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란 동명이 붙여진 것은 이 지역에 갯벌이 있다하여 "갯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또는 한자명으로 개포라 하였다. 이것은 개포동의 옛 마을 이름으로써 지금도 개패·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개포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일동, 반곡동의 일부였는데, 1914년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가 되었다.
1983년 12월1일 개포1, 2동으로 분동 되고, 1985년 개포2동에서 개포3동이 분동 되었고, 1988년 개포1동에서 개포4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며, 인접한 대모산은 표고 293m이며 산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옛날에는 할미산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제3대 태종대왕의 헌릉을 모신후 어명에 의하여 대모산으로 고쳤다 하며 서편 포이동 쪽으로 구룡산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 개포2동에 전하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한여울이 있으며 이는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이 거세어져 흐르고 마을이 갯바닥에 있는 데에서 반곡이라 하였다 한다. 개포동에서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4개의 남방식지석묘(고인돌)가 조사된 기록이 있으나 도시 개발에 밀려 모두 없어져 그 형태와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 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 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동이었는데 일제 때에는 대치리라 하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대치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5년 9월1일 대치2동에서 대치3동이 분동되었으며, 1988년 7월1일 대치1동에서 대치4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 부락으로는 한티를 비롯해서 움말, 오달짝, 새말, 능안말, 중간말, 세촌, 아랫말 등의 8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위치를 보면 움마을은 현재의 대치동 975번지 일대, 옹달짝은 980번지 일대, 새말은 915번지 일대, 능안말은 891번지 일대, 중간말은 910번지 일대, 세촌은 98번지 일대, 아랫말은 941번지 일대로 추정되어 비가 조금 많이 내리면 탄천과 양재천이 범람하여 농토가 물에 잠기어 별 쓸모가 없는 데다가 또 저지대에는 갈대만 무성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옛날 주민들은 마을을 둘러싼 쪽박산이 없어져야 이 마을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는 80년대 초 까지도 용신제라는 우물제를 올려 마을의 풍요로움과 질병 퇴치를 기원하고자 길한 날짜를 받아 5개의 공동 우물 청소를 깨끗이 하고 흑돈의 머리와 과일을 놓고 정성을 들여 제를 올렸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 개발에 밀려 우물이 모두 메워져 치제가 중단되었다
일원동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대모산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 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일원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원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에 속하였으며 ,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이 지역에 있던 대청말을 병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가 되었다. 1992년 10월 1일 일원동이 일원본동, 일원1동, 일원2동, 수서동으로 분동 되기에 이르렀다. 일원동의 대모산 기슭에는 약사절이 있다. 이 절은 고려 공민왕 2년 (1353)에 진정국사가 창건하고 불국사라고 했는데 고종 17년(1880)에 네번 째로 이곳에 옯겨 지은 것이며 이 절에 약사전이 있으므로 약사절이라고도 한다.
일원동 410번지에는 수령 250년 ,나무 높이 25m, 흉고 둘레 420cm, 수관 직경 1,5m인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느티나무를 주민들은 수호 나무로 삼고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었으나 주변이 택지 개발 지구로 개발 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돌보는 이 조차 없게 되었다.
도곡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 뒤의 매봉산과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 독골이 되었다가 도곡으로 변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동네 주변 밭에 그릇 깨진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마을에 큰 도요(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흔히들 독골(독, 옹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마을)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하여 마을의 유래를 살려서 이름을 붙인다면 道谷洞이 아닌 陶谷洞으로 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말죽거리 양재동과의 동명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옛 이름 독골을 바탕삼아 도곡동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12월 31일 도곡2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 부락으로는 독수리, 독부리, 독골, 양재리가 합쳐 이룩된 마을이며 독구리 마을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입성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말죽거리와 매봉산의 중간에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잠깐 쉬어 가거나 날이 저물면 하룻밤을 묵으면서 아침에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잠깐 쉬어가는 마을이었다 한다
수서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 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 내외와 그 봉사손 광평대군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수서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수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도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로 남아 있었다. 1992년 10월1일 일원동에서 수서동이 분동 되었다.
수서동에는 탄천에 접한 지역 쪽으로 남부순환도로가 올림픽공원까지 이어지고 있고, 자곡동·율현동·세곡동을 지나 성남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수서동 인터체인지가 있어서 중요한 교통 시설의 역할을 하고 있다
포이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큰 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펄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포이리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포이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포이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이동이라 하다가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이리라 하였다. 1988년 7월1일 개포1동에서개포4동이 분동 되어 현재는 개포4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맡고 있다.
포이동, 개포동 일대에 걸쳐 있는 구룡산은 해발 283m로서 계곡이 9곳이 있는 산으로, 이 산 이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그 중 한 마리가 양재천 연못에 빠져 죽고 9마리가 올라갔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구룡산은 양산 통도사에서 세운 서울 포교당으로서 1987년 8월12일 만불전의 기공식을 가졌다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 한강변에 있던 부락 새말과 사평리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신사동의 자연 부락에 대한 상고에 의하면 이곳에 사평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또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의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한다.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이라고도 하였다.
