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8년 3월 24일
장소:범어사와 통도사의 석가모니의 불국토를 찾아서
법보신문사가 주관하고 문화재 전문위원인 주수완 박사가 진행하는 “삼국유사 성지를 찾아 떠나는 인문기행”이란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성지순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조계사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는데
전국적으로 뒤덮인 미세먼지 탓에 숨쉬기조차 힘들긴 해도 오늘이 불교의 4대 명절중에 하나인 부처님 출가재일이라
또 다른 의미가 있는듯 하다...버스에 오르니 열흘전 스리랑카를 같이갔던 도반들도 보여 반갑기가 그지없다
거기다가 리딩을 맡은 남수연기자가 동행하여 더없이 반갑기만 하다
범어사 가람 배치도
범어사(梵魚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로 100개가 넘는 말사와 10개의 산내 암자를 관리하는
해동의 화엄10찰중 하나로 구한말 경허(鏡虛)스님이 주석하면서 동산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한 선찰
대본산으로 창건연대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서기 678년(신라 문무왕 18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
하였다고 하는데, 대사께서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670년에 귀국하여 전국에 화엄10대사찰(華嚴 十大寺刹)을
건립하였다...현재 국가보물 6점(삼국유사) 등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1603년(선조35년)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며, 화재로 다시 소실되어 1613년
(광해군 5년)에 묘전현감 해민(妙全玄鑑 海敏)스님이 중건한 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옛 기록에 의한 창건설화를 보면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타고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문무왕이 근심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태백산에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으로 가서
7일 7야 동안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독송하면 미륵여래의 화현과 사방의 천왕이 이르 제압해 줄 것이라 했다
이에 문무왕은 의상대사를 대동하고, 친히 금정산에 올라 선인의 지시대로 기도를 올렸다.
이에 부처님과 천왕신중(天王神衆), 문수동자(文殊童子) 등이 현신하여 동해로 나아가 왜적을 토벌하니
왜군들은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 공격하여 살아 남은자가 없었고, 대승을 하고 돌아온 문무왕은 의상대사를
경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큰 절을 세우니 그 절이 범어사이다
「범어사 서체유전」산령축(1920년)에는 밀양박씨가 많은 보시로 화주보살이 되어 불가에 귀의하고 절 살림을
맡아 오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내가 죽은 후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를
지어주면 고당봉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고 지켜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스님은 그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짓고 매년 정월 보름과 5월 단오에 제사를 지내니 번성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범어사 조계문에 사찰순례단
부산 청룡동 청송 맷돌순두부집
서울에서 당일로 부산.양산의 성지순례는 조금 무리인 듯 싶다.
아침 07시에 조계사 정문에서 출발한 버스는 11시 30분 조금 지나서 부산에 도착한다
원래는 범어사 참배를 끝내고 점심공양을 한 다음에 통도사로 가기로 했으나 주최측에서
일정을 바꿔 점심공양을 한 후에 범어사 참배를 하기로 하고 범어사 입구에 있는 순두부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범어사로 향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범어사로 향한다
범어사로 오르는 길에는 대가람답게 공덕주들의 공덕비가 많이 보이고 홍매화가 만발해 있다
범어사 가는길에 공덕비들
범어사 조계문으로 가는 길
백매화(白梅花)도 피기 시작하고...
공덕비옆에 피기 시작하는 홍매화(紅梅花)
범어사에 도착하여 한참을 걸은 다음에 가장 먼저 만나는 전각이 조계문(曹溪門)이다
3개의 문 위에는 각각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가운데 조계문(曹溪門)이라는 작은 편액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 존자, 달마대사, 육조 혜능대사 법맥을 이은 조계종 사찰임을 나타내는 일주문 명패인데 즉 범어사의
일주문은 조계문이라는 뜻이다
좌측의 “金井山梵漁寺”는 산명과 사명을 밝힌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척의 거암(巨巖)이 있고, 그 바위 가운데에 샘이 있어서 그 우물은 항상 금색(金色)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梵天)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온 범어(梵漁)들이 헤엄치며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했고, 사명을 범어사(梵漁寺)라고 했다고 한다
우측의 “禪刹大本山”이란 편액은 범어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범어사는 선(禪)을 중시하는
한국의 화엄10찰중의 하나로 창건되었는데, 범어사의 창건 설화중 또다른 얘기는 신라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의 계시로 금정산 금샘(金井) 바위 아래서 7일7야 동안 일심으로 화엄신중을 독송하여
왜군을 물리치게 되니 이 산이 영험이 있는 곳임을 알고 678년(문무왕 18년)에 창건한 호국도량이며,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을 진작한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다
범어사 좌.우에 걸려있는 두 편액은 조선후기 성균관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르 지냈으며, 구한말 의정부 참정과 탁지부 대신을 지냈고 대한정부 수립 후 법무대신
탁지부 대신을 지낸 해사 김성근(1835~1919)선생의 필적인데, 그는 서재필 박사의 외숙이기도 하다
편액의 관지를 살펴보면 우측에 “壬子小春下浣” 이라 쓰여 있는데 소춘은 음력 10월이며 하완은 하순이니
임자년(1912년) 10월 하순을 뜻하고, 1912년 10월 15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선찰대본산”이란 종지를
인가 받았음을 뒷받침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좌측 “七十八翁鹵堂”은 해로당이 78세 때 관서했음을 말하며, 해사 김성근 선생은 1910년 이전에는
海士로, 이후에는 해로당으로 낙관하였는데 여기서 ‘鹵’는 소금 ‘로(鹵)’의 속자로 염전, 척박한 땅,포로의 땅을
뜻하는 글자인데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빼앗긴 땅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조계문(曹溪門:보물 제1461호)
가람 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삼문(三門)중 첫째 문으로 산문(山門)이라고도 하며, 기둥을 일렬로
나란히 서서 지붕을 받치므로 일주문(一柱門)이라고도 하는데, 조계문은 기둥 2개만으로 지지되는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는 달리 자연암반 위에 돌기둥 4개를 세워사 3칸을 형성하였다
한국 사찰에서는 그 유래가 없을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1614년(광해군 6년)에 묘전화상(妙全和尙)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1718년(숙종44년)에 명흡스님이 주관하고 대준스님, 우화스님,처운스님이 편수가 되어
목조 기둥을 석주(石柱)로 개조 되었으며, 1781년(정조 5년)에 백암스님의 주관 아래 다시
중건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781년에 건립된 것이지만, 짧은 목재 원기둥을 받치고
있는 석주는 1718년에 세운 그대로이다
대웅전을 지은 조헌(祖軒)스님이 도대목(都大木)을 맡았던 까닭에 두 건물의 법식이 거의 동일하며
조선 중기의 다포식(多包式) 건축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一柱三間은 法華經의 廻三歸一思想과 연관하여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聲聞 緣覺 菩薩로
나누어진 불교의 여러 敎法을 오직 成佛을 지향하여 一佛乘의 길로 향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곳으로 일직선(횡)
기둥위에 맞배지붕을 얹는데, 一心을 상징하며 청정한 도량에 들어서는 사람은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 문을 들어서야 하며 합장 반배를 한다
법보신문사의 연락을 받고 범어사 총무국장 정산스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순례단을 맞이한다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스님께서는 직접 범어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다
스님을 모시고 기념촬영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은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란 뜻이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하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참다운 불성을 깨닫게 하도록 마음을 수행하는 근본도량이라는 뜻이다
구한말의 범어사에는 오성스님이 범어사 주지로 소임을 보고 있을 때, 성일스님은 먼저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명명하고 당대의 최고의 고승인 경허스님을 범어사 조실스님으로 초빙하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마음”이란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게 선수행의 도량이다
양산 통도사가 불보종찰이요, 합천 해인사가 법보종찰, 순천 송광사가 승보종찰이다
그러면 범어사는 그 네번째로 선본종찰로서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수행도량이어야 한다
그것이 선찰대본산의 의미이다 (범어사 자료 인용)
범어사 천왕문
숙종 25년 (1699)에 자수 스님이 건립한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풍판을 단 겹처마 맞배지붕을 얹고, 건물 내부 우측 협간(入場時)에는
동쪽을 상징하는 持國天王(靑 : 칼을 손에 들고, 착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리라)과
북쪽을 상징하는 多聞天王(黑 : 치아를 보이며, 비파를 들고 無明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 하리라.)이,
좌측 협간에는 남쪽을 상징하는 增長天王(赤 : 용과 여의주를 들고 성난 눈으로 만물을 소생 시키리라.)과
서쪽을 상징하는 廣目天王(白 : 삼지창과 寶塔을 들고 벌린 입으로, 佛法에 마음을 일으키게 하리라.)이
각 배치되고, 중앙 어간은 통로로 사용되게 하였다.
