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8년 9월 15일
장소: 경주 분황사와 폐사지(廢寺地) 일대
아직까지 몸뚱아리는 온전치 못하고 낮에는 모르겠는데 저녁에는 수술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이다...거기다가 1주일에 5일씩 받는 방사선 치료는 참으로 힘이든다
이제 방사선 치료가 8부 능선을 지났으니 참는 수 밖에 없다
지난 밤에도 엄청난 통증으로 인해 잠을 거의 자지 못한 탓인지 이른 새벽에 일어나니 엄청 피곤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법보신문사에 주최하는 삼국유사 성지순례를 가기로 약속했기에 카메라 베낭만
챙겨서 집을 나서는데 집에서는 안 갔으면 하는 생각인데 내 성격을 잘아는 터라 막지는 않는다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서 버스 탑승 장소인 조계사 앞을 가다가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에게 예를 올리고 버스에 오르니 늘 같이 다니던 도반들이 반겨준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어젯밤을 잠을 자지 못했던 탓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어림잡아
2시간 정도는 잠을 잔듯한데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도 버스는 천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속도로가 엄청나게 많이 밀린 모양이다
천안을 지나면서부터는 창밖으로 비는 오기 시작하여 많은 걱정을 했는데 버스가 의성을 지나면서
부터 비는 그쳤고 날씨는 잔뜩 흐려 있지만 오랜 산행 경험으로 봤을때 비는 오지 않을 듯 싶다
경주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점심식사를 하고 성지순례를 하기로 한다
오늘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찰과 전설의 무대였던 경주 순례는 ‘약사여래의 불국토’를
주제로 분황사를 비롯해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등을 찾아 신라인들의 신심과 역사를 만난다.
오늘 점심을 먹었던 숙영식당
주수완 박사님이 강추한 찰보리밥 정식인데 생각보다 깔끔하고 담백한게 참으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당 근처에 있는 첫번째 성지 순례코스인 경주분황사로 향한다
숙영식당 옆에 있는 가게의 모습
분황사 경내 유적 배치도
분황사(芬皇寺)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 서라벌내 7개 가람 중 하나에 속한다.
선덕여왕 3년(634)에 세운 신라 명찰 중 하나로 여왕의 향기가 물씬 나는 이름으로, 향기 '芬'자에
황제 '皇'자를 써 분황사로 칭했다.
분황사는 호국사찰인 황룡사와 함께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국찰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몽골군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되었고,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과,
조선시대에 세워진 보광전만이 남게 되었다.
자장과 원효가 거쳐 간 절로도 유명하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며, 경덕왕 때는
‘희명’이라는 다섯 살 여자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천수대비의 그림도 유명하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화정국사비의
귀부와 석정, 석조, 석등 등의 유물이 있는데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은 안산암의 석재를
벽돌처럼 깎아 쌓은 탑으로 분황사 창건과 같은 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9층탑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에는 3층만이 남아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수리하던 당시 2층 탑신과 3층 탑신의 중간에서 석재의 사리함이 발견되어 그 속에서
각종의 비취옥을 비롯한 옥재류와 가위. 은바늘 등과 함께 숭녕통보 등의 고전이 발견되었는데, 고려 시대에
이 모전석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 등을 봉납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넓은 기단의 네 구석에는 석사자를 배치하였다. 1층 탑신의 4면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양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 석조미술의 걸작품에 속한다.
화정국사비의 귀부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평장사 한문준의 소찬'으로 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비신은 유실되고 귀부만 남아 있다. 석정은 당나라 사신과 두 마리 용간에 얽힌 전설이
있는 우물로서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다
자장율사와 원효성사가 거쳐 간 절로도 유명하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며,
경덕왕 때는 ‘희명’이라는 다섯 살 여자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천수대비의 그림도 유명하다.
분황사 포시석 옆면에 쓰여 있는 글귀.
아~아 東海에 떠오르는 太陽처럼 빛나는 인류의 스승 元曉聖師시여!
月精橋 皎皎한 달무리에 봄 밤이 깊어 가는데
소 양뿔위에 華嚴 說하시고 오늘도 내일도 金剛三昧 드시네.
아~ 설총의 孝心에 天眞한 聖스러운 옆 모습을
往來人 人波속에 몇ㅊ이나 알고 가는가!
오늘 우리는 큰바위로 기치를 배우고
새벽을 여는 聖師의 慈悲光明이 다시 우주에 빛추어 주기를
祈精하고 祝願하며 이 비석을 세웁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이다
분황사의 창건 직후에는 당대(當代)의 명승(名僧)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주석(駐錫) 하였으며 분황사에는 솔거(率居)가 그렸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벽화와 경덕왕 14년(755년)에
강고내발(強固乃末)이 구리 306.700근(斤)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등이 있다.
분황사는 당간(幢竿)과 지주(支柱), 중문(中門), 석탑(石塔), 3금당(三金堂), 강당(講堂), 회랑(回廊)을
갖춘 대가람(大伽藍)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되어 버렸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普光殿)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경북도문화재자료 제 319호) 등이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중에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模塼石塔:국보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장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구황동 당간지주
(九黃洞幢竿支柱: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92호), 신라 호국룡(新羅護國龍)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石井 : 경북 문화재 자료 제9호) 등의 석조가 남아 있다.
분황사 삼문 현판의 편액
분황사는 일주문이나이 삼문(三門)이 일주문이나 사천왕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삼문중에 2곳은 굳게 닫혀있고 한곳만 열려있는 관광객과 순례객을 맞이한다
우리야 절집에 가면서 입장료를 내지 않아서 매표소와는 상관이 없다
프리패스하여 절집 안으로 들어서니 모전석탑이 범여를 반겨주고 주전(主殿)격인 보광전은
지금 해체 수리 복원중이라 절집 전체가 완전히 공사판을 연상케 한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나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분황사의 가람배치 변천
분황사의 창건 당시 석탑 북쪽에 ‘品’형삼금당을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였다.
석탑의 남북중심축상에서 동.서 26.6m, 남.북 15.4m, 면적 124평의 장방형 평면구조였으며
동.서 금당터는 석탑 남.북 중심축선을 기준으로 동서대칭지점에 배치된 동.서 20.3m, 남.북
18.0m , 면적 110평의 장방형 평면 구조였다.
삼국시대의 가람에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 구조는 원래 고구려의 가람배치 양식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의 전형은 동.서. 북쪽의 삼금당이 중앙의 탑을
각기 에워싸고있는 형국이다...그런데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에서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 양식을 받아들인 신라에서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를 받아
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고구려의 그것과는 달리 중금당은 동일 남북중심축선상의
북쪽에서 남향으로, 동, 서금당은 동 중심 축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지점에서 각각 남향으로
건립하여 삼금당을 모두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또 삼금당 모두 석탑의 북쪽에 위치하도록 배치하여 고구려의 전형 양식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즉, 고구려의 양식을 받아 들이되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독창적인 가람배치를 선보인 것은
새로운 신라 양식의 출현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용궁의 북쪽에 창건된 분황사(芬皇寺)는 왕분사(王芬寺)로도 불렸는데,그 명칭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선덕여왕 개인 또는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원찰로 기능한 듯한데 분황사는 신라인들이 석가모니
이전에 해당되는 전불시대(前佛時代)에 이미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도래하여 설법하였다고 믿었던
일곱 개의 사찰인 칠처가람(七處伽?) 중의 하나로 신라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다
7세기 후반에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면서『화엄경소』·『금광명경소』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화엄경소』를 짓다가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절필한 사건은 유명하다.
원효가 설총의 집 가까이 있었던 혈사(穴寺)에서 죽자 아들 설총은 풍장(風葬)을 거친 원효의 유해(遺骸)를
가져와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용상(眞容像)을 정면상이 아닌 반견상(返見像), 즉 뒤를 돌아다보는
형태의 회고상(廻顧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이를 두고『삼국유사』권제4 의해 제5 원효불기조의 내용과 같이‘설총이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문득 소상(塑像)이 고개를 돌렸다’로
와전(訛傳)되었다.
1669년에 간행된『동경잡기』고적조에 의하면, ‘분황사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허물었는데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해 해체하다가 또 일부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탑 내부에서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다.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하면 불길이 일어났으며 당시 백률사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한다
분황사 삼문을 들어서니 신라시대의 가장 오랜된 탑인 모전석탑이 순례객을 사로 잡는다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국보제30호)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내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9.3m로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이 석탑은 신라시대 남아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3년에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으로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으로
추정되며 1915년에 일본인들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하였다.
분황사모전삼층석탑의 평면도(기단 및 일층)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사리암 내부 전개도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으며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감실과 불단의 모습
감실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仁王象)이 세워져 있는데 금강역사(金剛力士)·이왕(二王)·집금강신(執金剛神)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약사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갑옷을 입은 신장형(神將形)으로 표현되었지만 차츰 반라의 몸에 천의를
두르고 팔을 들어 왕성한 힘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보통 사찰의 좌우에 두 신을 마주보도록 배치했는데 이는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입을 벌리고 한 손에 금강저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상은
아금강상(阿金剛像)이라고 하며, 입을 꽉 다문 채 주먹으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은 음금강상(吽金剛像)이라고 한다.
