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 4일차
어제 불치사를 둘러보고 2~3km 정도 떨어진 주택가의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끝낸 후에 피로를 풀기위해 호텔내에 있는 발 마사지 샵에 가서 마사지를 받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는다...손짓 발짓으로 해결하는데 마사지 실력은 별로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시간 전에 호텔 주위를 돌아 보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캔디의 번화가는 인공 캔디 호의 북쪽과 서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 길을 중심으로 불치사나
박물관등의 볼 만한 곳과 철도 역, 버스 터미널 등의 공공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호수의 남쪽과 동쪽은 호반 가까이 까지 완만한 능선이 연결되어 있어 산길을 따라 한적한 주택지가
들어서 있으며 비교적 잘 사는 가정 주택이 많고, 게스트 하우스를 겸하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또 불치사 뒤편에 있는 북쪽 일대의 산은 우다왓테켈레 자연보호구로 많은 새들을 볼 수 있다
다시 숙소로 되돌아 와서 아침 식사를 한 다음에 호텔 주변을 서성거린다
호텔내 수영장...수영복을 가지고 오질않아 그림의 떡이다
호텔 앞을 흐르는 마하웨리 강((Mahaweli rívər)
마하웨리(Mahaweli) 강은 스리랑카 섬의 중앙부에서 시작하여 트링코말리(Trincomalee)에 위치한, 인도양까지 흐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긴 강이다...참고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산은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 근처에 있는 2524m인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 )산이다역사 자료에 의하면, 센카다가라푸라(Senkadagalapura, 캔디의 옛이름)가 위크라마바후 3세(King Wickramabahu III)의 통치가 이뤄지는 1357~1374년에 만들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지금의 와타푸루와(Watapuluwa)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칸투부루 누와라(Katubulu Nuwara)가 캔디의 옛 이름이었다고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하면은, 일부 민속학자들은 위크라마바후(King Wickramabahu)왕의 왕비이름인 센칸다(Senkanda)를 따라 센카다가라(Senkadagala)라는 지명이 캔디의 옛명칭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현재의 지명인 캔디(Kandy)는 단지 식민지시대에 "캔다 우다 라타(Kanda Uda Rata; 산악지역이라는 뜻)"의 영국식 발음에 불과하다.
최초 이곳에 도시를 수립한 위크라마바후 3세(King Wickramabahu III)이후, 뒤를 이어 15세기 1473~1511년동안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부후(Senasammata Wickremabahu)가 캔디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시켰다.
캔디는 역사와 도시풍경이 181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영국통치가 강화되기 시작된 이후,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되었다.
로리(Sir Lawrie)의 기사에 의하면, "1818년의 반란때, 캔디지역에서의 영국법은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
된 가문들은 거의 죽음을 맞히했다. 총과 칼에 살아남은 이들중 콜레라와 천연두, 영양결핍으로 수백명이 죽어갔다. 사
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냉담해져 갔다. 그 뒤, 많은 해를 거듭해가는 동안 정부의 노력은 시작과 포기만이
계속되었다."라고 당시 반란의 여파를 서술하고 있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호텔내에 있는 야자수 나무
호텔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스리랑카 최대의 식물원이 있는 페라데니야로 향한다
페라데니아 식물원
스리랑카 캔디 근처의 페라데니야에 있는 식물원으로 1623년 영국인에 의해서 창설 되었다.
풍부하고 다양한 열대 목본식물들로 유명하다. 59㏊의 면적에 약 4,000종(種)의 식물들이 있다.
이 식물원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은 길가에 있는 인상적인 야자나무이다.
또다른 중요한 식물로는 난초류, 겉씨식물, 꽃피는 교목들이 있다.
이 식물원은 이 지역에 경제적으로 중요한 커피나무와 여러 가지 다른 열대식물들을 주로 도입하여
1821년 설립되었다. 식물학적인 가치가 중요시되기 시작한 1840년대 에도 원예학적 활동의 중심지로 남았다.
조지 H. K. 스웨이트의 지도 아래 1870년대말 국가의 차(茶)산업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스웨이트는 또한 이 나라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은 브라질산 고무나무를 들여와 경작했다.