큰 막돌 덤벙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방 뺄목을 초익공으로 만들어 이익공과 1출목의 행공을 걸어서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고, 내진기둥으로 대들보의 중앙을 받치고 동자기둥을 세워서
종보를 걸고, 다시 花盤臺工을 세워서 종도리를 받게 한 5梁架이며 연등천장을 꾸몄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익공식 가구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지금의 건물은 초창기로부터 한참 뒤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된다.
천왕문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東山스님의 친필 주련이 걸려 있다.
帝釋天王慧鑑明 (제석천왕혜감명) - 제석천왕의 지혜 밝게 빛나니
四洲人事一念知 (사주인사일념지) - 세상사를 한 생각에 알도다.
哀愍衆生如赤子 (애민중생여적자) - 가엾은 중생 어엿비 여기니
是故我今恭敬禮 (시고아금공경례) - 나 이제 공손히 예를 올리노라.
※ 사천왕은 天界(欲, 色, 無色)의 28天中(수직개념) 욕계 6天의 맨 밑에 있는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에 각 머문다.
天上은(수평개념) 33天이며,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이 가장 중심이며 제석천왕이 그곳의 주인이다.
※ 천왕문 좌측 基檀部에 ‘佛紀 2963年 丙子’ 라고 새겨진 글씨는 우리나라가 현재 사용하는 佛紀보다 483년
앞서는 北方佛敎紀元을 사용하였기 때문인데 이를 환산하면 1936년에 중수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방다문천왕(좌)과 동방지국천왕(우)
발밑에는 대부분의 악귀들이나 탐관오리를 묘사하고 있다
남방증장천왕(좌)과 서방광목천왕(우)
탐과오리의 모습
범어사 불이문(不二門 )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에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로 낮은 기단 위에 원통형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서 앞뒤의 각 주칸에 문틀을 짜서 쌍여닫이의 판장문, 공포는 내외 2출목의 주심포식으로
포작 했지만 다포식 공포와 흡사한 형식이 특이하며, 주두 아리로 창방 뺄목을 살미로 내어서 쇠서가 뾰족하게
치켜드는 형상으로 단청하였고, 쇠서의 끝은 만개한 연꽃과 봉오리를 초각하였다.
조선 숙종 25년(1699년)에 자수스님이 천왕문과 함께 세웠다는 기록만 있고, 그 후의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데
지금 건물은 한참 후에 만든 것으로 보여지며, 어칸 좌우 기둥의 주련은 동산스님의 친필로서 ‘神光不昧萬古輝猷
入此門內(來)莫存知解 (신광의 밝고 오묘한 뜻을 위하여 이문을 들어오면서 세상의 알음알이를 논하지 말라.) 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不二는 분별을 떠난.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뜻한다. 현상에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둘이 아닌 것이다. 즉 부처와 중생, 나와 남,
선과 악, 공과 색, 반야와 번뇌가 둘이 아니며 나아가서 생과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문으로 누구든지 이 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바탕을 되찾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범어사 성역으로 이르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을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사바의 예토를 지나 정토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고 하겠다.
범어사 일주문에서 불이문까지는 일직선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약간씩 굽거나 틀어졌지만, 각 문으로 단절시켜서 시각적으로
일직선인 것처럼 의 효과를 낸 절묘한 기술을 선조들이 나타내었고,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범어사의 제 1경으로 꼽는다
불이문 주련(柱聯)에 대해 설명하시는 총무국장 스님
주련은 동산스님의 친필로서 ‘神光不昧萬古輝猷 入此門內(來)莫存知解(신광의 밝고 오묘한 뜻을 위하여
이 문을 들어오면서 세상의 알음알이를 논하지 말라.) 라는 뜻이다
보제루(普濟樓)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보제루는 범어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써, 중단(中壇)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았는데, 숙종 15년(1699년)에 자수스님이 중건하고, 순조 13년(1813년)에 신정스님이 중수하고,
그 후 1827년에도 중수한 기록이 나온다.
석탑쪽으로는 梵魚寺, 중원 쪽으로는 普濟樓, 金剛戒壇 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不二門에서 30여단의 石階를 오른 자리의 樓下에 본래는 쌍여닫이 판장문으로 입구가 만들어졌고,
中庭쪽으로는 완전 개방이 되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樓下를 벽으로 온통 막아 돌아들도록 하였던
것을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하였고, ‘널리 중생을 제도 한다.’는 뜻에서 普濟樓 라는 이름을 붙힌 이 건물은
예불과 법요식에 사용되며, 오른쪽 벽면에는 宋나라 廓庵禪師가 創案한 牧牛圖(十牛圖)가 그려져 있다
보제루 아랫쪽을 통과하여 대웅전 마당으로 향한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금정산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보제루
이쪽에서는 보제루가 아닌 金剛戒壇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총무국장 스님은 가시고 본격적인 주수완 박사님의 사찰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범어사 대웅전(梵魚寺 大雄殿:보물 제434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1614년)에 묘전화상(妙全和尙)이 중건하였고, 그 후 숙종39년(1713)에
홍보스님이 중건한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러는데, 正面 3칸, 側面 3칸의 平面에 多包式 栱包를 짜고
맞배지붕을 올린 점은 큰 규모의 불전건물(佛殿建物)로서는 매우 특이한 예이다.
범어사 대웅전은 본존불(本尊佛)인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중심으로 미래에 오실 미륵보살(彌勒佛)과
과거의 부처님이신 제화갈라보살(練燈佛)이 挾侍로 모셔져 있으며,이것은 시방삼세(十方三世)라고 해서
공간적으로는 시방에, 時間的으로는 삼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불벽화는 1882년 조성된 것으로 降魔觸地印을 하고 계시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8보살, 2분의 분신불(分身佛),
석가여래의 10대 제자, 기타 신중, 무릎 아래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좌우에 2보살과 사천왕(四天王)이 그려져 있다.
불상(佛像)을 중심으로 법당 좌측 벽화에는 藥師如來와 挾侍菩薩인 日光, 月光菩薩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쪽에는
三藏撑畵(1882년조성)로 天藏菩薩과 그 좌우에 地持, 地藏菩薩이 그려져 있다.
우측 벽화는 阿彌陀佛을 中心으로 觀世音, 大勢至菩薩이 挾侍하고 그 아래로 神衆撑畵가 그려져 있는데,
帝釋天을 中心으로 좌우에 보살상, 그 아래로는 八部衆과 주악동자가 있으며, 보살과 제석천 사이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인물이 묘사 되어 있다.
※ 약사여래(藥師如來)는 衆生의 疾病을 고쳐주고, 壽命을 늘려주며 災難을 消滅해 주시는 부처님이며,
阿彌陀佛은 無量壽佛 또는 無量光佛로도 불리는데 먼 옛날 法藏比丘로 계실 때 成佛하기를 다짐하는
48誓願을 세워 西方 極樂淨土를 이룩하신 부처님이며,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極樂世界로 이끌어 주신다.
大雄殿 주련
摩河大法王 크고 수성한 법이여
無短亦無長 짧고 긴것 흔적도 없어라
本來非皂白 본래 그 모습 희지도 검지도 않지만
隨處現靑黃 곳에 따라 청황색을 나타낸다.