인왕은 금강역사와 밀적역사(密跡力士)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이는 같은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수호신으로 사찰이나 불전의 입구와 석탑의 문 등에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얼굴은 분노형이며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나형으로 신체의 근육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유물 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문 양쪽에 있는 신라시대의 인왕상(634)이 가장 오래되었다
금강역사상(인왕상) 인도의 약사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갑옷을 입은 신장형(神將形)으로
표현되었지만 차츰 반라(半裸)의 몸에 천의(天衣)를 두르고 팔을 들어 왕성한 힘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변했으며 보통 사찰의 인왕문 좌우에 두 상을 마주 보도록 배치했는데 이것은 사악(邪惡)한 것이
성스러운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분황사의 옛모습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으로 이 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
모전석탑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말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분황사 모전석탑이나 구황동 모전석탑
(현재는 폐탑으로 전돌과 금강역사상이 남아 있음)처럼 탑을 구성하는 전(벽돌)을 돌로 다듬었는데
그 형태가 흙으로 구운 벽돌을 모방하였기에 모전(模塼)이라 붙인 것이고 둘째는 서악동삼층석탑이나
남산 동삼층석탑처럼 석탑 전체으 모양이 전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르는 경우이다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모전석탑의 시원(始原)이자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으로써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고, 신라의 여왕 체제를 널리 알리며 불교에 의존한 왕권 신성화
작업으로 태어난 소산물로서 그 의미가 다른 탑과는 다르다고 한다
즉 대분분 사찰의 탑이 부처님에 대한 신앙의 대상물이라면 분황사의 석탑은 선덕여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목적이 가미된 조형물인 것이다
모전석탑의 네 귀퉁이에는 사자와 물개의 석이 있는데 혹자는 암사자와 숫사자로 구분하기도 한다
동해를 바라보는 동쪽에는 물개, 서쪽에는 사자가 앉아 있는데 동쪽과 서쪽의 모양이 다르게 하면서
대칭을 이루도록 하는 기법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좌경루와 범영루가 이루는 비대칭의
대칭 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건축 기법이다
서쪽의 사자상
사자는 불법의 수호와 함께 부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서 석탑이나 석등, 능묘 주위에
한조상으로 표현되거나 석조물의 표현을 장식하는 장엄용의 부조상으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석탑에서 독립된 사자상이 놓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불국사의 다보탑,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 광양 중흥산성 3층 석탑 3곳 뿐이다
석탑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사자상들이 탑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 나중에 특이한 형태의
4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많이 출현하게 된다
서쪽의 사자상 2기는 날카로은 이빨이 드러나게 입을 크게 벌리고 부리부리한 눈을
강조하여 얼굴에는 강한 기운이 드러나나 동쪽의 물개 형상은 온순하고 귀여운 상이다
인증샷
모전석탑 기단부의 그렝이법
석탑 기단부 윗부분에는 신라인들의 위대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그렝이법
그렝이법이란 건물을 지을 때추춧돌 위에 나무 기둥을 돌의 윗면 모양대로 깍아서 세우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위의 장대석을 아래돌의 형태대로 깍아 맞춘 것으로 내구성과 지진과 같은 흔들림에도
견디는 힘이 대단한 건축법으로 그렝이법은 본래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고급 건축 기법인데 신라에서는
불국사의 대석단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쪽의 물개상
안내판에는 그냥 사자 4마리라고 적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서쪽의 2마리 석사자(石獅子)는 오랑캐를
막기 위함이고 동쪽의 2마리 물개는 왜적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으며, 또 다른
해설사는 서쪽은 숫사자이고 동쪽은 암사자라고 하여 조금은 헷갈린다
모전석탑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에 의해 석탑이 해체 복원 되었는데 그 당시 2층 탑신 중앙
석함(石函)의 내부에서 다량의 사리구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리구들을 보면 분황사 모전석탑이 일반적인
탑과의 다른 성격의 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있던 돌로 만든 사리암 속에는 각종 옥류(玉類) 은제합, 수정, 금은제 가위., 유리병,
금제 실패, 은으로 만든 바늘, 침통, 족집게 등 여성 생활도구가 많이 출토되어 선덕여왕을 위해 세워진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약사여래상이 있었다는 터
경덕왕 14년(775) 本彼部(본피부)의 强古乃未(강고내미)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분황사에는 신라시대의 우물 중 가장 아름다운 8각형의 석정(돌로 만든 우물)이 있다
'호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漁井)'으로도 불리는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데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황제의 비밀 지령을 받은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들어와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킨 후대나무통에 숨겨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들이 용을 잡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북천의 물이 불어나 왕이 되지 못했던 김주원
후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당나라 사신들이 용을 잡아 떠난 그날 밤,
원성왕의 꿈에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우리는 청지와 동지에 사는 용의 부인인데
당나라 사신들이 우리 남편을 잡아가고 있으니 다시 데려다 주소서"라고 아뢰었다
이에 원성왕은 군사를 풀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을 붙잡아 용을 데려오고 이들을 도와준
김주원의 후손 일당을 처형하였다.
다시 우물에 돌아 온 용은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분황사 석정은 옆에서 보면 가구식 기단의 형식과 비슷하게 지대석, 면석, 갑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면석이나 갑석에는 치장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갑석 형태의 윗면 북쪽 일부에 거친 정으로 따 낸 후
다듬은 흔적이 보이는데 왜 깎아내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땅 속의 우물 석축은 약 20cm정도의 냇돌을 사용하여 허튼층쌓기방식으로 쌓아올렸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올린 방식이다
그런데 분황사 우물이 보여주는 특이한 점은 우물의 바깥면은 팔각형, 안쪽면은 원형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물 안쪽에는 긴 장대석으로 사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미적 요소를 위해 구성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사상을 바탕에 두고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우물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는데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식수를 공급하는 인공적인 시설임과 동시에
신성한 성지(聖池)로서도 인식되었다. 물이 가진 정화의 능력은 세속의 더러움을 씻어내 재앙이나 잡귀를 물
리치고 세속의 공간을 신성한 공간으로 바꾼다는 믿음의 장소인 것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신화에 등장하는 나정(蘿井)이나, 오릉에 있는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부인의 탄생지인
알영정(閼英井)은 탄생을 상징하는 신성한 장소들이다.
경주에는 분황사 우물을 비롯하여 김유신장군의 생가에 있는 재매정, 남간사지 내 우물 등,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우물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분황사 석정(삼룡번어정)은 돌우물로서
분황사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땅 위에는 평면 팔각형의 우물틀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평면 원형의 석축 우물이 남아있다.
1개의 큰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우물틀은 매우 독특한 형식이다
우물 안 내부에 있는 사각형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체(四聖締)를 말한다
사성제는 '네가지의 높은 깨우침'이라는 뜻으로,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체'자를 붙여서 고성체, 집성체, 멸성체, 도성체라고 하기도 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아 가르친 네가지의 진리, 사성체(四聖締)는
1.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과 (고-苦)
2. 그 괴로움의 원인과 (집-集)
3.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과 (멸-滅)
4. 열반에 이르는 길 (도-道)이다.
사성제를(四聖締)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하는데 고집멸(苦集滅)이 과정을
말한 것이라면 도(道)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육바라밀과 팔정을 언급한다
육마라밀은 보시(布施) 인욕(忍辱) 지계(持戒)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로서
베풀고, 참고, 지키고, 노력하고, 일관성을 가지고,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우물 바깥면의 팔각형은 팔정(八正)를 의미한다. 팔정은 바르게 해야할 8가지로서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즉 올바르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유지하고, 노력하고, 기억하고,
안정함으로서 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물 안쪽면의 원은 '원융(圓融)의 진리(眞理)'를 뜻한다
마음도, 만물도, 우주도 모두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원이 되는
우주의 진리가 부처님이 깨친 진리인 것인 것으로 즉 '나'라고 하는 것이 따로 우뚝한 것이 아니고
모든 '나' 속에 저 모든 '나'가 깊이 관계하고 있는 상즉상립(相卽相立)의 원융화엄(圓融華嚴)의 세계라는 것이다.
분황사 우물의 구조 원리
따라서 이 분황사 우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고통의 근원인 세상적 욕망의 끈을 끊어야 하며 그 길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의 훈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불교의 중심 사상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7호)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대좌로 크기 높이 60㎝, 가로 100㎝,
세로 40㎝이며 평면은 직사각형이며, 상대·중대·하대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에는 복련(覆蓮), 중대에는 안상(眼象), 상대에는 앙련(仰蓮)을 새겼으나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일부 남은 연꽃 조각에서 고려 중기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상대 윗면에는 비석을 세웠던 직사각형 홈이 패어 있고, 홈 밖 윗면 일부에 김정희(金正喜)가 쓴
此和靜國師之碑趺[차화정국사지비부, 跡이라고도 읽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101년(고려 숙종 6) 8월 고승 원효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화정(和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주석(駐錫)하였던 분황사에 추모비를 세우도록 명령하였는데, 막상
비석이 건립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명종 때였다
비석은 조선 전기까지는 남아 있었던 듯 『신증동국여지승람』 분황사조에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재료는 오금석(烏金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시습(金時習)은 이 비석을 보고 「무쟁비(無諍碑)」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비석 건립과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최유청묘지명(崔惟淸墓誌銘)」에서는 「화쟁국사비명」을 최유청이
지었다고 밝히고 있는가 하면, 『금석청완(金石淸玩)』(1665년 간행)에는 비문의 글씨를 최선(崔詵)이 썼다고 하였다
여기서 화정(和靜)은 숙종이 내린 시호요, 화쟁(和諍)은 원효사상의 핵심 개념이므로 구분하여 쓸 필요가
있으나 ‘화쟁국사’로 기록한 사료도 많아 현재까지 구분 없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분황사가 소실되면서 파괴된 듯하며, 이후 비석의 대좌만 남게
되었는데 조선 말기에 이곳을 찾은 추사김정희의 고증으로 이것이 승 원효의 비석을 세웠던 비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비문 일부가 탁본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전하며, 1976년분황사 경내에서 발견된 비편(크기:
16㎝×14㎝)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쟁국사비부는 숙종6년(1101년)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인데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한데, 비석 받침이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 받침 위쪽에 '차신라화정국사지비적(此新羅和靜國師之碑蹟)'이라 적고 작은
글씨로 김정희라고 새겨놓았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의 소찬(所撰)인 화정국사비가 있으니
오금석(烏金石)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비부만 남아 있고 비부의 네 모서리는 떨어져 나갔다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차신라화정국사지비적(此新羅和靜國師之碑蹟)... 글씨가 마모되어 판독이 쉽지 않다
분황사 보광전 뒷쪽의 모습
대원심 보살 사리탑
사리탑 옆에는 마모가 심한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대원심보살 사리탑 안내판
석조여래입상은 종무소 건물 앞, 자그마한 화단 한 쪽에 세워져 있다.
