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일시:2018년 5월 26일
장 소: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 일대
법보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삼국유사 성지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기행을 2번째로 따라 나서는데
이번에는 노고단 품에 안긴 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와 말사인 천은사로 향한다
아침 07시 조계사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남수연 기자의 인사와 문화재 전문위원이신 주수완박사님의
해박한 지식으로 구례사와 천은사에 대한 사전 설명을 해주시는데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탄천 휴게소에서 잠깐동안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화엄사로 향하는데 날씨는 정말 화창하고 좋긴 하지만 한 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운 날씨이다
11시가 다 된 시간에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가람으로 향한다
대한불교조계종 19교구 본사 화엄사(華嚴寺)
화엄사는 구례읍에서 동쪽으로 5.4km 떨어진 곳,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 고찰로
544년(백제 성왕22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하여 절의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과 대웅상적광전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1년)에 도선국사가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년)에 완성하였으며, 조선 세종 6년(1424)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화엄사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의 기록을 볼 때 8세기 중후반에
창건 또는 중창된 것으로 판단된다.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華嚴寺事蹟)』에 따르면
875년(헌강왕 원년)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1,300여 동에 이르는 건물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943년(태조 26)에는 고려왕실이 주도하여 중창불사를 하였고 인조연간(1122년~1146년)과 충선왕 때
각각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되고 주지였던 설홍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왜군에 대항하다
전사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는데 석조물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보제루 앞마당에 들어서면 높이 쌓아 올린 대석단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승방과 강당 등의 수행공간이, 위로는 대웅전과 각황전을 비롯한 예불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눈여겨 볼 것은 각황전과 대웅전을 중심으로 절묘하게 조화된 가람배치의 아름다움이다.
사사자삼층석탑과 공양석등에 전해오는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효 이야기도 발길을 끌고,
각황전 앞의 석등과 모과나무 기둥이 독특한 구층암 등도 화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화엄사 가람 배치도
화엄사는 특이하게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주불전 한 채가 중심을 이루지만 화엄사는
대웅전과 각황전 두 전각각이 각각 수직으로 배치되어 있어 두 축을 형성하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대웅전이 아닌 각황전의 규모가 더 커서 가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아마도 각황전이 원래 장육상이 모셔졌던 장육전(丈六殿)이었는데 , 임진왜란 후 복원하면서
장육전 규모가 커서 재건을 못하고 옆에 있는 대웅전을 주불전(主佛殿)으로 세웠다가 후에 장육전을
다시 복원하면서 이처럼 특이하게 두 전각이 중심을 이루는 가람 배치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고, 다른 생각으로는 현실적 공간인 보리도량(菩提道場) 을 상징하는 대웅전과
초월적 공간인 천궁및 보광명전을 아울러 상징하는 각황전을 세워 화엄경에서의 석가모니의
7처9회의 설법을 상징하려고 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석물들의 배치를 보면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5층석탑,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5층석탑 역시 축선에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또한 주불전 공간으로서의 진입 동선이 보제루(普濟樓) 아래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는 동선(動線)인데 , 석물의 비대칭적 배치와 진입동선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 오른쪽으로 돌아서 둘어오게 되면 각황전은 먼 거리에서 보게되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깝게 보게되어 두 불전의 크기가 차이가 있음에도 균등한 규모처럼 여겨진다.
또한 보제루를 돌자마자 전체 사역을 바라보면 비대칭인 석물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러면
마치 서석탑-석등-각황전이 일열로 놓이고, 동석탑과 대웅전이 일열로 놓여 시각적으로는 일정한
축선에 맞춰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다.
화엄사 일주문(一柱門)
화엄사 일주문은 여느 사찰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보이고 있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 양 옆으로 최근에 설치한 듯한 담장으로 이어져 있고
일주문에 걸려있는 편액의 현판글씨 배치가 좀 특이하다
일주문은 새로 해체 보수를 했는지 새롭게 지은 목조는 아직 단청도 안되어 있고
간간히 옛날 목재를 사용한 흔적도 보이는데 편액은 옛날 그대로이다
“智異山華嚴寺” 편액 좌측에는 “皇明崇禎九年歲舍丙資仲秋義昌君珖書(숭정9년 세사병자1636년
의창군광서)”라고 써 있는데 의창군 이광(598~1645)은 선조의여덟째 왕자라고 한다
화엄사 중창주 벽암 각성대사는 누명을 쓴 스승(부휴 선수)으로 인하여 1612년에 광해군으로부터
친국(親鞫:왕이 직접 문초함)을 당한 바가 있었고, 의창군은 1618년에 훈작과 관직을 삭탈을 당하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광해군의 정치적 피해자라는 점이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화엄사 사회국장 해덕스님
주차장에서 화엄사 일주문으로 향하는데 사회국장 해덕스님께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신다
스님께 인사를 올리니 스님께서는 직접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신다
화엄사 본전으로 향하는 길
本殿으로 가는 길 우측에 一切唯心造라는 글귀가 쓰여진 우측으로 들어서니 성보박물관이 나온다
차일혁 경무관 추모비
전북 김제 출신인 차일혁은 1951년 5월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그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과 암자불태우라는 상부명령을 받자 화엄사
각황전의 문짝 만을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는 상부에 “문짝만 태워도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앨 수 있다”고 보고하며 천년고찰을 지켜냈다.
그는 작전명령을 어기며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경찰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경찰청도 뒤늦게 그의 업적을 조명하며 2011년 8월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했다
차일혁은 1951년 5월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그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과 암자불태우라는 상부명령을 받자 화엄사 각황전의 문짝 만을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는 상부에 “문짝만 태워도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앨 수 있다”고 보고하며 천년고찰을 지켜냈다.
그는 작전명령을 어기며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경찰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경찰청도 뒤늦게 그의 업적을 조명하며 2011년 8월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했다.
또한 2012년에는 국가보훈처가 한국전쟁 영웅으로 선정했으며 올해에는 전쟁기념사업회 호국의 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화엄사를 초토화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당시 한 경찰관의 항변이었다.
8월21일 오후 구례 화엄사 경내. 고(故) 차일혁 경무관(1920∼1958)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성보박물관 마당에서 바라본 화엄원의 모습
초파일 지난지가 얼마 안되어 그런지 연등이 많이 걸려있다
화엄사 성보박물관의 모습
성보박물관 마당에 있는 돌사자상
이 돌사자상은 1930년대 도코 영친왕(英親王:1987~1970) 신축 저택을 장식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으로
구례 화엄사 사사자(四獅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의 서남쪽 돌사자상을 모방하여 일본인 조각가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가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4년 영친왕 저택이 매각되면서 전 일본 중의원 의장 호시지마 니로(星島二郞)에게 양도되었고,
1959년 호시지마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하여 이 조각상을 주일한국대표부(현 주일본대사관)에 기증하였다.
