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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佛 敎 ♣/聖地巡禮

南方 佛敎의 法燈 - 스리랑카를 찾아서(2)

by 범여(梵如) 2018. 3. 15.

스리랑카 2일차 (하바라나 빌리지)

리랑카에서 2일째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열대지방이긴 해도 생각보다 그리 덥지는 않다.

룸메이트인 모 대학 교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기에 혼자 빌리지를 나와 주변 마실을 나선다

하바라나 빌리지 입구

숙소인 빌리지를 나와 마을로 향한다

도로 주위는 우리나라 70년대 모습과 비슷하다

빌리지에서 1km 정도 걸어서 나오니 조금 시내(?)처럼 보이는 곳이 나온다

길가에 있는 불상의 모습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 목재소에도 관심이 많다

동네사람들이 모닥불에다 차를 끓여 마시는 모습이 신기하다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맨발이다

버스 정류장 주변의 모습

삼륜차도 많이 보인다

스쿨버스

복권방도 보인다

자전거 수리점

혼자서 바나나도 사먹고...

흰두교인의 집

도로 주위에는 이런 집들이 많이 보인다

도로가에 있는 나무에서 한 여인이 하얀꽃을 딴다

가서 꽃향기를 맡으니 향이 아주 진하다.

이 여인을 꽃을 따서 도로가에 있는 부처님전에 올린다

다시 빌리지로 돌아와서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앞의 수영장

빌리지 앞에는 넓은 호수가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이틀밤을 자야 하기에 짐을 그대로 두고 다시 성지순례를 나선다

오늘의 첫 코스가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 위 궁전으로 향한다

바위 위 궁전으로 가는 길

시기리야(Sigiriya)는 스리랑카 중앙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스리랑카의 말로 시기리야는 사자바위란다

입장권을 예매하고 바위궁전에 가는 길에 정원들이 보이는데, 왕이 바위 위에 짓고 아래에도 머문 흔적이 보인다 

시기리야 정원의 모습

정원 주위로는 빙둘러 인공 연못을 만들어놨는데 이것은 적의 칩입을 막기위한 요새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정확히 2,000년도에 이곳을 왔으니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모든게 그대로다

스리랑카의 문화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유적지는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와

플론나와라(Polonnanuwa), 그리고 캔디(Kandy)이다.

물방울 모양의 섬나라 스리랑카 중앙부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를 잡고있는 이 세도시는

‘문화 삼각지(Culture Triangie)’로 일컬어지는데 시기리야는 이 문화 삼각지의 중심부이다

정원에서 바라본 바위 궁전의 모습

높이 195m의 거대한 바위산 정상에 펼쳐져 있는 바위궁전(Rook Palace)은 스리랑카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스리랑카 여행의 백미이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있는 붉은 바위산.그 정상에 세웠졌던 화려한 궁전과 그곳에

살았던 고독한 왕의 이야기는 전설속의 한 장면처럼 경이로우면서도 슬프다. 

시기리야 바위산에 웅장한 궁전을 지은 왕은 5세기에 이곳을 다스린 왕 카샤파1세(Kashyapa:473~491)다

이 바위궁전을 세운 이유는 스리랑카 사람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카샤파 왕은 아누라다푸라에 거대한 저수지를 건립한 다투세나(Dhatusena:455~473)왕의 장남이었다.  
1,500여년전 당시 스리랑카의 섬 모리안 왕국(Moryan danasty)은 다투세나(Dhatusena)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목갈라나(Moggallana)였고 하나는

평민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샤파(Kashyapa)였다...카사파는 나이가 더 많음에도 어머니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할 수가 없었다. 

 

473년 왕의 호위대장인 미가라(Migary)와 왕 사이의 불화로 인해 미가라는 복수를 꾀하고

카샤파와 함께 쿠테타를 일으킨다...카샤파가 왕이 되자 다투세나왕은 감옥에 수감된다

카샤파는 왕위 찬탈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왕이었던 다투세나가 엄청난 보물을 숨기고 있다며

‘숨겨놓은 보물을 내놓으라’라며 아버지를 윽박 질렀으나 다투세나는 그가 조성한 아누라다푸라의

칼라웨아 저수지로 가샤파를 데리고 가서 저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 이에 격분한 카사파는 477년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원래 왕위 계승자였던 모갈라나 왕자는 카사파가 두려워 인도로 피신했다.

카사파는 모갈라나가 언젠가는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되찾으러 올 것이란

두려움에 시달려 정신병자가 되었다.

카사파는 왕국의 수도인 아누라다하푸라(Anuradhapura)를 버리고 난공불락의 요새를 택한다

그곳이 바로 평지에서 우뚝솟은 195m 높이의 바위 시기리야이다.

바위 궁전 앞에서의 범여

성지순례에 같이 나선 도반들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영혼 때문이었을까

카샤파는 이때부터 두려움에 떨며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함께 인도로 망명한 동생이 보복하러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카샤파는 미친듯이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지었는데 시기리야의 바위 궁전은 그렇게 탄생했다

7년의 난공사 끝에 궁전이 완성되자 왕은 총애하던 무희 한 명만 데리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 보이는

그 높은 바위산 꼭대기의 바위산 궁전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하지만 11년 후 카샤파의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다.

인도로 망명했던 동생 목갈라나가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것이다.

카샤파는 동생과 싸우기 위해 코끼리에 올라타고 전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싸움이 한창이던 무렵 무렵 카샤파를 태운 코끼리가 그만 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군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수렁에 갖혀 오도 가도 못한 채 혼자 남겨진 카샤파는 동생의 군대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단검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을 쫒아내며 왕위에 오른지 18년만이었다.

