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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梵如의 日常 ♣

8재계 수계 실천 대법회

by 범여(梵如) 2016. 9. 26.


올해로 14번째로 열리는 팔관재계(팔재계) 수계 실천 대법회가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에서 봉행을 한다...1999년 포교사를 품수받은 범여는 요즘 산에 미쳐있는 바람에

포교사단 행사에 좀 빠졌더니만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이제 포교사단에 와서 봉사 좀 하라고...

조금은 미안하기도하고 날라리 포교사로서 다시한번 초발심을 내어 부처님에게 다가서겠다는

생각으로 올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조계사에서 13시에 버스에 오르니 같은 차에 탄 선배님이

엄청 반가워 하신다...그러나 우리 기수와 아는 포교사의 얼굴은 그리많지 않다

대다수의 후배 포교사들과 버스를 타고 법주사에 도착하니 16시 40분경...

행사 일정표

팔관재계(八關齋戒)

 팔관재계란 다른 말로 '여덟 가지의 재와 계'라는 의미로 '팔재계(八齋戒)', 또는 단순히 '여덟 가지의 계'라를

의미의 '팔계(八戒)', 또는 '마땅히 멀리 해야할 여덟 가지'란 뜻의 '팔소응리(八所應離)' 등으로 불린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재가신도들이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받아 지키는 여덟 가지 계율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慈悲로 중생을 사랑하여 怨望하는 마음이 없고,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여긴다.


2,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不偸盜]

항상 깨끗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며, 무엇이든지 주면서도 바라는 마음이 없다.


3, 淫行하지 말라.[不邪淫] 아라한은 음란한 마음이 없다.

異性에 대해 부정한 생각을 내는 일이 없고, 청정한 마음으로 항상 정진을 즐긴다.


4,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생각이 항상 진실하여 조용히 하는 말은 그 마음과 같이 법에 맞으며, 거룩한 말에는 거짓이 없다.


5, 술 마시지 말라.[不飮酒]

그 마음에는 어지러운 일이 없고, 생각에는 게으름이 없으며, 밝고 바른 뜻에는 술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6, 몸에는 패물을 차거나 화장하지 말며,[不着香華 鬢不香塗身]

    노래하고 춤추지 말라.[不自歌舞倡伎不住觀廳]

좋은 의복이나 패물로 호사하거나 연지와 분을 발라 화장하지 않으며,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쓰는 일이 없으며, 오락에는 구경도 하지 않는다.


7, 높고 넓은 평상에 앉지 말라.[不作高廣大床]

비단으로 된 이부자리 같은 것은 쓰지 않으며, 낮고 허술한 자리에 앉고, 항상 올바른 가르침을 생각한다.


8, 제 때 아니면 먹지 말라.[不非時食]

量에 맞추어 적게 먹고,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는다.


이 여덟 가지 계법(戒法)중 앞의 다섯 가지는 은 온갖 나쁜 짓을 막는 문이며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하는 길이다.

출가 수행승이 되어 도를 닦는 이들은 평생을 지키지만 세속에서는 사는 신도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하루낮 하룻밤 동안만을 지키는 것이다.

팔재계 수계법회에 참석하는 포교사들

법주사로 향하는 길


법주사 일주문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가람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란 뜻으로, 호서지방 즉 충청도지방의 제일가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일주문 천정 그 뒤쪽으로 전서체로 쓰인 다른 문구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

세속과의 이별을 하고 부처님과 머무는 사찰이라는 의미이다.

반갑게 전국의 포교사들을 맞이하는 충북지역단 포교사들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 事實記碑:충북 유형문화재 제167호))

이 비는 1666년(현종7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3cm, 너비는 65cm이며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俊吉)이 쓴 것으로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속리산이 명산임가

세조가 이곳을 행차한 사실등을 적고 있다...특히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있는데 내용은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고 하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대사가 대답하되 동국(東國:한국)의 명산에 있는 큰 거북이 형상이

당나라 재물이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에 찾다가 마침내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늘렀다는 기록이 있다

속리산사실기비 옆에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71호인 벽암대사비로서 법주사를 중창한 벽암대사를 기리기 위한 돌비석이다

법주사...고맙습니다

가람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금강문(金剛門)

법주사의 정문인 '금강문'을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정면에 바로 보이는 전나무 두 그루이다.

