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 3일차(숙소:하바라나 빌리지)
이른 아침에 숙소에서 일어나 바로앞에 있는 호수로 걷는데 쪽배를 타고온 원주민이 배를 타라고 한다
이곳은 2000년에 스리랑카 성지순례 왔을때 묵었던 세계적인 건축 설계사 제프리바워가 디자인한 호텔로
유명한 간달라마 호텔을 연상케 할 만큼 친환경적이다
호기심에서 룸메이트인 모 대학 교수님과 같이 배를 탔다.
한 30분간 호수 주변을 태워주고는 1인당 20달러를 달라고 한다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의 끝자락에서 22km 바다 건너 자리한 작은 섬나라로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생김새가 눈물과 흡사해 누군가가 스리랑카를 ‘인도의 눈물’이라고 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에 들어가 보면 스리랑카 지도 모양을 소재로 한 상품이 심심찮게 보인다
루비, 사파이어로 만든 목걸이부터 에소나이트, 투루말린, 가넷 등을 썩어 만든 액자까지 다양하다.
인도의 눈물이라 쓰고 보석의 눈물이라 읽는다.
동화 ‘신밧드의 모험’속의 신밧드가 모험을 떠났다가 보믈을 찿은 왕국이 세렌디브(Serendib)가 스리랑카이다.
상상력으로 만든 보물의 섬이 아니라 ‘국토의 90%에 보물이 묻혀있다’는 말이 회자되는 스리랑카는
세계 보석강국 10위 안에 랭크되어 있다
귀한게 있으면 캐려는 사람도 많은 법...이 보물섬을 호시탐탐 노리는 왕조들이 있었다.
인도 중동부의 칼링가와 남부의 촐라 왕조를 필두로 한 타밀족들이 대표적이다
싱할라 왕조는 왕국 건립 초기(BC5세기)부터 유럽인들의 침입(1505년 포루트칼)을
받기 전까지 이들 세력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인도와 싸우며 흘린 스리랑카 눈물의 역사는 200년이나 된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촐라(Chola)왕국의 에랄라(Elara)왕이 스리랑카로 쳐들어 와서 싱할라 왕조
최초의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함락시키고 이곳을 중심으로 45년간을 통치하였다.
이 촐라왕조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를 기다려 분연히 일어선 왕은 둣타-가마니(Duttha-Gamna:BC161~137)
광복을 위해 스스로 창을 든 그는 싱할라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조를 위한 전쟁이 아니다. 불교를 위해 싸운다”
구국(求國)의 전쟁이 아닌 성전(聖戰)에 방점을 찍은 호소요 선언이다
스스로 방증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창 끝에 부처님의 사리를 넣고 전쟁에 임했다.
왕의 창 아래 운집한 싱할라족은 촐라족과 맞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이 전쟁에서 둣타 가마니왕은 아누라다푸라에서 벌인 에랄라왕과의 일대일 결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왕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적군을 무참히 죽인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고통이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이고 있었다.
이때 여덟명의 스님들이 왕을 위로한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해 오계(五戒)를 지켜야 사람입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계율을 어긴 사람은 사람이 아닌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 논리대로라면 이교도들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그러니 왕은 이 전쟁에서 단 한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은 셈이다.
당시 싱할라족은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고 침입자들은 이교도들이었다.
그 속삭임은 왕에게는 달콤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은 왕은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왕조 재건에 심혈을 기울인다
결국 이 전쟁을 깃점으로 ‘불교와 국가는 하나’라는 인식이 싱할라족 저변에 퍼져 나갔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싸고 채크 아웃을 한 다음에 식사후 3일째 성지순례 첫코스인 랑기리 담불라 석굴로 향한다
담불라 석굴에 오르면서 뒤돌아 본 모습
스리랑카 최대 석굴사원인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Rangiri Dambulla Vihara)가 있는 소도시 담불라(Dambulla)는
아누라다푸라와 캔디를 이어주는 간선도로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이 있다’라는
타이틀에 비해서 그저 작고 소박한 마을로 보인다
시가지는 비교적 사람들로 붐비지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위치한 성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한참을 걸어서 담불라 석굴로 향하는데 청승맞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길가 주위에 원숭이들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 사람이 다가가도 쳐다 보지도 않는다
담불라 석굴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도 심하고 계단도 많으며 그리만만찮은 길은 아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서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 멋진 석굴이 나오는데 이른 아침인데도
관광객과 참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담불라 석굴 입구
가이드가 입장권을 끊는 사이에 신발과 모자를 벗고 입장할 채비를 갖춘다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Rangiri Dambulla Vihara)석굴이 사원을 지은 인물은 왓타가미니 아바야(Vattagamini Abhaya)왕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 왓따가미니 아바야왕은 아누라다푸라를 침략해 온 타밀족에게 왕권을찬탈(BC43~29) 당한다...
