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8년 6월 23일
월출산 품에 안겨있는 무위사와 도갑사로 성지순례길에 나선다
법보신문사에서 진행하는 삼국유사 성지찾아 떠나는 인문학 기행
이번달에는 남도길 월출산에 남.북쪽에 자라잡고 있는 무위사와 도갑사로 향한다
이번달의 테마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찾아서인데 이른 아침 집을 출발하여
조계사에 들려서 참배를 하고 07시에 출발하여 강진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다
강진에 도착하니 12시가 다된 시간이라 다들 시장한 탓이지 점심 공양을 하고 무위사 참배를 하기로 한다
강진군 병영면에 있는 유명한 설성식당
오늘 참배할 사찰은 남도길 중에서도 가장 먼 곳이라 그런지 참으로 멀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 다시 목포를 지나 무위사 I.C를 빠져나와 강진읍 가기전에
병영면에 있는 유명하다는 한식집에서 점심공양을 하는데 얼마나 손님이 많은 대기표를
받아서 기다려야 했다... 전통 한식집인데 1인당 9,000원인데 서울의 40,000원짜리
밥상만큼이나 푸짐하다...손님이 많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곳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느긋하게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무위사로 향한다
|
무위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월출산
월출산은 강진과 영암을 남.북으로 반반씩을 차지하고 있는데 강진쪽의 월출산 자락에는
무위사가 자리를 잡고있고, 영암쪽은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가 있다.
흔히 월출산을 일컬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르고 있지만, “월출산을 펼쳐놓은 것이 금강산”이라
할 만큼 월출산은 보는 위치와 계절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자태를 느끼는 곳이다
버스에 내려 주차장으로 나오니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운 날씨가 순례객을 맞이한다
편안한 길을 따라서 무위사 일주문으로 향한다
무위사(無爲寺) 일주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월출산 있는 무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대흥사의 말사로
『무위사사적(無爲寺事跡)』에의하면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에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고 개칭한 뒤 많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그 후 946년(고려 정종 1년)에는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스님이 다시 중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고
불리다가, 조선 명종 5년인 1550년에 태감(太甘)이 4창한 후 지금의 이름인 무위사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905년(효공왕 9년)에 선각대사 형미(逈微)스님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수륙사(水陸社)로 유명하였다.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水陸齋)를 행했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다
주차장에 일주문을 향하는데 명성에 비해 절집은 다소 소박하다
참배객들도 별로없고 소임을 맡은 스님이 안 계시는지 순례객을 맞이해주는 스님도 없다
일주문의 건립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남도의 절집답지 않게 화려하다
무위사 일주문 현판
“月出山無爲寺” 현판은 南岡 李孝甲이라는 분이 쓰신 모양이다
“無爲”란 무엇인가?
무위라 하면 언뜻 떠오르는 단어가 무위도식(無爲徒食)이 생각난다
특별히 하는 일없이 빈둥빈둥 놀면서 먹기만 하는 사람을 말하며 사전적인 의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인데 불교적 의미는 “현상을 초월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
즉, 없어지지도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은 존재를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의미는 열반(涅槃)의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일주문 천정의 龍頭
일주문을 지나니 좌측으로 차와 기념품을 파는 보응료가 보인다
무위사 천왕문
비파를 든 동방지국천왕
칼을 든 남방증장천왕
창과 보탑을 받쳐든 북방다문천왕
북방다문천왕 발에 밟혀 신음하고 있는 악귀
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광목천왕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로 향한다
보제루(普濟樓)
2층 누각으로 이 누각의 아래층은 해탈문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보제루란 통상
사찰의 중심 법당 앞에 세우는 누각으로 두루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보제루를 통과하여 무위사 절 마당으로 들어선다
극락보전 앞에서 무위사 인증샷
극락보전 앞마당의 배례석
극락보전 바로 앞에는 길이 130cm, 폭이 98cm, 높이가 10cm 정도 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가운데는 커다란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는 이 배례석은 불공을 드릴 때 향로나 제기를 올려놓던 자리로 추정이 된다
무위사 극락보전(無爲寺極樂寶殿:국보 제13호)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이 극락전만큼은 1956년경 수리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뒷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연기문(緣起文)을 통하여 1476년(성종 7) 이전에 지어진 건물임이 밝혀졌다.
이 불전은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세웠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공포(栱包)는 주심포계(柱心包系), 지붕은 맞배지붕을 한 단층 겹처마집이다.
기단은 앞쪽만을 높게 쌓고 두 옆면과 뒷면은 지세(地勢)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柱坐)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柱心包作)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다.
출목의 수는 이출목으로서 바깥쪽 포의 끝은 제공(諸貢: 공포에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짜여진 것)처럼 되어 있고,
내포(內包)는 1장의 판으로 만든 것처럼 파련(波蓮)무늬를 새긴 운공(雲工: 장여와 도리를 받는 초새김한 짧은 재목)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가운데칸 양쪽 포 위에 놓고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과 ㅅ자 솟을합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렇듯 가구구조(架構構造)는 2중량(二重樑) 구조로 되어 있는데, 건물 외부에서 보면 2중량 구조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高柱)위에 중종보[中宗樑]만이 걸쳐져 있고 그밖에 창방(昌枋)·퇴보·장여 등 작은 직선재(直線材)로 측면을 간결하게 구성하고 있다...건물의 앞면은 격자모양·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四分閤) 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건물 안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마련하여 아미타삼존불좌상(阿彌陀三尊佛坐像)을 봉안하였고, 그 뒷벽에는
1476년(성종 7)에 조성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측면 벽에도 조선 전기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었는데
해체 수리하면서 벽체 그대로 뜯어내 보존 전시하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 대신에 전돌을 깔았고 천장은 위쪽 가구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불상 윗부분에만 보개(寶蓋)와
우물반자를 가설하였고, 공포는 기둥머리 위에서 내려다본 단면이 十자형인 쌍S자형 첨차로 그 위에 장여와 제2살미를
놓아 외목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이 첨차는 다시 제3살미와 직교하여 외목장여를 받치고 있다.
