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동작구 지명 유래
신대방동(新大方洞)
대방동 접격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70년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거 대림동에서 분동(分洞)되면서 신대방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거북고개
옛날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 신도비의 받침인 거북을 당시 관악산에서 조각하여 운반할 때 수백필의 소가 넘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삼육재활원이 있는 신대방2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는 모자원고개라고 불려지고 있다.
마장교
신대방1동 698번지 앞 도림천에 있었던 다리 이름으로 길이 100m, 폭 60여m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넓은 다리로 손꼽혔다고 한다.
모자원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로 6·25동란 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미망인과 자녀를 위하여 64가구의 주택을 마련하여 이곳에 살게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과부촌'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모두 이전하고 남아 있지 않다. 5) 비선거리 옛날 이곳에 비석이 많이 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 노정승 산소의 비가 섰던 아랫마을로 지금의 신대방 1동 584, 586번지 옛날 원풍모방 앞 삼거리를 가리킨다.
삼거리
현재 우성아파트 앞의 영등포·안양·대방동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쇠내피(牛臥皮)
소가 누워있는 지형으로, 옛날에는 현재의 도림천(道林川)이 넓고 수심이 깊어 도림천을 강변이라 불렀다. 특히, 물이 맑아 지금의 신림 4동 파출소 부근을 옥수(玉水)라 불렀다. 현재 문창초등학교 정문 앞 강 속에 높이 10여m나 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는 직경 두 자 가량의 크기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며, 당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 바위가 땅 속으로 완전히 묻히면 천지가 개벽한다.'라는 구전이 전해졌다. 그 뒤 6.25 동란을 전후하여 하상이 높아져 점차 반위는 도림천 땅 속으로 묻히기 시작하였으며, 지금부터 10여전도 이 바위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최근 전철역이 생기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쇠슬목고개
소가 누워 있는 듯한, 즉 우와피(牛臥皮) 지형 중 목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현재 이 마을 607-86번지에 해당된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이 고개에 있어서 신혼부부가 이 고개를 넘어가면 귀신이 질투하여 이 마을에 천연두 및 각종 재앙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또 상여(喪輿)가 고개를 넘으려 하면 고개 언저리에서 발이 묶여 고개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9) 안말 현재 신대방1동 639,640번지 문창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마을로 마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0) 전주고개(戰地고개) 신대방1동 429번지 일대로·우창·우진아파트 앞에서 대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임진왜란 당시 큰 싸움터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중국촌
광복직후 5~6년간 중국인 4가구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신대방동 338번지 일대이다.
계동궁능(桂洞宮陵)
현 신대방동 471-474번지 일대로, 옛날 이 마을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언제나 쪽박으로 물 떠먹었다고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하며, 일명 '세모골'이라고도 불렀다.
창밖에 웅덩이
현재 보라매공원 운동장 자리로 광복 이전부터 이곳에 만여평 정도되는 늪이 있어, 메기·가물치·붕어 등이 서식하여 주민들은 사철로 이 늪에서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공군사관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이 되었다고 한다.
책상모퉁이
신대방동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토목골
현재 우성아파트가 위치한 신대방1동 565번지 지역으로, 옛날 '토목'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 한국모방기지가 위치했다.
대방동(大方洞)
조선시대 때 높은 절 마을과 번댕이[樊唐里] 마을이 있어서 번대방리(番大方里)라 부르다가 광복 뒤 대방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계동궁능(桂洞宮陵)
낙천군과 연령군을 모셨던 능터로 현재는 충남 예산으로 옮겨졌다.
계동궁
연못 낙천군과 연령군을 모신 계동궁에 딸렸던 연못터였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높은절이[高寺里]
현재 노량진동과 대방동, 상도동과의 경계가 되는 대방동 1번지 높은 곳에 청련암(淸漣庵)이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때 노정승의 사패지라고 한다.
덕굴고개
대방동에 있는 고개의 하나라 일명 덕곡고개라고도 하였다.
번댕이[樊唐里]
옛부터 낙천군,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桂洞宮)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번당리'라고도 한다.