이 수집 식물들은 이 지역 명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곳은 14세기의 왕 파라쿠라마 바후 3세가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으로,
왕족들만이 즐기던 곳을 1876년에 식물원으로 개조해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시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최초의 식물원이다
예비 신혼부부들이 웨딩 촬영을 하고 있다
이 식물원 근처에 스리랑카 최대인 케라니아 대학교 있어서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하거니와 가이드말에 의하면 스리랑카 커플들의 첫 키스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예비신혼 부부...카메라를 들이대자 포즈를 취해준다
오랫만에 잔디를 밟으면서 걸어본다
소풍나온 가족들...특이한 것은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점이다
대 잔디(Great Lawn)옆에Cook's Pine Avenue에는
나무가 곧게 서 있는게 아니라 휘청휘청 이리저리 굽어 있다
인증샷
Great Lawn에서
로얄 야자수 거리
성지순례를 같이한 도반들
자바 윌로(Java Willow)
난이 전시되어 있는 실내정원으로 향한다
실내정원의 모습
쌀꽃(일명; 부쳐님의 열반의 꽃)
식물원 밖을 나오니 열대 과일들이 즐비하다
넓은 식물원을 주마간산격으로 대충보고 다음 여행지인 녹차밭이 있는 누와라엘리야로 향한다
페라데니아 식물원이 있는 캔디에서 70km 이상을 달려 홍차로 유명한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한 산길인데 마치 강원도의 어디로 가는 느낌인데 열대지방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다...홍차밭을 가기전에 레스토랑에 들려 점심 식사를 하는데 산과 폭포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누와라엘리야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향수가 가장 잘 서려있는 해발 1989m의 피서지로 차 재배지인 이 섬의
고원지대의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로서 콜롬보로부터 180Km 캔디에서 77Km의 지점에 있다.
모든 공공건물, 집, 거리, 길, 공원 등은 옛 영국식으로 되어있어 이곳의 맑고 시원한 산 공기를 마시며 가끔씩
내리는 비를 맞다 보면 마치 영국시골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라 한다.
이곳의 차는 고지대의 기후에서 경작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맛을 낸다 하며 이 일대를 둘러보면 차 재배와 가공의
전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고도 1,868m 중앙의 고지에 위치하며,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산, 피디루탈라갈라(2,524m)에 의해 내려다 보여진다.
스리랑카는 1500년경부터 거의 150년씩 450년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8년 완전히 독립했다.
1505년 포르투갈의 침략을 시작으로 1658년 네덜란드에 넘겨졌으며, 1796년 부분적인 영국의 통치가 이뤄졌으며,
최종적으로는 181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다. 독립한 뒤에도 식민 통치 시절 뿌려놓은 분란의
씨앗으로 여전히 내전이 지속된 불행한 역사를 안고 있다.
홍차를 알게 되면서 가장 새롭고도 크게 다가온 나라가 스리랑카다.
1972년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나라 이름을 바꿨지만 홍차는 여전히 실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과거의 스리랑카는 필자에게 존재감 없는 나라였다. 관심을 끌 만한 무엇도 없는 하나의 국가일 따름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홍차의 꿈 실론티’라는 홍차 음료 광고를 통해 실론과 홍차를 어렴풋이 연관시킨 것도 같다
하지만 홍차의 세계에 들어오면 스리랑카는 아주 중요하고도 큰 나라가 된다.
지난 150여 년간 인도와 함께 홍차의 세계를 이끌어온 커다란 나라다.
인도의 남쪽 끝 바다 건너 오른쪽으로 약 90km 지점에 위치한 길이 430km 폭 220km의 실로 작은 섬나라다.
이 작은 나라가 오랫동안 홍차 생산에서는 인도에 이어 두 번째였고, 수출량도 수위를 다투어왔다.
지금은 생산량이나 수출량 모두 케냐에 밀리고 있지만 다양한 정통 홍차의 생산과 수출은 여전히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홍차의 역사는 커피나무의 비극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커피 재배는 네덜란드 식민 통치
시절부터 발을 들여놓았지만,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비로소 상업적 농작물로서의 가능성이 분명해졌다.
