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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백두대간 3차 북진(終)

백두대간 제32구간 - 대관령에서 진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7. 9. 4.

삼양목장엔 소한마리 안보이고 비박족 텐트만 가득하다

 

☞산행일자:  2017년 9월 3일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약간 덥고 바람한 점 없음

산행거리: 도상거리 25.8km + 0.5km / 9시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대관령-기후관측소-헬기장-임도-930m봉-kt중계소-대관령 국사성황당

               갈림길(왕복)-강원항공 무선표시소 입구-갈림길-조망바위-새봉-갈림길

               공터-선자령-나즈목이-대공산성 갈림길-곤신봉-1.140m봉-쉼터-1,150m봉

               주차장-희망의 전망대-1,100m봉-1,163m봉(H)-갈림길-매봉-감시카메라

               홍수통제 시스템-안부-1,156m봉-1,172m봉-소황병산-통제초소-안부

               안개자니 갈림길-조망바위-폐헬기장(감시카메라)-노인봉무인대피소

               노인봉갈림길(왕복)-노인봉-1,312m봉-1,243m봉-안전쉼터-데크목 계단

               쉼터-진고개 고위평탄면-진고개

소 재 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舊도암면) / 강릉시 연곡면, 사천면, 성산면


토요일 오후내내 산행을 해야하나 말하야 하나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지인이 찾아와서 제육볶음으로 점심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것이 탈이 난 모양이다

갑자기 체기가 생기면서 두드러기가 나고 열이 나면서 식은 땀이 흐르는데 정말 미치겠더라

집에가서 휴식을 취하면 괜찮겠지 생각을 했는데 나을 기미가 없다그래 기왕에 갈려고

먹은거 가야할 것 아닌가... 자정에 집을 나서서 성남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제2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영동고속도로 평창 휴게소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채 안됐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차에서 잠을 청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나게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하는 수 없이 히터를 켜놓고 3시간정도 자고나니 몸은 좀 나아지는 듯

하여 5시 정도에 대관령으로 향한다...대관령I.C를 지나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05시 30분이다...옷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산행 준비를 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와 지도

진고개~대관령 구간 3D 지도

대관령(大關嶺:832m:05:30)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서울과 영동을 잇는

백두대간의 관문이면서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년 11월 횡계-강릉 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이 변해 대관령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에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 유래되었다 한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으로 흐르는 五十川은 강릉을 지나 東海로 흐르며,

西쪽은 松川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흐른다. 대관령 일대는 선자령,발왕산,황병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평탄면 지형이다. 北쪽으로는 오대산국립공원이 가까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약 16.1도로 봄,가을이 짧다. 여름은 서늘하며 무상기일이 짧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9월에 서리가 내리고 첫 얼음이 언다.

서늘한 기후에 적합한 고랭지 채소,씨감자,홉의 주산지이며 목축업이 활발하다.

대관령은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스키장을 건설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조선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인 高荊山이 수레를 이용하여 대관령의 길을 넓혔는데

그 후 병자호란 때 청군이 대관령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진군했다고 하여

죽은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 部棺斬屍했다고 한다.

대관령은 1917년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강릉과 이천 사이의 도로 확장 공사를 한 이래 길이 많이 넓어졌다.

일출을 준비하는 동해바다

산행을 시작하다(05:40)

동해바다쪽인 강릉방향은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붉게 물들어 있다

강릉방향에서 평창방향으로 넘어간다

대관령 평창방향의 모습

456번 도로를 벗어나서 “대관령 국사성황당 입구” 표시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선다

대관령 기후관측소(04:45)

한국공항공사 입간판이 있는 도로 앞엔 대관령 기후 관측소가 있는데 넓은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들어선다

대간 산꾼들의 표지기들이 많이 보이고 나무 계단을 따라서 오른다

바람한 점 없고 이른아침이라 그런지 날씨는 생각보다 쌀쌀하다

헬기장(05:48)

대관령 안내판이 보이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간다

헬기장 옆에 있는 이정표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입구에서 헤어진 시멘트 도로를 다시 만난다

930봉(05:55)

예전에 구부대 벙커가 있는 곳인데 지금은 철거하고 백두대간 복원 공사중이란다

kt대관령 중계기지를 바라보면서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kt대관령 중계기지(06:04)

kt대관령 중계기지 담벼락에는 산꾼들의 표지기들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대관령 국사성황당 갈림길(06:05)

이곳에서 200m 아래에 있는 대관령 국사성황당을 가보기로 한다 

대관령 국사성황당 맞은편으로는 강릉바우길 2구간이 연결되는 등로가 보인다

대관령 국사성황당 산신당(06:10)

매년 음력 4월 15일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대관령 산신제가

대관령 국사성황제와 함께 열린다고 한다

산신당 안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장군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으로 추앙받는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을 왔는데 그 재주가 특출해서 검술을 산신에게 가르쳤을 정도였다.

김유신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은 이 칼로 생전에 말갈족을 평정하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요사채와 산신당, 성황사, 대관사로 국사성황당을 이루고 있다.

범일국사를 모셔놓은 성황사(城隍祠)

‘매년 음력 4월15일에 봉행되는 대관령국사성황제는 통일신라시대에 국사로 추앙된 범일국사가

사후에 대관령 성황신이 되었다는 제를 지내는  의식으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의하면

매년 음력 4월15일에 강릉부 호장이 무당을 거느리고  대관령 산 위에 있는 한칸의 산사에

가서 고유(告由)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에다가 신령을 구하게 하여 나무에  신이내려

흔들리면 기운 센 사람들이 들고오게 한다’고 하였다

 

이 행차를 국사(國師)의 행차라고 하였는데 날나리를 부르는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고

무당들이 징을치고 북을 울리면서 따르고 호장이 대창역마를 타고 그 뒤를 따른다고 하였다.