법덕온천
지금부터 약 50여년 전 일본인이 물이 좋다는 것을 알고 지금의 공군본부 자리에 샘을 팠는데, 보통 우물은 약 100자 정도였으나 이곳은 700여자로 깊이 파인 우물로 목욕탕을 만들어 널리 용하였다고 한다.
보토머리
인공적으로 토성처럼 보토(우묵한 땅을 흙으로 메워서 채움)하여 동리(洞里)를 아늑하게 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낭당고개
옛말 서낭당이 있었던 고개로 성남중고등학교 후문에서 공군본부 의무실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안말
대방동 안쪽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마산
지금의 성남고등학교 뒷산으로 용마우물에서 용이 나와 그 산으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마우물
용마가 났다는 우물로 옛부터 물맛이 퍽 좋았다 한다. 현재 성남중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우물이다.
큰말
옛부터 80호나 되는 대촌(大村)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량진동(鷺梁津洞)
원뜻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란 뜻으로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꽃말
현재 여성개발원 별관(전 부녀직업전도소)이 위치한 서쪽 노량진1동 50~54번지 일대는 일제 때 '후까이'이라는 일본인이 이곳에 약 5천여평의 꽃밭을 만들어 이곳에서 나는 꽃을 서울시내 꽃도매상들에게 판매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꽃가지를 잘라 파는 것이 아니라 뿌리채로 판매하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당산
현재 노량진경찰서 부근 일대 야산으로 원래 '당산'이라 불리었다.
이곳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느티나무·도토리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이 해마다 10월이면 동네 서낭당 느티나무에 금줄을 치고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해서 자정에 당제사를 지내는데, 액을 쫓고 온 동네가 잘 되고 잘 살게 해달라며 기원하였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이 날만은 잠자지 않고 촛불에 소지(燒紙 : 신에게 비는 뜻으로 백지를 말아서 태워, 탄 재가 하늘 높이 올라가면 운수가 좋다는 풍속)를 올렸다.
독막(점말)
노량진2동 45~46번지 일대, 지금의 동작구청 자리의 마을이름으로 일명 동이점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옹기를 굽던 '가마'가 2군데 있었다. 하며 떡시루, 독 등을 제작하여 노량나루를 이용해서 시내로 반입되었고, 지금의 강남 일대 주민들과 과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후 대림산업 중장비 정비공장이 들어섰다가 현 동작구청이 지어졌다.
빨래골
원풍산업(현 국제상사 창고) 뒷편에는 관악산 줄기에서 졸졸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서 아낙제들이 빨래를 했다고 해서 빨래골이라 했다.
벽돌막
노량진1동 481번지 노량진초등학교 자리에 일제 때 일본인이 지은 붉은 벽돌 공장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나온 벽돌로 지금의 서울시청사,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공장은 노량진초등학교가 생기면서 철거되었다.
새말
지금의 노량진2동 292번지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전일에 신씨(申氏)네 4~5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솔모텡이
지금의 노량진2동 301, 302번지 일대에는 옛날 소나무가 울창하여 사람들의 출입이 곤란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곳 모퉁이에 위치했다 하여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곳은 지금의 노량진2동 동사무소와 송학대교회가 위치한 지역을 말하며 옛날 이곳에 큰 엄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송학대
현재 삼거리시장 못미쳐 장승배기 좌우편, 노량진2동 311~315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전일에는 수백년 목은 소나무가 많았으며 이 소나무에는 학(鶴)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몇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 있으며, 일제 때는 일본인 고관들이 이 지역의 경관에 반해 많이 살았으며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지명을 딴 송학대교회가 부근에 있다.
아차고개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六臣)을 처형함이 부당함을 간(諫)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 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유래는 조선 명종 때 이름난 점술가인 홍계관(洪繼寬)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홍계관이 자기의 명(命)을 점쳐보니,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횡사(橫死)하는 점괘가 나왔다. 살아날 길을 찾아보니 딱 한 방법으로 용상(龍床) 아래 숨어 있으면 횡사를 면한다고 하는지라, 홍계관은 왕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고, 날에 맞춰 용상 아래 숨어있었다.