절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수문장처럼 든든하다.

법주사의 정문 역할을 하고있는 금강문 편액은 만당 성주균 선생이 쓴 글씨이며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그 후 몇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선사가 중건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 지붕으로 가운데 한 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에는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 옆에는 금강역사가 보좌하고 있는게 특색이다

금강역사와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 다음으로 거쳐야 하는 문이 천왕문으로 사천왕문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상을 안치한 천왕문은 가람을 외호하고 악귀를 쫒아내는 신성한 문이다

평지에 위치한 법주사는 금강문, 천왕문, 팔상전,석등,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전각 배치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이 가운데 천왕문은 금강문과 팔상전 사이에 있어 사천왕인이

법주사 중심 건물인 팔상전 을 가까운 거리에서 외호하고 있는 형태이다

법주사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키가 무려 6m난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천왕상이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 法住寺 石蓮池 :국보 제64호)

법주사 경내에 있는,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연못으로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에 만들었다.

법당인 용화보전이 있을 때 정면에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 세계 연화지를 상징하며 화강암으로 조각하였다.

석조물 여기저기에 꽃·구름·덩굴 등의 무늬를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높이는 1.95m이다.

천왕문 서편에 자리잡고 있는 석련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잘 볼수없는 작품으로 돌로 만든 연못에 연꽃을 띄워 극락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 무늬로 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금동미륵대불

법주사의 왼쪽 중앙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거대한 금빛의 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수차례 옷을 갈아입은 기구한 사연이 있다.

신라 혜공왕 12년에 처음 만들어진 불상은 고종 9년 때 당백전 화폐 주조를 위한 구실로 몰수된다.
이후 1939년 주지스님이 후원을 받아 시멘트 불상을 조성하다가 6.25동란의 이유로 중단되고,

1963년 당시 주지스님이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를 받아 완성시킨다.

1986년 이는 해체되었다가 4년 뒤인 1990년 청동불로 다시 조성되며 2002년 금동미륵대불회향대법회를

계기로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으로 돌아오게 된다.

금동미륵대불 앞에서 인증샷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국보 제55호로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68년 해체 중수할 때 5층 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고 심초석에서 사리장치와 함께

동판에 새긴 글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1605년에 재건하고 1626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건물은 2단의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의 각 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건물의 외관은 층이 높아지면서 주간의 수가 줄어들어

강한 체감을 보이는데 1·2층은 5칸, 3·4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공포의 짜임은 금산사 미륵전이나 쌍봉사 대웅전에서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방식으로

 1층은 주심포식이지만 2층 이상은 다포식이다. 1층은 기둥머리에 창방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꽂혔으며 공포의 구성은 주심포식 2출목인데,

첨차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2, 3, 4층의 공포는 모두 기둥 위에만 있으나 다포식 구성에 속하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린 완전한 다포식이다.

내부 가구는 다층구조의 일반적 기법을 따라 5층 건물 전체를 통과하는

심주가 중앙에 있으며 네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隅高柱]를 세웠다.

2층의 우주는 1층 우주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退樑] 위에 세워졌다.

3층 역시 2층과 같은 형식으로 기둥을 세웠으며 4층은 귀고주가 바로 4층의 우주로 되어 있다.

이 귀고주는 심주와 대들보[大樑]로 연결되며 5층 우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세워졌다.