외포(外包)의 첫 출목의 첨차 끝 절단면은 느린 기울기를 가지며 밑면의 S자모양 곡선은 부드럽고 힘차다.
기둥머리나 소로[小累]의 굽은 단면이 직선이고 굽받침이 없다. 이러한 세부적 특징은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의 양식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조선 초기 주심포 건물의 양식적 특징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현판
극락보전을 설명하시는 주수완 박사님
극락보전 외벽과 공포에는 그 흔한 벽화 하나없이 단순하고 깔끔하다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다듬돌과 거친돌을 바른 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한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3출목의 공포를 포작하고 대들보를 얹었으며, 양쪽에 파련대공을 놓아 중종보를 받치고 있다.
가구구조는 이중량 구조로 되었으나 건물측면을 보면 이중량으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 위에 중종보만이 올려져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공포는 주심포 형식이다. 기둥은 간살이가 넓어 호남지방 특유의
오래된 수법을 지니고 있다.
측면은 건물의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벽체의 면과 가구의 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맞배지붕으로 된 주심포계 건물의 특징으로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의 측면에서도 이와 비슷한 아름다운
구조미를 볼 수 있다.
이 건물의 구조형식은 수덕사 대웅전에 비유할 만큼 아름답게 장식되어 비록 헛첨차와 우미량은 없지만 두공 위에서
짜여진 살미와 첨차 그리고 그 내부의 보를 받는 보아지, 또 마루대공의 파련화와 인자대공의 조식이 빼어나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진 주심포건축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구조형식을 지니고 있어 하나의 건축양식이
정착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또한 건축양식 사적인 분류로는 주심포 중기건축에 속하나 조선중기부터는 다포계
건축이 주류를 이루어서 실제적으로는 주심포계의 전형적인 규범을 보여주는 완성기의 건물로 볼 수 있다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무위사 극락전은 1956년에 해체보수하고 1974년에 벽화를 이전하고 다시 1983년에 해체·수리하였는데
이때 종도리 받침 장혀에서 선덕 5년 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나와 이 건물이 1430년(세종 12)에 지어졌음이 밝혀졌다.
소박하고 따뜻함이 묻어 나오는 무위사 극락보전은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아름다움을 가진 편안한 전각이다
고려 후기의 곡선 재료가 아닌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극락보전 기단은 앞쪽만을 높게 쌓고 두 옆면과 뒷면은 지세(地勢)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柱坐)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柱心包作)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고, 출목의 수는 이출목으로서 바깥쪽 포의 끝은 제공(諸貢: 공포에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짜여진 것)처럼 되어 있고, 내포(內包)는 1장의 판으로 만든 것처럼 파련(波蓮)무늬를 새긴
운공(雲工: 장여와 도리를 받는 초새김한 짧은 재목)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가운데칸 양쪽 포 위에 놓고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과 ㅅ자 솟을합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당간지주와 배려석은 단아함과 간결함을 강조했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 대신에 전돌을 깔았고 천장은 위쪽 가구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불상 윗부분에만 보개(寶蓋)와
우물반자를 가설하였고, 공포는 기둥머리 위에서 내려다본 단면이 十자형인 쌍S자형 첨차로 그 위에 장여와 제2살미를
놓아 외목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이 첨차는 다시 제3살미와 직교하여 외목장여를 받치고 있다.
외포(外包)의 첫 출목의 첨차 끝 절단면은 느린 기울기를 가지며 밑면의 S자모양 곡선은 부드럽고 힘차다.
기둥머리나 소([小累)의 굽은 단면이 직선이고 굽받침이 없다. 이러한 세부적 특징은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의
양식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조선 초기 주심포 건물의 양식적 특징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한 주수완 박사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선다.
극락보전에 들어서 반야심경을 봉독하면서 간단한 예를 올리고 주박사님의 강의는 계속된다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 삼존불과 후불벽화의 모습
(삼존불 뒷면에 있는 것은 천에 그림을 그린 탱화가 아니라 흙벽에 붓질을 봉안한 벽화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전각 자체가 보물창고이자 성보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극락보전 전각이 국보 제13호이고, 불상의 후불벽에 조성한 아미타여래삼존 후불벽화가 국보 제313호,
벽화 앞에 봉안된 아미타여래 삼존상은 보물 제 1312호, 후불벽 뒷면에 있는 수월관음도(백의관음도)는
보물 제 1314호, 아미타래영도를 비롯한 극락보전 내부사면 벽화 일괄 27점은 보물 제1315호이다
한 법덩 건물에 국보가 2점, 보물이 3점이니 왠만한 박물관 수준을 능가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초로 이어진 전각으로 후불벽화 좌.우 하단에 남아있는 화기(畵記)와
1983년에 발견된 종도리 장혀의 묵서명, 그리고 2011년 단청 모사작업 과정에서 찾은 천개반자 묵서명을
통해 건축과 벽화조영 연도가 밝혀졌다.
즉, 극락보전 건립은 1430년, 후불벽화및 수월관음벽화 제작년도 1476년, 단청장엄은 1526년으로 편년되었다.
이 시기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의 표현에 따르면 쓰라린 삶 속에서 문학이나 종교를 통해 목가적이며 인간본위로의
탈출을 꿈꾸던 중세의 가을 무렵인데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의 싹이 움틀 시기에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 후불벽화는
1476년에 제작되었다.
이는 레오나드 다빈치의「최후의 만찬」프레스코 벽화보다 약 20년 앞선 것이고 미켈란첼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벽화보다 60년이나 앞선 것이라고 한다...이 후불벽화는 15세기에 왜구의 약탈과 살상이 빈번한 시대
상황에서 그려진 작품으로 기근과 왜구의 침탈 속에서 희생된 민초들의 종교적인 위령제는 수륙재(水陸齋)였다.
그 당시 무위사는 수륙재를 맡은 수륙사(水陸社)의 지위를 가졌고 아미타여래의 정토신앙에 의지했다.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은 세가지라고...