그때 마치 쥐 한 마리가 마당을 질러가고 있었다. 이를 본 왕은 홍계관에게 '지금 마당에 쥐가 지나가는데 몇 마리인지 점을 쳐 보아라.'하고 명하였다. 그가 곧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세 마리라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형관을 시켜 홍계관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계관이 형장에 당도하여 점을 쳐보니 '만일 한 식경(食頃)만 기다리면 살 길이 있겠다.'하는 점괘가 나왔다. 홍계관이 형관에게 조금만 형 집행을 늦추어 달라고 간정하므로 형관이 허락하여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후 왕은 측근을 시켜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 보니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있었다. 홍계관의 신묘한 점에 놀란 왕은 곧바로 신하를 형장으로 보내어 계관의 참형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가 급히 달려가 보니 막 형을 집행하는 순간이었다. 크게 소리질러 중지하라고 하였으나 형관의 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손을 흔들어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형관을 사형집행을 빨리하라는 줄로 알고 홍계관을 참(斬)하고 말았다.
신하가 되 돌아와 왕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왕은 '아차' 하고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형장이 이 고개를 '아차고개'라 불렀다는 것이다.
안 굴
노량진2동 249번지 일대의 마을 이름으로 일명 유금산, 안산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10여 가구의 주민이 논과 밭농사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윗서낭당이
노량진1동 산 8번지 일대 서낭당이 있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 몇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서 주민들이 매년 한번씩 대동치성(大同致誠)을 지내던 곳이었으나, 1970년대 이 고목 느티나무는 자연사하여 넘어져서 자취를 감추고 현재 이곳에는 동성노인정이 세워져 있다.
장승배기
동작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파출소와 한빛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상 현재 장승이 서 있는 위치는 노량진2동에 속한다.
이곳은 노량진동과 상도동·대방동이 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노량진 선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서울 시민들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잘 몰라도 장승배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칭이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대방 장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민속신앙중의 하나이지만 예전에는 동네 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우리나라 각지에 이런 이름이 남아있다. 장승배기에서는 마을의 공동문제, 즉 부락제나 기타 여러 가지 일을 의논했다. 그러던 것이 마을이름으로 되어 전해 온것으로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가 1777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산(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 곧 현륭원에 참배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찾아가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 꿇고 그 애통한 한을 달래며 명복을 빌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인가가 없고 통행인마저 시오리 가야 한두 사람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
한편 장승을 소재로 문학작품 판소리와 서도창에 보면 이곳 장승의 이름이 팔도장승의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 장승이었고 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변강쇠가 엄동설한에 땔것이 없어 나무를 하러 첩첩산중에 갔는데, 눈 속에 땔나무할 것이 없어 길가에 세워 놓은 장승을 패가지고 오는 것을 풍자적으로 엮은 것으로, 변강쇠한테 도끼로 찍혀 부서진 장승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멋스럽다. 본래 장승이란 마을로 들어오는 동구 밖에서 병액의 귀신을 물리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촌락공동체의 수호신이요 경계표지였다.
이제 장승의 신앙적 의미는 미약해졌으나 다만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물로 부활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본 동(本洞)
'노량진의 원마을'이라는 뜻으로 1914년 일제가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의 본동·상가산처리·하가산치리 등 3개 마을을 통합하여 본동리라고 제정하면서 본동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가칠목(架七木)
옛날 상가차산리(上加次山里) 마을은 현재 국민은행 노량진지점(본동 207-2) 근처의 마을이며, 하가차산리(下加次山里) 마을은 본동 12, 24, 25, 26, 30, 31통의 일대로서 일명 가칠목으로 칭한다. 가칠목은 본동에서 가장 오래된 한강 기슭의 마을로 옛날에는 한강물이 불어나면 길이 막힌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 옛날 전염병자(호혈자, 염병)와 기타 돌림병자들을 이곳에다 격리시켜 가두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나루께
노들강변 노들나루 근처로, 옛날 이 강가 일대에 집이 몇 채 있었다 한다.