청담동의 유래는 지금의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청담동이 되었다. 1970년 5월 18일 법정동과 행정동을 일치 시킬 때, 수도동사무소가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다. 1973년 신설된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10월1일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8년 청담1동과 청담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삼동은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1997년 도곡동사무소에서 역삼동 사무소가 분동 신설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역삼동이 역삼1동과 역삼2동으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른다.
웃방아다리라는 이름은 즉 방아다리의 웃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이들 마을은 띄엄띄엄 자연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5~10여 호 정도가 한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아랫방아다리는 방아다리 아랫 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상부상조의 협동 정신이 강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자, 열녀가 많았다 하며, 역삼동 산 21의 1에서는 숭실대 사학과 유물 발굴단에 의하여 선사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을 사용한 사람들은 길이 16m 폭 3m정도 크기의 장방형의 주거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거지의 실내 면적은 12평 정도로 당시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기원전 7~4세기 사이의 주거지로 보고 있다
세곡동 동명은 1914년 행정 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 부락 명칭인 세천리와 은곡동의「세」자와 「곡」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이다. 세곡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세천리, 은곡동 지역으로서 1914년 3월1일 이곳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 칭하게 되었다. 세곡동의 행정동 변천 관계를 살펴보면, 1962년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관할 아래였던 이 지역은 1975년 10월 1일에는 성동구로 부터 분리·신설된 강남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세곡동사무소는 변함 없이 율현·자곡·세곡동의 행정을 맡고 있다.
현재 대왕국민학교가 있는 세곡동 로터리 부근에 가느다란 개울 세천이 있고, 이 개울가에 세천리 마을이 있다. 현재로 헌릉로에서 은곡동을 들어가려면 세천교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는 1957련 1월에 놓았으며, 이 세천리에는 술막이라는 술을 파는 곳이 있었다. 세천리와 함께 세곡동의 명칭이 있게 된 은곡동은 헌릉로 북쪽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은곡동은 일명 망골, 막은골이라 칭한다. 막은골이란 이름은 나무를 심어서 마을 수구를 막았으므로 유래된 것이라 하며 은곡동에서 자곡동의 못골로 넘어가는 곳에 도당터가 있으므로 이 산을 도당뫼라고 부른다. 또한 이 부근 세곡동 362번지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은곡동 서쪽의 들판을 용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용푼에는 굴이 있는데 기이하게도 이 굴에서 불을 때면 700m 떨어진 도당터 고목나무 줄기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는 것이다. 또 은곡동에서 못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마고개라고 칭하며, 이 마을의 뒷 산인 대모산에는 북 소리가 나는 바위가 있어서 못골 쪽 봉우리에있는 이 바위를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고 한다. 비선거리는 세곡동 118번지, 즉 세곡동사무소가 위치한 부근의 마을로서 전일에 비석이 서 있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삼성동은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무동도 닥점 지역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 3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대치동, 청담동과 함께 수도동사무소에서 관장하였다. (수도동이라는 명칭은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에서 따온 것이라 함) 그 뒤 1970년 5월18일 법정동과 행정동 명을 일치 시킬때 수도동사무소는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고 1977년 9월1일 청담동에서 삼성동이 분동 되었고 1985년 9월1일에는 삼성로를 경계로 삼성 1,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삼성동의 자연 부락은 닥점, 무동도, 학당동, 배곶이마을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닥점은 무동도 쪽에 있던 마을로 이 마을에는 닥나무(한지원료)를 파는 상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의 동호 일대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졌으며, 멀리는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와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언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에게 저자도와 함께 하사되었고 고종 21년(1884)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그가 역적으로 몰려 전 재산이 몰수될 때 압구정도 몰수되어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고 다만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바위돌만이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의 자연 부락은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말 등이 있었다.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먼오금은 압구정구내에 있던 마을이었고, 옥골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고, 장자말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도 불렀고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강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업 위주의 마을이었으며 일제 하에서는 배밭 등 과수원을 주농업으로 해온 마을이기도 하다.
수서역에서 개포동 방면으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오른쪽 아파트 단지와 맞은편 주택가가 궁마을이다. 현재 수서동 400∼500번지 일대가 해당된다. 본래 궁마을은 궁말, 혹은 궁촌(宮村)이라 불렸고,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에 속해 있었다.