주일한국대사관에 보관중이던 이 상은 2013년 2월에 국내로 이관되었고, 문화재청에서 구례 화엄사에 관리를
위탁함에 따라,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화엄사 구시
길이 7m인 화엄사 구시는 정유재란 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며 많은
승병들이 신속하게 밥을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마당에는 화엄사 경내에 있는 국보와 보물들을 사진으로 전시해놨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사사자 석등은 지금은 해체 보수중이라 볼수가 없다고 한다... 마당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문화재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국보 제12호),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국보 제35호),
화엄사 각황전 (국보 제67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제301호),
화엄사 동,서 5층석탑 (보물 제132호,133호), 화엄사 대웅전 (보물 제299호),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보물 제300호), 화엄사 화엄석경 (보물 제1040호),
화엄사의 올벚나무 (천연기념물 제38호), 화엄사 보제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화엄사 구층암 석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성보박물관에서 들어서자 화엄사의 창건설화에 대한 자료가 영상으로 보내준다
박물관에 들어서서 조감도를 보면서 화엄사를 설명하시는 해덕스님
화엄사영산회괘불탱(국보제301호)
영산회괘불탱은 직접 볼 수는 없다고 한다...괘불탱을 설명하시는 해덕스님
영산회괘불탱은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을 말하는데 화엄사 영산괘불탱은 1653년(조선 효종4년)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이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하고 꽃무늬 장식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성보박물관 자료로만 접하는 사사자 3층석탑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
높이가 550cm로〈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연대가 7세기 중엽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없다.
사사자 삼층석탑은 이형석탑(異形石塔)으로 이형(異形)은 전형(典形)에 대비되는 말인데 우리가 삼층석탑하면
통상적으로 이중의 기단위에 몸돌과 지붕돌로 한층을 구성하고 이를 3개층 얹은 모습을 말하는데 이것이 삼층탑의
전형(典形)이라면 이형석탑은 이처럼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팔각 사각 원형을 복잡 다양하게 구사하거나 사사자 석탑처럼
이층기단의 모습이 전혀 다른 형태를 띄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사자 네마리가 받치는 가운데의 인물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고 탑 앞에서 차를 공양하는 이가 연기조사라고 한다.
지대석 위에는 3단의 높은 굄이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를 조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3구씩 배치했다.
안상 안에는 천인상(天人像)을 조각했는데,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연화대좌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지물(持物)도 각기 다르다.
상층기단에는 암수 2쌍의 사자를 네 모퉁이에 각각 배치하고 머리 위에 연화대를 얹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합장하고 서 있는 승상(僧像)은 머리로 탑신을 받치지는 않았으나 그 위에 연화무늬를 조각하여 천개를 표현했다.
석사자상은 연화대좌 위에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각각 표정이 달라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승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라고 하며 이 석탑 바로 앞에 있는 석등 아래쪽에 꿇어앉아 있는 승상은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불탑을 받들고 서 있는 어머니께 석등을 머리에 얹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상층기단 갑석은 윗면에 약간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2단 굄이 있고,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는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졌는데
1층 옥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장식된 문비를 새기고 그 좌우에는 인왕상·사천왕상·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를 드러낸 모습의 사자 네 마리가 네 귀퉁이를 받치는 가운데에 선 모습은 남성적인 스님 모습으로 보인다.
탑 앞의 공양상은 연기조사 자신이라고 하는데 석등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석등을 받치는
3개의 기둥 가운데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공양하려는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자료 - 펌)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독성도(조선:1987.면본채색 . 136.5×123.5)
약효로부터 화법을 전수받고 함께 활동을 하였던 문성(文性)이 그린 독성도이다
독성도는 불제자인 나반존자가 수행장면을 표현한 불화인데 특히 이 불화는 독성뿐만
아니라 배경의 산수 풍경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작품으로 독성이 웃고 있는 얼굴과
자연스러운 옷주름에는 음영이 표현되어 있어 서양화풍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성보박물관을 빠져나와 우측으로 향하면 금강문인데 직진하여 화엄원으로 향한다
화엄사에서 가장 큰 건물인 화엄원의 모습
화엄원을 지나 보제루로 향하는데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순례객의 발길을 잡는다
화엄사의 포토라인이다
보제루가 보이고 이젠 보제루로 향하는데 보제루는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용인 2층의 누각 건물로
대개는 그 밑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서게 되지만, 화엄사의 보제루는 1층의 기둥을 낮게 만들어
옆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각황전, 대웅전, 대석단 등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중심 영역의 경관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로 보이며 장식을 배제하고 단청도 하질 않아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법고루 오르는 길 우측에 상왕문(象王門)이 보이지만 그냥 패스한다
상왕(象王)은 코끼리의 왕이라는 뜻으로 상왕(象王)은 코끼리 가운데 가장 큰 코끼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코끼리는 불교나 흰두교에서 성스러운 동물로 취급되었다고 하는데 상왕(象王)은
최고의 신성한 존재인 부처와 불법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한다.
보제루 방향으로 오르는 우측에 법종과 법고, 목어, 운판이 있는데 대부분의 가람에서는 범종각 또는 범루라 부르는데
이곳 화엄사에는 남쪽에는 법고루(法鼓樓)라는 현판이 있고 북쪽에는 운고각(雲鼓閣)이란 현판이 보이는데 좀 특이하다
법고루 북쪽의 모습
화엄사 보제루(普濟樓: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9호)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로
본래 법요식(法要式)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대웅전 앞 한 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 쪽은 지면 위에 막돌초석을 놓아 바로 기둥을 세웠으나, 반대쪽에서는 한 단 낮은 터에 막돌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누정(樓亭) 모양으로 꾸몄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쪽의 빗살문을 달고 반대쪽 5칸은 판문으로 대치하였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공포(栱包)의 양식은 초익공(初翼工) 양식으로 이 건물의 건립시기는 1800년 이후라 생각된다
보제루 아랫쪽의 모습
화엄사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건물이다.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대웅전 앞 한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고 그 반대쪽 5칸은 널판지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보제루는 개방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보제루 앞 마당에 걸려있는 연등
각황전 가는 길에서 만난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서5층 석탑은 각황전과 가깝게 설치되어 있으며 동오층 석탑과는 달리 기단면과 1층 탑신면에
팔부신중과 인왕상,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한 조각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탑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를 통해 화엄사 서탑이 9세기 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95년에 완전 해체되어 수리, 복원된 바가 있는데 이때 1층 탑신 상면의 사리공에서 청자병과 경전을
기록한 지류뭉치, 청동합, 수정옥, 사리 등 총 16종 72점의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 중 청동제 불상들은 크기가 가로 7cm, 세로 8cm 두께 0.4cm의 작은 장방형 판인데 주로 전불 등을
찍기 위한 음각들로 편년이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어 동오층 석탑과 거의 동시대의 것이라 한다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로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이 석등은 통일 신라시대 9세기말에서 10세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높이가 640cm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중대석을 장구 형태로 만든 고
복형(鼓腹形) 석등으로 전체적 규모에 있어 장중하면서도 세부 조각이 뛰어나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또한 기단부, 화사석 및 지붕과 상륜부가 완벽하게 남아있어 완성미를 더하고 있다.
석등은 전체적으로 팔각 평면이지만 기단부의 간주석이 장구 모양으로 된 고복형이다.
기단부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대석은 팔각의 하단석과 복련석으로 되어 있다.
하단석은 3매의 돌로 조립되었으며 각 면에는 각각 두 개씩의 안상이 있다.