이때 도로가에 도로가에 담을 쌓은것과 같이 종이나 천을 신목에 걸고 기원하거나

음식을 장만하여 무당들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대관령에서 내려와 저녁에 강릉부 관사에 이르면 횃불이 들판을 메우는데 하급관노들이

신목을 맞이하여 성황사 안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성황사에 내에 있는 범일국사

신라 말 입당 구법승 가운데 굴산산문(堀山山門 혹은 사굴산문)을 일으킨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는 현재 가장 한국적으로 변신한 모습으로 강릉 일대에서 섬겨진다.

이는 범일국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릉단오제, ‘강릉대관령국사성황제’의

주신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온 보답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는 해마다 5월 단오제에 주신으로 모셔져 민중의 친근한 존재임을 과시한다.

한국에서 오늘날 범일국사가 전통 마을 굿, 무속 굿의 형태로 진행되는 단오제의 주신으로

섬겨지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범일국사는 무불습합의 역행인 불무습합(佛巫褶合)의 전형적인 예이다.

범일국사는 선승에서 무신(巫神)으로 반본한 셈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불교의 선종(禪宗)은 말을 부정적으로 보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한자문화권의 혁명적 불교이다.

선종은 직관을 중시한다. 직관은 선종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그 이전의 샤머니즘과 통한다.

샤머니즘이야말로 만물과의 기통(氣通)을 전제한 것이다.  샤머니즘이야말로 자연의 소리, 자연의 실상을 듣는

원시종교로서 종교의 원형이다. 샤머니즘에선 자연이 경전이다. 만물은 스스로를 대상화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명인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바람에 교감을 중단당한다.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의 소통을 막고 끝내 불임을 강요한다.
강릉 단오제의 유래와 전설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①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인 굴산사지 부도. ② 김도연 작가가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산사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인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둘러보고 있다.

③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당. ④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신복사지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⑤ 범일국사를 잉태하게 한 우물로 전해지는 석천 우물 (강원도민일보 사진과 기사인용) 

 

강릉단오제에 얽힌 인물과 전설
강릉단오제는 세 신, 즉 대관령 국사 성황신, 대관령 국사 여성황신, 대관령 산신을 모셔와

축제를 치르고 다시 이 신들을 돌려보내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범일,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정씨 여인, 대관령 산신은 김유신 장군이

각각 신격화된 존재인 것이다.

먼저 대관령국사 성황신이 된 범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옛날 학산에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우물가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속에 해가 떠 있었다 한다.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물을 마신 처녀의 몸에는 이상이 생기고 마침내달이 차서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맹물 먹고 아이가 선’ 처녀는부모님의 노여움이 두려워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뒷산 학바위에 갖다 버렸다.

 자식을 버렸지만 마음이 편했을 리 없는 처녀는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 학바위로 올라갔다.

갓난아기는 포대기에 싸인 채 고이 잠을 자고 있었고, 잠시 후 학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감싸고단실 3개를 먹여주곤 날아갔다.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처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웠다. 이 아이가 곧 범일이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으며 자라던 범일은 7세가 되어 어머니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듣고 난 후 경주로 공부하러 떠났다.
공부를 하여 국사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영화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굴산사를 짓고 포교를 하였다. 이때 왜구가 쳐들어왔는데 범일이 술법을 써서 왜구를 물리쳤다. 도력으로 강릉을 지켜낸 범일죽은 다음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되어서 이 지역을 돌보게 되었다.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은 정씨 여인 신격화된 존재다.옛날 경방초계정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 딸이 노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대관령 서낭님이 보낸 호랑이에게 붙잡혀갔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딸의 방에 가 보니 딸이 보이질 않았다. 집 주위를 살펴도 보이지 않아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호랑이가 업고 가더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버지는 얼마 전 꾼 꿈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딸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서낭신을 사위로 삼을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급히 대관령 서낭당에 가 보니 딸이 서낭신과 함께 있는데 벌써 비석처럼 굳어 있었다.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려 세우니 시신이 떨어졌다. 국사서낭과 처녀가 혼배한 날이 4월 15일이다. 그 뒤로 정씨 집안의 딸은 여성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독특하게도 김유신 장군은 역사적인 위인으로서 산신의 대우를 받게 된 경우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을 왔는데

그 재주가 특출해서 검술을 산신에게 가르쳤을 정도였다. 김유신이 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은 이 칼로 생전에 말갈족을 평정하고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시대는 다르지만 모두 실존인물(또는 실존인물로 전해지는 인물)인데 범일정씨 여인강릉 출신이고,

김유신은 이 지방에 머물렀다.

범일(810년 신라 헌덕왕 3-889년 진성여왕 3)은 신라 때 강릉 지역의 지배세력이던강릉김씨술원(述元)의 손이고,

어머니는 문씨다. 술원은 명주도독겸평찰(溟州都督兼平察)을역임한 강릉의 토호였고, 범일의 외가는 여러 대를

강릉 지방에서 살아온 호족이다.

범일은 15세 때 승려가 되어 흥덕왕 4년(829)에 경주에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나라에 가서 제안대사(濟安大師)에게

사사하며 6년 동안 수도하고 귀국했다. 귀국하여서 고향 강릉으로 돌아 굴산사에서 40여년을 보내는 동안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국사가 되어달라는 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굴산사에 머물며 선문에 매진했다.

정씨 여인초계정씨의 시조인 정배걸(鄭倍傑)의 21대 손 정완주(鄭完柱; 조선 숙종 때 사람)와 어머니 안동권씨의 외동딸로, 정현덕(鄭顯德)의 5대조 고모가 된다. 정현덕은 대원군 때 동래부사를 지낸 분으로 정씨 여인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다는 집의 주인이다.

