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17년 02월 26일
☞ 산행날씨: 아침에 흐린날씨...오후에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9.8km (실제거리 약 33km) / 10시간 15분소요
☞ 참석인원: 진권아우와 둘이서
☞ 산행코스: 우장고개-밀양박씨 묘지-332.3봉-갈항터널 위-366.4봉-412봉-457봉-395봉
봉곡마을 갈림길-오봉대교 갈림길-안부-수점마을 갈림길-412봉-456.7봉
남평문공묘지-제석봉(효자봉)-조망바위-운동시설-제석리갈림길-국사봉-백마산
벙커앞-갈림길-중부내륙고속도로-금계마을 입구-돌고개-경부고속도로-하송마을 입구
142.2봉-영월신공묘지-안부-무명봉-송천령갈림길-송천령-무명봉-무명봉-국사봉
안부-무명봉-397봉-무명봉-꺼먼재산-점터고개 갈림길-북봉산-다시 꺼먼재산
NO19송전탑-대망2리 갈림길-294.2봉-283.1봉-안부-177.8봉-173봉-신촌고개
133봉-174봉-산막고개-186봉-갈림길-187.4봉-파평윤공 묘지-백마산-운동시설
33번국도-덕산이공묘지-73봉-고아농공공단-대망천 제방-어강마을-합수점
☞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남면, 아포읍 / 구미시 수점동, 고아읍, 선산읍
어젯밤 늦게까지 진권아우와 술잔을 기울이며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인
05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여관 입구에 있는 정수기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지난해 영암지맥
첫 구간에 들렸던 식사장소인 식당에서 우거지 해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서
베낭을 넣어려 하는데 갑자기 뭔가 허전하여 장비를 점검하는데 카메라가 보이질 않는다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진권아우에게 베낭을 맡겨놓고 식당으로 가니 카메라가 없다서
둘러 여관으로 가니 방에도 카메라가 없다... 다시 편의점으로 와서 베낭을 뒤져봐도 카메라는
보이질 않고...다시 여관으로 갔는데도 카메라는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 112에 신고를 하려고
여관문을 나서는데 여관앞 RV차량에서 두 사람이 뭘 만지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내 카메라가 아닌가
사연인 즉 여관문을 나서면서 정수기에서 수통에 식수를 채우면서 정수기에다가 카메라를 놓고 왔다.
그런데 우리가 묵은 여관은 싸구려 여관이라 일용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사람들이 내 카메라를 습득한 모양이다... 그 카메라 어디서 습득했냐고 물으니 여기서 줏어서
파출소에 신고하려 했다는 것이다...이 사람들 그게 뭔지 아느냐고 호통을 치니 나에게 주면서
본인 것이 맞는지 확인해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사이에 진권아우가 도착하고...
카메라를 찾은 다음에 택시를 타고 우장고개로 향하는데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우장고개(180m:06:35)
김천시 남면 오봉리와 구미시 수점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중앙선이 없는 포장도로에
이동통신탑이 서있고, 제석봉으로 오르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오늘의 산행을 종료한다
옛날 금오산성을 보수하거나 군수품을 운반할 때 이 마을까지는 소로 운반하고 여기서부터
산성까지는 사람이 등짐으로 지고 나르면서 몰고 온 소는 이곳에 매어두고 갔다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이정표(→금오산 정상 2.58km, ↑우장마을 0.58km, ←제석봉 5.94km)가 서있다
우장고개에 도착하니 아직까지 어둠이 가시지 않고 있다
택시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아직까지
어둠이 가시지 않고 있어 헤드렌턴을 켜고 산행을 시작한다
서서히 날이 밝아지면서 주변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인 밀양박씨 묘지(06:48)
332.3봉(06:55)
등로에서 바라본 중부내륙고속도로
갈항터널 위(07:00)
이 능선 아래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지나가는 갈항터널 윗쪽이다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오르막을 올라선다
366.4봉(07:10)
366.4m봉삼각점(△401복구 / 78 11 건설부
제도권 등로라 그런지 등로와 이정표가 잘되어 있다
최근에 불이난 듯한 곳을 지난다
412봉(07:25)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간벌지대이긴 하지만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457봉(07:30)
가야할 제석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지나갔지?
약간의 흐린 날씨탓인지 일출을 보지 못했는데 금오산 너머로 해는 벌써 저만큼 올라와 버렸다
395봉(07:37)
395봉을 내려서니 녹색 그물망이 처져 있는데 좌측으로 내려선다
뫳돼지의 횡포가 심한 모양이다
독한 사람이군...지맥 산꾼들은 그런 사람이 없으니 걱정마소
뫳돼지 목욕탕... 뫳돼지의 횡포가 상당히 심한 모양이다
지나온 457봉의 모습
능선 좌측으로 오봉 저수지(梧鳳池)가 보인다
오봉 저수지가 있는 김천시 남면 오봉리(梧鳳里)는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남면에 속한 오수동,
봉곡동이었으며, 1914년에 갈항동과 합하여 오봉동이라 하였고, 1971년에 모래동, 봉곡, 갈손,
오수, 원골을 분리하여 오봉 1동이라 하였고, 1988년에 동(洞)을 리(里)로 바꾸었다.
자연마을로는 원골, 봉곡(鳳谷), 오수(梧水), 갈항(葛項), 삼가촌(三家村), 우장(牛場) 등이 있다.
원골은 옛날에 서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곡이라 하기도 한다.