시기리야 바위산 가는 길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왕위에 오른 목갈라나는 카샤파의 무모한 욕망이 빚어낸

시기리야의 바위궁전을 승단에 기증하고 수도를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옮겼다

시기리야의 바위 궁전은 이후 상당기간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되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져 갔다

바위산 정상 오르는 길은 꽤나 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동반되어야 할만큼 힘이든다.
깍아지른 바위로 네발로 기어가듯 올라야 하지만 이 바위궁전이 주는 경이로움은

그 노력이 결코 아깝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데 이 가파른 바위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은 그 흔적만으로도 감탄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인데 불구하고 바위 궁전으로 오르는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2000년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 여행때에 오고 20여년만에  다시 오르는 바위궁전.

그 당시 기억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

어떻게 이 높은 곳에 궁전을 지었을까...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보인다

정상으로 오르는 바위 중간에는 “500명의 미녀들”이라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지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500명 혹은 1,000명의 미녀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카샤파왕이 땅에 묻어 죽인 아버지의 원혼을 미녀들로 달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프레스코 벽화들을 보면서 평생동안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았을 카사피왕의

삶을 보는듯한 느낌이다...자기 목숨에 관련된 수 많은 걱정에 정신병자가 안 되었으면 오히려

이상할 듯 싶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도 괴로운데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사는것이 엄청나게 괴로웠을 것이다 

500명의 미녀(시기리야 레이디)...모셔온 그림

거친 바위면에 정성스럽게 점토와 석회, 꿀을 발라 매끄럽게 만들어 그 위에 그린 프레스코화는

1500여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기리야 레이디”로 불리는 이 그림은 천상의 요정 압살라와 그를 시중드는 왕녀들로 추정되는데

카샤파왕이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그림속의 여인은 당초 500여명(혹은 1,000여명)에 달했지만 이곳이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되면서

지나치게 농염한 여인들의 모습이 부담스러워 일부를 지워 버렸고, 이후 비바람에 시달리다가

1967년 반달인이 이곳을 공격했을 때 다시한번 그림들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화려한 보석장신구로 온 몸을 치장하고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고혹적인 자세로 꽃을 감상하며

미소짓고 있는 시기리야 레이디 그 자체가 환상적이지만 사진에 담을 수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미러월

미녀도를 지나면 긴 회랑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미러월(Mirror)인데 이 거울벽에는

당대 왕조에 대한 서사시와 미녀도 속의 미녀들에 대한 칭송의 시가 싱할리어로 적혀 있는데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 벽화를 찍으면 여권이 압수되고 많은 금액의 벌금을 물게 된다고 가이드가 신신당부를 한다.

실제로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경찰의 눈매가 매섭기만 하다.

프레스코화를 지나면서 약간의 평지가 나오는데 벽에 뭔가가 보이긴 하는데 뭔지를 모르겠다

시기리야 레이디가 그려진 회랑을 지나 좁은 계단으로 올라서면 사자모양의 궁전입구가 나온다

넓은 광장에는 관광객 사이로 원숭이와 개들이 많이 보인다

시끄러운 관광객에는 관심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바위궁전 입구의 사자발톱

바위산 아래 궁전 입구에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거대한 사자상이 조성되어 있다.

날카로운 발톱을 앞으로 내밀고 포효하듯 입을 벌린 사자의 목구멍, 그곳이

바위 궁전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의 입구였다.

“사자의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카샤파의 엄포이자

그의 두려움이었다...궁전은 ‘사자의 목구멍’이는 뜻의 시기리야로 불렸다. 

사자의 입구를 통해 궁전으로 오르는 길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다

기오르듯 바위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사이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이 내달리는 바위산 정상에 세상에서 가장 고독했던 카샤파왕의 궁전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통치하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왕

세상을 다스리는 왕좌에 앉기 위해 지독한 고독을 택했던 카샤파왕은 거센 바람만 찾아오는 이곳에서

과연 행복했을까.

거센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바위궁전에 올라서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궁궐터가 나온다

웅장하고 화려했던 궁전과 물을 끌어올려 사용했다는 거대한 수영장

그리고 카샤파왕이 그토록 염려했던 왕좌가 과연 고독했던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단도(短刀)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카샤파왕도 어쩌면 불어오는 이 바람이 죽음보다 더 두려웠지도 모른다.

잠들지 않은 바람은 인간의 욕망, 그 끝없는 회오리에 휩싸여 미치광이 춤을 추다가 쓰러져 버린

카샤파왕의 손짓처럼 허망하게 바위산을 휘감고 있다

바위산 궁전 맨 윗쪽의 모습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해 마치 인종 전시장같은 느낌을 준다.

카샤파왕은 총애하던 무희(舞姬) 한 명만 데리고 바위 공전으로 올라갔다.

화려하게 꾸며진 궁전,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수영장, 무희의 춤이 끊이지

않는 연회장에서도 그는 홀로였다.

아무도 바위 궁전으로 올라올 수가 없었고, 심지어 대신들조차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위산 아래에 별도로 만들어진 알현실(謁見室)에서 왕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무려 11년동안 이 바위산 궁전에서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샤파왕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무모한 욕망이 스스로 눈을 멀게하고 자신을 두려움 속에 가둬버렸음을...

