산봉수(김포)
냉정산봉수(김포)→개화산봉수(양천)→목면산봉수(한양)으로 이어진다
봉화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봉화산 정상 삼각점(△대부306 / 1990 재설)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화성시 서신면(西新面)의 모습
북쪽으로 송산면(松山面), 동쪽으로 마도면(麻道面)에 접하고, 남쪽으로
남양만(南陽灣)을 사이에 두고 우정면(雨汀面), 서북쪽으로 안산시 대부동(大阜洞)과
마주하며, 제부도(濟扶島)·도리도(桃李島) 등 4개 부속도서가 있다.
편암(片岩)으로 이어진 제부도를 제외하면 면 전역의 기반암은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북부에는 함경산(咸鏡山:136m)·봉화산(烽火山:164m)·구봉산(九峰山:158m) 등의 산지가 있고,
남부에 해운산(海雲山:43m) 등이 있으나 비교적 저평한 지형을 이룬다.
남부해안의 꽃전·백미리(百味里) 등지에 농경지가 약간 펼쳐지고, 광평리(廣坪里) 등
염전에서 천일제염이 활발하며, 간석지에서는 어패류가 채취된다.
수원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지나며, 제부도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문화재로는 당성(唐城:사적 217), 화성 정용채 가옥(華城鄭用采家屋:중요민속자료 124),
화성 정용래 가옥(華城鄭用來家屋:중요민속자료 125), 홍담 효자각, 상안리 봉수(尙安里烽燧),
신흥사(新興寺), 홍법사지(弘法寺址) 등이 있다.
봉화산 정상의 이정표
봉화산 팔각정(12:25)
봉화산 안내판은 봉화산 정상이 아닌 이곳 팔각정에 서있다
팔각정을 지나 편한길로 내려서니 여우재가 나온다
여우재(12:27)
서신면 광평리의 뭇두리에서 텃골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넓은 우측으로는 하내테마파크로 오르는 넓은 임도가 있다
상안리에 있는 텃골(基谷)은 낮으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위치했다고 하여, 텃골 또는 기곡(基谷)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우재의 이정표
여우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다시 좌측으로 오른다
안동김공 묘지(12:28)
능선으로 오르니 안동김공의 묘지가 보인다
봉화산과 구봉산 구간 안내 이정표도 만나고...
하내테마파크 후문(12:30)
‘하’늘 아래 아름다운 곳에서 ‘내’일 준비한다는 뜻을 MT 장소이다
자연쉼터
하내테마파크 하얀 담장을 끼고 편한 길을 따라서 간다
담장 안으로 들여다보니 옛날의 석물들이 많이 보인다
갈림길(12:35)
갈림길에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간다
하내테마파크 정문(12:42)
하내테마크 정문이 있는 66번 2차선 도로를 지나서 절개지를 치고 오른다
옛날에 근처에 큰 당이 있어 인근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한다.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이장한 듯한 묘지가 보이고 길이 없는 곳을 무작정 치고 오른다
무명봉(12:50)
몸뚱아리가 잡목에 걸려 이리저리 치고 오르니 아무것도 없는 무명봉이 나온다
무명봉에서 바라보니 기가 꽉 막힌다
맞은편에 있는 함경산 아래인 이곳은 시화호를 매립하기 위해서 함경산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 현장이다
그래도 봄은 온다
베낭을 벗어놓고 무명봉에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
현오님의 반가운 시그널을 만나고...
절개지(12:55)
절개지를 지나니 아예 등로는 보이지도 않는다
시화호 매립을 위해 날아간 절개지를 따라서 곡예하며 절개지를 오른다
2번째 절개지를 오르고...
내가 오늘 걸었던 길을 한번 뒤돌아보고...
3번째인 마지막 절개지로 오르다가 꼬꾸라지는 바람에 다리에는 피가 흐르고...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을 바라보며... 언제까지 자연을 파괴할 것인가!
함경산(咸鏡山:137.2m :13:08)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와 장외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에 약샘이 있는데
거울같이 비친다하여 함경산(咸鏡山)이라 불러왔다고 지금은 인근의 시화호방조제
물막이공사에 쓰인 골재생산을 위해 북사면 거의 전부를 헐어내는 바람에 흉한 몰골을 하고 있다
워낙 잡목의 저항이 심하고 등로가 없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함경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선다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니...