왕궁에서 도망쳐 나온 왕은 아누라다푸라와 캔디 중간의 담불라평원에 우뚝 솟은 이 산에 은신을 했는데
‘물이 솟아나는 바위’라는 뜻이 담긴 담불라의산에서 무려 14년간을 숨어 지내다가 왕권을 되찾았다.
은신할 당시 승려들의 도움을 받았던 왓따가미니 아바야는 왕위에 다시 복귀한 후 감사의 뜻으로
절을 지어 보시를 했는데 댜표적인 사찰 하나가 훗날 스리랑카 대승불교 산실 역할을 한 아바야기리
위하라(Abaya giry Vihara:무외산사)이고, 또 하나의 사찰이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Rangiri Dambulla Vihara)석굴 사원이다
흑갈색 바위에 건축된 석굴사원은 보통 담불라 사원으로 통한다.
5개의 석굴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2의 석굴의 규모가 가장 크다.
첫번째 석굴에는 거대한 열반상이 조성되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석굴 조성을 위해 바위를 파들어 가면서 열반상 부분만 남겨 놓은 것이다
와불(臥佛) 전체는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부처님의 발바닥만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화려한 꽃문양을 그려 넣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불상의 발바닥을 이렇게 붉게 물들이는데
싱할라 왕조의 시조인 스리 위자야가 기원전 6세기에 인도로부터 이곳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손.발바닥이 붉었다는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붓다의 저 붉은 발바닥의 화려한 꽃문양은 싱할라 민족을 붓다와 연결해주는 상징인 셈이다
열반상에 예경을 올리는 불자들
제2 석굴
폭이 약 52m, 입구의 높이는 약 6m에 달하고 이곳에서만 56개의 불상이 있고 뒷면에 화려한 벽화가 석굴을 수놓고 있다
석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석굴 벽면에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극채색의 화려한 벽화이다
불상 뒷쪽과 천정을 꽉 채우고 있는 벽화의 모습
벽화는 훼손된 부분이 그리 많지 않고 색감도 생생한데 부처님의 생애와 스리랑카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가장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는 제2석굴의 불상들
제2석굴의 좌불상
벽화 가운데에는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에 전쟁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기원전 2세기 아누라다푸라를 침략한 타밀족의 엘 엘랄라왕에 맞서 “불교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며
자신의 창끝에 부처님의 사리를 넣었다는 둣타가마니(Dutthaganani. BCE:161~137)의 전쟁 장면이 눈길을 끈다
아누라다푸라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대탑 루완웰리세야다바고를 조성한 바로 그 둣타가마니왕의 모습은 용맹스럽고 당당해 보인다
벽화는 손에 창을 들고 흰 코끼리를 올라탄 둣타가마니왕이 검은 코끼리를 탄 엘랄라왕의
심장에 창을 꽂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엘랄라왕의 가슴을 관통한 창은 분명 둣타가마니
왕의 것일 것이며 화살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어 사리를 넣고 싸웠음을 암시한다
둣타가마니왕 주변으로는 싱할라 군인들이 적군의 목을 베는 모습을 그려 이 전쟁에서
싱할라 왕국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벽화이다
그림속 주인공 둣타가마니왕은 비록 적군이지만 수천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괴로뤄하지만
이 담불라 사원을 조성한 왓타가마니왕은 조상의 그런 고민을 모른다는 듯 용맹한 모습을 기록하였으며
타밀족을 무찔렀던 자신의 위대한 조상을 상기시키며 상처입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한 것은 아닌지?