가운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관음전 좌측에는 지장전이 자리를 잡고있다
금정총림(金井叢林)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사찰로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華嚴十刹)중의 하나로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華藏世界) 구현과 왜구를 막는 호국사찰로 창건 되었다.
흥덕왕 10년(835년)에 크게 중창되었으며, 조선 선조25년(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묘전화상과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숙종 29년(1703년)에 금정산성 축조 후 승군사령부로서 성곽 수비를 맡는 등, 지역
방위체제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구한말에는 승풍 지낙을 통한 민족불교운동을 통한
구심점으로서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 되었고, 1919년3.1만세운동 때는범어사 학림의거(學林義擧)를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1950년대에는 동산대종사가 주도한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지로서 한국 근대불교의큰 족적을 남기는 등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오늘의 종합 수행 도량인
총림으로 발전했다
범어사 대웅전 삼존불
범어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다른 사찰의 대웅전과는 달리한다
범어사 대웅전에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측에는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연등불)
우측에는 미륵부처님을 모셔논 게 조금 특이하다...과거의 부처님인 제화갈라보살.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셔놨다...
이 대웅전은 조선 선조 35년(1602년)에 재건되었고, 광해군5년(1613년)에 보수공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의 전통 총림으로 다섯 곳의 큰 사찰이 있으며 다섯 곳의 큰 사찰이라 하여 오대
총림(五大 叢林) 사찰이라고 하였으며, 유명 사찰이라하여 명찰(名刹)이라고 하는 것으로 5대 총림 사찰을 살펴 보면.
영축총림 : 양산 통도사
해인총림 : 합천 해인사
조계총림 : 전남 송광사
덕숭총림 : 예산 수덕사
고불총림 : 전남 백양사
불교계에 새로운 총림(叢林)으로 정해진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 13교구 본사인 쌍계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본사인 범어사
새로운 총림으로 사격(寺格) 되었다.
총림이란 뜻에서 총(叢)은 많은 수행자들이 한 곳으로 모여 있다는 뜻이며 림(林)은 그
수효가 많다는 어울림의 뜻을 수풀의 울창함으로 비유하였다.
총림이란 사찰 자체에서 전문하는 수행 도량인 사원(四院)을 갖추어야 한다.
(1)참선을 전문하는 선원(禪院)
(2)경전을 전문하는 강원(講院)
(3)계율을 전문하는 율원(律院)
(4)염불을 전문하는 염불원(法堂)
의 종합 사원을 갖춘 절을 총림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대찰 또는, 명찰이라 하는 삼보 사찰을 보면
불보사찰 :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놓은 경남 양산 통도사
법보사찰 : 목판 팔만대장경을 모셔 놓은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 : 전등 16국사가 배출 되어진 전남 승주 송광사이다
종루에서 바라볼 때 우측으로 미륵전, 비로전이 나란히 붙어있고 마당에느 괘불을 걸 수 있는 당간지주가
보이는데 이런한 가람배치의 방식은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범어사 3층 석탑(보물 제250호)
높이 4m. 2층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삼층석탑으로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하기단의 면석(面石)에 탱주(撑柱 : 받침기둥) 대신 안상(眼象)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인 하층기단 면석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 사이에 3구씩의 안상을 새기고
두툼한 갑석(甲石)의 윗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刻出)하였는데, 교적 큰 상층기단의 면석은 4매의 판석(板石)을
세우고 갑석은 2매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나 면석에는 가는 우주 사이에 꽉 들어차게끔 큼직한 안상을 새겼다.
갑석 밑에는 부연(副椽)을, 윗면에는 1단의 굄을 조각하여 탑신(塔身)을 받고 있는데, 탑신부는 각 층마다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별석(別石)으로 제작하였으며 옥신에는 우주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밑에는 4단의 옥개받침이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위에 보주를 얹었으나 보주는 후대에 보충한 것이고 노반은 거꾸로 놓였다.
이 탑은 근년에 보수하면서 기단 밑에 또 하나의 석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탑신을 세웠기 때문에 탑신에
비하여 높은 느낌을 준다.
조성연대는 범어사의 창건시기인 830년(흥덕왕 5)경으로 추정된다
범어사 종루(梵魚寺 鐘樓)
종루는 본래 심검당(尋劒堂) 우측 전방, 3층 석탑 맞은편 중원에 있던 것을 일제 초기에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2층 樓閣 건물인 梵鐘樓는 1669년 명학 스님에 의해 重建되었다고 전하는데,
건축양식이 미륵전(彌勒殿)과 흡사하여 1889년경에 크게 손질한 것으로 본것이며, 종루 아랫쪽에는 기념품점이 있다
鐘樓에는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범종(梵鐘)(1728년에 제작된 ‘옹정6년 명동종’)
가죽을 가진 축생을 제도하는 법고(法鼓)
허공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는 雲版,
물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는 木魚 등, 사물(四物)이 비치되어 조석 예불에 쓰인다.
※ 아침예불 = 木魚 -> 法鼓 -> 雲版 -> 梵鐘(發散 : 28회 타종)
저녁예불 = 法鼓 -> 雲版 -> 木魚 -> 梵鐘(收斂 : 33회 타종)
대웅전 마당에 핀 홍매화
범어사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금정산 계명봉쪽의 모습
범어사 지장전
지장전(地藏殿)은 명부전(冥府殿) 혹은 시왕전(十王殿),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하는데,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저승 세계를 상징하는 법당이다. 주존(主尊)은 지옥 중생을 모두 구제한 다음 부처가 될 것을 서원한 지장보살(地藏菩薩)로,
대원 본존(大願本尊)이라고도 한다. 또한 석가모니(釋迦牟尼)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 전 시대에 중생 제도를
석가모니로부터 부촉 받은 보살이기도 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정면이 측면보다 다소 긴 장방형의 모습이다.
다포 형식으로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지붕의 양 측면에는 풍판(風板)이라는 가리개를 덧대었다
1891년의 중건 기록은 「동래 범어사 중수 명부전 상량문(東萊梵魚寺重修冥府殿上樑文)」에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범어사 지정전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1904년(고종 41) 발간된 『한국 건축 조사 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 실린
1902년 범어사의 평면도가 현재 가장 이른 사례로 ,대웅전을 바라본 방향에서 왼쪽에 관음전 창고 그리고 중향실 옆에 위치한다.
지금의 서지전(西持殿)에 해당하며, 명부전의 방위는 북향을 하고 있다. 1658년 명부전을 남쪽 끝으로 이건하고
편액을 ‘지장전’으로 바꾸었다는 점으로 보아 초창 당시의 자리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1891년 이후의 기록은 현재
알려진 바 없으나 1988년 화재로 소실될 때 당시 봉안되어 있던 조선 후기 목조 시왕상이 모두 불에 탔으며,
이때까지 명부전으로 이어지던 것이 1990년 새롭게 조성되면서 다시 지장전으로 바뀌었다.
범어사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하는 법당으로 관세음보살의 서원이 철저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찰에 많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대쪽의 지장전과 함께 협시하는 식으로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축조되었으며, 기둥 위에만 포작(包作)한 주심포식 목구조로 결구되어 있다.
포작은 일출목을 짧게 내어서 행공첨차를 걸고 그 위에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덤벙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보머리를 받치는 익공(翼工)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 초각한
익공과 봉두(鳳頭)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다. 양쪽 귓기둥을 제외한 중간의 세 기둥은 용두(龍頭)를 초각하여 익공을 받게 하였다
관음전의 초창 연대는 확인된 바 없으며, 대웅전과 함께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창하였다.
