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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聖地巡禮

南方 佛敎의 法燈 - 스리랑카를 찾아서(6)

by 범여(梵如) 2018. 3. 16.

성지순례 마지막 날
벤토타 리조트에서 마지막날 잠을 푹자고 일어나니 인도양의 쪽빛바다가 시원스레 보인다

리조트 안 수영장인데 그냥 뛰어들고 싶은 느낌이다.

외국 여행을 많이한 듯한 일부 도반들은 수영복을 가져 왔는지 수영을 즐기고 있다

어제 만났던 경비원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스라랑카 남서해안은 세계적인 휴양지로 유명하다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세계적인 휴양지 벤토타가 있다.
정부지정으로 내셔날 홀리데이 리조트로 개발된 곳이다.
콜롬보에서 남쪽끝 갈레까지의 남서해안은 경치가 좋기로 으뜸이다.

 

해변을 따라 야자수가 그림처럼 늘어서 있고 오염되지 않은 바다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주로 해변가에는 마치 원두막 같은 엉성한 집에 사는 빈민가가 많은데 지난번 쓰나미가

덮칠 때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할머니와 손주

유럽에서 온 듯한 여인 2명이 겁도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파도가 꽤 심하건만 겁도없이 바다 멀리까지 나간다.

상념에 젖어있는 여성 도반

벤토타는 말 그대로 자연이 살아 숨쉬는 천혜의 낙원이다.
강이 흘러와 바다와 만나는 하구지역 긴 모래사장에는 몇 개의 리조트가 늘어서 있다.
파란 코발트색으로 빛나는 바다에는 윈드서핑을 즐기는 관광객으로 붐비고.남국의 태양과

푸른 바다, 황금빛 모래사장을 따라 드문드문 서있는 야자수가 시간을 멈추게 한다.

운이 좋으면 덩치 큰 초록의 이구아나가 어슬렁거리며 밀림으로 사라지는 풍경도 구경할 수 있다.

뭔 나무인지?

바닷가에서 만난 야자수 

멋진 인도양 해변을 뒤로하고 아침 식사를 하러 리조트로 향한다

리조트로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체크 아웃을 한 다음에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벤토타의 북쪽에는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넌 곳에 아루트가마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벤토타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지만 아루트가마는 리조트 지역인 벤토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도시이다.
풍요롭고 신선한 상품들이 진열된 시장의 번화함, 일용 잡화를 파는 상점, 골목을 여유있게 거니는 사람들.

상점 하나하나에서부터 교통 기관에 이르까지 모든 것이 일상 생활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듯하여

평범한 스리랑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두 도시와 정글촌을 방문해 보면 이 나라의 다양한 사회 측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포루트칼, 네덜란드, 영국 등에 300년 이상 외세의 지배 탓인지 성당과 교히 등도 많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는 길에 차창 밖으로 외세의 침략기의 암울한 시기에 스리랑카 불교 중흥의 신호탄이

된 파아나두라 마을을 그냥 지나치는데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영국이 스리랑카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불교의 위상은 말할 수 없이 악화됐다.

국교로서의 지위를 사실상 빼앗긴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독교의 전파를 통해 민족 의식을

말살하려는 영국의 정책으로 민중 속에서 조차 그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암울한 시기 고사할 듯 위태롭게만 보이던 법등이 다시 찬란하게 타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1873년 8월 26일 스리랑카의 남부 작은 시골마을 파아나두라(Panadura)에서는 스리랑카 불교의

명운을 건 역사적 역사적인 설전이 벌어졌다...불교를 우상 숭배의 미신 정도로 비하하며 무차별적

선교를 감행하고 있던 기독교에 맞선 한 스님의 공개적인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 중흥의 사명을 안고 대론(大論)에 나선 주인공은 모호티왓테 구나난다(Mohottiwatte Gunananda:

1823~1890) 스님이었다...구나난다 스님은 영국인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와 사리만나 전도사를 상대로

기독교 교리의 모순과 불교에 대한 그들의 비하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1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파아나두라 대론장에서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인들이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유일신의 허점과 윤회. 연기. 깨달음 등 불교의 주요 교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논리 정연한

대론을 펼쳐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불교를 저급한 종교로 전략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반박도 거셌지만 물러설 수 없는 논쟁의 장에