기원전의 불상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화려하고 섬세하다
석굴 안에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철조망이 처져있는 곳이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천장에서 한방울씩 물이 떨어지는데 물을 받는 돌항아리가 있다.
물의 양이 줄거나 넘치는 경우가 없이 언제나 일정하게 水量이 유지되고 있다.
이 물은 어디서 흘러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물은 사원의 성스러운 보물로 여겨져 중요한 의식이 있을때만 떠간다.
아무것도 먹지않고 이 물만으로도 며칠을 지낼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쳐놨는데 담불라라는 지명도 ‘물이 솟아나는 바위’라는
뜻으로 바로 이 석굴에서 유래된 말이다
백탑을 중심으로 좌불상들이 보인다
제3석굴은 네덜란드의 침략기였던 18세기에, 제4, 제5석굴 또한 열강들의 식민 지배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굴을 조성할때마다 앞서 지어진 석굴을 보수하고 벽화를 새로 그려 넣었기 때문에
어느것이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의 잣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국가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 석굴과 불상, 벽화를
조성하며 붓다의 붉은발 아래서 다시한번 싱할라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성했던 우리 조상의 역사처럼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민족의 침략에 대항하며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라는 찬란한 불교성지를
탄생시켰다
석굴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순례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석굴밖의 모습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스리랑카 불자
다음의 성지순례를 가기위해 석굴밖을 나오는데 다행히 빗줄기는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담불라 석굴사원을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Ranwarl spice garden이라는 식물원에 도착한다
천연 식물의 원료로 추출한 여러가지 식용기름과 향신료 등을 파는데 이런데 워낙 둔감하여 관심이 없다
마치 우리나라의 약장수나 다단계 판매점 같은 느낌이다
일부 도반들은 꽤나 많은 제품을 구입한다
가이드가 직접 나서서 제품을 설명하는데 난 관심밖이라 지루하다
정향가든은 잘 꾸며진 정원으로 각종 식물들이 많으나 이 지역 식물은 잘 모르겠다
저 열매에서 천연향을 추출한다고 한다
무슨 열매인지?
香이 기가 막히다
정향가든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음 캔디에서 북쪽으로 26km정도 떨어져 있는
마탈레의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 조성지 알루위하라로 향한다
알루위하라(Aluvihara)석굴사원
『증일아함경』에는 출가자들의 시비를 경계하는 대목이 있다. 붓다께서 구심성(拘深城)에 계셨을 때
구심(拘深)이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여 심지어는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하였다.
그의 악행으로 인해 승단이 소란스러워지자 어느 날 이른 아침 붓다께서 몸소 비구의 처소를 찾아가 말씀하기를
“너희 수행자들은 부디 싸우지 말고 서로 시비(是非)하지 말라. 너희들은 모두 한 스승을 섬기는 제자로서
마땅히 서로 화합하기를 물과 우유가 섞이듯 해야 한다.”며 구심 비구를 타이르셨다.
비구 사이의 시비가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수준이었다면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꽤나 심각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오죽했으면 붓다께서 직접 찾아가 타이르고 당부 하셨을까. 그러고 보면 대중이 모인 곳에서 시시비비의 발생이란
부처님 재세 당시에도 피할 수 없었던 인간살이의 모습인 듯하다. 상좌부 불교의 중심인 스리랑카 불교계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스리랑카는 남방불교계를 대표하는 상좌부불교의 중심 국가이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부파의
발생으로 인한 승단의 분열과 갈등이 1천여 년 동안 계속되며 심각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그 첨예했던 갈등의 흔적이 바로 스리랑카의 고도 아누라다푸라에 남아있는 대탑 아브하야기리 다고바(Abhayagiri Dagoba)다.