봉곡은 마을 뒤의 골짜기가 봉의 형국이라 하여 봉곡이라 하였으며, 오수는 나부정이라는 선비가
임진왜란 때 이곳에 피란와서 개척한 마을인데, 다섯 골짜기가 이 마을을 둘러싸며 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오수라 했고, 이곳에 샘을 파서 물을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고 하여 나병 환자들이 여기에
모여 살면서 마음껏 물을 마셨다고 한다. 갈항은 약 1600 년 전 김상집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칡덩굴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며, 또한 신라시대 갈항사라는 사찰의 이름을 땄다고도 한다.
지금 갈항사는 없어졌으나, 그 절 터에 보물 제245호인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남아 있다.
삼가촌은 약 60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는 세 집만 살았다 하여 삼가촌이라고 불렀으며,
씨집메라고도 하며, 우장은 금오산성에 식량을 운반할 때 소를 매어 두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쇠바탱이라 하기도 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금오산(金烏山)
금오산의 이름이 참으로 많다...원래의 지명은 대본산(大本山)이었다
금오산의 지명은 이 산에 금빛 태양새(三足烏)가 날아가는 형태처럼
보인다고 해서 유래되었으나, 시대에 따라서 이름을 달리 해왔다
고려 초기에는 남숭산(南崇山)으로 불렀다가 고려 후기부터 금오산으로 불렀다.
남숭산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중국의 숭산에 비유하여 생김새가 비범한데서 유래되었으며
이 산은 경북 칠곡과 인동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인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고도 했고,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국처럼 보인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라
불렀으며, 선산쪽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산의 형세가 뾰족하여 붓끝처럼 보인다고 해서
“필봉(筆峰)”이라 불렀는데, 이 금오산 아래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 대통령(박정희 - 근혜)이
태어났고, 장택상, 신현확, 김덕, 서석준, 이수성, 김만제 등 6명의 총리가 배출되었다
봉곡마을 갈림길(07:48)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있는 봉곡(鳳谷)마을은 마을 뒤의 골짜기가 봉황의 형국이라 하여 붙혀진 지명이다
오봉대교 갈림길(07:53)
이정표(←오봉대교 1.4km,↑ 제석봉 2.1km, ↗우장마을 4.32km)와 나무의자 2개가 있다
안부(07:55)
다시 나무계단이 있는 오름길이 시작되고...
수점마을 갈림길(08:00)
구미시 수점동(水店洞)은 1963년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구미읍 수점동이 되었으며,
1978년 구미읍과 칠곡군 (漆谷郡) 인동면(仁同面)이 구미시로 통합됨에 따라 구미시 수점동이 되었다.
이후 1995년 선산군과 구미시가 구미시로 통합되어 구미시 수점동이 되었다.
무수점(水店), 소바탕(쇠바탕, 쇠바태이)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수점은 금오산 계곡물이 급히 흐르다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 붙혀진 이름인데
물이 많은 곳을 뜻하기도 하는데, 그런 연유인지, 이곳엔 상당히 큰 대성저수지가 있더
소바탕은 소들에게 풀을 먹이는 풀밭이 있어서 붙혀진 이름이다
412봉(08:05)
봉우리 명까지는 모르겠고, 이젠 고도까지도 엉터리이다... 열정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계속되는 제도권 등로
쉼터 의자도 자주 보이고...
아주 편한 길을 여유롭게 걸어가는데 남원에 사시는 젠틀맨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범여님! 어디셔요... 제석봉 조금 못간 지점인데요’ 하니까 자기는 남성주 휴게소란다
천천히 갈테니까... 오셔요... 괜스레 기분이 좋고, 반가워진다
효자봉(孝子峰:456m:08:20)
1/25000 지형도에는 조금후에 가야할 제석봉을 효자봉이라고 부른다
남평문공 묘지(08:23)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길로 올라서니...
볼품없는 무명봉을 만나고...
1분만에 다시 편안한 등로를 만난다
슬랩지대를 지나...
아주 편안한 등로를 걷는다
금오산에서 효자봉(일명:제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금오산에서 효자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외곽부는 비탈면 전체가 급경사를 이루며 좁고 긴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효자봉 북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구미시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효자봉 남쪽에서 발원한 하천은
경호천(鏡湖川)으로 흘러들어 칠곡군 북삼읍과 약목면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제석봉 정상에 있는 이정표
제석봉 정상에 올라서니 여러개의 돌탑과 전망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데
제석봉 아래에 있는 제석리에서 왔다는 아줌마 한 분이 내가 갖고 다니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따라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오늘 산행길에 처음 만난 사람이라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깜짝 놀랜다
그러면서 여기에 있는 돌탑은 자기 부군이 쌓았다고 자랑을 하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부군 되시는 분은 올해 72세인데 백두대간을 2번이나 종주하였고, 오늘은 땅끝기맥을
가셨다고 하면서, 부군 되시는 분이 산행을 하는 날이면 자기가 이 제석봉을 올라와 지킨다고 한다
제석봉(帝釋峰:512.2m:08:35)
경북 김천시 남면과 아포읍, 구미시 수점동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지도상에는 제석봉이 아닌
효자봉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제석봉으로 바뀐 이유는 정확한 연유를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이 봉우리 북동쪽에 위치한 제석리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지?(범여의 생각 中에서)
이 산은 아포읍의 진산으로 고대 삼한시대에 개령을 중심으로 한 아포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소국(小國)으로 감문국, 아포국, 어모국, 문무국 등이 있었으며
추풍령을 지나 금오산으로 뻗어내린 산줄기 가운데 솟아오른 봉우리가 제석봉이다
김천의 곡창지대인 원창 가운데 솟아 올라 있으며, 삼한시대 아포국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산이다
지도상(영진지도 1/50,000)에서 효자봉으로 되어 제석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모립곡(지금의 구미시 상모동)에서 살던 한 젊은이가 병석에 누운 앉은뱅이 홀어머니를 위해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 이 봉우리에 올라가 지성으로 기도를 올려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후 젊은이의 지극한 효성을 기려 효자봉(孝子峰)이라 하였다
늘 나의 든든한 동반자인 진권아우
제석(帝釋)이란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에서 나온 용어로 불법과 이에 귀의하는 자를 수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하는 하늘의 임금을 말하는데, 원래는 힌두교의 신으로서 고대인도에서는
인드라(Indra)라고 했으며, 불교에 들어온 이후 제석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러 경론에 따르면 제석천은
원래 마가다국(Magadha)의 브라만이었으며, 보시(布施) 등의 공덕을 닦음으로써 도리천에 태어나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천주가 되었다.