정씨 여인은 창원 사람 황수징(黃壽徵)과 혼례를 올리고 난 후 시댁이 멀리 있어 알묘를 하지 못한 채친정 경방(經方)

머물고 있었는데 5월 단오날 집에서 국사 성황행차를 구경하다가 호랑이에게 업혀갔다.가족들이 대관령 국사성황당에

찾아가니 이미 시신이 되어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친정어머니 산소 앞에 안장했는데 지금도 정씨 여인의 묘가

강릉교도소 서쪽 산 능선(맴소)에 있다. 정씨 여인은 사후에 국사성황과 혼배를 하고, 국사여성황으로 추앙되었다.

김유신(595, 신라 진평왕17-673, 문무왕13)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심신을 수련했고,

장수가 되어 강릉 지역에 주둔하면서말갈족을 물리치고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산신당과 성황사를 들러본 다음에 옆에 있는 대관사로 향한다

대관사(大關寺)

이곳은 여느 사찰과 비교해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대웅전격인 대관사는 변방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고 무당들의 굿당인 성황사와 산신당이 훨씬 대접받는 느낌이다

성황사 옆에는 대관사(大關寺)라는 절이 있고 부처님을 모셔놨지만 산신당과 성황사에 비해 훨씬 초라해 보인다.

다시 대간 등로에 복귀하다(06:20)

등로에서 뒤돌아 보니 제왕산과 능경봉...고루포기산...맨 뒷쪽엔 화란봉이 아련히 보인다

 대간길을 우회하면서 걸어가니...

주목군락지를 지난다

갈림길(06:35)

선자령으로 가는 두갈래 길이 나오는데 좌측은 시멘트 도로이고 대간길은 직진이다

조망바위(06:37)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강원항공 무선표시소

 강원항공 무선표시소 아래에는 조금전에 지나온 kt 중계기지가 보이고, 그 너머 좌측으로는

고려 우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제왕산과 우측으로 능경봉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횡계리와 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알펜시아 리조트

지금 강원도 평창군은 군 전체가 동계 올림픽 준비로 인해 거대한 공사장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한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동계 올림픽이 끝나고 저 시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새봉(06:40)

정상에는 기상예방 시스템  장비가 설치되어 있고 데크목 전망대와 이정표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강릉으로 연결되는 영동고속도로가 보이고 강릉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새봉 정상에 있는 기상예방 시스템 

강릉의 지명유래

 강릉시는 옛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에는 위만조선에 영속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라고 불리었다.

 

 그 후 신라 진흥왕 11년(550년)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열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 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북쪽으로

원산에서 남쪽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 태조 4년(1395년)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면을 관할하였다.

 

일제 시대인 1931년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군으로 개칭 분리 하였다가,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통합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릉출신의 역사적 인물로는 조선초기 문신인 함부림. 최치운. 최수성 금오신화의 김시습 ,최초의

한문소설 (홍길동전)의 허균과 그의 누나이자 시인였던 허난설헌 그리고 한국 어머니의 표상이었던

신사임당이 있다

새봉 정상에서 강릉시내를 바라보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선다

숲길로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갈림길을 다시 만난다

갈림길(06:47)

다시 편안한 등로를 따라서 걷는다

그 넘 참 희한하게 생겼네그려

어느새 가을이 성큼 우리곁에 와 버렸나보다

폐헬기장인 듯한 넓은 공터에는 이정표가 서 있고 억새가 가을을 재촉한다

억새와 조화를 이루는 이정표

호젓한 등로 올라서니...

풍력발전기와 선자령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 대간길에서 본 적이 없는듯 한데 이정표가 많이 보인다

공터(07:00)

넓은 공터로 올라서니 삼양목장이 보이기 시작하는 공터에는 비박족들의 텐트가 엄청나게 많다

모싯대도 이별을 준비하고...

바람한 점 없는 날씨라 그런지 바람개비는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름길에는 선자령 등산로 안내판이 있고...

다시 선자령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삼양목장 안에 있는 멋쟁이 소나무 한그루가 이른 아침에 홀로 선자령에 오르는 산꾼 범여를 반기고...

선자령 오름길에는 꽃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많이 보인다

선자령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진부방향

삼양목장 너머 진부 방향은 멋진 운해가 한폭의 멋진 풍경화를 연출하는데

목가적인 풍경이 마치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어~~~라 이게 뭐야 목장 초지에는 가축은 한마리도 보이질 않고 비박족의 텐트만 보이는구먼

선자령에서 대관령까지의 등로는 완전히 둘레길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편한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조였던 고형산이란 분의 노고 때문이 아닐까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 고형산

강릉대 교수 장정룡이 쓴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는 대관령의 역사와 개척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의 글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고형산은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훗날 그의 부관참시는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뿌리를 둔 사건일 뿐, 대관령 개척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의

공간적 배경과 대관령 역시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어려웠던 시절에 도로를 개척한 공로를

일관되게 부정적 측면으로 폄하한 이유 또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고형산이 대관령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장정룡의 글은,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펌글)

뒤돌아봐도 온통 비박족...낡은모자님도 왔을라나...

선자령 정상으로 올라간다

수심이 가득한 동자꽃

선자령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삼양목장 너머로 황병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자령 정상에 있는 산악기상관측장비

선자령(仙子嶺:1157m:07:20 ~ 07:35)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능선에 우뚝 솟아 있다.

산 이름을 '산'이나 '봉'이 아닌 선자령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大關山)'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그 아래 보현사의 이름에 따라

'보현산(普賢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만월산(滿月山)'으로 적혀 있다.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자령은 해발 840m인 대관령의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대관령에서 약 6km밖에 되지 않아 산행이 힘들지 않고 

겨울철 적설 등반지로 적합하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조 중종때 이 지방 사람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따라서 거의 평지길이나 다름없는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므로 산길은 매우 완만하다.