상단석은 팔엽의 복련으로 연꽃잎마다 귀꽃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했으며 그 위로는
구름모양과 굽형 받침대를 두어 중대를 받고 있고 중대석은 중앙의 편구형태를 중심으로
위아래로 돌출시켜 마치 장구 모양을 하고 있다.
중심 편구형 부분에는 8곳에 꽃무늬를 배치하고 2줄의 띠매듭으로 연결하였다.
상대석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나 매우 낮게 처리되어 평박한 형태이다.
상대의 연화문은 하대석과 같은 8엽으로, 상단에는 굽형괴임을 각출하여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8면으로, 4면에 화창을 마련하였으며 벽면으로 처리된 부분에는 별다른 장식문양이 없다.
화사석 내부는 위아래로 원형 구멍을 두었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평박하고 넓게 뻗은 처마가 수평을
이루고 있는데, 각 모서리마다는 화문이 있고 커다란 귀꽃으로 장식되었다. 옥개석의 상면에는 연꽃이
조각된 복련대를 두었으며 상륜부는 노반, 앙화, 보륜, 보개,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노반은 8각으로 상면에 낮은 1단의 받침을 두어 앙화를 받고 있는데, 앙화는 8각으로 8엽의 화문으로 장식되었다.
보륜은 원형이며 보개는 8각으로 상면 우동이 두툼하게 표현되고 끝이 귀꽃으로 장식되었다.
보개의 위로는 3단의 원통형 받침을 두고 최상부에 연봉형의 보주를 놓았다
화엄사 각황전(覺皇殿:국보 제67호)
각황전은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3여래(三如來)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知積菩薩) 등
4보살(四菩薩)을 봉안하고 있으며 각황전은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건립했다는 설과 최치원이 쓴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奉爲憲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886)의 내용에 따라 9세기 후반에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
각황전은 본래 장륙전(丈六殿)으로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3층 7칸으로 건립하였으며 내부에는
화엄석경(華嚴石經: 화엄경 원전을 엷은 청색 돌에 새긴 것, 보물 제1040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에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 사경(寫經: 후세에 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 베낀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경내의 석조물들과 화엄석경의 글씨체도 8세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엄사와 장륙전은 8세기에 중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화엄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각황전 마당에서 바라본 화엄사 전각과 지리산
산에 드는 마음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빗줄기가 그친 사이
운무를 헤치고 산정에 올라서면
산은 침묵의 경전처럼 성스럽다.
계곡의 물소리는 산의 입을 막았고
운무는 산의 길을 지웠다.
바람과 초목의 숨소리만 살아서
眞言처럼 떠돌고 있다.
겨울산은 비장하였고
봄산은 청순하였으며
가을산은 화려했고
여름산은 격정적이다
비릿한 살냄새가 느껴지는 유월의 숲은
침실의 바다처럼 농염하고
거친 빗방울과 구름 속에서
여린 생명들을 잉태하고 있다.
동자꽃 흰여로 하늘나리 비비추 원추리꽃.....
푸른 산줄기와 흰구름의 자식들이
이제 막 시작하는 천상의 서곡처럼
산정의 날을 노래하고 있다.
노고단에서 / 이형권
각황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3여래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 등 4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불타기 전 원래의 장육전에는 16척의 석가여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의 건물은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3층 구조에 정면과 측면 7칸 규모로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도중에 왜병의 습격으로 화엄사 전체가 소실되었고 불상 역시 사라졌다.
원래 각황전 외벽은 석벽이었고 화엄경문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이때에 깨어졌다고 한다
각황전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여 주시는 해덕스님
각황전 문틈 사이로 바라본 지리산의 모습
각황전 본존불의 모습
각황전 천정
화엄사의 특징은 각황전에 있는데 대부분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국보 제67호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는데 원래 이 자리엔 670년
의상대사가 이 절을 중수할 때 돌에 화엄경을 새겨 벽에 둘렀다는 장륙전(丈六殿)이 있었다...
하지만,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를 숙종 때 계파(桂波) 선사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이에는 한 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가 자신이 가난하여 장륙전을 불사할 돈이
없음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빌면서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훗날 한쪽 손을 꼭 쥔 채
공주로 환생했다.
그 뒤 공주가 화엄사의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륙전(丈六殿)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를 들은 숙종은 공주를 위해 장륙전을 중창할 돈을 대주고, 각황전이란 편액을 내려주기까지 했다.
“각황전(覺皇殿)”이란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뜻이다.
각황(覺皇)이라는 말은 부처의 별명으로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으로 화엄사에서는 대웅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정도가 대단해서 전국에서 손꼽힐만한 중층의 사찰 건물로 누각이 아니기에 2층은 없지만
천정이 아주 높아 시원한 맛을 느낄 수가 있다...아주 높고 두꺼운, 그것도 심하게 휜 통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진 기둥들 여러개가 천정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인상적인데 가장 중심에 있는 천정은 바닥과
평행하게 놓여 있지만 외각의 천정들은 지붕에 따라 비스듬한 각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천정은 빗천정으로 부르는데 일반적인 건축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장대한 각황전 천정의 모습
기념촬영
인증샷
화엄사 나한전(羅漢殿)
화엄사(華嚴寺) 나한전 주련
諸大聖衆振玄風 (제대성중진현풍) : 제대성중께서 오묘한 기풍을 드러내시어
敎化群生一體同 (교화군생일체동) : 뭇 중생 교화하여 모두가 한결 같네
洞察人間如反掌 (통찰인간여반장) : 인간 세상 살피기를 손바닥 보듯하니
消災降福願皆脫 (소재강복원개탈) : 원컨대 복과 지혜 주시고 모두 해탈케 하소서
나한전 내부의 모습
석가모니를 주불로 하여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한다.
500나한상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백나한이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어 많은 나한전이 생기게 되었는데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한다
화엄사 원통전(圓通殿)
관세음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곳인데 관음전(觀音殿)을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이라 부르며 부속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 부른다
관세음보살은 세간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겪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큰 자비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므로 관세음(觀世音), 모든 현상을 두루 관찰하듯이 중생의 구제도
자재하므로 관자재(觀自在),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두루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원통대사(圓通大士)라고 한다.
원통전의 관음보살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원통전과 각황전 마당 앞에 있는 사자상은 높이가 3m로 ‘노주(露柱)’라고도 불리는
석탑 모양의 석조물로 윗받침돌의 덮개돌을 4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어서 ‘사자탑’으로 부르는데,
이러한 모습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求禮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다.
탑은 2층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여느 석탑처럼 몸돌 위에 다른 부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받침돌은 여러 장의 크고 긴 널돌로 결구(結構)된 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으며 아래층
받침돌은 네모난 불단(佛壇)의 모습으로, 1면에 1장의 널돌을 놓아 모두 4장의 널돌로 조성되어 있고,
각 면의 면석 아래부분에는 굽이 돌려져 있으며 그 위에도 각진 1단의 테두리 장식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면석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전혀 조각되지 않았으며, 덮개돌의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얕고 작으면서 각진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윗층 받침돌은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 윗면에 높직한 1단의 받침돌 1장을 놓고서 그 위에 둥글게 조각한
사자상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곧 사자는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처럼 윗층 받침돌 면석의 모서리 기둥을
대신하여 네 귀퉁이에 각각 1마리씩 모두 4마리가 배치되었는데, 아래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를 새긴 돌이 놓였고, 위에는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를 조각한 돌이 얹혀 있다.