대추나무 우물
우물가에 대추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매봉재
본동 473번지에 위치한 극락정사가 있는 본동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복궁촌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용산구의 새푸리촌이 물에 떠내려가자 그곳 주민 60여세대가 본동 440번지 일대에 정착, 집단 주거한 마을이다. 복궁촌이란 명칭은 '복흥촌(復興村)' 곧 다시 일으킨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산유원지
본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매봉재에는 일제 때 조성된 봉산유원지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곳에 배나무를 심어 놓았으므로 철도국 직원과 기타 각 기관 직원들이 많이 와서 놀았다고 한다. 또한 이 유원지에서는 남사당패들이 와서 산대놀이(탈춤), 박첨지 놀이(인형극), 줄타기 등도 공연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이 놀이는 당시 경성에서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와 이곳 봉산유원지에서만 행해졌다고 한다.
서낭당이 고개
매봉재 서쪽에 있는 고개로, 전일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비는 대동치성을 제사지내던 서낭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본동에는 이곳 외 2개의 서낭당이 더 있었으니 하나는 민절서원 뒷편, 또 하나는 사육신묘 뒤쪽에 있었다.
안산(案山)
본동사무소 바로 뒷산이다. 마을은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치성당(致誠堂)
본동 30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약 17세기경부터 한강의 용왕을 안치하고 소원 빌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상도동(上道洞)
조선시대에 성도화리(成道化里)로 불리다가 상도리·상도정이란 이름을 거쳐 1955년 서울특별시 동설치조례에 의하여 상도동으로 개칭되었다.
강적골
지금의 상도4동 210, 220, 223번지 일대와 양녕대군 묘소가 있는 일대로서, 이 마을 이름은 양녕대군의 시호가 강정공(剛靖公)인데 이곳에 묘소가 생기고부터 강정골로 불려지다가 강적곡(康迪谷)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옛날 강적굴 고개에는 도둑이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또 현재 약수터 뒤쪽 봉천고개 학교부지에는 '강정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꽃밭재
동작교육구청과 영도시장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 이곳에서 여러 가지 꽃들을 많이 재배하여 팔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화전촌(花田村)이라고 하였다.
나무시장
지금의 미륵암과 숭실대학교 부근에 섰던 시장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녀들의 학비조달을 위해 나무를 해다가 새벽 일찍 이곳에서 팔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가던 곳으로, 주로, 장작·솔개비·깔지 등이 매매되었으며, 이곳의 부자들과 일본인들이 사갔다고 한다.
노들고개
상도동에서 노들강 쪽으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능고개
상도4동 국사봉중학교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지금의 지덕사가 처음에는 중구 도동에 세워져 문중도 같이 살고 있었으나 워낙 살림이 빈궁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근근히 지내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노승이 이 집 앞을 지나다가 밤이 깊어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는지라 불러들여 불을 지피고 밥대신 죽을 끓여 집주인은 먹지 않고 중에게만 주었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노승은 너무 고마워서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그 주인을 데리고 능고개 자리에 와서 '장차 죽거든 이곳에 묘를 쓰라'고 일러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 주인이 죽자 중이 가르쳐준 고개에다 묘를 썼더니 그때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일어났다고 하여 능고개라 한다.
능굴
옛날 효령대군의 자제 서원군의 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도1동 413, 416번지 상도성결교회 부근 일대를 일컫는데 지금은 능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마치고개(망치고개)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칼과 징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이 들어서면서 밤낮 망치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 상도2동 29-27번지 일대가 된다.
만양고개
상도2동 대림아파트 옆에서 노량진중앙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호랑이가 출연했던 깊고 험한 고개로 워낙 길어서 '마냥 넘어간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밤골
옛날 이곳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의 상도2동 8, 12통 일대를 말한다.
배나무골
상도2동 10통 일대로 옛날 배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병목굴고개
상도1동 국민주택 일대에 옛날 골짜기 모양이 병목처럼 생겨 아래쪽이 좁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3) 백운대 상도1동 산49번지에 백운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불려진 이름이다.
빈수골
현 성대시장 뒤쪽 사자암이 위치한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일명 빙수골이라고도 하는데, 빙수골은 이 지역에 항상 찬물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불려지던 이름이 빈수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당이고개
상도1동 숭실대학교에서 사당4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이 고개 부근에 큰 사당이 있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살피재
상도1동 숭실대학교 밑 로타리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 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상도
소류지 1959년 상도토지개량조합에서 설치한 저수지이다.
서낭당
상도1동의 살피재에 있는 당(堂)으로 돌무더기가 있었다.
