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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화성(태행)지맥(終)

화성(태행)지맥 제4구간 - 굴고개에서 전곡리까지

by 범여(梵如) 2016. 3. 27.

☞산행일자:  2016년 3월 27일

☞산행날씨:  약간 흐린 날씨에 미세 먼지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17km+어프로치 0.7km / 5시간 30분소요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 상안리 버스정류장-굴고개-당성-갈림길-쉼터의자-안부-127봉-무명봉-옻골마을 입구

                인삼밭-전주최공묘지-포도밭-86봉-시멘트 농로-포도밭-88봉-임도-60봉-(주)서진피앤비

                알프스모텔-아지미고개-안양목장 앞-중송1리 마을앞-마도포장중기-70봉-안동김공 묘지

               무명봉-묘지 갈림길-공장수로-신진산업-사강리 도로-인애농원-중송2리 표시석-마루금 복귀

               양주김공 묘지-57봉-초계정씨 영묘단-배밭-306번 지방도-각골마을 버스 정류장-갈림길

               매화밭-무명묘지-55봉-남양홍씨 묘지-322번 지방도-마산1리사거리-장문마을 입구

              포도밭 삼거리-무명봉-주택-장문마을-23봉-황해농원 앞-용진농원 앞-Y자 갈림길-야적장

              거창신공묘지-50봉-임도-초계정공 묘지-임도-초지-무명봉-이봉산-초계정공묘지-지화리고개

              승학산-갈림길-홍씨묘지-2차선 도로-버스정류장-화랑교회-지화2리 버스정류장-마을회관

              마을끝 도로-포도밭-와룡산-갈림길-남경두토성-전곡1교-318번 도로-전곡리 버스정류장

소 재 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 송산면

 

2주전 화성(태행)지맥 마지막을 걸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뭔가 응어리진 느낌이다

그래서 그것을 풀기 위해 2주만 나선게 화성(태행)지맥 Y구간이다... 그 응어리가 풀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어제 동강 할미꽃 탐사를 갔다가 서울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조금 넘는 바람에 상당히 피곤하다

내일 하루는 집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할까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아침 6시가 좀 넘었다

그런데  또다시 내 몸속의 역마살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주섬주섬 베낭을 챙겨서 사당역으로 향한다 

사당역에 도착하니 07시 20분경... 국수집에 들려서 아침으로 국수 한그릇 먹고 김밥을 사서

베낭에 넣은 다음에  남양으로 가는 1002번 버스를 타고 남양사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수원에서

제부도로 향하는 1004번을 타고 당성터널을 지난 다음에 상안리 버스정류장에 내린다

 

홍어와 무인도님 블로그 자료인용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상안리 버스 정류장(09:00)

조선시대 상림원(常林院)이 이곳에 있어서 그 이름이 널리 불려졌던 상안리에는

화성시 향토유적 제1호인 안곡서원(安谷書院)이 있는데 1668(현종 9)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박세희(朴世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부근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뒤 지방 유림과 문중의 협력으로 1976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4칸의 강당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박세희(朴世熹)주벽(主壁)으로

박세훈과 홍섬(洪暹)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상안리 버스정류장 앞에는 한국발효 회사가 있고 감나무 천지라는 관광농원 간판이 보인다

버스에 내려 물한모금을 마시고 몸을 푼 다음에 관광농원 간판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선다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본 굴고개의 당성터널

터널이 2개가 보이는데 우측은 새로 생긴 당성터널이고 좌측은 예전의

터널인데 이곳으로는 완행버스만 다니는 곳이라 한가하기가 그지없다

 

1500여년전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대사와 원효성사가 걸었던 길이기도 한 곳이다

원효스님은 어릴 때 황룡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34세가 되던 해에

원효스님은 8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공부를 좀 더 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고구려 땅을 거쳐 중국으로 가려고 하다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1년 뒤 두 번째 유학을 떠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백제의 옛 땅을 거쳐 바닷길로 중국에 가려고 했다.

 

서라벌(지금의 경주)을 떠나 당나라로 가던 길에 남양반도의 '남양'을 거쳐  송산면 사강을 지나

이곳 어디쯤에서 밤이 어두워져 어느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런데 도중에 그만 날이 저물어 무덤 속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있는 물을 아주 맛있게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스님은 너무 놀랍고 역겨운 나머지 구역질을 하였고,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 달게 마실 때나

오늘 구역질이 날 때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제와 오늘 달라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생겨나므로 모든 것이 생긴다.” 라고 읊었다고 한다.