심주는 기단 윗면의 심초 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 건물에는 심주의 4면에 각 2폭씩 8폭의 팔상도가 있고 그 앞으로 4면에

열반상을 포함한 삼존불상을 각각 배치했으며 이어서 3열로 천불상을 봉안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표현한 팔상도를 모시고 석가여래를 기리는

불전으로 내부 중앙 전면에 석가모니불을 단독으로 모시거나 영상회상도를

모시기도 한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로 모신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 삼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후 혜공왕 12년에 이르러

금동미륵삼존불상을 갖추고 법상종의 3대 가람으로 발전해왔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조선 인조 2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증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十자형으로 배치된 형태로 규모는 큰 편이며, 속리산이 경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법주사는 모악산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와 함께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곳이다

 

법주사의 “법주(法住)”를 「대반열반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바른 뜻을 잘 분별하여 지성으로

사문과보를 항상 구하며 모든 생사의 업보를 꾸짖는다면 그 사람이 법답게 머무는 것이다”라 말한다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게 팔작지붕 건물로 불교 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

범종(梵鐘)

 

교에서 범종(梵鐘)은 원래 절에서 대중들을 소집하거나 시간을 알려주는 기구로 사용하다가

그 소리가 워낙 아름다워 여러 의식에 까지 사용되었으며  큰 종을 「인경」이라고 한다

범종의 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데 범(梵)이란 바로 우주 만물이며, 진리이고 맑고

깨끗하며 한없이 넓고 크고 좋다는 뜻이다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염원하며 울려 퍼지는 범종의 소리는 현세의 중생들뿐만이 아니라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울리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을 치는데 이것은 선종의 초조 마하가섭으로부터 28대

보리달마까지를 상징하며, 동시에 불교에서 뜻하는 하늘의 28천과 육도윤회중인 5곳을

합한 33곳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친다  

 

운판(雲版)

청동이나 철로만든  뭉게구름 모양의 판 위에 보살상이나 구름과 달을 새긴 법구이다

운판은 원래 부엌이나 공양하는 장소에 매달아 놓고 대중에게 공양 시간을 알리기 위한

기구로 사용 되었다...구름이란 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등에 운판을 매달아

화재를 방지하고자 하는 오행(五行) 상극(相剋)의 원리가 운판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운판의 용도는 아침, 저녁 예불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 운판을 울림으로써 허공 세계를

날고있는 수많은 중생들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목어(木魚)

 

목어는 수중계의 중생의 소리로서 구제하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 형태의 도구로 목탁은

이 목어를 간단히 디자인한 것이다...목어의 소리를 듣고 물밑에 살고있는 수중 중생들은

한없는 해탈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의 목어는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츰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을 한 형태로 변형되었고,

또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어 물고기가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된다는 속설에 따라 중생이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과정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기에 ‘수도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법고法鼓)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으로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듯이 불법을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음양화합의 소리를 싣고 막막한 대지에 가득 울리는 법고의 저음을 들으며 땅 위에 사는

네발 달린 짐승들은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된다

또 그 북소리는 우리 마음 가까이 다가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런 까닭에 북을 치는 가운데 나무로 된 두개의 북채로는 마음 심(心)자를 그리면서 두드린다 

법주사 약사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약사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였다

약사 신앙은 대표적 불보살 신앙 가운데 하나로 동방의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12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우리나라의 약사신앙은 대체로 8세기 이후에 번성하였다.

일연선사가 저술한 삼국유사에 약사신앙의 영험이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선덕여왕때 밀본(密本)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고,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찰중에 하나인 분황사(芬皇寺)에서는 아주 큰 약사여래입상이

있었다... 법주사에는 약사전이 들어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듯 하다

조선 중기 가람이나  18세기 중엽의 배치도에는 약사전이 존재하지 않았다.

 법주사 대웅보전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대웅전을 격을 높여 부를때 대웅보전 이라하며 대웅은 고대 인도의 "마하바라" 를

한역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는  위대한 인물(大雄)로 일컬은 데서 명칭이 유래 했다고 한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창건되고 776년(혜공왕 12)에 다시 지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보전은 팔상전과 함께 법주사의 중심이 되는 주요 건물 중 하나이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 가운데 하나인 중층(重層) 전각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170평, 높이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다.

