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가람 배치도
고창 선운사는 봄 동백, 한여름 녹음, 초가을 꽃무릇, 가을 단풍 그리고 겨울 설경 등 언제나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선운산이지만 정상으로 가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호남의 내금강이라 할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풍요로운 자연과 함께 계절마다 새로움이 가득하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에서는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라고,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는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라고 읊고 있다.
또한 대중가수 송창식의 「선운사」의 노랫말에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예요…”라며, 선연한 붉은 핏빛으로
피었다가 처연하게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며 엇갈리는 우리들의 삶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선운산에 동백이 가장 많다. 선운사 뒤편에 5백 년 수령의 6m 높이 3천 그루 이상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동백나무로 짙푸른 녹색의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단풍나무가 무성한 선운산은 연초록의 신록과 여름의 녹음 그리고 가을의 단풍이 짙다.
초가을 선홍색의 꽃무릇은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이라는
말처럼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듯 하는데 초가을 뙤약볕이 쏟아지는 때에 선홍빛 카펫을 보는
듯한 선운사의 9월 풍광은 아련한 그리움 속으로 깃든다.
박동진의 「시월 선운사」는
“억겁 기다림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이별 끝내 숙명으로 안았다는,/
동무들 다 떨구고 개울가 돌 틈/
빼초롬한/꽃무릇 한 송이/너 보자고, 너 보자고 도솔천…”
이라고 꽃무릇을 통한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이곳은 시인의 노래만큼 시정 넘치는 곳이다. 여기에 유서 깊은 사찰 선운사가 있다.
천오백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전통문화가 품어내는 향기와 풍요로운 자연과 정서가 담겨 있는
사색과 치유의 공간으로 언제나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선운사는 평지사찰로서 호남지역에서도 오랜 역사를 가진 명찰이다. 선운(禪雲)은 참선 수행자가 구름처럼 많다,
아니 참선의 관문을 뛰어넘어 속진을 벗어난 이가 구름처럼 많다는 것이다.
수행도량으로 이름 높은 선운사는 오랫동안의 역사에서 쓰러지고 다시 세우는 중창을 반복하면서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성종 때 행호幸浩 스님이 중창하였다가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불타고 다시 중창을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넓은 사역에 여러 전각의 배치는 조화롭다. 그 중심에는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 맞배지붕에는 단순하고
장중함이 깃들어 있으며, 대웅전이나 만세루 등의 여러 전각을 보면 형태나 공간, 개별적인 기둥과 보
그리고 서까래 등의 목재 또한 정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호방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도 일주문을 통과하여 절 마당 입구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일주문은 구경도 못하고 올라간다
이곳에는 법보신문 전북지사장과 직원까지 나와서 지극정성으로 맞이한다
선운사 절마당 앞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 절집으로 들어선다
선운사 마당에서 인증샷
선운사 종무소
선운사 만세루(禪雲寺萬歲樓: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로 정면 9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건물로 길이 27.0m,
너비 11.8m인 석조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강당(講堂) 건물로 기둥높이는 3.9m이며, 귀기둥은
특히 비대한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안쪽 기둥들도 둥글게 다듬긴 하였으나 거의 자연목 그대로 이용하였다. 지상 높이 0.48m에 하방(下枋)을
지르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을 끼우고 기둥머리를 얹은 다음 첨차를 끼워 장여[長舌]와 대들보를 동시에 받게 하였다.
대들보는 중앙 고주(高柱)와 양 평주(平柱) 사이에 각각 걸려 있으며 원목의 구부러진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을 세우고 중도리와 종량을 받쳤으며, 종량에는 키가 큰 대공(臺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쳤다.
한편, 종량 중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특이한 기법도 발휘되어 있어 주목된다.
앞면에는 판장문을 달고 양 옆면 1칸에 2쪽 판문을 달았으며, 대웅전쪽은 완전히 개방하였다.
전체적으로 원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여 구조의 단순성과 형태의 장엄함을 얻고 있으나 내부공간의
처리는 조형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인상을 준다
만세루는 긴 장방형이고 ‘누(樓)’라는 이름은 붙어 있으나, 낮은 단층 건물로 자연스러운 부재가 많이
사용되어 해학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는데 선운사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주로 강당이나 법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기둥의 형태를 비롯해 상부 가구 부재도 천연스럽게 휜 것이 많으며 기둥도 위아래를 다른 부재로 이어 사용한 것이 적지 않다.
어칸 대들보 위쪽 종보의 경우에는 양측 모두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러한 부재 사용은 목재를 구하기 어려운 조선 후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 만세루는 목재가 귀한 시대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건축 기법을 활용해 세운 것이라 여겨진다.
가운데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로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으며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되어 있는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앞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여 있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강당 역할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다도 체험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974년 9월 27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세루 지붕보의 모습
만세루 추춧돌
만세루와 멋진 배롱나무의 모습
선운사 천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2층 누각인데 아래층에는 사천왕상이 있으며
2층에는 범종과 법고가 있다. 전면에는 선운사 천왕문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버스를 타고
마당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걸 놓치는 憂를 범한다
선운사 천왕문(한국관광공사 사진 인용)
선운사 천왕문 편액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서방광목천왕
서방광목천왕 발밑에 깔려있는 탐관오리
남방증장천왕
동방지국천왕
지국천왕 밑에 깔려있는 익살스런 악귀의 모습
북방다문천왕
선운사 마당의 명물 배롱나무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대웅전 가는길에 연등이 많이 보인다
절집에서는 초파일 다음으로 우란분절을 치는데 오늘 연등 수입이 많아 많아야 하는데
명색이 교구본사라는 고운사에도 불자들이 그리많이 안 보이니 주지 스님 근심이 크시겠다
대웅전 가는 길에서 만난 괘불대
선운사(禪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이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린 날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감동하여 절을 세웠다는 설과, 그보다 2년 늦은 55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이 중수하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행호선사 극유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는데, 1613년(광해군 5)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원준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여 1619년 완성했으며, 그뒤 근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보물 제290호)·영산전·명부전·만세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산신각·천왕문·대방·요사 등이 있다.