心生卽種種心生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心滅卽種種心滅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唯心所作 一切唯心造':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


세상만사 마음 먹기 달렸을 뿐'이라는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나라에는 있으며 당나라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원효스님은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서라벌)로 돌아 갔다

 

잡풀이 가득한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서니 뚜렸한 등로가 나온다

보라색 제비꽃이 산꾼 범여를 반기고...

본격적인 화성(태행)지맥길로 접어드는데 2주전에 만났던 하얀 집을 만난다

하얀집을 지나 임도를 따라오니 맞은편에 당성(당항성)이 보인다

밭을 가로질러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접어드니 선답지의 시그널은 2주전 그대론데 개나리는 활짝 피었다

또다시 앙증맞은 제비꽃을 만나고...곧이어 당성으로 올라선다

당성(唐城:09:15)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과 송산면에 걸쳐있는 산성으로 사적 제217호이며 당항성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곳은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한때 고구려의 당성군이 되었다가 6세기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된 후에는 당나라와 교통하는 중요 항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신라 경덕왕이 한때 당은군으로

고쳤다가 다시 당성으로 복구했으며 이곳은 전략적인 중요성이 인정되어, 삼국간의 격전이

한창이던 642년(선덕여왕 11)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전하기도 했다.

그뒤 829년(흥덕왕 4)에는 군대를 주둔시키는 진을 설치하기도 했다

2주전에 만나지 못했던 현호색도 보이기 시작하고...

갈림길(09:20)

2주전 이곳에서 좌측 서신면 살곶이 방향으로 걸었기에 오늘은 우측 전곡리 방향으로 걷는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태행지맥 산줄기의 의견이 많이 분분한 곳이다

좌측으로는 구봉산, 봉화산 등의 뚜렸한 산이 많지만 산줄기로 따지자면 우측이 맞다는 의견이다

그거야 고수들이 해결할 문제이고, 나같은 산꾼이야 모르면 한번 더 걸으면 되는걸...

태행지맥의 응어진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은 우측의 전곡리쪽으로 향한다

2주전 올 한해의 무사산행을 기원하면서 독립군(나홀로) 시산제를 지낸 망해루를 쳐다보고 우측으로 내려선다

당성에 내려서자마자 길은 좋은데 등로는 중장비로 인해 마구 파헤쳐져 있다

쉼터(09:25)

쉼터를 지나니 좌측으로 묘지가 보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송산면 칠곡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등로에서 바라본 칠곡리(漆谷里)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마을로 옻나무가 많았으므로 옷골이라 부른데서 칠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양지말, 속말, 응짓말, 큰말 등이 있다. 양지말은 산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되어 있어

온종일 햇볕이 드는 따뜻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속말은 옻골 동쪽 속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큰말은 옻골의 큰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부(09:28)

좌측으로 내려서면 칠곡리 큰말로 내려서는 뚜렸한 길이 보이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꺽어져 올라선다

127봉(09:30)

이곳에서 낡은 삼각점이 있다는 산행기를 보고 한참을 찾았으나 마구 파헤진

공사장처럼 변해버린 정상에는 삼각점을 찾을 길이 없어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갈림길(09:32)

127봉에서 2분정도 내려서다가 뚜렸한 직진의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아주 주의할 구간이다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려서니 준.희 선생님의 시그널이 보인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시며 맥산행을 하는 산꾼들 한테는 전설적인 분이시다

나뭇잎 사이에 파묻힌 지적삼각점도 만나고...

무명봉(09:35)

안부같은 곳은 지나니 바로앞에 조그만 봉우리가 보이고 우측 사면길이 나있다.

혹 뭔가 있지 않을까 무명봉에 올랐다가 실망만하고 되돌아 내려온다

낙엽으로 인해 등로는 보이질 않고 조금을 더 내려오니 희미한 낙엽길이 보인다

간벌을 한 자리에는 수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바로 아래는 공장이 산아래까지 와 있다

등로에서 바라본 육일리(六一里)

화성시 송산면 구봉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육교동, 북일동, 창말 등이 있다.