이 세계를 온 몸으로 저항하며 거부하던가, 모순의 세계를 변혁하던가, 아니면 환상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라고 하였다.
15세기 조선의 민초들은 수륙재와 정토신앙에 의지하는 ‘꿈의 길’을 택했다
무위사 아미타삼존후불벽화(국보 제313호)
무위사 극락보전의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조선초기(1476년)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을 그린 벽화이다
화면 중앙의 높은 수미대좌 위에 아미타불이 결가부좌하였고, 왼쪽(향우)에는 관음보살, 오른쪽(향좌)에는
지장보살이 정면에 서 있으며, 그 위로는 좌.우에 각각 3명씩 총 6구의 나한이 구름속에 상반신만 드러낸 채 서 있다
화면 상단부 좌.우에는 작은 규모의 화불이 2구씩 배치되어 있다.
세로 207cm, 가로 210cm의 벽면에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6구의 나한 및 2구의 화불이 배치된 아미타삼존도벽화로서,
중앙의 아미타삼존을 벽면 대부분을 차지하게끔 크게 그리고 나머지 권속들은 작게 묘사한 삼존불 중심의 구도를 취하였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가슴으로 들어올려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왼손은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고 첫째와 셋째
손가락을 마주 잡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한 채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머리에는 크고 넓적한 육계가 묘사되었는데, 작은 이목구비와 높은 육계 등의 표현이 고려 아미타불화의
얼굴 표현과 유사하며 이 벽화에 보이는 고려 불화적인 요소는 착의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안에 군의(裙衣)를 입고 붉은
바탕에 원문이 있는 대의를 입은 모습은 고려 아미타불화의 착의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대의의 원문이 간략해지고 승각기 없이 군의만 입은 모습에서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본존의 좌우로는 왼쪽에 지장보살, 오른쪽에 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는데, 원래 아미타불의 양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지만 고려시대에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벽화에서도 그와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화불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아 정병을 들고 정면을 향해 몸을 살짝
비튼 모습으로, 어깨 위로는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얇고 투명한 옷을 걸쳤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서있는 지장보살은 조의가사(條衣袈裟)에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다.
구름 속에 상체만 드러낸 6구의 나한은 합장하고 본존을 향해 또는 서로 마주보면서 서있는데, 둥근 얼굴에 개성이 뚜렷하다.
채색은 황색바탕에 붉은색과 녹색, 검은색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한편, 이 벽화의 좌우 하단에는 ‘□□12년 병신년 3월에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그렸으며, 화원은
대선사(大禪師) 해련(海連)’이라는 내용의 화기가 적혀있다. 여기서 말하는 □□12년은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북탑지(北塔誌)
내용 중 성화(成化) 14년(1478년) 무술(戊戌) 4월 17일에 무위사에 주불을 주조하고 대회(大會)를 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화 12년, 즉 1476년으로 추정된다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에는 기둥이 전혀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루었고 건물 내에 고주가 없어 후불벽을 세우기 위하여
양측에 각재를 올려 세워 그 사이에 벽을 발라 벽화를 그렸다. 벽 앞에는 불단을 놓고 반자를 짜 감실 보개천장을 만들었다.
불단 위쪽에는 닫집모양의 보개를 올리고 단 위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모셨는데 가운데 본존불의 눈은 활안(活眼)으로서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보는 이의 눈을 따라다닌다고 한다. 1956년 수리 시에 발견한 후불벽화는 이 건물의 창건보다
46년이 뒤진 것을 알 수 있다.
무위사 벽화에 관한 전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불상뒤의
벽화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무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이 그림은 강노지 등 여러사람의 시주로 화승(畵僧)인 대선사
해련(海連) 스님등이 그렸고, 성종7년(1476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화기가 분명하건만 벽화가 워낙 유명하다가 보니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날 한 노승이 절에 찾아와 법당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더니 49일동안 법당안을 들여 보지말라고 한다
노승은 법당에 들어가더니 문을 걸어 잠근 후 한번도 나오지 않고 음식을 달라고 하지도 않앗다.
궁금증을 못참은 주지 스님은 문 틈 사이로 법당안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다 그린 후 막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후불벽화의 관음보살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이 벽화는 1476년에 화원인 대선사 해련 등이 그린 것으로, 고려불화의 특징을 계승하는 한편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 즉 넓고 큼직한 육계에 작은 이목구비가 특징적인 얼굴과 착의법,
법의의 원문 표현, 두건 쓴 모습의 지장보살, 관음보살의 투명한 겉옷과 치마 끝단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온화한 색채 등 고려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간단해진 문양과 키 모양의 광배, 본존불 가슴 부근까지
올라온 협시보살 등에서 조선 초기에 새로 나타난 요소가 잘 표현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벽화이자
고려 말∼조선 초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보물 제1312호)
전라남도 강진군 무위사 극락보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삼존불로 본존불(本尊佛)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통견의(通肩衣)에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는 본존불상은 연화대좌와 불신을 하나의 나무를 사용하여 조성한 아미타불로,
건장한 체구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감이 있다. 전반적으로 고려 후반기의 단아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미소가 사라져
근엄해 보이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 쳐진 가슴, 간략화하고 정형화된 옷주름, 가슴 아래로 가로지르는
승각기의 평행 띠주름, 금구장식의 소멸 등 조선 초기 불상들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함께 갖추고 있다
좌협시상인 관음보살상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좌협시상으로 머리에는 화려한 금속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양어깨 위로는 굼슬거리는 보발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정인 모양의 두 손으로는 보병을 받쳐들고 있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간단한 가슴장식이 되어 있다. 앉은 모습은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대좌와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앞쪽의 옷자락 또한 몸으로부터 흘러내리지 않고 대좌와 함께 조성됨으로써 몸체와 분리되는 특색이 엿보인다
우협시상인 지장보살은 관음보살상과 대칭하여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6개의 금속제 고리가 매달려 있는 육환장을 잡고 있다.