이 탑은 한때 대승불교를 수용하며 스리랑카 불교계를 호령했던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무외산사파’로 지칭)의
중심지인 동시에 상좌부와의 대립, 그리고 쇠망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건물 귀퉁이에 신발을 벗어놓고 알루위하라(Aluvihara)석굴사원으로 올라간다
좌측이 석굴사원인데 이곳은 영국군이 불태웠는데 세월이 흐른 후 참회하는 마음으로
영국이 복원을 해줬다고 하는데 법당이 아닌 성공회 교회처럼 보인다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는 기원전 1세기에 탄생해 대승의 교리까지 두루 수용하며 번성했던 스리랑카
불교의 부파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무외산사파’로 지칭)의 중심지였다.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은
상좌부 전통의 고수를 주장했던 마하위하라 승단(‘대사파’로 지칭)과 약1200여 년간 대립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공존했다. 하지만 12세기에 이르러 스리랑카는 결국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전래된 정통 상좌부로의 회귀를 택했고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은 소멸됐다. 하지만 부파의 발생과 오랜
갈등은 상좌부계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또한 부파의 발생과 대립 속에서 상좌부계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상좌부의 정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대립의 역사는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은 것이다.
패엽경은 붓다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경전으로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에서도 불법은 구전으로 전승됐다.
스승이 설한 가르침을 제자는 한 마디도 틀리지 않게 외우고 다시 그의 제자에게 전승하는 방식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
200여년간 변함없이 계속됐다. 그렇기에 패엽경의 탄생은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에 맞서기 위한 경쟁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는 불법의 단절이
우려될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싱할라 왕조가 세운 최초의 도읍 아누라다푸라는 남인도 타밀족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수난을 겪고 있었다.
기원전 103년 왕위에 오른 왓타가마니 아브하야(Vattagamani Abhaya) 왕은 타밀의 침략을 받아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났다.
그는 와신상담 14년 만에 아누라다푸라를 되찾고 왕좌에 복귀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이민족의 지배, 여기에 엎친대 덮친 격으로 가뭄까지 들어 기근이 극에 달했고 나라 전체는
전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으로 황폐해졌다. 굶주린 백성들은 급기야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그토록 존경하던 비구의 육체를 먹는 일까지도 발생했다. 수천 명의 백성과 승려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사찰들은 버려졌다.
아누라다푸라를 빛나게 하던 순백의 대탑 루완웰리세야는 물론 불교의 중심사원이었던 마하위하라 조차 돌보는 이가 없어
잡초가 무성히 자라났다
바위에 홈을 파서 양초와 향을 피울 수 있도록 해놨다
부파의 발생과 더불어 이같은 최악의 기근은 붓다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승가의 결단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대결집의 장소로는 아누라다푸라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탈레(Matale)
지역의 석굴사원 알루위하라(Aluvihara)가 선택됐다. 당시 알루위하라에는 500명의 스님들이 모였고 이들은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경·율·론의 삼장(Tipitaka)을 완성했다.
그때까지 전승되던 모든 가르침을 총망라한 대경전이 탄생한 것이다.
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오늘날 알루위하라는 도서관과 학교 등을 갖춘 비교적 규모 있는 사찰이다.
사원 입구에서 잘 정비된 계단을 올라가면 마탈레 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알루위하라의 도서관에 들어서면 패엽경의 재료들과 제작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전시실이라고 해서 번듯한 설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넓은 공간을 할애해 패엽경의 제작 과정을 꼼꼼히 설명하고 있다.
불교 최초의 경전이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졌다는 이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알루위하라(Aluvihara)석굴내의 불상
스리랑카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님 두 분이 계시는데 스리랑카에 전한 마힌다 스님과 붓다고사 스님이다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은 5세기 중엽 인도 출신의 스님으로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하나마왕(Mahanama. 406∼428) 시대에 스리랑카로 건너와 싱할리어로 된 삼장, 즉 패엽경을 팔리(Pali)어로
번역하고 주석서를 집필했다. 특히 삼장에 대해 주석하고 상좌부 불교의 교리와 학설을 집대성한 붓다고사 스님의
저서『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은 오늘날까지도 남방 불교계의 가장 권위 있는 논서로 첫 손에 꼽히고 있다.
『청정도론』은 상좌부 불교 교리의 집대성인 동시에 완전한 청정, 즉 열반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조목조목 제시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의 커다란 획으로 평가된다.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고 단계에 따른 체계적 수행을 실시하는 남방불교의 전통은 『청정도론』을 통해 완성되고
전승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불교 수행 세계화의 선두에 서있는 상좌부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은 이
『청정도론』에서부터 시작됐고 완성된 셈이다. 붓다고사 스님이 없었다면 오늘날 불교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상좌부 불교는 그 견고한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붓다고사 스님이 스리랑카에 머문 기간은 약 2~3년 정도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논서는 아누라다푸라의
마하위하라(Mahavihara)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루위하라의 스님들은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 집필에 앞서 이곳에 7년간 머무르며 패엽경을 공부하고 일부 주석서들을 집필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청정도론』의 씨앗이 잉태된 곳은 알루위하라라는 것이 이곳 스님들이 강조하는 대목이다.