절에 전하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동불암마애불상(보물 제1200호)·
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과
중종과 부도 및 탑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밖에 다수의 조상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부속암자는 현재 4곳만 남아 있지만 19세기 전반에는 50여 개나 되었으며, 절 주위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 전망이 뛰어난 만월대,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편액
현판의 글씨는 너무 굵지도 가늘지도 않아 중용을 지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글씨 또한 호남의 大刹에서 많이 만나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조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올 때 그의 무덤을 찾아가 잔을 올리고
묘비명을 써주었다는 명필로 동국진체의 완성한 자로서도 유명한 분이다
그는 나주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서예의 체계적인 이론서인
서결을 완성하고 한국적인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인물이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멋진 배롱나무
대웅보전 측면의 모습
선운사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으로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으며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내부는 통칸이나 불벽(佛壁)을 1줄 세워 그 안에 불단을 설치했으며, 불단 뒤쪽으로 고주 3개를 세워 여기에
대량(大樑)과 종량(宗樑)을 짜맞추었다. 내부의 천장은 내진(內陳)의 어간만 우물반자이며 나머지는 평반자로 하고
외진에는 빗반자를 설치하였으며 내진의 우물반자와 평반자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빗반자에는 구획을 하여
주악상(奏樂像)을 그려놓았으며 평반자 중 툇간에는 구름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용을 생동감 있게 그려놓았다.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병화를 입어 파괴된 후 1614년(광해군 6)에 재건되었음이 사적기를 통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있는 모습은 평야지대의 건물 특색을 잘 보여주는데, 다포계이면서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나
내부의 가구재가 간단한 것이 특색이며, 공포의 구성기법은 17세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교구본사 치고는 아주 작은 소박한 절집처럼 보인다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이 보이는데 이 탑은 원래 모습이 아닌 짜집기를 한 탑이다
보가 생긴 그대로 사용하여 훨씬 자연미가 돋보이는 느낌이다
관음전쪽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선운사 대웅보전은 간결한 맞배지붕인데 속을 가감없이 들어내 보인것인 더욱 더 정감이 간다
맞배지붕의 형태가 사람(人) 형상을 하고 있는게 특이하다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보물 제1752호)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본존인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약사불좌상과 아미타불좌상이 있으며 본존의 높이는 3m가 넘고
약사불과 아미타불의 높이는 2.65m에 이르는 대형 불상으로 세 불상 모두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얼굴 표현,
신체 비례, 양감 없는 평면성 등은 세 불상의 공통점이지만 손 모습이나 착의법 등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신중탱화
선운사 대웅보전 백의관음도
선운가 대웅보전 뒷쪽으로 가면 바닥에는 엄청난 괘불괘가 있고 벽면에 백의관음도가 있다.
대웅보전은 정유재란으로 거의 소실되었는데 광해군 5년(1613년)3년에 걸쳐 재건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단독 관음도가 그려지는데 후불벽 이면 3칸중 어칸에는 관음도가 좌,우에 신장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선운사 삼세불 벽화
선운사 대웅보전 삼신삼세불 벽화는 1840년(헌종 6) 화승인 원담(圓潭)과 내원(乃圓),
익찬(益贊), 도순(道詢) 등이 제작한 것으로 토벽에 그려져 있는데「비로자나불 벽화」와 「아미타불 벽화」,
「약사불 벽화」 등 세 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신불(三身佛)인 비로차나불(毘盧遮那佛)과 삼세불(三世佛)인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불(藥師佛)을 결합한 삼신삼세불화(三身三世佛畵)의 형식을 보여 준다.
1476년(성종 7)에 제작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함께 조선 시대 후불 벽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선운사 대웅보전 삼불벽화, 또는 선운사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벽화로도 불린다
폭의 벽화는 중앙에 본존불을 크게 그리고 좌우에 보살과 제자 또는 사천왕상 등을 묘사한 간단한 배치를 보여 준다.
「비로자나불 벽화」는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활짝 핀 연화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좌우에 시립하였고, 그 위로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 사천왕(四天王)이 배치되어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각기 줄기가 긴 연화를 잡고 있고
원형의 두광에 키 모양의 신광(身光)을 진 특이한 광배 형태를 하고 있다. 구름에 싸여 상반신만 보이는 사천왕은
비파·창·탑 등의 지물을 들었고, 모두 화려한 보관을 썼다.
「비로자나불 벽화」의 왼쪽 벽면에 그려진 「약사불 벽화」는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와
협시보살인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및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이 2단으로 묘사되고,
그 뒤로 구름 속에 싸인 4구의 나한상이 그려져 있다. 약사불은 2중으로 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고,
머리는 나발(螺髮)로 육계(肉髻)와 구별하지 않고 중앙 계주(髻珠)만 장식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대고 있으며, 왼손은 임지와 검지를 맞대고 결가부좌한 발 위에 놓아 약합을 들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합장을 하고 서 있으며 범천과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천의(天衣)의
옷 주름이 직선적이고 옷자락 끝은 뾰족하게 뻗쳐 있어서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비로자나불 벽화」의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불 벽화」는 아미타불과 백의(白衣)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비롯한 4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2구의 팔부중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가슴 부근으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서 엄지와 검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였는데, 머리 정상부의 나발이 조금 뾰족한 것을 제외하고는 약사불과 동일한
형태를 보여 주는데 좌우에는 백의를 입고 두 손을 앞에 교차하여 정병(淨甁)을 든 관음보살과 연꽃을 든
대세지보살이 협시하였으며, 뒤로는 범천과 제석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사자관과 코끼리관을 쓴
팔부중(八部衆) 등이 배치되었다.