불교에서 그의 지위는 범천(梵天)과 같이 불교의 호법주신(護法主神)으로서 동방을 수호한다.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며 사천왕과 십대천자(十大天子)가 양 옆에서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가 성불한 이후 제석천은 그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석가모니가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에게
설법할 때에는 보개를 손수 들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 모습은 보통 천인(天人)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하얀 코끼리를 타고 오른손에는 삼고저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신화〉에도 나타나는데, 천제 환인을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후 민간에서는 이를 신앙대상으로 삼아 하늘의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제석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가야할 국사봉은 약간의 운무에 가려있고...
돌탑 사이에 조그만 불상이 하나 있는데 진권아우가 불상에 예배를 올린다
아마 4월부터 2개월동안 히말라야 로체 등정의 성공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보다
오늘이 음력으로 이월 초하루이다... 내일 절에가서 아우를 위해 등이라도 하나 켜야겠다.
SBS세상에 이런일이 방송되었다는 이곳 제석봉(일명:효자봉)
안면있는 시그널들이 보이고...
제석봉 북서쪽으로는 김천혁신도시가 보인다
제석봉을 지키는 아줌마와 작별을 하고 국사봉으로 향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제석리(帝釋里)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는 제석봉에서 지명을 따왔다고 하며 제석리에는 삼한 시대 국가설과
역모를 꾀하다 처형된 길운절(吉雲節)과 관련된 길지(吉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제석리는 삼한 시대 성립한 아포국의 도읍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뒷산인 관리봉(官吏峰)과 제석봉,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는 삼태봉(三胎峰) 등지에서 관련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사서에도 “반란을 한 아포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 30명을 동원하였으나 감천 냇물이 불어 되돌아왔다
[牙浦叛大發三十夜度甘川水見漲而退].”라는 기록이 있다. 아포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감문국과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일대의 드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일정 형태의 소국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암릉구간이 나오고 우회하여 내려간다
편안한 등로를 걷다보니 조망바위에 도착한다
조망바위(08:45)
가야할 국사봉과 백마산을 배경으로...
운동시설(08:53)
제석리 갈림길(08:55)
제석리 갈림길을 지나면서 등로 가운데 뒤에 따라오는 젠틀맨님 드시라고
막걸리 한병과 금오지맥 종주 격려문구를 길바닥에 두고 가는데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막걸리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언 넘이 먹은거야!
국사봉 오름길에 뒤돌아 본 제석봉의 모습
국사봉(國士峰:480m:09:05)
경북 김천시 아포읍 국사리와 대성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이정표와
정상석과 돌탑이 보인다... 국사봉의 지명 유래는 이 산 아래에 있는 국사리에 따온듯 하다
국사리는 예부터 미곡 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사과와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북쪽으로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국도가 가로지르는 교통의 요지이며, 2008년에 중부내륙고속도로
김천~현풍 구간이 개통되고 인터체인지도 연결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송천리 대지 앞부터 국사리 일대에 걸쳐 한못 또는 대지(大池)로 불리던 광활한 못이
있었다고 하며 이곳은 판서 벼슬을 지낸 한씨(韓氏)의 집터로 국사봉과 효자봉의 정기를 이어 받은 명당 터로 알려졌다.
그 때문인지 한 판서의 아들 8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등 집안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장차 한씨 집안이
반역을 도모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이를 두려워한 나라에서 집을 헐고 그 자리에 못을 팠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는 한 판서가 주위의 모함이 있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고자 스스로 집을 헐고 떠났다고도 한다.
이 못 때문에 마을도 대지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1970년대 경부고속국도가 놓이면서 마을 대부분이
개발되어 한못은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은 택지로 개발되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신시가지가 조성되었다
국사봉에서의 인증샷
국사봉을 지나니 쉼터 의자도 보인다
등로는 마치 둘레길 수준이다
백마산(白馬山:434m:09:20)
넓은 헬기장이 나오는데 트랭글 앱에서는 이곳을 백마산으로 안내하고 있다.
백마산 정상의 이정표
특별히 길을 잊어버릴 일은 없을듯 하다... 워낙 등로가 잘되어 있다.
그러나 백마산이라 부르는 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는 이정표가 없다.
등로에서 바라본 김천JCT
경부고속도로와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만나는 김천JCT 옆 아파트 단지쪽이 아포읍이다
아포읍(牙浦邑)은 김천시의 동북부에 위치해 동북쪽으로 구미시와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은
감천을 경계로 감문면, 개령면, 서남쪽으로는 남면과 접한다. 아포라는 지명은 삼한시대에
제석리 일대에 아포국이라는 소국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감천이라고 하는 큰 하천을 끼고 있어 예부터 배가 드나들었는데 그중 지금의 의리 공쌍마을 앞에 지역에서
가장 큰 포구가 있어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어금니 아(牙)자에 물가 포(浦)자를 써서 아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동남쪽으로는 효자봉, 국사봉, 제석봉 등 높은 산이 감싸고 있고 감천이 동서쪽으로 흐른다.