위층에 비하여 아래층의 높이가 훨씬 낮아서 탑파와 비슷한 비례를 보이며, 정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의 1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는 따로 외짝문을 달았다.


대웅보전의 양식은 내외 2출목으로 공포를 짜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1층은 내외 2출목이고 2층은 내외 3출목인데, 1층 살미는 수서형, 2층 살미는 앙서형이어서 변화를 보인다.

공간포는 전체적으로 매 칸마다 1구씩 배치되었다. 1층 살미의 수서형은 좀 독특해서 한 번 둔각으로 꺾었으나,

윗면은 사선으로 깎았고 제3살미는 끝에 솟은 연봉이나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쪽의 보머리는 주심포 상부에서

4모를 죽인 8각형이고, 간포 상부에는 당초무늬가 초각된 형태이다. 창방머리의 연화당초각(蓮花唐草刻)도 주목된다.


2층의 살미는 제1, 제2살미가 수평에 가까운 기울기로 길게 뻗어 살짝 올린 완만한 곡선형 앙서이고, 제3살미는

끝을 화살 모양으로 뾰족하게 하고 밑면은 둥글게 한 형태의 초각인데, 이 위에 주심포 위에는 끝을 마름모꼴로

마무리한 보머리를 놓았고, 간포 위에는 제3살미와 겹판을 이루면서 머리 부분을 둥글게 한 보머리를 얹었는데

 1층에서와 같은 초각은 베풀지 않았다. 한편 공포 위에 3겹 퇴보를 얹고 나서, 퇴보 사이에 낮은 벽(상벽)을 쌓아서

층급을 이룬 다음 벽면을 짧은 동자기둥으로 분할하고 거기에 나한도를 그렸다.

이 상벽 위로 넓은 빗천장을 가설하기 위해 밑면에 연화두식(蓮花頭飾)을 초각한 십자형 받침을 설치하였다.

빗천장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을 그려넣었다. 이러한 구조는 2층 빗천장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내부에는 고주를 놓고, 이 퇴보 위에 2층의 평주를 놓아 금산사의 3층 전각인 미륵전과 같은 수법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내부에 모셔진 이 삼신불은 벽암이 중건할 때 조성된 것이다. 삼신불이란 석가모니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하여, 과보(果報)로 나타난 몸[報身]과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 석가모니의 진여(眞如)의

 몸[法身],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몸[化身]을 가리킨다.

 대웅보전 삼존불

안쪽 불단에는 비로자나 삼존불,  즉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우측에  노사나불, 좌측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흙으로 빚어진 이 불상들은 대웅보전이 중창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높이가 5.5m로 이르러 좌불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크다고 한다...이 삼존불은 각각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로 나타낸다

불신(佛神)을 세 종류로 표현하는 삼신설에 따르면 법신불은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 한

 진리불이며, 보신불은 오랜 수행의 과정에 얻어지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부처이고, 화신불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상대에 따라 특정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나는 부처인데, 이 법, 보, 화, 삼신불은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로 나타난다...이처럼 법당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삼신불로 모시는 것은 고려 중기, 특히 조선시대에 보편화되었다


이 불전은 대웅보전으로 되어 있지만,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불상으로 볼 때 대적광전으로 해야 옳을듯 싶다

 대웅전은 대웅세존(석가모니)과 좌, 우 협시보살을 모신 법당인데 법주사 대웅보전은 비로자나불이 주존이다

바이로차나(비로자나)에는 ‘빛이 두루 비친다’는 뜻이 있으므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불전에는

대적광전, 대명광전  등 주로 빛 광(光)자가 들어가게 된다

옛 기록에는 이 전각이  대웅대명광전이라 되어 있으나 흥선대원군 시절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미륵장륙존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석조희견 보살입상(石造喜見菩薩立像)의 모습

석조희견 보살입상(石造喜見菩薩立像)

법주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보살상으로 2004년 10월 7일에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으로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 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다.