이 능선길은 적설기와 신록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적설기에는 많은 눈에 덮여 은세계를 이루어 황홀하고,

록기에는 새로 자라난 연녹색의 초원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화원을 이루고 있다

선자령 표시석 뒷면

대부분 산의 봉우리는 "산","봉","대"로 불리고 고개는 "령","재","치","현"으로 불린다.

그런데 선자령은 산의 봉우리인데 "령"으로 이름지어져 있다.

이 지역의 지형이 완만하고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정상석의 뒷쪽을 보면 선자령은 옛날부터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을 있는 고갯길이었고,

대관산(산경표), 보현산(동국여지지도와 사탑고적고 기록), 만월산(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 기록으로,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

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선자령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선자령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선자령 정상 2등 삼각점(△ 도암 23 / 1991 복구)

예전의 앙증맞은 표시석 철거가 되었는지 보이질 않는다

헬기장을 지나 다시 길을 나선다

느낌이 그래서 그런가...예전에 비해 바람개비가 훨씬 많아진 느낌이다

선자령 정상에서 카메라 가지고 15분정도 놀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선자령 내려가는 길

나즈목이(07:38)

목장도로에서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로 내려가는 고개로 ‘낮은 목’. 강릉 사투리로 ‘안부’라는 뜻이다.

나즈목이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목장 도로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능선 우측으로는 대공산성이 보이고...

목장 도로를 따라서 내려 가다가 앞에 보이는 풍력발전기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능선을 타고 가다가...

아랫쪽을 바라보니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가 보인다

풀섶을 헤치면서 가는데 갑자기 뱀 한마리가 지나가는 바람에 깜짝 놀란다

금마타리도 滿開를 시작하는구나

다시 조금전에 헤어진 도로를 만난다(07:50)

하지말라는 게 와이리도 많노...팻말을 지나면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임도를 따라가도 되지만 악착같이 대간길을 고집하면 능선을 따라서 걷는다

등로는 잘 보이질 않고...

草地를 가로질러 도로로 내려갔다가...

다시 도로를 벗어나 초지 가장자리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이 넘들은 오늘 파업중인가 보다... 요즘 쥔장 경제사정 어렵다... 일 좀 하거라

초지가 대간길이다

곤신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대공산성 갈림길(08:15)

이정표에 '곤신봉 0.3km,  대공산성 1.3km, 선자령 2.2km, 보현사 3.4km'라 적혀 있다.

대공산성(大公山城)은 일명 보현산성 혹은 대궁산성이라고도 하는데, 발해왕 대조영(大祚榮)이

쌓았다고도 하고, 고구려 유민이 쌓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시 도로를 따라서 곤신봉으로 향한다

뒤돌아 본 선자령의 모습

곤신봉 (坤申峰:1127m:08:17)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봉우리으로 북쪽으로는 매봉, 소황병산, 노인봉, 진고개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선자령, 새봉,

대관령으로 이어지는데「강릉시사」에 의하면 곤신봉은 강릉부사가 집무하는 동헌(칠사당)인

강릉부에서 볼 때 거의 서쪽에 있는데 전통적 방위 용어로 곤신(坤申)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이 능선의 줄기에 명당이 많아 묘자리로 많이 쓰이는데 이곳에서 부는 바람이

세차서 곤신봉을 향해 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곤신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능선부에 대공산성(大公山城)이 있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성산면 보광리에는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이 있다.

대공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주군왕릉은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묘이다 

곤신봉 정상에서 인증샷

곤신봉에서 바라본 삼양목장의 모습

이곳은 삼양목장 목초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풍력발전단지, 목초지, 고랭지 채소밭은 백두대간의 대표적 훼손 유형이라고 한다

가야할 매봉과 소황병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삼양목장은 면적이 600만평, 여의도의 7.5배이며, 동양최대의

목초지라고 하는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소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목초지 도로에서 바라본 진부와 주왕지맥 능선이 아련하게 보인다

지난해 진권아우와 저 길을 걷다가 말았는데 올해 마무리하려고 하려니

젊은것이 행님 팽개치고 3개여월에 거친 희말라야 로체 등정에 나서는 바람에

범여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다...천상 내년에나 걸어야 할 듯 싶다

구절초가 산꾼을 반긴다

도도하던 루드베키아도 쭈그렁 밤탱이가 되어 버렸다

풍력 발전기 참으로 많이 보이는데 풍력발전 예찬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높이가 수십미터나 되는 몸통에다가 직경이 40m나 되는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니 건축기술에 도움을 가져오며, 발전을 하는 기계장치 및

부품개발에도 적지 않은 파급효과를 가져온다는 논리이다.

풍력발전기가 이토록 유용하니 이 땅의 수호신이라고 불리어져야 한다는 생각 마져든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전력대란에 비상이 걸려있는 이 싯점에 풍력발전기는 많이 건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물을 보면 왜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걸까. 그리고 왜 수호신이라기보다는

괴물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까.

난 사실 이 많은 풍력발전기들이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해내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생산된 전력은 어디에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보호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풍력발전기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렇듯 오늘 구간은, 입으로는 ‘자연보호’

실제로는 ‘자연파괴’라는 생태정신 분열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나무라고 있다.