세상 가운데 비교적 갸름한 형태의 얼굴로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가슴장식이 되어 있다. 걸터앉은 듯 오른
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이 상 역시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앞쪽 옷자락을 몸체와 분리하여 대좌와
함께 조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극락보전 불단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 삼존불좌상인데 중앙에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관음보살,
우측에는 지장보살이 자리잡고 있고, 연꽃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강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처진듯 표현되었으며 양 어깨에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 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인 관음보살상은 왼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모양의 가슴 장식이 있으며양 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고, 두 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우측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의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cm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으로 조선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에 대해 설명하시는 주박사님
강진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에 있는 조선 초기의 후불 벽화. 보물 제1314호. 화면 전체에는
관음보살이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화면의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보물 제1314호)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뒷면에 그려져 있는 백의관음도는 화면 전체에 관세음보살이 둥그스럼한
두광과 신광을 지고서서 화면 아랫쪽에 관세음보살을 예배하는 노비구를 내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의 주위에는 물결을 표시하여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인데 연판(連瓣)과 같은 모양의 대좌위에 서서
두 손으로 각기 정병(淨甁:범어(梵語)로는 군디카(Kundika)라 부른다)과 버들가지를 살짝 잡고 있다
넓적한 얼굴, 굵은 목, 넓은 어깨에서 남성적인 체구를 보여주고 있으며바람에 날리는 천의(天衣)의
모습을 표현한 강약의 변화있는 묘선이 이루는 긴장감 넘치는 필치는 활달하고 유려하며, 흩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강한 율동감과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내려다 보고있는인물은 승복을 입은 노비구의 모습이며, 무릎을 꿇고 합장한 자세와
표정은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염원이 매우 절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는 무위사 백의 관음도
1476년에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후불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관음보살도벽화는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관음보살이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고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벽화에서 선재동자 대신 노비구가 표현된 점이라던가 관음보살이 바다 위에서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모습,
노비구의 등 뒤에 있는 청조가 그려진 점 등으로 보아 이 벽화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동해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던
설화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벽화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후 유려하고 간결한 필치로 그린 관음보살벽화로,
1476년에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벽면의 가운데에는 흰 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는 비구형 인물이 보살을 향해 예배드리는 모습을 배치하였다.
관음보살은 두광과 커다란 신광을 두르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채 두 손은 앞에 모아 엇갈리게 하여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는 정병을 들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둥근 편으로 옆으로 긴 눈을 반쯤 내려뜨고 있다. 우뚝한 코 밑에는 팔(八)자모의 수염이 그려져 있고 커다란 귀와 함께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데, 목이 굵고 어깨가 각지고 건장하여 전체적으로 당당한 체구의 강한 남성적인 신체를 보여준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을 그린 관을 쓰고 있는데, 흰색의 천의가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양어깨를 감싸고
팔을 덮고 흘러내렸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앞쪽 아래 구석 둔덕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늙은 비구가 보인다.
이 인물은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는 관음보살을 찾아가서 청법(聽法)하는
선재동자(善才童子)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불화에서처럼 나이어린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승복을 입은 나이든 승려의 모습인 점이 특이하다.
비구의 어깨 위에는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 마리[靑鳥]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음보살상의 주위로 화면 전체에 물결 모양을 그려 넣어 마치 보살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잎을 타고 넘실대는
물결 위에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림의 우측 상부에는 고려시대의 문인 유자량(庾資諒)이 쓴 오언율시,
즉 “바다가 높은 벼랑 아득한 곳, 그 가운데 낙가봉이 있으니 대성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보문은 만나도
만남이 없네. 명주는 나의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와 이 사람은 상봉하였네. 오직 바라옵건대 푸른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같은 모습 뵈옵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의 낙산관음찬(洛山觀音讚)이 먹으로 쓰여 있다
후불벽화에 관한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보물 제1315호)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로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옆으로 긴 화면의 아래 위에 묘사된 구름을 배경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 등 삼존불이 부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좌우에 각각 3보살과 그 위로 비구들을 그렸다.
고려시대 경변상도의 필선과 닮은 활달하고 꾸불꾸불한 필선을 사용한 이 그림은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 고려불화의 양식이 짙게 나타나 있는 반면, 화면에 나한이 등장하는 등 세부 묘사에서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현재 동측 벽면에 그려진 아미타내영도는 모사본이며 원본은 보존각에 있다.
이 외에 설법도·보살좌상도·오불도·아미타여래입상도·해수관음좌상도·관세음보살도·대세지보살도·지장보살도·
비천선인도 등이 보존각에 보관되어 있다
극락보전을 나와서 감로수 한잔으로 목을 축인다
극락보전 좌측에 있는 미륵전과 산신각의 모습
무위사 미륵전(彌勒殿)
법당 안에는 도솔천에서 설법중인 미륵보살을 봉안하거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는데,
한국에서는 미륵불을 주로 봉안한다...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전각으로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석가모니불에 의해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성불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네가지 일(日事) 즉, 국토를 정화하고, 수호하며, 중생을 정화하고 수호하기 위해서다
무위사의 미륵전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불상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봉안하기 위해 세운 전각이다
석재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워서 만든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의 맞배지붕 전각이다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겨 모셨다
이마 위의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으나 불신(佛身) 주변의 화염문 광배를
선걱한 점이나 목의 심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如來)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뚜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추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원래 이 석불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마을의 독지가에 의해
무위사로 옮겨온 것이라 하며 현재 하단부가 마루바닥 밑으로 들어가 정확한 크기는 알 수가 없으나
마루까지 높이는 218cm라고 한다
무위사 산신각
무위사 산신각 내부의 모습
무위사 나한전(羅漢殿)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한다.
보통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과 석가삼존을 중심으로 500인의 아라한을 모신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오백나한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소승(小乘)의 최고 교법인 아라한과를 얻은 5백성중(五百聖衆)을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후세에 오백나한의 숭배가 성행하여 절에 따로 나한전을 세우고, 그 상을 안치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 오백나한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데 독특한 능력이 있다고 하여, 많은
나한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무위사 나한전에는 특이하게 석불좌상 하나가 모셔져 있다.