전각 안에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대좌도 없이 노천에서 그냥 땅에 묻혀있어 손상이 많다.
몸체와 붙은 커다란 광배는 주형(舟形) 신광과 두광을 갖추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신체 각부의
마멸이 심한데, 특히 얼굴 부분은 육계와 두 귀만 뚜렷할 뿐 파손이 많이 되어 있다.
편단우견의 불의를 입고 있으며 가슴 윤곽이 잘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가슴 아래로 모우고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 왼손으로 약합 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듯 하다. 왼쪽 손목
아래로 흘러내린 불의는 기다랗게 밑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고, 양쪽 허벅지께에서 포물선 모양의 옷주름이
중첩되어 흘러 내리고 있다. 무릎 아래가 현재 땅 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가 어떤지 알 수 없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과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 9세기 말에 조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분황사 대종각(大鐘閣)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사찰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에 있으며 내부에는
범종(梵鐘 : 절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종)이 달려있다.
그리고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목어(木魚 : ①목탁(木鐸). ②나무로 잉어처럼 만든 기구. 길
이 1m가량으로 속이 비어 있어 경전을 읽을 때에 두드림)는 원효예술제 때 이용한다고 한다
해체 복원 수리중인 분황사 보광전(普光殿)
보광전은 완전히 공사판이라 들어갈 수가 없고 맞은편에 임시 가건물에 법당이 있다
분황사는 창건 당시(선덕여왕 3년:634년)에는 ‘品’자형으로 배치된 3개의 금당을 가진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전각이 모두 불타버리고 지금은 약사여래불상이 모셔져 있는 보광전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보광전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내부 면적이 약 13평 가량되는 조그만 전각이다
보광전이란 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신 법당으로 유리광전 또는 약사전이라고도 불린다
보강전 공포
약사여래불은 동방유리광세계의 교주로서 죽음에 대한 안심감을 부여하는 부처로서
인간의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있는 대표적인
부처로서 대중의 신앙을 받고있는 부처님이시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 밀본(密本)이라는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와
분황사에 약사여래를 모셨다고 하는 기록, 그리고 신라 왕릉의 호석에 등장하는 12신장의
예를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약사여래신앙이 흥했음을 알 수 있다.
수리중인 보광전 안에 있는 약사여래입상(경북 문화재 자료 제319호)
수리중인 유리 케이스 안에 사진을 제대로 찍을수가 없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
이 불상은 보광전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乾漆製 藥器)의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九年乙未四月二十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 50년(1774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으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의 사이에는 화형을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 내리다가 무릎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다.
대좌(臺座)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앞에 놓인 석재 불단은 사천왕상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는데 이 불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보광전에 안치되어 있는 분황사 약사여래 입상은 원래 755년에 강고내미가 만든
약사불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원형은 거의 파괴되고 조선시대에 새로 보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고, 법의는 두껍고, 조각수법이 전체적으로 투박해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약사여래불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불이며 불상 뒤에는 약사회상도가 탱화로 걸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황사 보광전의 문살
분황사 보광전의 모습
경주에는 많은 약사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대표적인 곳이 백율사 약사불과 분황사 약사불이 있는데
백율사 금동약사불입상은 국보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30년대 백율사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14년(755)에
본피부(本皮部:지금의 경주)의 강고내말(強固乃末)이 30만 6천 7백근의 무게로
금동약사불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전기에「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주부조에 기록된 서거정(1420~1488)과
어세겸(1430~1500)의 시에서 내용을 종합해보면 당시 분황사에는 경덕왕 때
조성된 약사여래상인 장륙존상이 9층 석탑과 함께 남아 있었으며 사찰의 절반은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석탑 앞, 뒷면의 일부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 때 조성된 장육존상(丈六尊像)과 석탑은 왜군의 침입으로 야기된
7년간의 임진왜란 때(1592)에 화를 당했으며 나머지 전각들은 뒤이은
정유재란(1597) 때에 전소되었다.
조선조 광해군 원년(1609)에 거사 신희인(申希仁)이 주도하여 보광전을 서향으로 중창함과
아울러 새로 높이가 3.45m이고 무게는 5.360근의 청동으로 주조된 약사여래입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불상이 지금 남아있는 약사여래불입상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불상은 두 발 부분과 신체를 이루는 부분이 서로 다른 성질의 금속(합금의
비율이 현저히 차이가 나는)인 것을 미루어 두 발 부분은 원래ㅢ 형태가 아닐까 하는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분황사 보광전에 있는 이 불상은 전형적인 18세기 후반의 양식과 조형 기법을 따르고 있다.
육계는 낮고 작으며 상호(相好)는 둥글고 육감적이며 얼굴은 동안(童顔)이다
이 때문에 종교적인 신비감이나 자태를 느낄 수 없는 다분히세속적인 요소가 많이 보인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두꺼운 편이고 의습(衣褶)은 유리하지 않으며 치마띠는 화형(花形)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는 장식이 없는 판석(板石)으로 되어있고, 약합(藥盒) 뚜껑의 파손 부분을 살펴보면
건칠제(乾漆製)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보면 불상 전체도 건칠제일 가능성이 높다
약사여래불의 정식 명칭은 약사유리광세계 부처님 또는 대의와울이라고 한다.
동방으로 갠지스강 모래알 수 10배에 해당하는 국토를 지나 정유리정토에 계신다고 한다
원래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등에서 주로 설법되는
이 부처님은 보살이었을 때, 12가지의 서원을 세우고수행하여 부처님이 되었다고 한다
분황사 경내 순례한 다음에 분황사 삼문을 빠져 나온다
구황동 당간지주(幢竿支柱:경상북도유형문화재 192호)
옛날 절에서 당(幢)이라는 깃대를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 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높이는 360cm이며, 양 기둥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대로 돌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으로 기둥은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둥사이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의 당간지주인지 분황사의 당간지주인지 모호하여 그냥구황동당간지주라고
불렀으나 분황사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 소속의 당간지주로 추론하고 지금은 대개 분황사 당간지주라 부른다
당간지주는 보통 일주문 밖에 있는데 두 개의 돌기둥이다.
당간지주 사이에 세우는 당간(幢竿)은 절의 행사를 멀리서도 알 수 있도록 당(幢) 또는 번(幡)이란
깃발을 높이 매다는 나무, 쇠, 돌 등으로 만든 깃대를 이르는 것이다.
거북모양의 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이 시기 당간지주를 연구 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 쌍의 돌기둥이 70cm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고 귀부(龜趺)를 조각한 간대(竿臺)만 남아있다.
귀부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목은 움츠린 상태이며 오른쪽 앞다리와 왼쪽 다리 부분이 크게 깨어졌고
겁에 질린 듯 목을 잔뜩 옴츠리고 있다. 등에는 귀갑무늬가 없고 당간을 놓는 자리는 한가운데가 아니고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분황사 순례를 마치고 다음 코스인 황룡사지로 향한다
분황사 관련자료 : 토함산 솔이파리 http://blog.daum.net/kinhj4801/15959788
숨어서 약사여래를 지키는 분황사의 보살상의 자료 인용
분황사에서 황룡사지 가는 길
예전에 황룡사 우물이었다고 한다
황룡사지 가람 배치도
황룡사지에 해설을 해주시는 주수완 박사님
황룡사지(皇龍寺址:사적 제6호)
신라 진흥왕 14년(533)에 월성(月城)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짓게 하여 17년만에 완성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진흥왕 35년(574)에 5m가 넘는 주존불(主尊佛)인 금동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영왕 14년(645)에는
자장율사(慈藏律師)의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을 완성시켰다
이와같이 황룡사는 4대 93년간에 걸친 국가 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1976년부터 8년간의 발구조사를 실시하여 4만여점에 이르는 우수한 작품이 출토되었으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垈地)를 마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은 중문과 목탑,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길게 배치된 일탑식(一塔式) 배치를 하였으나
금당 좌우에는 좌.우 금당이 배치되는 일탑 삼금식으로 바뀌었다
황룡사는 신라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寺格)에 있어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컸다.
황룡사는 528년 불교가 공인된 후 처음으로 세워진 흥륜사(興輪寺)에 이어 조영된 신라의 국찰(國刹)이다
황룡사지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건물과 탑, 불상의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뿐이지만,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절터의 면적만 약 25,000평에 이르는 신라에서 제일 큰 사찰 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신라의 3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 목탑과 장륙존상 이였다는 것으로도 황룡사가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가람의 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 잡고, 중금당 좌, 우에
동, 서 금당이 위치한 1탑 3금당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보통 산지 가람은 산을 배경으로 하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평지 가람인 황룡사는 가람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점 칸을 늘여 감으로써, 절 안에 들어 갈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여 평지 가람의 단순함을 보완하고 있다.
