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宗과 敎宗이 어우러진 佛國土
조계산 동.서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가다
일시: 2018,7.28
지난 4월말에 우연히 신체검사를 받다가 발견된 종양을 수술을 받고나니 모든게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내가 아파서 수술을 했다면 수긍이라도 하겠다마는 멀쩡한 몸뚱아리에 칼을되어 모든게 불편하니 미치겠다.
제일 먼저 불편한 것은 10년동안 매주 베낭을 메고 집을 나갔는데 그걸 못하니 미치겠다.
습관 때문인지 토욜 그 시간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하고 정신이 맑아지는데 산행을 할 수 없으니 돌아버릴것
같은 느낌이고, 맥 산행을 갖다온 산꾼들의 산행기가 올라오면 괜스레 나만 낙오자만 되는 듯하여 초조하다
친구들이 찾아와도 즐겨 마시는 약주 한잔도 못 마시고, 걷는것도 불편하고, 수술중 마취의 후휴증으로
목소리가 잘 안나오는 건 더더욱 미치겠다...의사의 말로는 목소리는 6개월정도면 되돌아 오고 술은 마시지
말고 산행은 당분간은 안 된단다... 죽으란 말이냐고 항의를 하니 그래도 선생님은 天運이라고 한다
이 병은 발견이 쉽지 않을뿐 아니라 발견이 되면 끝나는 병이라고 겁박을 해되는데 방법이 없다.
나중이야 어찌되건 그건 차후 문제이고 당장 불편하니 괜히 수술을 했다싶어 후회스럽다
산행을 할 수 없으나 평지길은 그래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법보신문사에서 진행하는 성지순례를 나선다
아침 7시에 서울 조계사에서 출발하여 순천 선암사로 향하는데 참으로 멀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정도 늦고 거기다가 기사분이 선암사로 먼저 가야하는데
송광사로 먼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1시간 이상의 시간이 허비를 한다
버스는 남해고속도로 선암사 I.C를 빠져나와 쌍암기사식당에서 백반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지난달 무위사 가면서 들렸던 남도밥상을 생각하고 들렸다가 실망을 하고 간단하게 밥먹고 그리 멀지않은 선암사로 향한다
선암사 주차장 입구에서 농산물을 파시는 할머니
선암사 주차장에 내리니 불볓 더위가 사람을 괴롭힌다... 잠깐 사이에 몸뚱아리는 땀으로 범벅이 된다
조계산 선암사 가람배치도...(사진 펌)
선암사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루(梵鐘樓)가 압도하듯 다가오는데 그냥 서서 자나가면 호령이라도 할 것 같다.
이를 누하진입(樓下進入)이라고 한다.
전라도 지방의 사찰에는 이러한 누하진입이 드물다. 대웅전 앞뜰을 그다지 넓지 않다. 쌍탑(雙塔)을 격에 맞게 두었고
앞에는 길 다란 강당을, 좌우에는 요사와 선방을 위치시켰다.이러한 배치구조는 조선후기의 사찰가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이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 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영역과 축선이다.사찰의 규모가 크고 불전의 수가 많으니
주축 외에도 여러 개의 축을 설정하여 둘 이상의 주불전이나 영역을 통합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데 주축 상에
위치한 대웅전 영역의 건물군 외에도 원통전 영역, 응진당 영역, 각황전(覺皇殿) 영역 등 경내 전체를 네 개의
영역으로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대웅전 영역의 중심축에서 약간씩 비켜 서 있다.
특히 이러한 소 영역들은 서로 분리되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축대로 쌓여진 각각의 서로 다른 단 위에 펼쳐져 있다.
선암사는 예부터 6방(房)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여기서 6방이라하면 상선원.하선원.강원.정읍원.도감원.염불원을 일컫는다.
상선원은 지금의 칠전으로 하선원인 심검당에서 어느정도 수행을 한 납자들이 참선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하선원은 심검당으로 수행납자들이 처음 선방에 들어와서 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강원은 천불전으로 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는 공간이다. 정읍원은 무우전으로 밀교계통의 다라니를 외우는 공간이다.
도감원은 창파당으로 절의 사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염불원은 설선당으로 아미타불을 계속해서 독송하는 공간이다.
이런 6방 살림은 예불, 공양 등을 따로 분리하여 각각의 독립된 공간에서 독자적인 살림을 살았다고 한다.
선암사는 지난 6월 30일 오후(한국시간) 바레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심의 결과
지난해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
7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최종 확정됐다고 이날 발표했다. 등재 확정된 산사는 경남 양산 통도사,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대해 ‘7~9세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지속성과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이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기준(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전했다. 세계유산위는 아울러 산사의 종합정비 계획과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경내 건물 등에 대한 관리방안, 등재 뒤 늘어날 관광객 대책을 마련하고, 건물을
새로 지을 경우 세계유산센터와 사전 협의할 것도 추가 권고사항으로 요구했다고 문화재청은 덧붙였다
선암사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날씨는 무지 더운데 조계산 선암사(曹溪山仙巖寺) 돌기둥을 지나니 우측으로 부도밭이 보인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있고, 좌측의 도로쪽에는 4층 석탑으로 된 부도가 있는데 이 부도는
1928년에 세워진 화산대사의 부도로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선암사 가는 길에서 만난 장승
길 양쪽 장승이 하나씩 서 있는데 특이한 것은 장승은 대체적으로 남.녀로
구분되어 서 있는데 이곳은 좌.우 모두다가 남자 장승인 것이 특이하다
장승의 모습이 참으로 익살스럽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07년에 세워진 장승이 있었는데 1987년에 지금의
장승에게 내어주고 지금은 절 안에 있는 설선당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장승에는 호법선신과 방생정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호법선신 장승은 세갈래 수엽은 동그랗게 꼬았고, 방생정계 장승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나무장승 옆에는 최근에 조성한 듯한 대리석으로 만든 장승도 보이는데 난 나무 장승이 훨씬 정겹다
선암사의 진입 공간 부분은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첫 건물인 강선루(降仙樓)에서부터는 가파른 지형이다.