성대굴
상도3동 성대시장 입구에서 국사봉 골짜기까지의 마을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신씨(申氏)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죽어 묘자리를 구하여 땅을 파헤쳐 보니 복숭아꽃이 한아름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성도화리(成桃花里)라고 부르다가 차츰 성도아리, 성도리, 성대리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소쇠울개천
이 개천은 상도2동 대림아파트 앞에 있던 개울의 이름으로, 지금은 복개하여 보이지 않으나 이 개천은 상도동 전체를 통과하여 흐르는 개천이었다. 개울 아랫마을을 소쇠울이라 한다.
안골
상도동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2) 안말 사자암 아래 있는 마을로 성대굴 안말을 가리킨다.
약수터
옛날 강적굴 산에 있는 약수터로, 현재 주민들이 이용하는 약수터 우측에 약수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원래의 약수터는 이곳이라고 한다. 철분이 많다 하여 많은 주민이 이용하고 있다.
여박굴산
상도1동 산 49-36번지 숭실대학교 뒷산으로 일명 십자가산이라고도 한다.
주막거리
상도3동 우체국이 있는 지역으로, 이곳은 옛날 안양쪽 사람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야 하는데 이 지점에 도착하여 해가 저물어 하루 밤을 묵고 다음날 한양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숙박을 할 수 있는 주막이 많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바깥말이라고도 한다.
중등고개
소쇠울개천에서 밤골로 가는 상도2동에 있는 고개인데 산 중등을 넘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전사택
일제 때 한전 직원들이 이곳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상도1동 370,390번지 일대이다.
한증막
상도1동 288번지(30통)에 한증목욕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한증탕은 시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으나 현대화 물결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우정 목욕탕'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 주민과 버스정류장 표지판에는 아직도 한증막이라 부르며 이용하고 있다.
흐리목고개
상도2동 대림아파트에서 살피재로 넘어가다 우측 봉천동 은천초등학교 쪽의 흐리목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흑석동(黑石洞)
흑석1동 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 색을 띠므로 '검은돌 마을'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다.
검은돌
지금의 흑석1동 232, 243번지(12·14·16·17통) 일대를 지칭했으며, 은로초등학교 자리에는 동사무소가 있었다. 또한 남부동에는 우리 전통 한옥 120여채가 지금도 밀집되어 있어 일명 한옥촌이라고도 부른다.
검은돌시장
흑석2동 9, 43번지 일대에 있던 시장이다. 이 시장은 주로 야채류, 과일류 등 각종 농산물이 거래되었는데, 광복 직후 길거리에서 안쪽으로 밀려 지금의 흑석3동에 있는 흑석시장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검은돌시장은 당시 서초동·양지동, 과천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공군주택
지금의 중대부고 윗 지역은 20여년 전 공군장교들을 위한 30여채의 집을 지어 불하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동묘지
흑석시장 입구에서 중대부고로 가는 길 양쪽과 골짜기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옛날 본동·노량진동·상도동, 그리고 흑석동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묘를 썼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묘지 사용이 금지되는 한편, 서울시가 기존 묘도 이장하도록 공고한 후 이 지역을 개인에게 불하하여 지금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달마산
달마사라는 절이 있는 산 이름이다.
대동우물
흑석1동 156번지 지금의 성모병원 자리에 있던 우물로 옛부터 동리주민 약 80여호가 사용하였던 큰 우물이었으나 병원이 들어서면서 메꾸어졌다. 8) 대머리산 흑석2동 26번지 일대로 지금의 벧엘교회 옆 동산을 말한다. 이 산의 꼭대기 부분에 나무가 하나도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당째
학도의용군 현충비가 세워진 위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사이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전에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칠성님을 모시는 도당을 만들어 일년에 봄, 가을 두 번씩 마을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고, 질병이 없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명 도당칠성이라고도 하였다.
명수대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을 철거되었다.
명창굴
흑석1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중문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지금도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흘렀다고 한다.