세 벽화 모두 구도는 본존불이 화면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졌으며, 좌우 각각 4구씩 8구의
권속들만 배치된 간단한 9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권속들은 3단으로 보살과 나한, 제자 등이 본존을
에워싸는 구도를 보여 주며 얼굴은 대체로 둥근 편이며, 상체는 사각형에 가깝지만 무릎이 높고 큼직하여
전체적으로 장대한 신체라 할 수 있다. 채색은 적갈색과 연한 녹색, 흰색을 주로 사용했으며, 채운(彩雲)은
흰색과 연녹색을 칠해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느낌의 색조를 보여 주고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삼신삼세불 벽화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두 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대표적인 후불 벽화로, 세 폭의 삼신삼세불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유일한 벽화이다.
아울러 18세기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이었던 의겸(義謙)을 계승한 내원과 익찬 등이 함께 조성한 작품으로서,
19세기 호남 지역 불화 양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사 대웅보전 천정의 모습
선운사 대웅보전 천정장엄에서 가장 특징적인 대목은 유례없는 거대한 용의 장엄세계이다
천정의 구조는 가장자리가 빗반자이고, 가운데 부분은 우물천정이다
검단스님의 선운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선운사 절터 자리는 원래 용이 살던 연못이었는데 못을 메워 절을 이었다.
마치 연기설화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빗반자와 판벽천정 아홉칸마다 거대한 적룡, 황룡, 백룡,흑룡 등 다양한 색채와
형상을 풀어 하늘의 천정이 가히 천룡(天龍)의 세계이다
용은 만유의 생명력과 변화의 근원인 물을 상징하고, 우주에 가득한 기(氣)에너지이며, 신성을 지키는 수호의 상징이다
사찰장엄에서 용의 표현은 목조건물과는 절대 상극인 화기를 다스리고, 종교적인 신성을 결계하고 호의하는 수호력의
강력한 부적이자 , 내적의지의 힘이다
기도하는 스님이 계셔서 상당히 조심스럽다... 조용히 법당을 빠져 나온다
선운사 육층석탑 (禪雲寺 六層石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며 높이 13m의 크기에 화강석 재질의
다층탑으로 대부분 홀수의 탑이 보편적인데 특이하게 그 예가 없는 6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의 기단에 6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기단의 네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몸돌은 1개로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으며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5
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양끝에서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한 멋이 흐르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몸돌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지붕돌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비례감이
조금 떨어지나 옛 백제지역의 탑으로서 지붕돌 등에서 백제탑 양식이 보이고 있어 지방적인 특색이
잘 담겨진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선운사 동백(천연기념물 184호)
대웅전 뒷쪽 산기슭에 동백나무 숲 군락지가 있는데 백제 위덕왕(577년) 선운사가 세워진 한참후
조성된 숲으로 동백의 평균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나무의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cm의 가느다란 띠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애안이나 섬에서 자생하고 있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이 동백나무 숲은 아름다운 사찰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의 문화적 가치와 동백나무 숲으로의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 안에 서서
엉엉 울었다.
선운사 영산전(禪雲寺 靈山殿)
대웅전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본래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었으며 이후
조선 성종5년(1471년)에 2층 전각으로 중건하였다가 숙종39년(1713년)에 단층으로 개조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다시 두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선운사 영산전 목조삼존불상(禪雲寺 靈山殿木造三尊佛像: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조선시대 순조21년(1821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표면에 금칠을 한 석가여래좌상과
아난, 가섭 협시보살입상으로 여래좌상의 높이는 276㎝, 보살입상의 높이는 각각 240㎝의 크기이다.
16각의 난간을 두른 나무로 된 연꽃무늬 대좌에 모셔져 있는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신체에 비하여
머리가 큰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우며 목 아래에는 3개의 주름이 좁게 표현되었고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옷주름은 간략화된 모습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으며 삼존불상 좌우로는 목조 16나한상이 있는데 이들 나한상은 삼존불상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79~85㎝ 높이의 크기에 채색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평범한 불상 양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좌우의 보살입상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며 또한
삼존불 조성에 향나무를 쓰는 등 재료 사용 측면에서 흔치 않는 경우인데 목조이기 때문에 조금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이다.
영산전의 석가여래좌상
선운사 / 송창식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예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예요
나를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프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지는 그곳 말이예요
선운사 조사전(祖師殿)
전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형식의 건물에 선운사 창건주인 검단스님을 비롯하여
의운, 설파, 백파, 경담, 환응, 석전스님등 7분의 진영도 함께 봉안됐다
역대 조사들의 진영
영산전을 참배하고 팔상전으로 향한다
선운사 팔상전(禪雲寺 八相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석가모니의
행적 가운데 극적인 여덟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팔상전 내부의 모습
이곳에 1706년중건때 함께 봉안한 팔상탱화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현재는 1900년대에 새로 조성된 팔상탱화중에 6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석가여래 좌상도는 근래에 조성된 것이며 본존불 뒷쪽 후불 벽화는 1901년에 조성됐다.
선운사 산신당(禪雲寺 山神堂).
영산전 뒤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 목조건물로
광해군6년(1614년)에 조성된 이후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체적으로 산신각(山神閣)이라 부르는데 선운사에는 산신당이라 부르는게 특이하다
산신당은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토착 신앙이 불교가 도입되면서 서로 융합되어
새롭게 산신신앙으로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신앙형태이다
산신각에서 바라본 선운사의 모습
구시인가?
선운사 명부전(禪雲寺 冥府殿).
저승의 유명계를 나타내는 전각이며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한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초익공
맞배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전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고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을 설치하고 하단은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명부전 내부의 모습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관음전으로 향한다
선운사 관음전(禪雲寺 觀音殿).
대웅보전의 뒷편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다
관음전 편액
천수천안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선운사 관음전은 우리나라 33관음성지중에 하나이다
좋은 말인데 실천이 잘 안되니 어쩌죠
다시한번 대웅보전을 향해서 예를 올리고...
선운사 강원
범종각
목어와 범종
목어(木漁) 나무로 고기 모양을 만들어 걸어 두고 쳐서 소리를 내는 불교의식 용구의 하나로 범종(梵鐘)·법고(法鼓)·
운판(雲板) 등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에 속하며, 목어고(木魚鼓)·어고(魚鼓)·어판(魚板)이라고도 불린다
중국에서 유래된 이 법구는 고기의 배 부분을 비워 나무막대기로 고기 배의 양쪽 벽을 쳐서 소리를 내게 하였다.