그는 아버지와 백성들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진짜 보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바위산 꼭대기의 궁전이 결코 그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도,

그곳이 궁전이 아닌 감옥이 될 것임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열망했던 왕국, 손아귀에 넣고 싶었던

세상이 왜 어느 순간 두려운 존재로 바뀌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두려움은 그의 욕망과 무지(無知)가 빚어낸 괴물이었다.

그 괴물에 사로 잡혔던 카샤파왕의 마지막 선택은 또 다시 허망했다.

궁전터에 아직도 남아있는 수영장의 모습

그래서 시기리야 바위 궁전은 찬란하고도 슬프다.

카샤파왕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욕망의 사슬을 끊을수 있었다면

시기리야의 이야기가 이렇게 처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의 죽음은 도피였다. 

왕이 휴식을 취했다는 돌의자...앉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적혀있다

이 바위산위의 궁전...규모가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높이 195m 바위산 위에 조성된 시기리야 락팔레스는 터만 남아있다.

넓은 수영장, 연회장, 궁전이 있었던 흔적은 1600여년 전 이곳에 얼마나 웅장한 건축물들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그런데 잠시 목갈라나를 살펴보자.

인도로 망명한 왕자,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이가 어떻게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

목갈라나가 이끌고 온 군대는 남인도 타밀족이었다

타밀족이 누구인가.

그의 조상 둣타가마니, 바라감바후 왕은 타밀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기도, 그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하지만 타밀족 또한 엄연한 스리랑카의 또 다른 주인이다.

기원 전부터 스리랑카에 살았으며 그들의 뿌리인 남인도 타밀과도 교류했다.

때때로 싱할라왕국을 위협하는 침략세력이었지만 싱할라왕국의 지배력이 견고할 때는

왕실과 왕국을 수호하는 용병의 역할을 수행했다.

타밀족은 힌두교 전쟁의 신 스칸다를 신봉했다.

그들이 전쟁에 능한, 용맹한 전사의 민족임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불교에 귀의해 살생을 씻을 수 없는 죄업으로 여겼던 싱할라족에게

전쟁을 수행하고 외세를 막아줄 타밀족은 두렵지만 불가피한, 중요한 존재였다

심지어 ‘부처님 치아사리를 수호하는 역할은 타밀족의 책임’이라고 명시한 비문이 남아있을 정도다.

그러니 목갈라나가 남인도에서 이끌고 온 군대 역시 타밀용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산 궁전 정상에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느끼면서 바위산 궁전 아래로 내려선다

바위산 궁전 맞은편의 모습

바위산 궁전을 찾아온 스리랑카 중학생들

사자상 앞 넓은 광장으로 내려오니 원숭이들이 많이 보인다

관광객들에게 익숙한지 도망도 안가고 물끄러미 쳐다만 본다

母情

뒤돌아 본 바위산 궁전의 오름길 

왔던길을 다시 내려간다

바위산을 내려와 우측에 있는 궁궐터의 모습

뒤돌아 본 바위산 궁전으로 오르는 철계단의 모습

커다란 바위에 파진 홈이 궁금하여 동행한 남수연 기자에게 물어보니

예전에 저 구멍에 기름을 넣어 불을 켰던 곳이라고 한다 

시기리야 바위 궁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모습

1,600년전 대신들이 카샤파왕을 알현했던 알현실이란다

카샤파왕이 앉아서 대신들에게 보고를 받았던 용상의 모습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코브라 바위라고 한다

피리를 불면 코브라가 춤을 춘다...한번 보는데 1달러를 달라고 한다

카샤파왕의 슬픔이 고스란히 갖고있는 바위산 궁전을 바라보며 다음 행선지인 플론나루와로 향한다

플론나루와 가는길에서 바라본 들녘...1년에 벼농사가 2모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논 옆에 나무위에 원두막같은 높은 집이 있는데 짐승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만든 집이라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싱할리 왕조의 2번째 수도인 폴론나루와 쿼드랭글 사원으로 향한다.

폴론나후라(Polonnaruwa)는 아누라다푸라에서 남동쪽으로 103km, 행정수도인

콜롬보에서 216km, 시기리야에서 55km 떨어진 시골마을이다.

 

폴론나후라는 임도 남부 촐라왕조(9~13세기 중엽까지 남인도를 군림한 인도 타밀족 왕족)가

싱할라 왕조의 아누라다푸라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밀려난 싱할라 왕조를 견제하기 위하여

건설한 군사도시였는데 이후 촐라 왕조의 내분을 틈타서 비자야바후 1세 왕이 1017년에

폴론나후라를 탈환하여 싱할라 왕조의 2번째 수도를 삼았는데 이때 만들어진 아타다게(佛齒寺)

의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왕권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폴론나후라의 전성기는 12세기였으며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대규모 관개용 인공저수지인

파라크라마 사무드라(Parakrama Samudra)를 만들고 호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길을 끼고

직사각형 모양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도시 중앙에는 7층 규모의 거대한 왕궁과 수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는데 특히 왕궁 바로 옆에는

쿼드랭글이 조성되어 부처님의 치아를 안치한 바타다게 사원을 비롯하여 12개의 사원이

조성되어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스리랑카 성지를 순례할 때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몇가지 예절이 있다.

우선 사원에 들러갈 때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는 안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찰의 예절과는

별반 다르지 않으며, 남녀를 불문하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반바지나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웃옷들이 경계의 대상이다.

복장에 대한 이런 느슨한 규정과는 달리 외국인이라도 절대 예외없이 적용되는 규칙이 있다.