선각대사편광탑비 보물 표시석
선각대사편광탑비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하시는 주수완 박사님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는 864년(경문왕 4년)~917년(경명왕 원년)의 비로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써서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
(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9년후인 946년(정종 원년)에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선각대사가 탄생하여 가지산문의 체징(體澄)에게 출가하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운거도웅(雲居道膺)의 법을 전하고 귀국하여 무주의 세력가의 요청으로 무위사에 머물다 왕건을 만나
왕건의 요청에 따라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가서 궁예에게 간언을 하다 죽임을 당하는 생애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여 오관산의 산사를 수리하고 탑을 조성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2년 후 시호를 내린 사정을 기술하였다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보물 제507호)
높이 2.35m, 너비가 1.12m인 이 비석은 고려시대에 이곳에 주석했다고 하는 선각대사의 화강석 탑비로,
918년 선각대사가 입적하자 왕건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편광영탑'이라고 하였다.
비석에는 가로 세로 2cm 크기의 한자로 된 비문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비석은 귀부(龜趺, 거북돌)와 비좌(碑座), 비신(碑身), 이수(螭首, 머리돌) 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는
매우 정교하고 보존상태도 우수한 탑비로 귀부의 용머리 부분에는 두 개의 뿔이 조각되어 있으며, 속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은 속을 파내는 투조(透彫) 형식으로 조각을 했습니다. 등에는 6각갑(六角甲) 무늬를 양각으로 새겼으며,
이수에는 3단으로 겹송이 연꽃무늬를 장식한 귀한 작품이다
탑비 귀부 뒷면의 모습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빋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있는 용의 형상으로
중앙에 마련되어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에는 구름무늬와 둥근 형태의조각을 새겼다.
비 몸둥이에는 선각대사에 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 밑면에는 연꽃 무늬를 새긴 3단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 볼 수가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의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롤 가기를 기원하는
각 부의 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石碑)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에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무위사 3층석탑(전남 문화재 자료 제76호)
현재 무위사의 선각대사 편광탑비(946년) 바로 앞에 있으며, 조성연대는 탑비와 같은 시대인 고려 초기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으로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의 중석이 연결되어 있으며 각구를 2구로 나누어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 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하대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있으며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附椽)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다.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각면에 새겨진 면상은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반전되었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복발·구륜·보주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되었다.
3층 지붕돌과 1층 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 그 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무위사 성보박물관
후불벽화의 모습(모사본)
성보박물관의 백의관음보살도(수월관음도) 안내판
내영도
시간이 촉박하여 성보박물관을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고 박물관을 나선다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무위사 극락보전과 삼층석탑의 모습
무위사 범종각
최근에 조성한 듯 상당히 화려하다
무위사 절집 마당의 정갈한 모습
어린이 포교를 위한 것인가?
극락보전을 배경으로 인증샷
보제루를 빠져 나오면서 극락보전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무위사를 나온다
뒤돌아 본 보제루와 중수비
뒤돌아 본 무위사 가람의 모습
일주문을 빠져 나오면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도갑사로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한다
2014년 10월 9일에 땅끝기맥을 걸으면서 지나갔던 저 월출산 능선
오늘 성지순례를 하면서 와보니 모든게 새롭게만 느껴진다
무위사 주차장을 출발하여 13번 국도를 타고 월출산 반대편에 있는 도갑사로 향하는 길
영암에서 강진으로 가는 4차선이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이 길이 유배의 길이기도 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갈때 걸었던 길이기도 했고, 고산 윤선도가 해남으로
유배를 갈 때 걸었던 길이기도 한 곳이 이 13번 국도가 아니였던가
13번 국도에서 월출산을 바라보면 마치 다시의 고향이었던 양주 조안에서 도봉산을 바라보는
모습과 흡사하여 유난히 고향생각을 많이 했던 곳이 월출산이라 하지 않았던가
다산 선생은 강진에 유배를 와서 자신의 멘토이기도 했던 형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선생이
근처인 흑산도로 유배를 왔을때 형을 위해 지은 시가 생각이 난다
나주의 바다와 강진사이 200리
험준한 우이산이 두 곳을 만들었네
3년동안 묻혀살며 풍토를 익혔으나
흑산도의 이름이 여기 있음 몰랐네
인간의 안력이야 애쓴들 멀리 못봐
백보만 멀어져도 눈앞이 희미해라
더군더나 흙비 구름끼어 술 빛처럼 짙으니
눈 앞의 섬들이야 더욱 구별 어렵구나
손에 쥔 옥돌 쉼표 바라본들 무엇하랴
괴로운 마음 쓰린 창자를 남들은 모른다네
꿈속에서 서로 본 듯 안개속 바라보니
눈물만 흐르고 천지만 어둑해라
유배지에서 다산 선생의 심경을 잘 나타내는 詩이기도 하다
유배지에서도 오직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선비의 정신.
공무원들의 師表이기도 했던 다산 선생의 목민정신은 요즘 공무원들에게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으니
이 나라는 어찌될란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버스는 도갑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도갑사 일주문(道岬寺) 일주문(一柱門)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 북서쪽에 자라잡은 도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신라 말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그 뒤 세조 2년(1456)에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 때 966칸의 당우와 전각이 있었던 도갑사는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성보들이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었던 유물들도 일제시대와 6.25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1960에 중건하였으나 참배객의 부주의로 77년 대웅전마저 전소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현재에도 복원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도갑사 안내판
도갑사는 월출산에서 이어진 도갑산(道岬山)의 비교적 평탄한 대지에 산을 배경을 자리 잡았다.
배치 중심축은 서쪽을 향하도록 좌향(坐向)을 잡고 평지사찰과 산지사찰의 중간적 배치를 취하고 있다.
절 입구 정면에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계류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 숲 사이 길을 올라가면 왼쪽으로
새로 조성된 사적비가 있으며 여기를 지나 두 번째 산문인 해탈문(국보 제50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도갑사 중심사역에 이른다.