내리막길 좌.우에 있는 소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때문인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벙커앞(09:33)
산줄기(脈)에 관한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현오님
워낙 공사다망하신 분이라... 3월 10일 모임에서 볼 수 있을라나...
갈림길(09:35)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가야 한다(독도주의)
묘지를 지나고...
뫳돼지 목욕탕을 지나면서 등로는 애매하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조금은 높다
애매한 등로를 지나니 시멘트 도로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아래(09:45)
중부내륙고속도로 지하를 지나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금계(金鷄)마을 입구(09:53)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에 있는 금계마을은 마을 지형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금계포란형은 마을 앞이 개방되면 닭이 알을 편히 품을 수가 없어 마을에 우환이 드는 지형이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약 300년 전 마을 앞 사유지를 공동 매입하여 마을 앞이 가려지도록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앞숲으로 불리는 약 1,752.07㎡의 송림을 마을 공동 소유로 관리하고 있으며
숲 옆으로는 마을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대지(大池)는 마을 옆에 커다란 연못인 한못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1970년 경부고속국도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사라졌다
도로를 따라서 ∩자 형태로 걸어가는데 경부선 철도와 김천JCT를 통과하는 지하차도가 나오고
좌측으로 과수원이 보이는데 내가 걷고있는 이 도로가 금오지맥길이 아니고 앞에 보이는
과수원이 지맥길인데 고속도로와 철길이 가로막고 있어서 우회면서 걷넌다
경부선 철길 지하차도를 빠져 나오니 돌고개가 나온다
돌고개(74m:10:00)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에 있는 고개로 경부선 철도와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만나는 김천JCT와 김천에서 구미로 이어지는 906번 지방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인듯 하다
도로 서북쪽으로는 아포읍사무소가 있는데 지명에 대한 자세한 연유를 알 길이 없으나
돌이 많아서 돌고개(石峴)가 아니라 빙 둘러 간다는 뜻에서 ‘돌고 돌아 간다’ 는 돌고개가
아닌지(범여의 생각中에서...단순한 私見임)
뒤돌아 본 돌고개의 모습
김천에서 구미로 연결되는 4차선 906번 지방도는 생각보다 통행량이 많다
차량의 흐름을 살피면서 무단횡단을 했더니만 뒤따라 오는 젊은것이(진권아우)
눈을 부라리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한다.
오일뱅크 주유소가 나오고 진영케미컬 표시판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주유소를 끼고 돌아서니...
개구멍이 나오고...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지하차도(10:05)
지하통로를 빠져나와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하송마을 입구(10:10)
경부고속도로 옆을 끼고 올라서니 하송마을 입구가 나오고 좌측으로 꺽어진다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에 있는 하송마을은 송내마을 아래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송과 금천의 이름을 따서 송천리라 하였다.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공터에 묘지들이 보인다.
묘지를 바람막이 삼아서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가져온 앙꼬빵과 쥬스, 과일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좌측에 폐가가 있고, 우측엔 묘지들이 즐비하다
새로 조성된 가족묘지를 지나니...
등로는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여름에 이곳을 지난다면 애를 많이 먹겠다.
인동장공과 부인 덕산황씨 묘지도 보인다
그물망을 지나 사과밭 안으로 들어선다
사과밭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백마산과 국사봉, 제석봉이 아련히 보인다
농로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서니...아카시아를 비롯한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이내 편한 등로가 나오고...
142.2봉(10:40)
이곳에서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진다
내리막을 내려서자마자 또다시 좌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영월신공의 묘지가 나오고, 묘지 윗쪽의 능선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영월 신공 묘지(10:45)
영월 신씨의 원조는 신라 때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한 것으로 전하며,
시조는 고려 예종 때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신경이며 9세에 이르러 상장군파(上將軍派),
영산파(寧山派)[덕재공파(德齋公派), 초당공파(草堂公派)], 영월파(寧越派)[부원군파(府院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등 크게 5개 파로 나뉘었다.
안부(10:46)
무명봉(10:48)
약간의 거친 등로를 따라서 올라서니...
송천령 갈림길(11:00)
송천령(松川嶺:251m:11:02)
이곳에서 좌측으로 1분정도 가면 지도상에 송천령이란 봉우리가 나오고
고개가 아닌 봉우리를 “령(嶺)이라 해놨는데 이곳이 “송천령“이 아니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조금을 더 가면 구미시 고아읍 외예리 가는길에
송천령이 있다... 이곳에는 서레야님이 송천령이라는 코팅지를 걸어논 것을
어느 산꾼이 떼어버린 것을 진권아우가 들고와서 사진을 찍어 달란다
지명의 유래는 우측 능선 아래에 있는 송천리에서 따온듯 하며 이곳부터는
좌측으로 구미시로 고아읍으로 접어드는 구미와 김천의 경계능선이 된다
다시 송천령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무명봉(11:10)
무명봉(11:17)
완만한 능선을 걷다보니 국사봉이 도착하는데 오늘 구간에 2번째 만나는 국사봉이다
국사봉(國士峰:11:20)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와 구미시 고아읍 예외리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이 국사봉
북동쪽에서 구미천이 발원하여 구미 시가지를 지나 구미시 비산동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김천 지역에 속하는 부분은 상류부로 2.3㎞ 정도 구간이며 하폭과 유량이 적다
이곳부터는 재선충 피해가 심한지 소나무를 벌목하여 덮어논 것이 많이 보인다
안부(11:25)
안부에 오르면서 아침을 일찍 먹은 탓인지 약간의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능선 가운데 적당한 장소에서 밥상을 편다
점심시간(11:27~12:10)
이곳에서 밥상을 펴고 라면을 끓이고 술한잔 하면서 젠틀맨님에게 전화를 하니
지금 국사봉을 지나고 있단다... 에~잉 그렇게 빨리... 잠시 후 젠틀맨님이 도착하고
오랫만에 셋이서 라면에다 소주 4홉들이 한 병을 게눈 감추듯이 해치우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 가는줄을 모른다...산에서 이렇게 만날줄이야!