궁마을의 유래는 성종 원년(1470)에 세종대왕의 손자인 영순군(永順君)을 현재 궁마을 앞의 대모산(당시 경기도 광주 수토산)에 예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연산군 2년(1496)에 무안대군과 광평대군의 묘소를 광주 서촌 학당리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후, 영순군의 아들 3형제가 수토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궁(三宮)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이 마을을 궁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궁마을이 지명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영순군의 차남 청안군(淸安君)의 손자인 아산현감 이인건이 궁촌에다 재실을 지은 후 대대로 제사를 지내게 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용주별곡에 보면, 궁촌마을은 남한산성에서 서쪽으로 20리 지점 대왕면에 있으며 백제 때 도읍한 곳이라고 나와 있고, I중종실록 J에는 남한산성 서쪽에 탄천이 흐르고 탄천 동쪽과 서쪽에 수초가 무성하므로 수렵의 장소로 삼았다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궁마을은 수풀이 울창하여 사냥터로도 즐겨 이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대는 옛부터 경관이 아름다워 궁촌팔경으로도 유명했다. 궁촌팔경으로 꼽은 것은 동곡의 봄꽃, 약사의 새벽종 소리, 구현의 나무꾼 노래, 금평의 농부 노래, 쌍봉의 가을달, 남한의 저녁 노을, 탄천의 고기잡이 횃불, 광진의 돛단배이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 일원1동 주택가 및 일원2동사무소가 위치한 지점에 99칸의 한옥이 있었다. 탄천을 건너 잠실 일대에서 바라다 보면 이 한옥의 대청이 보인다 하여 이 곳을 대청마을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위치는 강남구 일원동 612-687번지 일대로 일원2동사무소 주변이 된다.
1860년경 세곡동에 살던 홍수근이라는 사람의 셋째아들이 힘이 장사였다. 이로 인하여 도리어 화를 입게 될 것을 걱정하던 홍수근이, 어느날 그 아들을 심하게 꾸짖고 매질을 하다 그만 죽여 버리고 말았다.
기이하게도 그날 밤, 이 고개에서 밤새도록 말 우는 소리가 들리자 마을 사람들은 홍장사가 말로 환생한 것으로 믿고, 이후 이곳을 마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위치는 강남구 세곡동 산 48번지 일대이다
이곳엔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자연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여울이란 지명은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큰 여울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1986년 은행나무가 고사하자 1990년 20년 나이의 대목(大木)을 이곳에 새로 심었다. 정확한 위치는 강남구 개포2동 189번지 일대로, 개포동 주공아파트 401동, 주공아파트 506호 사이 이면도로가 된다.
말죽거리와 사평나루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에는 수십 년된 싸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싸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개마루에는 이곳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안녕을 빌던 성황당이 있었으며, 고개에 오르면 서울 남산이 보인다고 해서 서울고개라고도 하였다. 위치는 강남구 도곡1동이다.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지칭하는데 강남 일대에서는 양재동, 역삼동이란 동명보다 말죽거리라고 하면 알아 듣는 사람이 더 많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곳을 말죽거리라고 칭하게 된 내력은 옛날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얼마전까지도 양재동사무소 동쪽의 헌릉로변 게리 또는 거여리에는 많은 마방이 있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충청도·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말죽거리는 이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 말죽거리였다. 따라서 말죽거리에는 조선초부터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멀리서 온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이 곳에 묵었던 것이다. 또한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압구정등에서 전송하는 벗들과 마지막 주연을 나누고 헤어져 저녁나절에 찾아든 첫 숙소가 말죽거리에 있는 주막이다.
이들은 이제부터 천리길을 가야 할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이르면서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이 곳 일대를 말죽거리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 곳에 이르러 유생 김이 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고 갔기 때문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그 밖에 다른 설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청나라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나라는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 이 곳은 청나라의 장사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였다. 즉 청나라의 기마병들이 산성을 향하여 공격을 가한 후에는 교대로 이곳 병참기지에 물러나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말죽거리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강남구 압구정동 526번지 일대를 옥골이라 불렀다. 옛날의 옥골은 현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21동, 71동, 81동 자리에 30여호 정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마을로, 옥(玉)과 같이 맑고 깨끗한 한강물이 마을을 지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구석기시대 석부(石斧)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는 학탄(鶴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남구 대치동 514번지 일대가 학여울터이다. 현재 이곳을 지나는 지하철 3호선 역의 이름도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 26번지 학동근린공원의 지형은 용이 꿈틀거리며 등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요봉으로 부르던 곳이다. 용요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현 강남우체국 자리는 5일장이 섰던 들이다. 용요봉 아래에는 학동으로 불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옛 이름을 1992년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따서 붙인 것이고, 근방을 지나는 지하철 7호선의 학동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강남구 논현동 26번지 학동근린공원의 지형은 용이 꿈틀거리며 등천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용요봉으로 부르던 곳이다. 용요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현 강남우체국 자리는 5일장이 섰던 들이다. 용요봉 아래에는 학동으로 불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옛 이름을 1992년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따서 붙인 것이고, 근방을 지나는 지하철 7호선의 학동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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