육교동은 육일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 때 6 교리()가 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북일동은 창말 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창말은 사창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육교동과 북일동의 이름을 따서 육일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수로를 지나면서 아카시아를 비롯한 지독한 잡목들이 초반부터 태클을 걸어댄다

가시나무에 바지가랑이가 찢어지고 베낭이 할키면서 절개지로 내려선다

칠곡리 고개(09:43)

송산면 육일리와 칠곡리를 잇는 고개로 ‘칠곡리(옻골마을)’ 표시석이 서 있고 주변은 온통 공장지대다

도로를 가로질러 올라야하나 절개지가 너무 높아 좌측으로 간 다음에 절개지로 올라선다

올라서는 길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잡풀을 헤치며 우측의 인삼포 옆으로 올라선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가니...

통덕랑을 지낸 본관이 귀한 삭령최공(朔寧崔公) 묘지가 나온다

 

통덕랑(通德郞)은 조선시대 정5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검상(檢詳)·정랑·지평(持平)·사의(司議)·

헌납(獻納)·시독관(侍讀官)·교리(校理)·직장(直長)·기주관(記注官)··찬의(贊儀)·별좌·문학·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통덕랑 이하는 낭품계(郎品階)로서 사(士)라고도 불렀다.

통덕랑은 향리들의 한품(限品)으로서도 중요하다. 향리의 호장(戶長)들이 스스로 통덕랑이라

자처하였다는 것이나 토관계(土官階)의 한품이 정5품이었던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삭령최공 묘지를 지나니 포도밭으로 연결되는 농로가 나오고...

농부들이 포도밭 손질에 한창이다... 여름철에는 지나기가 좀 힘들것 같다

포도밭을 가로질러...

개구멍을 빠져나와 등로를 이어간다

묘지에서 바라본 사강리(沙江里)

송산면 사강리는 전에는 이 곳까지 조수가 드나들었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다.

마을 앞 까지 조수가 출입하고 바다와 연결된 강에는 모래가 많았다 하여 사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안사강, 바깥사강, 정도, 저구말 등이 있다. 사강은 마을이 산등성이를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사강 안에 생긴 마을을 안사강, 밖에 생긴 마을을 바깥 사강으로 나누어 불렀다.

정도는 조선 때 양반에게 불손한 상민은 볼기를 맞고 정을 쳤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저구말은 전에 갯물이 드나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현오님 약간 중증 수준이 아닌지... 이리 험한 곳을 왜 다니는지?

우측으로는 잡목속에 송전탑이 보인다

86봉(09:55)

정상은 잡목으로 가득차서 서 있기조차 힘이든다

우측으로 꺽어져 급하게 내려서는데 등로는 보이질 않고 생강나무들이 꽃을 틔우기 시작한다

내려가는 길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와 송전탑을 기준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반가운 선답자들의 시그널

여름철에는 산행하기가 불가능할 듯...

시멘트 농로(10:05)

도로를 가로질러 포도밭을 지난다

벌목지를 가로지르다가 우측을 바라보니 아침에 지나온 사강리가 보인다

송산면의 중심지인 사강리가 보이는데 사강리는 화성시의 서북쪽에 위치한 송산, 서신, 마도면의

중심지로  수산물 시장으로 유명한 사강시장이 있고 국민가수 조용필도 이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사강장은 원래 조수가 드나들어 사강(沙江), 즉 모래강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뱃길이 닿는 데 위치하였다.

지금처럼 이름이 무색하게 육지화 된 것은 일제 이후다. 장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송산면, 서신면, 마도면

일대의 사람들이고, 대부도, 형도, 엇섬, 우음도, 불도, 제부도, 선감도 등 7개 섬 주민들도 모두 이곳 장을 이용하였다.

잡목의 저항을 뚫고 올라서니 등로는 또 보이지도 않고...

그 와중에도 반가운 다올 방장님을 만난다... 현오님 못지않은 중증 환자인듯...ㅋㅋㅋ

88봉(10:15)

88봉에서 2시 방향으로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에서 헤어졌던 임도를 만나고...

편한 임도를 따라가니...

우측으로 공장지대가 보이고...

송전탑을 지나 절반이 날아간 봉우리로 향한다

절개지로 내려서야 한다

좌측에 나주정공 묘지가 있고...

60봉(10:23)

60봉의 절반은 공장이 갉아 먹어 버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절개지로 내려선다... 내가 이 짓거리 왜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현오님보다 약간 덜하긴 하지만 ㅋㅋㅋ

곡예를 하듯 내려와...