멋쟁이 소나무는 예전 그대로이건만 나만 흰머리가 늘어나네...아! 가는 세월을 어이할꼬

귀한 용담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붉은 토끼풀도 앙증맞은 모습으로 피어있다

부지런히 목장 도로를 따라서 가니 1,140봉 삼거리가 나온다

1,140봉(08:40)

이곳이 남북 분단의 비극을 그린 2004년도에 개봉된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라고 한다

나도 본 태극기 휘날리며의 줄거리는 홀 어머니를 모시고 구두를 닦는 형 진태와 동생

진석은 인민군의 남침으로 피난길에 오르는데, 형제가 징집되어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고

진태는 진석이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인민군과 싸우게 되는데 분대장이 된 진태는 무리하게

공을 세우려다 분대원을 잃고 진석은 변해버린 형에게 점점 실망을 하고,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는데 둘의 친구였던 용석이를 진태가 사살하자 진석은 사랑하는

형의 마음에 돌아서게 되고 진태와 진석은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인민군에 대장이 되었다는 형의 소식을 듣고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설득하려 형에게 갔지만

이미 이성을잃은 진태는 진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성을 찾은 진태는 진석을 도망 보내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는데... 그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1,140봉 표시석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바람의 언덕으로 향한다

바람의 언덕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계속해서 풍력 발전기를 보면서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한참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원자력발전 폐기에 되어 문제를 한번 되집어 본다

선진국인 독일은 탈원전을 위해 25년 이상을 논의하고 연구한 다음 폐기했고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폐기를 밝혔다가 다시 다시 원전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대만은 탈원전을 외치다가 지난 여름 태풍으로 인해 엄청난 전력난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우린 충분히 검토조차 않고 왜 이리 서두르는지... 5년안에 모든게 다 해결될려나...

쉼터(08:50)

바람의 언덕 아래에는 쉼터가 있다

1,150봉(08:53)

바람의 언덕’ 표지판 뒷쪽은 ‘동해전망대’라고 써놨다 

1,150봉 정상 이정표

주차장(08:55)

오늘 걷는 이 길은 백두대간 능선의 대표적인 훼손지이다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이 이렇게 망가지는데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하긴 백두대간을 아직도 이 나라의 교과서나 각종 지리서에 태백산맥이라 표기하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 나라의 역사학자나 지리학자들은 아직도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일제가 한일 합방 이후 조선에 대한 자본 수탈과 침략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시기에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일대를 답사하며 한반도의 지형을 연구하여 그 결과물로 그는 <조선산악론>을 비롯한

3편의 논문과 지명사전인 <로마자 색인 조선지명 자휘>, <조선전도>를 펴냈다.

1903년에는 한반도의 지질 구조도를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형상을 토끼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山自分水嶺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 대간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지리학의 개념과 이론을

제공하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신앙이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우리민족의 精氣를 말살하기 위해 대간 마루금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워낙 많이 박았기에 아직도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엔 또다른 쇠말뚝이 박혀 있으니...

풍력발전기를 세우려면 쇠말뚝이 아니라 이 보다 몇 백배 더한 파일을 대간 마루금에 박아야 한다.

대간 마루금에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아 우리 정기를 말살하면 안 되고 우리가 파일을 박아

스스로 정기를 파괴해도 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지 자꾸만 망가지는 대간길이 안쓰럽기만 하다 

 

뜻있는 대간 산꾼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관계 기관에 건의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대통령을 꿈꾸었자들도, 현재 서울시장을 하는 분도 대간길 걸었는데 그 분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백두대간에 대한 개념을 한번이라도 생각하면서 걸었을까?... 아님 대간길을 몇km를 몇 시간에

걸어온 것만 생각 했을까... 아니면 앞 사람의 등산화만 보고 걸었을까 궁금하다

그러던 와중에 현오라는 분이 백두대간에 대한 해박하고 명쾌한 해설서를 출간하였는데 난 이 책을

받아본 순간... 진작에 나와야 할 책이 왜 이제 나왔는지...대간길 걷는 분은 꼭 한 권 사서 읽어 보시길

현오님은 나하고 한번도 산행을 해 본 적은 없지만 1년에 서너번씩 광장시장에서 만나 파전에다가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는 사이인데... 워낙 고수라 나에겐 범접하긴 조금은 벅차다

내가 머리가 흰 탓에 늘 선배님이라 깍듯이 예우를 하는 바람에 조금은 불편하긴 하지만...

책은 예스24에서 판매하고 가격은 25.000원인데 사보시면 백두대간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니 꼭 필독하시길...

현오님이 범여에게 보내준 백두대간 지침서

요즘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여행부분 서적 베스트 1위에 올라 있는 책이다 

전망대 앞에 있는 밀크박스 하우스 속에는 쓰레기만 가득하다

방위 표시석도 그대로이다

희망의 전망대(08:53)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과 평창군 도암면 경계 능선에 있는 전망대로 주문진과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해전망대는 등산객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삼양목장 측에서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

그래서 전망대 오른편엔 관광객을 위한 넓은 주차장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주문진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아침의 일출을 보기에 좋은 곳이라고 하며 사방으로 전망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라면을 생산한 삼양식품 전윤중 회장을 기리면서 만든 전망대가  있다

 

故 전 회장님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1963년도 삼양식품을 창업하여 일본으로 부터 기술을 도입하여

 '치킨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정직과 신용이라 기치아래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술마신 다음날 라면에 고추가루를 타서 먹으니 얼큰하고 좋다고 했을 정도란다

희망의 전망대 앞에서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데크목 광장으로 올라간다

희망의 전망대 광장의 모습

희망의 전망대(08:53~09:10)

몸에 체기가 있어 먹는게 겁이나서 어제 저녁을 굶고 아침도 안 먹었는데도 먹는게 겁이난다

그런데 어쩌랴 배가 고프니 안 먹을수도 없고 가져온 우유 하나와 바람떡으로 허기를 면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난다

등로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1,100봉(08:22)

목장 도로를 버리고 풍력발전기가 보이는 목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이 해발 1,100m 라는데 실감이 안난다

목초지로 계속 걸어간다

매봉이 점점 가까워지고...

도로를 내려서자마자 다시 목초지로 들어선다

가지 말란다... 미안해요...대간 길이라서...가야 되겠는데요

고사목을 바라보면서...