“패엽경이 있을 때에도 스리랑카 스님들은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스승이 전해주는 가르침을 그대로 암송해 전승했다.
경전 암송은 출가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전을 암송하지 못하면 출가하기도 어렵죠.
현재로서는 800여 년 전에 제작된 패엽경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건 전시하지 않고 있어서 보여드릴 수가 없네요.”
그 대신 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을 제작할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은 석굴이 있다.
1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석굴 안에 흙으로 빚은 인형을 이용해 2000여 년 전 패엽경을 만들던 모습을
연출해 놓았는데 제법 그럴듯하다. 또 다른 석굴엔 와불이 모셔져 있다. 석굴 내부는 화려한 색의 벽화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표현이 장엄함을 더하지만 고풍스런 맛은 덜하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인도에서 1차, 2차, 3차 결집이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을
기원전 1세기 때 14년동안 스리랑카에 오랜 가뭄으로 대 기근이 들어 인도로 피신했던 스님들이
돌아오고 스리랑카에 남아있던 스님들과 모두 500여명의 스님들이 이 알루비하루 석굴사원에서
세계 최초로 7년에 걸쳐 부처님의 설법, 경, 율, 론 삼장을 나뭇잎 퍠엽(Pattra)에 기록하면서
4차를 결집하였다.
그 당시 최초의 퍠엽경은 영국군이 불태워 버려는 바람에 지금은 없다고 한다
1815년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한 영국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담불라 석굴에서 출발한 스리랑카 군대와
캔디에서 담불라 석굴사원 쪽으로 가던 영국 군대가 이곳 마탈레알루비하르 석굴 사원 앞에서 충돌하여
치열한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군대는 사원에서 스리랑카 군대를 도와 주었다고 생각하고
사원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대부분의 패엽경을 영국으로 가지고 가고, 두개의 법당과 남은 모든것을
태워 버렸다.
패엽경을 만드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
패엽경이란 인도에서 종이대신 나뭇잎에 쓴 불경의 형태이다
범어(梵語) 패다라(貝多羅:Pattra)의 음사로서 즉 나뭇잎이란 뜻으로 패다(貝多) 또는 패다라엽(貝多羅葉)이라 한다
패다라는 특정한 식물을 가리키기도 하나 흔히 일반적인 식물의 잎 또는 필사용 나뭇잎이란 뜻으로 쓰인다
종이가 생산되지 않던 옛날 인도 등지에서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으며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가장 좋은 재료는 다라(多羅:Tala)의 나뭇잎이며 불교의 삼장 경전은 이 다라나무에 썼다고 한다
스님들과 인증샷
알루위하라 석굴사원의 성지순례를 끝내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캔디 불치사로 향한다
버스 주차장 가는 길에서 만난 과일 노점상
자기 꽃을 사라고 호객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꽃을 파는 여인들
기념품 가계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캔디에 있는 불치사로 향한다
버스에서 바라본 화려한 흰두교 사원의 모습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세워 열대과일을 사먹기도 했다
오후 늦은 시간에 캔디의 불치사에 도착했다
불치사 입구의 모습
커다란 보리수 나무도 20여년전 그대로이다
백색 스투파(白塔) 도 만난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법당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법당 내부의 모습
초와 향을 피우는 공간도 보인다
콜롬보와 폴론나후라와의 중간, 스리랑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캔디(Kandy)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정겨운 도시로 수도는 콜롬보이지만 캔디는 스리랑카를 가장 대표하는 스리랑카다운 도시이다
캔디는 2000여년 이상 이어져왔던 싱할라 왕조가 영국에 무릎을 꿇고 막을 내린 슬픈 역사의 도시이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제국의 침략에 대항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불교국가로서의 자긍심을 드러낸 자랑스런
자랑스런 역사의 도시이기도 한다
캔디는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110km 떨어져 있는 해발 500m 분지에 조성된 고원도시로
센카다가라푸라(Senkadagalapura)로 알려진 불교의 도시이다
기원전 아누라다푸라에 첫 수도를 정했던 싱할라 왕조가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겼다가 1447년 다시 이곳으로 남하하여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도로서 1815년 영국이
스리랑카를 점령할 때까지 350년간 싱할라 왕조의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도시 전체가 1988년 캔디신성도시(Sacred city of Kandy)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인구는 137만명(2012년 기준)이다.