이곳은 그다지 넓지도 않다. 따라서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선암사의 건물들이 좌우 방향으로는 다소 넓으나 전후 방향으로 조밀한 것은 그 까닭이다.
이러한 단들은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분절하여 위계성을 주며 시각적으로는 전개되고
패쇠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공간 구성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자 할 때 공간의 순서에 의미를 부여하여
진입 공간, 과정적 공간, 청정 공간, 매개 공간, 주공간, 부공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선암사에 있어서는 이러한 고려가 아주 우수하다.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긴데, 두 번을 휘감고 돌아가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선암사 승선교(仙岩寺 昇仙橋:보물 제400호)
승선교(昇仙橋)...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이다.
이름도 ‘신선이 되는 다리’라는 뜻의 승선교이고, 이 다리를 건너 선암사에 가서 道를 닦으면
부처가 된다는 뜻이며,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다시 내려오는 강선루(降仙樓)가 지척에 있다.
길이14m 높이 4.7m 폭 4m로 1713년 (숙종 39) 호암화상이 6년만에 완공한 다리로 넓은 개울을
기저부(基低部)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개의 아취로 이루어져 있다.
다리 중심석 아래의 조그맣게 돌출시킨 석재는 용두(龍頭)모습 같기도 하며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집 살림이 궁핍했던 조선시대에는 스님이 목수가 되어 법당을 지었고
기와를 굽고단청과 불화도 직접 그렸다 쇠를 녹여 범종을 만드는 스님이 있었고, 돌다리를 쌓는 스님도 있었다.
이 승선교를 쌓은 호암스님은 벌교의 명물인 홍교도 직접 쌓았다고 한다
승선교 아래에 있는 용두(龍頭)의 모습
승선교의 아치는 지면에 맞닿은 하부부터 원형으로 내쌓기 시작하여 완전한 반원형을 이룬다.
결구 방법은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가로로 한 단씩 빈틈없이 총총히 밀집시켜 스스로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저부는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르면서 꼭대기 부분에는
다소 작은 돌들을 끼워 넣었으며 정교한 홍예석 주변 양 측면에는 잡석들을 쌓아 양쪽 언덕과
연결시켰으며 윗면에는 흙을 덮어 평평하게 하였다.
특히 요석(要石:중심돌) 아래에는 조그만 석재를 빼내어 신기한 모습을 이루는데, 돌출시킨 석재가
용의 모습처럼 생겼다. 여기에는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모든 중생들을 보호, 수용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강선루에서 바라본 승선교
「조선불교총보」 제3호에 게재된 “공예사료의 선암사 승선교”에는 이 석교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글의 내용은 대부분이 다리옆에 있는 「승선교비명(昇仙橋碑名:강희 52년에 세움)」에 의한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승선교의 초창은 숙종 33년(1707) 정해(丁亥)12월에 시작되어 그로부터 6년 뒤인
숙종 39년 2월에 준공한것으로 보인다
승선교는 벌교에 있는 홍교보다 약 20년정도 앞서고 그 작풍도 웅대한 자연미를 안고 있다
강선루(降仙樓)
선암사 사찰의 출입용 문루(門樓) 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이다
주 진입로를 가로지르는 계곡위에 서 있으며 누하(樓下)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하였으나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목조 팔작기와 지붕이다
여느 중층 누문처럼 계자(鷄子)난간(닭벼슬과 같은 같은 기둥을 세운 난간)을 돌렸으나
2층의 우물마루(井자 모양으로 널판지로 가로 세운 마루)위에는 가늘고 낮은 누상주(樓上柱)를
얹었으며 기둥머리와 소로(小壚)와 첨차(檐遮)로 외 1출목(出目)을 결구하여 주심포 형식을
취했으며 살미(山彌:도리에 직교하여 받친 공포부재)쪽은 익공(翼工) 형식을 취하고 있어
주심포와 익공 형식이 서로 혼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사이(柱間)는 창방(昌榜:대청위의 장여 밑에 다는 넓적한 도리)으로 연결하였고, 창방과
장여받침, 골도리 사이에는 빈 공간으로 처리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기둥(童子柱:들보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중보(中褓:대들보와마루보 사이에 있는 보)를
얹었고,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쳐 5량 가구 형식을 하고 있다.합각지붕의 가구를 위해
충량(衝樑:집채의 좌.우쪽에서 상량과 동렬로 짜이는 단량) 과 선자(扇子)서까래가 설치되어 있는데 충량의
모습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찰은 누문(樓門)이 일주문 안쪽에 위치하는데 선암사는 사찰 경역의 입구에 두어계곡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 특징이며, 강선루의 최초의 건립 연대는 알 수가 없지만 1939년에
이월영(李月永) 주지스님이 여러지역의 유지들의 모금으로 지어 1953년, 1972년, 1983년에
보수했다는 기록과 그때 썼던 누(樓)의 앞뒤로 걸려진 현판의 주인공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편액의 굵은 글씨체는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인물로
근세 명필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喜:1871~1936)의 글씨와 다른 한쪽의 글씨는 동시대에
이.예조판서를 지내다 서예가로 활동했던 석방(石邦)윤용구(尹用救:1853~1936)의 글씨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공간 구성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자 할 때, 공간의 순서에 의미를 부여하여
진입 공간, 과정적 공간, 청정 공간, 매개 공간, 주공간, 부공간을 나눌수가 있다.
선암사에 있어서는 이러한 고려가 아주 우수하고 흥미롭다.
승선교라는 2개의 홍교(虹橋)를 지나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부분이 이 사찰에서 가장 아름다운경관을 이룬다...