해탈문을 지나 완만한 경사로 좌측에는 도선국사 성보관이 있고, 경사로를 오르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에 중정이 펼쳐진다. 대웅전 앞 중정에는 괘불대와 오층석탑, 석조(石槽),
그리고 새로 조성된 석등이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 명부전이, 뒤쪽에 국사전과 수미왕사비각이
있으며 대웅전 뒤편 계곡을 건넌 것에 미륵전과 부도전, 도선국사비각이 있다. 산내암자로
동암(東庵)과 상견성암(上見性庵)이 월출산에 포진해 있는데 옛날에는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배치도 이미지 출처 : http://www.dogapsa.org
도갑사 일주문 옆에 있는 수령 120년된 팽나무
일주문 배면의 편액
'國第一禪宗大刹'위에 '德海門'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매표소에다 법보신문사에서 왔다고 하니까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프리패스이다
도갑사 가는 길
해탈문 소맷돌
태극문양으로 만든 소맷돌은 만다라(佛法의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경지에 이르는 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해탈문 안으로 들어서니 이곳은 다른 사찰처럼 사천왕상이 있는게 아니라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모셔져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도갑사 해탈문(道岬寺 解脫門:국보 제50호)
해탈문은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면에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 쓴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본래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보물 제1134호)을 모셨으나 이 상들은
현재 도선국사유물전시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대신 지금은 금강역사상 2구를 모시고 있다.
해탈문은 1960년 해체·수리할 때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1473년(성종 4)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도갑사는 880년(헌강왕 6) 도선국사가 문수암이 있던 자리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미륵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과 대웅전 앞에 있는 5층석탑(보물 제1433호), 석등 대좌 등
여러 유적 등을 볼 때 11세기에 대규모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고려 말 조선 초에 사세가 크게 기울었으나
1457년(세조 3)부터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두 스님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창불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도갑사는 12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966칸이나 되는 큰 사찰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1835년(헌종 원년) 호암화상이
다시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과 1977년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또다시 소실되었다. 현재 도갑사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1981년 이후에 다시 세운 것들이다.
해탈문은 상량문(上樑文)에 1473년(성종 4)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 공사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60년에 해체·보수되었고
1971년부터 2010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탈문의 부분적인 보수와 주변 정비가 이루어졌다
도갑사 마당에서 바라본 해탈문의 모습
도갑사 해탈문은 도갑사의 산문으로, 가운데 칸은 출입을 위해 개방되었고 좌우 협칸(夾間)에는
금강역사상을 봉안하였다.
이 건물은 평면과 구조 때문에 사천왕상을 모신 사천왕문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발굴조사에서 현 건물의 뒤쪽 25m 지점에서 사천왕문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2중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헛첨차가 사용된 주심포(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리는 양식)
형식으로 바깥에 출목(出目)이 있다.
가구(架構) 구조는 5량 형식이다. 전면과 배면의 공포 위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에는 포대공을 짜서 종보를 걸었다.
포대공에는 우미량(牛尾樑)이 결구되어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종보의 양 끝에는 중도리를 올렸으며 중앙에는
접시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종도리와 종보 상부에는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결구하여 종도리를 보강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천장은 반자를 설치하지 않고 개방한 연등천장이다
도갑사 해탈문은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함께 희소적 가치가 높은 산문(山門)이다.
건립연대는 1473년으로 공포의 구성, 가구 수법 등에서 오래된 건축수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붕부의 가구는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과 비교할 수 있으며, 공포의 모습은 영주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 및 하사당(보물 제263호) 등과 비교할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집이지만 마치 다포집처럼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종도리와 대들보를 받치는
포대공의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공포는 기둥머리에 헛첨차가 사용된 형식으로
외목도리 밑에 행공첨차를 사용하지 않은 특징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는 주심포(柱心包)의 건축수법을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다포계(多包係) 건축수법을 반영한 특징을 보여준다
해탈문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주수완 박사님
밀적금강(密迹金剛)
손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서 있는 역사를 밀적금강이라고 부르는데 ‘밀적’이란 자취를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
이곳에 있는 밀적금강과 나라연 금강,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은 모사본이면 실물은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라연 금강(那羅延金剛)
나라연은 힘의 세기가 코끼리를 백만배나 된다고 한다
문수보살 동자상
보현보살 동자상
사른 사찰과 달리 문수동자상과 보현 동자상이 모셔져 있는데 목조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물 제1134호이며 실물은 도갑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건 가품이라 한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있는 두 동자상은 높이가 약 1.8m 가량이고 앉은 높이가 1.1m 안밖으로
크기도 비슷하고 조각기법도 동일하다
다리를 안쪽으로 나란히 모아서 사자. 코끼리 등에 걸터앉은 두 동자상은
동물상과 따로 만들어 결합하였으며 두 손도 따로 만들어 끼웠다.
현재의 손도 후대에 다시 만들어 끼운 것으로 생각된다
두 동자상의 머리를 묶은 모양새는 매우 화려하며, 이목구비가
원만하여 동자의 천진스런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점에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로 추정되며 사자와 코끼리를 탄 동자상이라는 드문 예 가운데
목조상이라는 유일한 작품이다
1960년 해탈문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기록이 해탈문이 1473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이곳에 모신 동자상도 문이 건립될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발췌)
해탈문과 대웅보전 사이에 새로 지어진 종무소가 있는 광제루(廣濟樓)가 나온다
광제(廣濟)는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도갑사 석조(道岬寺 石槽: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도갑사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 물을 담아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였던 일종의 돌그릇이다.
길쭉하고 네모난 돌의 안을 파내고, 각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는데, 아랫부분을 둥글게
반원모양으로 깎아 놓아 옆에서 보면 작은 통나무배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때 쓰이는 작은 배수구멍이 뚫려 있다.