후일 신라의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친히 불사에 참례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자주 이 절에 와서 예배하였다고 하나,
불행하게도 고려 고종25년(1238년)에 몽고군의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는데 황룡사의 종루에는
경덕왕 13년(754년)에 구리 약 50만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또한 몽고군 침입 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574년경에 만들어진 황룡사의 금동장륙삼존상은 신라 최대의 불상임과 동시에 걸작으로
본존불의 무게가 약 3만 5천근, 두 보살의 무게가 약 1만 2천근 이라하며, 지금 금당 터 중앙에 남아있는 3개의
석조 대석이 바로 이 금동장륙삼존상을 안치하였던 대좌이며, 자연석을 생긴 그대로 윗면을 평평하게 고르고,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서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굴조사 시 강당 터에서 발견된 높이 182cm에 이르는 치미(鴟尾 ; 전각이나 문루 등 우리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끝머리에 얹는 기와)는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황룡사 터에서 발굴된 치미 | 금동장륙삼존상을 안치했던 석조 대좌 |
자료 펌
황룡사의 창건역사를 보면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대궐을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이를 절로 고쳐 황룡사라고 하고 17년 만인 569년 완성했다.
이 때 솔거가 이 절의 벽에 노송을 그렸다. 명실 공히 신라 제일의 국찰이었다.
584년에는 금당을 지었고 그 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가 태화지 옆을 지날 때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여 구한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
또 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자장율사가 귀국해 선덕여왕께 청하여,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으며,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석탑을 건립하는 중에 백제건축가
아비지가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백제가 망하는 현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멈추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날이 어두워지더니 늙은 스님과 힘센 장사가 장육존상이 안치된 금당에서
나와 탑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이에 감동하여 자기를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
금당터의 모습
황룡사 금당의 벽화에는 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노송도)가 있었는데 솔거는
신라시대의 화가로 출생지나 일몰시기 등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삼국사기나 조선 후기학자 권종상이 지은 「동사유고(東史遺稿)」 등에 의하면
서라벌 주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농사일을 하다가 호미나 숯검정으로 바위나 마당에 그림을 그렸는데 털로 만든
붓한자루 갖는게 소원이었는데 집이 워낙 가난하여 부모에게 감히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솔거야! 나는 단군이다. 네게 좋은 붓을 줄테니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좋은 그림을 그리도록 하라’하고 사라졌는데 그 붓으로 청년이 될 때까지 열심히
그림 공부를 했고 단군화상도 많이 그렸다고 한다
어느날 황룡사 스님이 찾아와 솔거 부모님에게 부탁을 한다
댁의 아드님이 황룡사 법당에 그림 그릴 사람으로 데려 가려고 하니 허락하여 주셔요
황룡사에 가서 좋은 붓과 먹, 종이로 여러날 그림 연습을 한 후, 드디어 금당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고향집 뒷산에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였다고 한다
그림이 완성되던 날, 소나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솔향기가 절간에 진동하였다
그 그림밑에는 종종 새들이 떨어져 죽어 있었는데, 까치나 참새들이 진짜 소나무인 줄
착각하고 소나무에 앉으려다가 벽에 부딪혀 떨어져 죽은 것이라고 한다
노송도가 퇴색되어 스님들이 덧칠을 하자 새들이 더 이상 오지 않앗다고 한다
분황사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 유마거사상, 단군초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황룡사 중금당(中金堂)터
중금당에 설치된 황룡사 금동삼존불상 안내판
장육존상에 대해 해설을 해주시는 주박사님
장륙존상 대좌의 모습
이 황룡사지에 있었다던 장육존상을 바롯한 기록상의 유물이 발굴조사 때 출토되었다.
유물은 와전류(瓦塡類), 금속류, 토기류, 자기류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와전류 중에는
특히 용을 새긴 보상화문(寶相華文) 벽돌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손꼽힌다
또 높이 182cm, 최대너비 105cm나 되는 치미(鴟尾)가 출토되었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발견된 바 없는 동양 최대의 것으로 황룡사의 위용을 알려준다
금속류는 금동제불상, 풍탁(風鐸), 금동제귀고리,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제 불상 1점은 높이 10cm에 지나지 않은 작은 것이나 여래입상(如來立像)으로
도금이 매우 찬란하고 화려하여 신라의 우수한 공예기술을 전해주고 있다.
자기류 가운데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서 출토된 백자소호(白磁小壺)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토기류 가운데는 황룡사를 축조하기 위해 늪지를 매립할 때 들어간 것들이 있는데
이 토기들은 황룡사의 창건이전이라는 하안 연대를 지적해 주는 유물로 신라 토기나
고분의 편년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장육존상 대좌의 좌.우에는 각 5개의 초석이 있는데 주박사님의 설명으로는
10대 제자를 모셨다는 초석이라고 하신다... 수긍이 가능한 대목이다
중금당 장육존상 대좌터
장육존상(丈六尊像)은 황룡사 구층목탑,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허리띠와 함께 신라삼보(新羅三寶)로 칭해진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이 황금과 부처상 하나, 보살상 둘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륙존(丈六尊)의 모습을 이루기를 축원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주조된 장육존상의 무게는 35,007근으로 황금 10,198푼이 들어갔고, 두 보살에는 철 12,000근과
황금 10,136푼이 들어갔다는데 완성된 세 불상은 황룡사 금당 안에 모셔졌지만,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절이 불탈 때 함께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금당지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목탑지 방향으로 향한다
목탑지에서 상세하게 유래를 설명해 주시는 주수완 박사님
황룡사 목탑지(木塔址)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목탑은 자장율사의 건의로 백제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와
신라 장인들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염원을 담아 선덕여왕 12년(643)부터 3년간의
조성기간을 거쳐 높이 약 80m인 황룡사 9층탑을 왕성하였다.
여러 차례의 중수와 수리를 거치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면서 9층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목탑의 규모는 한변의 길이가 약22m인 정방형(正方形) 의
형태로 총 면적은 약490㎡이고 계단은 남면에서 3개소, 북.동.서에서 각 1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기단에는 1개의 심초석(心礎石)과 64개의 초석(礎石)이 정면 7칸, 측면 7칸을 구성하고 있다.
심초석은 435cm×300cm의 크기이며 두께는 128cm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무게는 약 30톤에 달한다
황룡사 9층 석탑은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운지 23년 만에 신라는 3국을 통일하였고 후에 수많은
현철들이 신라 삼국통일은 이 탑의 영험이라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의 3보배라 하는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구층탑 및 진평왕 옥대 중 2개가 황룡사에 있었으며 신라 최대의 종이
황룡사에 있었는 데 몽고의 침입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황룡사에서는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 진평, 선덕, 헌강, 진성의
제왕이 친히 설법을 듣던 곳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탑 양식이며, 정면과 측면 각각 7칸, 높이 80여 미터의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뒤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고려 고종 25년 몽고군의 침공 시 소실되었다고 하며 현재 탑 자리에는
외두리기둥 초석 28개, 안두리기둥 초석 36개와 함께 가운데 큰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심 초석의 사리구멍 안에서는 사리를 모셨던 사리 갖춤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리 갖춤의 외함에는 탑을 조성한
내력이 적혀 있어 찰주(刹柱 ; 탑의 중심기둥)본기(本記)라 부르며, 1964년 도굴 되었던 것을 1966년 되찾은 것으로,
금 동판 4개를 경첩으로 연결시켜 상자를 만들었고, 한 변은 문고리를 달았으며 이 문의 앞, 뒷면에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과 신상이 각각 2구 씩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세면에는 9층 목탑을 만든 경위와 탑이 기울어 경문왕
때인 871년 탑을 고친 내역을 새겼다.
탑을 세운 경위는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삼한의 통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세우자고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이간 용수를 감독으로 하고 백제 장인 아비지를 대장으로 삼아 높이 225자(약 80m)의 목탑을 건립하였다
여기서 9층탑의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중국),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 (중국 강소성 동쪽 섬),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을 복속시키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황룡사 건립 이배지 기념비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4년(545)에 신라 삼보(三寶)중에 하나로 이 탑은 자장율사의
발의로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신라인의 결의를 다지는 정신적 구심체로 김용준 등
군신들과 백성들의 열화같은 호응을 받아 건립하였는데 대장(大匠) 아비지가 장인 200여명과
함께 3여년의 각고끝에 완공 하였다.
신라는 이 탑을 세운지 31년만인 문무왕 16년(676년)에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으며 후세의
현철(賢哲)들은 이 탑을 세운 영험이라 기록하고 있다...황룡사 9층 목탑은 45m 정방형의
기단위에 전체 높이 약 70m에 이르는 한국 건축의 경이로운 수준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이 탑은 593년간을 이어 내려오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년 겨울 몽고침략군에 의해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단과 추춧돌이 남아있는 이 탑자리에 서서 아슬한 창공에 구름을 손짓하던장엄한 9층 목탑의
우람한 자태를 그려보며그 뛰어난 건축 기술을 되새겨 본다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건축가 아비지(阿非知)는 백제 사람으로 전해지나7세기 중엽경에 크게 활약한
사실만 짐작될 뿐, 거의 생애는 거의 알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
그러나 아비지가 비록 백제 사람이긴 하나 정치와 국경을 초월하여 신라에 까지 미쳤기에서라벌 터전위에
신기(神技)를 다한 제일의 목탑을 이룩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문화사에 불멸하는 아비지의 건축 예술을 기리기 위하여 황룡사 옛터에 이를 돌에 새겨
후일에 전하고자 한다
1987년 경주시에서 세우고 글은 문화재 위원 문명대(文明大)가 짓고, 글씨는 정수암(鄭壽岩)이 쓰다
碑文의 내용
아비지 기념비 뒷면의 모습
황룡사 9층 목탑 심초석(心礎石) 터
심초석은 435cm×300cm의 크기이며, 두께는 128cm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무게는
무게는 약 30톤에 이르는데 심초석 안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은 외곽에 두 줄의
홈을 돌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서 금동사리(金銅舍利) 내.외함
(內.外函)이 발견되었다
황룡사의 목탑지는 심초석과 함께 64개의 초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62개의 초석만이 존재한다.