다른 사찰에서보다 진입 부분을 길게 하였는데 진입 부분은 속세의 온갖 번뇌와
오욕을 씻고 천상의 성스러운 곳으로 오르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선암사 가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삼무(三無)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는데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구지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주련인데 다른 사찰의 대웅전에는 주련이 기둥에 붙어 있는데 선암사는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틀리다)라고 하여서 곧 깨달으면 말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서 주련을 달지 않았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는데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삼인당 안내판
삼인당(三印塘: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
장변과 단변이 2.2:1의 비를 갖는 기다란 계란 모양의 연못속에, 장변 11m, 단변 7m의 크기를 갖는
계란 모양의 섬이 저부(底部) 가까이 4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는 중도형(中島形) 타원형 연못이다
이와 같은 특이한 양식의 연못 형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기 힘든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정원에서는
직선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연못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앞의 구품연지(九品蓮池)는 정타원형 못이다
통도사의 구룡지(九龍池)는 구품연지와 비슷한 타원형 연못이기는 하나 모두 정형적인
정타원형 윤곽선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가로지른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상의 점에서 볼 때 선암사의
삼인당은 조선시대의 양식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성연대는 훨씬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추정된다
선암사의 사적에 의하면, 이 연못은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며, 연못의
장타원형의 안에 있는 섬은 ‘自利利他(자리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自覺覺他(자각각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뜻한 것으로,
이 연못은 불교의 이상을 배경으로 한 ‘삼인당’이라는 명칭과 독특한 양식 등이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선암사 하마비(下馬碑)
이 하마비에 대하여 구전설화에 의하면, 고려 시절 동래정씨의 시조 묘소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분묘(墳墓) 입구인
이곳에서 경의를 표하고 가라는 하마비를 세우게 되었고, 하마정(下馬停)이라고 하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정에 얽힌 전설로는 임진왜란 당시 倭將이 하마정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 하자, 말이 갑자기 요동을 치며
왜장이 말에서 떨어졌다.
다시 말을 타려고 하자 또 말이 요동을 쳤다. 통역관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 사연을 설명하였더니,
왜장도 예의를 갖추고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션한 물줄기도 보이고...
선암사 일주문
선암사는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소재한 조계산에 위치한 한국불교 태고종의 의 본찰이다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고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께서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셨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는데 송광사가 화려한 번성을 누린다면
선암사는 고졸하면서도 운치있는 기품을 보이며 한적한 숲속에 그윽하게 자리잡고 있어 깊은 인상을 준다.
선암사 일주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유일하게 소실을 면한 전각이라고는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전체적인 모습은 전통 사찰 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외 4출목의 다포식(多包式)
건축으로 원형으로 잘 다듬어진 초석위에 95cm가량의 배흘림 두리기둥(원형기둥)을 세웠고, 조그만한
주두(柱頭)밑에 2개의 용머리를 문과 평행하게 안쪽으로 끼워 장식하였다.
기둥사이에 3군(群)의 다포를 짜 맞추었는데, 소로와 첨차가 조그마하여 조금은 불안한 형태이다
처마는 겹처마 밑에있는 쇠서와 양서가 가날프고 또한, 창방 위에 평방(平㭶)을 걸치고 주두 모양의
커다란 소로를 놓고 공포(拱包: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 등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를
짜 맞추었고, 일주문 양 옆으로 담장을 연결하여 돌계단으로 층계를 연결한 형식이다
현재 선암사의 창건시기와 창건주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신라말의 도선국사(道詵國師)
창건설과 삼국시대의 아도화상(阿度和尙) 창건설로 엇갈려 있으나 계음 호연스님이 18세기초에
작성한 「조계산선암사사적」신라 하대에 조성된 대웅전 앞 마당의 동.서 3층 석탑 등의 유물로
볼 때 신라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그 돌계단의 소맷돌에는 이름 모를 석수(石獸)가 선암사를 수호하고 있다.
건물은 단순한 맞배지붕이며, 두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cm
중간에서 보조기둥을 잘랐는데 이는 기둥 얖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하며, 다른 일주문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선암사 일주문 안쪽의 모습
선암사 일주문의 전면 현판에는 '曹溪山仙巖寺'라는 사명을 새겼고, 후면에는 전서체(篆書體)로
'古淸涼山海川寺'는 옛 사명을 새겨 걸었놨다. 조계산의 옛이름 청량산이나, 절 이름 해천사는
잦은 화마(火魔)로부터 절을 보호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라말에 창건된 선암사는 고려시대 중기에 왕자출신 스님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변화를 맞게 된다
의천스님은 지리산 화엄사와 무등산의 규봉암 등 전남지방을 돌아보던 도중에 조계산의 빼어난 경치에 찬탄하여
선암사 대각암(大覺庵)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선암사의 규모는 법당 13동, 전각 12동, 방 26개, 산내 암자가 19개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대각암에는 의천스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가 있으며 또한, 응향각(凝香閣) 안에 보관중인
대각국사 가사(架裟)는 둘째 형인 고려 선종(宣宗)이 의천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각의천(大覺義天:1055~1101)은 고려 문종(文宗)과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 사이에 태어난
넷째 왕자로 본래 이름이 후(煦)이고 자는 의천(義天)인데, 당시 송나라 철종(哲宗)의 휘(諱)가 후였으므로
황제의 이름을 피하여 자인 의천을 주로 썼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는 그의 시호이다
11세 되던 해에 당시의 관례에 따라 왕사(王師)이며 화엄종의 고승인 경덕국사(景德國師)난원(爛圓)에게 출가했다.
그는 특히 화엄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으며 부왕 문종의 원찰인 흥왕사(興王寺)에서 15세(혹은 13세)에
우세승통(祐世僧統)의 법계(法階)를 받고 일대 법문을 설하여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의천스님은 구법(求法)과 교장(敎藏)을 수집하기 위해 송나라에 유학을 하였다가 귀국하였다.
송나라에서 귀국한 그는 오랜 숙원인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인주(仁州) 이씨와
연결된 법상종(法相宗)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구례 화엄사에서 연기(緣起)
조사를 예찬하기도 했으며, 선암사 대각암에서 지관(止觀)을 닦다가 이 산이 중국의 조계산과 같음을
보고 산 이름을 조계산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의천이 40세 되던 해에 외척 세력인 인주 이씨의 권세는 날로 더하여지고 이자의(李資義)의 난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숙종은 이들을 평정하고 왕위에 올라 국청사(國淸寺)를 낙성시켰다.