매봉을 향해서 걸어간다...임도파들은 목장도로를 계속 따라서 가도 된다

대간 원칙자들은 누가 뭐래도 대간길을 고집하지...다를 대단해요

선자령에서 소황병산까지 (도상거리 약 11km) 풍력발전기와 동행하게 되는데

날개의 반지름이 무려 40m라고 하는데 에너지가 부족한 이 땅에서 풍력이라는 천연자연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고자 설치한 장치라고 한다.

수력 및 화력 발전소를 건설하자면 인근 주민들로부터 많은 민원이 제기되고 자연 파괴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택한 방법이라고도 한다.

요즘 한창 회자되는 신재생에너지, 지속성장이 가능한 에너지, 脫(탈)석유 에너지, 녹색에너지인 셈이다.

 

풍력 발전기가 2008년 기준으로 49개라고 하는데 자세히 세어보진

못했지만 지금은 그 보다도 훨씬 많아보이고 이곳을 지나노라면

풍력발전이 아주 발달된 덴마크나 노르웨이에 온 기분이다.

매봉을 바라보면서 걷는데 날씨는 그리 덥지 않으나 햋빛은 상당히 따갑다

초지에서 숲속으로 올라선다

폐헬기장인듯한 넓은 공터를 지나니...

1,163봉(09:35)

"1,163봉"에서 부터 이곳까지 "노인봉대피소"까지라고 단속구간이라 알려 준다.

목적이 "야생 동식물 서식지 보호"라고 명시해 놓았는데 정작 이 지역엔 나무를 거의 전부 베어내고

목초지를 만들어 목장을 만들었고, 목장 관리를 위해 수많은 트렉터 등차량들이 운행 되고

있으며 야생 동식물 서식지 보호"가 목적인지, "목장 보호"가 목적인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철조망을 쳐놓고 ‘식생 복후 철거예정’ 팻말까지  붙혀 놓았지만 출입금지 팻말 뒷쪽으로 넘어간다

원형 철조망을 통과한 다음에...

뚜렸한 등로를 따라서 가니...

갈림길(09:45)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꺽어진다

매봉(膺峰:1173m:09:50)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1,173m의 사천면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옛날 미데기(바닷물)가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 매 한 마리가 겨우 앉을 자리만 남기고 이 봉 꼭대기까지 바닷물이

가득찼다고 해서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매 응(膺)자와 봉우리 봉(峰)자를 쓴다.

정상에는 건물이 부서진 흔적이 보이면 3등 삼각점이 있다

 

정상 부근에는 기상관측 시설이 있었는데 철거가 됐는지 건축 폐기물만 어지럽게 널려있다

독수리의 둥지가 있었거나 봉우리가 독수리의 형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모양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런 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목초지 개발과정에서 평탄 작업을 하고

주변에 키 큰 나무도 모두 뽑혀나가는 등 이름 붙여진 때와는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매봉 정상 삼각점(△연곡 320 / 1985 복구)

매봉에서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09:55)

맑은 날씨 탓인지 설악산 대청봉과 점봉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붕어빵에도 붕어가 없고 삼양목장에도 소가 한마리도 없다

임도로 내려서니 공사판이 보인다

예전에 없던 감시카메라가 보이고 재수없이 걸리면 김새니까 우측으로 돌아카메라를 피해서 걷는다

카메라를 피해서 내려와 대간길로 들어서니 예전에 없던 시설물이 보이고

이곳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뭐냐고 물어보니 소나무를 심어 논거라고 한다

소황병산으로 향하는 길

뒤돌아 본 매봉의 모습

멋쟁이 소나무도 예전 그대로이다

등로에서 바라본 강릉시의 모습

홍수경보시스템(10:05)

미역취(꽃말: 섬색시)

취나물의 일종으로 나물의 맛이 미역맛과 비슷하고 대가 나오기 전의 잎자루가 축처진

모습이 미역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으로 산이나, 들의 햋빛이 잘드는 곳에서 자란다

여전히 도도하다

귀한 분홍색 구절초

목초지 끝에서 다시 능선으로 가는데 출입금지 구간이니 되돌아 가란다~~~대관령까지 어떻게...헐

목책을 넘어 비탐구간으로 들어선다

이쁜 넘~~~쨉싸게 챙겨서 베낭으로 집어 넣는다

안부(11:00)

안내판을 무시하고 소황병산으로 걸어간다

오늘 횡재 만났네

등로 우측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또 목책과 산꾼을 겁박하는 안내판... 조심스레 걸어간다

2027년 12월 31일까지 출입금지라...그때는 난 할배라 너무 늙어 올 일도 없소이다

1,156봉(11:10)

투구꽃(꽃말:산까치)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며 꽃 모양이 병사가 쓰는 투구를 닮아 붙여진 이름으로 몸에 강한 독성이 있다.

어렸을 때 잎 모양이 취같은 산나물처럼 생겨 봄이면 사람들이 잘못 뜯어먹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영명은 꽃모양처럼 '수도승의 두건'을 뜻한다

1,172봉(11:22)

소황병산 오르기 직전에 예전에 없었던 목책이 보이고...

비탐구간에 띠지라...간이 엄청 크시네요

특전사 훈련표지기 인듯...

숲속을 빠져 나오니 넓은 초지가 있는 소황병산이 보인다

 

초지를 가로질러 소황병산으로 향한다

소황병산(小黃柄山:1,430m:11:40)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이라기 보다는 그냥 목장 가운데

여인네의 乳頭처럼 볼록 생긴 봉우리인데 그렇지만 오늘 산행구간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은 대관령목장의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표지석과 함께 안내판이 서 있으며 황병산 정상은 대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황병산은 ‘누른(黃) 자루(柄)’처럼 길다랗게 생긴 산이라 붙여졌으며 소황병산은 황병산과 산허리를 맞대고 있어

같은 산이지만 높이가 조금 낮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청학동 소금강 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지만 내륙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고산 구릉지대다.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완만한 구릉지를 모두 목장용 초지로 개발하여 지금은 수천 두의 소를

방목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목장이 되었다.