심초석은 황룡사 9층 목탑의 가운데 기둥을 받치는 석재이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것은 초석을
덮고 있는 암석인데 1978년 발굴 조사시 심초석 사리공에는 경문왕 12년(872)에 제작된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 명문이 적힌 금동사리함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으며 하부에는
청동제 팔찌, 청동제 그릇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심초석 안내판
황룡사지 9층 목탑 심초석과 초석의 모습
황룡사지 중문터
중문터의 모습
중문은 정면 4칸, 측면 4칸이었으며, 중문의 안 중앙 남쪽에 9층 목탑을 배치하고
북측 중앙에 정면9칸, 측면 4칸의 중금당을 놓고, 그 좌.우에 중금당보다 적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금당과 서금당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중문 좌.우에 창건 가람중 동.서의 긴 건물이 있었던 것을 개조하여 복랑(復廊)의
회랑을 설치하였으며 세번째의 변화는 종루와 경루가 배치되면서 바뀐 것이다
종루와 경루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5칸이나 장방형(長方形)으로 세워졌다.
이 때 중건 중문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되어 정면4칸, 측면 2칸의 2차 중건 중문이 되었다
황룡사 중문 인왕(아형)
황룡사 중문에 설치된 인왕(仁王)은 이왕(二王), 금강역사(金剛力士)이라고도 불리는데
황룡사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아형(阿形:입을 벌린 채 공격하는 모습)”, 인왕은 나라연 금강(那羅延金剛)이라 하여
천상에 살면서 힘이 코끼리의 100만배나 된다고 한다
여기서 “아(阿)”는 범어(梵語)의 첫 글자이며, 인왕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하며 현재 인왕의 제작 시기, 형태 등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황룡사 중문 인왕(훔형)
황룡사 중문에 설치된 인왕(仁王)은 이왕(二王), 금강역사(金剛力士)이라고도 불리는데
황룡사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훔형(입을 다문 채 방어하는 모습)인왕은
밀적금강(密迹金剛)이라 하여 부처님을 호위하면서 비밀스러운 일을 모두 들으려 한다
여기서 “훔”은 범어의 끝 글자이며 인왕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한다
중문터를 들러보고 있는 순례객들
황룡사지에서 바라본 경주 남산의 모습
황룡사지 서금당터
서회랑 터
회랑이란 궁궐이나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전각을 둘러싼 담의 안쪽에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외부 세계와 구분 지을 수 있도록 담을 쌓고 그 담 안쪽으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달을 것을 회랑이라고 하며
회랑은 궁궐이나 사찰에 대부분 두칸으로 구성되었으며, 두칸이라는 것은 기둥이 세개가 된다는 것을 뜻하고
길이 두개라는 것으로 회랑의 한칸은 창고를 언제든지 설치할 수 있도록 홈을 파두었다가 벽을 조립식으로
설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해두는 게 정상이다. 회랑에 홈을 파는 위치는 아래로는 기둥의 주춧돌과 나무 기둥의
아랫부분이고 위로는 2미터 정도 되는 높이다
황룡사지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우측에 황룡사 역사 문화관이 있지만 그냥 패~~~스
황룡사 역사 문화관
황룡사 역사 문화관은 황룡사지 서쪽에 위치하여 황룡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관람객들이 체험하는 역사 체험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황룡사 역사 문화관의 1층은 전통건축의 기단을 형상화하고, 2층은 전통 한옥
요소와 동기와 지붕으로 표현하여 천년고도 경주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주요 시설은 황룡사 9층 목탑 1/10모형, 3D영상실, 신라왕경 파노라마, 야외전망대가 있다
목탑 전시실은 야간 경관 조명을 설치하여 내.외부에서 관람할 수 있으며, 약 8m의 목탑 모형으로
황룡사의 상징성을 표현하였으며, 3D 영상은 황룡사 창건(533년:진흥왕 14년)부터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으로 황룡사가 소실(1238년:고려 고종25년)까지의 역사를 생동감 있게 느낄수록 제작했다.
또한 출토유물 복제품, 발굴조사 내용, 연구 성과 등을 전시하여 경주 황룡사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황룡사 역사 문화관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는 황룡사지에서 발견된과 기와 등이 전시되어 있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연화하대석과 간주석
석등 하대석
삭탑 옥개석
석탑 갑석
원형초석
방형초석
황룡사지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그리 멀지않은 중생사(衆生寺)로 향한다
중생사쪽으로는 버스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대로변에서 내려서 걸어간다
동해남부선 철길을 지나 중생사로 향하는데 중생사는 낭산(狼山)이라는 야트막한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반경 500m 이내 능지탑지와 선덕여왕 묘,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등 폐사지와 왕릉이 즐비하다
한 마디로 경주 전체가 지붕없는 박물관이란 말이 실감을 한다
철길을 지나 조금을 올라가니 좌측으로 중생사로 향하는 小路가 나오고 사찰가기 직전에
문무대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순례객을 맞이하는데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랴... 당연히 들려야제
능지탑지(陵只塔址: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
경주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높이 4.49m이다
능지탑(陵只塔)은 예로부터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으로 불려왔는데, 무너진 채 1층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신라삼산조사단(新羅三山調査團)이
1969년 이래 1971년까지 4차에 걸쳐 조사한 끝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의 화장터 유적으로 비정하였다.
기단부는 한 변의 길이가 12m, 높이가 1m인 석단으로, 상부의 낙수면은 토층으로 덮고 잔디를 심는
방식으로 마감되었으며, 둘레의 중대석에는 12지상 9구를 방위에 맞추어 같은 간격으로 기둥처럼 배치하였다.
12지상 가운데 뱀(남면)·범(동면)·용(동면) 등 3구는 없어졌다. 현존 12지상 중 일부는 낭산 동쪽 황복사(皇福寺) 앞에
있던 유구로서, 목탑터로 알려져 오다가 최근에 왕릉터로 수정된 유적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갑석은 연꽃을 새긴 장대석과 정사각형 대석 두 가지인데 후자는 귓돌로 사용되었으며 1층탑신부는 옥신의 한 변이 6m이고 기단부처럼 연화석을 얹었는데, 다만 상부에 굄돌 1단을 더 쌓고 토단을 경사지게 쌓아올려 사모지붕처럼 마감하고 중심부에자연석을 마치 보주(寶珠)처럼 사용하였다.
한편 연화석은 양식적으로 8∼9세기에나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여, 석단형 유구가 후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고 있다.
1975년의 해체·발굴조사로 정사각형 석단 중앙부에 찰주석이 지층 아래까지 세워져 있고, 찰주석(擦柱石) 하부에는
공간을 포함한 토석 유구가 있으며, 토석 유구와 주변 지층이 까맣게 그슬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화장묘(火葬墓)로 추정되었다.
그러니까 원래 창건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된 묘가 있었으나 이것이 언제인가 소실되자 이 화장묘를 보존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외부에 정사각형 석단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문무대왕의 화장 장소로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탑 기단 내부에서 소조(塑造) 불상의 파편 여러 개와 수많은 와전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통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서, 현존 석단 이전에 창건된 건물, 즉 문무왕의 탑묘(塔廟)에 쓰였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른바 방단형석탑(方壇形石塔)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 탑은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지금과 같은 규모의 평면에 5층으로 쌓아올린 석조 축단형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현재 터의 향좌측에는 보수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토단 유구가 남아 있다
중생사의 우물
능지탑을 참배하고 바로 옆에 있는 중생사로 향한다
일주문도 없고 가람으로 들어서 가장 먼저 만나는게 식수로서 사용할 수 없는 우물을 만나는데
佛國土인 경주의 절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절집 살림이 어려운 貧寒한 절이다
절 집에 40여명이 들어서도 인기척이 없다가 한참을 지난 다음에야 순례객들의 소리에 요사에서
스님인 듯한 분이 나오시는데 법복도 입지 않았고, 순례객들에게 별로 반응을 하지 않는다
중생사(衆生寺)의 모습
중생사는 불국사의 末寺로 되어있는데 사실은 조계종 사찰이 아니며, 679년(신라 문무왕 19년)에 창건되었다.
중생사는 근처에 선덕여왕 능이 있어 선덕사로 불리기도 했으며 70여년전 중창하면서 중생사로 개명되었다.
마당 주변에는 건물 초석, 불상 좌대, 옥개석, 파석들이 널려있고 특히 이곡 지장전 누각밑 큰 암반에 삼존불이
마모된 채로조각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석조 약사불좌상, 석조 십일면 관음보살상, 마애삼존상이 발견되고현 경주박물관에
영험하다고전해 내려오는 석조관음보살상도 이 주변에서 발견되어 신라시대에 유명한 절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이 절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는데 중국 오(吳)나라의 한 화공(畵工)이 이 절에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신라말에 최은함이라는 사람이 이 보살상에게 기도를 올린 후
아들 최승로(崔承老:927~989)을 얻었다고 한다
이 외도 몇가지 설화가 더 전해지는데 992년(고려 성종 11년) 이 절의 주지 성태(性泰)스님이
시주를 받지못해 절 운영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자, 이 보살상이 금주(金州:지금의 김해)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주었으며, 법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보살상이 스스로 절 마당으로 옮겨와 재난을 피했다고 한다.