숙종 2년에 의천을 국청사 주지로 맞이하니 의천은 「속장경(續藏經)」간행 사업을 추진하면서 천태교관
(天台敎觀)을 본격적으로 개강하여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이때에 덕린(德麟), 경란(景蘭), 익종(翼宗), 연묘(連妙), 등 선교 제종(諸宗)들의 고승들이 그의 제자로
귀의해 왔고, 의천은 1101년(숙종6년) 10월에 47세의 나이로 입적했는데 숙종은 그가 열반하기 전날밤에
“大覺國師”의 시호를 내렸다.
선암사 범종루
범종루에는 선암사의 지위, 즉 한국불교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叢林)임을 알려주는 현판이 붙었다.
총림이란 종단의 종합교육기관으로서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太古叢林曹溪山仙巖寺’ 편액이 걸려있는 범종루는 대웅전과 축을 이루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종루이다
8단의 계단을 오르는 높은 기단위에 사다리꼴 모양을 한 초석을 놓고 가느다란 누하주를 세웠다
누하주는 그 머리부분에 장귀틀과 동귀틀을 거쳐 그 위에 누마루를 깔았고, 누상주는 낮고 굵다
기둥머리에는 공포와 첨차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공포 구조와는 달리 판형(板形)의 살미를 중첩하였다.
또한 굵은 대들보를 두개의 주두가 받치고 있어 특이한 조형 기법을 보이고 있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을 세우고 종보(宗樑:지붕 가구에서 대들보 위에 걸리는 보)를 얹은 다음
그 중앙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지탱하고 있다.
합각(合閣: 지붕 윗쪽의 양 옆에 박공으로 人자 모양을 이룬 각) 부분에서는 충량과 선자, 서까래를
설치하였는데 충량의 모습이 용의 몸에 귀면(鬼面)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신중문(神衆門) 곧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인왕문(仁王門)이 들어서야 하는데 이곳 선암사에서는 없다.
이것은 일주문과 종루 사이가 너무 좁아 이들을 수용할 공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만세루(萬歲樓)
만세루를 육조고사(六祖古寺)라고 하며 선암사의 강당(講堂)에 해당하는 건물로
원래 초기 가람의 배치 형식에서는 강당이 금당(金堂)으로 대웅전의 뒤에 있었다.
육조고사(六祖古寺)라고 하는 글씨는 추증 영의정 김익겸:1614~1636:구운몽의 저자서포 김만중의 부친)의
글씨라고 하는데, 중국 선종의 최종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6조 혜능대사가 중국 조계산에서 주석한 것을
이곳 조계산과 연결하여 혜능대사의 법맥이 전하는 고찰이라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인 목조 건물로 외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사이를 창방으로 연결하고 그 위에
3구씩의 소로를 두었고, 기둥머리 부분에는 주두와 이익공의 쇠서가 돌출되어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가 얹히고 그 위로 바로 대들보가 통칸으로 얹혔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이 놓이고 그 위에 다시 중보를 걸친 다음에 판대공을 놓고
장여받침 굴도리 모양의 종도리가 얹혀 있다.
통칸의 넓은 공간을 단일 부재인 커다란 대들보로 처리한 강직하고 간결한 전각이다
만세루 우측에는 범종각이 보인다
신검당(尋劍堂)
사찰에서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많이 붙이는 이름으로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하는데 심검당의 검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사찰 내에 적묵당(寂默堂)이 심검당과 함께 위치할 경우에는 적묵당은 선원으로,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선암사 심검당은 대웅전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사채나 종무소로 쓰이고 있으며, 중층으로 하여 아래층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승방으로 하고, 윗층에는 사찰에서 사용할 여러가지 물건이나 음식과 곡물들을 보관한다
외부에서는 1층으로 보이나 내부 구조는 2층으로 살림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단촐하다
심검당은 두리 기둥으로 익공 형식을 하였고, 팔작지붕이 이어져 ㅁ자형을 이룬다
마치 서울, 경기 지방의 양반집의 안채를 이루는 기법과 건축 형식이 같다
내부는 조그만 중정을 두어 개방적이나 외부는 창문과 벽으로 둘러져 폐쇄적인 기능을 갖는것이 흥미롭다\
외부 벽(좌측) 윗쪽에는 ‘水’ , ‘海’라고 환기창이 있고 우측에는 ‘卍’자의 환기창이 나 있다
설선당(說禪堂)
대웅전 좌측에 있는 전각으로 현재는 스님들의 공양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낮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아 두리 기둥을 세우고 초익공 형식을 한 단촐한 건물이다
맞배지붕이 이어져 ㅁ자를 이루고 중앙의 마당을 향해 건물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외부에서는 단층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중층이며 1층에는 스님들이 기거하고
2층은 수장(收藏)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암사대웅전(보물 제1311호)
선암사의 중심법당으로 1824년에 중창되었으며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전각이다
선암사는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타 없어져 1660년(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 등 3대사가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존 대웅전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1766년(영조 42)에
불탄 것을 1824년(순조 24)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으며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 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으며 높이 1m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하였는데,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四分閤門)이며 위에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두는 낮은 창)을 두지 않았다
선암사 대웅전 편액
선암사 대웅전 중창의 역사는선암사의 여려 자료에 의해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 의천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이 어느 시기에 다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졌던 것을1660년(현종1)에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후 1776년(영조42)에 다시 화재로 의해 소실된 것을 1824년(순조24)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대웅전의 편액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순조 임금의 장인)
의 글씨로 당시 임의 어필(御筆)이 아니고는 현판(懸版)의 두인(頭印)에 글쓴이의 이름을 쓰지
못하였는데도 ‘金祖淳書 大雄殿’이라고 쓸 정도였으니 이 편액을 통해 당시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한다
대웅전 내부는 천장을 井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後佛璧)을 세워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 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대웅전의 어간 좌.우 기둥 위에는 바깥으로는 용의 머리 부분을, 안쪽으로는 용의 꼬리 부분을 조각해놨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용선을 표현한 것으로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를 건너갈 때
타고가는 상상의 배를 말하며 또한 ‘반야(般若)’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말하며 ‘바라밀다(波羅蜜多)’는
피안의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대웅전은 부처님과 함께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향해하는 반야용선의 선실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이때에 용두(龍頭)는 뱃머리가 되고 용의 꼬리는 배의 선미(船尾)가 된다
대웅전 건물이 중생들을 배에 태우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선암사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부처님 곁에는 협시보살상(挾侍菩薩像)이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의 오른손을 자세히 살펴보면 항마촉지안(降魔觸地印)을 하고 계신다.