밑면에 앙련을 새긴 덮개돌은 평평한 1장의 널돌인데, 윗면에는 여러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 무늬를 꽃잎이
위로 솟게 장식하였다.
몸돌은 길고 네모난 기둥 모양으로, 일반적인 석탑의 몸돌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각 면에는 네모난 테두리를 돌리고서 그 안에 신장상 1구가 얕게 조각되었다.
몸돌 위에는 마치 지붕돌처럼 보이는 1장의 널돌이 올려져 있는데, 밑면에는 윗층 받침돌 윗면과 대칭이
되도록 여러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 무늬를 꽃잎이 위로 향하게 장식해 놓았고, 윗면에는 반구형(半球形)의
돌기가 솟아 있어 특이하며, 이 탑은 받침돌과 몸돌의 연꽃 무늬나 몸돌 각 면의 신장상 조각이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보다 더욱 가냘퍼 보이는데 이로써 보아, 건립 시기는 대체로 9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각황전 마당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
화엄사 영전(影殿)
원통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전각으로 최근에 단청을 했는지 아주 깨끗하다
본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거주했던 전각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면서, 연기조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 등 화엄사의 역대 조사(祖師), 선사, 대사 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전각이다
조선 인조 10년(1632년)때 벽암선사가 중건하고 헌종 2년(1836년)에 선일(善馹)스님이 보수,
명선 스님 때인 1976년에 고승 영전 여러점이 도난 당했으며, 도광선사께서 1983년에
영전 좌측 뒷방을 개조, 1997년 조열스님이 보수, 각황전에 불단을 해체 보수하면서 불단에 있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을 옮겨 놓았으며, 종삼 주지스님이 2006년 도량 복원 정비 불사를 하면서
영전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하였으며 2012년 10월에 주련을 달았다.
대웅전 가는 계단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동.서 5층 석탑이 있는 넓은 마당에서 4칸으로
이루어진 높은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서쪽으로는 영전과 원통전이 있고 동쪽에는
명부전이 서향을 하고 있는데 대웅전은 각황전처럼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架構式) 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초석은 각황전과는 달리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내외 3출몰 형식으로 첨차는 모서리 하부를 둥글게 깍은 교두형(翹頭形)이고, 1.2.3 제공은
바깥쪽 끝이 하늘로 향하는 앙서형(仰舌形), 4.5제공은 운공형(雲工形)이다
제공은 건물 내부에서일체형으로 초각하여 장식성을 높혔으며 창호는 정면의 경우 모든 칸에 세짝의
분합문을 달고 분합문 상부에는 교창을 두었고, 양측면의 퇴칸에는 외짝 교살문을 설치하였으며
배면은 가운데 3칸에만 두살 띠짝문을 달았다
화엄사 대웅전(보물 제299호)
화엄사 대웅전은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외관이 장중하고 내부 장엄도 우수하다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하는데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내외3출목으로 외부에는 쇠서[牛舌] 끝이 잘려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첨차[山彌檐遮]는
초화형으로 장식되는 등 조선 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며. 앞면에는 정자무늬와 빗살무늬로 된 삼분합이 달려 있으며
그 위에는 교창을 두어 건물이 높은 편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외둘레간보다
한층 높게 만들었다.
불단 뒷면과 좌우에는 각각 2, 3개의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으며,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1757년(영조 33)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고 이 불상 위로는 각각 J자 형의 처마로 된 정교하고 장식적인 닫집이 있다
화엄사 대웅전 현판
화엄사 “大雄殿”옆에는 세로로 ‘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인조 14년/1636)라는 銘記되어 있다
탐관오리 벼슬아치들의 횡포가 극심한지라 벽암대사께서 광해군의 이복 동생이자 인조 임금의 숙부인
義昌君 李珖(의창군 이광/1589~1645)에게 부탁하여 글을 받아 화엄사의 불법이 영원하길 염원하며
편액을 걸었다고 하는데 왕가의 친필이 걸린 이후 아전들의 횡포가 없어졌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조 14대 임금인 선조는 부인이 8명인데 8명의 비.빈한테서 14남. 11녀 총 합쳐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한테서는 자녀가 없었고, 두번째 왕비인 인목왕후 김씨한테는 영창대군과 정명 공주가 있었고,
3번째 부인인 공빈 김씨한테서는 임해군과 15대 임금인 광해군이 있었으며 4번째 부인인 인빈김씨한테서는 9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화엄사 현판을 쓴 의창군도 임빈김씨의 자녀이다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보물 제1368호)
대웅전 목조 삼존불 뒷면에 조성되어 있는 삼신불탱은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그린 탱화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이 삼신불탱은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렸다.
법신인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과 8대보살, 4위의
타방불과 6위의 제불, 사자와 코끼리 탈을 쓴 성중(호계대신, 복덕대신)들이 에워싸듯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키 모양의 광배를 가지고 있는 본존불은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으며,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고, 무릎 폭이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귀는 기다랗고, 다자색 법의의 깃을 따라 연두빛과 분홍빛깔의 보상화무늬가 장식되어 다소나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보신인 노사나불도는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상 2위, 4위의 타방불, 3신장과 4금강이 주위에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단정한 귀·눈·입·코 등에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는 있으나, 둥근 머리광배에 보관을 쓰고 귀걸이·목걸이·팔찌·]
구슬 장식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살형 불상으로서의 꾸밈이 돋보인다.
화신인 석가모니불도는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문수·보현보살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 스님 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
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4m를 넘는 거대한
3폭의 화면에 삼신불을 완전히 갖춘 매우 드문 예로, 통도사대광명전삼신불도(보물 1042호)와
더불어 18세기 삼신불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엄사 대웅전 목조 삼존불(보물 제1548호)
화엄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화엄사상의 삼신불인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불을 표현한 것인데, 도상면에서 법신,
보신, 화신(응신)을 나타내는 매우 귀중한 예로 이러한 삼신불은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으로는 드문 편이다.
특히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조각으로 남아 있는 이른 예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삼신불상은 크기가 거대하고 단순하고 깊이의 강약이 느껴지는 굵직한 옷주름의 표현은
한층 상의 중후함을 더해 주고 있는데 특히 『화엄사사적기』에 의하면 1636년 조각승 청헌, 영이,
인균, 응원 등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17세기의 대표적인 승려장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화엄사 대웅전은 삼신불상은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고,
도상이나 양식면에서 17세기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높은 의의가 있는 상으로 평가된다
대웅전 앞 마당에 있는 동오층탑(보물 제132호)과 서오층탑(보물 제133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서 동.서로 쌍탑이 서 있는데탑의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은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에 동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어 심플하다.