범바위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 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는데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비개마을
흑석2동 26·28·33·38번지 일대로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서달산
흑석동 남서쪽 달마사(흑석1동 37번지)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솔밭
흑석 3동 7, 8통 일대 지역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말·새말
안말은 흑석1동 5통(125-133번지)일대의 마을을 일컫는다. 새마을의 유래는 을축년 큰 장마 때 안말이 침수되자 그곳 주민들이 좀 더 높은 지대이던 지금의 중앙대학교 앞으로 옮겨서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흑석1동 156번지 성모병원이 들어선 지역의 마을을 웃말이라고 칭했다.
약수동
흑석3동 69번지 6통 일대의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아주 맛있는 약수물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께
연못시장(흑석동 101·102·182번지)과 주택은행이 있는 일대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은 일제 때 일본인 목하영(木下榮)이 이 곳에 5천평 정도의 커다란 연못을 파고 가운데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 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복후에 이곳을 메꾸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완성군산
완성군산(일명 왕성군산)은 전주이씨 덕천군파 완성군의 묘소가 있는 산으로, 흑석2동 54-323호에 양옥으로 된 재실(齋室)이 있으며 후손이 이재주(李在周)가 20년 전부터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이 산을 왕성군산으로 칭하는 것은 완성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 잘못 발음하여 불려진 것이다.
재강굴산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컫는데,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의 묘가 있다.
집바위
바위가 속이 비어 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집박굴우물
달마사 밑에서 나던 맑은 물로 약수는 아니지만 물맛이 썩 좋았다고 한다.
찬우물
비개마을 부근 산버덩에 있었던 우물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치마바위
바위모양이 치마처럼 넓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학도의 용군 현충비에서 원불교서울회관 밑으로 이어지는 한강변에 있었다.
큰우물
흑석1동 5통 일대에 옛날 안말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안에 있었던 우물이다.
한강신사
일본인들이 도당째 터에다 50여평의 12층으로 된 목조건물을 지으면서 바위를 깨뜨리고 소나무도 베어버린 후에 지었다. 당시 은로초등학교 학생들과 경성부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마을 주민들이 이 건물을 허물어 버렸는데 6·25동란 때는 국군의 작전지로 사용되다 현재는 효사정(孝思亭)이란 정자가 들어서 있다.
한강장(漢江莊)
연못께에서 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는 일제 때 한강장이란 큰 요리집이 있었다. 이 요리집은 일본인 고바야시가 지은 것으로 기생들을 두고 각 기관장들과 부호들을 맞아들였다 한다. 이 요정 앞으로 한강이 보인다고 한 강장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광복후 화재로 전소되었다.
할딱거리
동양중학교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연날리기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동작동(銅雀洞)
지금의 국립현충원 부근에 동작진 근처 이남 지역을 연결하는 동재기 나루터가 있어 '동재기마을'이라고 부른데서 유래 되었다.
가막재
현 동작중학교에서 국립현충원로 넘어가는 산 11,12,12번지 일대이다.
갯말
동작동 80~106번지 일대의 마을로 일명 '포촌(浦村)'이라 불렀는데 이 일대가 갯벌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배
현재 지하철 동작터널과 국립현충원 군악대가 있는 지역에 있었던 마을로 약 15가구가 나루터에서 고기잡이와 잡역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고 한다. 일명 능배라고도 불렀다.
능말
현재 국립현충원 안 현충탑과 창빈 안(安)씨 묘가 있는 지역에 있었던 마을인데 약 10여가구가 농업을 주로 했으며 광산 김(金)씨가 주로 살았다고 한다.
당째
현재 경문고등학교 운동장에 약 2,000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주민들이 대동치성을 드렸던 당나무이며, 그리고 이곳은 옛날 고개였다고 한다.
동재기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현충원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구리빛 색깔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던 데서 붙여진 이르이다. 이 나루터는 조선시대 과천·수원·평택을 거쳐 영·호남으로 내려가든가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이다.
동재기고개
동작파출소 부근에서 군악대가 위치한 곳으로 넘어가는 길 이름으로 일명 동적고개라고도 한다. 9) 방아다리 현 경문고등학교 건너편으로 지금으로 방배동에 속하나 옛날 삼각개울이 마주치는 개울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디딜방아로 놓았던 다리라고 한다.