즉 항마촉지인으로 탐진치 삼독(貪嗔癡 三毒)을 멸하시고 마구니에게 항복받으셨으므로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항마촉지안(降魔觸地印)
수인(手印)은 모든 불보살의 서원(誓願)을 나타내는 손의 모양, 또는 수행자가 손이나 손가락으로 맺는 인(印)을 말한다.
수인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나 석가여래의 근본 5인(5印)이 대표적인데, 선정인(禪定印)·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전법륜인(轉法輪印)·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이 그것이다. 그중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의 정각(正覺) 성취를
상징하는 수인으로 그 형태는 결가부좌한 자세의 선정인에서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에 얹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를 보통 촉지인(觸地印) 또는 지지인(指地印)이라고도 한다. 즉, 정각을 성취한 석가모니가 악마의 장난을
물리쳤음을 지신(地神)으로 하여금 최초로 증명하게 하는 손의 모습이다.
선암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거대한 목조여래좌상(높이 233cm)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장방형에 가까운 상호는 위엄이 있어 보인다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肉髻:부처의 정수리에 솟아있는 상투모양의 혹)와의 구분이 거의 없이 처리 되었고
정상에 조그마한 원통형의 계주를 표현하였으며, 머리의 중간 부분에 반원형의 큰 계주가 채색되어 있다
규모가 큰 목불이라 위엄은 있어 보이나 조각 기법은 뛰어난 편은 아니며, 조성 양식과 대웅전 건물의
중창 사실 등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단에는 좌.우 보처없이 단독상으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후불탱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10대 제자와
8대 보살, 화불, 천왕 등이 그려져 있다.
서부도암감로왕도
1736년에 의겸(義謙)에 의해 제작된 서부도암감로왕도의 모사본(模寫本)이 대웅전 우측에 걸려있다.
원본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상단에는 칠여래와 관음, 지장과 인로왕보살, 중단에는
한 쌍의 아귀와 제단, 하단에는 육도 제상을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감로도(甘露圖)는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 시킨다는 의도에서 붙혀진 이름으로
감로왕도 또는 감로탱이라고 하며 영가단에 봉안하는 탱화이기 때문에 영가단 탱화이라고도 하며
내용상 우란분경(盂蘭盆經)을 근본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우란분경변상도라고도 한다
선암사 대웅전 신중탱화
불교의 호법신을 묘사한 불화로 본존불의 중심에서 우측의 벽에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화에서 나오는 많은 호법신들은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다
이런한 점에서 신중탱화는 그 어떠한 탱화보다도 우리나라 고유의 특성이 강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중탱화는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서 바탕을 둔 것으로
39위(位)의 신중탱화가 그 원형을 이루다가 조선시대에 불교가 차츰 민간신앙과
강하게 결합되면서 많은 신들을 수용하여 104위, 신중탱화를 이루게 되었다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제 395호)
선암사 대웅전앞 좌우에 서 있는 신라때의 석탑으로 특별한 장식이 없는 화강암 석탑이다.
선암사 아래쪽 계류를 건너는 곳에 선암사 승선교가 있다. 조선조때의 이례적인 아치교 다리로
보물 400호로 지정되었으며 삼층석탑을 수리할 때 나온 유물들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선암사 대웅전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 주수완 박사님
선암사 구시
연대:조선시대
재질:괴목(회화나무:콩과의 낙엽 활엽교목)
용도:대중공양을 위한 밥 보관 그릇
크기:330×80×50cm
대웅전 한 쪽에 놓인 선암사 구시는 길이는 길이가 3m가 넘는 거대한 목조 용기이다
일반적으로 큰 통나무를 파서 그 안에 밥을 보관하는 것을 구유 또는 구시라고 하는데 만든 재질이나
지명을 따서 구시 앞에 명칭이 붙혀지고 있다...선암사 구시는 전하는 말로 칡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그 재질은 괴목으로 판단되며 2천인분의 밥을 보관하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선암사는 아도화상의 비로암에 개창한 이래 수많은 선승과 강백을 배출하였으며 전국에서
승려와 대중들이 모여들어 한때 선암사에 주석한 승려들이 2천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 선암사 안내문 인용 -
응향각(凝香閣)
대웅전 서편에 남쪽을 향하여 서 있는 선방으로 선암사의 중요한 유구들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이기도 하다.
정면 4칸, 측면 1칸에 홑처마의 맞배지붕에 남쪽과 북쪽에 정면을 두고 담으로 외곽을 쌓다
우측의 지붕은 북쪽으로 꺽여 ㄱ자형을 이루었고, 낮은 외벌대의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굴곡이 심한 우미량(牛尾樑:파리를 쫓는 황소 꼬리 모양의 흰 보)과 장여받침 납도리(모나게 만든 도리)
를 결구하여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단순한 민도리집이다
대웅전 광장 서편 설선당(說禪堂)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공간답게 별도의 담장을 둘렀다.
설선당 북쪽 건물은 응향각(凝香閣)이다
선암사가 자리 잡은 대지는 그다지 넓지가 않다. 따라서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그 단부(段部)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선암사의 건물들이 좌우 방향으로는 다소 넓으나 전후 방향으로 좁은 것은 그 까닭이다.