표면에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갑사 성보박물관 가는 길
도갑사 성보박물관은 일반인들에게 잘 개방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법보신문사에서 왔다고 하니 박물관을 담당하는 직원이 와서 문을 열어준다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보현보살 동자상
문수보살 동자상
도선국사 진영(道詵國師 眞影)
가람이 지어진지가 얼마되지 않은듯한 광제루와 도갑사 종무소의 모습
도갑사 대웅보전과 5층석탑(五層石塔:보물 제1433호)
고려시대 석탑으로 도갑사 대웅전 앞에 있다. 2층 기단의 5층으로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처음에는 하층 기단이 없는 1층 기단의 5층탑이었으나 세진당(요사채) 북서쪽에서
하층 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 2월 2층 기단의 5층탑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탑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위치와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면에는 네모서리에 기둥이 모각되어 있으며 지붕돌(옥개석)에는 지붕돌 받침이 1~3층은 5단,
4층은 4단, 3층은 3단씩 조각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급격한 체감률을 보이기는 하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이 잘 계승되어 있어 고려 초기의 탑인 것으로 보인다.
도갑사 대웅보전
통일신라시대 말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년)가 헌강왕 6년(880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도선국사가 태어난 마을 영암은 풍수지리의 메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도선국사가 태어난 영암군 군서면의 구림(鳩林)마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듯 하다.
'비둘기 숲'이란 뜻의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창건이후 고려시대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나 유적이 없어 사세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이후의 모습은 "도갑사사적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도갑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456년(세조 2) 수미(守眉)선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부터이다.
도갑사의 중창은 수미선사가 세조로 부터 존경받았던 인물이였기에 세조의 국가적 지원으로 이뤄졌다.
중창 직후의 도갑사는 전각이 966칸에 달하였고, 부속암자만 해도 12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또 1473년(성종 4)에는 해탈문을 새로 지었는데, 이 때에도 시주자(施主者)로 수미대사가 등장하고 있어
그에 의해 1456년에 시작한 절의 중창이 17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기 1555년(명종 10년)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는 중 도갑사에까지
들어와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불이 꺼져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전란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으며 광해군(1608 ~1623년)때에는 낡은 전각을 중수하였는데,
당시 도갑사의 승려는 78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633년(인조 11년)에는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를 건립하였는데,
여기에 스님과 지방의 유력인사들도 동참하였다. 1653년(효종 4년)에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와 "조계곡석교신창비(曹溪谷石橋新創碑)"를 세웠는데,
두 비문의 건립에도 당시의 영의정, 형조판서 등 최고의 권력자들과 당대의 고승들이 참여하고 있어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등을 거치면서 도갑사는 사세가 많이 기울게 되었고, 1977년에는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의 복원을 시작으로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으며,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도갑사 대웅보전 삼존불
목조로 모신 아미타·석가 · 약사여래의 삼불상을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모니불는 현재불, 약사여래불는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하며, 이 삼세불 신앙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으며 뒤에는 삼불회도(三佛會圖)로 1폭에 삼존을 배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화재이후 대웅전이 다시 복원된 탓인지 단청이 아주 화려하다
도갑사 요사채
도갑사 국사전(道岬寺 國師殿)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전각으로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의 왕사로서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인데,
세조는 그에게 묘각화상이라는 호를 내렸다.
고려의 정신적 지주 도선국사(高麗의 精神的 支柱 道詵國師)
고려 사회의 기본 사상 중 하나인 풍수지리 이론을 체계화한 영암 출신의 승려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시조인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의 생애는 신비에 가득 싸여 있다.
전국 곳곳에 그와 관련된 신비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그의 출생 시기나
활동 지역에 대해서도 다양한 전승이 전한다.
하지만 현재 공식적으로 도선의 고향은 영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도선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고려 시대의 옥룡사 선각 국사비와
조선 시대의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대선사비는 모두 도선이 영암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다른 주요 자료들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도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옥룡사 선각 국사비에서 강 씨(姜氏)라고 이야기한 것과
달리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대선사비를 비롯한 후대의
자료들에서는 대부분 최 씨(崔氏)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영암이 도선의 고향이라는 것을 반영하듯 영암에는 도선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가 전하고 있다.
먼저 구림면 성기동(聖基洞)의 성천(聖泉)은 도선의 잉태와 관련된 곳으로, 어머니가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계곡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성기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림(鳩林)과 국사암(國師巖)도 도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다.
도선이 태어난 직후 어머니의 부모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딸이 낳은 아이를 집 근처 바위틈에 버렸는데,
근처 숲에 있던 비둘기들이 날아와 아이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이때 아이를 버린 바위가 국사암[도선 국사를 버린 바위라는 뜻]이고, 비둘기들이 모여 살던 숲이 구림이라고 한다.
영암 지역의 사찰들 중에도 도선과 관련된 곳이 많다. 군서면 월곡리의 월암사(月岩寺)는 도선이 처음 출가하여
머리를 깎은 곳이라고 하고, 같은 군서면의 도갑사(道岬寺)는 도선이 개창한 사찰이라고 한다.
한편 이웃한 강진군 성전면의 월남사(月南寺)도 도선이 어릴 때 수학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다.
영암 지역 중에서도 구림을 비롯한 군서면 지역에 도선과 관련된 유적지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도선의 출생지가 바로 구림 마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갑사의 개창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년)의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
현재 국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진영은 모사본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사전(좌)과 수미왕사비각의 모습
수미왕사비(守眉王師碑:유형문화재 제152호)
도갑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수미는 조선시대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였고,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형식적으로 조각된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의 머리처럼 바뀌었으나, 목이 짧다.
앞발과 뒷발의 발톱이 다섯개씩이다. 거북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비몸 위에 놓인 머릿돌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구름 위로 중간과 양 모서리에 다투듯 뒤엉킨 두마리의 용을 새겨놓았다
선조 14년(1581)에 비가 넘어져 새로 세운 것으로, 인조 7년(1629)에 시작하여 인조 11년(1633)에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로서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비(碑)는 돌거북인 귀부(龜趺)와 비의 몸체, 용을 아로 새긴 비의 머리 부분인 이수(螭首)가 잘 남아있다.