중생사 마당에 있는 호랑이상
창건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1940년에 옛터에 중생사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며, 건물은 법당(비로전)과 삼성각, 요사 2동이 있고
유물로는 보물 제665호로 지정된 낭산마애삼존불이 유명하며, 이외에도 팔각원당형불좌대와, 석탑
옥개석, 석조관세음보살상, 석탑 부재등이 남아 있는데, 이중 석조관세음보살상의 불두(拂斗)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옛 절터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경주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있다.
이 탑은 본래 5층 석탑으로 사방에 십이지상이 세워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인근에 있는 선덕여왕릉, 신문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 보이며, 중생사가 위치한 경주 낭산 일대에는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생사 비로전(毘盧殿)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전각으로《화엄경》을 바탕으로 하므로 화엄전(華嚴殿),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므로 비로전(毘盧殿),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깊은 선정(禪定)과 지혜의 빛이 충만하므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한다.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데 노사나불은 연화장세계의
보신불(報身佛)로 즉,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거듭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한 연화장세계의 부처이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인계는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이다.
후불탱화로 법신탱화(法身幀畫) · 보신탱화(報身幀畫) · 응신탱화(應身幀畫)를 각각의 불상 뒤에 거는 경우가 많다
중생사 비로자나불
중생사 비로전의 신중탱화(神衆幀畵)
신중탱화에 나오는 많은 호법신들은 우리 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은데 이는 재래 토속 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의미한다.
그리고 토속신들이 호법선신(護法善神)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에서 신중탱화는 그 어떠한
탱화보다도 고유의 특성이 강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둔 것으로 39위(位) 신중탱화가 그 원형을 이룬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차츰 불교가 민간 신앙과 강하게 결합되면서 보다 많은 신들을 수용하여 104위 신중탱화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다시 개개의 신들이 지니는 본래의 신앙적 기능이 강조됨에 따라서 다시 분화된다
비로전을 참배하고 중생사에 있는 핵심포인트인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으로 향한다
이 마애보살삼존상(狼山磨崖菩薩三尊坐像)은 보물 제665호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표시석
마애보살삼존상(狼山磨崖菩薩三尊坐像:보물 제665호)
현재 중생사 지장전으로 된 곳에 마애보살삼존상(狼山磨崖菩薩三尊坐像)은 중앙에 본존불이
얕은 감실(龕室)속에 부조된 좌상으로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둥글고 비만한 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얼굴은 살짝 미소를 띤 독특한 모습이다
넓은 어깨에 목은 거의 표현되지 않은 움츠린 자세이다. 옷은 통견(通肩)인데, 왼쪽 어깨 위에서 한 번
뒤집혀 있고, 드러난 가슴에 두 줄의 옷주름선이 비스듬히 표현되었으며, 또한 군의(裙衣)를 묶은 띠매듭이
보이며, 군의가 두 무릎을 덮어 발이 드러나지 않는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원형으로 음각(陰刻)되었다.
좌우의 협시상들은 한 발은 안쪽으로 접고 다른 발은 약간 편 자세[遊戱坐]로, 갑옷을 입은 무장상(武將像)이다.
머리는 마멸되어 잘 알 수 없지만, 본존상과 마찬가지로 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입은 꼭
다물고 있다
목은 역시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목 주위에는 신장상(神將像)에서 흔히 볼 수 있는 Ω형 옷깃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상은 칼을 잡고 있으며, 왼쪽 상의 지물(持物)은 파손이 심해 분별할 수 없다.
이 상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것으로 보아 신장상으로 추정되며, 세부 표현이 마멸되어 상의 명칭과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얕게 부조된 평판적인 부드러운 신체, 풍만한 얼굴, 넓은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은 좁지만 안정된
자세등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불상은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한 예는 매우 드문 일이다
중안에 있는 본존(本尊)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양 어깨를 감싸면서 입은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비슷하며, 또한 몸과 머리에서 빛을 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손 모양은 생략 되었다.
좌측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오른쪽에 칼을 차고 있으며 유희좌(遊戲坐:결가부좌에서 한쪽 다리를 풀어 대좌 밑으로
내린 자세)를 하고 있고, 우측의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악귀를 몰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보살삼존상 뒷쪽 천정에는 지장전 건립에 불사한 보시한 명단이 적혀있다
중생사 비로전을 참배하고...
다음의 순례코스로 향한다
절마당에 방치되어 있는 유물들
초석들도 많이 보인다
비로전 우측에 있는 삼성각은 올라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삼소관음(三所觀音)상이라 서술되어 있고 본 설화에 등장하는
관음보살상이라고 추정되는 불상은 원래 중생사에서 멀지 않은 밭두렁에
머리를 잃은 채 묻혀 있었고 1997년 4월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왔었다.
그런후 일제시대때 박물관으로 먼저 옮겨진 머리부분과 맞추어 복원하여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모셔져 있다.
옛날 중국 오(吳)나라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여인은 천하 절색의 미녀였다.
『아마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고금에는 물론 그림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이처럼 흡족해 한 천자는 어느 날 미모의 여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 화공을 불렀다.
『화공은 듣거라. 오늘부터 이 여인의 실제 모습을 한치도 틀림없이 그려 그녀의
아름다움을 오래 오래 볼 수 있도록 해라.』
왕명을 받은 화공의 이름은 전하여지지 않으나 혹자는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 화공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인의 모습을 다 그렸는데 그만 마지막 붓을 놓는 순간
붓을 잘못 떨어뜨려 그림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혀 버렸다. 아무리 지워 보려 했으나
기이하게도 고쳐지질 않았다. 화공은 자기 의도와 관계없이 생겨버린 그 붉은 점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완성된 그림을 천자에게 바쳤다.
『아니 이럴 수가. 옷 속에 감춰진 배꼽 밑의 점까지 그리다니….』
그림을 본 황제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죄를 면한 화공은 박사 분절(博士 芬節)에게 자기의 심중을 나타내었다.
중생사를 나와서 선덕여왕릉으로 향한다
경주 낭산(狼山)일원(사적 제163호)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산 허리가 잘록하며 높이가 108m로 그리 높지 않아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서라벌의 진산(眞山)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12년(413)에는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 올랐는데, 왕이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이후로
낭산에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百結) 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공부하던 독사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는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이 있다.
이 마애보살삼존좌상 주변으로는 소조불상이 모셨던 곳으로 여겨지는 능지탑이 남아있다
선덕여왕릉 가는 길
길가에는 으아리꽃도 보이고...
오랫만에 호젓한 숲길을 걸어본다
소나무숲을 걷다보니...
소나무 숲사이로 선덕여왕능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사적 제182호)
경주 낭산(狼山)의 전체 면적 82만 7,848㎡에 포함되어 있는데 무덤의 지름은 23.6m, 높이는 6.8m이다
선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제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며,
진평왕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추대로 왕이 되었는데, 632년 왕이 되어 647년에 승하할 때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고, 특히 첨성대(瞻星臺)ㆍ
황룡사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으며, 김유신ㆍ김춘추 등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죽은 뒤 낭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비정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 위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은 도리천은 낭산의 산정이라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낭산의 신유림(神遊林) 정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고
호국신(護國神)인 사천왕을 모셨는데 이후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천왕이 있는 곳을 사왕천(四王天)이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도리천이라 한다.
이로써 낭산 정상이 도리천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30여년이 지난 문무왕 19년(679)에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佛經)에서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길이 30∼60㎝
크기의 자연석을 사용해 2, 3단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렬(石列)을 마련하였다
선덕여왕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는데 선덕여왕이 신뢰했던 비담(毗曇) 을 신라 최고의 벼슬인
상대등(上大等:신라의 중앙 관제에서 최고위 관직)에 앉혔으나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기치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의 정치를 문제삼아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덕여왕이 병세가 깊어 진덕여왕을
후계자(후사)로 삼자 이에 대항하여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도중인 정월 8일에 선덕여왕은 승하하였고, 이어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신라의 제28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비담의 난과 관련된 일화가 실려 있다.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이 이끄는 관군은 월성에 진을 쳤다. 어느 날 밤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이 부하들에게 "이는 틀림없이 여주(女主, 여왕을 낮추어 부른 말)가 패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김유신은 왕을 안심시킨 후 허수아비에 불을 붙인 후
연을 띄워 하늘로 올려 보낸 후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관군은 기세를 얻어 반란군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었다는 표석
신라의 왕릉으로 전하는 무덤 가운데 능의 주인공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열왕릉,
문무왕릉, 흥덕왕릉, 등인데 선덕여왕릉도 위의 기록들과 일치하고 능의 형식도
고신라말기의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대체로 인증을 받고 있다.
능은 봉분의 크기가 직경 24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하단에는 둘레돌(護石을
돌렸는데, 크고 작은 자연활석을 일정한 높이로 2~3단을 쌓고 사이 사이에 둘레돌 높이의
큰 편평석을 끼워 놓아 버팀석 역할을 하고 있다
능의 바로 앞에는 후대에 설치한 배례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고, 그 우측에 표석이 있다.