이러한 단들은 오르는 방향으로 분절(分節)하여 위계성을 주며, 시각적으로는 전개되고 폐쇄되는 효과를 준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다양한 영역과 축선인데 사찰의 규모가 크고 불전의 수가 많으니
주축 외에도 여러 개의 축을 설정하여 둘 이상의 주불전이나 영역을 통합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주축상에 위치한 대웅전 영역의 건물군 외에도 원통전 영역, 응진당 영역, 강황전 영역 등 경내 전체를 네 개의
영역으로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대웅전 영역에서 약간씩 비켜 서 있다. 특히 이러한 소 영역들은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축대로 쌓여진 각각의 서로 다른 단 위에 펼쳐져 있다
불조전(佛祖殿)
불조전은 대개 사찰의 개창자나 중창자, 중수자 및 역대 유명한 선조사(禪祖師)스님들의 진영이 봉안된다.
그러나 이곳 선암사의 불조전에는 과거 7불과 미래의 53불 즉, 60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전각인데,
1761년에 중창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기와집으로 주심포 형식에 익공 형식이 가미된 건물이다.
불조전 내부의 모습
불조전의 풍경
선암사 조사전(祖師殿)
조사전(祖師殿)은 역대 선승들 진영 한 곳에 모신 곳으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비롯하여 그의 법맥을 이은 육조혜능(六祖 慧能), 임제의현(臨濟 義玄), 양기방회(楊岐 方會),
석옥청공(石屋 淸珙), 태고보우(太古 普愚), 침굉현변(枕肱 懸辯) 등 한국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7명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조사전 내부의 모습
장경각(藏經閣)
건물의 명칭이 의미하는대로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정면3칸, 측면 3칸의 목조 팔작기와집으로 대웅전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고적도보」에는 장경각이 2층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건물은 단층이다
이 문헌에 의하면 1층은 정면 3칸, 2층은 정면 1칸을 1층의 중앙칸 위에 그대로 올렸다.
또한 1층은 중앙칸에만 창호를 두었고, 좌.우칸은 마루를 깔았던 것으로 보이며 난간은 돌렸다.
장경각의 편액은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1873~1943) 선생의 글씨이다
장경각 내부의 모습
원통전 영역 후문인 일각문(一閣門)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응진당 영역과 각황전 영역으로 이어진다
원통전 뒷뜰에는 수령 600여년이나 된다는 백매화와 홍매화가 여러 그루 있는데,
모두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된 것들이다
선암사는 꽃나무들이 많아 한마디로 꽃 절로서 매화, 철쭉, 왕벗나무목련 들 모두가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다.
봄이면, 피어나는 꽃들이 고풍의 절집과 돌담이 함께 어울려, 조계산을 등에업고 연출하는 풍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못하게 하며 더불어 돌담과 어울린 고매의 자태는 모든 사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칠전선원(七殿禪院) 입구
대문각에는 '호남제일선원(湖南第一禪院)'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 칠전선원(七殿禪院)이라는
선암사 선방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가
이곳은 선암사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한 응진당(應眞堂) 영역 울타리 안에는 응진당을 중심으로
달마전과 미타전, 진영각 등 7채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가 선암사의 두 곳 선방 중
상선원(上禪院)에 해당하는 칠전선원(七殿禪院)이다. 물론 이들 건물군만이 아니라 그리고 뒷쪽에
조성된 차밭까지 포함된다. 건물이 일곱 채인 것은 석가모니 이전에 세상에 출현했던 과거칠불(過去七佛)을 상
징하며, 그런 의미에서 선원의 이름이 '七殿'이 되었다는 그럴싸한 설도 있다.
이 칠전선원은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선암사 대각암에서 오도(悟道)한 뒤 현재의 칠점선원 터에
칠구선원(七區禪院)을 세운 이래 무수한 선사들이 거쳐 간 수행터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지리산
칠불암선원, 금강산 마하연선원, 묘향산 보현사선원과 함께 전국 4대 선원으로 꼽혔다고 한다.
선암사 칠전선원을 거치지 않으면 중으로 인정을 못할 정도로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같다는 것이다.
선암사의 선방 수좌(首座)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의 어느 선방에서도 받아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전한다.
그런 명성을 생각한다면 칠전선원의 규모는 보잘 것이 없다.
응진당(應眞堂)
선암사 응진당은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정면 3칸, 측면 3칸 목조 맞배기와집으로 깬돌을
경사지게 쌓아 높은 축대를 이루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에 두리 기둥을 세웠다
기둥사이에는 기둥위에 창방을 걸치고 그 위에 화반을 놓은 다음 소로를 얹어 뜬장여를 받치고 있다.
또한 벽면에서 1출목이 튀어 나오고 그 위에 장여받침인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어 단촐한 느낌을 준다
응진당 내부의 모습
응진전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소였던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유마경(維摩經)」.
「증일아함경(增一阿含慶)」등에 나오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셔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십육나한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나한전 또는 영산전이라고 한다
선암사 칠전선원 내에 영역에 있는 주불전으로 좌측에는 달마전(達磨殿), 우측에는 진영당(眞影堂)이 있다.
칠전선원에는 지금 수행중
선암사 진영당 내부의 모습
진영당(眞影堂)
선암사 큰 스님들의 진영(眞影)을 모셔놓은 곳으로 이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특별한 장식없이 민도리 형식으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달마전(達磨殿)
칠전선원 안쪽 응진당 좌측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스님들의 요사겸 선방으로 쓰고 있다.
칠전선원 안쪽에 있는 응진당과 갈마전, 진영당을 참배하고 다시 되돌아 나오니 선암매가 즐비한 길이 보인다
선암매 길을 지나 선암사 중수비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선암사 중수비 가는길
선암사 중수비 안내판
선암사 중수비(仙巖寺 重修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92호)
1707년(숙종 33)에 건립된 석비로 선암사의 무우전(무우전) 뒷편 북암가는 길목에 서 있다.
선암사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승려 약휴(若休. 1664~1738)가 1698년부터 8년 동안 선암사를 중수하였다.
약휴스님은 선암사를 성심으로 보호하여 <호암자. 護巖子>라고 불렸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중수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총 높이 5.02m, 비신 너비 1.25m, 두께 30cm의 크기로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세우고, 정상에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귀부의 귀두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나, 목이 매우 짧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며, 귀갑(龜甲)은 육각문이 음각으로
선명하게 시문되어 있다.