(주)서진피앤비 공장 마당을 지나 잠긴 문을 넘어 도로로 나온다

조금전에 지나온 것을 뒤돌아 보고...

공장 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좌측으로는 스위스 모텔이 보이고...

스위스 모텔을 내려서니 322번 지방도가 지나는 아지미 고개로 내려선다

아지미 고개(10:35)

송산면 사강리에서 고포리로 넘어가는 322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인데

고개 정상에는 스위스 모텔과  우측엔 두영금속파일 공장과 안양목장이 보인다

아지미 고개를 지나니 안양목장이 나오는데 안양목장 가운데로 태행지맥길이

이어지나 그곳으로는 갈 수가 없기에 도로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도로 좌측으로는 중송1리 마을 표시석이 보인다

마도포장중기 간판이 보이고...

마도포장중기를 끼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절개지 좌측으로는 공장이 보인다

오름길 역시 잡목으로 여간 고행길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뒷쪽에 개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송아지만한

개한마리가 나타나 금방이라도 나를 물것처럼 덤비기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고 개를 향해 던지니 36계 줄행랑을 치는데 나도 엄청 놀랬다

70봉(10:45)

거친 잡목을 헤치고 등로를 이어간다

뒤돌아 본 안양목장

안동김공 묘지를 지나고...

무명봉(10:50)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개성옥공 묘지가 나오고...

잡풀이 무성한 곳에서 좌측으로 떨어진다

원 지맥길은 우측의 휀스 안쪽이나 좌측의 뚜렸한 길로 내려선다

공장에서 만든듯한 수로를 내려서니...

좌측엔 (주)신진산업 공장이 보이고... 공장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사강리 마을길(10:58)

송산면 사강리와 천등리를 잇는 도로인데 다른 도로에 비해 교통량은 뜸하다

주택을 끼고 좌측의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인애농원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원 지맥길은 인애농원 가운데이나 갈 수가 없기에 좌측 도로로 향한다

좌측으로 중송2리 마을 표시석이 보인다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중송리(中松里)는 바닷가에 인접하였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고 마을 주변에 노송이 우거져 소나무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송이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자연마을로는 뒷골, 솔뫼, 못골 등이 있다.

뒷골은 마을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고 특히 이 마을이 소의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 하여 '뒷꼬리'라 부르다가 붙은 이름이다.

솔뫼는 소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중송2리를 입구를 지나자마자 우측 농로로 접어든다

마루금 복귀(11:05)

양주김공 묘지를 지나니...57봉이 나온다.

57봉(11:07)

57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는데 우측엔 초계정씨 숭모당과 가족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초계정씨 숭모단

초계정씨 가족묘를 따라서 가니 배밭이 나온다

배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내려가는데 가야할 77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전 인애농원 앞에서 헤어졌던 도로를 다시 만난다

각골버스 정류장(11:12)

버스 정류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서 50m 정도 가다가 좌측 임도로 접어든다

임도를 따라 오르니 매화밭이 나오고... 

새로 조성된듯한 묘지 2기를 지나 능선으로 나오니 T자 갈림길이 나온다

55봉(11:20)

이 험지(?)에서 현오님의 흔적을 만나고...

어디로 가란 말이냐?... 정면 돌파는 거의 불가능하여 에둘러 우회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고포리(古浦里) 모습

송산면에 있는 고포리는 서해안과 인접하여 삼면이 바다와 인접하였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으며 자연마을로는 고잔동, 포막동, 대두리 등이 있다.

고잔동은 고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뒷산이 말처럼 생겨 마산포라고도 부르며

곶으로 되어 고잔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포막동은 고개가 목이져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대두리는 산맥이 이어져 내려와 바다와맞붙은 곳에 형성된 부락으로 산의 머리부분이

크다고 하여 큰머리라 한데서 대두리라는 명칭이 생겼다.

고잔동과 포막동의 이름을 따서 고포라는 명칭이 생겼다.

예전에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갈때 이곳에서 갔다는 설이 있다

우회를 하니 뚜렸한 등로가 나오고 등로옆에 두릅이 벌써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77봉(11:30)

77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남양홍씨 묘지가 나온다

남양홍씨 묘지에서 바라본 마산리의 모습
송산면 마산리는 서해안과 인접하여 삼면이 바다와 인접하였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다.

산의 형세가 말의 모습 같다 하여 마산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갓마루, 도말, 장문 등이 있다.