사원을 들어설 때 입구에서 모자와 신발을 반드시 벗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요즘은 스리랑카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늘어서인지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의 옷차람은 이런 예절을 무색케 할 만큼 과감하기 그지없다.

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인 까닭에 외국인들 가운데는 아예

웃옷을 벗어 버리고 다니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해심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아예 포기해서인지

이런 노출심한 외국인 관광객에게 제재를 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유적 특히, 싱할라 왕조의 2번째 수도였던 폴론나루와((Polonnaruwa)에서

이 규칙은 순례길에서 예상치 못했던 고행길이었다. 

문스톤(Moon Stone)

스리랑카 대부분의 사원 입구에는 문스톤(Moon Stone)이라 불리우는 반원

모양의 석조 발판이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모자와 신발을 벗어야 하는 곳이다.

문스톤은 윤회(輪廻)의 상징으로 불꽃, 코끼리, 말, 사자, 소, 꽃, 새, 연꽃 등을

통해 인간세계의 생로병사와 그로부터의 해탈, 열반 등을 상징하고 있다. 

 

문스톤 중에는 코끼리, 말, 사자만 있고 소가 없는 이유는 인도에서 시집온  왕비를

위해 지었기 때문에 소를 신성시하여 소를 새기지 않았다고 남기자가 설명을 한다

쿼트랭글(Quadrangle) 사원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중에 수평선이 보이는 호수를 만났다면 폴론나루와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실은 호수가 아닌 대형 저수지 ‘파라크라마 사무드라’이다. 파라크라마(Parakrama)는 이 도시에

아름다운 사원과 거대한 저수지를 조성한 파라크라마 바후1세(1153~1186)의 이름을 딴 것이고

사무드라(Samudra)는 싱할리어로 바다를 뜻하니 바다를 품은 저수지이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가 내어주는 물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된 도시.

이 땅의 왕은 이곳에 도읍을 정한 후 왕궁을 지으면서도 사원 불사를 잊지 않았다.

왕궁 바로 옆 공간에 사각형 모양의 정원을 조성하고는 그 안에 사원과 탑 등 11개의

건축물을 성스럽게 빚어 놓았는데 이것이 쿼드랭글(Quadrangle)이다.

바타다게(Vatadage)

‘불치사리를 봉안한 둥근 사원’이란 뜻으로 7세기에 조성된 이 사원을 12세기에

니상카 말라왕이 재건축해 불치사리(佛齒舍利)를 봉안하고 바타다게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타다게(Vatadage)는 싱할라어로 ‘바타’는 원, ‘다’는 치아, ‘게’는 사원을 뜻한다

즉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신 둥근사원’이란 뜻으로 불치(佛齒)는 싱할라 왕권의 상징을 뜻한다

이중에 원형기단(하단의 지름 40m)의 위에 외부의 둘레는 기둥으로 줄을 세운 낮은 담으로

둘러싸고 안둘레는 원형의 높은 담(높이 4.7m)으로 두르고 중앙에는 벽돌로 쌓은 작은 스투파

(인도형의 탑)를 세워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셔놨다.

 

탑 사방에는 4방향에서 각각 바라볼 수 있도록 부처의 조각상을 안치했으며 지붕은 돌기둥 위에

나무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을 것으로 추정되며 북쪽과 동쪽 입구에는 문스톤과 가드스톤

(Guard stone:악마로부터 부처를 지키는 수호석)이 있다.

바타다게는 7세기에 조성된 사원으로 추정되며 재건축을 하여 불치사리를 봉안하고 바타다게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바타가 ‘원형’을 가리키는 점을 감안하면 아타, 하타도 사원의 전체적인 형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건물 모양에 따라 이루어진 각(角)의 수를 이른다’며 8개의 각으로 조성된 불치사, 60개의 각으로 조성된

불치사라는 뜻’으로 8각 불치사, 60불치사, 원형 불치사, 역시 세 사원을 관통하는 모드는 모양이다

바타다게 계단입구 가드스톤

사원내에 들어오는 악귀를 물리친다고 한다

세 개의 불치사원 옆에는 스님들이 전하는 경전을 왕이 경청하는 공간인 라타만타파(Lata Mandapa)가 있고,

그 옆에는 깨달음을 위해 숨 하나까지도 관조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도량 투파라마(Thuparama)가 자라잡고 있다.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도반들

직경 18m의 원형 건축물 중앙에 사리를 모시고 네 방향으로 불상을 봉안했다.

각각의 입구에서 들어와 4면의 부처님께 참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사원의 천정은 나무 지붕으로 덮었는데 전통적인 싱할리 건축 양식이다

원형의 건축물 주변으로는 지붕을 받쳤던 기둥의 흔적이 남아있다

촐라족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된 불상의 모습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불치사리를 모실 불치사와 대탑(大塔) 건립 등 많은 불사에 노력을 기울였다.

왕궁이나 접견실 등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건축물 못지않은 정성을 공들였다.

아누라다푸라를 신성 도시를 만든 보리수 스리마하보디와 불치사, 이수루무니아가 폴로나후라에는

불치사와 바타다게가 있어 싱할리 왕국의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촐라왕국을 물리치고 수도를 옮긴 후 불치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8일만에 지었다는 전설이 만들어 질 정도로

서둘렀던 바타다게와는 달리 파라크라마바후는 공을 들여 크고 화려한 불치사를 세웠다.

자신이 불치(佛齒)를 봉안한 왕국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였지도 모른다. 