현오님과...
다올방장님의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갈림길(13:12)
독도에 주의해야 할 곳이다...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무명봉(13:15)
무명봉을 지난 다음에 또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강력한 잡목의 저항을 받는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 베낭을 내리고 가져온 국수에 따뜻한 물을 붓고 국수를 끓인
다음에 국수와 막걸리 한잔으로 허기를 면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갈림길(13:35)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절개지가 나오고 아리랑고개가 보인다
우측으로는 전곡항과 전곡산업단지가 보이고...
아리랑고개 (13:40)
맞은편의 전곡산업단지를 바라보며 좌측의 배수지 방향으로 향한다
배수지 갈림길(13:42)
배수지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좌측의 밭가장 자리를 따라서 능선으로 오른다
갈림길(13:50)
능선위로 오르니 등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향한다
97.2봉(13:58)
4등급삼각점(△대부414)
97.2봉 정상에는 현오님의 시그널만 보이고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선다
갈림길(14:00)
넓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진주정씨 묘지가 보인다
진주정씨 묘지(14:01)
또다른 묘지를 지나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좌측으로 한옥마을이 보이고...
한옥마을을 끼고 지맥길을 이어간다
잡목지대를 헤치고 내려서니...
담밭사거리(14:05)
서신면 송교리(松橋里)와 광평리를 임도가 나오고 송교 담밭 마을이 우측 아래에 있다
서신면 송교리는 바다와 인접한 마을로 소나무로 다리를 높았으므로 솔다리라 한데서
송교라는 명칭이 생겼자연마을로는 개경촌, 대촌, 딴뫼, 돌말 등이 잇다. 개경촌은 마을을
새로 연다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며 대촌은 마을의 터가 넓고 크다는 뜻에서 큰말이라 부른데서 붙은 이름이다.
딴뫼는 외딴 산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돌말은 돌로 뒤덮여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담밭 성지길을 따라서 컨테이너 하우스 방향으로 오른다
등로에서 바라본 서신면 광평리
옛부터 마을 앞 넓은 벌은 천일염을 생산하던 곳으로 이 벌을 막아 넓은 들을
이루었다는 데서 광평리(廣坪里)라고 불러졌으며 고라물·고래물 옛부터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우물이 고래를 닮았다고 해서 고래우물(鯨井)로 불리다가 뒤에
고래물-고라물로 변음되었고 임벗(林浦村)은 옛부터 羅州 林氏가 이곳에 많이
살았고 천일염을 생산하는 포구리는 뜻에서 임포천 또는 임벗으로 불려졌다
갈림길(14:10)
청주양씨 (淸州楊氏)묘지
시조 양기(楊起)는 중국 출신으로 원(元)나라에서 중서성 정승을 지냈으며, 고려(高麗)원종(元宗) 때에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배종하고 들어와서 정착하였고 그 후 양기는 원나라에 가서 공물을 삭감케 한
공으로 삼한창국공신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지고 청주를 관적(貫籍)으로 내림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청주양씨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양기는 6형제를 두었고 그 후손이 각기 분파를 이루어 전국에
분포되었고 또한 분적하였으며 청주양씨에서 분적한 안악양씨(安岳楊氏)·밀양양씨(密陽楊氏)·
남원양씨(南原楊氏)·중화양씨(中和楊氏) 등이 본관을 달리하고 있다.
넓은 임도(14:15)
넓은 임도로 지맥길은 계속되고... 한동안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좌측으로 전원주택이 보이고...
임도에서 우측으로 가면 편안하게 지맥길을 이어갈 수 있겠만 힘들게 좌측으로 오른다
김해김공 묘지(14:28)
김해김공 묘지에서 바라본 송교리
김해김공 묘지를 지나니 또다시 잡목의 저항은 시작되고...
78.5봉(14:30)
78.5봉에서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길이 보이질 않는 우측으로 꺽어지니 현오님의 흔적이 보인다
희미한 길을 조금 내려오니 조금전에 김해김공 오르기 전의 임도를 만나고...
전원주택 단지(14:35)
전원주택 단지가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동네의 개새끼들은 다 나온듯하다
개새끼들을 풀어놔서 금방이라도 나를 물것 같이 덤비는데 옆에 있는 나무 몽둥이를 드니
다들 도망을 가버린다
전원주택단지로 인해 지맥길은 없어지고...