무명봉(12:15)
또다른 무명봉(12:23)
능선에 오르지 않고 우측으로 살짝 꺽어진다
397봉(12:27)
특이한 형태의 암릉
무명봉(12:35)
암릉구간이 나오는 등로를 걷는데 젠틀맨님과 진권아우는
호화준족이라 그런지 사진 몇 커트 찍는 사이에 흔적도 보이질 않는다
지도상 꺼먼재산이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꺼먼재산은 아직도 멀은 모양이다
편안한 등로를 걷다보니 또 졸음병이 밀려온다
꺼먼재산(12:42)
구미시 부곡동과 고아읍 내예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가운데는 2등 삼각점이 있고
구미시에 설치한 북봉산 등산 안내도가 있으며, 이곳부터는 구미 사람들이 트레킹 코스인지
베낭도 없이 물통만 하나 들고 산행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인다
꺼먼재산의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조은산의 산행기를 보니 그 먼데 있는 산 → 그 먼데 산 →
꺼먼데산→ 꺼먼재산이 되었다는 사견을 내세우는데 조금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꺼먼재산 정상 삼각점(△선산21 / 1981복구)
꺼먼재산 정상에서 인증샷
꺼먼재산 정상인 지맥길에서 동쪽으로 0.9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점에 있는 다봉산(북봉산)으로 향한다
점터고개(店峴嶺) 갈림길(12:45)
접성산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구미시 고야읍 원호리의 웃골 서쪽에 있는 점터마을에 있는 고개로
이 점터마을에서 옛날 옹기점이 있던 곳의 고개를 점터고개 또는 점티고개, 점현령 등으로 불러왔다
예전에 원호리 사람들이 선산부를 오갈 때 점현령을 넘어 대망리로 나갔으며,
대망리에서는 점현령을 넘어 옛 구미를 거쳐 경상감영이나 대구부(大邱府)를 오갔다.
점현령을 오가는 길은 산골 오솔길이었으나 그때는 지금의 국도처럼 사용하였다.
점현령은 2000년에 평지처럼 낮추어졌으며, 지금은 국도 33호선에서 이례리를
지나 대망리로 진입한 뒤 점현령을 지나서 구미역이나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도 한다
북봉산 오르는 길에서 만난 돌탑
소나무숲 사이로 올라서니...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나오고 팔각정인 북봉정 지붕이 보인다
북봉산의 이정표와 북봉정
북봉산(北峰山:400.5m:12:53)
경북 구미시 봉곡동 뒷쪽에 자리잡은 북봉산은 영진지도를 비롯한
지형도에는 다봉산으로 기록이 되어있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산 정상에는 헬기장과 표시석, 이정표, 선주청년회에서 세운 표시석, 벽진이씨 북봉공 종회
안내판 등이 있어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정상에 서니 구미시가 한 눈에 보이나
짙은 박무로 인해 모든게 흐릿하게만 보인다
북봉산의 예전 이름은 등골산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구미시가 많이 커지면서 외지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봉산이 전체를 아우르는 산이 되었고
실제로 영진지도를 비롯한 지도책에도 이곳을 다봉산이라 표기가 되어 있다
그러다가 이 산의 소유주인 벽진이씨(碧珍 李氏) 종회에서 원래의 이름인 북봉산을 되찾고자
그 유래를 조사하고 자료를 많들어 국토지리원과 구미시에 건의하여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벽진이씨 북봉공 종회 안내판
북봉산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조선조 광해군 8년(1616년) 벽진인 이민선(李敏善:1546~1626)은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를 지내고, 낙심하여 정착한 곳이 멱우골이며 현재
별남고을로 알려진 곳인데 조선조 선조실록 1594년 2월 이민선은 임진왜란때 성균관 대성전이
왜적들에 소실되자 이에 국란을 극복하려고, 국왕에게 중수할 것을 상소하여 국왕(선조)이 기꺼이
윤허허였으며 중수를 마친 후, 난세를 떠나 이곳 북봉산 아래 성남촌으로 이주한 기록이 있다.
송자대전에 우암 송시열은 조선조 인조 12년 4월(1634년)영남으로 유람을 하게 된다
우암은 동춘당 송춘길과 함께 선산 성남쪽에서 만나기로 한 기록이 있고이 사료적 근거를
보면, 이민선의 아호(雅號)를 북봉(北峰)이라 하고 뒷산을 북봉산(속칭:등골산)이라고
한 명칭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북봉산 정상에서 인증샷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북봉산
북봉산에서 바라본 구미시는 모든게 흐릿한게 요즘의 이 지역 출신인 박근혜 대통령 속마음처럼 보인다
지금의 「구미지역」이 신라 및 고려초에는 선산에 속한 방리였으나 그 당시 어떤 지명으로 지칭하였는지
자료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 오는 말이 없고, 다만 구미라는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으로 등재된 것은
고려 성종(981~997)때부터이다...즉, 고려사 병지(2) 역참조에 "상주도당의 25개 역 중에 구미(선주)가
있음을 보아"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성종14년(995) 선주자사를 파견할 때 관아 및 역참을 지금의 구미시
선기동에 함께 설치한 것이 고증되었다.