1721년(경종 1) 승려 홍보가 다시 중건하였고, 그 후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보이며, 원래 대웅전 남쪽 사리탑
자리에 있던 것을 1938년 7층 석가세존 사리탑을 세우면서 금어선원(金漁禪院)으로 자리로 옮겨 지었다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梵魚寺 捌相· 獨聖· 羅漢殿)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2006년 7월 3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본 건물은 현재 범어사 대웅전 서쪽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부속
불전의 하나로, 적어도 1706년 이래로 존속했던 위치에서 변함없이 존속해 온 건물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 1905년 11월~1906년 11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따라서 서측의 팔상전 부분과 동측의 나한전 부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중건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지며, 다만, 팔상전과 나한전의 노후화 된 부재의
교체와 내부 가구(架構)가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1906년에 단장된 독성전(獨聖殿) 부분은
문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독특한 모습이고, 창방 사이의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통판(通板)으로 넝쿨 형상을 초각하였으며, 창호도 팔상전과 나한전이 교살창인데 비해
독성전은 화문살로 아름답게 꾸미는 등 장식수법이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이처럼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은 1906년에 중건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간살, 가구(架構)와 평면,
입면 구성 등에서 1706년 이래의 건축 형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고, 특히 하나의 건물에
세 불전(佛殿)을 모신 점, 중아에 위치한 독성전 개구부(開口部)의 뛰어난 의장과 초각수법은 그 예가
극히 드문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한 건물로 된 팔상전(捌相殿)·독성(獨聖殿)·나한전(羅漢殿)은 1613년 묘전화상이 나한전을 창건하고
1705년에 명학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는 것을 보아 원래는 이 두 건물이 별도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05년에 학암스님이 팔상·독성·나한전(捌相· 獨聖· 羅漢殿)을 중건하고 성상(聖象)으로 새롭게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 건물에 새로운 건물이 연이어 붙혀서 길쭉하게 세워진 건물로, 독상각 입구를 반원으로
아치형으로 한 건축수법, 각 문의 문틀장식이 여러 꽃문양으로 한 것이 특이하다
범어사의 팔상전(捌相殿) 편액(扁額을 보면 팔상전(八相殿)이 아니고, 팔상전(捌相殿)으로 되어있다.
‘여덟 팔(八)이 아닌 깨트릴 팔(捌)’인데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도 ‘깨트릴 팔(捌)’으로 되어 있다
팔상전 삼존불 좌상 후불탱화
팔상전 석거모니 후불탱화(捌相殿釋迦牟尼後拂幀畵)는 범어사 팔상전 정면에 모셔진 석가 삼존 좌상
뒷면에 봉안된 여래 후불도이다.
하단에 마련된 화기에는 1905년에 금어(金魚)[불화나 단청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승려] 금호(錦湖) 약효(若效) 외
14명의 화승, 출초(出草)[단청 무늬의 초안을 그리는 일] 보응(普應) 문성(文性)이 관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세로 240.8㎝, 가로 219.8㎝의 면 바탕에 채색을 베푼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는 항마인의 여래가 단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앉아 있다.
본존의 대좌 양측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협시가 전신을 드러내며 서 있는데, 왼쪽에는 양 손목을 교차시켜
정병을 쥔 백의관음, 맞은편 오른쪽에는 양 손에 금강저를 든 보살이 있으며, 그 위쪽으로 두광을 구비한
보살상 6위, 천부상 2위가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본존의 광배 주위에는 투명 두광을 구비한 아난과 가섭을 비롯해 제자격의 나한상 8위가 있고,
그 위쪽 좌우측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4위씩 배치되어 8금강이 지키고 있으며, 반대로 가장 아래쪽에는
사천왕이 외호하고 있다.
본존의 두광 좌우에는 광배를 갖춘 여래형의 타방불 2위가 합장하는 모습으로 서 있고, 가장 위쪽
가장자리에는 용왕과 용녀가 배치되어 있다
팔상전 삼존불 좌상 후불탱화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충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불화승인 금호 약효가
그린 것으로, 그가 주 활동지인 마곡사 이외에 해인사 등 부산·경남 지역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독성탱화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독성각이라 부르는데 범어사에서는 독성전이라 부르는게 특이하다
독성전의 문살
절집 마당에서 바라본 금정산의 모습
며칠전 눈이 거의 오질 않는 부산에 몇십년만에 3월에 눈이와서 산에 눈이 보인다
대웅전을 나와 설법전과 성보박물관 가는 길에서 만나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00 選 중에 하나인 길을 만나다
범어사 설법전의 모습
범어사 성보박물관
박물관 담벼락에 있는 목조와 궤
성보박물관을 둘러보고 조계문으로 향한다
조계문에서 인증샷
범어사 홍매화
범어사 백매화
봄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는 찍사
범어사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서둘러 통도사로 향한다
통도사 가람 배치도
범어사에서 약 40여분 걸려 양산 통도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다를 건너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통도사 부도전이다
부도전 너머로 낙동정맥과 영남 알프스를 종주하면서 걸었던 영축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통도사 부도전(通度寺 浮屠殿)
통도사 부도는 통도사 주변 일대에 흩어져 있던 승탑과 탑비를 이전, 재정비한 후 새롭게 조성한 곳으로
이들 승탑 및 탑비는 조선후기의 특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불교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또한 이들 승탑․탑비의 조성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승탑․탑비 양식의 절대편년을 제공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2015년 7월 30일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8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은 역대 고승들의 사리탑과 탑비를 봉안한 곳으로
이곳에 있는 부도와 탑비들은 원래 통도사 주변과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는 것을 월하(月下) 방장스님의 교시로 통도사
가람을 정비하면서 1993년에 이곳에 부도전을 조성했는데 부도원 또는 부도밭으로 불리기도 하며 17세기부터 현재까지
통도사를 대표하는 역대 스님의 부도 60여 기와 각종 비석 50여 기가 안치되어 있으며 상단에는 부도, 하단에는 부도탑비와
통도사와 관련된 공적이 있는 분들을 기리는 각종 공덕비가 있는데, 부도의 형식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형태인 종형을
비롯하여 구형, 전각형 등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통도사만의 독특한 부도가 많다
통도사 입구에 있는 영축총림(靈鷲叢林) 표시석
총림(叢林)이라 함은 승속이 단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짐이 숲과
같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불교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말인데 총림의 조건은
첫째,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을 갖추어야 하고
둘째, 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을 두어야 하고
셋째, 계율 전문 기관인 율원(律院)을 두어야만이 총림이라 부를 수가 있다
영축총림(靈鷲叢林)
부도전을 지나면서 만나는게 영축총림(靈鷲叢林) 문이다
총림(叢林)은 빈댜바나(산스크리트어: Vindhyavana)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빈다바나(貧陀婆那)라고도 한다.
여러 승려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며 안거(安居)하는 곳이며 선원(禪院) · 강원(講院) 등 제반 시설을 갖추고
여러 승려가 수행하는 도장이며, 총림의 최고지도자를 방장(方丈)이라 부른다.
조계종에는 해인사 ·송솽사 ·통도사 ·수덕사 ·백양사의 다섯 사찰이 선원과 강원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이들을 오대 총림이라 하였는데, 2012년 11월 7일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는 제192회 정기회의에서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의 세 사찰을 만장일치로 총림으로 추가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팔대 총림이 있게 되었다
통도사 인증샷
총림문을 지나서 조금을 더 진행하니 우측으로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성보박물관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창건 이래로 통도사에서 전래되어 오던 문화재들을 본사(本寺)의
관음전(觀音殿), 만세루(萬歲樓) 등의 전각에 진열장을 마련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일종의 전시관 성격을 가지고
출발하였는데, 그 후 일반 대중의 호응과 사중(寺中) 스님들의 성보 보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1987년 10월에 정
면 7칸, 측면 3칸의 약 80여 평 규모의 독립 전시관을 신축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유물의 수집, 보존, 연구의 기능을
담당하는 체계적인 박물관으로 발전하여 한국 사찰(寺刹) 성보박물관의 효시가 되었다.