즉 같은 경내의 쌍사자 석등을 제작한 작가와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록 이 조각상의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법주사 원통보전(法住寺 圓通寶殿:보물 제916호)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통버전 관세음보살상

법주사 당간지주 (幢竿支柱)

당간이란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刹)을 사찰(寺刹)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예전에는 종파(宗派)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했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 같은 기능을 갖게되어 신성한 구역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 7년(1006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약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년) 국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當百錢)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 당간도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경) 이곳 철 당간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철솥(보물 제1413호)
철솥은 법주사 공양간에 있었던 것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에 두께10cm에

무게는 20톤에 달하며 큰 사발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명의 승도가 운집하고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연대, 제자자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주철로 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법주사 석조(石槽:충북 무형문화재 제70호)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으며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늬 장식이 없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는 모를 깍아서 부드러운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며 긴쪽은 23cm, 짧은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고 아랫부분에는 11cm의 구멍이 있어 실제로 물을 담아두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모퉁이 부분의 일부의 손상 흔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명부전은 시왕전(十王殿) 또는 지장전(地藏殿)으로도 불리며

이 법당의 주불(主佛)은 지장보살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로 봉안되어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명부시왕(冥府什王)이 안치되어 있다

후불탱화로는 지장보살 뒤에 지장탱화를 시왕 뒤에는 명부시왕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후 미륵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세계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으로 도리천(忉利天)에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보살로서 지옥에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으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성불마져도 미룬 대자비의 보살이다

 

법주사는 일찍부터 지장보살과 깊은 관련을 맺고있는 곳인데 중흥조인 진표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서 지장보살에게 정계(淨戒)를 받았다고 한다

명부란 염마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곳이므로

시왕전[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 살면서 미륵불이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용화삼회를 열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고, 시왕은 128개 지옥을 나누어 다스리는 명계의 왕이다.

본래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각각 독립된 전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이

편찬된 이후 종래의 현세 기복신앙이 내세 구원신앙으로 바뀌면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고려말 이후 지장전과 시왕전이 명부전으로 결합되었다.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좌측에 위치한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산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고,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중 한 분인 나반존자를 말한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 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설치되어 있는게 특징인데 법주사는 대웅보전 바로옆에 위치한 것이 이채롭다. 

삼성각 삼성탱

삼성각의 탱화는 1991년에 조성된 것으로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엔 북극성에 해당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한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이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됐다.

좌측의 독성탱은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잇다.

우측의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과 시자의 모습이 보이고,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이 벽화로 묘사되어 있다.

진영각(眞影閣)

조사각(祖師閣)이라고도 부르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으로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가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받는 큰 스님을 일컽는 말로 특히

선가(禪家)에서 즐겨쓴다...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祖師閣)이라 하여 조선 후기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이씨(暎嬪李氏)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 모셨었는데 1991년에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影子殿)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에

있었으며 진영각 내에는 법주사 창건주인 의신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30분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진영각 내부의 모습

법주사 적멸보궁

적멸보궁 뒤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세존사리탑(충북 무형문화재 제16호)과

그 내용을 기록한 세존사리비가 있으며 사리탑은 고려 후기인 1362년(공민왕11년)에 조성되었다.

그 옆에는 1650년(효종1년)에 조성된 세존사리비가 사리탑의 조성과정을 전하고 있다.

당시 홍건적을 격파한 공민왕은 그 공덕이 부처님의 은혜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주사를 찾은 공민왕은 통도사 적멸보궁에 모셔진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1과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라고 하명하여 적멸보궁을 조성하였다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16호)
법주사 마애불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로 높이가약 6m가 되는 큼직한 바위에 불룩 새겨진

이 여래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있는 의상(倚像)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렸한 눈두덩, 꽉다문 입술 등은 기다란 귀,

삼도(三道)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의 마애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 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법주사 전경

법주사 가람내를 다 구경하려면 반나절 이상은 걸릴듯 싶다

그러나 팔재계를 시작하는 전야제 행사가 진행되기에 주마간산격으로 구경하고 행사장으로 향한다

팔관재계(八關齋戒)의 '팔관(八關)'의 의미를 살펴보면 '관(關)'이란 '막는다'는 뜻으로 '삼가하고', '금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덟 가지 '삼가하고', '금지할 것'이란 의미인데 그것이 바로 재계(齋戒)를 말하며 재계(齋戒)란 식사와 행동하는

것을 삼가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다시 구체적으로 계(戒)와 재(齋)로 구분된다.