 

삼양식품 대관령목장과 한일목장, 그리고 농촌진흥청의 고랭지 시험장의 경작지도 이 지역에 있다.

소황병산 산에 서면 조금전에 지나온 매봉과 곤신봉, 선자령 등 대간 봉우리들이 시계방향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 드넓은 목초지가 그 주변 횡계리의 시골풍경도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인다.

베낭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삼각점이 있는 소황병산 정상으로 올라선다

소황병산 정상(10:42)

조금전 지나온 표석이 있는 곳이 정상이 아니고 삼각점이 있는 이곳이 정상이다

대간산꾼 누구하나 실제 정상을 대접하지 않는구나... 아예 삼각점은 풀섶에 파묻혀 버렸다

이곳에서 황병지맥이 시작된다

황병지맥(黃柄枝脈)이란?

백두대간 소황병산(1328m)에서 분기하여 황병산(1407m),용산(1028m).두타산(.박지산1394m).

상원산(1421.4m)과 옥갑산봉(1285m)을 거쳐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아우라지 까지의 도상거리

 

53km를 말하는데 특히 이 산줄기는 1.000m가 넘는 무명봉들이 부지기수로 연봉을 이루며 장쾌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천, 동쪽으로는 송천을 포함한 물줄기로 分水하여

한강(동강)의 水量을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소황병산 정상 2등 삼각점(△연곡26 / 2005 재설)

소황병산 정상에서 바라본 오늘 내가 걸어온 길

소황병산에서 바라본 황병산의 모습

황병산(黃柄山, 1,407m) :정상에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각 이동통신사들의

중계소가 있으며 민간인들의 접급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란다.서부전선을 지키는

해병대 청룡부대 수색대들이 겨울에 훈련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소황병산 정상 아래에는 삼양식품 그룹에서 설치한 표석도 있다

소황병산 정상에서 한참동안 셀카놀이를 하다가 내년쯤 걸어볼 예정인 황병산을 바라보며 노인봉으로 향한다

불법산행 통제초소(12:00)

소황병산 정상에서 국공파들이 지키고 있나 마음을 졸이면서 초소까지 왔건만 다행히 아무도 없다

오늘도 죄인의 심정으로 가슴 조이며 대간길을 걷는다

혹 국공파가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스레 원형 철조망을 넘는다

감시초소를 지나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사람을 만나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옷차림과 옷의 색깔이 국공파와 흡사하여 바짝 긴장을 했는데 이 분도 나홀로 산꾼이다

휴~~~10년 감수했네...이 불경기에...

오늘은 수입이 꽤나 짭짤하다

산 전체를 멧돼지를 아작을 내놨건만 저 넘들은 나두고...맨날 대간 산꾼들만... 만만한게 홍어 ㅈ이냐

폭이 50cm도 안되는 길을 걷는 산꾼들이 뭔 죄가 있다고...하긴 산을 좋아하는 죄가 크지

안개자니 갈림길(12:30)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 안개자니 마을로 내려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요즘은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지 등로에는 잡풀이 수북한데 안개자니의 지명유래

개자니는 지형이 개가 잠을 자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바깥개자니와 안개자니

마을이 있으니 개자니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노인봉 대피소가 가까워 질수록 조심해서 걷는다

산림 유전자 보호구역이란 표시판이 있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소황병산

아래에서 만난 산꾼이 먼저 가기에 노인봉대피소 오르기 전에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다시 오르막길 특전사에서 붙혀논 듯한 B-1 야광 코팅지가 보인다

앙증맞은 바위가 있고 조금을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공터옆에는 조망바위가 있다

조망바위(12:58)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가야할 노인봉이 보인다

이곳에서부터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서 조용하게 걷는다

폐헬기장(13:04)

이곳엔 예전에 없었던 감시카메라가 산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카메라 앞에 노출을 안하려고 낮은 포복으로 가는데 아무래도 먼저간 산꾼땜에 찜찜하다

폐헬기장을 지나자마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산꾼들은 우측으로 갔다

상당히 갈등이 생기나 지난주에 이곳을 지나간 00대장이 행님 단속을 안합디다

하기에 우측으로 꺽어진다... 우측으로 가면 노인봉 대피소로 이어지고 길은 좋다

좌측으로 꺽어져 노인봉 갈림길 삼거리로 이어지는데 국공파를 피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00대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우측으로 꺽어져 200m정도 가니 먼저 간

산꾼이 국공파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게 아닌가... 참으로 난감하다

국공파 직원이 하는 말 ‘어르신 이곳에 들어오시면 안되는 거 아시죠?’ 하는데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일행이냐 묻기에 아니라고 하니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한다

 

방법이 없다...일단 정공법으로 나가자

그래! 미안해요... 법을 어긴 자체는 잘못이다... 담부터는 절대 안하겠다고 하면서

아들뻘 되는 친구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비니 똑바로 서라고 하더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더니만  다음에 걸리면 벌금을 2배로 물리겠다고 하면서  보내준다

00대장 땜에 십년감수했네... 화장실 옆 목책을 넘어 안전구역에 도달한다

노인봉 무인관리 대피소(13:10)

이곳은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진고개에서 노인봉, 소금강으로 이어지는 100대 명산 코스라 그렇다

그런건 우리하고 하등의 관계가 없으니 서둘러 노인봉으로 향한다

홍수방지 감시탑이 보이고 등로를 따라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폐헬기장에서 좌측의 험한 등로로 올라서면 이곳인데... 이곳으로 왔으면 험한 꼴을 안 당했을텐데...