그후 조선조에 이르러 단종2년(1454)에 간행한 「세종실록지리지」의 역참조에「구미역」이 기록되어 있고,
그 뒤 23년후인 성종8년(1477) 9월 선산도호부사 김종직이 편찬한 「일선지」에 "선산도호부 관할의 남면 방
리조에 구미리(선산부 남쪽 삼십리) 및 전야조에 구미평과 고적조(선주)에 고아 및 사창, 관청, 향교 등의 구기가
남면「구미」에 있다"는 등의 기록을 보아 조선초기부터 구미라는 리명이 역명과 함께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종25년(1530) 왕명에 의하여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산도호부, 사묘조에「길재사」는
금오산 밑의「구미리」에 있는데 관찰사 남재의 소건이라 하였고, 그후 영조36년(1760)에 간행된「여지도서」의
「금오진 선산도호부」단묘조에 역시 "길재............사는 금오산하의「구미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길재사당이
금오산 아래의 「구미리」에 소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구미」의 미자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만든 이두글자로 음은「며」이다. 또한 며와 彌(미)가 거의
동음인 것으로 모두 '동음이자(同音異字)'로 보아야 한다고 사학자인 이병도박사는 고증하고 있다.
이두는 한자의 음이나 새김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명, 지명, 관직명 등에
보이는데 신라, 고려, 조선조 초기까지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미의 지명은 이두문자로 뜻이 없기 때문에 음이 같은 「뜻」이 있는 글자인「구(龜)」자와
미(尾)」자로 바뀌었다고 사학자인 이병도박사 및 불교학자인 이인재씨(한학 및 이두문에 조예가 깊음) 역시 고증해 주었다
북봉산 정상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북봉정으로 향한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랴...
오랫만에 해후한 젠틀맨님과 진권아우와 함께 막걸리 한병을 나눠
마시고 잠깐동안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꺼먼재산으로 되돌아 간다
다시 꺼먼재산(13:20)
계속되는 내리막길... 졸면서 걷기에 딱 좋은 코스이다
진권아우와 젠틀맨님과 산에 대한 얘기로 지루한 줄 모르고 걷는다
NO19 송전탑(13:30)
대망2리 갈림길(13:32)
이곳에서 횡산리 방향인 좌측으로 꺽어진다
등로 주변으로는 재선충의 피해가 상당히 많다
294.2봉(13:40)
283.1봉(13:55)
서레야님은 작은안연흥봉이라고 적어놨다... 근데 믿음이 안간다
283.1봉 삼각점(△412재설)
283.1봉을 지난 다음에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져야 한다
독도에 주의할 구간이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될듯..
안부(14:05)
177.8봉(14:12)
이곳도 독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이다
뚜렸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173봉(14:20)
등로 사이로 신촌마을이 보이고 급하게 내려서니...
나뭇가지 높은 곳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앞에 보이는 저 밭 언덕이 지맥길인데 편하게 논 가운데를 지나 통신탑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신촌고개(新村峴:61m:14:32)
구미시 고아읍 파산리에서 신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916번 지방도가 지나며
고개 좌측에 신촌마을이 신촌고개라 불리는데 정상에는 통신탑이 보인다
남쪽으로 깃대봉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북쪽으로 덤바위산이 가로놓여 있고
서쪽에 흐르는 낙동강 지류 감천이 농경지의 젖줄 구실을 한다
신촌리는 새을, 명동, 등너머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월 또는 신촌이라고도 한다.
등너머는 새을 남쪽 산등 너머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를 가로질러 밭 가운데로 올라서니 유인 인동장씨 묘지가
있고 잡목은 우거져 있으나 그래도 등로는 뚜렸한 편이다
가족 묘지를 설치하려는 모양이다...잔디를 심어놨고 묘비 하나가 보인다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분의 공덕비가 서있는 묘지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우측으로 통정대부를 지낸 경주최공의 묘지가 있는데
좌,우로 서 있는 문인석중에 우측의 문인석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있어 보기가 않좋다
잠깐동안 등로가 거칠어져 심하게 잡목의 저항을 받는다
133봉(14:43)
공작산 아우님이 먼저 지나갔나?
김해김공과 유인 김해김씨의 묘... 동성동본도 결혼이 허용된 모양이다
논 가운데를 가로질러...
넓은 임도로 올라서니...
이 경일님의 격려문구가 보인다
지맥길은 능선 앞에 새로 조성된 묘지 좌측으로 올라가 174봉 아래서 우측으로 가야하는데
대다수 산꾼들은 편한 우측 임도로 가버리고, 젠틀맨님과 나만 미련스럽게 좌측으로 오른다
174봉 꼭지점(14:53)
잡목의 저항이 엄청나게 심하다... 희미한 길을 따라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다시 편안한 임도를 만나...