1987년 개관 이후 사용되던 전시관은 전시 유물의 증가와 박물관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1994년부터 정부의 보조와 사찰 자체 비용을 투입하여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춘 대규모의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여 1998년 10월에 새롭게 문을 열게 되었다
신축 박물관은 5,000여 평의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총 1,300여 평의 실내 전시 공간과
학예 연구실 그리고 4개의 유물 수장고와 자료실, 보존 관리실, 강당 등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보유하고
있는 유물은 국보 1점, 보물 8점을 비롯하여 지방유형문화재 32점을 포함한 1만여 점으로 이는 통도사
전래의 유물을 비롯하여 수집과 기증을 통하여 입수된 것으로 소장 유물은 그 내용 면에서 선사 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유형별로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특히 그중에는 400여 점에 달하는 불화가 포함되어 있다.
불화는 밑그림인 초본(草本)을 비롯하여 소형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서 초대형 괘불(掛佛)에
이르기까지 분야가 다양하다.
이들 불화를 중심으로 전시실을 운영함으로써 불화 전문 박물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걸쳐 모두 4개실이 운영되고 있다.
상설전시실은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通度寺 靑銅 銀入絲 香垸) 」(보물 제334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보물 제738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6(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四十六)」 (보물 제757호) 등 250여 점의 통도사 전래 유물을 전시하여 통도사의 역사와 변천을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사찰벽화의 기획전
꼭한번 보고싶은 전시회인데... 시간이 우째 될런지
감로수로 목을 축인 다음에 일주문으로 향한다
통도사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갈 때 첫번째 지나는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일주문은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으로 다른 나라 불교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다
이러한 독특한 일주문의 양식은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가짐을 올 곧게 다지라는 깊은 뜻을 상징하고 있다.
보통 일주문은 일주삼칸으로 되어 있는데 부처가 될 수 있는 방편인 불법을 성문행(열심히 공부하는 것)
독각행(열심히 참선 수행하는 것), 보살행(부천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상징하여 부처가 되는
궁극적인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 충렬와 31년(1305년)에 창건한 것으로 일주문 정면에 걸린 현판 글씨인
'영취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라는 글씨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친필이다
일주문 좌.우에 있는 석주에 빨갛게 쓴 글씨는 좌측에는 이성동거필수화목(異性同居必須和睦: 각 성들이 모여사니
화목해야 하고) 우측에는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 가사를 입고 삭발했으니 청규를 따라야 하네)라는 뜻이다
일주문 기둥의 주련은 기둥 좌우의 '국지대찰 불지종가(國之大刹 拂之宗家)'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통도사에서도 법보신문사의 연락을 받고 총무 소임을 맡고있는 스님께서 반갑게 맞아준다
통도사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스님
일주문에 바라본 삼성 반월교의 모습
일주문 앞에서 주차장으로 넘어가는 곳에 돌다리가 하나 있는데 삼성반월교란다
교각 2개에 3개의 구멍이 있는데 불교의 상징인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삼성반월(三星半月)은 마음 ‘심(心)’을 나타내는데 달의 형태가 마음 ‘心’을 풀어 쓴 것으로
삼성의 세개의 점을 반월은 나머지 한 획을 나타내는데, 곧 일심교(一心橋)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깨끗한 마음으로 건너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다리는 난간도 없고 폭도 좁은데 헛된 생각으로 정신을 못 차리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우 주고 있는 다리이다
1937년에 경봉스님께서 중수한 다리로 표지석의 글씨는 경봉스님 친필이라고 한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유명한 홍매화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올해는 날씨가 추운 탓인지 매화의 피는 시기가 조금 늦은듯 하다
양지바른 곳은 좀 피었다
통도사 천왕문(天王門:경남 유형문화재 제250호)
통도사 전체의 대문이자, 통도사 경내 세 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의 출입문에 해당한다.
고려 충숙왕 6년(1337년)에 취암대사(翠岩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성 수법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이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부처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그들을 인도하는 수호신인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내부에는 거대한 목조 사천왕상을 배치하였으며, 불법과 가람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은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불교의 수호신으로 손에는 각기 다른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지물은 경전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며, 신라 이래의 조각이나 불화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통도사는 세가지 가람이 합쳐진 사찰로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의 세가지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천왕문에 들어서면서 하로전이 시작된다
북방다문천왕(좌)과 동방지국천왕(우)
동방지국천왕은 보검을 들고있고, 북방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남방증장천왕(좌) 서방광목천왕(우)
남방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 서방광목천왕은 보탑을 들고 있는데 사천왕은 사주세계를
순행하면서 착한자를 상주고,악한자를 벌하며 정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통도사 홍매화
이렇게 홍매화가 피어 있는줄 알았으면 마크로 렌즈를 가져올 걸... 베낭이 무거워 안 가져온게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통도사의 하위 영역에 있는 하로전(下瀘殿)에 들어서니영산전, 극락전, 약사전, 만세루, 영각루, 범종루가 있다
하로전의 건물들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가람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통도사의 세 영역중에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하로전의 중심 전각은 영산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건물 내외의 벽화가
인상적이며 영산전은 영축산의 준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한 곳이다
통도사 극락보전(極樂寶殿:경남유형문화재 194호)
극락보전은 통도사 하로전의 중심 건물인 영산전의 동쪽에 서향을 하고 있는데 극락보전의 창건 연대는
고려 공민왕 18년(1369)이라 전해지는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극락보전에는 서방 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그 좌우에 협시보살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작고 예쁘게 다듬은 둥근 초석 위에 활주를 받치고 있다
극락전은 통도사의 3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 가운데서 중간 위계에 해당한다
극락보전의 주인은 서방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이며,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를 하고 있으며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해도 극락왕생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사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전각이 극락전이다.
극락은 무한한 수명을 가지고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세계로,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극락전이 여러 사찰에 조성된 것은 그만큼 우리 옛 사람들의 생활이 녹녹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닌지...
극락보전 외벽에 걸려있는 반야용선도
거칠고 험한 바다를 헤쳐나가 극락세계에 이른다는 반야용선도인데 용머리 앞에는 인로보살이, 용꼬리인
배 뒷부분에는 지장보살이 석장을 짚고 배에 가득 탄 많은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배의 앞부분이 용머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흡사 살아 있는 용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고,
배 선두에서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이끄는 보살은 인로왕보살이며, 반야용선도 꼬리부분으로 용꼬리를 표현하고 있다.
맨 뒤에서 석장을 짚고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살은 지장보살이다.
통도사 만세루(萬歲樓:경남유형문화재 제193호)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 때
사용하던 누각(樓閣)으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44년(인조 22)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 한다.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이며(162㎡)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으며, 어간(御間) 좌우기둥 상부에는
밖으로 용두(龍頭)가 새겨져 있고 안으로는 물고기꼬리 모양의 용미(龍尾)가 새겨져 있다.
이는 출입구가 되는 정간(正間)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공포(栱包)의 쇠서[牛舌]는 아래 윗몸에 연꽃과 연봉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연등천장[椽背天障]으로
되어 가구(架構)가 드러나 있다.
이 건물은 커다란 글씨로 ‘萬歲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사중(寺中)에 전하는 말로는
이 현판을 6세의 신동(神童)이 썼다고 한다
만세루는 지금 통도사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는듯 하다
통도사 영산전(靈山殿:보물 제1826호)
통도사는 상로전(上爐殿), 중로전(中爐殿), 하로전(下爐殿) 등의 3구역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남향한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 불전으로, 앞마당에는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극락보전과
약사전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는 만세루가 위치하여 있다.
평면은 앞면 3칸, 옆면 3칸인데, 특히앞면의 주간(柱間)이 옆면의 주간과 2:1의 비율 정도로 넓어서
평면은 길고 네모난 편이며, 건물 안은 기둥이 없는 통간(通間)형으로 뒷면인 북쪽이 아닌 옆면인
동쪽에 별도의 내주(內柱)를 세우지 않고 옆면의 고주(高柱)에 의지하여 불단(佛壇)을 조성하여
독특하며,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후불탱으로 영산회상도를 걸었다.