갓마루는 마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지형이 마치 갓을 쓴 것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도말은 마을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깨끗하여 선비들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이 곳을 자주 찾았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고 장문은 옛날에 서신면 전곡리 앞 바다에서

이곳까지 좁고 긴 갯골이 나고 또한 포구가 있어 배가 자주 드나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남양홍씨 묘지에서 망자의 밥상을 빌려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마친

다음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범여의 점심상

도로에 내려서니 아미지 고개에서 헤어졌던 322번 지방도를 다시 만난다

332번 지방도(11:55)

마산1리 포도마을 표시석이 보이는데 이곳은 가는곳마다 포도밭이다

건널목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장문마을 입구 표시석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우측엔 대경테크란 공장 건물이 보인다

좌.우 양쪽의 포도밭 사이의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포도밭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포도밭을 지난 능선에 오르니 이곳은 지금 한창 간벌 작업중이다

우측으로는 축사가 보이고 능선으로 조금 더 진행하다가 좌측의 밭으로 내려선 다음에

다시 마을로 내려서니 남의 집 마당 한 가운데로 내려서는데 다행이 쥔장이 없다

장문마을(12:30)

장문마을 가운데 도로로 지나 우측으로 계속 걸어간다

포도밭 가운데로 걸어가는데 잠시후에 오를 이봉산이 보인다

이곳 송산면과 2주전에 걸었던 서신면은 온 천지가 포도밭이다

23봉(12:35)

도로옆에 있는 23봉에 오르는데 선답자이신 박종율 선생께서 이곳에 삼각점이

있다는 산행기를 보고 올랐지만 잡풀이 어찌나 많은지 모래사장에서 바늘찿기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도로로 내려서서 이봉산 방향으로 향한다

황해농원 입구(12:37)

황해농원 버스 정류장을 지나니 용진농원이 보이고...

Y자 갈림길(12:40)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편하게 이봉산으로 오를 수 있지만 그러면 지맥상의

50봉을 놓치게 되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기도 하지만 가급적 원칙적으로 가고

싶어서 좌측의 능선으로 향하는데 전봇대 옆의 능선으로 오른다 

등로에서 바라본 마산리 장문마을의 모습

송산면 마산리 장문마을은 옛날에 서신면 전곡리 앞 바다에서 이곳까지 좁고

긴 갯골이 나고 또한 포구가 있어 배가 자주 드나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능선으로 접어들자마자 심한 잡목의 저항을 받으며 걷는데 잠시후에 맥길은 끊어지고 야적장이 나온다

야적장 좌측으로 돌아서 절개지 위로 올라선

50봉 바로 아래에는 기독교인이었던 거창신공과 부인 청주한씨의 묘지가 있다

50봉에서 바라본 송산면의 모습

송산면은 화성시 남부면 남양반도에 위치해 있고, 시화권역에 속하며, 서해안과

인접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다

50봉(12:50)

길이없는 잡목지대를 헤치고 내려오니...

농로가 나온다

농로에서 철조망을 무단으로 넘어 임도로 올라선다

호화묘지가 나오는데 생전에 판사를 역임했던 초계정씨의 묘지가 나오고...

묘지 주변으로 철조망을 막아놔 겨우 구멍을 찾아서 내려서니...

Y자 갈림길에서 헤어졌던 이봉산 오르는 등로와 다시 만난다.

넓은 임도를 버리고 초지가 보이는 쪽으로 향한다

묘지가 보이는 곳에서 조금을 더 진행하다가 좌측의 등로로 접어든다

무명봉(13:05)
이봉산의 전위봉에 오른 다음에 다시 좌측 등로로 따라서 간다

이봉산으로 오르는 길은 예전에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마구 넘어져 있다

이리저리 넘어진 나무들을 피해서 이봉산으로 향한다

이봉산(二峰山:105.7m:13:12)

화성시 송산면 마산리와 지화리 경계에 있는 이봉산은 원래 마산(馬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 동쪽 아래 동네의 마산리가 산의 형세가 말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생긴 명칭이라니 말이다.

다음(Daum)지도와 몇몇 지도에는 삼봉산이라 표시된 곳도 많지만 화성시의 거리명이나 국토지리정보원

자료에도 이봉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이봉산이라 불리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정상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가 있고 맨날의 산패가 보이며 인식할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이봉산 정상 삼각점

여영님의 산패 아래에 베낭을 놓고 인증샷을 남긴다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길이좋다

잘 꾸며진 초계정공의 묘지가 나오는데 이곳은 초계정씨들이 많이 사는 모양이다

초계정공의 묘지를 내려서니...