조금을 걷다보니 또다시 도로가 나온다
절개지 아래로 내려서니 산막고개가 나온다
산막고개(15:00)
구미시 고아읍 파산리에서 황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차량 통행이 거의 없다
산막고개에서 올라서니 파평윤공과 부인 밀양박씨 묘비가 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고아읍 파산리(巴山里)의 모습
고아읍 파산리는 조선 초기 김해허씨 일족이 처음 정착하여 살 때 마을 뒷산의 모습이 뱀과 비슷하여
마을 이름을 사미동(巳尾洞)이라 하였다. 그러자 집에 뱀이 너무 자주 들어오므로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뱀의 눈을 뺀다는 의미로 뱀 사(巳) 자에 점을 찍어 파토리(巴吐里)라 하였고, 후에 파산리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 파산은 중국의 지명으로, 마을을 개척한 김해허씨와 연관이 있는 지명이어서 파산동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연마을로는 봇들(일명 파산·파토동), 화개동(花開洞, 일명 하망정) 등이 있다.
봇들은 조선 말기에 대망리에서 파산리 쪽으로 큰 보(洑)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개동은 봇들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쪽이어서 꽃이 일찍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망리의 망정 밑이어서 하망정이라고도 한다
금오지맥이 끝나는 지점인데 잡목이 끝까지 태클을 건다
186봉(15:10)
갑자기 등로는 무쟈게 좋아지고...
갈림길(13:20)
187.4봉 능선에 올랐다가 정상까지 가지않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진다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오래된 묘비가 있는 파평윤씨 묘지들이 나온다
파평윤씨 묘지들
특이한 묘비
朝鮮學生坡平尹公之墓라고 써놨다
처사 파평윤공이라... 處士와 學生이란 생전에 벼슬을 하지 않으신 분이다
고로 묘비위엔 지붕을 씌우지 않는 법인데... 이곳은 한결같이 지붕석이 있다
백마산(白馬山:186.6m:15:30)
구미읍 고아읍 황산리와 오로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선산)에
"백마산(白馬山)은 선산도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로 처음 등장하며 그 위치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표기자의 변화없이 『여지도서』(선산)와 『대동여지도』에 '백마산(白馬山)'이 기재되고 있어
강한 지명의 존속성과 주민들의 지명 인식을 알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백마산(白馬山) : 오로촌 서쪽에 있는 산 (중략) 모양이 백마처럼
생겼다 함"이라는 기록이 있어 지명 표기자를 뜻풀이한 지명 유래의 일설을 확인할 수 있다
백마산 아래의 오로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단종이 세조에게 손위(遜位)함을 보고 직제학 오로재(吾老齋) 김성미(金成美)는 사위 이맹전(李孟專)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사모하며 “나는 이곳에서 늙겠다.”는 말과 함께 여기에서 살았다.
그 후 태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심온(沈溫)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길렀는데, 후일
심온의 아들이 좌의정에 올랐을 때 양부(養父)인 김성미에게 벼슬길에 오르기를 권했다.
그러나 김성미는 사양하고 “나[吾]는 홀로 늙어가겠다.”고 해서 이 마을을 ‘오로(吾老)’라고 칭했다고 전한다
금오지맥 마지막 구간을 원칙대로 걸어 보기로 한다
금오지맥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서 오로리를 지나 낙동강과 감천이 합쳐지는
합수점으로 간 산꾼들의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고 99%이상의 산꾼들이
이곳에서 좌측의 에덴아파트 방향으로 내려가 선주교에서 산행을 마무리 하였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금오지맥의 끝지점은 분명히 감천 끄트머리에서 끝내야 한다
진권아우와 젠틀맨님과 함께 오로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운동시설(15:38)
묘지옆을 지나 내려서니...
등로에서 바라본 고아읍 오로리(吾老里)
오로리의 옛 이름은 오을고개로, 외부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모두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올라가는 고개, 즉 오을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유래에 따르면,조선시대에 태종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을 숙청할 때
그 아들 심회(沈澮가 유모의 헌신으로 오로리 가좌골로 와서 강거민(康居敏)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뒷날 심온의 결백이 밝혀지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러 양아버지인 강거민에게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하였으나 강거민이 “오로사(吾老死: 나는 이곳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부당하게 여긴 세력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할 때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인 김성미(金成美)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오로리 뒷산인
직학곡(直學谷)에 올라가서 매일 단종이 유폐된 영월을 향하여 곡하며 절을 하였다.
이후 매방골에 오로재(吾老齋)를 짓고 많은 후학들을 길러 내낸 데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등로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이 오로리 가좌골이다
가좌골은 영남의 거유로 유명한 직제학 김성미가 낙향하여 임진왜란 때인 1582년 소실된 오로재를
지어 제자들을 기른 곳인데 당시 김성미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는데,
이 학생들이 오로재를 가리켜 “즐거움을 더해 주는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하므로, 이에 오로재가 있는
마을을 한자로 가좌골[佳座谷]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매방골이라고도 하며, 매를 놓았다 하여 응방곡(鷹放谷)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으로는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33번 국도(16:45)
제일병원이 있는 33번 국도의 건널목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도로가에 서 있는 오로리 마을 표시석
33번 국도를 건너 우측으로 들어서니...
대진석공예 건물이 보이고...
제일병원옆 골목에서 과수원을 끼고 우측 임도로 접어든다
묘지 사이로 계속해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통훈대부 덕산이공 묘지
이곳 묘지들은 지금 移葬중이다... 고아제2공단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73봉(15:55)
금오지맥의 가장 마지막 봉우리이다
73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는데 등로는 전혀없다...선답자들의 시그널도 없고...
하기사 어느 누구도 이 길을 걷지 않았으니, 어쩌면 없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진주강공의 묘지를 지나니...
밭이 나오고...
농로를 따라서 내려가니 고아농공공단이 보인다
고아농공공단을 들어선 다음에...