그리고 능 아래로 좀 떨어진 곳에는 1949년에 이 능을 수축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신라선덕왕릉봉수기념비(新羅善德王陵奉修記念碑)가 있다
이 수축때 왕릉이 졸렬하게 복원되어, 원래 별도의 둘레돌을 받친 버팀석이 그 사이 사이에
끼었다고 전하는데 능의 크기가 불규칙한 깬돌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며 치석 가공한 석재를
사용한 둘레돌과 버팀석으로 이행하기 이전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내부 구조는 돌방(石室)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왕릉의 둘레돌은 6세기초 이전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封土墳) 축조시기에는
자연석이나 깬돌을 이용한 돌담식이, 그 이후는 돌방무덤(石室墳)이 채용된 초기
(고신라 말기)에는 돌담식의 둘레돌에 버팀석을 둔 것이 통일신라 초기에는 장방형으로
치석한 석재를 기단과 갑석(甲石)을 마련하면서 쌓은 것이, 그 이후에는 면석(面石)과
탱석(撑石)을 갖추고 십이지신상을 새긴 둘레돌이 유행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이 능은 삼국시대 말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고고학적 현상으로 보아도
선덕여왕의 임을 알 수 있다...이와같은 양식의 둘레돌이 있는 것으로는 서악동의
태종무열왕릉과 그 뒤에 배열되어 있는왕릉급의 고분들이 있다
선덕여왕릉을 둘러보고 바로 아래에 있는 사천왕사지로 향한다
철길이 사찬왕사지로 내려가는 길을 끊어놔버려 무단으로 철길을 건넌다
잡초가 무성한 사천왕사지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가람배치도(일금당쌍탑) - 사진출처 네이버 기사
사천왕사지(慶州四天王寺址 :사적 제8호)
경주시 낭산 남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삼국유사』문호왕 법민조(文虎王 法敏條)에
기록된 건립 설화를 보면,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경주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675년(문무왕 15)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가사(假寺)를 사천왕사로 고쳐짓고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문종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이 유지된 것을
알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시 「유금오록(遊金鰲錄)」을 통해, 15세기 후반 경 이미 민가(民家)로
변해버렸음을 알 수 있고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습 조사된 바 있으나 전제적인 가람배치와 녹유소조상의 배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사천왕사지 안내판
사천왕사 금당지(金堂址)
현재 사역에는 동서방향으로 초석을 남긴 사방 3칸의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초석이 남아 있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어 쌍탑식(雙塔式) 가람(伽藍)배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금당지 북쪽에 동서방향으로
사방 3칸 규모의 작은 건물 기단(일명 단석지, 불교의식공간으로 추정)이 있다. 외곽에는 머리가 없어진
동서 귀부와 당간지주가 1기 있으며 이밖에 최근 발굴 조사로 확인된 회랑지·익랑지·석등지·귀부 비각·
북편배수로·석교가 있고, 일제가 가설한 철도로 파괴된 강당지가 일부 드러나 있다.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단은
전면에 2개, 좌우에 1개씩 설치되어 있다. 금당지 중심부에는 원형대석 사이에 방형대석이 놓여 있다.
단석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방형 건물지였으며 초석 중앙부에 지름 22㎝,
깊이 23㎝의 원형구멍이 있고, 그 주변에 약 55㎝ 크기의 방형을 이중으로 모각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 때까지는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 :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했던 밀교의식)을
행한 단석(檀石)이 남아 있었다 하나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절을 지은 곳인 신유림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선덕여왕이
그곳을 도리천(忉利天)이이 있는 곳이라 신성시하였다.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곳이 낭산의 남쪽이라 하였다. 선덕여왕이
죽은 지 30여년 만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되자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을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삼국통일 전의 신라의 사찰들은 모두 금당(金堂:사찰의 중심이 되는 법당) 앞에 1기의 3층탑
또는 5층탑을 세우는 일탑일가람제(一塔一伽藍制)를 따랐지만 삼국통일 이후에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제(雙塔一伽藍制)로 변모 되었다.
사천왕사는 삼국통일 이후에 발전된 형식을 갖춘 쌍탑가람제의 최초의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가람의 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탑.서탑이 있고 북방으로는 좌경루(左經樓), 우경루(右經樓)가 있어서
마치 본존불(本尊佛)이 안치된 금당을 중심으로 사천왕이 배치된 것과 같은 특이한 가람형태를 이루었다
동단석터
서단석터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첫번째 나오는 전각이 대부분 천왕문이다
이곳에 4분의 천왕(天王)을 모셨는데 모두 험상궂게 생겼으며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악귀 등
부처님 나라인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사천왕인데 불교에서 말하기를 28개 범천(梵天)이 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가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시왕천이며 , 2번째가 제석천이 관장하는 도리천이다.
사천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기술(記述)되어 있는데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명랑법사가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기위해 낭산 남쪽의 신유림에창건하였다고
하며당나라 군이 쳐들어 오자 임시 건물을 짓고 명랑법사는 중국에서 배운 밀교인 문두루비법으로
바람을 불게하고, 파도를 일으켜 당나라 배를 모두 침몰 시켰다고 한다
이는 범어(梵語)로 문두루는 무드라(mudry)의 음사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된다
2번에 걸친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건물을 다시 고쳐짓고 사천왕사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던 사천왕사는 대사찰의 사격(寺格)을 무색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폐허로 남아있던 사천왕사지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에
처음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1922년, 1928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2006년에 들어와 서탑지의 다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사천왕사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로
탑의 기단부와 하부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반파로 된 채 남아있던 녹유사천왕상전이
기단석에서 발견되어 사천왕상의 배치등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발굴되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당시 신라 최고의 조각승인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녹유사천왕상눈은 부릅뜨고, 귀는 축 늘어졌으며 익살스러운 치아와 생동감 넘치는
인체 표현 등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갑옷과 테두리에 장식된 꽃무늬 등 모든거 하나까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통일신라 불교 예술의 극치를 보는거 같다
서탑지 출토 녹유사천왕상전(국립 경주박물관 소장)녹유사천왕상(綠釉四天王像)이다. 사천왕사 터 동·서 두 목탑 기단 유적에서 여러 점이 발굴된 녹유사천왕상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인 사천왕(四天王)을 조각한 벽돌로, 푸른색이 도는 유약을 바른 것이다
녹유사천왕상전(綠釉四天王像塼)
윗 부분이 파현 형태로 수습한 녹유전이며 아랫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중인 녹유전 유물의 사진이다.
이것이 사천왕이 아니라 신중(神衆)을 표현했다는 등의 이설도 많다.
사천왕사지 목탑터(木塔址)
사천왕사 목탑지는 1금당 2목탑의 양식을 따랐으며 동.서 2개의 목탑으로 금당지 앞에 좌.우로 세워졌다.
동탑은 1.3m 높이로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3칸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으며목탑의 받침돌인 초석은 각각
정사각형이며 크기는 약 50cm 정도이며, 초석 가운데 심초석은 약 118cm 크기의 네모 반듯한 모양이며
그 가운데 한 변의 길이가 30cm에 7cm 깊이로 파인 사리공이 설치되어 있다.
서탑지 또한 초석과 심초석이 동탑과 같은 형태이다
사천왕사 서탑지
탑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방형으로 중앙에 방형의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이 있다.
기단은 가구식전석축기단으로 사방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고, 지대석 중간 중간에 얕은 장방형의 홈을 파고 탱주를 세웠다.
기단 모서리에 사방 50㎝되는 방형의 얕은 단을 만들고 그 중앙에 홈을 파서 우주를 고정시켰다.
우주와 탱주 옆에는 넝쿨무늬가 있는 장방형전을 쌓아올리고 이 전으로 구획된 면에 녹유소조상을 부착하였다.
사천왕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 주수완 박사님
사천왕(四天王)은 불교에서 사바세계의 중심으로 보고있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그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의 설화에서 서라벌 가운데 산인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사천왕사지에서 바라본 낭산(狼山)의 모습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한 낭산은 높이가 108m밖에 안되지만 경주의 지형 조건이
문화 형상에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내산과 외산으로 나눠지는 경주의 산악 지형은
국토 수호의 방벽 역할을 했으며특히, 신라 왕궁과도 가까이 있었던 낭산은 여러 의미에서
서라벌의 진산 역할을 했다.
실제 삼사(三祀) 가운데 대사(大祀)를 받들었던 산이 낭산이었던 점에서도이 산의
중요성을 알고도 남음이며 낭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크고 작은 유적들도 모두 산악신앙과
연관해 자리를 잡았다...신라의 진호국가 도량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천왕사가 낭산
남쪽에 있었으며 왕실 기복을 위한 원찰인 황복사는 이 산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낭산을 신앙적으로 숭상했다는 증거는 낭산의 지명 유래에서 잘 나타나 있다.
구마라집이 한역한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에는 미륵이 중생, 제자들과
함께 도래해 오르는 산이 낭적산(狼跡山)이다
이곳에서 미륵불이 육만억년 동안 세상에 머물며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법안을
얻게 되는데 이렇듯 낭산은 신라의 건국 사상과 이념이 불교와 매우 밀접하게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는 산이 낭산이다
서단석지(西壇席址)
금당지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0m 동.서로 각각 20.6m 떠렁진 곳에 정면3칸, 측면3칸
방형 구조의 건물지로 동.서 단석지가 있는데, 초석의 간격은 60cm로 매우 좁다.