불단의 반대쪽인 서쪽 벽에는 견보탑품변상도(見寶塔品變相圖)가 그려져 있는데,『법화경』「견보탑품」을
그림으로 푼 국내에서 유일한 변상도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쪽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가 걸려 있다.
받침은 다듬돌을 2단으로 바른층쌓기하고서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앞면 가운데에는
소맷돌을 갖춘 계단을 두었으며, 자연석을 일부 다듬은 막돌주춧돌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모두 민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이며, 공포는 내외3출목의 다포식으로 앞면과 뒷면의 모든 주간(柱間)에는 공포가
3개씩 설치되었고, 제1단∼제3단의 살미는 앙서[仰舌]형의 쇠서 위에 연꽃과 함께 연꽃 봉오리를 새겼다.
제4단 살미는 끝부분을 3번 꺾어 다듬은 삼분두(三分頭)형이고, 제5단 살미는 구름 모양의 운공(雲工)형이며,
첨차는 모두 밑면 끝을 둥글게 깎은 교두(翹頭)형이다.
가구는 고주가 없는 5량(樑) 구조인데, 대들보와 종보는 모두 심하게 휜 나무를 사용하였고,
대공은 화초를 새긴 판대공(板臺工) 형식이고, 천장은 층단을 넣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인데, 옆면의 박공부에는 풍판(風板)이 설치되어 있다. 창호는 앞면과
뒷면에만 설치하였고, 좌우 옆면은 창호가 없이 회벽으로 처리하였다. 앞면에는 모든 간(間)에 정자살의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는데, 가운데칸의 2짝만은 정자살을 45도로 눕힌 교살로 만들어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뒷면에는 3칸 모두 띠살로 된 2짝의 창호를 두었다.
영산전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716년(숙종 42)에 작성된「영산전 천왕문 양중창
단확기문(靈山殿天王門兩重創丹雘記文)」에 보면, 1713년 봄의 어느 날 밤에 영산전과 천왕문이 불에
타버렸는데, 이듬해에 임간청인(任間淸印), 송곡정안(松谷正眼), 풍암랑일(楓岩朗日), 선암치원(禪岩致源) 등
대선사 4명이 기부금을 모아서 33명의 목수와 15명의 화승을 동원하여 천왕문과 함께 다시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산전과 천왕문의 암막새에도 ‘강희(康熙) 53년 갑오’라는 내용이 포함된 명문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살미에 연꽃과 연꽃 봉오리를 새겨 조선 전기의 강직함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장식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제1단∼제5단의 살미 끝부분을 연결한 선은 아직 하나의 직선을 이루지 않아서, 조선 후기의 공포와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전반적인 공포의 구성이 조선 전기에서 18세기 이후에 법식화(法式化)되는 과도적인 모습을 갖춘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3층 석탑(보물 제1471호)
극락전과 영산전의 앞 마당에 있는 건물로 2층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쌓아 올린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으로 꼭대기 부분에 받침을 설치하여 그 위에 장식을 올렸다는데 현재 장식은 사라지고 없다
전체적인 조성 방식은 통일신라시대 말엽이나 고려시대 초엽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1987년에
해체 복원하면서 그 당시 상층 받침대 부분 안에서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면서 이 탑은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통도사 약사전(藥師殿)
통도사 하로전에 있는 약사전은 극락전과 마주하여 동향을 하고 있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단촐한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성곡대사가 초창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현재의 약사전은 극락전이 중건될 당시인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측면을 1칸으로 하여 주칸에 공포를 배치하고 않고 다포식이면서도
앞뒷면에만 공간포를 배치한 점이 특색적인 전각이다. 극락전 앞에는 제법 큰 향로석이 세워져 있다.
약사여래상을 본존불로 봉안하였고, 후불탱화는 약사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비롯하여 대보살,
신장상 등을 나타내었다고 하는데,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촬영을 못한게 아쉽기만 하다
약사여래는 유리문 안에 보전되고 있었으며 후불탱화는 약사여래와 함께 일광보살, 월광보상을 비롯하여
대보살과 신장상 등을 표현하고 있고, 두개의 둔중한 돌을 다듬어 향로석을 만들어 놓았다.
향로석은 향을 사르는데 사용하는 분향기구로 무덤의 상석 앞이나 사찰에서 설법할 때 향로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든 석물 도구로 제사나 행사 때 향을 살라서 주위의 잡스러운 냄새를 제거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약사전 뒷쪽으로 들어가니 영각(影閣)이 나오고 그 옆에 내가 그렇게도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자장매화가 있는게 아닌가
통도사 영각(影閣)
영각은 통도사의 역대 조사및 고승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곳으로 숙종 31년(1705년)에 중건된
건물이며 통도사 영각의 뜰에는 수령 110년된 자장매화라 불리는 홍매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자장매화(慈藏梅花)의 유래
양산 통도사 경내 영각 앞 수령 370년 된 노거수로 일명 자장매(慈藏梅)로 불리는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금강계단 불보사찰 영축총림 통도사는 법보 해인사, 승보 송광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로 꼽히는 천년고찰로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인데자장매는 1650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도사의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매화나무로 율사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는 유래가 있으나, 자장매화 안내문에는
아래와 같은 얘기가 쓰여 있다.
“임진왜란 후 통도사 중창을 발원한 우운대사(友雲大師)는 먼저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축조하고
인조23년(1643년) 이후 참회하는 마음으로 역대 조사의 진영을 모실 영각(影閣)을 건립했다.
상량보를 올리고 낙성을 마치니 홀연히 매화 싹이 자라나서 해마다 섣달 납월에 연분홍 꽃이 피어
사람들은 이를 자장스님의 이심전심이라 믿었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진다.
그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스님의 지계 정신을 표현한다 해서 이를 자장매화(慈藏梅花)라 하였다.”
자장매화 옆에는 백매화 한그루에도 꽃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화공이 열심히 매화를 화폭에 담고있다
하로전 이곳저곳을 시간에 쫒기면서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중로전으로 가기위해 불이문쪽으로 향한다
통도사 불이문(不二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건물으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했다고 전하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세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불이문은 동향한 전면 3칸에 판문을 달아 출입하는데, 대들보 위의 상부 가구재(架構材) 구성에 특징이 있다.
즉, 대들보 위에 두꺼운 솟을합장재(合掌材)를 삼각형으로 짜고, 그 부재 위에 장여를 걸쳐 중도리·
하종도리· 종도리를 얹어서 서까래를 받게 하였으며, 이것은 고식(古式)의 가구수법으로 매우 주목된다.
‘불이(不二)’란 법계(法界)의 실상(實相)이 평등하고 피차의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이 불이문으로부터
실질적인 가람의 공간배치가 이루어지며 이 건물의 특징은 대들보 위에 삼각형으로 솟을합장재를 짜고,
상부구조를 지지하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의 가구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문에 걸려 있는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송나라 화가 미불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그 아래 ‘원종제일대가람(圓宗第一大伽藍)’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원래 일주문에 걸려 있던 것으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친필(親筆)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불이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통로사의 중로전(中瀘殿)인데, 중로전 구역의 중심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이 있고, 그 주위로 개산조당, 해장보각, 장경각, 전향각, 황화각이 있다.
관음전 옆 남쪽에는 원통방과 감로당이 세로로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뒷쪽에는 통도사 공양간이 있다
통도사 용화전(龍華殿)
용화전(龍華殿)은 석가모니 다음에 출현할 미래의 부처로,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000만 년 뒤에
성불하리라는 수기(受記)를 받은 미륵불을 봉안한 전각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처음 건립되었지만
이후 1725년(영조 1)에 청성대사(淸性大師)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불전으로 면석과 갑석이 갖추어진 기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건물은 외이출목(外二出目), 내오출목(內五出目)의 다포계이며, 앞면과 측면에는 공포가 짜여 있으나 측면에는 공포가 없다.
공포는 중앙 어칸에 2구의 공간포를 배치하였고, 좌우 협칸에는 각각 1구씩의 공간포를 배치하였다.