화성(태행)지맥 능선에 들어선 전원주택들
제부도갈림길(14:40)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니 대체적이로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제부도로 향했다
그러나 맥상의 길을 보면 앞에 보이는 무명봉으로 올라서야 맞을듯 싶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서니 또다른 전원주택을 만나고...
전원주택단지 뒷쪽의 절개지로 올라선다
뒤돌아 본 화성(태행)지맥길
무명봉(14:47)
무명봉은 잡목에 완전히 점령되어 길은 보이질 않고 걍~~~ 그냥 우측으로 내려선다
전주최공묘지(14:50)
전주최공의 묘지가 나오고 묘지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걷는다
kt이동통신탑(14:53)
kt이동통신탑 아래로 내려서니 제부도에서 남양읍으로 이어지는 76번 도로가 나온다
도로 맞은편에는 군부대 철조망이 바닷가를 가로막고 있고 철조망 너머로 새섬이 보인다
새섬의 모습
살곶이에 딸린 새섬과 우측으로는 제부도가는 길에 긴 차량행렬이 이어져 있다
저 제부도를 가본지가 한 20년은 넘었는가보다... 아련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제부도(濟扶島)는
옛부터 율지에서 멀리 보이는 섬이라는 뜻에서 “저비섬” 또는 “접비섬”으로
불려졌으나 조선조 중엽이후 송교리와 이곳을 연결한 갯벌고랑을 어린 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는 뜻의 제약부경(濟弱扶傾)의 말에서 따와서
제부도(濟扶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소설가 서하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 실린 소설 '제부도' 속의 남녀가
머물렀던 곳이'섬에 닿자마자 보이던 횟집'이 아마 저 어디쯤이겠지
불륜의 남녀는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며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
그러나 되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던지 남자는 물속으로 차를 몰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얼마 후 다시 이 섬을 찾아와 남자와의 추억을 되새기던 여자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곳으로 나는 그를 따라가리라.(…) 춤추는 바다를 나는
그 파도를 닮은 손짓으로 밀어내며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어쩌면 소설 속 남녀의 관계보다 갖가지 모순으로 중첩한 현실이 훨씬 불륜스러운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걸 핑계 삼아 시도때도 없이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고.제부도를 등지고
육지라는 산모가 미처 끊어내지 못한 탯줄 같은 바다갈라짐길로 접어든다.
76번 도로를 따라서 살곶이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간다
예전에는 살곶이는 섬이었는데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렸다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에 있는 살곶이(殺串)는 살고시라는
지명도 보이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눈’에 해당되는 곳이란다
임진왜란 당시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간 사이 도성을 전부 단도리한 홍정승이 후손들을
데리고 이곳을 내려와서 사는 곳이라 하여 살만한 곳(生處)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기도 하다
홍정승이 한양에서 고향인 이곳으로 오는데 왜구들이 추격을 해왔다
당시 살곶이는 섬이었는데 마침 썰물때라 홍정승의 식솔들이 바다를 건너 섬에 도착하자마자
밀물이 몰려와 왜구들이 모두 다 수장되고 말았다.
그 당시 홍정승은 사복사정(司僕寺正)이란 벼슬을 가진 남양홍씨 예사공파인 홍인귀였다.
76번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살곶이 갈림길(15:10)
합수점(?:15:15)
더이상 갈곳이 없다... 예전에 바다였던 이곳은 간척사업으로 논이 되었고
우측에 있는 살곶이는 섬에서 육지로 바뀌었으니 桑田碧海가 되어 버린게 아닌가
지형이 바뀌어 버렸으니 더 가봐야 뭔 의미가 있으리오
힘들게 화성(태행)지맥을 끝내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4월중에 당성(唐城)에서 와룡산, 승학산을 거쳐서 전곡항으로 가야할 듯 싶다
살곶이 버스정류장(15:20)
버스 정류장에서 제부도에서 오는 330번 버스를 타고 남양사거리에 도착하여 1008번을
갈아타고 사당역에 도착하니 16시 40분이라 집에 들어가기는 뭐하다
며칠전 사당동에서 스크린 골프장을 개업한 바람친구한테 들려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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