지화리 고개가 보인다

지화리(芝花里) 고개(13:25)

화성시 송산면에 위치한 지화리고개는 정상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2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포구가 있던 곳이었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고 자연마을로는 거지, 화량, 방죽머리 등이 있는데

거지는 지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인근 마을 중 가장 먼저 부락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구한말 때는 거지동으로

불렸으며 화량은 화량진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방죽머리는 마을 앞에 방죽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거지와 화량의 이름을 따서 지화라는 명칭이 생겼다

고개에서 좌측으로 간 다음 능선으로 오른다

승학산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의외로 길은 좋고 주위에는 생강나무들이 滿開하기 시작한다

승학산(乘鶴山109.7m:13:37)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는 산으로 이곳의 유래에 대한 자료는 찾을길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성장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이건만 문화에 대한 투자는 상당히 인색하다

전국의 산을 다니다보면 조그만한 지자체에도 지역에 대한 자료가 풍부한데 비해

이곳 화성지역은 이름난 곳만 자료가 풍부하고 이런곳은 자료가 아주 빈약하다

모든 아쉬움을 안고 서둘러 승학산 아래로 내려선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오니 또다른 현오님의 흔적이 보이고...

갈림길(13:40)

좌측의 지화리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길로 걸어간다

잠시후에 조망이 트이면서 지화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바다 가운데에 선감도가 보인다
수로를 타고 내려오니 기독교인 묘지가 나온다

기독교인의 묘지를 지나 내려서니...

2차선 도로가 보인다

화랑교회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화랑교회(13:50)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부활절이라 그런지 시골 교회에도 차가 여러대 보인다

꽃다리마을 컨테이너도 지나고...

지화2리 버스 정류장(13:52)

마을회관을 지나...

황톳길 방향으로 직진해야 한다

황톳길 끄트머리까지 오르니 포도밭이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오늘의 마지막 산인 와룡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2주전에 걸었던 구봉산과 봉화산, 함경산이 뚜렸이 보인다

와룡산 정상에는 상주박씨 묘지가 있는데 지난해 후손들이 벌초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와룡산(臥龍山:107.8m:14:07)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 바로 옆에는 묘지 한기가 있는데 전망은 없다

동쪽으로는 2주전에 걸었던 구봉산과 봉화산이 보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선감도와 전곡항이 보인다

이곳 와룡산 역시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용이 누워있는 형세라 그렇게 불렀나... 짐작만 할 뿐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의 뱃길로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지금이야 화성방조제로 인하여

농경지로 변해있지만 방조제 완공 전 까지만해도 구봉산의 당성(당항성)과 와룡산의 남경성(화량진성)사이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당성은 6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교역항이자 군사요충지로 역사에 많이

노출되어 일부 성곽도 보수되어있고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와룡산 정상에서도 베낭으로 인증샷을 대신하는데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다

베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입고 서둘러 하산을 결정한다

와룡산 정상에서 깨진채 방치되어 있는 삼각점의 밑판

선배님도 이런 험한곳에... 이젠 연세도 있으신데 살살 댕기셔...

지나온 이봉산과 승학산을 한번 더 뒤돌아보고...

소나무 숲사이로 내려서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너진 토성의 흔적이 나오는데 이곳이 남경투토성(회량성)이다

갈림길(14:15)

이곳에서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등로가 전혀 보이질 않는 우측으로 치고 들어간다

갈림길에서 바라본 선감도와 전곡항의 모습

남양반도의 지형은 굽이마다 곶이다. 땅의 생김새가 입을 내밀듯 바닷가로 삐죽이 뻗어 있기 때문이다.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와 건너편 전곡리까지 300m 거리는 해안과 맞닿아있다.

입구는 좁지만 내륙으로 들어서면 칠곡리, 중송리까지 포함해 3km가 호리병처럼 드넓다.

현재는 농토가 됐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바다와 연결됐던 곳이다.
이곳으로 수많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어귀를 한눈에 감시하던 와룡산(107.8m)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성이 하나 있는데 남경투토성(회량성)이다

남경투토성(회량성)

산성 뿌리까지 바닷물이 출렁거렸고, 뱃길이 트이자 포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국 대륙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뱃길 중 가장 빠른 곳이어서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삼국들의 쟁탈전도 치열했다.