건물 측면 중앙 칸에 문짝을 달고, 건물 내부 공포를 오출목 형식으로 천장 높이까지 짠 11포의 화려한 공포 구성이
특징이며, 세부 장식에는 용 무늬를 많이 썼다. 내부 벽면에는 7폭의 대형 벽화가 있는데, 이 벽화는 모두 경전에
등장하는 교훈적인 내용이나 법요(法要)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 이후에 출현한다는 약 2미터나 되는 웅장한 미륵불 좌상을 봉안하였다
통도사 봉발탑(奉鉢塔:보물 제471호)
높이 2.6m. 석등과 거의 같은 구조의 대석 위에 뚜껑을 덮은 큰 돌바리때[石壺]를 얹은 희귀한 석조물이다.
대석은 석등 대석과 마찬가지로 하대석(下臺石)·간석(竿石)·상대석(上臺石)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판석을 깐 넓은 지대석 위에 복련석(覆蓮石)을 놓은 것인데, 하반부에는 상하 두 가닥의 테를 돌리고
그 둘레를 8등분하여 기둥모양 8개를 돋을새김하였다. 상반부에는 4중의 중판연화문(重瓣蓮花文)을 새기고
윗면에는 3단의 낮은 굄을 조각하여 간석을 받치게 하였다.
간석은 단면이 사각형의 모를 깎은 부등변팔각형의 기둥인데, 한가운데에 대나무 같은 마디를 오목새김하고
위아래의 사면을 약간씩 홀쭉하게 다듬었다. 상대석은 둥근 앙련형(仰蓮形)인데 측면에는 8엽의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을 돌리고 윗면에 3단의 낮은 굄을 마련하였다.
상대석 위에 얹은 돌바리때는 뚜껑까지의 높이가 1m, 지름 90㎝ 가량인데, 밑에는 아름다운 곡면(曲面)의
굽을 돌렸을 뿐 아무런 장식을 더하지 않았으나 균형 있는 형태이다. 뚜껑에서 굽으로 흘러내린 곡선은
평범한 가운데 고고한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이 유물은 간석의 형태나 연판(蓮瓣)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바리때의 고고한
기품에 비하여 대석은 거기에 따르지 못하여 빈약한 느낌이 없지 않아 양자가 같은 시대의 작품인지 의심스럽다.
이 석조물에 대하여 통도사에서는 석호(石壺) 또는 의발탑(衣鉢塔)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용화전(龍華殿) 앞에
건립한 데에는 신앙상의 뜻이 있는 듯하다.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가사와 바리때를 전법(傳法)의 의표로 전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부처의
의발[衣鉢 : 가사와 바리때, 곧 전법의 표가 되는 물건]을 용화전의 주불인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로 생각된다.
따라서, 탑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이 석조물을 봉발탑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용화전과 황화각 사이에 핀 목련
요염한 자태가 순례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화엄전(華嚴殿)
화엄전은 원통방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이 자리는 원래 1368년(공민왕 17년)에 초창된 건물이었는데 1762년(영조38년)과
1883년(고종 20년)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1887년에 구련대사(九蓮大師)에 의해 중건된
건물이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콘크리트로 세운 새로운 건물이다
이곳은 기도접수, 신도 등록, 시주 확인서 발급 등 종무 행정과 신도들의 휴식 공간으로 쓰인다
통도사 황화각(皇華閣)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건물로 또다른 이름으로 천자각(天子閣)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06년에 성해화상(聖海和尙)이 중수하였으며, 황화각은 일반신도와
격리된 곳으로 공부하는 학승들의 거처하는 공간이다
황화각 현판에 걸려있는 교융해악은확건곤(敎融海嶽恩廓乾坤:가르침은 산과 바다를 꾸리고
은혜는 하늘과 땅에 퍼지네)...이 글은 이곳이 강원임을 알려주는 곳이다
통도사 관음전(觀音殿:경남유형문화재 제251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인 관음전은 통도사의 중로전(中爐殿) 영역에 있는 3개의
불전 중 가장 앞쪽에서 남향하고 있는 건물로, 그 뒤에 용화전(龍華殿)과 대광명전(大光明殿)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1725년(영조 원년) 용암대사(龍巖大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뒤에도 여러 번 중수하였다.
불전 내부에는 기둥을 세우지 않고, 앞뒤 기둥 위에 직접 대들보를 걸어 넓은 내부공간을 형성하였다.
익공계와 다포계가 절충된 모습을 지닌 이 건물은 2익공의 공포에 다포계의 쇠서[牛舌]와 3분두(三分頭)형
보뺄목을 갖추고 있다.
불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였으며, 벽화로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에 있는 관음의 모습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형상, 32응신(應身)을 상징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을 표현한 것들이 있다.
익공계와 다포계의 건축양식이 절충된 18세기 불전으로 전통 목조건축의 양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일체 존재의 상태의 관찰함이 자유자재한 지혜를 갖추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을 구제하시는 분이
관세음보살이신데 이러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을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 보타전(寶陀殿)이라 한다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 전체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관음전이라고 하고,
관음보을 모신 전각이 사찰 중심 법당이 될 때는 원통전 또는 보타전이라고 한다
원통전은 관음보살이 모든곳에 두루하는 원융통(周(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한 명칭이며, 보타전은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낙가산(寶陀落迦山)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나라 관음신앙은 주로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통도사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
통도사 개산조당은 전각 정면에 있는 독립된 3칸의 조사문으로, 가운데 칸은 높은 솟을삼문 형식이다.
양반가의 대문은 보통 3칸인데, 초헌 등의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중앙의 칸을 높게 만든다. 궁궐이나 사당 같은 중요한
건물도 출입문이 삼문인 경우가 일반적인데 개산조당은 3칸 모두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해장보각의 부속 건물인 개산조당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교 건축의 사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개산조당과 해장보각 두 건물은 중로전의 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이는 이미 완성된 사찰 가람의 기존
영역 사이를 비집고 세운 것임과 동시에 중로전 기존 영역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8세기의 전국 유명 사찰에는 원당의 설치가 유행이었는데, 대개 원당은 가람의 조직이 완비된 사찰의 기존 영역에
조성되었으며, 유교 사당과 같이 솟을삼문을 세웠으며 개산조당은 해장보각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 건출물의 배치와 유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개산조당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이며 해장보각에는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 율사의 영정과 고려 대장경이 보안되어 있다.
해장보각 내부에 모셔져 있는 자장 율사의 영정은 순조 4년(1804년)에 그려진 것이다
통도사 세존비각(世尊碑閣)
세존비각은 중로전(中爐殿) 영역에 있는데,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의 서쪽 편 금강계단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였고 평방은 가설하지 않았다.
공포(栱包)는 출목(出目)이 있는 주심포식으로, 살미첨차는 쇠서의 형태로 조각하였으며,1706년(숙종 32) 승려 계파(桂坡)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소장하게 된 내력을 자세히 밝힌 비가 세워진 다음 지은 것이다.
세존비각 내부에 있는 비석의 높이는 약 2.5m, 폭 1m 정도인데, 밀양의 표충비처럼 간혹 땀을 흘린다고도 한다.
비각 가운데에 귀신 문양을 조각하였고, 양쪽에는 단순한 꽃 무늬를 조각한 비석 받침이 있으며, 천장에는 비석을
내려다보는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비석은 ‘사파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屠碑)’라는
또 다른 비명(碑銘)이 있으며, 비문은 菜彭胤(1669~1731)이 썼다.
비석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산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계단에 두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梁山 通度寺 大雄殿 및 金剛戒壇:국보 제290호)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의 법당으로 통도사의 가람건축들은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대웅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금강계단이 있다.