배나무굴
현 동작동 41·42·7·71번지 일대의 마을로 이 마을은 광복 전까지만 하여도 아름드리 배나무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 마을 근처에 이수교(梨水橋)라는 다리가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진주 강(姜)씨 50여세대가 살았으며 현재도 10여세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배물다리[梨水橋]
1925년대 일제에 의해 설치된 갯말 앞에 있는 다리로 일명 이수교라고 한다. 옛날 다리 남쪽에는 배나무골이 있고 동쪽에 한강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루가 있는 물가의 다리란 뜻이다.
비냥모퉁이
동작터널이 지나는 길 모퉁이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에서 구들장을 떠서 한강 건너 이촌동에 판매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상고목나무
동작동 44-12호에 있는 이 나무는 아래쪽의 하고목나무가 죽으면서부터 자라 지금의 큰 나무가 되었다 하며, 현재 하고목나무가 있는 것으로부터 100여m 위 도로 우측편에 위치하고 있다.
석바탱이고개
대촌마을의 일부분으로 서쪽 귀퉁이에 있는 마을로서 매사냥할 때 석 받은 곳이었다 한다.
아홉고비탱이
현 지하철 4호선이 지나는 동작터널이 있는 산으로 옛날 이 산이 매우 급경사여서 빙빙 돌아 아홉구비를 올라 꼭대기에 도착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금마을
현재 경문고등학교 옆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정(丁)씨 성을 가진 감사(監司)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정감몰' 또는 '정가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후기 이곳에 포방터(砲放터 : 사격장)가 있어 여기서 훈련을 마친 뒤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였다고 하여 '점검마을'이라 한 것이 '정금마을'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또 서울에서 나루를 건너 호남으로 여행하던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주막이 위치한 산모퉁이 동네라 하여 '정거머리' 동네라고도 불리어졌다고 하는데, 현재 동작동 56·59·61·64번지 일대이다.
조마고개
물 아래 뒷 등성이 너머에 있는 작은 고개로 고개산이 용마혈(龍馬穴)인데 옛날 오랑캐들이 근처에 진을 치고 혈(穴)을 끊어 정기(正氣)가 없어진 고개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말 국립현충원 설치로 없어진 마을로 가장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터꿀[基谷]
정금마을 우측 동작동 산 16-18번지 일대 산을 말하며, 산 중턱 골짜기에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사변 전까지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오다가 이후 서울시 소유로 되면서 없어지다가 이장되어 지금은 거의 없고 몇몇 묘소만 남아있다.
하고목나무
현재 동작동 67-1번지 새림연립 앞 길 중앙에 있는 나무로, 고려말 한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짓고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근대화가 된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나무 밑으로 하수도를 내는 관계로 원뿌리가 잘리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 뒤 죽은 나무의 밑둥을 몇 년 전 이곳 주민의 한 사람이 잘라내었는데 우연인지 며칠 후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나무를 베면 며칠을 살지 못한다고 하여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 곳 토박이들은 지금도 1년에 한번씩 돼지머리 등을 준비하여 산고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동
큰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1914년 당시 능마을·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사당리라고 부르다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사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마니촌
가마니를 덮어놓고 어렵게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산 22번지 일대로 대부분 무허가 거주 주민들이었는데 1980년 재개발사업을 시행하여 지금은 우성아파트와 삼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까치고개 [작현(峴鵲), 가추개]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져 까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281-291번지 일대이다. 현재 은행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고 하여 은행나무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거늠말
현재 사당3동 219-7호 일대 마을이었다.
고록부리
산 모양이 뿔처럼 뾰족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고록뿔'이라고도 하였다. 현 사당4동 노인정 아래이다.
곶이고개
곶이처럼 산혈이 뻗은 중턱고개 이름이다.
구루물빨래터
구름만 끼어도 물이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남사초등학교 윗쪽, 즉 소댓물 위쪽으로 1960년대 초까지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군산터
옛날 군산이란 사람이 살았던 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1동 남성중학교 일대이다.
넘말
동래정씨 문중의 재실 너머 위치한 마을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235번지 일대이다.
능내(陵內)
조선시대 동래정씨 문중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 사당동 239-241번지 묘가 있는 지역이다.
도당(都堂)터
현 사당동 사거리 지하철 사당역 일대로서, 1970년대 초까지도 느티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받들고 해마다 고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느티나무는 뽑히고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화상(畵像)은 남현동의 관음사(觀音寺)로 옮겼다.