바타다게를 배경으로 인증샷

아타다게(Atadage)

이역만리 성지에서 제일 먼저 합장하고 싶은 사원은 폴론나루와에서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최초로 봉안했던 아타다게(Atadage)이다... 아타는 8을 가리키므로 “8각불치사(八各佛齒寺)”라는 뜻이다

싱할리 왕조의 최초 도시 아누라다푸라는 11세기초에 남인도로부터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촐라(Chols) 왕조에 의해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었는데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아누라다푸라의 수많은 사찰이 피괴되었을 뿐이 아니라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단이 절멸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단 한명의 비구니도 살아남지 못한 대비극이었다.

 

그러나 1055년에 즉위한 위자야바후1세(Vijayabahu1)는 1070년 촐라인을

완전히 격퇴시키고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의 남동쪽에 있는 폴론나루와로 옮긴다

이로써 폴론나루와는 싱할리 왕조의 2번째 수도가 된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가 등극하기 불과 100여년전 인도양 일대를 아우르던 대제국 촐라왕조를

무너뜨리고 싱할라 왕국의 제2 전성기를 연 위자야바후 역시 스리랑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걸출한 영웅이었다...하지만 스리랑카 역사에 단 두명뿐인 ‘위대한 왕(Great King)’

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는 그의 손자 파라크라마바후에게 돌아갔다

 

위자야바후 사후 스리랑카는 그의 형제와 아들, 딸들에 의해 다시 3개의 왕국으로 분열되며 혼란에 빠졌다.

위자야바후의 조카로 남부 다키나데사 지방의 패권을 장악했던 마나브하나라는 자신의 아들에게

‘적을 무찌르는 팔’이라는 뜻의 ‘파라크라마바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의 이름은 당시 싱할라 왕국이 얼마나 큰 분열과 혼란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 위자야바후 1세는 불교적 기준을 통해 혼란해진 국가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쇠락한 불교의 재건이 시급했다.

 

국왕 위자야바후 1세는 스리랑카에 법등(法燈)을 전해 주었던 미얀마의 수도 바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스님과 경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미얀마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스리랑카 불교 재건에 힘을 보탰다.

스리랑카가 전해 주었던 법등이 다시 돌아와 쇠락해 있던 스리랑카 불교를 중흥시킨 것이다 . 

이 같은 혼란기에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파라크라마바후의 유년기는 각 지방의 패권을 둘러싼

삼촌과 사촌들간의 분열과 대립, 동맹과 배신의 반복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파라크라마바후는 절묘한 처세술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마나브하나라를 대신해 다키나데사를 지배하던 삼촌 키티스리메가가 세상을 뜨자

파라크라마바후는 20대 중반 왕좌에 오르며 싱할라 왕국 통일에 박차를 가했다.

로얄 팔레스(Royal Palace)

파라크라마 왕의 궁전이었다는 로얄 팔레스(Royal Palace)는 벽과 돌기둥만 남아있지만

벽의 두께가 무려 3미터이고 높이만도 3층 규모에 달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 호수 동쪽에 있는 동쪽에 있는 궁전으로 파라크라마바후 1세(재위기간1153~1186)에 세워졌으며 궁전의 한 변이 각각 45.7m인 정사각형의 대지위에 높이 30m로벽돌과 나무로 만든 7층 높이의 왕궁이었으나 불타고 지금은 3층 벽체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36개의 돌기둥은 당시의 홀 지붕을 받치고 있었던 것이며 방이 50개나 되었는데 니산카 말라왕의 목욕탕과 벽돌로 지은 집회소가 있다. 

 

그는 다키나데사의 왕으로 등극한 지 불과 10여년만에 셋으로 분열됐던 스리랑카를 통일하고 폴론나루와에 입성,

통일왕국의 수도로 변모시켜 나갔으며, 현재 폴론나루와에 남아있는 유적의 상당수가 파라크라마바후

시대에 이르러 건설된 이유이다.

파라크라마바후는 통일 싱할라 왕국의 국왕이라는 자신의 지배력을 드러내기 위해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세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렸으며 현재 폴론나후라에 남아있는 왕궁 유적지 또한 그의 산물이다.

파라크라마바후의 왕궁으로 불리는 벽과 돌기둥 일부만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로 31m, 세로 13m에 벽의 두께가 무려 3m에 달하는 이 왕궁의 흔적은 당시 파라크라마바후의

왕궁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는가를 대변하고 있다.

이 궁전 건물은 30m 높이의 7층 규모로 지어졌으며 36개의 기둥이 중앙의 홀을 지탱하고 있었다.

3층까지는 돌로, 나머지 4개층과 지붕은 나무로 지어졌으며 왕궁 전체에는 무려 1,000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13세기 초에 스리랑카를 침입했던 남인도 판디아 왕국에 의해 소실되어 사라졌다.

현재에도 일부 벽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궁전 맞은편 왕의 접견실과 왕실 가족들의 목욕탕이었던 쿠마라포쿠나 등도 파라크라마바후 시대

강력한 왕실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이다

파라크라마바후 왕의 접견실

접견실에는 우리나라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볼 수 있는 품계석과 같이 이름이 적혀있는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데, 왕을 중심으로 왕자, 장군, 수상, 대신 등 각각의 지휘와 역할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어 당시의 행정 조직의 형태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기둥에 남아있는 Council Chamber

석판의 기록에 의하면 ‘Raja Vaishayabhujanga Mandapa’ 로 불린 파라크람바후 1세의 각의장이었다.