또한, 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서탑(서 오층 석탑)의 기단이
2단인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데 이 탑은 일반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탑이 2단 기단인데 비해 1단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구례 화엄사 서 오층 석탑)과 비슷한 9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각황전 마당에서 바라본 동.서 오층 석탑의 모습
대웅전을 기준으로 봤을 때 서탑은 많이 떨어져 있고 옆에서 봤을 때 서탑과
동탑의 위치는 일직선이 아닌 비스듬하게 보이는 것이 상당히 특히한 현상이다
짐작컨데 서탑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면 동.서 5층석탑의 거리로 보아 예전의 대웅전이
상당한 규모로 지금의 각황전과 같은 규모였거나 더 크지 않았난 하는 생각이다
화엄사 천왕문
지리산 화엄사 천왕문(天王門)에 있는 사천왕상으로,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며 높이는 378㎝이다.
1630년(인조 8)에서 1636년(인조 14) 사이에 벽암(碧巖)선사가 화엄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금강문·
보제루·천왕문·적묵당·일주문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 구의 사천왕상은 공통으로 화염 무늬가 새겨진 화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 광목천왕 그리고 깃발 달린 창과 사자를 쥔 북방 다문천왕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과 칼을 쥔 남방 중장천왕
화엄사 청풍당
화엄사 나오는 길 좌측으로 새롭게 건립한 듯한 청풍당이 보이는데 주련이 나옹선사의 시가 한글로 쓰여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금강문을 통과한다
문수동자(文殊童子)와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좌보처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해 사자를 타고있는 모습이다
나라연금강은 천상의 역사(力士)로써그 힘은 코끼리의 백만배나 된다고 하며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보현동자(普賢童子)와 밀적금강(密適金剛)
보현보살을 동자로 화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우보처로 진리의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行願)을 나타내기 위하여 항상 코끼를 타고 다니며,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늘 부처를 호위한다는 야차신(夜叉神)으로 보통 절 문의 왼쪽에 세운다
화엄사 금강문 주련
擁護聖衆滿虛空(옹호성중만허공) : 허공 중에 가득한 옹호신의 무리여,
都在毫光一道中(도재호광일도중) : 모두가 호광의 한길 속에 있도다.
信受佛語常擁護(신수불어상옹호) : 부처님 말씀을 받아 믿고 늘 지키며
奉行經典永流通(봉행경전영유통) : 경전이 늘 유통토록 받들어 모시네
서울에서 출발하여 화엄사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조그만 전각들은 들리지
못하고 나오니 많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랴 점심을 먹고 천은사로 향해야 하는데...
일주문까지 우리를 배웅하고 돌아 가시는 해덕스님
우리 일행들에게 단주를 주시고 화엄사 신도회 회장님이 운영하시는 산채비빔밥까지 소개해 주시고 가신다
주차장 근처에 있는 산채비빔밥집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도반들이 나올때까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느 여인이 혼자서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어서 한참동안을 구경한다
스리랑카에서 신한대학교로 연수 오신 분들도 공연 구경에 열심이다
다시 도반들과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은사로 향한다
구례 화엄사를 출발하여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버스는 지리산 성삼재로 향하는 조그만 꼬부랑길로 올라서더니
얼마후 천은사 매표소가 나온다...지리산으로 오르는 산꾼들에게는 늘 시비의 대상인 매표소이다
천은사를 방문하지 않고 지리산을 오르는데 왜 이곳을 막고 돈을 받느냐고? 거기에 대해선 불자인 범여도 불만이다.
요즘은 이곳에 이런 안내문을 붙혀놨다, 새로 뚫린 19번 국도를 타고 인월로 해서 성삼재로 가란다.
하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던가...꼬우면 이 길안타면 될 것 아닌가
하기야 범여는 이곳을 오르면서 傳家의 寶刀처럼 갖고 다니는 포교사증으로 한번도 입장료를 내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다
버스는 좁은 도로에서 좌측의 천은사 주차장으로 접어드는데 이곳은 매표소의 영향인지 아니면 조그만 사찰이라
그런지 넓은 주차장에는 차들이 한 두대 밖에 보이질 않는다
버스에서 내리니 5월의 마지막인데도 불구하고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무더위이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향하는데 커다란 금강송이 가장 먼저 순례객을 반긴다
천은사 일주문 가는 길
전남 구례는 경치가 남아도는 고장임에 분명한 듯 하다 그것은 지리산이 주는 혜택으로 특히 계곡에 물이 넘쳐난다.
구례 천은사(泉隱寺)도 그 중에 한 곳이다. 일대는 초록물이 떨어질 것 같이 푸른 숲이 발길을 가볍게 한다
이 근처를 돌아 다니다보면 운조루를 비롯한 유명한 누각이 참으로 많은 곳이 구례가 아닐까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 노고단 길목에 터를 잡은 ‘샘(泉)이 숨었다(隱)’는 천은사도 그중에 한 곳이다.
천은사를 저수지와 계곡에 물이 넘쳐나는 ‘여름 절’이라고도 부기도 하는 곳이다
영광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며 학자였던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 방장하운(方丈夏雲)
방장산.(지리산의 다른 이름) 지리산의 여름날 구름을 읊었던 시가 떠오르게 한다.
方丈山雲山上山(방장산의 구름 산 위의 산같이 보이니)
愁心千疊有無間(시름에 찬 천첩(千疊)이 있는 듯 없는 듯 하구나)
從?未慰三農望(용을 따라 다니면서 삼농(上中下農)을 달래지 못하고)
碧落飄然去又還(하늘에 둥둥 떠서 가고 오고 하는구나)
천은사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로서,
828년(흥덕왕 3) 인도 승려 덕운(德雲)이 창건하였으며,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다.
그 뒤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였고,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로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의 전화로 완전히 불타버렸으나, 1610년(광해군 2)에 혜정(惠淨)이 중창하였고,
1679년(숙종 5)에 단유(袒裕)가 중건하여 천은사라 하였다.
중건 당시 감로사의 샘가에는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으므로 한 승려가 이를 잡아 죽였더니
그 뒤로부터는 샘이 솟아나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 해서 천은사로 개명하였다 한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로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 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2)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고,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은사 일주문 현판
절 이름을 바꾼 뒤 이상하게도 이 사찰에는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일어나서 절에 큰 걱정거리가 되었지만,
재화가 끊이지 않자 주민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 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그 때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李匡師)가 수체(水體)로 물 흐르듯 ‘智異山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서
수기를 불어 넣은 현판을 일주문에 걸게 한 뒤로는 다시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도 새벽녘의
고요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연연히 들린다고 전하여 내려온다.
피안교(彼岸橋)
일주문에서 좌측편에 부도밭을 감싼 금강송군락을 지나면 수홍루(垂虹樓)가 반긴다.
계류를 가로지르는 무지개다리 위에 천은사 출입문루로 세워진 2층짜리 누각이다.
사찰에서는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에 놓인 다리를 피안교(彼岸橋)라고 부르고 있다.
반야교,해탈교, 연화교, 칠보교, 열반교 등으로 불린다.
사찰입구에는 개울을 건너며 삼독심을 모두 씻어내리는 의미로 물이 흐르고 있다.
이 개울의 다리를 건너야 절에 갈수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천은사 계곡을 막은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지는데 속계(俗界)와 진계(塵界)를
나누는 영역구분으로 피안교 위 수홍루가 있는데 '마음의 미진을 깨끗이 버리고 부처님앞에 나아가라'는
수행의 상징의 누각이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 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이다. 따라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한다.