맞은편 엠에스나노(주) 공장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조금을 더 진행하여 (주) 드림팩 공장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좌측의 고아농공공단 관리사무소 끄트머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한다
고아농공공단 관리사무소(16:05)
계속해서 고아농공공단 도로를 따른다
33번 국도 안내판이 보이는 150m 전방 지점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제방뚝을 따른다
대망천 좌측으로는 입주기업들의 입간판들이 서 있다.
고아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대망천 제방길을 따라서 걷는데 저 멀리 노란 버스가
관심교 다리위에 서 있는데 젠틀맨님이 타고온 광주 길벗산악회 버스란다
25인승 유치원 버스인데 기사양반이 어찌나 친절한 지...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후미팀을
이곳에서 싣고 감천 합수점까지 갈 것이란다... 그런면서 맥주와 소주 두부김치까지 차에서
꺼내와 먹으란다... 앉은 자리에서 셋이서 소맥을 말아서 연거푸 3잔을 마시고나니
갑자기 힘이 솟아나는 느낌...다시 감천으로 향한다...젠틀맨님 복받을기요
제방둑에서 바라본 고아읍 관심리 들판
관심리 지명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 이전에 관심(觀心)과 관심(官心)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유는 알 수 없고 다만 고려 후기 기록부터는 모두 관심(官心)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신라시대에
행정 관청이 이 마을에 많이 있어 ‘관의 중심지’였으므로 관심이라 불렀다 한다
접성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넓은 들판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을 연상하게 되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길게 흐르고 서쪽으로는 감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면서 넓은 평야를 형성하였다.
동.서.북 3면은 거의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 지형이며,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화개산 기슭에
연결되어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관심리는 지형상 외적의 침입을 막는 천연요새인 동시에. 풍부한
수자원과 비옥하고 넓은 농경지를 가지고 있어 쌀과 보리를 중심으로 농경 사회에서 더 없이 좋은
마을 형성 요건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고아읍 소재지가 있는 곳이다
대망천 제방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고아읍에서 선산읍으로 경계가 바뀐다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금오지맥 합수점 바로전에 있는 어강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뒷쪽으로 녹색으로 보이는 도로가 선산에서 구미로 이어지는 우회도로 다리 공사중이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산 너머의 태조산에는 아도화상이 신라시대 최초로 창건했다는
신라불교 발상지인 도리사(桃李寺)가 있는 곳이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꺼먼재산에서부터 젠틀맨님과 같이 온 광주 길벗산악회 산꾼들은 보이질 않고
우리 셋이만 합수점으로 향하는데 뭔 그리 야그가 많은지...
금오지맥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이 선산읍 원리 어강마을이다
원리(院里)는 조선시대 동내방에 속한 마을로 서원, 강창, 웃마(일명 어강), 아랫마(일명 새도방), 연수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원은 마을의 명당자리에 금오서원을 이건한 뒤 많은 선비들이 모여 글공부를
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고 강창은 낙동강을 따라 각종 곡물과 소금을 운송하면서 창고가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웃마는 서원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아랫마는 서원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수는 맑은 못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감천이 흐르는 뚝방에 올라서 북서쪽으로 바라보니 좌측으로 희미하게 지나온
백마산이 보이고, 그 앞에는 에덴아파트, 그리고 대다수의 금오지맥 산꾼들의
산행 종점으로 여겼던 선주교가 보이는데 우린 4km를 더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금오지맥 합수점(16:50)
수도산(修道山) 사면에서 발원하여 헤어졌다 만났다 여기까지 같이온 감천
이제 금오지맥의 脈이 이곳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입수를 하면서 범여의
발걸음도 멈추고,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어면서 종료 의식으로 합수점에 손을 담근다
한자로 풀이하면 ‘감천(甘川)’의 어원은 단샘·달래라는 설이 있다. 감천의 ‘감’을 한자형(漢字形)을 떠나
‘검’으로 통한다고 본다면 ‘감내’는 ‘검내’로, 다시 이것을 ‘금내’로 관련지어 보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
‘감’은 검이란 뜻도 되나 ‘임금’의 금이 위대하고 크다는 의미로 새겨본다면, 오늘날 금오산의 ‘금’이나
김천의 ‘김’이나 감천의 ‘감’이나 모두 같은 ‘김·금·감’의 어음을 넘나드는 것이다.
이렇게 옛사람들이 자기 고장의 지명·수명·산명을 위대하게 부른 데서 감천을 ‘감내’ 혹은 ‘검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금오지맥을 마무리하며 합수점에 손을 담근다
금오지맥을 처음부터 같이 걸었던 진권아우... 나에겐 늘 든든한 동반자이다
그리고 중간에서 만난 젠틀맨님... 넘넘 고마웠고 반가웠습니다
둘째주에 연비지맥길에 신세를 좀 져야겠습니다
젠틀맨님과 인증샷
진권아우와도 인증샷을 남기고 제방으로 올라오니 광주 길벗산악회 회원들은
이곳까지 버스로 와서 인증샷을 남긴다... 그리고 뒷풀이를 하는데 아우와 나도
거기에 꼽사리 끼어서 또다시 소맥 서너잔을 얻어 마시고 버스를 타고 선산터미널
앞에서 버스까지 빈대(?) 붙어서 오는데... 다들 고마웠습니다... 늘 안산 하시길 바랍니다
선산버스 터미널(17:28)
이곳에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연결되는 교통편은 상당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구미로 가긴 그렇고하여 택시를 타고 선산 휴게소로 향한다(택시비:10,000원)
선산 휴게소는 영남권 고속버스의 환승을 하는 곳으로 택시에서 내리니 용인가는 버스가
3분내로 온다고하여 진권아우는 먼저 가버리고 나도 곧바로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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