우리나라 궁전의 품계석처럼 돌기둥에는 대신(臣)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왕의 오른쪽에서 부터

황태자, 장군, 수상 각료, 재무대신 , 서기 순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왕실의 목욕탕 - 쿠마라포쿠나

왕실의 목욕탕인 쿠마라포쿠나는 인근의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오고 사용한 물을 내보내는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당시 물을 다루는 관계 기술의 놀라운 수준을 보여준다.

목욕탕은 아름답게 조각된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어 눈길을 끌지만 지금도 비가오는 우기철이

되면 탕 안에 모인 빗물이 새어나가지 않고 그대로 담겨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건축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탈의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남아있다.

5세기경 인도 출신 붓다고사(Buddhaghosa)스님이 스리랑카로 건너와 싱할리어로 된 삼장(三藏) 즉

패엽경((貝多羅葉)을 팔리어로 번역하고 주석서를 집필하였으며 상좌부 불교의 교리와 학설을 집대성한

저서「청정도론(淸淨道論)」은 오늘날까지도 남방불교계의 가장 권위있는 논서로 첫 손에 꼽힌다 

이곳은 붓다고사 스님의 목욕탕이었던 쿳탐 포구나이다

그 당시에 사용했던 우물

파라크라마 사무드라(Parakrama Samudra)

이 저수지는 2개의 자연 호수를 연결하여 확장하고 댐을 설치해 만든 인공 저수지다

저수지의 폭은 최대 14km에 달하고, 165개의 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댐의 높이도 12m가 넘는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는 평균 수심이 7.6m로 호수의 면적은 22㎢에 달한다.

이 저수지는 3,000여개의 수로를 이용해 73㎢(약 2200만평)에 달하는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규모이다.

이 같은 대규모의 저수지가 확보되자 폴론나루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고, 연중 농사가 가능해지며

도시는 풍요로워졌다.

 

파라크라마는 바다라는 의미로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재위기간 동안 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산업에도 큰 발전이 있었고,  서남아시아( 특히 아랍)와 중국과의교역도 증대되었다.

풍요로운 도시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당시 인도는 이슬람의 침입으로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세계 최대의 불교교육기관이었던

나란다 불교대학과 인도 밀교의 중심지였던 비크라마쉴라 대사원까지 폐허로 변했으며 수많은

학승과 불교학자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상당수 불교학자들과 스님들이 이곳 싱할라 왕국의 폴론나루와로 몰려 들었다.

싱할라 왕국은 이미 기원전 1세기에 왓타가마니 하브하야왕 시대에 승가의 분열이 일어난 후

하브하야기리(무외산파)파를 중심으로인도 불교의 다양한 부파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같은 전통이 이어지던 싱할라 왕국의 풍요로운 수도 폴론나루와에는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인도 밀교까지 전파되며 뜻하지 않은 불교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싱할리 왕조의 최초의 도시 아누라다푸라는 11세기 접어들며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인도 남부의

촐라 왕조에 의해 초토화가 됐다...고대에 건축된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고 단 한명의 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당시 촐라를 섬에서 몰아내고(1070년) 아누라다푸라를 회복한 인물은 위자야바후 1세(1059~1114)이다

그는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옮기고 미얀마에 승려와 경전을 요청하며 상좌부 불교 중흥의 토대를 다져갔다.

그때 아누라다푸라에 있었던 부처님 치아사리(불치사리)를 이운해와 이 사원에 봉안했다.

스리랑카의 역사서 “출라왐사(Culavamsa:小史)”는 당시 폴론나루와의 승가에 대해 계율이 문란해지면서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고 전한다...일부 비구는 결혼을 하거나 심지어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는 것, 또 출가한 이후에도 속가의 가족을 돌보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등

‘출가한 수행자라 해도 그 행동은 우바새와 다를 바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이러한 승가에 대해 개혁을 단행했다.

왓타가마니 아브하야왕 시대의 분열 이후 3개로 나뉘어졌던 승단을 하나로 통합해 기원전 2세기

둣타가마니왕 시대와 같은 하나의 승단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파라크라마바후의 승단 통합, 아니 왕권에 의한 승단 정화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계율을 지키지 못했다고 판단된 출가자들은 환속을 시켰고, 승단은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된 마하위하라, 즉 대사파로 통합했다.

이후 스리랑카는 현재까지도 마하위하라파의 전통을 계승하며 남방 상좌부 불교계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역사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과연 12세기 폴론나루와의 불교는 출라왐사의 기록대로 문란한

계율 정신과 만연해 있던, 불가피한 정화의 대상이었을까

그런데 왜 아타다게일까?
다게(da)는 치아(齒牙)이고 게(ge)는 사원(寺院)이니 ‘다게’는 ‘치아를 모신 사원’을 뜻한다

그런데 ‘8’을 가리키는 ‘아타(Ata)’는 왜 붙어 있을까? ‘8개의 불치사리를 모신 사원’은 아닐 것이다.

아타다게 옆에는 폴론나루와에서 2번째로 불치사리를 봉안했던 사원 하타다게(Hatadage)가 있다.

아타다게 입구에는 신발과 모자는 꼭 벗어야 한다.

입구를 지키는 감시원 눈매가 상당히 매섭다

하타다게(Hatadage) 사원의모습
‘하타’는 ‘60’을 의미을 의미한다

그러나 ‘60개의 불치사리를 봉안한 사원’이란 풀이는 분명 맞지 않을 터, 8과 60은

불치사리를 의미하는 아니며 그럴수도 없다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이운된 불치사리는 1과이기 때문이다

하타다케 입구의 모습 

남인도 촐라왕국의 지배를 극복하고 싱할라왕국의 국권을 회복한 위자야바후왕은 폴론나후라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불치가 있는 곳에 싱할라의 지배자가 있다는 믿음으로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실 불치사 ‘하타다게(Hatadage)’를 건립했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최초로 아누라다푸라에서 폴론나루와로 옮겼던 사원이 이곳이다.