우리들이 사찰에 갈 때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 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안교 북측에는 차량들이 다닐 수 있는 또다른 다리가 보인다
수홍루(垂虹樓)
정면 2칸, 측면 1칸인 2층 팔작지붕 골기와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다.
이후 1929년 퇴적대사(退籍大師) 권동희가 세웠다.
홍교위에 2층 누각을 새긴것이 다른 가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누각이다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릅답다
1898년 매천 황현이 광양에서 구례로 옮겨와 학문을 연마하던 44세 때 천은사 수홍루에에서 이런 시를 읊었다고 한다
眼前不擇地 (눈앞은 어느 곳이든 가릴 것 없이)
行坐盡淸陰 (걷거나 앉거나 모두 맑은 그늘이네)
寺小松難老(절이 작으니 늙은 소나무 보기 어렵고
僧高山轉深 (중은 고승이라 산은 도리어 깊어라)
仄溪橋影曲 (비스듬한 시내엔 다리 그림자 둥그렇고)
微雨磬聲沉 (가랑비 속에는 경쇠 소리 잠겼구나)
誰遣禪寮內 (누가 승방 안으로 맑은 바람을 보내어)
淸風動士林 (사람들을 경동케 하는가)
수홍루 편액
수홍루 편액은 한말 교육자이자 서화가로 근대 ‘호남화단의 마지막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리는
대한제국기와 일본강점기라는 격변기를 민족교육과 서화가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화순출신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 1873-1943) 선생의 글씨이다.
甘露泉
수홍루를 지나니 커다란 감로수 항아리가 나오고 그 옆에 기념품 가게가 있으나 절 마당은 조용하다
말사라 그런지 아니면 법보신문 남기자를 몰라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중 나오는 스님도 없다
이곳에서 시원한 감로수 한바가지 들이키고 천왕문 계단으로 향한다
급한 계단으로 올라서 천왕문으로 향한다
천은사 천왕문(天王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건물로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셔놓은 전각인데
자세히 보면 다른 사찰의 사천왕상과 특이한 점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주수완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이유는 천은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아마타후불탱화에
기인한다고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잠시후에 하기로 하고...
천은사 비파를 든 북방다목천왕(北方多目天王:좌측)과 칼을 든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우측)
다른 사찰에서는 칼을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인데 천은사에서는 동방지국천왕으로 되어있고
비파를 든 동방지국천왕은 북방다문천왕으로 되어 상당히 헷갈린다
용을 쥐고 있는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좌측) 탑을 든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다른 사찰에서는 용과 여의주를 쥐고있는 천왕을 서방광목천왕이라 부르고
창과 보탑을 쥐고있는 천왕을 북방다문천왕이라 부르는데 이곳 천은사에서는
동방→북방, 남방→동방, 서방→남방, 북방→서방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천은사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남방을 주관하는 증장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사람의 善根을 증장시키는 천왕이다
천은사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서방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왼손에는 창, 오른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는데 웅변을 통하여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는 천왕이라고 한다
천은사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왕은 칼을 들고 있으며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는 인간을 보살피는 천왕이다
천은사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북방을 수호하는 다목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재물 부귀를 맡고 부처님과 법을 옹호하는 천왕이다
천은사의 경내
천은사는 불의 기운이 강해서 석등이 없었으나 2000대초에 어느 불자가 석등을 시주하였고
극락보전 앞에 석등을 세웠다가 석등이 있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안 어느 스님이 현재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극락보전앞 마당은 연못, 극락보전이 있는 자리는 연못에 떠있는 연꽃자리, 극락보전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의미한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서 범종각으로 올라간다
천은사 범종각(梵鐘閣)
운고루(雲鼓樓)라고도 하며 누각 형태의 건물로 내부에는 사물(四物.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이 걸려
있으며 조석 예불 시에 두드리며 소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생명을 구제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천은사 보제루(普濟樓)
보제(普濟)는 두루 살피다(普天之下) 구제하다(道濟天下) 곧 두루 구제한다,
널리 보살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는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살핀다고 이해된다.
보제루란 대중의 법요식(法要式) 집회소나 강당으로 사용하는 건물로 사찰 누각의 이름은 만세萬歲,
침계(枕溪),보제(普濟) 등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불교적이라는 것보다 유교적 정서가 풍긴것으로 보아
사부대부들과 융화를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강당형식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형식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한 후면만 이층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익공계 건물로서
건물이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었다.
보제루 현판
호남의 명필로 불리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5) 쓴 것이라고 한다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보제루
천은사 회승당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는 회승당은 ㄷ자형 맞배지붕 건물로 정조시대에 만들고
고종시대에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천은사 설선당(說禪堂)
극락보전앞에 있는 건물로 간단하게 해석하면 禪을 說하는 곳이랄까.
설선당 편액에는 두인을 비롯해 액판 좌측에 “念齊”라는 관지와 念齊 宋太會印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변죽을 따로 붙이지 않고 뚜꺼운 통판에 글씨를 새겨져 걸었는데, 아마도 禪을 참구하는
선방에 건 편액이기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편액은 해서체이지만 날카로우면서
짜임새가 있는 필체로 평가된다
설선당은 ㄷ자형 맞배지붕으로 종무소와 주지실,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단아하면서도 고졸한 멋이 일품인 툇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면 딱 좋을 것같은 건물이다.
천은사 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적인 다포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기단은 장방형의 4각판석으로 짜올렸고 덤벙초석에 기둥은 둥근 민흘림이다.
기둥 위로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돌리고 두공의 포작은 외3출목·내4출목으로 주칸에는 2구의
공간포를 배치하여 다포집의 화려한 장식을 보여주는데 내부의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문은 3칸 모두
3분합인데 중앙 3칸은 굵은 빗살문이고 좌우 양칸은 井자살문이다. 창방 밑에 교창을 두지 않았다
〈천은사 법당 상량문〉 목판기록에 따르면 극락보전은 1774년 혜암선사가 남원부사의 도움을 받아 2
년여에 걸쳐 중건한 18세기 건물로 아미타후불탱은 극락보전 중건을 완료한 무렵인 1776년에 금어 신암스님 등
13명의 화승이 그려 봉안하였다. 후불탱의 최상단은 범자 아홉자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팔대보살과 사천왕, 아라한이 둘러서있고, 하단에는 사리불이 법을 구하고 있는 도상이다.
불보살과 사천왕상에 방제를 마련해서 존명을 낱낱이 밝히고 있어 주목되는데, 팔대보살은 밀교경전인
〈8대보살만다라경〉등에서 근거하는 바, 천정에 8엽연화문을 장엄하고, 우물반자에 밀교적 범자종자불
(梵字種字佛)을 새긴 것은 내부장엄의 일관된 상응으로 보여진다.
중앙천정에 8엽연화문의 한 가운데에 아미타불의 범자종자인 ‘흐리’字가 나타나는 까닭이다.