고기 모양을 취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한다.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의하면 물고기는 언제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그 형체를 취하여 나무에 조각하고 침으로써 수행자의 잠을 쫓고 혼미를 경책했다고 하였다.
또, 사찰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옛날 한 승려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옳지 못한 행동을 하다가 죽었다.
그 승려는 곧바로 물고기의 과보를 받았는데, 등에는 나무가 한 그루 나서 풍랑이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하곤 하였다. 마침 그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물고기로 화현한 제자가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물고기를 해탈하게 하였다.
물고기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등에 있는 나무를 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고 한다
이 불구는 소리를 내어 대중을 모으도록 하는 데 사용되었다.
『백장청규』에 의하면 식사 때는 길게 두 번을 쳐서 알렸고, 대중을 모두 모을 때는 한 번 길게 쳐서 알렸다.
따라서 처음에는 식당이나 창고 등에 걸어두고 오로지 대중을 모으는 데만 사용되었으나, 뒤에 독경을 하거나
기타 의식에 사용하게 되었으며 현재 사찰에서는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큰 행사가 있을 때 범종 등과 함께
목어를 치게 되는데, 이는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형태도 처음은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차 용머리에 고기의 몸을 취한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변형되어 갔으며, 입 사이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태를 취한 것도 있다
운판(雲板)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구름 모양의 넓은 청동판으로서 두들겨 청아한 소리를 내게 하는 일종의 악기
불전사물(佛前四物)의 하나인데 인도에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미상이나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종(禪宗)에서는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아 두고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기구로 사용되었다.
재료는 주로 청동을 사용하며 형상이 구름 모양을 하였으므로 운판이라 하고, 죽이나 밥을 끓일 때에
세 번 치므로 화판(火板)이라고도 하였으며, 끼니때에 길게 치므로 장판(長板)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끼니때에 치기보다는 아침·저녁 예불 때에 범종·법고·목어와 함께 치는 의식용구로 되었다.
이들은 모두 중생교화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운판은 유독 허공에 날아다니는 짐승들을 위하여 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운사 범종(梵鐘: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31호)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으로 높이 103cm, 입 지름 93cm이고,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29cm이며,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이 없는 대신, 종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돌렸다. 선 안쪽으로 글씨를 새겼는데, 조선 순조 18년(1818)에 다시 만든 것임을 알려준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다. 윗부분에는 꽃과 덩굴로
장식한 4개의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안에 범자를 하나씩 새겨 넣었으며 3줄의 선 아래에는 42인의 이름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고, 그 아래로 2줄의 선을 둘렀다.
이 종은 신라와 고려 종에서 보이는 유곽과 유두를 가지고 있지만, 용통이 없고 2마리 용으로 만든 용뉴, 몸체
가운데와 종 입구 위에 두른 횡선이 있는 조선 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종신은 세 개 부분으로서, 융권(隆圈)과 함께 길이 19㎝의 구연상(口緣上)에 돌대(突帶) 2부분이 있다.
유곽(乳廓) 네 개는 주출(鑄出)되었고, 유곽 사이에는 높이 약 21.5㎝의 보살입상이 양각돼 있다.
유곽과 보살입상 윗부분에는 작은 원 여덟 개가 있으며, 원 안에는 ‘범(梵)’자가 1자씩 양각돼 있다.
용뉴는 쌍용으로, 용의 몸통에는 여러 개의 청동 비늘이 장식돼 있다. 종의 음관(音管)은 없지만,
종의 공명(共鳴)을 위해 종신 맨 윗부분에 둥근 구멍 한 개를 뚫었다
종신에 양각된 연화당초문대(蓮花唐草文帶)와 보살입상의 섬세한 처리가 일품이며 도편수 권동삼과
부편수 이명환이 개주(改鑄)하였으며, 이때 선운사 주지 처영(處英)이 주조를 감독하였다.
처음 주조된 해는 1788년(정조 12)이라고 한다. 참당암 동종과 유사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법고(法鼓)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북으로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줄여서 북(鼓)이라고 한다.
주로 잘 건조된 나무로써 북의 몸통을 구성하고, 쳐서 소리를 내는 양면은 소의 가죽을 사용한다.
이때 북의 가죽은 암소와 수소의 가죽을 각기 양면에 부착하여야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한다.
큰 것은 지름이 거의 2m 가까운 것에서부터 30㎝ 내외의 소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타악기의 일종이지만 불교의식에 사용되므로 법고라고 한다.
불경에는 북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당시에 이미 북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그 형태나 크기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여러 가지 용도에 북이 활용되었다.
특히, 불경에는 여러 종류의 북을 열거하고 있으나 주로 그 용도는 대중에게 크고 작은 일이 있음을
알리거나 일종의 신호로도 사용되었으며 의식에 사용되는 경우 범패(梵唄)의 장단에 맞추어 치게 되며,
범종각의 사물(四物) 중의 하나인 북은 아침·저녁 예불 때에 치게 된다.
이때 북을 치는 이유는 축생의 부류를 제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불경에는 대지(大地)가 18가지 모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천고(天鼓)가 스스로 울린다고 하여 하늘북을 말하였고,
정법(正法)의 북을 쳐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깨우치게 한다고 하여 추상적이고 상징적 용구로서 북을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하나인 승무에는 법고가 필수적으로 대두되어 의식용구로서의 법고가 불교예술에 끼친
영향도 크다...북의 몸체 부분에는 보통 용을 그리기도 하고 두드리는 부분에는 만(卍)자를 태극모양으로 둥글게
그려 북을 장엄하기도 한다.