건축 당시에는 기둥이 54개인 2층 규모로 사리는 2층에 모셔졌다고 하며 바타다게 맞은편에 있다. 

인도 촐라족에 의해서 파괴된 불상들이 많이 보인다

폴론나루와 사원구역인 쿼드랭글 안에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菩薩像)

Bodhisatva image House(보디사트바 상사 원)인데 보디사트바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이란

뜻으로 보살(菩薩)이란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고 하며 당시의 싱할라 왕국에 수준높은 대승불교가 흥성했음을

대변하고 있다.

하타다게 내부의 모습

쿼드랭글 석비

폴론나루와 불교의 중심지였던 쿼드랭글 안에 남아있는 석비에는 “불치사리(佛齒舍利) 수호의

임무가 왕의 사병에게 위임되어 있다” 명문(名文)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문은 타밀어로 쓰여있다. 

폴론나루와시대에 타밀 용병의 위상과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조성한 와타다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는 법보신문사 남수연 기자

투파라마 사원(Thuparama Vihara)

부처님의 치아사리에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사원으로 지금은

공사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이 사원은 파라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건설된

사원으로 폴론나후라의 사원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사원이다

고대 건축 양식인 아치형(gedige) 스타일의 건축물로 폴로나후라에서 유일하게 지붕이 남아있는 유적이다

벽과 지붕은 벽돌로 지었는데 인도 남부지역의 건축 양싯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2m 두께의 뚜꺼운 벽에 아침이면 각도를 맞추어 뚫은 천정의 구멍을 통해 햋빛이들어와

부처님의 얼굴을 환히 비추도록 설계가 되었으며 내부에는 거대한 부처의 좌상이 있다는 기록이

비문(碑文)이 적혀 있지만 지금은 커다란 좌대만 남아 있으며 캔디로 수도가 옮기기 전까지

스리랑카 불교의 중심이 된 사원이다

스리랑카의 보석이라 불리는 랑카탈리카(Lankatilaka) 사원

일반적인 스리랑카의 stupa(탑)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탑으로 위로 갈 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9미터의 

7층짜리 탑으로 재료는 진흙으로 만든 벽돌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탑의 모양은 캄보디아와 태국등에서 볼 수 있는데,

폴론나루와의 전성기 시대였던 12세기경에는 태국이나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 승려들이 찾아 왔는데 당시 건설된 것이다.

군데군데 출입구 같은 구멍이 나 있으며 계단을 통하여 꼭대기까지 갈 수 있다.

 

원래는 7층이었는데 지금은 6층이며 캄보디아 양식으로 12세기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7개의 층은 수미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1153~1186)왕에 의해 지어진 조상형(彫像形) 사원으로

입구의 두 탑문과 안쪽의 거대한 부처 입상은 스리랑카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높이 17.5m, 길이 52m, 폭 18m의 규모로 한쪽에 입구가 입구가 있고 나머지 3면에 벽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치형 천정이 무너진 사원 내부에는 머리가 부서진 거대한 부처 입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머리가 없는 입불(立佛)을 향해 예경을 올리는 도반들

부처님의 발가락...상당히 큰 규모이다

이 입상은 불상이 아닌 힌두교 양식의 입상처럼 보인다.

랑카탈라카 사원의 가든스톤(수호석)의 모습

내부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멍의 모습

햇빛이 들어오는 모습

랑카탈라카 사원 내부의 불상

랑카탈라카 사원 내부를 둘러보는 도반들

하타다게 앞에 있는 갈포타(Gal-pota)의 모습

Gal은 바위이고 pota는 책으로 길이 9m, 폭 1.5m 두께는 44~66cm, 무게는 25톤으로 세계 최대의 석장경(石藏經)으로

11세기에 스리랑카 불교를 개혁하고 담불라 석굴을 중수한 니산카말라(Nissanka malla:1187~1196)왕이

이전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 근방 마힌틸레에 있던 것을 수도를 옮기면서 같이 옮겼다.

앞면에는 코끼리상을 그리고 윗면에는 팔리어 경전 중 훌륭한 왕이 덕목을 돌에 새기고 남인도에서 침략한

타밀군의 침략사와 주변 나라들과의 외교관계. 그리고 니산카 말라왕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나라의 이두문자와 비슷하게 팔리어어를 소리나는대로 싱할라어로 적었다고 한다 

갈포타에 대한 설명을 하고있는 남수연 기자

갈포타의 설명을 듣고난 후에 옆에 있는 화장탑으로 향한다

화장탑

넓은 잔디가 펼쳐진 곳을 지나니...

예전에 연못이었다고 한다

석주(石柱)들이 있는 곳을 지난다

키리 베헤라(Kiri Vehela)

흰 석회칠로 되어 있는 대탑(스투파)를 만나는데 ‘Kiri’는 싱할라어로 ‘우유’라는 뜻이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왕비였던 수바드라(Queen Subhadra)가 세웠다고 한다   

악어인지 도마뱀인지?