1830년경부터 시작해 영국은 빠른 속도로 밀림을 개척해 커피 농장을 만들어나갔다.
이 당시 커피 농장을 위해 새로 개척한 곳이 오늘날 최고의 홍차 생산 지역인 딤불라, 캔디, 누와라엘리야 등이다
영국은 커피 산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1869년 시작된 커피나무 병은 곧바로 섬 전체를 전염시켜
커피 농장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실론 섬에서도 미약하나마 홍차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차 씨앗이 1824년 중국으로부터, 1839년 아삼으로부터 수입되어 실험적 기반에서 캔디에 있는 페라데니야 식물원과
누와라엘리야에서 재배되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 홍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테일러가
캔디 근처의 룰레콘데라(Loolecondera) 다원에 아삼 차의 씨앗을 심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이 되어서였고,
이것이 스리랑카에서의 제대로 된 홍차의 시초였다
1875년 커피나무 병의 마지막 강타가 몰아쳐 남아 있는 농장을 휩쓸었으며, 커피나무는 모조리 땅에서 베어졌다.
그 자리에 차나무가 심어지면서 다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글로는 간단히 정리되지만 커피 산업이 무너지고
새로운 차 산업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스리랑카는 경제적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숱한 커피 농장이 방치되어 싼값에
팔렸다. 토머스 립턴이 실론 섬에 나타나 값싼 다원을 인수하고 영리한 사업적 수완으로 마치 실론 전체가 자신의 다원인
양 이러한 분위기를 영국민에게 알리면서 홍차의 왕으로 등극한 것이 이 시점이다
스리랑카는 차 생산국 중에서는 드물게 1년 내내 차가 채엽되고 가공된다.
이로 인해 다르질링이나 아삼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산 지역에서 수확 시즌에 따라 차를
구분하는 것과 달리 스리랑카 홍차는 차나무가 재배되는 고도에 따른 구별이 좀더 의미가 있다
이런 고도의 차이는 다양한 토양 구성을 가져오고, 여기에 햇빛과 비와 바람의 양과 방향 등
변화 많은 기후가 작용하여 실론티의 맛과 향에 선명히 구별되는 화려한 다양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물론 같은 고도에 있는 지역이라도 특별히 좋은 품질을 산출하는 시기가 있는데, 이때 생산된 차를 시즈널
퀄리티(Seasonal Quality)라고 한다.
시즈널 퀄리티는 그 시기 그 지역만의 독특한 온도, 습도, 바람과 같은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차 재배 지역은 고도에 따라 여섯 부분으로 구분되며, 이 각각에서 생산되는 차는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고지대인 누와라 엘리야, 우바, 딤불라 지역의 홍차가 오랫동안 고품질로 여겨져왔지만, 최근에는 저지대에서
생산되는 홍차도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누와라엘리야, 우바, 딤불라 지역이 속하는 하이 그론 티는 1,000m에서 2,000m 고도에서 자라며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들이 실론의 가장 좋은 차로 여겨진다. 높은 고도의 낮은 온도로 인해 차나무가 천천히
자라면서 찻잎에 향을 농축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와라엘리야는 살짝 머금고 있는 듯한 꽃향기와 깔끔한 황금색
수색으로 가벼우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을 지닌 홍차다. 우바는 농축된 맛에서 오는 힘과 부드럽고 우아한
민트 향이 특징이다
미드 그론 티는 향뿐만 아니라 기분 좋은 깨끗한 맛이 특징이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화려하진 않지만
풍부하고 적당한 강도가 장점이다. 미드 그론의 대표인 딤불라(고지대와 중지대에 걸쳐 있음)는 아마 실론차
중에서 가장 깊은 전통을 지녔을 것이다. 이 향기로운 차는 우리면 깨끗하고 밝은 특징을 보여주면서 강하고
분명한 향, 풍부한 풀 바디의 맛도 낸다. 딤불라 지역에는 많은 다원이 있지만 특히 케닐워스(Kenilworth),
키코스왈드(Kirkoswald), 서머싯(Somerset)에서 생산한 단일 다원 차를 꼭 마셔보기를 권한다.