법고는 우리의 민속과 함께 서민생활에서도 친숙한 악기이다
다시 만세루로 와서 차한잔을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후 지장보살이 있는 성보박물관으로 향한다
만세루에서 차 한잔을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후에 요사채같은 건물을 지나니
지장보궁이라는 조그만 문이 나오고 좌측의 요사채 앞에서 상사화 한그루가 피어있다
요사채
인적이 없어 적막강산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요사채 마루에 핀 상사화 *꽃말:이룰 수 없는 사랑)
상사화는 석산 또는 꽃무릇이라고도 불리는 수선화과의 꽃으로 붉기가 동백꽃 못지 않다
봄에 선명한 녹색 잎이 구근의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에 마주 붙어나지만 꽃은 보지 못하고
6월쯤에 말라 버리며, 꽃은 잎이 말라 없어진 다음에 7~8월경에 꽃대를 내어 피운다
이처럼 상사화는 마치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는 연인처럼 잎이 나오면 꽃이지고, 꽃대가 나오면
잎이 말라 버리는 서로를 그리워 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슬픈 연인을 보는듯 하다
그래서이름도 상사화이며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상사화의 전설
상사화는 수선화과의 상사화 속의 식물로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함을 안타까워 상사화라 했다.
이 상사화는 스님과 세속의 여인 사이에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있었는데 한 스님이 여인을
사랑하였으나 신분 때문에 이루질 수가 없어서 안타까운 마을에 절 마당에 풀을 심었는데 이 풀은
꽃을 피우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며, 잎이 말라 죽은 뒤에 꽃대가 나와서 꽃을 피우므로 풀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잎은 풀잎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스님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꽃이름을 상사화라고 했다
지장보궁 가는길
예로부터 선운사 일원은 지장보살 신앙으로 유명한 곳이라 지장보살 성지라고도 한다
특히 삼장(三藏) 지장신앙의 중심으로 지장신앙은 본존이 지장보살이며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양 협시로 하고 시왕(十王)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어 지옥의 구제자로 불린다
이것이 후세에 와서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과 결합된다
삼장 지장보살이 탱화가 아닌 불상의 형태로 온전하게 봉안되어 내려오는 곳은 선운사가 유일하다
지표상으로 볼 때 선운사가 가장 낮으니 ‘지장(地藏)’이고 참당암은 ‘인장(人藏)’,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솔암에는 ‘천장(天藏)’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는 성보박물관 안쪽으로 향한다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보물 제279호).
선운사 지장보궁 영역의 성보박물관 내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며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으며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지장 신앙은 인도에서 4세기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중국·한국·일본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널리 숭배되어온 보살로서 그는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석가모니에게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악한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다.
중국에서 찬술한〈지장본원경 地藏本願經〉에는 효행을 주제로 한 지장보살에 관련된 전설들이 많이 실려 있다.
중국에서 지장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신행(信行:540~594)이 삼계교(三階敎)를 세우면서부터인데,
그는 당시를 말법시대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시대에는 지장보살을 숭배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하여
말법 사상에 기초한 지장신앙을 널리 전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圓光)이〈점찰경 占察經〉에 의거한 신도 조직인 '점찰보' 를 설치하면서부터
지장신앙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는데 〈점찰경〉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지장보살에게 예배하여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고쳐나갈 것을 권하는 경전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윤리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지장보살은 9세기경부터 널리 숭배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의 보호자이자 서민들에게 여러 가지 축복을 주는 보살이다
선운사의 잃어버린 지장보살을 되찾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선운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 말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어느 여름날 갑자기 없어졌다...일본인 2명과 한국인 1명이 공모하여 지장보살좌상을 훔친 뒤 이를
거금을 받고 일본인에 팔았다. 이 지장보살좌상을 구입한 일본인은 일본으로 가져갔다.
금동지장보살좌상을 소장하게 된 일본인에게 자꾸만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 일본인의 꿈에 지장보살이 수시로 나타나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보내달라’ 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이라고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계속 꿈에 나타나고
급기야 병이 들면서 집안의 가세(家勢)가 자꾸만 기울게 된다
이 일본인 소장자는 마음이 꺼림칙하여 이 지장보살을 다른 일본인에게 팔아 넘겼다.
그러나 또 다른 소장자의 꿈에 지장보살은 똑같이 나타났으며 역시 병이나고 가세도 기울었다.
이렇게 몇차례 소장자가 바뀌게 되고, 이 지장보살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다
이후 마지막으로 소장한 이가 고창경찰서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지장보살좌상을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도난당한 지 2년만인
1938년 11월 이었다.당시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과 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선운사내 지장보궁에 있으며 일반인들이 참배할 수 있으며 이 지장보살좌상이 선운사 삼장 지장보살중
지장(地藏) 지장보살이다
석씨원류경판
부처님의 일대기와 부처님의 가르침이 서역 및 중국에 전파된 사실을 글과 그림으로 기술한 것을
석씨원류경판이라 하는데 성보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데 아무도 관심조차 않는 느낌이다
주수완 박사님께서 금동지장보살좌상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다
그런데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지 않고 최근에 조성한 듯한
성보박물관에 조성되어 있어 신비로움이 좀 덜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성보박물관 마당에 있는 돌부처
금동지장보살좌상을 참배하고 선운사를 빠져나와 부도밭으로 향한다
부도전 가는 길
부도전 정문
선운사 부도전(浮屠殿)
부도전이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부도가 모여 있는 곳으로 선운사 부도전에는
오래된 부도도 보이지만 최근에 조성된 부도도 보인다... 그 가운데 근대의 고승인 정호(鼎鎬:1870~1948)
스님과 영호당 대종사 부도,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벽파대사 비도 보인다
선운사 벽파율사비(禪雲寺白坡律師碑: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2호)
조선후기의 탑비로 전체 높이 2.36m, 비신 높이 1.4m인 이 비석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내용을 짓고 글씨를 써서 유명하다.
선운사 부도전(浮屠田)에 위치하고 있으며, 1858년(철종 9)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방정한 해서체의 글씨로서 추사가 별세하기 1년 전에 쓴 글씨로서 추사체의 진면목이라고 일컬어진다.