이수는 하단에 앙련을 두르고 상단에 두 마리의 용이 얽혀서 꿈틀거리고 있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조각되어있어, 조선시대의 석비로는 수작에 속한다고 한다.
선조암(禪助庵)터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300~400m 떨어진 선조암(禪助庵)터의 우측에 위치하며 기단부인 지대석과
하대석, 그리고 중석, 상대석을 갖추고 탑신부와 옥개석, 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작품이다.
부도는 경내에 있는 무우전 부도 및 대각암 부도와 함께 동시대인 고려 전반기에 속하면서도 가장
빠른 시기인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명 선조암지 부도라고도 한다
선암사에서 가장 윗쪽에 있는 곳인데 녹차밭속에 묻혀 있다.
오늘 날씨가 38도를 가리키고 있는데다가 조금만 움직여도 옷이 다 젖어 버리기에
오르지 않고 카메라 렌즈로 당겨보고 중수비를 훝어본 다음에 다시 내려간다
수령 600년(620년)이 넘었다는 선암매의 모습...원통전 뒷쪽에 있다
첨성각(瞻星閣)
원통전 좌측 옆에 허름한 전각이 하나 서 있는데 학정 이돈홍 선생이 쓴 첨성각(瞻星閣)이다
전각이라기 보다는 허름한 일반 가정집의 안채처럼 보이는 아주 소박한 절집이다
원통전첨성각 중창상량문에 의하면 1780년대에 중창되었고, 그 후 1860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원통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기거하시는 요사채로 첨성각이란 별을 보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별이 보이는 새벽에 일어나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첨성각 내부의 모습
첨성각에서 원통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선암사 원통전(圓通殿)
원통(圓通)이란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준말로,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통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원통전이다. 따라서 관음전은 원통전과 같다
원통전은 약휴선사(若休禪師)가 1698년에 창건하고, 1년 후에 불조전을 창건하였으며 정면 3칸 가운데 칸의
지붕을 밖으로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丁자 모양의 건물이 되었다. 丁자의 돌출된 부분이 팔상전과 불조전 사이에
일치하여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원통전의 지붕면만 노출된다.
선암사는 일주문, 대웅전을 잇는 남북축선상에 대웅전 좌우로 설선당과 심검당을 두어 중점을 형성하고,
그 위에 여러 전각들을 지세에 맞추어 배치하였는데, 원통각도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원통가의 좌향은 동남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丁)자형 건물로, 정면에 기둥과 活柱를 내어
처마선을 길게 노출시켰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전면은 약 1m 정도되는 축대를 쌓았고, 양 측면과 후면은 외벌대로 되어 있다.
초석은 덤벙주초와 일부는 원형의 다듬돌로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을 얹고 창방으로 걸었으며, 창방과 장혀 사이에 화반, 동자주가 있다.
화반 위로는 장혀, 도리, 서까래 순으로 짜여져 있다
원통각 내부는 보가 없는 무량구조로서, 이 지방에서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구조 형식에 속한다.
내진과 외진은 간단한 벽과 문으로 구분되어 내진은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외진의 천정은 우물반자로
짜여져 있으며, 내진의 천정은 출목을 연결시켜 천정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 (위 사진)이 봉안되어 았는데, 스승인 침굉스님으로부터 선암사를
보호하라는 뜻에 따라 호암(護庵)이라는 이름을 받은 약휴(若休)스님이 선암사의 뒷산 선암에서 본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그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복전(大福田)
1789년(정조 13)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이곳 원통전에서 그리고 해봉스님은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드디어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다.
후일 왕위에 오른 순조가 그 고마움에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하였다. 이 현판은 원통전 내부에 걸려 있다
원통전의 풍경
원통전을 지나 선암매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절 집 길을 걸으니 宗正院이란 앙증맞은 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선암사에서 가장 조용한 공간인 각황전과 무우전이 저 안에 있는데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선암사 각황전과 무우전 대문 역할을 하는 宗正院
무우전(無憂殿)은 선암사에서 가장 외진곳에 위치하여 선방으로는 아주 적격이다
사찰의 요사채라기 보다는 양반집의 사랑채처럼 보이는 전각으로 건물의 뼈대가 굵고 칸실이 높다
정면 8칸반, 측면 6칸의 한식 기와로 전면은 팔작지붕이고 양 측면의 날개는 맞배지붕이다
ㄷ자형 평면을 한 집으로 지금은 선방을 겸한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으며 태고종 종정의 침실이
마련되어 있고, 대개 외지인들에게 제공되는 방이라고 한다
선암사 각황전(覺皇殿)
선암사 창건 당시의 기록은 없고, 1088년 대각국사 의천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원년(861)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60년에 복원하였고, 다시 1760년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각황전을 장륙전(丈六殿)으로 부르는 이유는 장륙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인 장륙존상을 봉한했을것이고,
그러한 장륙존상의 예는 신라 황룡사 금당 장륙존상대석(丈六尊像臺石)의 유지에서 알 수 있다
선암사 경내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각황전은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하여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규모는 작으나 화려한 멋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각황전 안에는 우물천정으로 하고
있으며, 처음 지었을 당시 조성하였던 철불을 1900년 경에 석고로 도색하여 봉안하고 있다
방지(方池)
선암사 경내 연못은 삼성각 옆에 있는 방지(方池)와 설선당 서쪽의 쌍지(雙池)가 있는데
절 뒷면에서 흘려든 계류는 방지에 머물다가 쌍지를 거쳐 그 아래에서 작은 폭포를 이룬
다음에 일주문 앞쪽에 있는 삼인당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선암사라는 절간에도 역시 사람 사는 사바세계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곳,
고색창연한 건물 선암사종무소와 적묵당(寂默堂)이 있고, 커다란 석조(石槽)에는
시원한 샘물이 넘치고 갖가지 수목이 어루러진 아름다운 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삼성각
대웅전 북서쪽에 위치한 조그맣고 간결한 건물로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삼성각 내부의 모습
뒷간의 안내판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구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소설 "칼의 노래"의 김훈 작가는 그의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배설의 낙원이다. 전남 승주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 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오와서 양명(陽明)하다...