백제가 터를 닦고, 고구려가 왔다갔다. 신라는 국운을 걸고 이곳에 깃발을 세웠다.

영토사수의 결의를 다짐하며 진흥왕(564년)은 이곳에 수군기지 화량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동맹협상을 추진하면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당항성에 이르러 한 무덤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화량은 서해안 신라 최대의 항구였다.

 

왕건도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이 지역을 가장먼저 차지한 후, 나주 무안을 점령했다.

조선 태종은 1413년 남양도호부를 설치할 정도로 행정과 군사적으로 중요시했다.

산성 앞은 탄도가 앞을 막고,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는 마산수로가 형성돼 있어 육지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군사요충지였다. 이런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곳에 쌓은 것이 화량진성이다.

천수백년에 걸쳐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화성일대는 크고 작은 성터 20여개소를

쌓을 만큼 우리역사에서 늘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지역이다.

 

선조 8년(1575)에는 수군절도사가 영종포와 초지량, 제물량을 관할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침략이 두려웠던 인조는 1629년 도성방어를 위해 강화도 교동으로 수군절도사를

옮기면서 화량진성은 수군기지로서 막을 내렸고, 산성기능만 유지하다가 폐성되고 말았다.
화량진성은 와룡산 정상에서 남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산등성이에 있다.

서신당성에 비해 유명하지 않지만 화성시 관할의 석축 산성으로서는 유일하다. (데일리안 뉴스 자료인용)

성곽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등로는 아예없고 내가 길을 만들어 내려간다

급경사를 내려오다가 유일하게 만난 다올방장님... 고수로 인정합니다

절개지로 내려서니 비포장 도로가 보인다

도로에 내려서니  바로앞에 전곡1교 다리가 보인다

전곡1교(14:30)

이곳에서 4번에 걸친 화성(태행)지맥의 大尾를 장식한다

맥길이 자꾸만 산업화로 인해 길과 산이 없어지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프다

어떤때는 내가 왜 이짓거리를 해야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하기에...

뒤돌아본 전곡1교의 모습

이곳은 예전에 바다였는데 시화지구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곳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전곡리 방향으로 향한다

뒤돌아 본 와룡산의 모습

좌측으로는 엄청나게 큰 석산업개발이라는 석산개발 업체가 있고 주위는 대하 양식장이 많이 보인다

엠보트 버스정류장(15:10)
318번 도로를 따라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버스가 지나가 버리는게 아닌가

아휴! 이걸 어쩌...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히치를 해보건만 4차선 도로에 엄청나게

속력을 내는 차량에 위협을 느끼는 바람에 히치를 포기한다

조금을 내려오니 주유소가 있기에 직원에게 버스 시간을 물으니 1시간에 한번 지난다고

하는데 조금전에 지나 갔으니 1시간이 지나야 버스가 온다고 하면서 조금을 더 가서 제부도

쪽에는 버스가 많다고 하기에 무작정 제부도 방향으로 걸어간다

제부도 입구(15:40)

제부도 입구를 지나서 한참을 지난 다음에야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도로를 따라서 3km이상을 걸어온 듯 싶다

전곡2리 산업단지 버스 정류장(15:50)

주유소 직원의 말만 믿고 20분이상 기다려도 버스는 오질 않는다

버스 노선표 아래에 있는 버스회사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니 이곳은 3시간에

한번씩 버스가 다닌다고 하면서 16시 50분에 버스가 있다고 한다

가만히 서 있으니 너무 추워서 택시를 부르는데 이곳이 전곡이라 114에

전화를 걸어서 택시를 보내달라고 하니 위치가 어디냐고 묻길래

가르쳐주니 이 곳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한참을 통화하다가 보니.. 이걸 어쩜

114안내원이 이곳이 아닌 연천군 전곡 택시로 연결해 준게 아닌가

다시 전화를 해서 서신면 택시를 불러 서신까지 7,000원을 주고 간다

서신면에서 궁평항에서 나오는 400번 버스를 타고 남양사거리까지 온다

남양사거리(17:00)

남양사거리에서 사당동으로 가는 1008번 버스를 타고 사당동에 도착하니 저녁6시경...

특별히 일찍 집에 들어갈 일도 없고하여 사당역 근처에서 혼자 순대국에다 막걸리

2병을 깔끔하게 비우고 화성(태행)지맥 마무리를 혼자서 자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