 

폴론나후라의 유적지와 왕궁을 갈비하라로 가기위해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 근처의 기념품 가계

버스를 타고 그리멀지 않은 갈비하라에 도착한다

갈비하라에 도착하여 신발과 모자를 벗고 불상쪽으로 향한다

동남아 지역에는 불상에 예배를 하기 위해서는 신발과 모자를 벗어야 한다

폴론나루와 북쪽에 있는 갈비하라 석굴의 정식명칭는 웃탈라라마( ගල් විහාරය) 로 북쪽에 있는

사원이란 뜻으로 갈비하라( Gal Viharaya)라고 하는데 바위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길이 51m 화강암 바위 측면에 조각이 되어있는 거대한 불상으로 각기 다른 표정의 부처의 조각은

부처가 열반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파라크라마바후 1세 시대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원력을 전하고 있는 역사서 ‘출라왐사’에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명령했던

석불의 조성 형태도 기록되어 있는데 바위 동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부처님, 선정에 든 부처님,

그리고 고요히 열반에 든 부처님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갈비하라 석불이다.  

 바위 동굴에서 정진하고 있는 부처님은 마치 인도의 아잔타 석굴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입구에서부터 수평으로 바위를 뚫고 들어가며 석굴과 불상을 조성해 나갔다.

입구에는 기둥을 내부에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었고, 2m 남짓 파고 들어가  좌대와 불상, 광배를

남겼고, 석굴을 개착하고 불상을 별도로 조성해 석굴안에 봉안한 것이 아니고,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바위 전체를 깍아내었다.

 

석굴을 조성한 장인은 마치 바위를 투시하듯 심안(心眼)을 갖고 필요없는 돌들을 도려냈다.

그리고 마침내 나툰 석불은 깊은 삼매에 든 듯 편안하고 고요하다

좌대와 광배에는 연꽃과 사자 문양이 정교하게 문양되어 있으며, 마치 나무를 깍아 짜서 맞추고

흙을 빚어 조성한 듯 정교하고 빈 틈이 없다

 

수행하는 부처상으로 전면에 2개의 감실이 있는 인공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 좌불상을 앉혔는데

처음에는 황금으로 채색한 황금불상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흔적만 남아있다.

불상 주위에는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며 불상앞 제단에는 꽃과 향로가 놓여있다.

석불좌상

높이 4.6m로 당당한 어깨와 굳센 체구의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불두(佛頭) 주위에는 연꽃 장식과 4분의 작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800여전에

조각된 이 부처는 갈비뼈가 앙상할 정도로 여윈 모습인데 오랜 명상의 증거라고 한다

열반상(涅槃像)

길이가 약14m쯤 되는 와불(臥佛)로 열반에 든 부처상의 표현을 하고 있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오른쪽 팔을 괴고 누우신 부처님의 두 발가락 끝이

살짝 어긋나 있어 지금 막 열반에 드셨음을 말해준다.

반듯하게 내려뻗은 왼팔과 법체를 덮고있는  가사자락의 정연한 주름은 흐트러짐

없는 열반의 세계, 그 숭고한 순간을 전하고 있다.

이 세분의 석불은 파라크라마바후가 원력대로 100개의 사원을 조성했음을 말해주는듯 하다

하지만 갈비하라에는 파라크라마바후 왕이 조성했다는 석불 외에도 입불상이 하나 더 있다.

이 수수께기의 입상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 머리맡에 서 있다.

이 입상(立像)은 두 팔을 모아 가슴을 끓어안고 질끈 눈을 감고있는 모습이며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는

미간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열반에 든 부처님을 외면하 듯 살짝 고개를 돌려 바위에 몸을 기댔다.

오른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지만 이미 꾸부러진 왼쪽 다리, 바위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땅 위에

쓰러질 듯 보인다

이 입상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머리에 표현된 나발(螺髮),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진 귀, 그리고 연꽃좌대 등로 보아 분명 부처님상이라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하지만 표정과 자태로 보아 스승의 열반에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고있는 아난다의

모습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않았지만 열반에 든 스승의 모습만은 차마 볼 수 없었던 아난다.

바위에 머리를 묻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보이는 깊은 슬픔 앞에서 이 입상의 주인공이

분명 아난다라는 섣부른 판단을 해본다 

이 입상이 어느 시대 어떤 이유로 조성되었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파라크라마바후 시대 이후 추가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한다.

최근에는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끌어안고 있는 형태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임께서 성도 직후

부다가야에 머무시는 동안 세상을 살펴보시며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어느쪽도 아직 확실하자 않지만 이 입상은  갈비하라를 더욱 묵직한 감동으로 각인시켜주고 있다   

웃타라라마가 갈비하라(바위사원)로  불리게 된 것 또한 세 분의 석불 조성이후이다.

웃타라라마는 파라크라마바후의 승단 통일이 결행된 역사적인 장소로 분열과 경쟁, 계율의 혼란과

일부 스님들의 부패로 혼란에 빠진 스리랑카 승단을 마하위하라파, 즉 대사파(大寺派)로 통일하며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국왕의 결단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웃타라라마에서 1,000명의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삼장(三藏)의 결집이 단행됐고, 부주석서인

‘아누티카’도 이곳에서 편찬되었으며 또 승단 규약인 ‘카티카와카’ 를 제정해 스님들의 생활

규범으로 삼았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자신의 이 모든 업적을 갈비하라 암벽에 새겨 놓았다.

웃타라라마는 갈비하라로 이름이 바뀐 이후에도 스님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활용됐다.

아마도 갓 출가한 스님들에게 카티카와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철저히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갈비하라 부처님을 향해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이틀째의 성지 순례를 마치고 숙소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