노인봉 삼거리(13:13)

노인봉 삼거리에서 0.2km를 걸어서 노인봉 정상 아래에 도착한다

노인봉 정상에 있는 안내판

노인봉(老人峰:1338m:13:20)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및 평창군 도암면(현재 대관령면)에 걸쳐 있는 봉우리로

오대산국립공원권에 속하는 산으로 황병산과 오대산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산자락에 소금강 계곡을 거느리고 있으며 옛날 심마니가 산삼을 캐러 왔다가

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 산삼 있는 곳을 일러주더라고 한다.

그래서 잠을 깬 심마니가 꿈에 노인이 일러준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어 많이 캤다고 한다.

그리하여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 산삼이 있는 곳을 일러주었다고 하여

그 때부터 노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설은 멀리서 보면 노인봉 정상의 바위가

마치 머리가 하얀 노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인봉이라 했다고도 한다.

 

노인봉 아래의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명승1호로 지정되었다.

 일부에서는 연곡 소금강, 오대산 소금강, 청학동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일컫는 '소금강'이란 이름은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탐방하고 쓴

 

《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무릉계곡 바위에 아직 '소금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낙영폭포·만물상·구룡폭포·무릉계로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는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산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를 흘러내리며 이룬 소금강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 30여 개가 넘는

 경관지를 빚어냈는데 특히 금강산의 그것과 흡사한 만물상·구룡연·상팔담 등이 볼 만하다.

노인봉에서 바라본 만월지맥 능선의 모습

노인봉 정상에서 바라본 황병산의 모습

노인봉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노인봉 삼거리로 되돌아 간다

노인봉삼거리(1,286m:13:28)

목책을 따라서 진고개로 향한다

1,280봉(13:47)

진고개로 향하는 등로는 노인봉으로 오르는 등산객이 많은 탓인지 등로가 반질반질하다

이곳에서 국공파에서 같이 걸렸던 산꾼과 대관령으로 가는 택시비를 1/N로 하기로 하고

횡계 택시를 콜한다

1,321봉(14:05)

돌로 된 등로를 따라서 내려간다

1,243봉(14:15)

안전쉼터(14:20)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편하게 내려간다

쉼터(14:25)

데크목 끄트머리에 내려오니 그늘은 없고 햇살이 따갑다

맞은편에는 다음구간에 오를 동대산이 시원스레 보인다

눈 앞에는 진고개 고위평탄면이 시원스레 보인다

진고개 고위평탄면(14:38)

진고개 정상부 일원에는 해발 900~1,000고지임에도 비교적 넓고 평탄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경동성 요곡운동과 관련되어 형성된 유형지물인 고위평탄면(침식작용을 받은 평탄면이 융기하여

높은 고도에 위치한 지형)이라는 지형에 해당되며, 고위 평탄면은 융기 이전의 한반도가 평탄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지형으로 융기 이후 지속된 개석작용(골짜기 침식작용)으로 한반도 일부지역에만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 융기와 관련된 특징은 고개 양쪽의 사면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진고개 서쪽의 사면인 평창방면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동쪽 사면인 강릉방면은상대적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비대칭 형태를 하고 있다

즉 동해안쪽 사면은 짧고 가파르지만, 서쪽 사면은 길고 완만하여 기복이 적은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신생대 제3기 말기부터한반도는 수평 횡압력에 의한동해의 해저지각 확장으로 인해 융기하였는데

이때 융기축이 동쪽으로 더 많이 치우쳐 동쪽은 높이 솟아올라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은 완경사를 이루어

동고서저(東高西低) 의 비대칭 단면으로 이루게 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남북, 북동, 남서방향으로 뻗어있는

산줄기들은 모두 비대칭 모습으로 하고 있으며이는 한반도의 1차적인 골격이라고 한다

진고개 고위평탄면 안내판

진고개 휴게소가 보이면서 산행의 끝지점이 나오는데 예전에 없었던 동물이동통로가 보인다

데크목 계단으로 내려가니...

오대산 진고개 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진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하는 스틱을 접는다

진고개 (峴:960m:14:40)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병내리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사이의 6번 국도상에 있는 고갯마루이다.

백두대간의 동대산(1,436m)과 노인봉(1,338m)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고개를 한자화해서

니현()이라고 하는데, 『조선지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이 한자식 지명이 나와 있다.

예전에 이 도로가 포장이 되기 전에 비만 오면 땅이 질어서 진고개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또 다른 설은 '긴' 하는 강릉 사투리가 '진'이어서 남쪽 비탈이 9km, 북쪽 비탈이 11km여서

도합 50리의 '긴 고개'란 뜻에서 진고개라 했다고도 하는데 대관령의 보조역으로 개설된 도로이며,

강릉 이북의 해안지역에서는 이 길을 이용해 내륙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리가 가깝다.

정상에는 산장과 휴게소가 있으며  ‘장현’ 또는 ‘이현’이라고도 불렀다.

산행을 종료하고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캔맥주를 한잔 마시고 있으니 택시가 도착한다

이곳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차량을 히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여 택시를 불렀다

왜냐하면 진고개에서 대다수의 차량들이 진부나 연곡쪽으로 가기 때문이다

택시 요금이 40,000원 정도 나오는데 대간길에서 만난 산꾼과 절반으로 나누어 20,000원이다

쥔장을 기다리는 愛馬

대관령에 도착하여 같이온 산꾼과 헤어져 서울로 향하는데 대관령I.C에 들어서 진부쯤 오니

고속도로가 마치 주차장인양 착각들이 들 정도로 차량이 많아 진부 I.C를 빠져나와 6번국도를

타고 진부, 장평, 면온, 둔내, 새말, 횡성을 지나 양평으로 오는데 차량이 하나도 밀리지 않는다

양평을 지나 양수리에서 팔당대교까지 조금 밀리긴 했으나 고속도로보다 훨씬 편하게 왔다

통행료도 아끼며 편하게 왔으니 이런걸 ‘도랑치고 가재잡는다’고나 할까

집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오늘 산행의 전리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