나선 구나난다 스님은의 결연한 의지와 정법의 교리로 무장한 정연한 논리는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논쟁의

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논쟁이 끝났을 때 목사와 전도사는 불교의 승리를 인정하는

참가자들의 환호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의 논쟁은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고 비하하려 했던 기독교의 오만한 세력 확장에 대해 불교가

정법의 교리로 맞서 승리했다는 표면적인 의미와 함께 불교 국가 스리랑카 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양하고

정법의 힘으로 이교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해준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콜롬보 가는 길에서 본  코코넛 가게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스리랑카 독립광장(Independence Square)주차장에 도착한다

스리랑카 독립 기념관
스리랑카 콜롬보 독립기념관은 1948년 2월 4일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할 때 처음 국회가 열렸던 곳으로 현재는 독립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스리랑카 독립을 기념해 만든 독립 기념관은 벽이 없는 건물 메모리얼 홀이다.

캔디 시대에 Audiance Haii을 모방해서 지었다고 하며 1505년 포르투칼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48년 2월에 독립을 하면서 기념으로 지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은 지붕의 경사 각도가 중간에 변하는 2단식 구조로 싱할라 건축의 특징이라고 한다 .

Independence Hall

독립 광장에 세워진 고도 켄디의 오랜 왕국을 모방한 건물로 매년 2월 4일의 독립기념축제 시 집회와 행사가 개최된다.

기념관 정면에는 초대총리이자, 독립운동 지도자로 국부("The Father of the Nation")로

추앙받는 스페텐 세나나야케( Rt. Hon. Don Stephen Senanayake)의 동상이 있다.

그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총리로 재임했으며 승마광이었던 그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으로 사망했다

콜롬보 시내 계피공원(Cinnamon garden)에 세워진 이 건물은

1948년 2월 4일 영국으로부터의 통치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많은 관광객과 관람객들이 자유 분방한 편이다

스리랑카와 사자는 불가분의 관계

독립기념관은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된 석조 건물이었다.

가이드 역할을 하는 남수연 기자의 설명을 듣고있는 도반들

스리랑카의 중심지인 콜롬보시는 도심 전체가 무언가 꽉 짜여 있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섬나라의

쩨쩨함이 아닌 대륙성 기질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어쩌면 종교관이 확고한 사회의 구성에서 기인한 듯싶다.

만약 부처의 자비로움이 현대 사회로 승화되어 표출된다면 우선 이곳을 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들은 욕심 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강가라마야 사원

‘물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뜻의 강가라마야 사원은 베이라 호숫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주도한 히카두웨스리 나야카 스님이 경전 간행을 목적으로 1985년에

건립한 사원인데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사원이라 태국, 인도, 중국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건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대법당, 보리수, 다고바, 유물박물관,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보관된

박물관이 있다  

19세기에 지어진 콜롬보 시내의 강가라마야 사원은 거대한 불교 박물관 같아보였다.

콜롬보 시내에 있는 강가라마야 사원은 서울로 치며 조계사 같은 곳이라 보면 될 듯 싶다 

스리랑카는 부처님이 세 번이나 방문했던 나라이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남인도의 흰두교 유입으로

불교가 약간 쇠퇴했고 이어서 포루투칼, 네덜란드에 이은 영국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이들 기독교 문명이

불교 박멸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바람에 18~9세기 무렵에는 스리랑카 땅에 승려 한명 남지 않는 법난(法難)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했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미얀마의 승려들이 들어와 겨우 구족계를 받는 정식 스님들이 하나둘 생기게 된 것이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미얀마계통의 종파 1개와 태국 계통의 종파 2개를 합쳐서 3개의 큰 종파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조계종이 큰 규모의 종파인 것과 같은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이들 3종파는 모두 크기와 규모가 비슷하며 승려들의 복장 역시 육안으로 보아서는

구별이 안될 만큼 3종파를 구별 짓는 것은 없으며 그 세력 또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불교사원인지 골동품 가게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청계천 8가 골동품 노점상을 온 기분이다

온갖 잡동사니가 다 모여있다

강가라마야 사원 입구의 모습

중국 도교 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유비인지 관우인지 모를 그런 유물들도 많이 보인다

전 세계 불교국가와 교류를 했는지 수많은 불교 관련 물품들이 엄청나게 많이 진열되어 있다

강가라마야 사원  내부의 모습

가네슈상(像)

힌두교 신화에서 등장하는 지혜의 신으로 시바의 아들로서 성천(聖天), 관희천(觀喜天), 가나파티라고도 한다.