돌거북의 머리는 눈살을 심하게 지푸린 용의 얼굴로 표현되었으며, 목이 짧아 등 껍질이 꽤 두꺼워 보인다
이수에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구름 무늬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용 두마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34m, 비신(碑身)의 높이는 2m, 비신의 폭은 1,08m, 비신의 두께는 21cm이다
비의 건립은 조선 인조7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조선 인조 11년에 세운 것이며, 그 양식적인 특징은
고려 전기에 유행하였던 형식과 비슷하다
귀부(龜趺) 뒷면의 모습
귀두는 용두화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 없이 위 아래로 이빨을 맞대고 있으며, 목은 짧은 편이고 앞발은
약간 벌려서 八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발가락은 5개이고, 뒷발은 앞발과 달리 양 옆을 향하고 있다.
귀갑은 이중의 6각문(六角文)이며, 등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받고 있다.
이수는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팔작지붕형이 아니고 장방형이다.
이수의 네 모서리 상단에 밖을 향하여 용두(龍頭)가 조각되어 있고, 몸둥아리는 서로 얽혀
허공을 날아 비약하는 모습이다.
이수의 전면 중앙에 또 한 쌍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입을 근접시켜 혀를 맞대고 있는 재미있는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비 전면 상단에 ‘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銘(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라 전서(篆書)하였고, 비문은 19행의 해서체로 비문의 끝에 ‘崇禎己巳二月日始癸酉六月日立(숭정기사2월일시계유6월일립)’이라 하여 이 비가 1629년(인조 7) 2월에 시작하여 4년 후인 1633년(인조 11) 6월에 세워졌음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짓고 썼다.
비신 후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하였던 지방인사와 승려 등의 시주자들이 음각되어 있다
국사전에 바라본 도갑사 대웅보전의 모습
도갑사 천불전
천불의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주불로 석가모니를 주불로 아미타여래, 약사여래가 협시불로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도갑사 명부전은 대웅보전에서 부도전으로 가는 길목 좌측에 있다
도갑사 명부전에 모시고 있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한 것으로
높이 89.3cm, 무릎 폭 70cm 규모로 너무 작지도 않고 부담스럽게 크지도 않은 보기에
딱 좋은 정도이며 얼굴은 방형으로 미소를 띠고 있으며가슴부터 배까지 영락장식을 표현하고 있다.
미륵전과 도선수비 비각으로 향한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좌(臺座)는 밋밋한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부도전 옆에 있는 도선국사 비각으로 향한다
도갑사 도선국사道岬寺道詵國師碑閣:보물 제1395호)
신라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로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구비했으며, 높이 517cm 규모의 석비이다. 도갑사 부도전(浮屠殿)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귀부의 사선문(斜線紋)과 비신 측면의 운룡문(雲龍紋)이 특히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는 ‘도갑사 도선 국사 수미 선사비’와 ‘도갑사 도선 수미 양 대사비’로도 불린다.
1974년 5월 22일 지방 유형 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으나, 2004년 1월 26일에 보물 제139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귀두 후면의 모습
석비가 자리한 탑구(塔區)는 수매의 판석으로 조성했는데, 전면의 구도는 방형이지만, 뒷면은
귀부의 형상과 같이「ㅅ」자형으로 조성해 전체적으로는 6각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 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하였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으며 4발 중 앞발은 5조, 뒷발은 3조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꼬리는 살짝 돌려 왼쪽 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상면에는 비좌(碑座)로 부터 중단에 이르기 넓게 방형의 앝은 받침이 표현되었다.
각 면 중앙의 내곡된 상면에는 화문(花紋)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은 귀부와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으며, 상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
이라 썼으며, 비제(碑題)는 횡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 음각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 곳에 잇던 도선국사의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로 다른 석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비문의 찬자가 각각 李景奭, 李壽仁, 鄭斗卿인데 반해 연대는 모두 〈崇禎丙子四月日始. 癸巳四月日立〉이라
기록되어 있어1636년(조선 인조 14년)에 건립이 시작되어 1653년 조선 효종 4년)에 준공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양 측면에는 운용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단에는 28판의 앙연(仰蓮)이 조각되었으며, 상면에는 운문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 석비는 1653년 조선 효종 4년)에 건립된 것으로 우선 규모 면에서 다른 비석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각부의 양식에서 귀부는 다른 예와는 달리 귀갑문 대신 평행사선문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비신 역시 조성재료가 대리석이라는 점 외에도 양 측면에 조각된 운용문은 내우 힘찬 기상과 율동감을 지니고
있어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비의 건립기간이 18년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한편 건립연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비문이 각각
독립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찬자는 물론 쓴 사람과 각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며. 아울러 2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석재의 채취로부터 이동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3번째 비문에서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석비의 건립과정에서 3개의 비문에
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 국사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하며,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 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의 내용으로 구분되어
일반적인 비문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세 부분의 명문이 모두 동일한 건립 연대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모두 다른 것은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한 시점부터 모금 기간과 공사 기간을
합쳐 21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석비는 규모의 거대함과 더불어 건립에 소요되는 기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아울러 미술사적으로 볼 때도 조선후기 조각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도선과 수미선사 등 2인 이라는 점과 글씨 역시 서예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따라서 이 석비는 보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도갑사의 가람 형태는 좀 특이한 곳이 많이 보인다
해탈문이 그렇고 미륵전 입구 있는 용화문이 그런데 부도 입구에도 진화문이란 전각이 특이하다
도갑사 부도전의 모습
도갑사 산신각
다시 대웅보전으로 되돌아와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도갑사를 빠져 나온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일주문에서 인증샷
도갑사 주자창으로 와서 귀경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 佛 敎 ♣ > 聖地巡禮'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계산 서쪽 품 안에 안긴 송광사 (0) | 2018.07.29 |
---|---|
조계산 동쪽 품 안에 안긴 선암사 (0) | 2018.07.29 |
노고단 품안에 안긴 화엄성중의 불국토 - 화엄사와 천은사 (0) | 2018.05.28 |
석가모니의 佛國土 - 범어사와 통도사 (0) | 2018.03.26 |
南方 佛敎의 法燈 - 스리랑카를 찾아서(6) (0) | 2018.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