백파(白坡, 1767∼1852)는 법명이 긍선(亘璇)으로서, 18세 때 선운사로 출가하였으며, 순창
구암사(龜巖寺)에서 주석하면서 설법한 대강백이자 선승이었다. 50세 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하여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선논쟁(禪論爭)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 추사는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선논쟁은 조선후기 불교사에서 1백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백파와 추사는 이러한 논쟁의 인연이 있었는데, 백파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들이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자 추사가
흔쾌히 수락하여 백파율사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문의 첫부분은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로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추사가 백파를 존경의 의미가 담긴 선사(禪師)라 칭하지 않고,
그 대신 율사(律師)로 규정한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벽파대율사 사적비
추사 김정희가 조선조 숭유억불 정책하에서도 화엄종을 내심으로 부터
실천적으로 간직한 벽파율사에 대한 비문인데 조선의 최고 명필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주수완 박사님께서 해박한 지식으로 순례객에게 비문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신다
벽파율사 비문 뒷면
정호스님을 비롯한 부도들이 보인다
정호스님은 전주 출신으로 모친이 위봉사에서 듣고 온 생사법문(生死法門)을 듣고 감동을 받아 출가를 하였다.
19세에 전주 태조암에서 출가하여 금산(錦山) 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21세에 장성 백양사의 환응(幻應) 스님에게
사교(四敎)를 배우고 선암사에서 경운(敬雲)에게 대교(大敎)를 배운 뒤 구암사에서 처명(處明)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한 뒤 해인사, 법주사, 백양사, 화엄사, 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 하였다.
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의 유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화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曺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꽤했을 때 한용운(韓龍雲),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峰) 스님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의 전통론을 내세워 연합조약을 무효화 시켰다.
1913년에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 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가 되었으며
1926년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를 배출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지도하였고, 1931년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
교장으로 선임 되었고, 1945년 광복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 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를 이끌다가
정읍의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부도전을 나와 다음 참배지인 참당암을 버스를 타고 향한다
좁은 길을 따라서 커다란 버스가 가려니 힘이 드는 모양이다
오름길에 버스가 상당히 헉헉 거리는데 그래도 20여년전 도솔암 갈 때 비하면 양반이다
잠시 후에 버스는 참당암 입구에 도착한다
참당암 암주 법만스님
미리 연락이 다았는지 주지 법만스님께서 손수 나오셔서 순례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스님께서는 교구본사인 선운사 주지 소임을 마치시고 산내 암자를 맡아 수행에 열심이시다
참당암은 도솔산 내의 사찰과 암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찰로 사람들에게는 선운사와
도솔암의 명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웠던 거찰(巨刹)로
조선조 정조 18년(1794) 임상우가 쓴 「도솔산대참사고사」,「대참사법당기」등에 따르면
참당암은 신라시대 의운화상이 개창한 것으로 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참당암(懺堂庵)
선운사의 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거찰(巨刹)이었으며. 삼국시대 의운(義雲)스님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의운스님이 도솔산 법화굴(法花窟)에 살고 있을 때 산 아래 죽포 포구에 돌배 한척이 들어왔다.
이 배는 속인들이 보려고 다가가면 바다로 멀어지곤 하다가, 의운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서야 저절로 다가왔다.
이윽고 배에서 노를 젓던 한 금인(金人)이 나타나 여러 불상과 경전과 보인(寶印)을 스님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나는 우전국의 왕인데 불상을 모신 곳을 찾아 해동의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던 중, 도솔사에 대참(大懺)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이 곳으로 왔으니, 청컨대 집을 짓고
편안히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스님은 산 가운데 터를 잡고 진흥왕의 도움으로 절을 세우고 '대참사'라 하였으니,
이때는 581년(백제 위덕왕 28)이었다.
이 절이 삼국시대 의운스님이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시주한 것은 후일에 첨가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1328년(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년(충목왕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가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먼저 1530년(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서 1614년(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년(인조 20), 1794년(정조 18)등 4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1494)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현재 참당암의 전각은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응진전(應眞殿)·명부전(冥府殿)·도솔선원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당암(懺堂庵)은 「대참사 사적기」에 의하면신라시대에 의운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참사란 의운화상의 ‘성전참회발원’에 의한 절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은 것으로 대참사(大懺寺)는
지금의 참당암을 말하며사적기에는 그의 창건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산에는 동쪽 고개위에 수십명이 앉을만한 평평한 평평한 암반이 있고, 그 밑에는 100여명이
들어 있을만한 고왕굴(高王窟)이 있으며 그 앞 층암을 오르면 정상에 해악(海嶽)이 한 눈에 전망되는데
여기에 천상굴(天上窟)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수백보 거리의 촉석이 둘러있는 곳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던 용담(龍潭)인 아뇩지(阿綠池)가 있다.
또 여기에 도솔당이 있는데 좌대와 같이 넓은 대암(大巖) 병풍과 같이 깍아 세운듯한 암벽이
사면을 두른 가운데 학이 깃들고 용이 머문 듯 하면서 송풍라월(松風蘿月)의 묘한 경과을 자아낸다
도솔암의 좌편에는 열석굴(裂石窟)이 있는데 신라 왕이 왕위를 피하여 이 산속의 굴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꿈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암석을 깨고 출현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사찰을 세우도록 현기(玄機)를 내렸다.
중애사(重愛寺)와 선운사, 도솔암이 그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문수사는 옛날 중국의 신승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유희하던 곳이라고 하며 운령사(雲嶺寺)와
개심사(開心寺)는 바로 개산조사인 의운화상이 머물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때 산 아래 죽도(竹島)의 포구에 한 척의 돌배가 와 닿았는데 그 배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그 배는 물러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의운화상이 그 배 안에 들어가니 옥축대장(玉軸 大藏)과 석가모니 불상, 가섭존자(迦葉尊者),
아난존자(阿難尊者) 등 16나한상이 배 안에 병렬되어 있고, 또 금인(金人) 한 사람이 오른손에 옥으로 된
돛대를 잡고 비단으로 된 돛을 펼치고 있으며, 왼손에 아주(牙籌:어금니 모양의 투호살(산가지)와 금자(金字)로
된 보인(寶印)을 잡고 배 위에 서 있었다.