머리가 코끼리의 머리이며 4개의 손과 하나의 긴 이가 있으며 장애물을 제거하고 지혜를 준다고 알려져 있다.

대법당에 있는 불상

부처님 머리카락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순례객들

스리랑카 절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신발을 벗어야한다.

신성한 구역에 들어서는 의식인 것이다.

사천왕상의 모습

사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왕서방도 보이고...

남기자가 바쁘다...이것저것 설명해 주느라고...

일본 불상의 모습도 보인다

강가라마야 사원  내에는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수백년된 보리수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끔 한다.

이곳에서는 감로수를 들고 탑돌이 하듯이 보리수 나무를 돌고 있다

보리수 아래 불상에 예를 올리는 참배객들

보리수 나무 뿌리를 둘러보고 있는 순례객들

보리수 나무 아랫쪽의 모습

불단 아래의 조각...흰두교 사원에 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사원 안에는 온갖 불상과 사진 등으로 그 자체가 박물관 같다

가사와 천수천안 대다라니경도 보인다

이 물건들도 중국에서 온 것들로 보인다

미얀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각 방마다 안치되어 있는 불상들은 황금빛이거나 컬러풀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사원 경내에는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 같아보였고, 공간 마다 진열장을 만들어 놓고는 온갖 불상이며

잡다한 물건(역대 스님들 사진, 엄지손가락 만한 불상이며 불교경전 등등)들이 진열되어 있어 다소 어수선한 느낌도 느껴졌다

플로나루와의 갈 비하라의 불상과 같은 느낌이 드는 불상도 보인다

각 방마다 다양한 불상들이 있는가하면 지붕위에도 불상들이 빼곡하다

사원입구에 안치된 거대한 불상 뒤에는 흰탑이 놓여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문스톤과 가드스톤 등 필요한 형식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박제된 코끼리가 전시되어 있는데 ‘나밤 페라헤라(Navam Perahera)’ 축제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등에 싣고 바로 그 코끼리라고 한다...매년 2월 보름날 나밤 페라헤라 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이날  코끼리 등에 부처님의 사리를 얹고 행렬을 벌이는데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 50마리와

전통 탈과 복장을 한 춤꾼과 스님,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춤을 추면서 행진을 하는데 그 시작점이

이곳 강가라마야 사원이라고 한다

나밤 페라헤라(Navam Perahera)’ 축제에 대한 설명을 하는 남기자님

한국의 육하사에서 기증한 불상들도 보인다

육하사는 서울 성북동에 있는 절로서 이 절이 강가라마야 사원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기증한 불상과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념패가 있다

강가라마야 사원의 순례를 끝내고 마지막 순례지인 켈라니아 사원으로 간다

스리랑카! 인도의 남쪽에 있는 섬나라! 남한의 2/3 정도의 면적에 인구는 2,167만 명 (201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6천 불 수준으로 홍차와 코코넛 같은 농산품과 봉재의류, 완구 등이 주요 생산품이며 전(全) 인구의

3/4이 싱할라족이고 나머지는 인도 계통의 타밀족과 무어인(이슬람), 종교의 분포도 이와 유사한 비율로

70%가 불교도이며 힌두교(15%)와 이슬람(8%)과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콜롬보. 1985년 콜롬보에서 6km 떨어진 새 수도로 이전했으나 행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콜롬보는 여전히

이 나라의 수도이다... (새 수도인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는 입법․사법 수도) 중세까지는 인근 강대국 인도(타밀족)의

침입으로, 근대 이후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 침략으로 수난을 겪다가 1948년 2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지난 2009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내전으로 몸살을 앓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맑은 눈망울과 티없는 미소가 방문객의 가슴까지 따스하게 만들어 주는 나라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불리지만 ‘인도양의 진주'라는 이름이 훨씬 더 어울리는 나라, 스리랑카! 