계(戒)란 위에서 설명한 여덟 가지 가운데 1번부터 7번까지를 말하고 마지막 '때아닌 때 음식을 먹지 말라'라는 것을 '재(齋)'라고 한다.
'재(齋)'라는 한자의 의미는 '재계하다', '공경하다', '삼가하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본래 산스크리트어로는 'Uposadha'를 음역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잘 다스려서 악업(惡業)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의미가 변천해서 식사를 함부로 하지 않는 의미로 쓰이며, 스님들의 경우 정오를 지나서 식사하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재(齋)의 또 다른 의미로는 법회 때 스님과 신도들에게 공양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같은 의미가

변천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거나 성대하게 불공하는 것을 재(齋)라 하기도 했으며 특히 근래에 와서는 망자를

위해 49재 지내는 것도 재(齋)라고 부르고 있다.

팔관재계와 삼장재일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께서 어느 날 기원정사의 동쪽으로 산책하시다가 유야라는 신도의 집에 들리셨다.
부처님을 맞이한 유야는 여러 부인들과 같이 목욕하고 부처님 앞에 예배드리며 지극한 마음으로 법문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신도들에게 큰복이 되고 좋은 공덕이 되는 여덟 가지 재계의 법을 말씀하시면서 하루종일

후회가 없는 아라한처럼 생활하라고 말씀하셨다.


1. 아라한은 산목숨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다. 자비로 중생을 사랑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없고 산목숨에 대하여 내 몸같이 여긴다.


2. 아라한은 탐내고 아끼는 생각이 없다. 항상 깨끗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며 무엇이든지 주되 바라는 마음이 없다.


3. 아라한은 음욕의 마음이 없다. 이성에 대하여 부정한 생각을 내는 일이 없고 맑고 깨끗한 행을 닦으며 조용히 정진을 즐긴다.


4. 아라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은 언제나 조용하게 하고 말은 마음과 같이 법에 맞으며 거룩한 말에 거짓이 없다.


5. 아라한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마음엔 번뇌망상이 없고 생각은 게으름이 없으며 술은 생각지도 않는다.


6. 아라한은 방종하지 않는다. 좋은 의복과 패물로 사치하거나 분을 발라 화장을 하지 않으며

래 춤 악기 등 온갖 오락은 구경하지도 않는다.


7. 아라한은 몸의 편안함을 위하여 높은 평상이나 좋은 자리에 앉고 눕지 않는다.

    비단으로 된 이부자리는 쓰지 아니하며 낮고 허술한 평상이나 자리에 앉거나 쉬며 오직 바른 법만을 생각한다.


8. 아라한은 법답게 먹는 시간을 지켜 정오에 한끼만 식사하되 양에 맞추어 적게 먹으며 정오가 넘으면 먹지 아니한다.


이 여덟 가지 계법은 나쁜 짓을 막는 문이며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길이다.