의운화상은 그 사람에게 육지에 내려 불상 등을 봉안할 것을 의논하려 했으나 마땅한 도량을
정할 수 없어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의운화상의 꿈에 그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于闐國)의 왕인데
불경과 불상을 봉안할 성지를 보기 위해 동해의 여러곳을 편력하던 중에 이곳 선운산의 대참(大懺)의
빼어난 기운이 있고, 용당이 세워질 신령스러운 기운이 하늘에 뻗쳐 있음을 보고 이곳에 이르렀으니
원컨데 대사께서는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여 이 불상을 봉안케 하라’ 하였다.
이에 의운화상은 금인에게서 불경과 불상및 나한상,그리고 아주와 금자 보인을 받아 이 산 가운데
길이 봉정할 도량을 택하여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가람을 개창하였는데 그 가람이 참당암이라고 한다
참당암 대웅전(보물 제803호)
참당암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기간의 왕사(王師)이자 , 국사(國師)인 의운(義雲) 스님이
진흥왕의 시주를 받아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에는 대참사(大懺寺) 또는 참당사(懺堂寺)라
불리면서 조선 중기까지는 산중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 쇠락하여 선운사 산내 암자로 편입되었다.
건물 후면에 조선시대 부재가 남아 있는 대웅전은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셔놓고, 좌.우 협시보살로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다
참당암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장참회 기도도량이자 근대들어 선원을 개설하여 수행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 많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참당암(懺堂庵)은 ‘누구나 찾아와서 참회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참당암 대웅전은 선운사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선운사 경내에는 많은 산내 암자가 자리를
잡고 있지만 거의가 정유재란 과정에서 불타버렸고 조선후기 불사과정에서 만들어진 전각과 당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유일하게 화를 입지 않았던 전각이 바로 참당암 대웅전이다.
참당암 대웅전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불전(佛殿)으로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고려시대
건축 양식이 조선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다포식 맞배지붕을 올린 참당암 대웅전 내무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과
고통을 없애 준다는 대세지보살이 협시한 목조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1900년대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천정의 중앙부는 높고 뒷간쪽은 한단 낮은 층급을 둔 우물 천정이다
천정 아래로 노출된 부재에는 당초문 초각을 매우 매우 복잡하게 틀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내부는 우물 마루이고고주 사이로 후불벽을 형성한 후 그 앞으로 불단을 만들어 삼존불을 봉안했다
대웅전 내 신중탱
참당암 응진전(應眞殿)과 명부전(冥府殿)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 하나에 응진전과 명부전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한 건물에 벽을 막아 각각 별개의 법당 형식을 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고 그 좌우로 500나한이 모셔져 있다.
입구의 좌우에는 소조불로 되어 있는 인왕상 한쌍이 세워져 있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응진전은 나한 중에서도 16나한을 모시는 건물로 나한신앙을 배경으로 조성된 것이다.
대개 응진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과 가섭을, 그 주위에 16나한을 배치하고 끝에
범천과 제석천을 봉안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응진전 내부의 모습
중앙불단에는 석가여래좌상,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삼존이 모셔져 있는데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75~80cm 정도 규모이며이 불상들은 흙으로 만든 소조이며, 함께 봉안되어 있는 시자상, 인왕상도 마찬가지이다
명부전은 시왕전 또는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이 법당의 주불은 지장보살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다시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한다.
후불탱화로는 지장보살 뒤에 지장탱화를, 시왕의 뒤에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참당암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 외 권속들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 작품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선운사 일원은 지장보살 신앙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지금은 선운사 동백꽃과 도솔암
미륵불 등의 유명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본래 선운사는 삼장(三藏) 지장신앙의 중심이다.
지장신앙은 본존이 지장보살이며,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양 협시로 하고,
시왕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어, 지옥의 구제자라고 불린다.
이것이 후세에 와서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과 결합되는데 삼장 지장보살이
탱화가 아닌 불상의 형태로 온전하게 봉안되어 내려온 곳은 이곳 선운사가 유일하다.
지표상으로 볼 때 선운사가 가장 낮으니 ‘지장(地藏)’이고, 참당암은 ‘인장(人藏)’이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솔암에는 ‘천장(天藏)’이 모셔져 있다
참당암에 이르면 탁 트인 평지 중앙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고, 특이하게 오른쪽으로 한 지붕 아래
응진전, 명부전이 함께 들어서 있고 맨 왼쪽으로 참당선원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참당암이 지장참회도량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 자리한 지장전에 모셔진
지장보살상(전북유형문화재 제33호) 때문인데 참당암 지장전 안에는 돌로 만들어진 석조지장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광배를 제외하고 아래의 대좌로부터 불신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불상이다.
손에는 동그란 약병을 들고 있어서 약사보살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머리에 두건을 두른 것이
전형적인 지장보살이다. 이 지장보살이 선운사 삼장 지장보살 중 인장(人藏 )지장보살이다
참당암 지장전
참당암 인장(人藏 )지장보살(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일명 돌부처라고 하는데 문화재청 등 일부 공식 자료는 아직도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다고 적고 있는데
공식 명칭도 선운사 약사여래불이다.
그러나 한국민족대백과에는 지장전에 있으며 지명도 “선운사 참당암 석조 지장보살상”이라고 정확하게
밝힌 자료도 보인다
지장전 돌부처라고도 불리는데 불상의 높이는 80cm이고 무릎의 높이는 50cm로 전라북도 유령문화재
제33호로 등록되어 있는 선운사 약사여래불상(藥師如來佛象)이라 불리는 이 불상은 옥석으로 만들었으며
의왕불좌상(醫王佛坐象)이라고도 하며 오른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대단히 희귀한 불상으로 이 절의 창건시
인도에서 왔다는 전설도 있는데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쥐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이 “선운사약사여래불상”
으로알려져 있지만 머리에 두건을 쓴 전형적인 두건(頭巾) 지장보살상이다
고려말 혹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얼굴은 풍만하며 가는 눈초리와 작은 입, 반달형의 눈썹으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의 두건은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두른 뒤 이마 부분에 긴 끈을 묶어 귀 뒷쪽으로 내린 형식이다
양 어깨 밑으로 길게 드리워진 머리띠 자락의 끝부분은 3엽의 꽃무늬 형태로 마무리 되었다.