캔디는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로 해발 500여m에 자리잡은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이다
인도의 잦은 침략으로 남쪽으로 옮겨가던 싱할라 왕조는 14세기경 사방이 둘러쌓인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캔디 호수에 자리잡은 유명한 성지순례 유적인 불치사(佛齒寺)는 칼링가 (인도 오리사주)에서
스리랑카로 건너온 석가모니 진신 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로 아누라다푸라의 마힌탈레와
더불어 스리랑카 최고의 불교 성지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캔디시는 1803~1807년에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헤가 조성한 인공호수 근처 언덕 사이의
작은 숲이 우거진 계곡에 건설되었고, 호수 북쪽에 있는 유적지에는 커다란 알현실, 불치사,
스리 워크라마궁, 왕비의 저택과 목욕탕 등을 포함한 왕궁 유적이 있다.
불치사(佛齒寺)
스리랑카 불교 성지중 으뜸인 불치사는 싱할라어로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Sri Dalada Maligawa)”라고 하며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사원으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불교사원이다
기원전 543년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다비장을 치르렀을 때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가 장작더미 잿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남인도 칼링가 왕국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기근과 전쟁이
끊이지 않은 와중에 왕의 꿈에 불치사리를 스리랑카로 보내면 우환이 없으지리라는 계시를 받아
AD362년 헤마말라 공주에 이해 스리랑카로 보내졌고, 이후 불치(佛齒)는 스리랑카 왕권의 상징이
되었으며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를 거쳐 1590년에 다르마수리야 1세 왕이 캔디에 2층 사원을
지어 불치를 봉안하였다.
이후 18세기에 나렌드라 싱하 왕이 사원 주위에 해자를 파고 건물을 확장하여 현재 2중 구조의
불치사를 완성하여 전 세계 불교 신자들의 끊임없는 순례장소로 각광받게 되었고 1988년에
‘성스러운 도시 캔디’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좌측 입구가 불치사로 들어가는 정문이고 우측 8각형의 붉은 지붕 건물은 불당(佛堂)이었으나 지금은 도서관이란다
불치사는 전형적인 싱할라 건축 양식으로 분홍빛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모습이다
도반들과 함께 인증샷
불치사에 대한 경계가 이처럼 강화된 것은 1998년 불치사를 향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한 이후다.
당시 폭탄을 싣고 불치사를 향해 돌진한 이 차량은 불치사 입구에서 폭발해 건물 일부를 파괴시켰지만
다행히 치아사리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타밀족으로 구성된 반군에 의해 벌어진 이 테러는 불치사가
싱할라 민족주의의 상징이며 그런 까닭에 테러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후 불치사에 대한 경비가 대폭 강화됐다고 하는데 20년전에 왔을때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그 당시에는 스리랑카 왕사스님의 상좌였던 난다시리 스님이 동국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을 때
동행하는 바람에 칙사 대접을 받으면서 참으로 불치사를 순례했었는데...
불치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법보신문 남수연 기자
불치사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字: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의 모습
불치사 사원은 2중 구조로 되어있는데 커다란 바깥 건물 안 중앙에 2층 규모의 법당이 조성돼 있는 형태다.