출가해서 도를 닦는 이들은 평생을 지니는 것이지만 세속에 있는 신도로서는 그렇게 지닐 수는 없더라도

삼장재월인 일월, 오월, 구월이나 육재일인 팔일, 십사일, 십오일, 이십삼일, 이십구일, 삼십일만이라도 하루 밤

낮을 깨끗하게 받아 지키면 그 복됨이 열여섯 큰 나라의 보배들을 혼자 수용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고, 하늘의

천신들이 항상 보호하며 모든 재앙은 스스로 없어질 것이며 위없는 보리도를 장엄하여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될 것이다

 유야와 여러 신도들은 이 법문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전야제 축하공연

저녁 예불이 시작 되고 곧 이어 개회식이 열린다

기수단이 입장하고 포교사단 윤기중 단장은 인사말에서 팔관재계수계실천대법회는 “ ‘포교가 곧 수행, 수행이

곧 포교라는 정신으로 1일 출가자가 되어 그 동안의 수행과 전법활동을 점검하고 팔관재계를 수지하여 전법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행사라고 전제하고 지난8월 포교원장스님께서 제안한 신행혁신으로 전법의 새 지평을

열어가자는 신행혁신운동에 우리 5,000포교사들이 앞장 설 것을 다짐하자고 말했다.

법주사 주지 정도스님의 환영사와 신규 포교사들의 품수식에서 포교원장 지홍 큰 스님께서는 법문을 통해

올해 포교정책으로 정한 신행혁신운동은 불교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가자’ , ‘불자답게 살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불자는 동체대비 행을 하는 사람, 보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며

진정한 포교사가 되어 전법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난 불자로 법주사 일주문을 내려가라고 당부 했다

 

품수식에 이어서 열린 특강에서 법주사 회주 월탄스님은 전 세계 70억명의 인류를 부처님으로 제도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 불자들의 몫”: 이라고 지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조고각하(照考脚下)의 삶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야만 중생을 제도할 힘이 100%, 1000%, 1% 나올 수 있다

격려의 덕담을 들려주었다

속리산 법주사의 가을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추웠다

오리털 파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추위는 뼈속까지 스며는 느낌이지만 오랫만에 느끼는 환희심에 추위를 느낄새가 없다

오후불식 의식으로 저녁까지 굶고 철야정진을 하건만 3500여 포교사들의 행동은

흐트짐이 없어 보인다

밤10시부터 11시 30분까지 진행되는 연비의식... 새로운 불자로 다짐하면서
나는 하늘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길을 떠나라. 여러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동정하여, 인간과 천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마라.

비구들아!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

 

붓다의 전법선언 중 일부에서 발췌

팔재계 수계의식으로 연비를 하는동안 참회진언을 하는데  밤이슬이 흠뻑 내리는지

의자에 벗어논 베낭이 흠뻑 다 젖어 버렸다...별이 촘촘한 속리산 법주사의 밤

밤이슬을 맞으면서 범여는 뭘 서원한 것일까.

수계식을 끝내고 법주사에서 정이품송이 있는 곳까지 왕복 6.4km 철야정진에 나선다

촛불을 손에들고  목탁에 맞춰 석가모니 정근을 하는 포행... 오랫만에 느끼는 환희심이다

왕복 6.4km의 철야정진을 끝내고 다시 법주사로 되돌아와서 새벽예불을 준비한다

새벽예불

새벽 예불이 끝나고 포교부장 무각스님의 특강이 이루어진다

스님께서는 법문에서 항상 해야 하는 일과 수행이 있어야 한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상을 내세우지 말고 “붓다로 살자”고 말했다

금강경을 합송하면서 특강을 마무리 한다

회향식

25일 동이트는 새벽녁에 열린 회향식에서 포교원장 지홍 큰스님은 “1500여년 속리산 법주사의 역사에서

전국의 포교사 3,500여명이 한데 모여 밤이슬을 흠뻑 맞아 가면서 철야로 기도하고 정진했다는 사실이

예삿일 아닐 것이다”고 말하고 “오늘 이 시간부터 우리는 ‘어제와 다른 나’, ‘붓다로 살자’,‘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는 포교사로 거듭났으믈 자랑스럽게 알리자” 고 독려하며 회향식을 마무리 한다

회향식을 마치고 각 지역단별로 기념 촬영을 끝낸후에 난 도반들과 헤어진다

 

동료 포교사들은 귀경하는 버스에 오르는데 난 속리산 문장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