그러나 선암사 화장실은 하도 깊어서 " 저녁에 스님이 대변을 보고나서 아침에 소변 보러 화장실에
들르면 그때서야 쿵하고 똥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깊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끝이 잘 안보인다.
아랫쪽에서 바라본 뒷간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된 뒷간이 있는데 맞배지붕에
마루바닥을 댄 목조건물은 T자형 모습을 하고, 아랫층의 큰 주춧돌은 큰 뒷간을 버티고 있다.
전남 지방에선 평면구성을 한 측간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가치가 높다.
정자형 이 건물은 ‘뒷간’이라 적힌 현판을 못보고 지나치면 뒷간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뒤ㅺᅟᅡᆫ’이라는 한글 고어로 거꾸로 적혀 있어 ‘뒷간’이 아닌 ‘깐뒤’로 읽히기도 한다.
뒷간 내부로 가면 남녀용으로 구분되는 문이 있다.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용으로 각각 8칸씩 나뉜 공동변소다.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고, 안쪽에서는 뚫린 창살 사이로 경내를 감상할 수 있는 뒷간이다
'선암사 측간(뒤깐, 해우소 ,화장실, 변소)
이곳은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 옆으로 분리되어 있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20년 이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 뒤깐'이다.
선암사 해우소(解憂所)는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로, 출입용으로 맞배지붕을 붙여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전라남도 지방에서 이와 같은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 총 26칸으로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해우소 중 가장 큰 건물이다.
그만큼 대중들이 많은 절집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화장실로서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사례이다.
그 명칭은 순천선암사측간(順天仙巖寺厠間)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유재란 등 여러 차례의 선암사 화재
중에서도 소실되지 않은 몇몇 건물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똥을 의미하는 분(糞)은 쌀 미(米)와 다를 이(異)가 합쳐진 한자로 선암사 해우소는 공양을 하는 곳과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공부 하고, 해우소에서 몸의 오물을
처리하라는 의미이다.
사찰의 해우소는 일반 화장실과는 달리 사용상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낙서하거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하며, 힘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셋째, 외우고자 하는 게송이 있다면 외운다.
넷째,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온다.
다섯째, 손을 씻기 전에는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님의 詩 中에서>
선암사 무량수각
종무소 뒤쪽 건물 무량수각(無量壽閣)인데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여 갈 때마다 눈길을 오래 끄는 건물이다.
자세히 보면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말고도 불교강원(佛敎講院), 불교전문교육원, 한국불교 태고종립 선암사승가대학
(韓國佛敎 太古宗立 禪巖寺僧伽大學) 등 여러 개의 현판이 보인다. 선암사 내에서도 다양하고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이며 여기가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림(叢林)임을 가장 뚜렷하게 느끼게 한다.
이 건물 역시 선암사 네 곳에 있는 승방(僧房) 중의 하나로서 앞뜰에 자리잡은 특이한 모양의 소나무(臥松)와 어우러져
고졸하고 그윽한 느낌을 풍긴다
마침 휴식 시간인 모양이다...공부하던 학인스님들이 물한모금 마시고 뒷간으로 향한다
엄청나게 무더운 날씨에 너무나 먼 곳을 오다보니 순례객들이 지친 모양이다.
성보박물관은 그냥 패스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일주문을 빠져 나오면서 선암사에 대한 예를 올리고 송광사를 가기위해 주차장으로 향한다
선암사가 자리하고 있는 조계산(曺溪山)의 매력은 무엇일까.
물론 승보사찰인 송광사(松廣寺)와 태고총림인 선암사(仙巖寺)가 이 산의 강보에 싸여 있는 것도 확실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산의 푸른 배경이 되는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그리고 햇볕과 계곡물이 현상 뒤의 심원에
깔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선암사에 오면 말문을 닫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이곳은 태백산맥의 저자인 조정래 선생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조정래 선생의 부친이선암사 부주지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한국. 좌.우익에 대한 묘사를 리얼하게 그려낸 대하소설“태백산맥”의
주무대가 이곳 선암사에서 그리 멀지않은 벌교땅이 아니였던가그리고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속에
좌익의 근거지가 되어 ‘한국의 모스크바’ 라불리기도 했던 보성군 외서면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탓에 피해를 많이 본 곳이기도 하다
선암사 선원교를 빠져 나오면서 선암사를 생각하니 불자로서 맘이 착잡하다
선암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 이후 빚어진 비구ㆍ대처 갈등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소유권은 조계종이 갖고 있지만 태고종이 점유해 그동안 갈등을 빚어왔다.
이에 정부가 전통사찰보존법을 근거로 1970년 순천시장을 선암사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해 2009년까지 관리해왔다
선암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됐다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 사찰로서
임진왜란 이후 왜군들이 퇴각하면서 불을질러 거의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으나 1660년(현종1년)에
다시 중창하였고, 영조때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24년)에 해붕스님이 다시 중창했다.
민족 역사와 질곡을 같이한 천년고찰 선암사
그러나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유시’로 인해 비구(수행승)와 대처(교화승) 대립이 심화됐고
두 종단의 갈등으로 인해 정부가 1970년에 재산관리권을 순천시에 넘기면서 비극이 발생했다.
지금도 재산관리권은 순천시, 점유권은 태고종 선암사, 소유권은 조계종 선암사로 3분되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특히 대장경의 목함에 순서를 표시하기 위해 붙였던 경패는 두께 0.5cm
숙숙림하승(肅肅林下僧):쓸쓸한 숲 아래 스님일세
정진혼파락(情塵渾擺落):마음 속 띠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수정징응(智水正澄凝):슬기로운 물은 맑게 고여 있네
은예팔천성(殷禮八千聖):팔천의 성인에게 예배하고
담교삼요간(淡交三要間):담담한 사귐은 삼요의 벗일세
아래소열뇌(我來消熱惱):내가 와서 뜨거운 번뇌 식히니
여대옥호수(如對玉壺水):마치 옥병 속 얼음 대하듯 하네
선암사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송광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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