이처럼 건물이 2중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치아사리를 캔디에 모신 다르마수리야 1세가 2층의 사원을 지은 후
18세기 들어 나렌드라심하(Narendrasimha. 1707~1739)왕이 사원을 개축했기 때문이다
불치사 천정의 단청
불치사 경내로 들어간다
이러한 불치는 어떻게 스리랑카에 전해졌을까
불치가 4세기경 인도로부터 전해졌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일치하지만 그 이유와 과정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중 전래과정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중국의 삼장법사 법현스님이 저술한 “佛國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붓다의 열반 후 인도의 각국으로 분배된 사리중 불치는 약 800년 가량 인도 남부 칼링가 왕조에서 봉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링가 왕조에 봉안돼 있는 불치를 친견한 왕들이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를 버리고 잇따라 불교로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다...그러자 불치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인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불치를 빼앗으려는 이웃국가들의 침략과 개종에 반발하는 바라문교 세력의 반란으로 인해 칼링가국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약 4세기경 스리랑카를 통치하고 있던 마하세나왕도 불치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갖고 있던 보물 전부를 칼링가왕에게 바치며 불치를 전해주길 간청했다
그러나 이때 칼링가 왕국은 또다른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칼링가왕은 이번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이웃나라로 시집가 있던 공주 헤마말라와 그의 남편
단타구말라 부부를 급히 불러들였다...왕은 공주부부에게 “불치를 스리랑카의 마하세나왕에게 전하여
여법히 모실 수 있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음을 각오하며 전장으로 떠났다.
헤마말라 공주는 남편과 함께 불치를 받들고 스리랑카로 떠났다.
공주는 불치를 들키지 않고 인도 땅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틀어올린 머리카락 속에 불치를 숨기고
밤을 틈타서 성을 빠져나와서 간신히 배를 구해 스리랑카로 떠났지만 중도에 풍랑을 만나 인도 남쪽으로
표류했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천신만고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하세나왕은 죽고 그의 아들 시리메가완나(Sirimeghavanna:301~328)왕이 즉위한 후였다.
시리메가완나는 부왕의 대원(大願)이 성취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불치를 모실 사원을 궁전옆에
조성하고는 왕 스스로 불치를 안치하며 성대한 공양을 올렸다.
이후 불치는 싱할라 왕조를 옮길 때마다 함께 옮겨져 봉안되었으며 “불치가 있는 곳에 왕이 있다”는
왕권의 상징이 되었고, ‘불치를 모신자가 랑카의 지배자’라는 민중의 인식은 캔디왕조가 1815년 영국에 의해
막을 내린 이후에도 뚜렸이 나타났다...영국의 통치가 시작되었지만 영국을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항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영국은 1818년 불치를 손에 넣은 후에야 랑카의 새로운 지배자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랑카섬을 침략한 포르투칼인들은 불치에 대한 싱할라 사람들의 이같은 믿음을 와해 시키기 위해 불치를
인도의 고아지방으로 가져가 부수려고 했다...하지만 승단은 불치를 델가무(Delgamu)의 사원에 은밀히
숨겨두고는 가짜 불치를 포르투칼인들에게 넘겨져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이야기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영웅담이다
다르마수리야왕은 바로 이때 숨겨두었던 불치를 다시 캔디로 모셔와 봉안한 것이다
그러나 불치의 캔디 봉안은 이교도들의 침략과 불교 탄압에 더 이상 굴하지 않을 것이며
스리랑카에는 여전히법등을 밝게 빛나게 있는 상징이었다
지금도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불치사에서 취임 선서를 한다고 한다
돌아왔다가 이후에 쿠루네갈 라(Kurunegala), 감폴라(Gampola), 코테(Kotte), 델가무(Delgamu)를 거쳐 지금의
캔디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현재 캔디 불치사는 1590년 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Vimaladharmasuriya I:재위 1590~1604)가 처음 건축한 것을 신하(Sinha:재위 1707~1739) 왕이 신축한 것이다.
정문 은 평소에는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사리함을 공개하는 의식이 시작할 때 천을 걷는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곳이 스리랑카의 중심이다.
행정상의 수도는 콜롬보일지 몰라도 스리랑카 불자들의 마음은 늘 캔디를 향해있다.
역사 속에서 불치사리가 모셔진 곳이 곧 수도였으니, 캔디 불치사는 스리랑카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16세기 스리랑카를 강점한 포르투갈은 부처님 사리를 빼앗아 파괴하려고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모형 불치사리를 만들어 위기를 넘겼다.
그만큼 불치사에 모신 치아사리는 스리랑카 불자들의 불심의 상징이다.
지금도 치아사리함을 열기 위해서는 4개 지방에 떨어져 있는 장관 4명이 한날에 모여야 열 수 있다.