그것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팔대보살이 둘러서있는 팔대보살도를 고도로 압축시킨 기호상징일 터이다
천은사 극락보전 현판
이 글씨도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원교(園敎) 이광사(李匡師)가 쓴 글씨라고 한다
천은사 극락보전 삼존불과 아미타극락회상도(보물 제924호)
극락보전 삼존불 뒤에 모셔진 아미타후불탱화는 영조 52년인 1776년에 그려진 탱화로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특징은 어칸에만 아미타그락회상도를 걸고, 좌.우칸은 흰 벽으로 남겨 두었다.
불단은 후불벽 크기에 어울리게 3칸 규모로 장대하게 만들어졌으며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향우측벽에는 삼장탱화(1776년작), 향좌측벽에는 제석천룡도(1833년작)을 걸어놓았다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후불탱화로 중앙 사각 대좌 위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보살, 사천왕,
10대 제자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듯이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각 도상들의 명칭이 적혀져 있어
아미타불화의 형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데 후불탱화의 크기는 가로 277cm,
세로 360cm로 삼베에 그린 것으로 녹색이 주로 표현되어 있고, 탱화 위에 닫집과 장식들 역시
눈여겨 볼만한 우수한 것들이다.
천은사 극락보전은 후불탱 상단과 천정, 내4출목의 장여 등 곳곳이 범자세계이며 사방 벽면공포 칸칸의 장여에는
신령의 기운이 초록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검은 바탕의 원이 나오고, 그 안에 문자불, 혹은 진언을 베풀었다.
질서정연한 사방 공포벽면의 범자조형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고 천정 곳곳은 8엽 주화문 한가운데 범자가 심어진
종자불의 심인처고, ‘옴’은 비로자나불을, ‘아흐’는 불공성취여래의 종자불이고, ‘흐리’는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바,
결국 천정은 그 자체가 거룩한 불보살의 법계이다.
삼존불 뒷면에 있는 아미타후불탱화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팔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의 아미타회(阿彌陀會)를 묘사했는데 10대 제자중에 8명만 묘사되어 있는게 특이하다
각각의 존상 옆에는 긴 방형의 난을 만들고 존상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중안의 본존 옆에는 ‘광명보조수명난사48대원무량수여래불(光明普照壽命難思四十八大願無量壽如來佛)’이라
기록되어 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미타불 바로 아래쪽으로 두 보살상은
‘문성구고관세음보살(聞聲救苦觀世音菩薩)’과 ‘섭화상생대세지보살(攝化象生大勢至菩薩)’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로 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짝을 이루며 좌우 대칭으로 아미타불을 시위하고 있어 이 여덟명의
보살이 아미타팔대보살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팔대보살은 고려시대 불화의 도상에서도 보이는데 8세기 후반에 한역된 불공(不空) 역
팔대보살만다라경(八大菩薩曼陀羅經)이 이 도상의 등장과 관련된 유력한 소의경전으로 지적되어 왔다.
특히 고려불화에서 팔대보살이 묘사되었지만, 도상의 존명이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천은사아미타후불탱화가
아미타팔대보살의 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아미타팔대보살의 도상과 존명이 고려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여서 고려시대의
고려시대의 아미타팔대보살의 존명과 도상은 앞으로의 연구가 요구된다
이 불화는 아미타팔대보살의 도상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사천왕상 배치와 존명 문제에도 중요한
해석의 실마리를 던져주는데, 통상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까지 한국의 사천왕상 가운데 탑 또는
당(幢)을 들고있는 천왕은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으로 비정되었으나 그러나, 이 불화에서는 사천왕 옆에
존명이 기록되면서 탑을 들고 있는 천왕이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이 아닌 서방 광목천(廣目天)으로,
동방 지국천(持國天)으로 불려왔던 비파를 든 상은 북방의 다문천으로 확인되었다.
결국 천은사아미타후불탱화 존명에 따르면 동방→북방, 남방→동방, 서방→남방, 북방→ 서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천은사 불화의 방제로 파악할 수 있는 조선후기 사천왕상 존명과 배치에 대하여 아미타후불탱화를 그린 화가의
실수이거나 미숙의 결과로 보는 연구도 있지만, 조선 후기 불화인 마곡사 괘불(1687년), 장곡사 괘불(1773년)
뿐 아니라 같은 천은사 삼일암 아미타후불탱화(1853년)와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승사 후불목각탱
등은 천은사 불화의 사천왕상 존명과 같아, 조선 후기의 사천왕상 존명과 배치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더불어 송광사 천왕문의 사천왕상 복장에서도 비파를 천왕이 북방 다문천왕이며, 당이나 탑을 든 천왕이
서방 광목천왕이라는 존명을 알려주는 명문 묵서가 발견되어 천은사 사천왕상과 그 존명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존명과 도상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게 되었다
극락보전 삼존불과 아미타후불탱화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주수완 박사님
천은사 극락보전 삼존불은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천은사 극락보전 삼장탱화(三藏幀畵)
천은사 삼장탱화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탱화로 제작의 절대연대(1776년)를 알 수 있으며, 구도와
색채감이 뛰어나며, 또한 등장하는 도상의 이름이 하단에 밝혀져 있어서 삼장탱화의 도상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며, 불교사나 민간불교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같은 시기에 같은 작가들에 의하여
제작된 천은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가 보물 9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등 천은사 삼장탱화는 여러 가지
사료적인 가치와 더불어 18세기의 우수한 불화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
천은사 극락전 향 우측 벽에 봉안된 삼장탱화는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와 조성연대가 같은 1776년의 작품이다.
옆으로 긴 그림으로 비단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렸다. 한 화면에 좌우로 3등분하여 중앙에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권속이 모인 천장회상(天藏會上)과 향 우측이 지지보살과 그 권속들을 그린 지지회상(持地會上), 향 좌측이
지장보살과 그 권속이 모인 지장회상(地藏會上)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각 보살들은 중앙에 위치하고 각각의 권속들이 보살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며 하단에는 4개의 화기가 쓰여 있는데
하나는 불화의 조성시기와 시주자 등의 내력을 밝힌 것이고 나머지 셋은 각 회상에 참석한 성중들의 명호가 쓰여 있다.
이 참가 성중들의 명호는 조선시대 삼장탱화의 도상 명칭을 밝히는데 중요한 기록이다
향 우측의 지지보살은 붉은색 천의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무릎 위에 올린 왼손에는 경책을
들고 오른손을 천장보살과 같이 우측 가슴 앞에 올리고 있으며 주위에는 27명의 권속이 하단부터
층층이 겹쳐 그려져 있는데, 하단의 명호에 따르면 교주지지보살(敎主持地菩薩) 좌보용수보살(左補龍樹菩薩)
우보다라니보살(右補陀羅尼菩薩) 제견뢰신중(諸堅牢神衆) 제금강신중(諸金剛神衆) 제팔부신중(諸八部神衆)
제용왕신중(諸龍王神衆) 제아수라중(諸阿修羅衆) 대약차중(大藥叉衆) 나찰바중(羅刹婆衆) 귀자모중(鬼子母衆)
대하왕중(大河王衆) 등이다.