최근까지도 이 화상을 모시고 치제(致祭)하였으며, 경비는 각 가구마다 쌀 한말씩을 갹출하였다고 하는데 양이 조금 모자라면 쌀을 이고 오다가 넘어져 꼭 부상을 당하여 감히 양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독굴
옛날 도둑떼들이 자주 이곳에 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사당동 316~4번지 노인정 아래 지역으로 일명 도둑굴이라고도 하였다.
동산말
옛날 작은 동산(東山)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羅)씨가 5~6가구 정착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 사당동 1038번지 관악시장 일대이다.
뒷절이
현재 사당동 305-302번지 일대 상신아파트 앞 골짜기이다.
벌명당
사당동 동래 정씨 문중의 묘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나라에서 묘자리를 정하려고 지관(地官)을 시켜 지형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 지역이 명당임을 알았다. 지관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려 할 때 당시 영의정에 있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알고 다른 곳을 찾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지관은 영의정에게 자기가 동재기나루를 다 건널 무렵에 그 곳을 파보라고 하였다.
지관이 동작진(銅雀津)을 다 건넜으리라고 생각되었을 때 땅을 파 보니 커다란 벌들이 수없이 나와 지관에게 날아가 지관을 쏘려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독을 뒤집어쓰자 벌들이 독에다 침을 놓아 독을 깨트리고 죽었다. 그 뒤 영의정이 죽어 그 자리에 묘를 쓴 뒤 9대를 두고 내리 정승이 나왔다한다.
불개미꿀
옛날 불개미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남성초등학교 일대이다.
성지골
현재 사당동 421-436번지 일대 상도여중 아래 골짜기이다.
소댓물
현 사당동 1011번지 남사초등학교 옆 일대로, 이곳에 300여평 가까운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물은 겨울이 되어도 얼지 않아 목욕과 빨래터로 60년대 말까지 이용되었다고 한다.
수라간(우물)
옛날 임금님이 행차할 때 이곳에서 수라를 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 사당동 1041번지 한전건물 뒤이다. 최초로 장인동이란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쉰마지기들
옛날 쉰마지기 정도의 논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318번지(사당시장) 일대이다.
승방뜰
마을 뒷산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어 곧 관음사 앞 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심방뜰'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사당1동 지역으로 당시는 약 80여호 주택이 있었다고 한다.
식목갓
약 100여년 전 마을에서 식목을 하여 조림한 숲 이름이다.
식목갓다리(승방교)
6·25사변이 끝난 후 가설한 '식목갓'과 '승방뜰' 근처의 다리 이름이다. 24) 시우전 옛날 많은 논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252-263번지 일대이다.
안말
사당1동 105-1050번지 일대 지금의 예술인 마을부근으로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26) 안자리 안쪽에 있는 작은 들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1003, 1004번지 남사초등학교 자리이다.
양짓말[陽智村]
해가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3동 219번지 일대로서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양지마을이라고 부른다.
양춘말
옛날에 논이 있었다는 마을로 현재 사당3동사무소 일대이다. 능내에서 내려오는 '양춘말 개울'이 있었다.
원당고개
조선시대 동래(東萊) 정(鄭)씨 문중과 전주(全州) 이(李)씨 문중이 사당(舍堂) 고을을 서로 자기 땅이라 하여 소송이 붙자 당시 이 고을 원님이 이 고개에 앉아서 판결을 내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 사당동 산 44번지 일대에서 봉천동(奉天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산 44-12, 산 32-4번지를 경계지점으로 반씩 소유토록 했다. 다시 말해서 산 44-1번지에서 남태령(南太嶺) 고개까지는 전주 이씨가, 산 32-4번지에서 동작동 배나무골까지는 동래 정씨가 소유했다고 한다.
진꿀
긴 골짜기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119-99번지 남성시장 뒷편으로 논밭이 많았다고 한다.
작은고개
총신대 앞 사당아파트가 있는 부근의 작은 고개를 가리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안자리
작은 들판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2동 사무소 일대이며 큰 안자리는 사당1동 남사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
장군내다리
6·25 사변이 끝난 후 가설한 '승방뜰' 근처의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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