로 그론 티는 대체로 600미터 이하로 섬의 서남쪽 지역, 즉 라트나푸라로부터 갈레 사이에서 재배된다.
스리랑카의 생산량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섬세함이나 깔끔함과 같은 고지대 특유의 맛은 없지만
적당한 강도와 무게감으로 입안 가득 바디감을 주는 것이 매력이다.
이곳 차밭의 노동자들은 타밀족인데 삶이 고단한 지 관광객들이 오자 우르르 몰려와 구걸을 한다.
싱할라족이 인구의 74%를 차지하고 있는 스리랑카에서 타밀족의 비율울 약 18%이다.
이 중에서 12.5%는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갖고 때로는 싱할라 왕조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던 토착세력으로 이들을 스리랑카 타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곳 누와라엘리야의 차밭에서 만날 수 있는 타밀인은 대부분 영국 식민지 시절 커피와
차나무 재배를 위해 인도로부터 강제로 이주당한 인도 타밀족 노동자의 후손이다.
스리랑카 인구의 5.5%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누와라엘리야의
차밭에서 찻잎을 따는 노동으로 생활하며 스리랑카의 최하층민을 형성하고 있다.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은 사회적 차별과 열악한 교육 여건으로 인해 희망을
찾기 어려운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스리랑카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가 시작된 것은 1815년 캔디 협약이 체결되면서 이다
영국과의 동맹으로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싱할라 왕조는 영국이 태도를 바꿔 해안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움켜지고 세력을 넓혀 나가자 영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이를 기회로 1803년 싱할라 왕조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왕과 귀족간의 대립으로 허약해진
틈을 이용, 1815년 2월 15일 싱할라 왕조의 수도 캔디를 점령해 싱할라의 왕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
(Sri Vikrama Rajasimha:1798~1815)를 포로로 잡게 된다
이어 3월 2일 왕은 왕조의 대표들과 스님들로 구성된 식민지 의회에서 나라의 통치권을 영국 왕실에
넘긴다는 식민조약(일명 캔디협약)에 서명하고 폐위된다
이로써 2,300년간 이어져 온 싱할라 왕조는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영국은 스리랑카 역사상 최초로
랑카 섬 전체에 대한 식민 지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스리랑카는 310년간 서구 열강의 침략을 잘 견뎌냈지만 결국 이교도 국가인 영국 지배하에 들어간다
하지만 나라를 잃더라도 법등(法燈)만은 지키려 했던 싱할라 왕조의 캔디 협약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싱할라 왕조는 나라를 넘긴다는 캔디 협약의 제5조에 ‘불교는 신성한 종교이므로 불교의 의식, 의식과
관련된 사람, 그리고 예배하는 장소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영국 정부의 의무다’라는 문항을 포함 시켰다.
나라 전체를 영국에 넘겨주며 왕조는 막을 내렸지만 불교국가로서의 전통을 지키고 법등을 수호하려 했던
싱할라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확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불교를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대목을 협약에 넣은 영국의 속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협약은 단지 스리랑카에 대한 완전한 식민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이루기 위해 왕조를 종식
시키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식민 지배를 시작한 영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식민지배 초기에 스리랑카에 파견된 영국의 총통은 치아사리 이운 축제와 불교의 최고 장로를
임명하는 왕실 행사에 참석하는 등, 스리랑카의 불교 전통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곧바로 영국 본토의 기독교계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곧이어 이러한
의식들은 폐지되었는데 이는 왕실과 불교계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의식들이 중단됨으로써
불교가 점유하고 있던 국교로서의 지위가 사실상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영국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한편 이들을 통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불교에 대한 비하와 비난을 쏟아 부었다...또한 전통적으로 사찰을 담당하던 지역 교육 시설로서의
기능을 박탈하며 모든 학교를 교회내에 설치하도록 하는 밥법으로 싱할라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사찰을 분리하러 안간힘을 썼다.