향 좌측의 지장보살은 승형 머리를 하고 그 위에 투명한 검은 색 두건을 쓰고 있는데 무릎 위에 올린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앞의 두 보살과 같이 우측 가슴 앞에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위에는 28명의 권속이 좌우대칭으로 층층이 배치되어있는데 하단의 화기에 따르면 교주지장보살
(敎主地藏菩薩), 좌보도명존자(左補道明尊者) 우보무독귀왕(右補無毒鬼王)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상비보살(常悲菩薩), 용수보살(龍樹菩薩)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허공장보살
(虛空藏菩薩) 제일진광대왕(第一秦廣大王), 초강대왕(楚江大王) 송제대왕(宋帝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태산부군(太山府君) 판관(判官) 귀왕(鬼王),장군(將軍) 동자(童子)
감재(監齋) 직부(直符) 등이다.
불보살상의 얼굴은 갸름하게 둥근 형태로 얼굴에 비해 큰 코와 작은 입을 꼭 다문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모두 장식무늬가 수놓인 의습을 걸치고 있으며 색조는 대체로 붉은색과 초록색을 주로 사용하고 파랑색과
흰색으로 변화를 주고 있으며, 엷은 녹색과 주황색을 간색으로 사용하여 통일감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선명한 느낌을 주는 우수한 불화로 불화의 제작에는 신암 화련(信庵 華蓮) 내숙(來淑)
덕잠(德箴) 민휘(敏徽) 태윤(泰閏) 육원(六圓) 환종(幻縱) 태화(泰華) 유운(有云) 성잠(性岑) 성활(性闊)
보잠(普岑) 행정(幸正) 성감(惺鑑)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에 그려진 극락전의 <아미타후불탱화>의 제작에도 모두 참여하고 있어서 두 작품이
함께 그려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전라도 지역의 불화제작에 자주 나타나는 화승이 아니어서
다른 지역에서 초청되어 천은사 불화들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삼장보살도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의 삼장보살도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등장인물의 수도 많아지면서 화폭의 크기도 커지고 있다.
천은사의 삼장보살탱화는 18세기 중엽에 그려지면서 그 당시 불화의 뛰어난 색감과 묘사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우수한 작품이다.
그리고 제작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고, 도상이나 구도에 있어서도 뛰어나다.
천은사 영단 후불탱화
천정장엄에 나타나는 선학(仙鶴)의 아름다운 율동에도 눈길이 오래 머문다.
선학은 단학과 쌍학의 형식이 동시에 나타나며 날개를 편 선학의 형상은 초승달 모양 판박이로 우아하다.
흔히들 불로초라 부르는 영적인 꽃가지를 입에 물고 신령한 기운이 불꽃처럼 뻗치는 보주를 취하고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연상케 하는 보주가 원의 중심처럼 조형구도의 중심을 이룬다.
쌍학의 우아한 날개짓과 어울려 태극 구도의 조화로움이 빼어나다.
작고 단순한 조형세계임에도 부드러우며 완벽한 원융의 아름다움이 우러나온다.
조형은 쌍학의 날개가 만드는 타원의 장축이 비스듬하게 뻗은 사선을 중심으로 대칭적이다
극락보전 천정의 그 엄숙한 자리에 수달처럼 생긴 짐승이 법당 기둥을 타고 물고기를 문 채 내려오고 있다
그 반대편 기둥에는 용처럼 몸에 신령의 기운이 흐르는 서수가 동태를 살피고 있는게 이채롭다
천은사 극락보전에는 유난히도 용이 많이 보인다... 닫집을 비롯한 전체의 용이 16마리나 된다
좌측 기둥에는 하마 한마리가 내려오고 있다
천은사 마당은 연못, 극락보전은 연못 위 연꽃의 형세여서
극락보전에 사는 하마와 수달이 연못으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조각했다고 한다
우측 기둥에는 수달 한마리가 물고기를 물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천은사 경내
극락보전 뒷쪽을 돌아 들어가니 괘불을 모셔논 궤가 있고 그 윗쪽으로 백의관음도가 보인다
천은사 백의관음도
백의.관음도 (버드나무, 감로수, 청조) 해상용왕, 남순동자 (보타낙가산)
주 박사님의 설명으로는 백의관음 아랫쪽에는 선재동자이고, 맨 밑쪽은 의상대사라고 한다
천은사 첨성각(瞻星閣)
극락보전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첨성각은 이곳 천은사와 하동 쌍계사, 조계산 송광사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전각으로 첨성(瞻星)은 ‘별의 움직임을 살펴보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예로부터 별의 움직임을 보는 첨성(瞻星)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한 점술이며,다른 하나는 역법을 만들기 위하여 별의 운행을 관측하는 천문학이다.
그런데, 사찰에 있는 첨성각은 신라 첨성대나 조선의 관천대(觀天臺)와는 건축물 구조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별자리 천문학하고는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찰의 첨성각 용도가 대개 ‘요사채(승방)’인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시계가 없던 시절, 해가 없는 밤에는 달과 별로 때를 알았는데 달은 차고 기울지만
별을 차고 기우지 않기 때문에 밤 시간과 계절 등을 알아내는 데는 별이 훨씬 더 요긴하다.
옛날 스님들이 전하는 바로는, 시자(侍者)들이 첨성각에 머물면서 별을 보고 대중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수행적인 의미로는,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1주일간 정진 끝에 새벽별을 보고 비로소 큰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으니, 수행자들도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경책의 의미로 첨성각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천은사 팔상전과 응진당의 모습
천은사 팔상전(八相殿).
막돌로 석축 및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세운 정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로서 영조50년(1774년) 중건 무렵에 처음 지어진 건물이나 지금의 건물은
최근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다
팔상전 내부의 모습
팔상(八相)이란 부처님 일대기의 대표적인 여덟 가지 장면을 가리키는데
첫째,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둘째,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셋째, 태자시절의 석가모니가 성문을 나서 세상을 관찰하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넷째, 성을 떠나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다섯째, 눈 덮인 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여섯째,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일곱째,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여덟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등이다
천은사 응진당
응진전은 영산전, 나한전이라고도 부르는데 영산은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축산의 영산회상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자, 나한들을 모셔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벽 따라
빙 둘러 나한들이 앉아 있는데 아라한의 줄임말 나한은 원래는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었지만
중국과 한국 불교에선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내려주는 공상적인 존재로 여긴다
응진당 내부의 모습
천은사 명부전(冥府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 목조건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地藏殿) 또는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이라고도 부른다
천은사 관음전(觀音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로 남쪽바다에 솟아있는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중생을 구원해준다고 하는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관음전 내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관음보살을 협시하는 것은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인데 조각으로 표현된 것은
거의 없으며 이곳에서는 뒷편에 벽화 형태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표현하였다.
천은사 삼성전(三聖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단층 목조건물로 ‘삼성전’과 함께 ‘칠성전’, ‘산왕각’ 현판이 함께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치성광여래상과 독성상, 산신상, 동자상 2체가 봉안되어 있으며 불화로는 최근에 그려진
칠성탱화 및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다.
삼성전 내부의 모습
극락보전의 풍경이 유난히 높이 걸려있다
날씨도 무덥고 서울을 가야할 일 걱정되어 천은사를 빠져 나온다
다시 되돌아 온 천은사 일주문
인증샷
일주문을 빠져나와 주차장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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