목에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는데 선운사와 도솔암의 지장보살과 같이 목 아래의 목걸이는 가운데
화형(花形)의 고리장식을 달고 가슴 가운데로 세 가닥의 장식을 늘어뜨린 화려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사(架裟)는 통견(通肩: 어깨를 겹침)으로 오른쪽 소매자락을 허리 아래에서 가사자락 밑으로 여며 넣었다.
옷 주름은 폭이 넓고 직선적인 평판 형태로 단순화 되어 활력을 찾을 수가 없다.
군의(裙衣)는 가슴까지 치켜 올라가 있으며 복부에는 군의를 묶은 허리띠 매듭이 나비 리본의 형태로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엄지와 둘째 손가락 사이에 보주를 쥐었으며
왼손은 손가락을 곧게 펴서 가부좌(跏趺坐)한 무릎 밑으로 내렸다.가부좌한 하체에는 우측 발목이 노출되어 있다
머리띠로 묶어 내린 두건의 착용방식과세 줄의 영락(瓔珞:구슬을 꿔어 만든 장신구)이 달린 목걸이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다가 팔꿈치 부근에서 삼각형꼴로 접힌 옷주름 표현 등에서 도솔암 내원궁에
안치된 지장보살좌상(보물 제 280호)와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 279호)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도솔암 내원궁의 지장보살상은 왼쪽에 보주가 아닌 법륜(法輪)을 쥐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약사여래상이라기 보다는 지장보살좌상이 맞을 듯 하다
선운사 삼장 지장을 가리킬 때는 선운사의 지장보살을 지(地)지장보살, 참당암의
지장보살을 인(人) 지장보살, 도솔암의 지장보살을 천(天) 지장보살로 부른다
굴곡이 적은 직선적인 신체, 크고 넓적한 얼굴, 직선적으로 가늘게 그어진 눈매와
딱딱한 표정, 평판적인 옷주름 표현 등에서 조성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불상 좌대 하단의 모습
지장암을 지나 대웅전 뒷쪽으로 와서 올라서니 쵠근에 조성한듯한 산신각이 보인다
산신각 가는 길
참당암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산악숭배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에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보통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 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져 있는데 명칭은 산신각·칠성각·삼성각 등으로 불린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이라 하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이다
참당암 산신탱
산신은 보통 호랑이와 함께 있는 백발에 수염이 있는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위패는 '○○산신위(山神位)' 또는
'○○산령위(山靈位)'라 해서 산의 이름을 적어놓는 경우와 산의 이름은 없이 그냥 산신위 또는 산령위라 적어두는 경우가 있다.
건물 정면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산신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보통으로 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은 한 지역공간의 중심이며, 산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존재로 믿어졌던 것이다.
한편 산신각에 모셔지는 산신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 것을 생각해볼 때,
산신신앙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졌다.
그 명칭은 산신각·칠성각·삼성각(三聖閣) 등 일정하지 않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참당암 산신각 풍경
산신각 옆에 있는 쉼터
다시 대웅전으로 내려선다
대웅전으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도솔암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시간이 오후 4시가 좀 넘었다
물론 도솔암으로 갈 수도 있지만 나이드신 분들이 많아 집행부에서 많이 망설이다가가
포기하고 귀경을 결정하는데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선운사에 있는 3분의 지장보살 중에서도
도솔암 지장보살이 가장 인기있는 지장보살이고 도솔암을 가본지가 20여년이 넘어 꼭 가보려고
했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귀경하는 버스에 오른다
아래의 사진과 자료는 인용한 것음
도솔암 마애불(보물제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이며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으며 불의는 통견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도솔암 내원궁 아래 거대한 암벽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지장신앙이 미륵신앙과의 연계성을 보여주면서 미륵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 마애불은 선운사의 상징이 되고 오랜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도솔암 미륵마애불은 선운사의 삼장 지장보살상보다 훨씬 오랜 전에 조성되었고,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호남의 미륵신앙의 주요 성지이기도 하다. 절벽에 있는 13m의 큰 마애불좌상을 보면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어
놀라고, 그 크기뿐만 아니라 거칠고 개성적인 데에 재차 놀란다. 그보다 이 불상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불상의
가슴 아래 있는 복장감실에 있는 비기秘記 때문이다. 이 비기로 인해 마애불은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희망의 미륵불이 되었다. 특히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때 그 믿음은 배가 된다. 따라서 이 비기가
열리는 날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개벽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실제 한말 당시 1894년
동학혁명의 도화선은 1892년 불상의 가슴에 있는 복장물을 동학교도 손화중 등이 탈취해 간 데서 시작된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선운사는 삼장(三藏)지장보살을 모신 도량으로 꽤나 이름이 나 있다.
도솔암, 참당암, 선운사 지장보궁의 지장보살상은 천장(天藏)·인장(人藏·)지지(持地)지장보살의 삼장보살들로,
고려와 조선을 대표할만한 명작이다. 지장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여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성인이며
대원(大願)을 세운 보살이다. 선운사가 지장도량인 연유는 아마도 조선 성종 때 중창불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배불의 역사 속에서 위기에 빠진 불교가 생존하는 방법의 하나로 당시 왕실이나 권력층의 비호를 받아
그들의 소망을 기원해주는 방편에서 지장신앙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길이다. 산의 계곡을 따라 오르면
진흥굴과 참당암을 거쳐 도솔암에 이르는데, 완만하고 자연스럽다. 도솔암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모셔져야 하는데 현재는 고려시대 금동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그
의 빈자리를 지장보살이 지키고 있다고 보인다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도솔암 도솔천내원궁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선운사 삼지장보살중 천장(天藏)보살이다
대좌와 광배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길상좌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다.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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