계단의 사리탑 속에는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되어 대웅전 안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큰 불단만을 마련하였고, 1961년 7월 보수공사 때 발견된 동쪽 합각(合閣) 머리의 서까래
세 개에 쓰여 있는 순치이년갑신오월(順治二年甲申五月)의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보아 이 건물이
1645년(인조 23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으로
규모는 앞면 3칸·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불가에서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통도사 대웅전의 주련
月磨銀漢轉成圓(월마은한전성원):달이 은하수를 맴돌아 둥글고 밝으니
素面舒光照大千(소면서광조대천):소박하고 잔잔한 빛 큰 세계를 비추네
連譬山山空捉影(연비산산공착영):원숭이들 팔 벌려 물 속의 달을 붙잡으려 하나
孤輪本不落靑天(고륜본불락청천):달은 본래 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默契菩提大道心(묵계보리대도심):묵묵히 보리(지혜)는 큰 발심에 계합하네.
통도사 대웅전 건물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동쪽은 大雄殿, 남쪽은 金剛戒壇, 서쪽은 大方廣殿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북쪽에는 寂滅寶宮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내부와 북쪽은 들어갈 수도 사진 촬영을 할 수가 없어 아쉽다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가 없고 대웅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것을 인조 23년(1645년)에 우운대사가
중건하였고, 내부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았는데, 이는 대웅전 뒤에 있는 금강계단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계단(金剛戒壇)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허락하여 기원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한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는데 이때는
개성 송림사 · 서울 흥천사 ·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난을 피하는 등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승려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2층으로 위층가운데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강계단 주변에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대웅전 건물 남쪽에 金剛戒壇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통도사의 큰 법당이 대웅전이라고는 하나 부처님의 사라탑 앞에 세운 예배각(禮拜閣)에 불과하다
통도사에서는 대웅전 건물 뒤에 있는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일찍이 금강계단으로 불러왔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戒를 설할 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거행했는데 이를두고 금강보계(金剛寶戒)라 하였다
따라서 통도사는 불사리탑과 그 앞에 세워진 예배각을 통틀어서 통틀어서 금강계단으로 부르고 있다
통도사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할 때 황성(皇城)인 경주의 황룡사(皇龍寺)는 왕실 중심인 귀족불교를
전파하고 왕궁과 떨어져 있는 통도사는 대중불교를 표방하였는데 여기에 금강계단을 설치하여 자장율사가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 교육하고 계를 주어 전법에 나서게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의미를 살려 금강계단부처님에 관한 글을 새겨 놓았는데 주련의 내용을 보면
初設有空人盡執(초설유공인진집):처음 설 하실 적 유와 공에 집착하더니
後非空有衆皆捐(후비공유중개연):뒤에 설 할 적에는 사람들이 공도 유도 모두 다 버리네
龍宮滿藏醫方義(용궁만장의방의):용궁에 가득한 경율론 모두가 의사의 처방이요
鶴樹終談理未玄(학수종담이미현):학수(싸라쌍수)에서의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못 되네
금강계단 계단의 모습
대웅전 서쪽에는 大方廣殿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대방광(大方廣)이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가리키며 같은 의미로 방등(方等)이라고
표현하는데 소승 경전에는 방등이 없으므로 방광 또는 방등을 대승의 경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통도사 대웅전에 大方廣殿이란 편액을 단 것은 부처님의 생애를 기록한 방광대장엄경
(方廣大莊嚴經), 일명 보요경(普曜經)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이 경은 부처님이 스스로
자신의 생애를 설한 것으로 바로 앞에 있는 구룡지와 연결시키면 부처님과 용을 연계시키는
계기가 되는데 보요경에는 관욕으로 상징되는 아홉 용이 탄생한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서쪽의 대방광전 주련에는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용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대방광전 주련
楊柳稍頭甘露灑 (양류초두감로쇄):
버들가지 끝을 적셔 감로수를 뿌리니
蓮蘤香裏碧波寒 (연화향리벽파한): 연꽃 향기 속에 푸른 물결이 서늘하네.
七寶池中漂玉子 (칠보지중표옥자): 칠보의 연못에 옥동자를 띄우고
九龍口裡浴金仙 (구룡구리욕금선): 아홉 용이 입으로 부처님을 씻기우네.
大聖元來無執着 (대성원래무집착): 큰 성인은 원래 집착하지 않음이라.
통도사 상로전(上爐殿)의 모습
개산조당 앞 석탑을 지나 낮은 계단으로 올라서면 통도사의 상로전 구역이다
이 계단은 2단에 불과하며 사실이지 굳이 계단을 만들지 않아도 될 곳이다
이 계단은 중로전과 상로전의 경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라는 해석도 있다
통도사 상로전은 대웅전과, 금강계단, 응진전, 명부전, 삼성각, 산령각, 일로향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도사 구룡지(九龍池)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한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부처님정수리뼈,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이다.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스님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영축산 기슭에 나쁜 용이
거처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나쁜 마음을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재앙을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니라.”
스님은 귀국하여 선덕여왕과 함께 영축산을 찾아서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그때 자장에게 항복한 용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굳이 그 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자기마한 상징적인 못을 두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신지(九龍神池)이다. 불과 작은 크기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 영험함이 있다
통도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대웅전 서편 구룡지(九龍池) 옆에 위치한 규모가 작은 법당으로 삼성각의 초창은 고종 7년(1870)
영인대사(靈印大師)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나 현 건물은 1935년 경봉선사(鏡峰禪師)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내부에는 중앙에 삼성탱화를 안치하고 그 오른쪽에는 칠성탱(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이는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명을 맡고 있다), 왼쪽에는 독성탱(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12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
성인의 지휘에 올라 독성이라 한다.)을 안치시켜 복합적 기능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에는 삼성의 추앙 말고도 인간의 수복(壽福)과 이치를 깨달기를 기원하는 법당의 구실도 한다.
삼성(三聖)은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이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삼화상(三和尙)을 지칭하는데,
지공은 인도로부터 우리나라에 온 범승(梵僧)으로서 당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지공스님과 통도사와의 연관은 밀접하다.
즉 지공스님은 고려말 충선왕대(忠宣王代)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와서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통도사에 와서
부처님의 가사(袈裟)를 친견(親見)하고 사리계단(舍利戒壇)을 참배한 후 등단설법(登壇說法)하는 등 통도사에서 성대한
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나옹스님은 고려 말 생불(生佛)로 추앙받던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무학 역시 고려 말기
태조(太祖)의 왕사(王師)로서 조선(朝鮮) 건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고승이다. 이 아담한 법당에 세분의
고승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 이후 존중받는 고승으로서 추앙되고 있다
구룡지를 지나 적멸보궁으로 올라서니 모든게 막혀있어 아쉽기만 하다
오늘이 부처님 출가재일이라 개방을 할 줄 알았는데...
사연인 즉 오늘 참배객이 너무 많아 적멸보궁을 개방할 경우에
불상사를 우려해 산중회의에서 개방을 안 하기로 했다고 한다
통도사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한 사찰 건물을 말한다. 적멸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를 말하고,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에는 다섯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에는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산수유도 개화를 시작하는구나
백매화도 피기 시작하고...
감로당 담벼락에 걸려있는 글귀
통도사 오향매(五香梅)
추운 경울을 이겨낸 그윽한 매화향이 부처님께 향을 사르며 예배하는 수행자의 지계(持戒)의 향,
선정((禪定)의 향, 지혜 (智慧)의 향, 해탈(解脫)의 향, 해탈지견(解脫知見)의 향과 닮았다고 해서
오향매라고 부르며, 지리산 남녘 골짜기에서 자생한 이 매화나무는 수령이 3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오향매의 안내판
통도사 능수매화
시간에 쫓겨서 대충 산사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통도사(通度寺)는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佛寶·法寶·僧寶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鷲棲山)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靈山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舍利孔)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부도원을 지나니 오늘이 부처님 출가재일이라 그런지 삼보일배를 하시는 불자들을 만난다
예전에 나도 저런걸 참으로 많이 했는데 요즘들어 자꾸만 나자신이 나태해지는 느낌이다
언젠가 나 자신을 뒤돌아 볼 겸 월정사 단기출가를 꿈꾸고 있는데 언제쯤 실현 될란가...
주차장에서 조금 늦은 시간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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