초석 중앙부에는 지름 22cm, 깊이 23cm의 원형 구멍이 있고, 원공 주변에는 약 55cm의
방형 모각(模刻)을 이중으로 하였고, 이 모각은 다시 초석의 네 귀퉁이로 연결된다
초석의 측면에는 인접 초석과 이어진 듯한 고막의 형태 부분이 남아 있는데 폭이 약30cm이다
1929년에 사천왕사지를 조사한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海治郞)는 이 건물을 종루와 경루로
추정하였고, 장충식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이 건물을 단석(壇席)으로 보고 있다
주수완 박사님은 이 건물을 밀교 주술을 위한 단을 세웠던 단석으로 보고 있으며, 초석 구멍에
십이지를 새긴 나무기둥을 12개가 한 조를 이루어 모두 2조를 동.서로 배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문두루비법을 통한 호국 사찰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탑지의 모습
7번 국도변에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우리는 중생사와 선덕여왕릉을 들려서 걸어 오느라 거꾸로 내려온 셈이다
도로 옆에는 안내판과 함께 사천왕사 당간지주가 보인다
사천왕사 당간지주는 7번 국도옆에 서 있는데 원래 자리는 아니고 절터 옆 민가에
있던 것을 1928년에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하며 좌측의 지주는간공과 간공 사이에
금이 가 있는데 다시 접착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단과 간대석은 남아 있지 않고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지주의 너비와 높이를 참고하면 전체적으로 보아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주의 내면은 평평하게 하였고, 바깥쪽 3면은 위로 올라가면서 비스듬하게 줄어들면서
하부에 1단의 층을 두었는데 이는 상부보다 하부가 더 넓고튼튼하게 하여 더 견고하게
하면서 美的 감각을 고려한 목적이 가미된 결과인 듯 하다
지주의 각부분은 고르게 잘 다듬었는데모서리 부분은 얇게 깍아서 각을 죽였다.
꼭대기 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나가면서 원형을 부드럽게 하였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간공을 3개를 뚫었으며꼭대기는 간구를 내지 않았다
3개의 간공은 약 60cm 간격으로 뚫려 있는데 위와 아래는 사각형으로 하였고,
중간에는 원형으로 변화를 주었으며간공은 모두 지주를 간통하고 있다.
사천왕사지가 674년에 급하게 착공하여 679년에 완공 되었다고 하니 이 당간지주도
완공 시점이 그때이거나 그 이후일 가능성이 많은데 건립 시기는 대략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사천왕사지 안내판
7번 국도옆 풀섶에는 목이 잘린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가 숨어 있다
동귀부(東龜趺)
동쪽 귀부와 서쪽 귀부가 있다고 하며, 동쪽 귀부와 서쪽 귀부는 쌍둥이처러 닮았다고 한다
등 주변은 당초문(唐草紋)을 두르고 안에는 육각형의 거북의 등껍질을 새겼다
비좌 아래에는 복련(覆蓮: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무늬)을 새겼고, 위에는 사각기둥을 낮게
올린 뒤에 홈을 파서 비를 올렸다. 네 발은 발톱까지 날카로게 묘사되어 있어서 꼬리와 함께
사실적이어서 등 부분의 조각과 어울려 당시의 우수한 조각 기법을 보여준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는 동쪽 귀부에 사천왕사사적비가 있었고, 서쪽 귀부에 문무왕릉비가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문무왕릉비편이 발견된 것은 1790년대 농부가 발을 갈다 가 나온 큰 파편
2개가 처음이었는데이것이 당시 경주부윤 이계 홍양호에 의해서 1796년(정조 20년)알려지게 되었다
발견 장소는 선덕여왕릉 아래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1800년대 초기에 비편 2조각을 발견하였는데 그 비편에 비좌를 꽂아보니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 비편은 탁본되어 청나라에 보내졌다고 한다
이 귀부 부근에서 초석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비각이 있었다는 뜻인데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는
동.서 귀부 사이에 협괘철로가 부설되었다고 하며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서쪽 귀부 문무왕릉비는 북쪽으로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져 있는 능지탑을 보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문무왕은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안에 수장하라고 하였고, 그 수중릉이 대왕암이므로 왕릉비는 이곳에 세울수도 있다.
비문은 당시 국학소경(國學小卿)으로 있던 인물이 지었고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쓴 것으로 나와서
건립연도는 비문중의 국학소경에 비유하여 설치된 682년(신문왕 2) 6월 이후 얼마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문무왕의 원찰(願刹)인 감은사(感恩寺)가 완공된 얼마 안되는 시점이다
사천왕사지를 둘러보고 7번 국도 건너편에 있는 망덕사지로 향한다
풀섶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덕사지의 모습
망덕사지로 가는 길은 보이질 않는다
논을 가로질러 무대포로 풀섶을 들어서는 꽃무릇이 폐사찰 망덕사지의 현재를 대변하는 듯 하다
사적 제7호로 등록 되었다는 경주망덕사지(慶州望德寺址) 표석
망덕사지 안내판
망덕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5) 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외침을 막기위해 신라에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는데 당나라에게는 황제를 위한 절이라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당에서는 예부시랑(樂鵬龜)를 보내어 사천왕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신라 조정은 사천왕사를 보여서는 안 되리라 여겨 사천왕사의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그곳으로 당의 사신을 인도하였다...그러나 사신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하여 새로운 절에
끝내 들어가지 않아 신라의 사신들이 금을 주었다
그 후 사신은 돌아가서 사천왕사는 황제의 만수(萬壽)를 빌고 있는 절이라고 거짓 보고하였다.
이후 새로 지은 절이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
현재 망덕사지에는 13층의 목탑지와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익랑(翼廊)터 등이 남아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절 배치를 보이고 있다.
2013년 정비를 위하여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강당터를 추가로 확인하였으며
고려시대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음이 밝혀졌다.
망덕사지 금당터(金堂址)
망덕사지(望德寺址)는 배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 4년(684)
여름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천왕사지 건너편에 있는데 당군이 침입할 때 사천왕사를 짓고
비법으로 물리치자 당에서는 그 사실을 알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했다.
사천왕사를 보이지 않고 급작히 새로 망덕사를 지어 속였다. 당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우리는 절을 지어 당황제 만수(萬壽)를 빌었다'라는 거짓 구실로 당사를 속여 조국의 위난을 극복한
신라인의 지혜와 호국의 얼이 담긴 옛터이며 당간지주, 당탑지, 초석 등이 남아 있다. 사역은 24,261㎡(7,352평)이다.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5) 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외침을 막기 위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당(唐)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당황제 고종을 위한 절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당에서 예부시랑 악붕구(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사천왕사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였다.
신라 조정이 당의 사신을 망덕사로 인도하자, 악붕귀는 “부시사천왕사내망덕요산지사(不是四天王寺乃望德遙山之寺)”
라고 하며 망덕사지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 뒤 효소왕 1년(692)에 절을 정식으로 짓고 낙성재를 베풀었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이 탑이 흔들렸는데 그 해 중구에서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놨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실(唐室)을 위하여 지은 절이니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라 하였다.
당시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 등과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또 이 절에는 효소왕이 재를 베풀 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알아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공양한 뒤 진신석가로부터 조롱을 당한 설화와, 이 절에서 육백부 『반야경』을 사경(寫經)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선율(善律)이 명부(冥府)에 갔다가 경의 완성을 위하여 환생한 설화 등이 전하고
있으나 그 뒤의 사찰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이 망덕사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차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13층 목탑지와 금당터·강당터·중문터·회랑터·익랑터 등이 남아 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절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 밖에 남쪽에는 계단터, 서남쪽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동탑지(東塔址)
이곳에는 동탑지(東塔址)와 서탑지(西塔址)가 남아 있어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동탑지 심초석
잡초밭을 헤매며 당간지주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서탑지의 심초석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표시석
당간은 옛날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인데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 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慶州望德寺址幢竿支柱:보물 제69호)
경주시 배반동 망덕사 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 2.44m로 낭산(狼山)의 남쪽에 있는 망덕사 터의
서쪽에 있으며, 현재 있는 곳이 원래의 자리이며 두 지주는 65㎝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겉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는데, 바깥면에만 양변의 모서리를 윗부분에서 아래로 1.57m 정도까지 깎은
장식적인 의장(意匠)이 보이고, 정상 부분은 안쪽 옆면의 윗부분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반원형의
선을 그리고, 바깥으로 6㎝ 쯤 깎여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윗부분 한 군데만 두었는데, 안쪽면 윗부분에 길게 네모난 간구(杆溝)를 파서
간을 설치하였고, 현재 지면이 깎여서 두 지주의 아랫부분은 70㎝ 정도 노출되어 받침 부분의 적심(積心)이
드러나 있는데, 주변에 아무런 석재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원래의 간대나 받침 부분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이 당간지주는 비록 각 면에 조각이 없지만, 조성 양식과 수법은 그리 발달되지 않았던 초기의
모습을 보이며,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망덕사는 685년(신문왕 5)경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지주와 그용도인 당간을 고정하는 방법으로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기본적인 방법은 돌로 만든 지주(支柱) 사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대석(竿臺石)을 마련하고 원좌(원공밖의 테두리)와 원공(당간의
아랫부분을 놓던 자리)을 만들어 그 위에 당간을 세우고 당간의 아랫부분 좌.우에 있는
돌로 만든 지주의 안쪽 면에 간공(杆孔)을 만들거나 돌로 만든 지주 윗 부분에 간구(竿構)를
만들어 높은 당간을 고정하였다.
당간의 재료들은 나무,돌, 철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대부분 남아 있는 것은
돌로 만들어진 석당간과 철(鐵)로 만든 철당간만 보인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주들은쌍으로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그 형태가 대칭으로
건립되었는데, 이후 도괴(倒壞:무너져 붕괴됨)되거나 하는 이유로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하나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당간지주들도 볼 수가 있고, 초기 형태와 다른 모습의 조잡한
형태도 간간히 보인다...망덕사지 당간지주는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하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당간지주 옆에 나뒹굴고 있는 초석의 모습
망덕사지 당간지주에서 바라본 사천왕사지와 낭산의 모습
오늘의 성지순례를 끝내고 논두렁을 따라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오늘은 실체가 있는 분황사와 중생사도 순례했지만 실체가 없는 폐사지(廢寺地)
순례에서 많은 지식을 얻어 가는데 폐사지에 관한 순례도 상당히 흥미롭다
정말 좋은 기회이고 주박사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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