이름 그대로 '빛의 섬'! (스리랑카어로 'Sri'는 '빛나는, 찬란한', 'Lanka'는 '섬'이라는 뜻)

독립 당시의 국호는 실론(Ceylon)이었으나 1972년 '스리랑카'로 변경되었다

강가라마야 사원에서 켈라니아 사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콜롬보 시내에서 9km정도 자동차로 달려서 도착한 곳이 켈라니야 사원에 도착한다

켈라니야 불교사원(Kelaniya Raja Maha Vihara)

켈라니야 사원의 모습

지붕과 기둥의 장식이나 기단부의 조각들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전란과 외침에 시달려 온 스리랑카의 다른 유적들이

대부분 후대의 복원물이듯이 이 건축 또한 연조가 그리 오래지는 않다.

3세기 때 지어진 최초의 가람은 인도와 열강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캔디 왕조의 스리 라자싱하

왕에 의해 1769년 이후 19세기까지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는데 불상은 물론 각종 조각품과 회화 등

다양한 불교문화를 볼 수 있는 건물로 사원 안은 부처님의 일생을 묘사한 그림들로 가득하다.

법당 문을 들어서면 4개의 방이 있다.

정면을 향해 오른쪽 방에는 와불(臥佛)이 있고정면은 설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부처의 상이다.

설산을 배경으로 가부좌를 하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

정면 방에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켈라니야 사원 와불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와불(臥佛)이 스리랑카에서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에 의하면 아무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살아계신 동안에는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이상

탐․진․치(貪瞋癡), 즉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완전히 끊을 수가 없어 완전한 부처님이 아니며, 열반에

들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삶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와불이라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의 와불, 즉 누워서 주무시는 부처님과 열반불, 열반에 드신 부처님은 구분된다.

와불은 누워서 포갠 두 발의 엄지발가락이 꼭 붙어 있고 열반불은 두 발가락이 약간 떨어져, 위에 있는 왼발의

엄지발가락이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와불상에 예경하는 스리랑카 순례객

경내의 입구에는  꽃문양으로 삼각형위에 원형이 장식되어 있는 문스톤(Moonstone)의 월장석(月長石)이

장엄되어 있는데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이곳부터는 신발을 벗어야 법당내로 들어갈 수 있다

불경책을 보고 있는 스리랑카인

법당 내부의 모습

스리랑카에 당도한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 벽화 

 

제자들을 거느리고 찾아온 석가에게 왕과 백성들이 귀의하는 장면

석가모니의 스리랑카 방문 당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왼쪽 방의 벽화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순례객들

지난해 방문한 부탄과는 달리 사진을 찍는것을 허락해 주어 고맙기만 하다

켈라니야 사원을 한번 참배한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지은 모든

죄가 소멸된다고 믿기에 항상 많은 참배객들이 많은 사찰이다

사원 뒤뜰에 서 있는 불상. 오른손에는 연꽃,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관세음보살상으로 보인다.

문스톤이 없는 점이 눈길을 끈다.  

켈라니야 사원 다고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8년후 성도절 보름날 이곳을 방문하시어

강물에서 목욕을 하시고 직접 설법을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켈라니야 사원은 라자 마하 비하라(Raja Maha Vihara)로 불리는데, '위대한 왕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콜롬보 동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이 사원은 스리랑카 불교 제1의 성지로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생전에

스리랑카를 세 차례 방문했는데  그 중 한 번은 이곳을 찾아와 강물에 목욕을 하고 설법을 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이곳에 오신 이유는 보석의자로 인하여  적대하여 서로 싸우는 당파 때문이었다는 것.

사원 내 다고바가 다투는 무리들을 앞에 놓고 부처님이 다툼과 욕심의 무의함에 대하여 설법한

곳이며 보탑 안에 모셔져 있는 의자가 그때 부처님이 앉으셨던 바로 그 의자라는 것이다.

사원 안에는 당시 부처님이 옷을 갈아입은 처소도 남아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맨발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낮의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진 돌이나 시멘트 바닥 위를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걸어다녔다.

기도를 드릴 때도 조그만 방석이나 매트 하나면 충분했다.

그 조차도 없이 흙바닥 위에, 또는 모래 위에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사원 외벽의 벽화들

앙증스럽고 귀엽다

사원 입구에서 법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거대한 보리수

인증샷

부처님께 올린 꽃공양

8일간의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마치며 법당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회향을 한다

20여년만에 다시 와 본 스리랑카...불교가 살아있는 것을 느끼며 성지순례를 마감한다

네곰보 공항 가는 길

네곰보 공항

서울로 가는 비행기 티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