각자가 가진 열쇠 4개를 함께 돌려야 불치사리함의 문이 열린다.
2중으로 된 사리함이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은 8월에 열리는 사리 이운 축제인 에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 때 뿐이다.
황금으로 만든 연꽃 좌대에 모셔진 치아사리를 코끼리에 태워 캔디 시내를 돌며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축복을 내린다. 속설에는 지금 모셔진 사리는 모형이며 페라헤라 때 시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사리도 모형이란다.
불치사 경내는 순례객들로 늘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나도 꽃공양을 하기위해 꽃을 샀다
황금색 보석으로 치장한 치아(齒牙) 사리함(舍利函)은 하루에 3번 공개되는데 06:00, 11:30, 18:30에
공양을 올리는 푸자 의식때, 빨간 옷을 입은 악사들의 연주와 춤으로 푸자 의식이 시작되면 예불 의식을
참여하는 스님들의 세족 의식이 행해지고 공물을 받쳐 든 사람들이 사리가 봉안된 곳으로 들어간다 .
사리함에 공양을 올리는 의식은 미리 신청한 사람만 입장이 가능한데 몇년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신청하여 시간을 맞추어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일단 사리함에 서더라도 사리를 볼 수 있는것이 아니고, 겹겹히이 쌓여있는 황금색 사리함을
단지 수초동안 볼 수 있는데 스리랑카 불자들은 이 찰나의 공양을 평생을 준비한다고 한다
사리는 7년에 한번 공개된다고 한다
불치 실물은 에살라 페라헤라(캔디에서 진행되는 불교 행사) 마지막 날에만 공개된다.
불치 실물이 공개될 때는 금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접시 위에 놓인다고 한다
법당은 사각형의 커다란 돌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인데, 아누라다푸라나 폴론나루와 유적에서 보았던
돌기둥들이 원래는 이런 형태로 사용됐을 것이다. 천장은 우리나라 전통 사찰건축의 다포양식 같은 출목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벽에는 치아사리를 지키는 듯 보이는 각종 신장, 천신,
상상의 동물들과 함께 길상을 상징하는 꽃과 문양 등이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닫힌 황금색 문 안에 사리함이 보관되어 있다
불치 사리함을 향해 예경을 올리는 순례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보니 문지방은 온통 화려하게 조각된 금으로 덮여 있다
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리함은 높이 약 60센티미터에 다고바 형태의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사리함은 화려한 목걸이와 장신구 등으로 가득 뒤덮여 있는데 옛 왕비들이 자신들의 장식구를
치아사리에 공양 올린 것이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황금 띠로 중간 중간을 엮은 검은색 줄 같은 것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검은 줄은 머리카락 다발이었다. 신심이 지극했던 한 왕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금실로 엮어 치아사리에 공양올린 것이라고 한다. 싱할라 왕조의 지극했던 신심과 더불어 치아사리에
담겨 있는 강력한 왕권을 상징해 보이는 듯 했다. 사리함은 모두 일곱겹으로 돼 있는데 보이는 것은 제일
바깥쪽의 사리함 뿐이다. 안쪽의 사리함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불치사를 찾아온 스리랑카 순례객
불치사의 전각모습이 어쩐지 우리나라의 사찰과 비슷해 보인다,
한국의 불교에서 기증한 불상도 보인다
불치사를 나오니 바로 옆에 싱할라 왕조 시대의 왕궁이 있고 코끼리 박물관도 있다.
불치사 옆에 있는 싱할라 왕궁의 모습
코끼리(Raja) 박물관
불치사 옆 코끼리 박물관에는 박제되어 있는 코끼리가 있는데 보통 코끼리가 아니다
1년에 한번 치아사리함이 코끼리 등에 실려 일반에게 공개되는 캔디의 에살라 페라헤라에서
코끼리 라자(Raja) 는 50년 동안이나 치아사리함을 등에 실은 코끼리였다.
1988년 이 코끼리가 병으로 죽었을 때 정부는 애도의 날을 선포했고, 스리랑카 지페(1,000루피)에
등장할 정도였으니 스리랑카인들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자 코끼리 생전의 모습
불치사를 나와 오늘의 성지를 마치고 호텔로 향한다
캔디 시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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