기독교인이 아니고서는 공무원이 될 수도 없고 출생신고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가에 대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존경과 믿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여전히 승가를 가장 고귀한 존재이자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자신들이
불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배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다수 민족이었던 싱할라인을 지배하기 위해 영국은 소수민족이었던 스리랑카 타밀족을
중용하는 정책을 썼고, 또한 전통적인 소규모 농업을 강제로 통합해 집단 농장을 만들어
커피, 고무, 차 나무등을 재배하며 남인도의 타밀족을 강제 이주시켜 노동자로 활용했다.
영국의 이같은 분리정책은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 민족간의 갈등이 계속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간간히 외신으로 장식하는 스리랑카 내전의 심각한 원인이 되고 있다.
차 공장의 모습
타밀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다음 다시 캔디시내로 되돌아 온다
캔디댄스를 보기 위해 가는 길에 보석을 파는곳이 많이 보인다
보석은 스리랑카 중부 내륙의 남쪽 마을 라트나푸라(Ratnapura)가 '보석의 도시'(The 'City of Gems)로
스리랑카 보석 산업의 중심지이다...스리랑카를 보석의 섬이라 한다면 라트나푸라는 스리랑카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보석 생산지로 라트나(Ratna)는 보석을, 푸라(Pura)는 도시를 뜻한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보석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왕이 시바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기위해
스리랑카산 루비를 선물로 보냈다고 하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으며 아라비안나이트(Arabian Night) '신드밧드의
모험'에는 신드밧드가 배를 타고 와 스리랑카 남서해안 어업항구 베루왈라(Beruwala)에 도착한 뒤,
라트나푸라(Ratnapura)까지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마르코 폴로도 13세기에 쓴 아시아 여행기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에 갔다가 돌아 가는 길에
실론섬(첫 상륙지 역시 베루왈라)에 들러 스리랑카(당시는 실론섬) 보석의 훌륭함과 귀중함을 보고 이를 기록했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다이애나 비에게 약혼 반지로 스리랑카산 불루 사파이어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보석은 그 찬란한 빛이 사악함을 물리치거나, 영원한 반짝임으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불로불사 不老 不死) 생명을 얻는
상징물로 통한다. 이밖에 권력 상징 등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캔디 댄스를 보러 왔다가 남는 시간을 이용해 목공예 공장을 들어가 본다
흑단목(黑檀木)으로 제작하는 코끼리의 가격을 물어보니 한국 돈으로 200만원 정도이다
2마리를 사야 하는데 너무 비싸서 입맛만 다신다
직물 짜는 것도 구경하고...
잠깐 휴식을 취하는데...
스리랑카 캔디 라이온스 멤버들이 연차총회를 하는 모양이다
같은 리이온스 멤버로서 관심이 많다
회의장 입장하는 라이온스 멤버들
Kandyan Cultural Center
스리랑카 정통 공연인 Kandyan Dance(Rangahala Cultural Dance)를 구경하기로 한다
캔디안 댄스는 에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 축제에서 추는 춤인 캔디안 댄스를 무대에
올린 것으로, 캔디 왕조때 궁전 앞에서 정통 악기에 맞추어 추었던 춤으로 스리랑카를
느낄 수 있는 정통 춤이다
화려한 왕조의 춤...캔디안 댄스
쇼라고는 하지만 댄스는 신성한 것이어서 댄서들은 램프를 손에 들고 앞으로의 성공과 숙련을 빈다.
캔디안 댄스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로 캔디 왕조시대에 궁전 연회에서 추었던 춤을 중심으로 스리랑카 각지의 민속 무용을 합친 것이다. 오늘날에는 쇼의 성격이 많이 가미 되었는데 일 년에 한 번 행해지는 대 축제 페라헤라 때에도 역시 캔디안 댄스를 춘다. 쇼는 우선 전통적인 드럼 음악의 격렬함과 더불어 막이 오른다.성격이 다른 몇 가지 춤이 계속 펼쳐지는데 남성 댄서들의 기민하고 박력에 찬 움직임과 여성 댄서의 화려한 의상과 부드러운 율동을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 버린다.
캔디 댄스를 구경하고 버스로 한참을 달려서 남쪽에 있는 벤토타 해변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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